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
- 감독
- 글렌 피카라, 존 레쿠아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라이언 고슬링, 엠마 스톤, 스티브 카렐, 줄리안 무어, 케빈 베이컨, 마리사 토메이, 존 캐럴 린치
제이콥( 스티븐 연 )과 모니카( 한예리 ) 부부는 미국 남부 아칸소의 외딴 공장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한다. 그들은 하루 종일 병아리의 항문을 확인한 뒤 성별을 구분해 색이 다른 통에 넣는 일을 한다. 성별이 수컷이거나 다친 병아리는 별다른 고려 없이 소각장으로 보내진다. 끊임없이 잿빛 연기를 뿜어내는 병아리 소각장 앞에서 제이콥은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도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거야.” 제이콥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건, 이들 부부의 일상에 비상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 미나리 >는 서서히 코너에 내몰려 결국 인적 없는 미국 남부 시골 마을까지 오게 된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를 다룬다.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 그리고 부부의 딸 앤과 아들 데이빗은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까 싶은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한 트레일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동안 우리가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한국계 미국인 디아스포라 영화들은 LA처럼 한인 커뮤니티가 잘 형성된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 고요하고 황량한 벌판, 이제까지 한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거의 탐험해본 적이 없는, 오히려 개척을 테마로 하는 서부영화에 더 잘 어울릴 법한 풍경 속에서 디아스포라 가정의 서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가 <미나리>에 대한 첫 번째 궁금증이었다. 제이콥이 “미국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고 말하는 아칸소의 초원은 미국행을 택한 뒤 10여 년간 실패만 거듭해온 한국계 미국인 가족이 마지막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꿔보고자 하는 장소다. 촬영감독 라클란 밀네가 포착한 아칸소의 따스한 햇빛과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 위를 바쁘게 오가는 한국계 미국 배우 스티븐 연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나리>는 묘한 울림을 준다. 품었던 희망들이 하나씩 좌절되며 구석까지 내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의지(그것은 제이콥이 굳이 미국 채소가 아닌 한국 채소를 미국 땅에 재배하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와 애환이 아칸소의 정적이고 서정적인 풍경과 어우러져 강렬한 정서적 감흥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틀림없이 절제된 프로덕션 속에서 감정의 진폭을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로 완성된 영화의 스케일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것을 다루는 영화처럼 느끼게 만드는 리 아이삭 정 감독의 연출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미나리>는 가족이라는 우주를 통해 그들이 속한 세계를 조망한다. 식탁에서, 일터에서, 가족이 발 딛고 서 있는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건들은 문화와 세대의 차이, 이민자 가정의 좌절과 희망, 사랑과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가족 구성원에 따라 같은 사안을 대하는 시각이 달라지고 어떤 구성원이 누구와 마주하느냐에 따라 대변하는 문화적, 사회적 층위가 달라지는데, <미나리>는 그런 점에서 영화의 시선이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는지 살피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일례로 제이콥의 아메리칸 드림은 모니카에겐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남편이 “아빠가 한번쯤 해내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프라 없는 시골 마을로의 이사를 결심할 때, 현관문이 없는 새 집의 상태를 근심하는 것, 심장이 좋지 않은 아들을 위한 병원이 한 시간 이상 운전해야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음을 우려하는 건 전부 아내 모니카의 몫으로 남겨진다. 같은 꿈을 꾸며 택한 미국행이었으나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여전히 작동 중인 한국식 가부장제가 어떻게 부부의 마음을 갈라놓는지, 영화는 관찰자의 위치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배우 한예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이민자 여성의 초상을 사실적이고도 디테일한 필치로 연기한다. 