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
- 감독
- 클로이 자오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이렌느 비다드, 존 레디, 엘레오노르 헨드릭스, 제이샨 세인트 존
“나는 영화를 보러 간다기보다는 전례 없는 시간성을 즐기기 위해 간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래서 영화관에 자주 간다고 말이야” - 장 루이 세페르,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중 1. 영화는 처음부터 시간의 마술이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열차의 도착>을 처음으로 상영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시간의 마술사들이었다. 잘 알려진 일화지만 뤼미에르는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완성한 뒤, 자신의 공장(뤼미에르 형제는 카메라 부품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들이기도 했다) 사람들과 일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내 그것을 유료 공개하였다. 뭔가 흥미로운 볼거리를 보여주겠노라고 그들은 호객했고, 호기심에 휩싸인 사람들이 1프랑의 돈을 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카페에 인위적 어둠을 만든 뒤, 공간 정면에 시오따 기차역 사진을 크게 영사했다. 이 순간 사람들은 속으로 ’별거 아니군. 그저 커다란 사진일 뿐이야‘라며 실망했다. 그 시대, 확인되지 않은 볼거리를 위해 1프랑의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70여 년 전(1820년대 사진 발명)에 처음 등장한 ’사진 이미지‘에 낯설지 않은 중산 계급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정지된 사진 속 이미지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화적 매혹‘의 탄생이었다. 영화사 초창기를 기록하는 자료들에 의하면 이때 뤼미에르 형제는 의도적으로 ’정지된 순간‘을 연출하였다. 익숙하다고 간주되는 것에 ’시간‘의 마술을 부여함으로써 놀라움과 매혹을 연출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 눈 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가상의 세계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한 순간을 소환한 것이었다. 지나간 시간을 현재화하는 능력, 영화는 시간을 지배하는 예술이었다. 영화 편집에 관한 다큐멘터리 <컷팅 엣지>(2004)에 인터뷰어로 등장했던 영화 감독, 롭 코헨이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편집할 수 있기 때문 일거에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편집하고 싶어 합니다. 나쁜 일, 지루했던 일은 잘라버리고 좋았던 것만 더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요.”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지루했던 일상과 나빴던 일들을 송두리째 들어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통해 불가역적인 시간을 통제하고픈 욕망을 발현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물리적 시간에 감금된 ‘평범한 인간’에게 영화는 (적어도 창작자에게) 시간 지배자의 위상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이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는 오늘날 할리우드 감독들 중 가장 소란스럽고, 거창하며,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영화적 시간’에 대해 유희하는 인물이다. 늘 언제나 기대를 자극하는 멋지고 웅장한 트레일러를 선보이지만, 정작 본편인 영화는 늘 실망에 마지않는 유아적 영웅주의에서 멈춰서는, 그런 진부한 대작을 만들어낸다. < 인터스텔라 >(2014)와 < 테넷 >(2020)을 통해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병렬적인 세계의 차원과 열역학 엔트로피까지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란한 언사와 스펙터클의 제스처 바로 뒤편에서 그의 영화들, 특히 이번 영화 <테넷>을 지탱하고 구성하는 본질적인 장치들은 팍스 아메리카를 설파했던 80년대식 하드바디 영웅주의 서사에 묶여있다. 팀 버튼의 분열적 반영웅 ‘배트맨’을 초국적 자본의 스펙터클 하드바디로 전락시킨 < 배트맨 비긴즈 >(2005)는 물론이고, 2차 대전의 애국적 영웅주의를 설파했던 <덩케르크> 그리고 이번 영화 <테넷> 역시, 미국의 CIA 요원이 탐욕스러운 구소련의 악당에 맞서 제3차 대전을 막아내는 새로운 위인 서사에 불과한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 터미네이터 >(1984)를 물리학 용어로 재각색한듯한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적 스펙터클로서 시간을 재구성한다. 미래의 침입과 인버전, 역행하는 시간의 언캐니한 속도감. 