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우 : 죽은 천사의 시
- 감독
- 랜스 문기아
- 제작년도
- 2005
- 출연
- 데이빗 보리나즈(David Boreanaz), 에드워드 펄롱(Edward Furlong)
올해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한 <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August at Akiko’s >(크리스토퍼 마코토 요기, 2018)는 연초에 봤음에도 연말이 된 지금까지 나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영화다. 하와이 배경의 음악 영화인데, 하와이 출신의 음악 애호가이자 하와이 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인 앤더슨 리가 일찍이 작품을 보고 귀띔해줬던 덕에 미리 로테르담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사회를 보기로 자청하고 갔었다. 긴 설명 없이 “작은데 잘 만들었어. 데뷔 장편 영화고. 한 번 봐봐”라던 앤더슨의 말에 믿음이 갔다. 또 그 친구가 추천한 만큼, 화이트워싱 논란을 일으켰던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알로하Aloha>(2015) 같은 영화들과는 달리 하와이의 모습을 좀 더 현실성 있게 그리기도 하겠지 싶었다. 실제로 가보면 관광객을 포함한다 쳐도 하와이에는 백인이 소수라는 느낌이 확연히 들 정도로 아시아 태평양계의 인종이 많다. 토속 하와이인들뿐만 아니라 수 세대 전서부터 하와이에 이민 가서 정착한 아시아계 가족들, 앤더슨네와 같이 좀 더 최근에 들어간 가족들 등등 다양하다는 걸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만든 크리스토퍼 마코토 요기 감독도 일본계 하와이 출신이다. 증조부모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에서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갔다가 끔찍한 노동 조건과 부당한 계약에 혹사를 당했다고도 한다.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퍼는 도시 소년으로 잘살았지만, 그 전 가족 중에 하와이섬을 야반도주한 증조할머니뿐만 아니라 자살한 여러 명과 마약 중독과 학대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가족 사이의 소곤거림으로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계 가족인 만큼 이런 트라우마의 역사는 드러내놓고 회자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고 한다. 감독은 전 세대들이 고생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덕에 잘 살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얼굴 없는 조상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화 예술 MFA를 받고 본토에서 생활하게 된 그는 이런 조상들과 끊긴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1년 넘게 하와이섬에 살면서 영화 준비를 했다고 한다. 올해 유난히 한국 영화 관객과의 대화가 많았던 것 같은 로테르담에서 나는 숨이 턱에 걸려 뛰어다니다가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는 상영 당일이 돼서야 관객과 함께 처음 보게 됐다. 관람 전 심기를 잠시 말하자면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속된 말로 빡친 상태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부 상피까지, 여러 가지 일을 둘러싼 고질적인 문제들부터 시작해서 그날 영화제 센터에서 꽤 떨어진 극장을 찾아가는데 나타나지도 않아놓고 차비를 청구한 우버 예약 차량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일로 빡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관람을 시작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는 이런 내 안의 모든 불협화음을 더욱더 심하게 진동시키다가 궁극적으로는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좀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어거스트 앤 아키코즈>는 ‘힐링 영화’다. 음악가 '더티 비치스Dirty Beaches'로도 알려진 알렉스 장 후앙타이가 주연이다. 대만 태생으로 하와이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영화 속에서도 ‘알렉스’라는 이름의 30대 중반 음악가 역이다. 인생의 뭔가 안 좋은 전환점이나 방황기를 맞은 것 같은 모습으로 오랜만에 하와이에 도착해서 할머니 집을 찾아가지만, 당황스럽게 집은 사라졌고 모르는 사람의 새집이 공사 중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전화를 걸어본 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걸 그때까지 몰랐다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게 믿어지질 않아.” 가족 관계의 근절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사라진 어린 시절 하와이의 모습과의 근절도 느끼는 알렉스는 더욱 방황하는데, 결국 흘러 들어간 곳은 ‘아키코즈 부디스트 베드 앤 브렉퍼스트 (Akiko’s Buddhist Bed and Breakfast)’이다. ‘아키코’라는 일본계 미국인 할머니가 운영하는 민박 시설로 새벽에는 명상도 하고 낮에는 요가도 하는 곳이다. 푸르른 자연 속에 옛 일본계 농장 가옥들을 개조한 B&B는 고양이들이 느긋하게 돌아다니고 개구리들이 밖에서 합창으로 울어대는 곳이기도 하다. 아키코는 항상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열대 꽃을 한쪽에 꽂은 채, 주로 민소매 차림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70대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다소곳한 일본 할머니는 절대 아니다. 거의 락커 할머니 느낌이다. 인생을 좀 사신 분이다. 긴말을 묻지 않고도 알렉스가 방황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나름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가이드 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호놀룰루 태생의 일본 이주민 3세 아키코 마수다가 영화 속 아키코 역을 맡았다. 배경이 되는 B&B도 실제 그녀의 것이다. 현실과도 매우 비슷한 두 인물의 설정 때문에도 그렇지만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 두 사람과 많이 협업하고 즉흥 연기도 많이 장려했다고 한다. 