마음 둘 곳 없는 딸을 위해 한국에서 이민 온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 윤여정 )와 손자 데이빗은 <미나리>를 본 이들이 가장 오랫동안 사랑할 만한 조합이다. 집에서건 밖에서건 한국말을 쓰며 외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모니카와 달리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데이빗은 외양은 한국인이나 이미 자신도 모르는 새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소년이다. 그런 그에게 (미국 할머니들처럼) 요리도 안 하고, 욕설을 입에 달고 살며 ‘한국 냄새’가 나는 외할머니는 납득할 수 없는 존재다. 영화는 순자와 데이빗의 에피소드를 통해 일상적으로 정체성의 충돌과 혼란을 겪고 있는 이민 2세대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외신으로부터 2021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한 여우 조연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배우 윤여정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를 한다. 그가 연기하는 순자는 동서양을 막론한 장년층 여성의 스테레오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낌없이 베풀고 인자한 모습의 할머니와 거리가 멀다. 호불호가 명확하고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며 무심한 듯 세심하게 삶의 연륜으로부터 비롯된 지혜를 가족들에게 건네는 ‘쿨’한 할머니의 존재는 전세계 매력적인 장년층 여성 캐릭터의 정전에 기꺼이 순자를 추가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먹고사는 걱정으로 인해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력조차 없는 이민자 가정의 척박한 상황을 조명하는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과 관객이 숨을 돌릴 틈을 마련하는 것 또한 외할머니 순자, 그리고 그를 연기하는 배우 윤여정의 몫이다.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 감독 리 아이삭 정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다. 데뷔작 < 문유랑가보 >부터 <미나리>에 이르기까지 줄거리나 대사로 구현할 수 없는 정서적인 순간들을 특유의 시적 영상으로 구현해온 리 아이삭 정 감독에게 <미나리>는 유년 시절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어 더욱 특별한 영화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가 있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아칸소)에서 성장했다. 스스로를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기보다 코리안/아메리칸이라 느낀다”고 밝힌 바 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이 그 자신을 관찰자의 자리에 위치하게 하는 듯하다. 내전의 불씨가 사라지지 않은 르완다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소년과 그와 동행하는 원수지간 부족의 친구를 조명한 <문유랑가보>에서부터 리 아이삭 정의 관심은 경계의 인물들, 소수자들, 다양한 층위가 충돌하는 누군가의 내면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경계에 위치한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아시아계 감독이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지난 2018년 주류 미국 영화산업에 선풍적인 박스오피스 기록을 남기며 주목받았던 <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 < 서치 > 등의 영화와는 또 다른 의미의 인상적인 족적으로 기억될 듯하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은 영화 <미나리>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긴밀한 결속과 유대로 이어진다. 결국 이 영화는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민자 가족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기댈 곳은 서로의 어깨 뿐이기에 누구도 이탈하지 않도록 각자의 손을 더욱 단단하게 잡는 이야기다. 집안 곳곳에서 가족들이 맺는 다양한 관계와 유대의 순간들을 조명하며 감정의 폭을 촘촘히 쌓아가다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감정을 폭발시키는(윤여정의, 윤여정에 의한, 윤여정을 위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의 진폭을 확장시킨다. <미나리>에서 사사롭게 마음이 갔던 대목은 모든 것을 잃은 밤, 온 가족이 바닥에 누워 함께 잠을 청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이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고된 현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오늘 밤 아무도 잃지 않았음에 안심하며 또 다른 미래를 위해 힘을 비축하는 이들의 근성이야말로 그 어떤 설명이나 수식 없이 한 가족이 거쳐온 이민자로서의 삶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낯선 땅에 뿌리내리고 풍성하게 자란 미나리처럼, 이 가족의 아메리칸 드림 또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작은 희망을 <미나리>는 안겨주고 있다.