화려한 오페라극장에 대규모로 동원된 관객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떨구며 수면으로 빠져드는 초현실주의적 모멘트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적 물질성에 입각한 세트 촬영의 지표적 이미지라 할지라도 그의 영화는 결국,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시간의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감을 창출하는 시간적 연쇄의 합리성으로 구성된 허구, 근대적 자본주의 권력과 질서를 인과론과 합리성의 체제 내에서 지각하고 수용케 하는 시간의 허구 말이다. 미래의 침입이라는 SF적 상상력이라면 이미 1962년, 크리스 마르케가 완성한 <환송대>의 영화적 체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포토 로망으로 호명된 이 영화는 정지된 사진 이미지의 연쇄와 단 한 순간 제시되는 움직이는 이미지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3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세계, 미래의 과학자들은 한 남자를 대상으로 시간여행을 실험한다. 그는 이미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과거의 공간, 죽은 자들의 시간으로 침입해가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금지된 사랑은 그를 실험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결국 그는 미래의 사도들에 의해 쫓기다 살해된다. 1958년에 공개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대한 오마쥬와 병렬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 이미지,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갔던 남자에 대한 기억과 흔적, 죽음과 소멸에 대한 놀라운 은유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이미 반세기 전 영화 역사에 등장해 시간에 관한 가장 매혹적인 사유와 이미지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이후 등장한 모든 영화는 <환송대>가 이미 성취한 예술적 경지 주변부를 배회할 수밖에 없다. 3.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늘 궁금하다. 예전 사사로운 리스트에 < 덩케르크 >(2017)를 언급하면서, 그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의 한 장면에 견주어 혹평을 했음에도 그 영화가 지닌 과감한 시간 배치의 모험은 흥미로웠다. <테넷>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서사와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진부하고 보수적이지만, 그는 어쨌든 할리우드의 막강한 자본력과 인력을 동원해 첨단의 영화를 물리적으로 직접 찍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첨예한 방식으로 그리고 동시대적 감각으로 영화를 통해 시간을 사유하고, 구축하고 그리고 압축할 수 있는 감독이기도 한 것이다. 맑스주의 학자인 데이빗 하비가 90년대 발표한 대표 저서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은 동시대 문화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시공간을 압축하고 사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흥미롭고 정치한 논리를 선보인다. 그중 그가 분석 사례로 제시하는 < 블레이드 러너 >(1982)에서 인조인간 ‘로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욕망하고 동기화하는 시공간 압축의 가장 첨예한 은유로서 분석된다. 로봇에게 부여된 4년의 작동 시간, 고도록 집약된 노동 능력,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축적된 인공지능 로봇의 기억과 감정, 추억과 연민, 공포와 분노 등은 우리가 무심하게 신격화하는 용어 ‘휴머니티’를 반성할 것을 촉구한다. 즉 ‘로이’는 당대의 자본주의 경제가 지향하는 시공간 압축과 기계화된 인간 노동에 대한 욕망의 상징이자, 탁월한 SF 영화의 기념비적 캐릭터이자,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중층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흥미롭다는 것은, 달리 말해 데이빗 하비의 방식처럼(혹은 랑시에르의 방식처럼), 그의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문화가 집결한 그곳에서 영화적 시간을 구축하고 욕망하고, 재현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지각하고 감각하도록 강요하는지 흥미로운 것이다. 즉, 영화 제작의 최첨단에 선 그가 반영하게 될 지금 세계의 모습, 첨예한 속도전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시간에 대한 감각, 일방향적 속도를 넘어 이제 모든 차원의 시간을 다 통제하고야 말겠다는 전체주의적이고 전능주의적인 신화, 그리고 그 시간을 서사화하고 스펙터클화하는 전시주의의 욕망.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그러한 흔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4. 다소 러프한 방식으로 ‘영화적 시간’을 정의하다 보면, 2019-20년에 선보인 영화들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감각과 욕망을 드러낸다. 