알렉스는 자기 안의 갈등과 상실감, 죄책감 등으로 힘들어할 때 색소폰으로 울부짖는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아키코와 함께 앉아 명상을 하다가 그녀가 해주는 기도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동네 꼬맹이와 놀아 주기도 하고, 공동체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면서 자아 밖으로 시선과 성찰을 돌리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불협화음과 소음이다. 왠지 일본식 불교 명상과 기도를 할 때면 완벽한 정적이 강구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아키코는 인생의 시끄러움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예를 들어 거의 정글 같은 수풀 속의 가족 묘지를 정돈하러 가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사람들과 둘러서서 기도할 때,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철학으로 알렉스도 불협화음과 갈등 속에서 맑은 색소폰 소리와 마음의 평화를 찾아 나가기도 한다. 영화의 제작비는 $100,000 (원화로 1억1천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으로 미국 영화치고 초저예산인데, 갖가지 현물 지원과 심지어 밥을 해서 갖다 주는 지역 주민들의 도움까지 있었다고 한다. 예산이 작았음에도 아름다운 전경들과 빛과 소음까지 하와이의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감독과 스태프는 현지 로케이션의 모든 것을 활용한 것 같다. 소위 말하는 “프로덕션 밸류”는 뒤지지 않는 영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로스앤젤레스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타내기도 했다. (이 작품의 조은수 촬영 감독은 < 해어화 >(박흥식, 2015) 등을 찍기도 한 한국인이다.) 브루클린에 근거지를 둔 ‘팩토리 25’라는 독립 영화 및 음반 제작〮배급사가 내년 3월부터 미국에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를 개봉시킬 예정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제작자들은 아직 해외 배급을 찾고 있는 상황이다. ‘새라 킴’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한국계 미국인 프로듀서 김사화는 “우린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한정적으로라도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이 영화와 그 속에 담긴 힐링의 메시지들을 최대한 나누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전한다. -에필로그- 워낙 연초에 본 영화라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2018년 11월 도쿄 필멕스 심사위원으로 와서 쟁쟁한 경쟁작 10편을 진하게 보는 와중에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를 다시 보게 됐다. 이날 숙소로 들어오기 전에 본 것은 230분짜리 <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An elephant sitting still >(후 보, 2018)라는 작품이었다. 멀리 만저우리에 있다는 코끼리를 꿈꾸는 네 명의 주인공이 중국의 소도시에서 하루 동안 겪는 일련의 우울하고 화나고 끔찍한 사건․사고들을 따라가는 수작이다. 중국의 현재 자화상을 그렸다며 베를린 국제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당시부터 찬사를 받은 영화다. 소설가 후 보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서로 ‘하지만 어디 가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떠난다 해도 인생은 다 이래’ 식의 담담한 대사를 읊기도 하는 영화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이 영화를 완성할 즈음, 후 보 감독이 자살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엔드 크레딧 올라갈 때, 그의 웃는 모습이 담긴 추모 사진이 나오는 순간, 우린 방금 어느 한 사람의 성명서를 본 것인가, 삶의 무게와 아픔을 못 이기겠다는 자살 편지를 본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근 4시간 동안 그의 영화와 함께 호흡한 끝에 압도적인 충격과 슬픔이 몰려왔다. 히비야의 밤거리를 헤매다시피 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와이파이가 자꾸 끊기는 일본 부띠끄 호텔 쪼끄만 방구석에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 재관람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갈등과 부조화는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의 것과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에 갇혀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이나 혼란스러움은 누구나 겪을 수 있다. 이 두 영화에는 사뭇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에 나오는 코끼리의 거친 울부짖음은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에 나오는 알렉스의 색소폰 울부짖음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알렉스의 색소폰 소리는 거친 울부짖음 끝에 차차 맑은 조화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영화를 재관람하면서 다시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무 안타까웠다. 평소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후 보 감독도 영화를 만들고 나서 아키코즈 부디스트 베드 앤 브렉퍼스트 같은 델 경험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와이의 햇볕과 터프한 할머니의 온기, 다른 곳에 가면 가끔은 기적 같은 만남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더라면 말이다. 중국 영화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억압인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 안이한 상상일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말이다. 애달픈 젊은 예술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와이의 푸르른 숲과 그 속에 있는 민박집에 마주 앉아 눈 감고 명상을 하며, 기도를 하듯 노래도 하고, 색소폰도 불고, 눈물도 흘리는 두 사람 알렉스와 아키코를 생각하며 동경에서의 새벽을 맞이했다.
