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단계
- 감독
- 크리스 마르케
- 제작년도
- 1997
“나는 영화를 보러 간다기보다는 전례 없는 시간성을 즐기기 위해 간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래서 영화관에 자주 간다고 말이야” - 장 루이 세페르,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중 1. 영화는 처음부터 시간의 마술이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열차의 도착>을 처음으로 상영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시간의 마술사들이었다. 잘 알려진 일화지만 뤼미에르는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완성한 뒤, 자신의 공장(뤼미에르 형제는 카메라 부품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들이기도 했다) 사람들과 일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내 그것을 유료 공개하였다. 뭔가 흥미로운 볼거리를 보여주겠노라고 그들은 호객했고, 호기심에 휩싸인 사람들이 1프랑의 돈을 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카페에 인위적 어둠을 만든 뒤, 공간 정면에 시오따 기차역 사진을 크게 영사했다. 이 순간 사람들은 속으로 ’별거 아니군. 그저 커다란 사진일 뿐이야‘라며 실망했다. 그 시대, 확인되지 않은 볼거리를 위해 1프랑의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70여 년 전(1820년대 사진 발명)에 처음 등장한 ’사진 이미지‘에 낯설지 않은 중산 계급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정지된 사진 속 이미지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화적 매혹‘의 탄생이었다. 영화사 초창기를 기록하는 자료들에 의하면 이때 뤼미에르 형제는 의도적으로 ’정지된 순간‘을 연출하였다. 익숙하다고 간주되는 것에 ’시간‘의 마술을 부여함으로써 놀라움과 매혹을 연출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 눈 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가상의 세계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한 순간을 소환한 것이었다. 지나간 시간을 현재화하는 능력, 영화는 시간을 지배하는 예술이었다. 영화 편집에 관한 다큐멘터리 <컷팅 엣지>(2004)에 인터뷰어로 등장했던 영화 감독, 롭 코헨이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편집할 수 있기 때문 일거에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편집하고 싶어 합니다. 나쁜 일, 지루했던 일은 잘라버리고 좋았던 것만 더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요.”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지루했던 일상과 나빴던 일들을 송두리째 들어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통해 불가역적인 시간을 통제하고픈 욕망을 발현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물리적 시간에 감금된 ‘평범한 인간’에게 영화는 (적어도 창작자에게) 시간 지배자의 위상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이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는 오늘날 할리우드 감독들 중 가장 소란스럽고, 거창하며,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영화적 시간’에 대해 유희하는 인물이다. 늘 언제나 기대를 자극하는 멋지고 웅장한 트레일러를 선보이지만, 정작 본편인 영화는 늘 실망에 마지않는 유아적 영웅주의에서 멈춰서는, 그런 진부한 대작을 만들어낸다. < 인터스텔라 >(2014)와 < 테넷 >(2020)을 통해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병렬적인 세계의 차원과 열역학 엔트로피까지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란한 언사와 스펙터클의 제스처 바로 뒤편에서 그의 영화들, 특히 이번 영화 <테넷>을 지탱하고 구성하는 본질적인 장치들은 팍스 아메리카를 설파했던 80년대식 하드바디 영웅주의 서사에 묶여있다. 팀 버튼의 분열적 반영웅 ‘배트맨’을 초국적 자본의 스펙터클 하드바디로 전락시킨 < 배트맨 비긴즈 >(2005)는 물론이고, 2차 대전의 애국적 영웅주의를 설파했던 <덩케르크> 그리고 이번 영화 <테넷> 역시, 미국의 CIA 요원이 탐욕스러운 구소련의 악당에 맞서 제3차 대전을 막아내는 새로운 위인 서사에 불과한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 터미네이터 >(1984)를 물리학 용어로 재각색한듯한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적 스펙터클로서 시간을 재구성한다. 미래의 침입과 인버전, 역행하는 시간의 언캐니한 속도감. 화려한 오페라극장에 대규모로 동원된 관객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떨구며 수면으로 빠져드는 초현실주의적 모멘트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적 물질성에 입각한 세트 촬영의 지표적 이미지라 할지라도 그의 영화는 결국,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시간의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감을 창출하는 시간적 연쇄의 합리성으로 구성된 허구, 근대적 자본주의 권력과 질서를 인과론과 합리성의 체제 내에서 지각하고 수용케 하는 시간의 허구 말이다. 미래의 침입이라는 SF적 상상력이라면 이미 1962년, 크리스 마르케가 완성한 <환송대>의 영화적 체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포토 로망으로 호명된 이 영화는 정지된 사진 이미지의 연쇄와 단 한 순간 제시되는 움직이는 이미지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3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세계, 미래의 과학자들은 한 남자를 대상으로 시간여행을 실험한다. 