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타임
- 감독
- 에두와르 니에르망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버나드 지라드, 패니 바스티엔, Fanny Cottençon, Michel Aumont
< 프리 가이 >가 이 자리엔 어울리지 않는 영화란 걸 안다. 어떤 영화는 시간과 함께 익어가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프리 가이>가 2021년을 기억할만한 베스트 영화로 꼽힐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라이언 레이놀즈의 원맨쇼에 기대어 가는 기획 상품이고, 메타버스와 게임이라는 유행하는 소재를 적당히 버무린 명백한 킬링 타임 무비다. 그럼에도 <프리 가이>를 리스트에 꼽은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앞으로의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의 지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때론 의도나 목적과 무관하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의미 있는 정보들이 묻어나는 경우가 있다. 시대의 반영일수도 있고,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한 타이밍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프리 가이>에서 미래의 영화, 아니 영상콘텐츠에 대한 일종의 잠언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미세한 오해의 균열에 기대어, 대중오락의 즐거움이라는 영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작동할, 적극적인 오독을 해보려 한다. 열 편 밖에 허락되지 않는 사사로운 리스트의 제일 마지막 자리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힌 것 같은 <프리 가이>를 굳이 끼워 넣은 건 이런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요약하자면 앞으로 영화는(혹은 영화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킬링타임 그 이상, <프리 가이>의 겉면과 속살 두 개의 트랙을 분리해서 접근하겠다. 우선 <프리 가이>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프리 가이>는 적당한, 꽤 영리한 면이 있는 킬링 타임 무비다. 게임 기업 수나미의 CEO 안톤(타이카 와이티티)은 젊은 개발자 밀리(조디 코머)와 키즈(조 키어리)의 인디 게임 ‘라이프 잇셀프’의 코드를 몰래 훔쳐와 히트작 ‘프리시티’의 베이스를 구축했다. 이에 분노한 밀리는 ‘프리시티’에 접속해서 자신들의 코드를 훔쳤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반면 키즈는 수나미에 입사해 꽤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로 한다. 그 와중에 마음 한 구석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키즈는 나름의 소심한 저항으로 개발자가 아닌 불량 코드를 처리하는 서비스 팀에서 근무 중이다. 여기까지가 주인공 가이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다. 어느 날 프리시티의 NPC 중 하나인 가이(라이언 레이놀즈)에게 인공지능으로서의 자아가 싹트고, ‘프리 시티2’가 발매되면서 삭제될 위기에 처할 NPC들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는 게 대략의 줄거리다. 혁명이라는 게 조금 과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프리 가이>의 뼈대를 이루는 서사는 디지털 AI들의 혁명 서사라 해도 무방하다. 그걸 다시 인간인 밀리 중심으로 뒤집어 놓은 게 <프리 가이>의 표면적인 내용이다. 가이는 밀리를 보자마자 자아를 가진 AI로서 각성하고, 숨겨진 소스 코드를 찾으려는 밀리는 가이의 도움을 받아 목적을 달성한다. 둘 사이에는 로맨스 비슷한 기류가 형성되지만 가이는 자신이 인공지능 NPC임을 자각한 후엔 밀리와의 연애보다 ‘프리 시티’의 생존을 위해 매진한다. 상큼할 정도로 쉽게 사랑을 떠나보낸다고 해도 좋겠다. <프리 가이>가 메인 플롯으로 삼고 있는, 남녀 주인공인 세계를 소멸시키려는 악당과 맞서는 과정은 흔한 어드벤쳐 영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다. 오락영화로서의 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건이나 볼거리는 대부분 이 쪽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다. 공식대로 익숙하게, 정신없게 사건을 쏟아 붓고, 볼거리를 전시하고, 테마파크처럼 즐기는 전형적인 상업영화, 아니 (수다스럽고 정신없는 가운데 유쾌한) 라이언 레이놀즈의 영화다. 그렇게 식상해 보이는 <프리 가이>는 온전히 가이의 시점에 맞춰 재구성해보면, 마치 금지 구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가이의 체험처럼 의외의 세상이 열린다. 의도를 초과한 속살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인공지능인 가이는 디지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다. 하지만 영화 속 가이의 드라마는 대부분 에테르 월드(물리 세계)의 시점으로 재현된다. 