어두운 화면. 흰색의 자막이 기차처럼 흘러간다.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과 함께 잡음이 잔뜩 낀 방송의 파편들이 들려온다. “...좋은 아침입니다. 2014년 7월 1일 오늘 오전 6시에... 지난 7년간 논쟁을 들끓게 했던 문제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환경 단체와 개발도상국들의 시위자들이 여전히 반대하는 가운데... CW7이 지구 온난화의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왔고...” 이 아래로 깔리는 음악은 나른하지만 불길한 기운을 머금는다. 공허한 바람소리가, 피아노의 떨림이, 스트링의 스산함이 예사롭지 않다. “...지구 온난화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여긴 지도자들은 오늘 79개국 대기의 상층부에 CW7의 살포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지구 평균 기온이 적정한 수준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공냉각제인 CW7에 의해... 인류의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방안이 될 것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창공에 뜬 비행기들. 대량으로 살포되는 인공냉각제. 인류의 고된 운명을 암시하듯, 비극적인 서막을 고하듯 혼(Horn)이 포효하고 팀파니가 굉음을 터트리며 영화 타이틀이 찍힌다. 그리고 그 이후 세상에 대해 간단하게 자막으로 소개한다. “CW7 살포 후 머잖아 세계가 얼어버렸다. 모든 생명체가 멸종됐다.” 새로운 빙하기 위로 기차 한대가 매서운 속도로 달리며 설명은 이어진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방주에 탑승한 몇 안 되는 소중한 이들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이다.” 이 영화는 영원한 겨울, 얼어붙은 백색의 세상, 지구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향하여 달리는 열차에 대한 얘기다. 절대 멈추지 않는 열차. 그것은 바로 온 세계를 축소해 담아놓은 100여량의 ‘설국열차’다. 설국열차 < 플란다스의 개 >와 < 살인의 추억 >, < 괴물 > 그리고 < 마더 >로 자신의 세계를 확고하게 쌓아나간 봉준호 감독은 그간 소문만 무성하던 < 설국열차 >를 차기작으로 결정했다. 2004년 <괴물>의 프리 프로덕션을 준비하며 홍대의 한 만화서점에서 프랑스 원작과 마주친 지 대략 7년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국내에서 희귀한 장르인 괴수물을 만들어 1,300만 관객을 동원한 그였기에 본격적인 SF물을 표방한 <설국열차>에 쏟아지는 지대한 관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제작자로 박찬욱 감독이 나서며 범상치 않은 프로젝트가 될 것임을 암시한 것처럼 제작비 4,000만 달러라는 역대 최고 규모에, 할리우드의 쟁쟁한 배우들과 다국적의 스탭들이 대거 참여하여 그 기대치를 한껏 부풀렸다. <괴물>에 이어 송강호 와 고아성 이 그대로 부녀로 출연하는 것은 물론, < 캡틴 아메리카 >의 수장 크리스 에반스와 < 빌리 엘리어트 >의 차세대 스타 제이미 벨, 아카데미 조연상을 거머쥔 바 있는 두 명의 여배우 틸다 윈스턴과 옥타비아 스펜서 외에 관록파 배우 에드 해리스와 존 허트까지, 국내영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캐스팅 파워를 자랑했으며, 체코 출신의 미술감독 앙드레 넥바실과 쟁쟁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로 다져진 VFX 디자이너 에릭 덜스트, 줄리안 스펜서 같은 노련한 스턴트 코디네이터가 참여해 내실을 갖췄다. 그런 이유로 음악 역시 국내 음악감독보다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영화음악가를 원했는데, 봉준호 감독은 < 3:10 투 유마 >에서 인상적인 음악을 들려줘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됐던 마르코 벨트라미를 낙점했다. 마르코 벨트라미 196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브라운대와 예일대 음악과를 졸업한 마르코 벨트라미는 그 실력만큼이나 스승 복과 작품 운이 따른 영화음악가다. 