실사영화 < 알라딘 >(가이리치, 2019)이 최근 1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오래전 2D 애니메이션 < 알라딘 >(데이빗 드웨이츠, 1992)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지니를 실사화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봤지만 그런 우려를 떨쳐낼 만큼 윌 스미스의 매력도 충분했다. 물론 흑인 배우가 지니를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일부 팬들의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알라딘>이 뮤지컬로 만들어질 때 흑인 배우 제임스 먼로 아이글하트가 이미 멋지게 지니 역을 소화한 바 있고, 그를 통해 토니상 남우조연상까지 받았다. 인종 문제 얘기를 하자면, 최근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역시 <인어공주> 실사영화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인어공주 역으로 낙점된 일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알라딘>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아랍 지역을 배경으로 삼고 있을 뿐 램프의 요정의 어떤 인종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알라딘>이 아랍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원전에서는 배경이 중국이며 알라딘도 중국인이다. <인어공주> 역시 원작자가 덴마크인이고 북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 인어공주는 인간과 다른 종족이기에 피부색이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전세계 영화의 중요한 경향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PC(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고려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PC란 인종, 종교, 성별 묘사 등에 있어 그 어떤 편견과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유색 인종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무분별하게 연기하는 인종차별적 ‘화이트워싱’(whitewashing) 현상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크다. 지난 2017년에는 한국계 미국 배우 존 조를 < 마션 >(리들리 스콧, 2015) 등 여러 영화의 포스터에 합성해 화이트워싱에 반발했던 캠페인 ‘존 조 주연시키기(Starring John Cho)’가 SNS를 뜨겁게 달궜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에서 주연을 맡기 힘든 아시아계 배우들의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 서치 >(아니쉬 차간티, 2017)는 그동안 백인 배우들의 전유물이었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버지 역할을 존 조에게 맡김으로써 미국영화 속 아시아계 배우의 활동 범위를 한층 더 확장했다. 감독 또한 인도계 미국인인 아니시 차간티이며, 자신이 성장해온 미국의 아시안 커뮤니티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개봉하여 제작비 대비 7배라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보여주며 북미 박스오피스를 강타한, 제작진부터 배역까지 아시아계로 꽉 채워진 <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존 추, 2018)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앞으로는 내년 개봉 예정인 <뮬란>에 화이트워싱 없이 유역비가 주연을 맡고, 마블 최초의 아시안 히어로 영화 <샹치>가 제작 준비 중이다. 마블 최초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 < 캡틴 마블 >(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2019)을 통해 안나 보덴이 마블 최초의 여성감독이 된 이후, <샹치>보다 앞서 2020년 11월 6일을 개봉일로 잡은 <이터널스>는 마동석 배우의 출연만큼이나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가 마블 최초의 비백인 여성감독으로 메가폰을 잡아 눈길을 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다시 <알라딘>으로 돌아와, 과거 애니메이션과 비교하면 실사영화의 자스민 공주가 궁의 생활을 별로 답답해하지 않는 것 같아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답답한 궁에서 살고 싶지 않아!”라는 과거 자스민의 ‘선언’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수많은 공주들 중에서 처음으로 ‘NO!’