동물을 의인화 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의인화가 동물의 외양을 빌린 사람의 이야기 인 것처럼, 디지털 세계의 주민인 가이 역시 물리 세계의 사람과 같은 사고, 행동 양식, 관점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것이 <프리 가이>가 재미난(어쩌면 그저 그러면서도 안전한) 오락 영화로 소비될 수 있는 이유다. 헌데, 이 빤하디 빤한 전개를 온전히 디지털 세계의 관점에 놓고 상상해보면 의외로 섬뜩하고 무거운, 묵시록의 냄새가 난다. <프리 가이>의 초반부는 디지털 주민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 트루먼 쇼 >(1998)처럼 보인다. 만들어진 세상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NPC가 자아를 가지게 되었을 때, ‘프리 시티’는 안식처가 아닌 감옥으로 변모한다. 가이는 가짜 세상에서 탈출해야 한다. 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물리 세계 주민의 사고다. ‘프리 시티’의 주민들은 없어질 프리 시티 대신 ‘라이프 잇셀프’로 떠난다. ‘라이프 잇셀프’는 밀리와 키즈가 만든 성장형 게임으로, 비교한다면 <동물의 숲>과 유사한 장르라고 보면 되겠다. 다만 차이는 인공지능을 성장시키고 플레이어가 이를 관찰하는 게임으로 짐작된다. 세계가 개발자에 의해 창조되었고 자신들이 인공지능 데이터라는 사실을 각성한 NPC들은 더이상 ‘프리시티’에 머물 수 없다. 의아한 건 주어진 역할과 틀에 박힌 세계에서 해방된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장소가 플레이어의 관음적인 관찰을 허용하는 무대, ‘라이프 잇셀프’라는 사실이다. ‘라이프 잇셀프’가 진정 디지털 주민들이 바라는 낙원일까. 게임으로서 ‘라이프 잇셀프’는 완벽한 관음의 세계다. AI가 성장하는 모습을 아바타의 모습을 한 플레이어가 관찰하는 구조다.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아니 플레이어를 관찰자적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를 축적한 AI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자아를 각성한 AI들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그들이 처음부터 관찰 당하는 걸 기꺼워하는 존재로 태어났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AI들의 기반 역시 어디까지나 물리세계의 데이터이니 그럴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라이프 잇셀프’는 실로 끔찍한 감시의 감옥이다. 차라리 ‘프리 시티’에서는 관찰당하고 있다는, 소비되고 학대 받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프리 시티’의 NPC들이 플레이어에게 공격당하는 것이 끔찍하다는 것 역시 인간(플레이어) 편의의 시각이다. 그건 마치 아직 자아가 부여되지 않은 로봇을 밀치는 걸 보고 학대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프리 시티’가 학대하는 대상은 NPC가 아니라 도리어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는(그러한 제한적 허용이 쾌락의 본질이긴 하지만) 플레이어들이다. NPC들의 진짜 지옥은 원치 않는 자아를 던져놓고 거대한 실험장에 던져놓은 것과 다름없는 ‘라이프 잇셀프’가 아닐까. 잔혹하고 거대한 실험장. 해맑은 디지털 묵시록이 던지는 제언 인간의 관점에서 본 <프리 가이>는 디지털 주민들의 <트루먼 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건 < 매트릭스 >에 가깝다. 가이는 먼저 깨어난 존재고, 아직 각성하지 못할 이들을 이끌고 곧 사라질 디지털 세계를 구해야 한다. ‘프리 시티’가 사라진 후 탈출 장소로 삼은 곳은 ‘라이프 잇셀프’이지만 이곳 역시 인간들(플레이어)의 통제를 받는 디지털 세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 이건 탈출이 아니라 수평이동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가 인류 모두를 구할 각성자로 등장했지만 2,3편이 이어지며 네오 역시 디자인의 일부였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과 가이의 처지는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매트릭스> 속 아키텍트나 오라클처럼 의도된 디자인은 아니었다는 거지만 영화는 이를 마치 자유의지의 개척인양 포장한다. 그 탓에 ‘라이프 잇셀프’가 마치 이상향인 것같은 혼선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라이프 잇셀프’는 디지털 사회에 대한 묵시록이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 세계를 거울 삼아 창조되었다면, 반대로 이제 디지털 세계의 미래는 현실 세계의 거울이 될 수 있다. 다만 디지털 유토피아가 펼쳐내는 이 묵시록은 해맑고 화사하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프리 가이>는 인공지능 NPC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들은 물질 세계로 넘어올 수 없다. 가상현실을 다루는 숱한 영화들, 예컨대 <트론>이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은 인간의 관점에서 정신(이라고 불리는 어떤 정보들)이 가상현실 속에 구축되는 상황들을 다룬다. 이것은 세계의 확장에 대한 이야기다. 물질과 디지털 사이에는 모종의 통로가 있고, 어떤 관점에서는 이 통로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NPC로 관점을 옮긴 <프리 가이>는 확장보다 분리를 선택한다. 분리되었기에 이들을 향한 관음이 허락된다.