쇤베르크의 사위이자 이탈리아의 거장 루이지 노노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USC에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전설 제리 골드스미스에게도 사사받았고, 단편과 TV물로 영화음악에 뛰어든 지 3년 만에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 음악을 맡아 획기적인 성공을 경험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모든 음악을 담당하며 빠르게 주류에 편입해 들어간 그는 이후 메이저 영화사의 호러나 스릴러 장르에서 활약해 자신만의 어둡고 비장미 넘치는 색채를 더욱 발전시켰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함께 한 < 미믹 >과 < 블레이드 2 >를 비롯해, < 패컬티 > < 크로우 2 > < 왓쳐 > < 드라큘라 2000 > < 캔디케인 > < 레지던트 이블 > < 언더월드 2 > 등 유독 음울하고 어두운 장르에서 진가를 발휘하며 명성을 드높였는데, 장중한 혼과 강렬한 퍼커션, 서정적인 스트링에 일렉트릭 사운드를 곁들인 독자적인 스타일은 유행에 함몰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인장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노르웨이의 <디나>, 덴마크의 <선생님의 외계인>, 프랑스의 < 퍼블릭 에너미 넘버원 > 등 세계 각국의 작품들에 도전해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었을 뿐더러, 장르에 있어서도 스펙트럼을 넓혀 인디 드라마부터 코미디, 스포츠, 서부극과 휴머니즘 등 다양한 선구안을 보여주었다. 특히 < 3:10 투 유마 >와 < 허트 로커 >의 연이은 아카데미 음악상 노미네이트로 60년대생 또래 작곡가 중에서 마이클 지아치노와 다리오 마리아넬리와 함께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설국열차> 음악을 담당한 작년 2013년은 마르코 벨트라미가 가장 바빴던 한해로 무려 7작품에 이름을 올리며 얼마나 잘 나가는지 손수 증명해보였다. <설국열차>는 마르코 벨트라미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발현되는 작품이다. 암울하고 어두운 톤의 심상에, 캐릭터들의 잿빛 미래를 투영시킨 디스토피아적인 사운드는 그의 초기작부터 견지해왔던 음악세계로 인도한다. 풍부한 스트링과 마이너한 테마 그리고 울부짖는 취주악 파트에 과도한 일렉트릭 효과, 그리고 심장 박동처럼 두근두근 고동치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타악 세션의 조화는 지독한 심연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뜨린다.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한 벌레부터 지옥에서 불려온 악마의 자식이나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돌연변이 뱀파이어 안티 히어로, 감정을 가진 유일한 로봇, 666 표식을 한 악마의 부활과 학교에 숨어들어 인간 행세를 하는 외계 변종 생물체, 그리고 고전적인 드라큘라까지 줄곧 외면 받고 잊혀진, 저주와 악이라는 미명 하에 터부시 되어 왔던 캐릭터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여 온 마르코 벨트라미의 음악은 설국열차의 뒷칸에 자리 잡은 하층민들에게도 유효하다. 앞 칸으로 가기위해 체제전복적인 일을 도모하는 커티스 일행과 열차 각 량의 다양한 모습들을 묘사하는 그의 스코어는 박진감 넘치면서도 동시에 애수어리다. 달리는 기차라는 콘셉트에 맞게 규칙적으로 약동하는 비트에 미니멀한 주제부를 부여한 <설국열차>의 음악은 짧지만 효율적으로 각 칸의 성격들을 정의하고, 액션에 드라마틱한 동기를 심어주었다. 이는 그전의 < 헬보이 >나 < 아이 로봇 >, < 터미네이터 3 >와 < 노잉 > 등에서 들려줬던 방식과도 유사하며, 할리우드 스코어 특유의 스케일과 빠른 호흡을 불어넣어 좁고 한정된 공간의 제약과 단선적으로 보일 수 있는 플롯의 한계를 지워버렸다. 마르코의 동료이자 프로그래머인 벅 샌더스는 다양한 소리들의 질료를 모아 음악 아래 배치해두었고, 이를 베이스 삼아 덧입혀진 스코어는 입체적이고 공감각적인 반향을 이끌어냈다. 페이크 OST커버(좌), CJ 디지털 음원 커버(우) 영화상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쓰인 곡은 도끼를 든 갱들과 어두운 터널 속에서 혈전을 벌릴 때 등장하는 ‘Blackout Fight’다.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다 성냥을 떠올리고 형세 역전을 일궈내는 흐름에 배치돼 있는데, 고요하던 엠비언트 사운드가 점차 고조되다 휙휙 몰아치는 스트링과 파워풀한 퍼커션이 가세해 절정에 치닫는 혼과 브라스가 순차적으로 어우러지는 이 곡은 진정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고 관객들을 흥분케 하는 묘미가 있다. 