라고 말한 획기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사영화의 자스민은 궁을 떠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훌륭한 술탄(왕)이 되려고 한다. 과거에는 아버지 술탄이 왕자가 아니어도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끔 법을 개정했지만, 이제는 “네가 아그라바의 미래다. 술탄의 지위를 너에게 넘기겠다”라며 딸이 직접 술탄이 되고 법을 개정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게끔 한 것이다. 이런 변화에 더해 최근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의 <인어공주> 캐스팅에 이르기까지, 디즈니의 오랜 팬들 중에는 디즈니의 ‘과도한 PC 강박’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들도 꽤 많다. 하지만 그들이 집중적으로 불편함을 토로해온 지난 10년의 시간이,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가장 고도의 성장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 마블과 픽사와 루카스필름까지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디즈니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컨텐츠 제국이 됐다. 오래전 월트 디즈니는 무려 23개의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난 이 트로피보다 돈이 더 좋다”고 말해온 사람이었다.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남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먼저 시도하고 돌파하며, 언제나 새로운 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디즈니 입장에서 말 그대로 PC는 돈이 되는 주문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그것이 중요하다. PC한 것을 추구할 때 좋은 평가도 얻고 돈도 번다는 것을 세계영화계 모두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물체가 움직이는 효과가 특수효과예요. 그래서 조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특수효과 이문걸) 1) 영화 특수효과(Special Effect)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렇다, 마술사이기도 했던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그는 원-쇼트 필름(one-shot film)에서 우연히 ‘스톱 모션(stop motion)’을 발견해 마치 마술에서처럼 영화에서도 특수한 효과인 스톱 액션(stop-action), 이중 노출(double exposure), 원근감 트릭(perspective trick)을 사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신데렐라 Cinderella>(1899)에서는 스톱 액션을 써서 호박이 화려한 마차로 변하고 재투성이 아가씨의 누더기가 파티 드레스로 변하도록, <인디언 고무 머리 Indian Rubber Head>(1902)에서는 부분 마스킹을 이용한 분할화면(spilt-screen)을 활용해 자기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폭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달세계 여행 A Trip to the Moon>(1902)에서는 원근 전환(perspective shift)과 많은 트릭 효과를 사용해서, 총알 우주선이 저 멀리 우주의 달로 발사되고 달세계에서 지구의 우산이 버섯으로 깜짝 변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렇게 시작된 특수효과는 오늘날의 관객들의 뇌리에는 컴퓨터 그래픽(Computer-generated imagery, CGI)을 사용하여 스펙터클한 화면 시각 효과(Visual effect)를 내는 할리우드식 공상과학 영화를 만드는 최첨단 기술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1990년대 이후로 본격적으로 특수효과의 영역으로 진입한 컴퓨터 그래픽은 최근 한국영화에서도 <퇴마록>(박광춘, 1998)을 시작으로 <괴물>(봉준호, 2006), <신과 함께-죄와 벌>(김용화, 2017) 등의 판타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2004), <웰컴 투 동막골>(박광현, 2009), <명량>(김한민, 2014)처럼 사극과 전쟁 영화, <화산고>(김태균, 2001), <악녀>(정병길, 2017) 같은 액션 영화는 물론 멜로드라마 <뷰티 인사이드>(백종열, 2015)에서도 수준급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효과는 대부분 광학효과를 만들어내는 후반작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엄격히 말하면 특수효과의 일부분이다. 자연현상인 눈, 비, 안개, 지진부터 건물 파괴, 총격이나 폭발의 장면 등을 기계적 또는 화학적 방법으로 재현하는 것, 고속/저속촬영은 물론 애니메이션이나 미니어처 같은 촬영 방법을 함께 동원해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하는 그 모두를 일컫는 것이 바로 특수효과이다. 