그중에서 가장 아쉽고 이상해 보이는 영화는 샘 멘데스의 영화 < 1917 >(2019)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경이해 마지않는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와 함께한 이 작품에서 그는 이냐리투 감독의 < 버드맨 >(2014)과 스탠리 큐브릭의 < 영광의 길 >(1957)에서 보여준 형식적 실험과 주제 의식을 매우 지루하고 나이브하게 모방하고 반복한다. 폭격을 막기 위한 지령을 들고 목적지까지 질주하는 병사의 시간을 추적하는 이 작품이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이미 이냐리투 감독이 2014년, 뛰어난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벳츠키와 함께 선보였던 <버드맨>의 아류처럼 보이며, 전쟁의 불모함과 광기, 병사들에 대한 연민과 공포는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영광의 길>에서 선보인 참호전의 잔혹함과 기만성을 통렬하게 성찰했던 것에 전혀 가닿지 못한다.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에서 눈에 띈 또 다른 영화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와 폴 그린그래스의 <뉴스 오브 어 월드>이다. 이 두 편은 모두 1870년대 서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서부 역사의 결을 거스른다. 그러나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는 자상한 백인 중년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톰 행크스를 서부로 데려간 것 이외엔 아무 특이점이 없다. 반면 켈리 레이차트의 <퍼스트 카우>는 그녀의 전작 < 믹의 지름길 >(2010) 못지않게 완연히 새로운 서부의 시간과 사건을 기록한다. 서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가난하고 비루한 백인 남성과 중국계 남성. 이들이 살아가는 서부의 시간과 공간은 정복과 개척으로 포장된 승리의 서사도 아니고, 흑과 백, 문명과 야만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선을 긋는 신화적 공간도 아니다. 빈곤과 공포 속에서 오직 생존하기 위해 서부를 배회해야 했던 가련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연민과 기억,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상기하고자 하는 영화이다. 그 외 201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마티 디옵 감독의 < 애틀란틱스 >(2019)는 매우 심플하지만 시선의 지형과 주체를 바꾼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시간과 초현실적 시간(죽은자의 시간)을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강렬하다. 이주 노동, 난민 등의 문제는 언제나 유럽 1세계 백인의 관점에서 서술되곤 하였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난민 문제를 포용하거나, 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문제시하거나, 혹은 휴머니즘과 낭만적 서사를 결합하거나. 그러나 마티 디옵은 1세계의 시선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혹은 난민의 대지 바로 위에서, 그들 계급의 시선으로 ‘이주’와 ‘착취’를 묘사한다. 경제적으로 불모한 땅에 사는 젊은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젊은 여성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을 청년들이 자취를 감춰버린다. 영문 몰랐던 여인들에게 들려온 소식으로는 그들 모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바다를 건너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들의 비통함과 부재의 흔적들. 그러던 어느 밤. 청년들이 돌아온다. 더 이상 산자가 아닌, 죽은 자의 영혼이 되어 그들은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의 육체에 강신된다. 그리고 강신된 육체가 향하는 곳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고향의 착취적 자본가들. 바다 저편에서 죽은 자가 귀환해 그들의 원통함을 해결하는 것은 흡사 존 카펜터의 호러 < 안개 >(1980)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마티 디옵의 <애틀란티스>는 오컬트 호러라는 장르적 포뮬라나 컨벤션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정학과 계급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다. 새로운 ‘제 3영화’적 포지션 속에서 포개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시간은 처연하면서도 인상 깊은 계급 정치학을 피력한다. 2020년, 압축된 시공간의 논리를 보다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냄으로써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은 샤디프 형제의 < 언컷 젬스 >(2019)일 것이다. 