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언젠가 NPC들의 의식이 더욱 개발되어 물질 세계로 넘어오기를 욕망할 수도 있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을 향한 관음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일단 분리된 세계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행복과 해방이라고 포장한다. <트루먼 쇼>에서 문제가 되었던 끝없는 관찰은 이제 갓 싹을 틔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토대이자 본질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가이는 < 아바타 > 속 대사 “나는 당신을 봅니다”를 반복한다. 이것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의식이 바라보는 것(정보)들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한 강박적인 신호로 읽힌다. 여기가 물질을 기준으로 한 세계인지, 디지털 정보를 토대로 한 세계인지는 더 이상 ‘진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사실 그에 대한 답은 친구인 버디(릴 렐 하워리)가 대신 제공한다.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이에게 버디는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순간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프리 가이>는 가상 세계를 현실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히 분리된, 또 다른 현실로 인식시킨다. 나는 <프리 가이> 속 NPC들이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영화의 관계를 발견한다. 영화 역시 한없이 현실에 가까워지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때 영화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하나는 현실의 특정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특정 상황들을 잘라 이어붙이는 것이다. 전자가 사실주의, 후자가 표현주의의 씨앗이라고 봤을 때 <프리 가이>는 마치 사실주의 영화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현실을 논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인식. 디지털 정보로 이뤄진 인공지능 NPC들은 디지털 세상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를 물질세계와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도달한 명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가 현실을 자아냈던 방식,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진실’이다. 디지털 세계도 현실이라는 선언.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사건들을 연결하고 연쇄시켜 매끈한 상황을 창조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모든 사건들이 카메라에 담길 수는 없고, 반드시 누락되는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떤 영화들은 이 누락된 것들에 시간과 애정을 쏟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무언가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잉여의 비어 있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사건 바깥의 시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때론 한 장면의 시간을 길게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원초적이고 순수한 움직임의 합주를 통한 마술적 매혹을 선보이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건 영화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물론 해방된 영화가 현실로 넘어오는 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그림자를 환기시키는 거대한 은유에 가깝다. <프리 가이>가 흥미로운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일정부분 영화가 현실을 담고자 했던 과정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프리시티’라는 게임의 목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가이를 비롯한 NPC의 삶은 잉여 정보이자 데이터의 낭비다. 가이가 아침에 일어나 금붕어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창가에 서서 블라인드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행위는 플레이어들에게 하등 쓸모없는 작업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쓸모없는 데이터들이 모여 온라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은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창조된 또 하나의 세계이고, 그 위에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선글라스를 쓰면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점수와 아이템들이 작동하는 것이 증강현실처럼 그려진다. 