테마나 멜로디라 할 것 없이 단순무식하게 오스티나토를 위압적으로 몰아붙이는 큐이지만, 그래서 더 기차라는 배경이 도드라지고 대치라는 상황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트랙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처음 반란을 일으킬 때 흘러나왔던 ‘Requesting An Upgrade’와 메이슨을 처단하고 난 뒤 앞 칸으로 전진하는 장면에서 쓰이는 ‘We Go Forward’ 역시 쉽게 잊을 수 없는 큐들로 짧고 점층적인 미니멀한 사운드가 가진 위력과 효과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마르코 벨트라미는 특히 오케스트라에 각종 이펙트나 다양한 소리들을 접목시켜 종종 자신만의 특색 있는 사운드를 창출하는데, 주로 호러 영화에서 활용될 법한 효과들을 정극에 도입해 독특한 긴장과 염세적인 분위기를 묘사해낸다. < 맥스 페인 >과 < 허트 로커 > 등에서 사용돼 이미 검증된 바 있는 이 방식은 ‘This is the End’, ‘Axe Gang’, ‘The Seven’, ‘Steam Car’, ‘Snow Melt’ 등에서 언뜻 드러나며 음계가 표현해낼 수 없는 지점의 감성을 포착하는 동시에, 음향과 멜로디의 접점과 경계를 통해 황폐하면서도 위협적이고 복합적인 심상을 자아낸다. 시스템과 전복적인 세력 간의 충돌로 읽혀질 수 있는 ‘소리’와 ‘테마’의 충돌은 마르코 벨트라미가 그간 담당해온 여러 디스토피아 사운드트랙의 중추이자 근간인 셈이다. 반면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Sushi’나 ‘Yona’s Theme’ 같은 서정적인 큐들의 배치는 다른 큐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며 모노톤 일색의 스코어에 일말의 휴머니즘을 설파한다. 금방 꺼져버릴 것 같은 성냥불이지만 온기와 밝음을 머금은 것처럼 적지만 분명한 어조로. 그는 최근작인 < 소울 서퍼 >나 <더 세션>을 통해 이런 종류의 감정에 대해 탁월하게 공감을 자아낸 바 있다.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This is the Beginning’은 영화 내내 유지해왔던 디스토피아의 톤을 뒤집어 그 희망적인 시선을 계속 이어주는 곡으로 할리우드 특유의 파워풀하면서도 큰 스케일의 관현악 사운드를 유감없이 접할 수 있는, 사운드트랙의 백미이기도 하다. 육중하면서도 스피디하게 달려가는 기차를 형상화한 듯한 리듬과 서사적인 구조는 물론 결말에 이르러서 기차 탈선의 느낌을 상징하는 금속성의 엠비언트 소리들의 충돌로 곡을 마무리 짓는 것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트랙리스트엔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맨 마지막 곡인 ‘Yona’s Theme’가 끝나고 나면 몇 초 지난 뒤에 사운드트랙의 이스터 에그로 마르코가 제일 처음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윌포드 찬가’의 데모 버전(그의 가족들이 직접 불렀다!)이 흘러나온다. 사운드트랙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삽입곡으로 등장하는 곡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단백질 블록을 만들어내는 칸에서 조리사가 틀어놓았던 음악은 하드록그룹 Cream이 부르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Strange Brew(수상한 제조)’이고, 식물원 칸에서는 영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클래식 중에 하나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988이 흘러나온다. 사우나 칸에서는 Ray Noble의 ‘Midnight With The Stars And You’가 슬쩍 들리는데 영화 < 샤이닝 >의 엔딩곡으로 쓰였던 노래로, 봉준호 감독이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헌정을 담아 선택한 곡이라고 한다. <설국열차>를 봉준호 감독의 베스트라 단언할 수 없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마르코 벨트라미 역시 <설국열차>가 최고작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필모 중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품었고, 세계적인 공감대를 공유하기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마르코 벨트라미 역시 생소한 아시아 영화에 도전했으며, 자신의 필모에서(최신작인 < 더 기버: 기억전달자 >까지 포함해) 가장 극대화된 디스토피아 사운드를 완성해냈다. 