그들의 전작 < 굿타임 >(2017)에 이어 숨 가쁘게 이어지는 사건과 사운드, 대사, 움직임 등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모두의 찬사를 받았던 아담 샌들러의 연기는 곤혹과 절박, 신경증과 불안, 허세와 짜증에 관객까지 연루시키는데 여지없이 성공한다. 5. 그러나 2020년 영화 중 가장 정서적으로 공명할 수 있는 시간 이미지를 선보인 작품은 클로이 자오의 영화 < 노마드랜드 >(2020)이다. 사실, 사사로운 리스트를 제출한 이후에 접하게 된 이 영화는 매우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를 기억에 각인시킨다. 그것은 주인공 프랜시스 맥도맨드(극 중 캐릭터, 펀)가 텅 빈 사막지대를 배경으로 무심하게 서 있거나 걸어가는 옆모습을 클로즈업으로 팔로잉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유목적 삶을 선택한 노년의 여성을 따라간다. 60대 여성 ‘펀’은 낡은 자동차 한 대에 자신의 모든 짐을 싣고 1년 단위로 노동과 공동체를 찾아 이주하며 살아간다.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묘사하지 않는 이 영화는 다만 유목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 얼굴, 회한, 소망 등을 가끔씩 응시할 뿐이다. 만들어진 모든 쇼트들에 유기적인 사건과 시간의 의미를 채워놓고자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과 이 영화가 대비되는 지점은 이 영화가 모든 쇼트들로부터 시간의 강박을 지워버리고, 특정 의미를 채우려 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며, 무한히 열어 놓는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난 직후, 우연히도 읽게 된 글이 있었다. 앙드레 바쟁이 자크 타티의 영화 < 윌로씨의 휴가 >(1953)를 분석하며 썼던 평론 “윌로씨와 시간”.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윌로씨가 1년 중 10개월은 사라졌다가 7월 1일, 임시적인 시간이 형성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나타남과 사라짐, 그러한 반복의 시간은 무용한 행위가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리듬을 지닌 ‘의식의 시간’이라고 바쟁은 명명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시간의 방향은 원인에서 결과로, 시작에서 끝으로 향해 간다. 하지만 <윌로씨의 휴가>는 이런 것들과는 반대로 나아간다. 아마도 시간은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소재가 아니라 이 영화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앙드레 바쟁, “윌로씨와 시간” 중) 바쟁은 따띠가 창출한 ‘윌로씨의 시간’에서 그가 영화 속 근대 사회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 감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영화는 윌로라는 캐릭터를 통해 근대적 시간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과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마드랜드>가 감히 자크 타티의 영화에 비견될 수 있겠느냐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반복 관람한 직후, 우연히 접한 이 영화의 리듬과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 이외에 다른 것을 갈구하지 않는 ‘펀’의 무심한 시간들과 표정은 <테넷>에서 묘사된 필사적인 그 모든 것들을 가볍게 눌러버리며, 놀라운 정서적 공명을 만들어낸다. 특정한 방향으로 질주하길 재촉하는 시간 이미지들에 대비되어 <노마드랜드>에서 프랜시스 맥도맨드의 얼굴 이미지가 선택하고 열어놓은 시간은 그 모든 시간에 대한 강박을 털어버리게끔 하는 것이다. 장 루이 세페르의 말처럼, 영화는 전례 없는 여러 시간을 체험하는 여행이다. 그 시간은 때로는 영화 창작의 주체가 치밀하고 꼼꼼하게 채워 넣은 플롯들과 서사의 시간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들어가 관람하는 극장이 존재하는 동시대적 시간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억을 끄집어내어 영화라는 외부적 이미지와 접촉해 만들어내는 감각 경험적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테넷>부터 <퍼스트 카우> 그리고 <노마드랜드>까지, 영화는 그 모든 다양한 시간에 대한 체험과 기억, 욕망과 불안을 모두 열어놓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영화가 구성하는 시간의 매혹이다.