그래서 특수효과를 담당하는 인력들은 영화 연출에 전반에 대한 미학적 기술적 인식은 물론이고 물리 법칙이나 화학 배합에 대한 지식을 장착해야 한다. (사진1)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에서처럼 1960년대 전쟁영화에서는 특수효과랄 것도 없이, 실탄을 장착한 총기를 사용해서 실제 전투 장면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의 궁금증, 그렇다면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특수효과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상상과 공상의 장면을 구성하고 코믹한 효과를 주기위해 특수효과가 시작된 서구의 영화 제작과는 달리, 한국영화에서의 특수효과는 영화계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는 1950년대 후반,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등 민족의 수난을 소재와 주제로 한 영화들에서 시작되었다. <5인의 해병>을 연출한 김기덕도 회고한 바 있듯이, 연기자 주변의 땅바닥에 총이 맞아 튀는 효과를 내기 위해 군이나 경찰의 지원과 엄격한 통제 하에 명사수를 데려다 실제로 실탄 사격을 해댔다. 2) 이처럼 전쟁과 첩보, 군사, 액션영화에서 적과의 총격이나 전투 장면에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총격과 폭파 효과를 내던 것이 바로 한국 특수효과의 시초였다. 실제 총에 실탄을 장전해 연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영화를 찍던 1960년대 초, 중요하지만 또 위험한 소품인 총기나 무기류를 챙겨 관리하는 것이 바로 제작부 소품 담당의 주요 임무였다. 아직은 영화 엔딩 크레딧에 ‘특수효과’라는 명칭으로 오르지도 못한 채, 총기류와 폭약류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가 바로 이문걸이다. 1996년 <크레이지 댄스)<박한순>을 마지막으로 약 7백여 편의 극영화, <배달의 기수>등 군 홍보영화와 <전우> 같은 4백여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다. ‘보이는 모든 장면을 실감나게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문걸은 특수효과의 불모지에서 수많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분야를 개척한, 명실상부 1980년대까지 한국영화계에 독보적이고도 유일한 특수효과 ‘맨’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특수효과의 역사는 이문걸의 작품연보와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진2) 군홍보영화 <잃어버린 세월>(설태호, 1990) 촬영현장에서 왼쪽부터 특수효과 감독 이문걸, 감독 설태호, 촬영감독 팽정문 이문걸은 1935년 일본 나가노켄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한국으로 왔다. 1956년에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꼼꼼하고 부지런한 성격 덕분에 상병 계급이던 당시, 오히려 하사를 병기계 보로 두고 병기계 담당을 맡았다. 1960년 한흥영화사의 제작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영화계에서 일하던 동생 이예남의 권유 때문이었다. 병기계 담당을 하던 군에서의 경력이 인연이 되어 그는 자연스럽게 제작부에서 총기를 관리했다. 그가 제작부로 입사한 한흥영화사는 최관두가 이끌고 있었고 당시 제작부장은 김홍빈이었다. 1959년 창립한 한흥영화사는 정창화의 멜로드라마 <사랑이 가기 전에>(1959)로 영화제작을 시작했지만 주로 활극, 스릴러를 기획, 제작하면서 가히 ‘액션 스펙터클의 총본산’으로 불렸다. 김홍빈의 제작부에서 활동한 이문걸은 <지평선>(1961)의 정창화, <싸우는 사자들>(1962)의 김묵,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의 임권택, <창살 없는 감옥>(1963)의 강범구의 작품을 함께 했다. (사진3)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제작부에서 총기 담당을 맡으며 특수효과에 입문했다. (사진4)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포스터.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소품’ 담당으로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지평선>에서도 활약을 했지만 이문걸이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것은 한흥영화사의 10회 기념작 <싸우는 사자들>의 ‘소품’ 담당이었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한국전쟁 당시 철원지구에 잠입한 유격대의 활약상을 그린 이 작품은 여성 유격대원들의 전투장면과 포로수용소의 대폭파 장면이 압권이었다. ‘7백 여 명의 「엑스트라」 및 약 6백 자루의 권총, 「엠원」 소총, 「칼빙」소총, 자동소총, 다발총 등의 소화기를 동원하였고 TNT 폭탄 2백 「파운드」씩 두 번’을 사용해, 촬영 당시 ‘파편으로 경상을 입은 「엑스트라」가 21명’이나 될 정도로, 당시 한국영화에서는 처음 있는 특수효과를 실험해 전쟁 스펙터클을 구현해 낸 액션 영화였다. 3) (사진5) <두만강아 잘 있거라>(임권택, 1962) 중 독립군과 일본군이 펼치는 설원의 최후 전투 장면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는 학생독립단의 무력 항쟁을 그린 임권택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특수효과 ‘맨’ 이문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첫 촬영은 독립투사가 일본군 중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었다. 