끝에서 시작해 시작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갖는 힘은 언제나 크다. 그 울림을 고스란히 간직한 음악 역시 귀중하다. 마르코 벨트라미의 <설국열차>는 그런 에너지들이 충돌하고 폭발하며 힘차게 질주해대는 비장의 OST다. Blackout Fight Track List 1. This Is The End 2. Stomp 3. Preparation 4. Requesting An Upgrade 5. Take The Engine 6. Axe Gang 7. Axe Schlomo 8. Blackout Fight 9. Water Supply 10. Go Ahead 11. Sushi 12. The Seven 13. We Go Forward 14. Steam Car 15. Seoul Train 16. Snow Melt 17. Take My Place 18. Yona Lights 19. This Is The Beginning 20. Yona’s Theme
“로스앤젤레스로 오세요. 강렬한 태양 아래 해변은 매혹을 뽐내고, 오렌지밭은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일자리는 넘치고 땅값은 쌉니다. 모든 시민들이 집을 소유하고,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어요.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또 누가 알아요? 감독에게 픽업돼 배우가 될지. 아니면 적어도 스타 한 명은 마주치겠죠. LA에서의 삶은 멋집니다. 지상낙원이니까요. 하하하. 겉보기는 그렇죠. 영화나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그런 이미지를 팔고 있으니까요. 인기 절정의 드라마 <영광의 뱃지>에서도 경찰들은 활보하며 도시의 범죄자들을 소탕합니다. 맞아요.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과 달리 이 에덴의 동산에도 골칫거리가 있습니다. 마이어 해리스 코헨, 일명 ‘미키 C’로 통하는데 그가 LA를 장악하고 있어요. 미키는 범죄조직의 대부로 마약, 밀수, 매춘에 손대고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을 살인하면서도 격조 있는 삶을 누리고 있죠. 신문 일면을 장식하는 그의 얼굴은 LA의 수치입니다. 가장 치안이 좋은 도시에 조직범죄라니 말이 됩니까? 그래서 대책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독창적이진 못했죠. 할리우드니까요. 알 카포네에게 했던 대로 미키에게 했을 뿐입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미키의 구속으로 힘의 공백이 생겨났고, 누군가가 또 그 공백을 메꾸려고 할 테니까요.” 도입부 내레이션은 영화의 시대상을 명료하게 함축한다. 향락과 비리, 부패, 범죄가 판치는 도시. 1950년대 LA는 누아르 그 자체였다. 「L.A. 컨피덴셜」 1951년부터 58년까지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세 명의 형사가 하나의 사건을 수사해가는 「L.A. 컨피덴셜」을 영화화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긴 세월에 걸쳐 수많은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이 방대한 제임스 엘로이의 원작을 두세 시간이란 한정된 분량 안에 녹여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계에 도전한 무모한 이들이 있었으니, 그전까지 흔하디흔한 스릴러를 연출해오던 감독 커티스 핸슨과 호러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시작한 브라이언 헬겔랜드였다. 제임스 엘로이 소설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뭉친 그들은 2년에 걸친 시간 동안 이 작품에 몰두하며 일생일대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각색은 놀랄 만큼 함축적이고 영리했고, 영화는 1998년 거의 모든 비평가협회의 작품상과 감독상, 각색상을 휩쓸며 최고의 영화로 추앙받았다. 비록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버티고 있던 제임스 카메론의 < 타이타닉 >으로 인해 아카데미에서 고배를 마시고 흥행에서도 외면받았지만, 러셀 크로우와 가이 피어스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세상에 인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물갔다고 평가받던 왕년의 섹시스타 킴 베이싱어에게도 수많은 여우조연상을 안기며 그 가치와 안목을 입증했다. 