실사영화 < 알라딘 >(가이리치, 2019)이 최근 1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오래전 2D 애니메이션 < 알라딘 >(데이빗 드웨이츠, 1992)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지니를 실사화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봤지만 그런 우려를 떨쳐낼 만큼 윌 스미스의 매력도 충분했다. 물론 흑인 배우가 지니를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일부 팬들의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알라딘>이 뮤지컬로 만들어질 때 흑인 배우 제임스 먼로 아이글하트가 이미 멋지게 지니 역을 소화한 바 있고, 그를 통해 토니상 남우조연상까지 받았다. 인종 문제 얘기를 하자면, 최근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역시 <인어공주> 실사영화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가 인어공주 역으로 낙점된 일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알라딘>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아랍 지역을 배경으로 삼고 있을 뿐 램프의 요정의 어떤 인종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알라딘>이 아랍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원전에서는 배경이 중국이며 알라딘도 중국인이다. <인어공주> 역시 원작자가 덴마크인이고 북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 인어공주는 인간과 다른 종족이기에 피부색이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전세계 영화의 중요한 경향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PC(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고려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PC란 인종, 종교, 성별 묘사 등에 있어 그 어떤 편견과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유색 인종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무분별하게 연기하는 인종차별적 ‘화이트워싱’(whitewashing) 현상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크다. 지난 2017년에는 한국계 미국 배우 존 조를 < 마션 >(리들리 스콧, 2015) 등 여러 영화의 포스터에 합성해 화이트워싱에 반발했던 캠페인 ‘존 조 주연시키기(Starring John Cho)’가 SNS를 뜨겁게 달궜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에서 주연을 맡기 힘든 아시아계 배우들의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 서치 >(아니쉬 차간티, 2017)는 그동안 백인 배우들의 전유물이었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버지 역할을 존 조에게 맡김으로써 미국영화 속 아시아계 배우의 활동 범위를 한층 더 확장했다. 감독 또한 인도계 미국인인 아니시 차간티이며, 자신이 성장해온 미국의 아시안 커뮤니티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개봉하여 제작비 대비 7배라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보여주며 북미 박스오피스를 강타한, 제작진부터 배역까지 아시아계로 꽉 채워진 <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존 추, 2018)의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앞으로는 내년 개봉 예정인 <뮬란>에 화이트워싱 없이 유역비가 주연을 맡고, 마블 최초의 아시안 히어로 영화 <샹치>가 제작 준비 중이다. 마블 최초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 < 캡틴 마블 >(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2019)을 통해 안나 보덴이 마블 최초의 여성감독이 된 이후, <샹치>보다 앞서 2020년 11월 6일을 개봉일로 잡은 <이터널스>는 마동석 배우의 출연만큼이나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가 마블 최초의 비백인 여성감독으로 메가폰을 잡아 눈길을 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다시 <알라딘>으로 돌아와, 과거 애니메이션과 비교하면 실사영화의 자스민 공주가 궁의 생활을 별로 답답해하지 않는 것 같아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답답한 궁에서 살고 싶지 않아!”라는 과거 자스민의 ‘선언’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수많은 공주들 중에서 처음으로 ‘NO!’라고 말한 획기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사영화의 자스민은 궁을 떠나려는 게 아니라 그냥 훌륭한 술탄(왕)이 되려고 한다. 과거에는 아버지 술탄이 왕자가 아니어도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끔 법을 개정했지만, 이제는 “네가 아그라바의 미래다. 술탄의 지위를 너에게 넘기겠다”라며 딸이 직접 술탄이 되고 법을 개정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게끔 한 것이다. 이런 변화에 더해 최근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의 <인어공주> 캐스팅에 이르기까지, 디즈니의 오랜 팬들 중에는 디즈니의 ‘과도한 PC 강박’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들도 꽤 많다. 하지만 그들이 집중적으로 불편함을 토로해온 지난 10년의 시간이,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가장 고도의 성장을 보여준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 마블과 픽사와 루카스필름까지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는 디즈니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컨텐츠 제국이 됐다. 