그는 이미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과거의 공간, 죽은 자들의 시간으로 침입해가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금지된 사랑은 그를 실험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결국 그는 미래의 사도들에 의해 쫓기다 살해된다. 1958년에 공개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대한 오마쥬와 병렬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 이미지,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갔던 남자에 대한 기억과 흔적, 죽음과 소멸에 대한 놀라운 은유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이미 반세기 전 영화 역사에 등장해 시간에 관한 가장 매혹적인 사유와 이미지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이후 등장한 모든 영화는 <환송대>가 이미 성취한 예술적 경지 주변부를 배회할 수밖에 없다. 3.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늘 궁금하다. 예전 사사로운 리스트에 < 덩케르크 >(2017)를 언급하면서, 그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의 한 장면에 견주어 혹평을 했음에도 그 영화가 지닌 과감한 시간 배치의 모험은 흥미로웠다. <테넷>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서사와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진부하고 보수적이지만, 그는 어쨌든 할리우드의 막강한 자본력과 인력을 동원해 첨단의 영화를 물리적으로 직접 찍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첨예한 방식으로 그리고 동시대적 감각으로 영화를 통해 시간을 사유하고, 구축하고 그리고 압축할 수 있는 감독이기도 한 것이다. 맑스주의 학자인 데이빗 하비가 90년대 발표한 대표 저서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은 동시대 문화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시공간을 압축하고 사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흥미롭고 정치한 논리를 선보인다. 그중 그가 분석 사례로 제시하는 < 블레이드 러너 >(1982)에서 인조인간 ‘로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욕망하고 동기화하는 시공간 압축의 가장 첨예한 은유로서 분석된다. 로봇에게 부여된 4년의 작동 시간, 고도록 집약된 노동 능력,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축적된 인공지능 로봇의 기억과 감정, 추억과 연민, 공포와 분노 등은 우리가 무심하게 신격화하는 용어 ‘휴머니티’를 반성할 것을 촉구한다. 즉 ‘로이’는 당대의 자본주의 경제가 지향하는 시공간 압축과 기계화된 인간 노동에 대한 욕망의 상징이자, 탁월한 SF 영화의 기념비적 캐릭터이자,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중층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흥미롭다는 것은, 달리 말해 데이빗 하비의 방식처럼(혹은 랑시에르의 방식처럼), 그의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문화가 집결한 그곳에서 영화적 시간을 구축하고 욕망하고, 재현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지각하고 감각하도록 강요하는지 흥미로운 것이다. 즉, 영화 제작의 최첨단에 선 그가 반영하게 될 지금 세계의 모습, 첨예한 속도전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시간에 대한 감각, 일방향적 속도를 넘어 이제 모든 차원의 시간을 다 통제하고야 말겠다는 전체주의적이고 전능주의적인 신화, 그리고 그 시간을 서사화하고 스펙터클화하는 전시주의의 욕망.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그러한 흔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4. 다소 러프한 방식으로 ‘영화적 시간’을 정의하다 보면, 2019-20년에 선보인 영화들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감각과 욕망을 드러낸다. 그중에서 가장 아쉽고 이상해 보이는 영화는 샘 멘데스의 영화 < 1917 >(2019)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경이해 마지않는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와 함께한 이 작품에서 그는 이냐리투 감독의 < 버드맨 >(2014)과 스탠리 큐브릭의 < 영광의 길 >(1957)에서 보여준 형식적 실험과 주제 의식을 매우 지루하고 나이브하게 모방하고 반복한다. 폭격을 막기 위한 지령을 들고 목적지까지 질주하는 병사의 시간을 추적하는 이 작품이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이미 이냐리투 감독이 2014년, 뛰어난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벳츠키와 함께 선보였던 <버드맨>의 아류처럼 보이며, 전쟁의 불모함과 광기, 병사들에 대한 연민과 공포는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영광의 길>에서 선보인 참호전의 잔혹함과 기만성을 통렬하게 성찰했던 것에 전혀 가닿지 못한다.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에서 눈에 띈 또 다른 영화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와 폴 그린그래스의 <뉴스 오브 어 월드>이다. 이 두 편은 모두 1870년대 서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서부 역사의 결을 거스른다. 그러나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는 자상한 백인 중년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톰 행크스를 서부로 데려간 것 이외엔 아무 특이점이 없다. 반면 켈리 레이차트의 <퍼스트 카우>는 그녀의 전작 < 믹의 지름길 >(2010) 못지않게 완연히 새로운 서부의 시간과 사건을 기록한다. 