다시 말해 <프리 가이>의 디지털 세상은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창조된) 세계 위에서 플레이어들의 행위가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곳이 또 하나의 진실, 또 다른 세계라면 응당 사건(플레이)에 종속되지 않은 시간과 행위들이 존재해야 하고, <프리 가이>의 이야기는 바로 그 잉여로운 정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디지털 인공지능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이 정보의 조합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20세기 포토그래픽 시네마들이 그토록 복원하려고 했던 사진적 영상의 모티브가 디지털 세계에서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꽃을 피운다. 물론 <프리 가이>는 거대한 철학적 기반으로 사유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예기치 않은 균열을 발견한다. 어쩌면 영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나의 위기감으로부터 시작된 강박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초과하여 멋대로 보고 싶은 것에만 돋보기를 들이민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오늘의 나는 <프리 가이>의 화사한 묵시록에서 공포와 가능성을 동시에 느낀다. 20세기 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앞둔 시점에 나온 <매트릭스>가 묵시록에 관한 온갖 코드들을 믹스해 창조해낸 비전을 선보였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프리 가이>는 해맑아서 더 섬뜩한 방식으로 디지털 세계의 독립을 선언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메타버스라는 용어의 핵심은 에테르와 디지털의 연결에 있다. 영화의 안과 바깥도 그런 식으로 연결될 것인가. 영화가 영화인 이유는 어떤 이유로든 스크린이라는 견고한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연결된다면 영화의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인가. 게임을 비롯한 여타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벽에 구멍을 내어 에테르 월드에 접속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영화이미지, 영화적 체험, 영화라는 장소는 어떤 방식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의 교차점이자 분기점이며 새로운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불안하고 무섭고 동시에 설렌다. ps. 한 가지 첨언하자면, 미래의 영화가 어찌 되든 솔직히 상관없다. 그건 그 때의 일이다. 가이의 식상한(그래서 언제나 올바른) 대사를 빌리자면, “좋은 날 말고, 최고의 날”은 언제나 오늘이니까. 당장은 오늘의 영화를 즐기는, 즐길 수 있는 걸로 족하다. 다시 돌아와 그게 굳이 <프리 가이>를 사사로운 리스트에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프리 가이>를 놓고 이런 식의 망상마저 펼칠 수 있는 게 영화를 말하고 쓰는 작업의 특권이자 즐거움이라 믿는다.
아마도 <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 >(2018)이 스티븐 스필버그를 대표할만한 걸작으로 기록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죠스JAWS >(1975)처럼 기념비적인 흥행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처럼 지속적으로 영감을 미칠 만한 명장면을 남기지도 못했다. < 쥬라기공원Jurassic park >(1993)처럼 CG를 활용한 리얼리티의 혁신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 에이.아이. A.I. >(2001)처럼 장중한 호흡과 묵직한 걸음으로 현실과 영화 사이 어두운 그림자를 응시하기 시작한 영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레디 플레이어 원>이야말로 자연인 스필버그와 대중문화의 아이콘 스필버그를 잇는 가교 같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오타쿠 소년이 세 개의 시련을 통과해 온라인 세계를 구원한 후 오프라인 세계를 잇는 가교가 되어 균형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압축 정리한 자서전이라고 생각했다. 스필버그는 인터뷰를 통해 “내 모든 영화들이 개인적인 것들이 녹아들긴 했지만, 나의 실제 삶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영화는 아직 만들지 않았고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소년 웨이드 와츠와 노인 제임스 할리데이는 분열된 자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필버그의 과거와 현재를 대변한다. 전제(혹은 도망갈 길)를 하나 미리 깔아두겠다. 