오래전 월트 디즈니는 무려 23개의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난 이 트로피보다 돈이 더 좋다”고 말해온 사람이었다.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남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먼저 시도하고 돌파하며, 언제나 새로운 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디즈니 입장에서 말 그대로 PC는 돈이 되는 주문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그것이 중요하다. PC한 것을 추구할 때 좋은 평가도 얻고 돈도 번다는 것을 세계영화계 모두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로데오 카우보이 The rider >(클로이 자오, 2017)를 보는 동안 몸이 아팠다. 이건 영화의 인상에 관한 수사가 아니라, 물리적 경험의 차원에 대한 표현이다. 그 감흥은 이 세계가 특별한 육체성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후에야 나는 인물을 연기한 이들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 브레디 블랙번은 실제로 로데오 카우보이로 활동하다 부상을 당했던 브레디 잰드로고, 그의 아버지와 여동생으로 등장하는 이들은 잰드로 가족이며, 스타 카우보이였으나 낙마 사고로 장애를 입은 레인은 같은 과거를 가진 레인 스콧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연기에 모방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느껴진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느낌은 그들의 연기가 숙련되고 능숙하다는 평가와는 좀 다른 맥락의 문제다. 연기 경험이 없는 자가 영화 안에서 자신으로 분해 과거에 겪었던 사건을 재연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효과가 따르는 건 물론 아니다. 요컨대 브레디 블랙번과 브레디 잰드로가 동일 인물이라고 해서 실제 육체와 극의 육체가 완전히 일치하기는 불가능하다.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에 진짜가 들어오는 순간 오히려 둘 사이의 간극이 돌출된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캐릭터를 분석해서 서사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일반 배우들과 비교한다면 이 경우 ‘나’는 영화 안에서 ‘나’를 가장 어색하게 흉내 내는 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로데오 카우보이>가 성취한 자연스러움은 신기하고 기이한 것이다. 감독의 뛰어난 역량이나 이 영화로 데뷔한 이들에게 잠재된 배우로서의 재능 같은 것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앞서 말했던 <로데오 카우보이>의 ‘특별한 육체성’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이를테면 레슬러도 음악가도 무용가도 아닌 로데오 카우보이의 세계라는 점이다.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현실을 재연하는 연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그들의 실제 직업적 활동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감독은 로데오 카우보이라는 정체성을 영화의 몸으로 반복하고 싶어 한다. 잘 알려져 있듯, 로데오는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나 소를 가장 잘 타는 사람을 선발하는 일종의 스포츠 혹은 엔터테인먼트다. 흩어진 소들을 직접 한 곳으로 모는 카우보이의 일거리가 점차 줄면서 로데오는 공식적인 경기가 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울타리가 쳐진 작은 공간에서 조련되지 않은 말 위에 올라 최대한 오래 버티는 행위. 그래봤자 몇 초 안에 승부가 판가름 나는 말과 인간의 싸움. 로데오를 보다 보면 개인적으로는 짜릿함보다는 씁쓸함과 비애감이 먼저 찾아온다. 그건 아마도 사라진 서부의 자리와 의미를 더없이 인공적인 행위를 통해 오직 육체만으로 가까스로 좇고 있다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말을 타고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거나 황야로 근사하게 사라지는 카우보이가 아니라, 저 비좁은 곳에서 오래 버티는 쇼로 단시간의 흥분에 도취된 카우보이의 형상. 말은 카우보이의 조력자가 아니라, 이겨야만 하는 대립항이 된다. 아니, 말은 가짜 적이 되어 카우보이와 함께 ‘서부의’ 연극을 수행한다. 로데오의 장소는 자기 죽음을 외면하는 서부의 시간이 극단적인 오락의 형태로 돌아온 곳처럼 보인다. 로데오 카우보이가 야생마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몇 초는 말하자면 그 환상이 유지되는 짧은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카우보이가 몸을 다쳤다. 몸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로데오 카우보이가 서부의 환상을 구현하거나 그 안에 남아있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물음이 <더 라이더>의 시작점이라고 짐작한다. 