서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가난하고 비루한 백인 남성과 중국계 남성. 이들이 살아가는 서부의 시간과 공간은 정복과 개척으로 포장된 승리의 서사도 아니고, 흑과 백, 문명과 야만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선을 긋는 신화적 공간도 아니다. 빈곤과 공포 속에서 오직 생존하기 위해 서부를 배회해야 했던 가련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연민과 기억,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상기하고자 하는 영화이다. 그 외 201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마티 디옵 감독의 < 애틀란틱스 >(2019)는 매우 심플하지만 시선의 지형과 주체를 바꾼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시간과 초현실적 시간(죽은자의 시간)을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강렬하다. 이주 노동, 난민 등의 문제는 언제나 유럽 1세계 백인의 관점에서 서술되곤 하였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난민 문제를 포용하거나, 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문제시하거나, 혹은 휴머니즘과 낭만적 서사를 결합하거나. 그러나 마티 디옵은 1세계의 시선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혹은 난민의 대지 바로 위에서, 그들 계급의 시선으로 ‘이주’와 ‘착취’를 묘사한다. 경제적으로 불모한 땅에 사는 젊은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젊은 여성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을 청년들이 자취를 감춰버린다. 영문 몰랐던 여인들에게 들려온 소식으로는 그들 모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바다를 건너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들의 비통함과 부재의 흔적들. 그러던 어느 밤. 청년들이 돌아온다. 더 이상 산자가 아닌, 죽은 자의 영혼이 되어 그들은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의 육체에 강신된다. 그리고 강신된 육체가 향하는 곳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고향의 착취적 자본가들. 바다 저편에서 죽은 자가 귀환해 그들의 원통함을 해결하는 것은 흡사 존 카펜터의 호러 < 안개 >(1980)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마티 디옵의 <애틀란티스>는 오컬트 호러라는 장르적 포뮬라나 컨벤션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정학과 계급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다. 새로운 ‘제 3영화’적 포지션 속에서 포개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시간은 처연하면서도 인상 깊은 계급 정치학을 피력한다. 2020년, 압축된 시공간의 논리를 보다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냄으로써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은 샤디프 형제의 < 언컷 젬스 >(2019)일 것이다. 그들의 전작 < 굿타임 >(2017)에 이어 숨 가쁘게 이어지는 사건과 사운드, 대사, 움직임 등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모두의 찬사를 받았던 아담 샌들러의 연기는 곤혹과 절박, 신경증과 불안, 허세와 짜증에 관객까지 연루시키는데 여지없이 성공한다. 5. 그러나 2020년 영화 중 가장 정서적으로 공명할 수 있는 시간 이미지를 선보인 작품은 클로이 자오의 영화 < 노마드랜드 >(2020)이다. 사실, 사사로운 리스트를 제출한 이후에 접하게 된 이 영화는 매우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를 기억에 각인시킨다. 그것은 주인공 프랜시스 맥도맨드(극 중 캐릭터, 펀)가 텅 빈 사막지대를 배경으로 무심하게 서 있거나 걸어가는 옆모습을 클로즈업으로 팔로잉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유목적 삶을 선택한 노년의 여성을 따라간다. 60대 여성 ‘펀’은 낡은 자동차 한 대에 자신의 모든 짐을 싣고 1년 단위로 노동과 공동체를 찾아 이주하며 살아간다.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묘사하지 않는 이 영화는 다만 유목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 얼굴, 회한, 소망 등을 가끔씩 응시할 뿐이다. 만들어진 모든 쇼트들에 유기적인 사건과 시간의 의미를 채워놓고자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과 이 영화가 대비되는 지점은 이 영화가 모든 쇼트들로부터 시간의 강박을 지워버리고, 특정 의미를 채우려 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며, 무한히 열어 놓는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난 직후, 우연히도 읽게 된 글이 있었다. 앙드레 바쟁이 자크 타티의 영화 < 윌로씨의 휴가 >(1953)를 분석하며 썼던 평론 “윌로씨와 시간”.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윌로씨가 1년 중 10개월은 사라졌다가 7월 1일, 임시적인 시간이 형성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나타남과 사라짐, 그러한 반복의 시간은 무용한 행위가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리듬을 지닌 ‘의식의 시간’이라고 바쟁은 명명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시간의 방향은 원인에서 결과로, 시작에서 끝으로 향해 간다. 하지만 <윌로씨의 휴가>는 이런 것들과는 반대로 나아간다. 