마치 1950년대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이 불세출의 네오누아르는 고전보다 더 고전적인 스타일과 이야기를 과시하며 탄생하자마자 걸작이 되었다. 그 바탕에는 뛰어난 촬영과 편집, 미술과 사운드 그리고 무엇보다 황홀한 음악이 존재했다. 제리 골드스미스 < LA 컨피덴셜 >에서 음악이란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었다. 그 시대상과 분위기를 단번에 녹여내기 위해 당대의 히트 넘버들이 사용되어야 했다. 커티스 핸슨 감독은 시나리오를 작업하며 영화에 삽입될 곡들을 한 뭉텅이 선곡해놓고 있었다. 문제는 이를 받쳐줄 스코어였다. 삽입곡과 궤를 같이하며 분위기를 그대로 연장시킬 수 있는 곡, 그리고 거기에 액션과 스릴, 캐릭터들의 감정까지도 표현해줄 수 있는 그런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곡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커티스 핸슨은 바로 전작 < 리버 와일드 >를 같이 한 제리 골드스미스에게 음악을 부탁했다. 동부에 존 윌리엄스가 있다면 서부엔 제리 골드스미스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을 대표하는 양대 마에스트로 중 하나. 그는 이 영화의 무대가 되는 1950년대 LA에서 영화음악을 시작한 이 분야의 대가였고, 수정주의 누아르이자 필름누아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 차이나타운 >의 사운드트랙을 직조해낸 바 있는 장인이었다. 골드스미스는 감독이 준비해놓은 곡들의 면면을 살펴봤고, 쳇 베이커나 바비 하켓의 곡들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트럼펫 선율을 메인 모티브로 잡아 세밀하게 삽입곡과의 간극을 좁혀나갔다. 따라 스코어 전반에 걸쳐 쿨한 트럼펫의 음색이 연신 흐르고 있고, 타악기처럼 활용된 낮고 격정적인 피아노와 강렬한 퍼커션은 영화의 인상적인 음영을 그려 넣었다. 그것은 마치 <차이나타운>의 재림과도 같았다. 애수 어린 트럼펫과 낮고 거칠게 으르렁거리는 피아노의 리드미컬한 터치는 두 작품 다 공통적으로 나타난 요소들이었다. 다만 조금 로맨틱하면서도 감성적이고, 지독하게 허무한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차이나타운>과 달리 <LA 컨피덴셜>의 음악은 지극히 남성적이고 폭력적이며 투박한 어둠의 그림자와 피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패배의 기운이 가득했던 <차이나타운>의 씁쓸했던 뒷맛과 다르게 <LA 컨피덴셜>에선 (비록 상처투성이긴 하지만) 달달한 승리의 결말을 안겨준다는 것 또한 큰 차이다. 이는 원작과 비교해도 달라진 부분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모던한 누아르로서 성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달라진 시대상을 적극 반영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는 골드스미스가 20여 년 만에 누아르로 복귀한 스코어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낮고 서늘한 브라스는 불길한 징조처럼 사건을 암시하거나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악의 근원처럼 스멀스멀 울려 퍼지기도 하고, 규칙적인 일렉트릭 비트와 팀파니 등 다양한 퍼커션의 향연은 그 시대의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하며 영화의 다이내믹한 면을 부각시킨다. 특히나 영화의 주된 테마로 등장하는 ‘The Victor’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유일하게 담당했던 정극 < 워터프론트 >의 테마를 인용해 만들어진 곡으로 초반 트럼펫 솔로 모티브가 유사하다. 하지만 이내 독자적인 색채를 띠는데, 이는 마치 < 토탈리콜 >에서 바질 폴두리스가 작곡한 < 코난 > 메인 테마의 퍼커션 라인을 가져와 자기 스타일대로 변주한 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뉘앙스를 선사하는 이 독특한 오마주는 그의 동료들에 대한 색다른 칭송이자 헌화이기도 하다. 삽입곡들이 주로 대화 씬에 배치돼 사건을 이끌어가거나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를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면, 그의 스코어는 긴장과 갈등이 부딪치는 액션 씬과 전조를 알리는 브릿지 등에 흐르며 포괄적으로 상황을 아우른다. 