대관령에서 촬영한 이 장면을 위해 이문걸은 연기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실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총격 효과를 내는 특수효과를 실험한다. 마분지를 연필 굵기로 3cm씩 말아서 그 속에 특수 약품을 넣어 가짜 실탄을 만들었다. 그렇게 백여 개를 만들어 하나씩 특수전선을 연결한 후 땅속에 일정한 간격으로 묻어 선에 전기가 흐르도록 합선·폭발하여 흙이 튀면서 실탄이 맞는 특수 효과를 만들어 냈다. 4) 또 이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은 만주로 가려는 독립군들의 마지막 격전, 두만강 도하를 목전에 둔 겨울 계곡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벌이는 전투이다. 영화 내내 어두웠던 흑백 시네마스코프의 화면은 눈 쌓인 설원을 활강하는 스키 부대의 활약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살상이 벌어지는 총격전은 비장할 만큼 눈부시기도 하다. (사진6) <증언>(임권택, 1973)의 탄착효과가 돋보이는 전투장면 (사진7) <증언>(임권택, 1973)의 한강 다리 미니어처 폭파 장면, 이문걸은 특히 <빨간 마후라>(1964)와 <대괴수 용가리>(1967)의 경험 이후에 다리 폭파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임권택과 이문걸이 함께 만든 이러한 액션 미학은 <증언>(1973),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임진란과 계월향>(1977), <아벤고공수단>(1982), <개벽>(1991), <장군의 아들3>(1992), <태백산맥>(1994)으로 이어진다. 점차 영화계 내서도 총격 효과를 내는 것, 화약을 다루는 것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식되면서, 이문걸은 자연스럽게 ‘특수효과를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흥영화사에서 탄탄하게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문걸은 1963년 영화사가 폐업하자 <소만국경>(강범구, 1964)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특수효과’로 크레딧을 올렸고, 조수 5명을 데리고 독립했다. (사진8) <소만국경>(강범구, 1964) 총격 장면의 화약 효과 ‘제작부’나 소품‘으로 이름을 올리던 그가 특수효과로 독립하면서 시작한 것은 ‘가짜 실탄’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짜 실탄’은 하나하나 말아서 만들어야했던 불편한 ‘마분지 실탄’이나 다소 위험했던 공업용 뇌관을 대신할 수 있는, 보다 간편하고 좀 더 안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실탄과 선을 직접 맨손으로 합선시켜야만 폭발시킬 수 있던 방법도 개선해서 버튼 하나를 눌러 수백 발의 실탄을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자동 폭발시킬 수 있는 전자식 ‘컨트롤 박스(control box)’도 그의 특수효과 팀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9)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 미니어처로 제작한 비행기와 한강 다리 장면 미니어처(miniature)를 제작해 물리적, 화학적 효과를 가미하는 촬영 방법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에서도 사용했던 영화사 초창기부터 발달해온 오래되었지만 대표적인 특수효과 기법이다. <빨간 마후라>(신상옥, 1964)에서 이문걸은 동생 이예남과 함께 미니어처 작업을 처음 시도했다. 당시 주먹구구식의 미니어처를 만들어 야외에서 촬영해 폭파 장면을 찍었다. 이런 장면의 연출은 감독과 긴밀하게 소통해야하는 것은 물론, 폭파되어 전소될 건물을 짓기 위해 미술 담당 스태프에게 톱밥을 섞은 연한 석고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여러 번 실험해 촬영 스태프와 합을 맞추는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영화에서 여러 번 한강 다리를 폭파시키는 경험을 했는데, 다리 폭파(?)의 전문가가 되었다. (사진 10)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칠흑 같은 우주에서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 장면 (사진 11)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용해 용가리가 서울 시내의 건물을 파괴하는 장면 (사진 12)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와 대치하는 군의 포격 장면 (사진 13)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 중 용가리가 한강 다리를 파괴하는 미니어처 장면 이문걸이 본격적으로 미니어처와 결합한 특수효과를 몸에 익힌 것은 김기덕의 한국형 공상과학 영화이자 괴수물 <대괴수 용가리>(1967)에서였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철사에 모형 비행기를 매달아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하는 공중전을 연출했고, 떨어지는 유성은 물론 반짝이는 별 사이를 비행하는 우주선을 영상화했다. 또 특수전선을 늘어놓고 순간적으로 전류를 흐르게 하여 번개가 치게 하고 미니어처로 만든 한강 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을 거뜬히 해냈다. 