아마도 시간은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소재가 아니라 이 영화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앙드레 바쟁, “윌로씨와 시간” 중) 바쟁은 따띠가 창출한 ‘윌로씨의 시간’에서 그가 영화 속 근대 사회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 감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영화는 윌로라는 캐릭터를 통해 근대적 시간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과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마드랜드>가 감히 자크 타티의 영화에 비견될 수 있겠느냐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반복 관람한 직후, 우연히 접한 이 영화의 리듬과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 이외에 다른 것을 갈구하지 않는 ‘펀’의 무심한 시간들과 표정은 <테넷>에서 묘사된 필사적인 그 모든 것들을 가볍게 눌러버리며, 놀라운 정서적 공명을 만들어낸다. 특정한 방향으로 질주하길 재촉하는 시간 이미지들에 대비되어 <노마드랜드>에서 프랜시스 맥도맨드의 얼굴 이미지가 선택하고 열어놓은 시간은 그 모든 시간에 대한 강박을 털어버리게끔 하는 것이다. 장 루이 세페르의 말처럼, 영화는 전례 없는 여러 시간을 체험하는 여행이다. 그 시간은 때로는 영화 창작의 주체가 치밀하고 꼼꼼하게 채워 넣은 플롯들과 서사의 시간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들어가 관람하는 극장이 존재하는 동시대적 시간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억을 끄집어내어 영화라는 외부적 이미지와 접촉해 만들어내는 감각 경험적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테넷>부터 <퍼스트 카우> 그리고 <노마드랜드>까지, 영화는 그 모든 다양한 시간에 대한 체험과 기억, 욕망과 불안을 모두 열어놓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영화가 구성하는 시간의 매혹이다.
영화에 관해 글을 쓸 땐, 사적인 이야기로 지면을 채우는 것을 많이 주저하는 편이다. 영화 글을 읽는 사람들의 동기는 대체로 글쓴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그 글이 다루는 영화에 대한 관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쓰이게 된 배경을 잠깐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년 연말까지만 해도 난 한국에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작은 규모의 영화 잡지를 만들며 백수와 직업인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몇 달 앞두고 마침 뉴욕에 계신 먼 친척분의 집이 비게 되었고, 뉴욕행 비행기의 항공권보다 서울의 여섯 달 치 월세가 더 비싸단 이유만으로 예정보다 조금 빨리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딱히 이곳에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영화들의 DVD나 블루레이를 구해 보거나, 링컨센터 필름 소사이어티(Film Society of Lincoln Center), 필름 포럼(Film Forum), IFC 센터(IFC Center) 등을 다니며 소일하던 중 한국영상자료원으로부터 ‘뉴욕에서 할 수 있는 시네필 적인 경험’에 대해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이곳에서 새롭게 경험한 것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무심코 청탁을 수락하게 되었다. 처음엔 집필 과정이 순탄할 것만 같았다. 장 뤽 고다르가 < 언어와의 작별 >(2014)에서 3D 기술을 활용해 단순한 오버랩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이미지의 중첩을 선보임으로써 영화 몽타주의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한국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나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몇몇 운 좋은 관객들만이 그 순간을 목격할 수밖에 없던 것과는 달리, 뉴욕의 시네필들은 맨해튼의 IFC 센터에서 비교적 오렛동안 매일같이 영화사의 새로운 도약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아쉬운 이야기부터, GV가 예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회고전 내내 자신의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극장을 찾아 모든 관객의 질문에 성심껏 답하며 크리스 마르케, 알랭 레네, 프랑수아 트뤼포 등과의 일화를 들려준 아녜스 바르다의 이야기라든지, 크라이테리언의 노력 끝에 4K 복원된 사티야지트 레이의 < 길의 노래 >(1955)를 다른 도시의 시네필들보다 먼저 만나볼 수 있었던 것 등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글을 시작하고 나니 ‘과연 내가 뉴욕에서 경험한 것들이 한국에 있었을 때에 비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곳에서 그저 영화를 보았을 뿐이고, 좋은 영화를 만나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은 부산에서 십대를 보내고, 서울에서 이십대를 보내는 동안에도 내가 늘 해오던 것이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뉴욕의 시네마테크들에서 내가 만났던 영화들과 영화인들에 대해 부러움을 표할 때, 나는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 영화의 전당에 앉아 있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밝은 햇빛 혹은 현란한 네온사인이 내미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깜깜한 어둠 속에 틀어박혀 영화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어느 프랑스인의 묘사에 의하면 ‘시네마테크의 들쥐들’ 같은 시네필들이 하는 경험이란 결국 어떤 도시에 체류 중인가의 문제가 아닌 어떤 극장을 찾았는가의 문제에 의해 좌우되며, 그것들 사이에 우열 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 맨해튼 >(1979)을 극장에서 본다면, 그곳이 맨해튼의 필름 포럼이 아니라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한 시간 반 남짓 우디 앨런의 시선으로 바라본 1970년대의 맨해튼에 있는 것이다. 