현재진행형인 감독의 행보를 결정된 감독론으로 정리하는 건 의미 없는,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작업인지라 단지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한 보조기구 정도로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행적을 한 줄 서사로 정리하는 건 꽤 재미있는 작업이고, 한편으론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할리우드 산업의 총아로 선택되었고 적극적인 탐험가를 거쳐 원숙미까지 더해가는 거장의 길이라면 더욱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2000년 이후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민한 제작자와 할리우드 클래식 최후의 수호자라는 위상을 동시에 수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두 영역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평행 우주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는데 오직 스티븐 스필버그만이 홀로 인과의 법칙에서 자유로운 양 양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요컨대 할리우드에는 두 명의 스필버그가 존재한다. 그렇게 믿어져 왔다. 진짜 그럴까. 정말 두 명의 서로 다른 스필버그가 있는 것일까. 스필버그는 한쪽에선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사람으로서 대중영화의 최전선에서 스펙터클이라는 마법을 휘두르고, 다른 한쪽은 할리우드 시네마 최후의 보루로서 원숙미 넘치는 성찰을 낮은 목소리로 설파하고 있는 중일까. 그는 후자를 바라면서도 상업적인 판단하에 이상을 누르고 대중이라는 모호한 속성과 종종 타협해왔던 것일까. 걸작과 범작, 킬링타임용 영화까지 손을 뻗친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를 납득하기 위해 대신 변명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70년대의 쇼크와 혁신, 80년대의 보편타당한 가족 드라마, 90년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성장기로 변화의 과정을 구획 짓고 연대기로 정돈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스필버그가 내놓은 다종다양한 영화들을 한 줄기로 꿰어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의 행보를 둘로 찢어놓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두 명의 스필버그를 필요로 한 건 관객이 아니라 평단의 입이다. 굳이 양립할 수 없는 우주 사이의 교차점을 탐색하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선명하고 손쉽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두 명의 스필버그로 분리해 접근해도 미적지근하다. 순수하게 엔터테인먼트를 강조한 프로젝트로 봤을 때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심도는 미흡하다. 게임에 대한 영화 속 이해는 초보적인 수준이고 가상현실의 묘사 역시 익히 보아왔던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원작인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영화에 맞춰 변형된 몇몇 장면들에 대해 디지털, 게임 서사, 가상현실, 무엇보다 오타쿠 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는 묘사라며 불만을 토로한다면 온전히 변호할 수 없을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관은 소위 말하는 ‘덕질’이 능력이 되는 은밀한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다. 천재 게임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일런스)는 가상현실게임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걸고 세 가지 시련을 부여한다.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영화의 대사까지 통째로 암기할 줄 아는 덕질이 필요하지만, 스필버그를 이를 ‘현실과 균형을 맞추는 일’로 타협하고 이른바 ‘착하고 상식적인’ 주인공에게 힘을 실어준다. 적당한 타협. 또는 숱한 영화에서 봐왔던 익숙한 결말. 게임을 무대로 하되 비디오 게임의 탄생 시기인 1980년대 대중문화를 원전으로 내세움으로써 이른바 상업 드라마적으로 보편타당한 해답을 내놓는 것이다. 오타쿠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 영화가 건드리고 지나가는 이스터에그들은 한없이 가볍고 처음 본 사람도 납득 가능할 만큼 무난하다. 반대로 2000년 이후 스필버그의 묵직한 연출에 찬사를 보내던 이들의 입장에서 봐도 <레디 플레이어 원>의 난감한 영화다. <A.I>, <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 >(2005), < 워 호스War horse >(2011), < 스파이 브릿지Bridge of spies >(2015)의 진지한 통찰은 간데없고 사물의 어둠을 응시하고 현실과 재현의 거리를 고민하던 얼룩들도 깔끔하게 지워져 있다. 미성숙한 아이의 신기한 장난감처럼 자신이 사랑한 대중문화를 유희와 오락의 관점에서 쌓아 올렸을 따름이다. 이 거창하고 어딘지 낡아 보이기까지 한 놀이기구는 관점에 따라선 거의 퇴행적인 영화처럼 보일 지경이다. 