이 영화에서 이문걸은 괴수물에 능숙한 일본의 특수효과 전문인력들에게 연화(煙花, 불꽃놀이 폭죽으로 사용되는 화약)로 영화 촬영용 폭약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미니어처이다 보니 축소해 만든 건물이나 다리를 폭파하면 폭파 시간이 너무 짧은 것은 물론 눈으로 보기에도 작은 폭발로 보인다. 이를 스크린 상에서 용가리가 야기한 거대하고 웅장한 재난의 현장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특수카메라를 이용한 고속 촬영은 물론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해한 특수효과 팀의 폭파 기술이 유기적으로 접목되어야 한다는 방법론을 체화했다. 그가 이때 연마한 미니어처 폭파 기술은 이후 <증언>에서의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은 물론, 1980년대를 풍미했던 <조선왕조 오백년>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임진왜란의 해전을 재현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사진14)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이문걸이 만들어 낸 새벽의 안개 장면 하지만 총기나 폭약으로 특수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자로만 이문걸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수효과 담당자가 맡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프레임 속에서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고, 지진이 나게 하고, 물 위에 살얼음이 뜨게 만들었다. 연기자의 몸에서 피가 날 수 있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훨훨 공중을 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우선 김수용의 <갯마을>(1965)에서의 안개 낀 바닷가 소나무밭 장면을 보자. 시동생 성칠(이낙훈)과 시어머니(황정순)은 마을 사람들이 잠든 안개 낀 새벽을 틈 타 주인공 혜순(고은아)이 상수(신영균)이 마을을 떠나보낸다. 부산 기장에서 촬영한 이 장면에서 감독은 ‘바다 전체에 안개(스모그)를 깔아 달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혹여 안개가 낀 바다를 연출하기 위해 바다 전체에 연기를 까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바람이 불 수 있는 야외공간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당시 스모그를 만들어내는 담당 스태프를 ‘쪼다통’이라 불렀다. 피우라는 시점에 해당 공간에 스모그를 채운다고 해도 바람이 불어 버리면 담당 스태프는 변명의 여지없이 ‘쪼다’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제안으로 이 장면은 바람이 거의 없는 기압이 낮은 새벽에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숨을 참아가며 연막통을 터뜨려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진15) <결사대작전>(고영남, 1969)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경험한 이문걸을 이후 <오, 인천!>(1981)의 특수효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다. (사진16)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포스터 (사진17)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포스터 흑백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던 시기 특수효과를 시작했던 이문걸은 영화를 촬영하기 이전에 연기자들과 동선을 맞춰보고 촬영지에 가서는 수차례 시험 폭파를 했다. 연기자의 안전을 위한 이유가 첫 번째였기는 하지만 필름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한 폭파 시험뿐이었다. 1960년대 후반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점차 표준이 되어 가자 감독들은 특수효과에서 더 많은 폭파 불꽃을 시각화하기를 원했고, 총탄을 맞자마자 피가 나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싶어 했다. <의사 안중근>(주동진, 1972) 같은 영화에서 안중근(김진규) 의사가 이등박문(박노식)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문걸은 피가 범벅된 화약과 함께 솜을 긴 대롱에 넣고, 에어스프레이(Air-spray)로 쏘아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전쟁 영화에서 총탄을 맞아 가슴에서, 머리에서, 철모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들은 분장과 이런 특수효과의 트릭들을 활용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는 대만과 홍콩영화와의 합작이 많아지고, ‘으악새 영화 혹은 참바라 영화’로 불리는 액션영화가 국내에서 많이 제작되던 시기, <돌아온 외다리>(이두용, 1974),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같은 영화에서 이문걸은 배우들의 액션과 점프를 도와줄 수 있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장비를 도입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사진18)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포스터 이 영화 작업을 통해 이문걸은 할리우드식 영화제작 및 운영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했다. (사진 19)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 폭격 장면 스틸 특수효과가 주요했던 전쟁영화 <오, 인천! Oh, Inchon!