극장 문이 닫히고 나서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기 전까지의 짧은 어둠 속에서 관객들은 이전까지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과 격리되어 곧 상영될 영화의 감독이 설계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영화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창조된 공간은 그곳이 세트였든 아니면 실제 장소였든 간에, 분명 존재하기에 필름에 착상되어 이미지로 재연되었지만, 막상 그것이 촬영된 실제 장소와는 다른 성질을 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찰나의 암전 후 영화가 상영되는 세상의 모든 영화관은 엄밀히 말해 일종의 무국적 지대이며, 그 속의 시네필들은 이를테면 국적은 물론 시간과 공간의 경계마저 초월한 그 영역을 유랑하는 초국적의 시민들인 셈이다. 그들이 이미 극장에 들어선 순간 그들에게 자신이 위치한 물리적인 좌표는 무의미할 뿐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네필이 도시 간을 이동하며 여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서로 다른 장면에서 울고 웃는 타 문화권의 관객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 체험은 때때로 그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하며, 다른 도시를 방문해 그간 영화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실제 장소를 비교해보는 것은 그 영화가 그 도시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영화적 공간으로 구성한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여행자로서 시네필은 유명한 관광 명소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이라면 무심결에 지나칠 법한 곳들에서도 그 장소에 덧입혀진 서사에 기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킹콩의 사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더라도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의 풍경에서 감흥을 느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 이터널 선샤인 >(2004)을 보지 않은 채로 몬타우크에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물리 법칙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앞서 나열한 것들과 같은 시네필적 경험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영화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각자 다른 영화를 만나며, 내가 만나지 못한 영화를 만날 누군가를 끊임없이 부러워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의 곁을 지킨다면, 그래도 영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형태인지 점차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앞선 시네필들이 단지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시네필들이 서로에게 ‘저는 이 영화를 이렇게 보았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부치듯이 쓴 조각들이 모여 감히 혼자서는 완성하지 못할 영화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그 지도를 보며 후대의 시네필들이 다음엔 어떤 영화를 찾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며 새로 써나간 편지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 어쩌면 시네필의 역사이자, 영화 비평의 역사이며, 영화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은 조금 서투르고 정리가 안 되긴 했지만, 그리고 엉뚱하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 무엇보다 내가 뉴욕에서 겪은 시네필적인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시작되면 파리의 아름다운 전경들이 펼쳐진다. 공중과 첨탑 등에서 부감으로 촬영된 멋진 풍경!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파리. 그리고 울려나오는 이브 몽땅의 고혹적인 목소리. “확인하고 싶었다.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가?”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 < 아름다운 5월 >은 이렇게 시작된다. 1962년 5월. 그는 촬영 감독 피에르 롬과 함께 영화 카메라에 포착할 수 있는 5월의 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파리의 풍경들을 포착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부르주아들, 상인들, 알제리 이민자들, 아이들, 여성들, 노동조합원들.. “당신은 언제 행복하신가요?” “62년 5월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알제리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파리 사람들은 이 낯선 질문자의 카메라 앞으로 모여들고, 의외로 자신들의 욕망과 생각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한다. 여기까지라면 이 영화는 시네마 베리테의 출발점이라고 이야기되는 장 루슈와 에드가 모랭의 < 어느 여름의 연대기 >(1961)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크리스 마르케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1962년 5월 파리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흔적과 단순한 답들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필름 에세이스트’라고 불렀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답변의 내용이 아니라 그 질문과 대답의 간극 속에서 사유되는, 62년 5월 파리에 관한 한 좌파적 지식인의 근심과 불안에 관한 것이다. 