삽입곡에 밀려 스코어의 비중이 낮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베테랑답게 이 어려운 감독의 요구에 응하며 누아르에 어울리는 끈적하고 강렬한 톤의 만가(輓歌)를 완성해냈다. L.A. 컨피덴셜 사운드트랙은 90년대부터 보편화된, 삽입곡 위주의 컴필레이션 앨범과 골드스미스가 작곡한 스코어 앨범, 2장으로 나눠 발매되었다. 상업적인 이유로 발매되던 여타의 컴필레이션과 달리 < LA 컨피덴셜 >의 경우는 두 앨범을 모두 접해야 완벽한 영화의 감흥을 느낄 수 있는데, 2장 다 러닝 타임이 30분 정도에 불과해 모든 곡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컴필레이션 앨범 맨 앞에 실린 ‘Badge of Honor’는 스코어 앨범에도 실려 있지 않은 제리 골드스미스의 히든 트랙이자 보너스로, 영화상에 등장하는 인기 절정의 드라마 <영광의 뱃지>를 위해 작곡된 가상의 타이틀곡이다. 알다시피 그의 초기 경력인 1950년대엔 이런 TV 범죄물의 음악들을 여럿 담당했던 적이 있는 터라 정확한 고증이 따로 필요 없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모든 크레딧이 올라간 뒤 쿠키 영상으로 이 <영광의 뱃지> 타이틀 화면이 나오기도 하니 제법 친절하고도 쏠쏠한 팬 서비스인 셈이다. 오프닝 내레이션이 나올 때 흐르는 조니 머서의 ‘Ac-Cent-Tchu-Ate the Positive’를 비롯해, 차트 넘버원을 기록한 케이 스타의 ‘Wheel of Fortune’, 딘 마틴의 미공개 발표곡 ‘The Christmas Blues’ 등 올드 팝의 정수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단지 이에 그치지 않고 각 상황에 맞게 배치된 곡이 캐릭터들의 상황과 심경을 묘사하고 있는 터라 더욱 의미심장하다. 스타 형사 잭을 처음 소개하는 장면에선 ‘Oh! Look at Me Now’가, 버드에게 신문지 속에 감춰진 총과 뱃지를 돌려줄 때는 ‘Look for the Silver Lining’이, 미키 코헨의 부하들을 처단하는 장면에서는 ‘Hit the Road to Dreamland’가, 린과 버드의 관계에 질투심을 느낀 에드가 린을 강제로 안을 땐 ‘But Not For Me’가, 자기혐오에 빠져 술을 마시다 거울을 바라보는 잭의 얼굴 위로 ‘Powder Your Face With Sunshine’이 나오는 식이다. < LA 컨피덴셜 >은 그간 잠자고 있던 누아르를 다시 현재에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 이는 뛰어난 배우들과 훌륭한 원작, 영리한 각본에 정공법적인 연출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음악의 승리다. 현재 관객들이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잘 설계된 삽입곡과 제리 골드스미스의 탁월한 스코어가 완벽하게 그 세계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올해는 제리 골드스미스가 타계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자 그의 탄생 85주년이 되는 해. 그의 부재가 새삼스레 아쉽게 느껴진다. (영상도서관에는 컴필레이션 앨범(F-0554)만 접할 수 있다.) The Victor Track List (Score Album) 1. Bloody Christmas 2. The Cafe 3. Questions 4. Susan Lefferts 5. Out of the Rain 6. Rollo Tomasi 7. The Photos 8. The Keys 9. Shootout 10. Good Lad 11. The Victor (Compilation Album) 1. Badge of Honor - Jerry Goldsmith 2. Ac-Cent-Tchu-Ate the Positive - Johnny Mercer 3. The Christmas Blues - Dean Martin 4. Look for the Silver Lining - Chet Baker 5. Makin' Whoopee - Chet Baker & The Gerry Mulligan Quartet 6. Hit the Road to Dreamland - Betty Hutton 7. Oh! Look at Me Now - Lee Wiley 8. The Lady Is A Tramp - The Gerry Mulligan Quartet 9. Wheel of Fortune - Kay Starr 10. But Not For Me - Jackie Gleeson 11. How Important Can It Be - Joni James 12. Looking at You - Lee Wiley 13. Powder Your Face With Sunshine - Dean Martin 14. L.A. Confidential - Jerry Goldsm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