영화는 로데오 경기장에서 밀려난 그를 서부극의 행위자를 연기하는 장소로 부른다. 그곳은 고전적인 서부극을 지탱하던 장르적인 구조와 질서가 사라지고 다친 카우보이와 거친 말만 남은, 달리 말해, 실은 서부극이 성립되기 어려운 세계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미 사라진 서부의 시간을 영화의 몸으로 환기하며 불러내기 위해서는 로데오라는 환상만큼이나 간절한 환상의 활동이 필요하다. 현실의 로데오 카우보이는 육체적 충돌을 피해야만 그 환상을 유지할 수 있지만, <더 라이더>에서 그 환상은 육체적 충격을 통해서 지연될 수 있다. 그 사실이 이 영화에 고인 슬픔의 기원인 것 같다. 로데오 카우보이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들의 경기 장면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찍어둔 영상으로 나올 뿐이다. 그 영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몸은 로데오 쇼에 임할 수 없을 만큼 이미 망가진 상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우리는 그들의 육체적 상흔을 마주한다. 브레디는 머리 한쪽에 붕대를 감은 채 등장해서 붕대를 고정시키기 위해 박은 철심을 뜯어내는데, 수술 부위엔 피가 맺혀있다. 사고 후유증으로 그의 손가락에 마비가 와서 말고삐를 제대로 쥐지 못하는 장면들도 종종 보인다. 그를 찾아온 카우보이 친구들은 로데오를 하다 갈비뼈가 부러진 경험이나 뇌진탕이 일어난 순간들을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며 “고통에 굴복해서는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웅과 다름없던 레인의 모습이 나올 때, 우리는 그 다짐의 비극적인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고 말도 하지 못하며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생각을 전달한다. 이전 장면에서 친구들은 그의 재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며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했지만, 레인의 장면은 그 염원을 아프게 무력화한다. 그러니까 로데오의 활동이 아니라, 그것에 의한 육체적 충격의 결과, 혹은 여전히 진행 중인 충격의 잔상이 이 세계를 구성한다. 카우보이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환상을 지탱하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브레디가 데려온 아폴로는 조련을 거부하는 말이었지만, 점차 브레디의 손길에 익숙해진다. 더 이상 로데오 경기에 임할 수 없는 브레디에게 아폴로는 카우보이로서의 마지막 소망이 투영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말이 갑자기 사라지고 다리가 심하게 찢어져 피를 흘리는 상태로 발견된다. 아폴로가 탈출을 시도하다 철창에 다리를 찔린 것으로 생각되나, 영화가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대신 다리를 다친 말이 회생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냉정히 상기시키고는 브레디의 아버지로 하여금 총을 쏴 죽이게 한다. 말의 급작스러운 부상과 영화가 멀리서 지켜보는 죽음의 광경은 말의 운명을 극화하며 그것을 서부극의 시간과 풍경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말이 달리며 생성하는 행로가 아니라 말이 쓰러진 자리에 생긴 구멍을 응시한다. 어떤 가치나 사건이 아니라 충돌, 찢김, 구멍이 <로데오 카우보이>의 시간을 버티게 한다. 육체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한계에서 육체성을 체념하지 않기 위해 이 세계는 육체에 충격을 각인하는 방식으로 존립하려 한다. 이를테면 브레디는 로데오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한다. 그의 등 한가운데에 레인의 이름이 새겨지는데, 그건 회복할 수 없는 몸을 가진 로데오 카우보이가 육체적인 감각을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하고 막다른 방식이다. 로데오에 다시 도전하려던 시도가 좌절된 다음, 브레디는 레인을 찾아가서 그 문신을 보여준다. 그런 브레디에게 레인이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자 브레디는 휠체어 앞에서 레인의 손을 잡고 마치 말의 고삐를 쥐고 로데오 경기를 하는 것처럼 움직여본다. 그 간절한 동작에 담긴 마음을 실현해주듯, 영화는 하얀 말을 타고 벌판을 가로지르는 브레디의 장면으로 전환되며 끝난다. 서로 마주 보며 과거의 육체적 기억을 함께 더듬는 두 남자의 장면에는 로데오 카우보이의 표식들, 이를테면 말도, 안장도, 로데오 경기장도, 무엇보다 육체적 부딪침의 격렬한 현재성도 없다. 오직 두 남자의 부자유한 몸과 서로의 몸을 주시하는 눈빛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과 인간이 공존하며 함께 운동하는 마지막 장면의 서정은 앞선 브레디와 레인의 경직된 몸의 장면이 꾸는 꿈일 것이다. 언젠가 도래할 미래도 실현될 희망도 아니라 불가능한 육체가 접속한 불가능한 환상. 이 끝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은 그래서 더없이 비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