크리스 마르케의 관념 속에서 62년 5월의 파리는 격전지였다. 61년 10월 파리에서 자행된 알제리인 대량 학살(이때 희생당한 알제리인 200여명은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채 세느강에 던져졌다)에 대한 지식인의 죄의식과 트라우마, 제국 프랑스의 전승비 앞에 아직도 사열하는 군국주의자들의 행진들, 수탈당하는 이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의 양태들, 돈을 숭상하며 주식거래장 앞으로 모여드는 군중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파리 사람들에게 5월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이상기온을 꼽았고, 알제리에 대해서는 국수주의적 적대를 보였으며, 여성들은 정치를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다. 행복의 조건으로 돈을 꼽았고, 직면한 문제로는 연애과 결혼, 휴가에 관한 것을 언급했다. 크리스 마르케는 제국 프랑스, 근대적 자본주의 프랑스의 지배와 정치가 어떻게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욕망 속에 관철되어지는가를 들여다본다. 미시적 일상에 갇힌 사람들. 지배 논리와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군중들. 그러나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 그래서 영화 < 아름다운 5월 >은 이른바 몽타주의 미학과 방법을 채택한다. 영화의 첫 장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추상적 관념 속에 있는 파리는 에펠탑과 아름다운 관광지, 전승지, 문학과 예술의 집결지였다. 마르케의 사유는 그 신화적 이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가?” 이 질문과 함께 아름다운 에펠탑과 도시 풍경의 이미지는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신경증적인 대화 목소리들, 교통 소음들처럼 불안하고 음울한 사운드들과 충돌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파리의 곳곳을 포착하던 카메라는 이윽고 파리의 감옥으로 향한다. 높은 담장과 팔각형의 건물은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고,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대를 키워나간다. 에펠탑과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들에 대한 부감숏으로 시작됐던 이 영화의 후반부는 이제 감옥을 거쳐 파리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 ‘추상에서 구체로’라는 맑스의 변증법적 사유가 그러했듯 마르케의 카메라는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낮게 장착되어 파리의 거리들을 질주한다. 그리고 불현 듯 제시되는 파리 사람들의 얼굴들. 무언가 잔뜩 화가 난 얼굴들,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얼굴들. 이어지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내레이션. “슬픔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부자가 있을 수 없다. 감옥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 2012년, 7월 29일. 아흔 한 살의 크리스 마르케가 세상을 떠났다.(그는 1921년 7월 29일 생이다) 스스로 엄격한 좌파 사회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그는 1952년부터 총 52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그 중에는 유일한 극영화 < 환송대 >도 포함된다),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쿠바, 칠레의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기록들을 지원했으며(그 중에는 < 칠레전투 >의 파트리시오 구즈만도 포함된다. 실제로 <칠레전투>는 크리스 마르케가 보내준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편집작업을 도와준 쿠바의 이카익도 크리스 마르케가 연결해준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영상매체에 대한 놀라운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뉴미디어 아트도 선보였다. 다큐멘터리 영화사에 엄청난 획을 그었고 동료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는 은둔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남아있는 사진도 거의 없다. < 아름다운 5월 >은 그의 이후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이미지와 사유, 현실과 기억,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이전의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혁신과 방법론을 선보인 작품이었다. 지금 이 작품이 더욱 놀라운 것은, 1962년 5월 무작위의 파리 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과 사유는 2012년을 마감하는 대한민국에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거대한 정치적 권력과 게임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의식과 욕망이 포획되고 관리될 수 있는지, 이때 이 절망적 풍경 속에서 카메라를 든 자, 영화 감독, 아니면 크리스 마르케가 스스로 피력했듯 영화 에세이스트는 이제는 무엇을 사유하고, 무엇을 증언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망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그 이면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역사를 다시 쓰듯 기억을 다시 써야한다.” 크리스 마르케의 방법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