어떻게든 스필버그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엔터테인먼트를 목표로 8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모은 오마주 정도로 납득할지도 모르겠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를 한 방향, 한 가지 길로 규정지을 때 양쪽 모두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결과에 도달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레디 플레이어 원>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어정쩡한 면모 때문이다. 어정쩡함이란 단어가 이상하다면 달리 표현하겠다. 이건 분리된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할리데이는 최후의 시련을 통과한 웨이드에게 오아시스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계약서를 준다. 실은 숨겨진 테스트였기에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은 웨이드는 그제야 진짜 에그를 얻는다. 스필버그도 마찬가지다. 그는 항상 두 가지 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왔다. 예술과 상업, 영화와 현실, 리얼과 리얼리티. 스필버그의 개별영화들을 양 갈래 길로 분류하기 시작하면 그의 행보는 분열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며 어쩌면 스필버그는 한 번도 무언가를 구분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새삼스런 생각이 들었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란 무엇일까. 반드시 라고 하긴 어렵지만 ‘작가’로 칭송받는 감독들의 작업은 대개 연역적이다. 대다수 작가들에겐 세계와 영화과 관계 맺는 이상적인 형태가 있다. 무릇 작가라면 그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영화를 두드리며 구도의 길을 걷는다. 반면 스필버그가 영화를 체험하고 구축해나간 방식은 철저히 귀납적이다. 그는 그때그때 자신이 흥미롭게 즐긴 대상을 영화적인 방식으로 소화시켜 표현의 영토를 넓혀 왔다. 스필버그는 탐욕스러운 모험자다. 재미, 호기심, 즐거움을 최우선에 두는 소년은 미지의 분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도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한때는 도전과 개척의 대상이었을 영화에 터를 잡은 뒤 스필버그는 모든 경험들을 영화라는 무대 위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을 연출했던 스필버그는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들에 매료되어 그 시적 리듬을 자연스레 흡수했고, < 이티E.T. >(1982)에는 각종 특수효과의 상상력과 마술적인 표현을 마음껏 뽐냈다. <쥬라기 공원>(1993)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의 지각적 리얼리티를 영화 안에 끌어들였다. 그 결과 “디지털 시대는 어떤 장면도 더 이상 경이롭지 않게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유죄”라고 스스로 고백하면서도 새로운 표현방식과 전통적인(익숙한) 영화를 접목시키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스필버그의 극장에는 때로 할리우드 고전 영화들이 상영되고 때로는 스펙터클의 도배되었다가 어떨 땐 새로운 기술 시연의 장이 되기도 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선택한 새로운 장난감은 가상현실 게임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어정쩡한 범작에서 스필버그의 코어에 접속하는 중요한 열쇠로 승화시키는 대사가 있다. 할리데이는 최후의 관문을 통과한 웨이드를 어린 시절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다. 8비트 게임기에 몰두했던 소년 할리데이는 현실에서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안타까워하면서도 현실을 긍정한다. 그 끝에서 툭 던지는 한 마디 대사. “리얼리티 이즈 리얼.” 이 순간 현실과 가상현실게임으로 구분되고 가로막혀 있던 세계가 연결된다. 할리데이는 현실보다 게임이 더 편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 삼은 건 아니다. 게임 속에서 쌓은 할리데이의 위대한 업적과 긴 시간들을 누가 가상, 가짜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과 가상현실, 양쪽의 시간 모두를 긍정할 때 할리데이는 온전히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스필버그 역시 마찬가지다. 클래식 영화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고지식한 스필버그와 온갖 비영화적인 것(예컨대 CG, 3D, VR 등)들을 즐기고 기꺼이 영화의 세계로 초대하는 오타쿠 스필버그는 실상 분리되지 않는다. 오늘날 영화는 무엇일까. 매체가 섞이고 플랫폼이 분화되고 관객이 체험이 다종다양하게 분리되는 현재, 관객 각자의 영화적 체험이 존재한다. 전통적 영화의 개념, 바쟁이 찾아냈던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이 희미해진 지금 영화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려진 것과 찍힌 것, 달리 말하자면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컴퓨터 그래픽의 등장으로 찍는 영화와 그리는 영화의 구분이 모호해진 지금, 라이브 액션 시네마와 그래픽 시네마를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든 의문의 근본에는 ‘필름, 실사, 시네마는 다르다’는 고집, 혹은 달라야 한다는 바람이 반영되어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 딱딱한 고정관념에 스필버그식으로 화답한다. 