>(테렌스 영, 1981)은 이문걸의 작품연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그가 특수효과를 담당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문걸은 <오, 인천!> 촬영에 참여해 할리우드식 영화의 제작 및 운영 시스템과 선진 특수효과를 경험하게 되는 값진 계기를 얻었다. 통일교 문선명의 제작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이 작품은 <디어 헌터 Dear Hunter>(마이클 치미노, 1978)에서 특수효과를 담당했던 프레드 크래머(Fred Cramer) 팀이 도맡아 작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위한 무기류의 국내 반입이 쉽지 않았을 뿐더러 할리우드에서 촬영용으로 사용하던 흑폭약이나 화학 약품들을 한국에서 구하는 일이 녹녹치 않았다. 또 특수효과가 대부분인 로케이션 촬영이 상당수이고 계획대로 촬영할 수 있기 위해서 국내 여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자 이문걸의 특수효과 팀이 합류했다. 실제로 이 영화의 촬영용 폭약은 대부분 이문걸이 직접 공수해 가능한 것이었고, 이문걸 팀은 촬영 상황에 따른 장비 응용력은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에 이 팀에 대한 신뢰는 점점 깊어져갔다. 5)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인천 등대 유리창을 깨어야 했는데 건설부 친구들이 꼭대기에 올라가는 사다리를 제대로 만들지 않아서 산소통을 끌고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도리가 없어서 이문걸 씨가 고무줄에 베아링을 연결지어 쏘아 깰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한국 측의 이문걸 씨나 박광남 씨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어서 미국 측도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6) 실사에 더 유능했던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과 미니어처를 제작해 한강 다리 폭파 장면을 촬영했으나 결국 감독 테렌스 영은 이문걸에게 맡겨 그 장면을 재촬영을 했을 정도로 그의 미니어처 폭파 기술을 인정했다. 또 할리우드 스태프들은 이문걸이 만든 콘트롤 박스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결국 이문걸 팀에게 컨트롤 박스를 얻어갔다. 총탄이 비 오듯 퍼붓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아비규환의 전쟁터. 그리고 가슴에 총탄을 맞은 연기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이 모든 장면들은 진짜‘처럼’ 보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가져야하고 감독이 ‘컷’을 외칠 때까지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은 머리털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 이문걸이 일생을 바친 특수효과란 “같은 양의 특수약품이더라도 방향, 습도, 위치에 따라 위력이 다르고 화면도 달라” 7) 지기 때문에 철저한 계산은 물론 수많은 경험치가 필요한, 자신은 물론 스태프의 목숨을 담보로 한 매번 위험천만한 작업이었다. 총기 소지가 힘들 뿐 아니라 탄약과 화약을 민간인에게는 공식적으로 판매하지 않는 한국에서 이문걸은 종종 ‘불법으로’ 일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참고할 만한 그 어떤 선례도 없는 가운데 영화 장면을 위해서 총을 개조하고 뇌관을 만들었다. 이문걸은 서늘한 간담을 뜨거운 열정으로 녹이며 임하는 작업 과정 속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험과 현장 감각으로 한국영화의 명장면들을 만들어 낸 특수효과 ‘맨’이자 스크린의 마법사이다. *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를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이문걸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 참고. 2) 「김기덕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5 참고. 3) ‘TNT 4백 「파운드」로 쾅!’, 조선일보, 1962년 8월 28일 4면. 4) 오홍근, ‘국내 유일, 그만둘 자유도 없어 영화 특수효과맨 이문걸 씨’, 중앙일보 1981년 2월 17일 6면. 5)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2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1/2월호, 45~48쪽. 6) 한재수, 오! 인천 그 실록 <3회>, 영화, 영화진흥공사, 1980년 3/4월호, 43쪽. 7) 오홍근, 앞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