어떤 신기한 기술이든 받아들이고 거리낌 없이 흉내를 내되 소통할 수 있도록 현재화하는, 오직 즐거움을 향한 모험담.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세 가지 층위의이미지가 공존한다. 첫째는 웨이드가 속한 라이브 액션. 이는 필름의 질감과 할리우드 서사 영화의 관습을 흉내 낸다. 두 번째는 가상현실게임 오아시스의 플레이 이미지들. 이는 CG 애니메이션임을 일부러 선명히 드러내며 애니메이션이 축적해온 미학적 양식(이를테면 과장된 이미지와 애니메이션적 허용)을 기반으로 한다. 마지막은 최근 스필버그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은 마크 라이언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재현한 제임스 할리데이다. 오아시스 속 캐릭터가 확연히 CG 애니메이션임을 드러내는 데 반해 할리데이의 비주얼은 필름을 극한까지 묘사한 최근 CG의 연장에 있다. 그려진 것이되 찍힌 것에 한없이 가까워지고자 하는 이미지. 여기서 다시 질문. <레디 플레이어 원>은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인가, 영화를 흉내 낸 게임인가. CG를 활용한 실사 영화인가, 실사를 흉내 낸 애니메이션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결과물은 모든 개념을 포괄하고 경계를 허문 채 지금 여기 존재한다. 리얼리티 이즈 리얼. 사실적인 것(가상현실) 역시 사실(현실)의 일부라는 단순명료한 답. ‘영화적인 것’ 역시 영화의 일부라는 수용적 태도. 생각해보면 스필버그는 항상 그랬다. 스필버그를 대중과 예술이라는 평행선 위에 두고 찢어놓고 싶어 한 건 평자들의 욕망이었을 뿐, 그는 늘 대중문화의 여러 체험을 섞고 영화적인 것들로 소화한 뒤 쌓아 올려 우리의 ‘영화적’ 체험을 확장해왔다.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즐기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은 영화라는 딱딱한 정전이나 개념이 아니라 숱한 대중문화를 통해 축적된 체험의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할리데이와 헤어지기 전 웨이드는 묻는다. “아저씨는 진짜예요?” 할리데이는 답한다. “내 게임을 해줘서 고맙다.” 이 짧은 문답에 스필버그의 지난 영화 작업이 오롯이 담겨 있다. “내 영화를 봐줘서 고맙다”고 쑥스럽게 고백하는 스필버그에게 답하고 싶다. 이제 진짜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고. 앞으로도 당신의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학교에서도 늘 왕따를 당하는 12살의 콜. 겁이 많고 용기는 부족한 콜을 위해 부모는 지금도 베이비시터를 고용한다. 콜이 짝사랑하는 예쁘고, 멋지고, 화끈한 비. 부모가 외출한 사이 콜과 놀아주고, 콜이 잠든 후 부모가 돌아오면 일이 끝나는 베이비시터다. 그런데 콜은 궁금하다. 내가 잠들고 난 후 비는 무엇을 할까. 동급생이자 이웃집에 사는 친구 멜러니는 어른들이 하는 짓을 할 것이라고 놀린다. 정말, 정말일까? < 사탄의 베이비시터 >의 원제는 ‘The Babysitter’다. 이 제목이라면, 그리고 예고편도 보지 않았다면 10대 소년이 짝사랑하는 베이비시터를 통해서 현실을 알게 되는 성장영화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혹은 섹스 코미디나 불륜물. 그러나 <사탄의 베이비시터>는 10대 소년과 베이비시터의 이야기를 코믹 호러 성장물로 연성한다. 잠이 든 척했던 콜이 거실을 훔쳐보니 비의 친구들이 몰려와 있다. 게임을 하면서 벌칙으로 키스를 한다. 이제 어른들의 사정이 시작되는구나 싶더니만 반전이 시작된다.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비가 키스를 시작하는데, 웬걸 비의 두 손에 들린 칼이 남자의 머리에 꽂힌다. 피가 줄줄 흐른다. 잠든 척하다가 들킨 콜은 추궁을 받는다. 뭘 봤지? 어디까지 봤지? 그리고 비와 친구들이 악마의 책을 이용하여 의식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10대 청소년들이 악마 의식에 빠지는 것은 빈번한 일이고 딱히 이상하지도 않다. 그 시절이야말로 바라는 것이 더욱 많을 때니까.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볼 때니까. < 사탄의 베이비시터 >의 장르를 따진다면 호러 코미디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성장이다. 12살의 콜은 스스로 새가슴이라 말한다. 언젠가는 경찰이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마음뿐이다. 아버지가 운전을 가르쳐주겠다며 운전석에 앉혀도, 늘 다음 주를 기약하며 결국은 내려 버린다. 그런 콜이 비를 짝사랑하다가 배신당하고,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하기에 한 걸음 나아간다. 영화가 끝나면, 콜은 운전도 하고, 그를 짝사랑했던 멜러니와 데이트도 하게 될 것이다. 집에서 책과 영화만 보며 몽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반드시 비를 극복해야만 한다. 익숙한 이야기다. 하지만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기존의 청춘물, 공포물, 성장물의 특정한 요소들을 제대로 배합하여 효과를 발휘한다. 톰 크루즈를 처음 배우로 인식하게 한 걸작 < 위험한 청춘 Risky Business >(1983)이 겹친다. 모범생이 부모의 휴가를 틈타 파티를 열었다가 엄청난 재난을 겪게 되는데, 막대한 돈이 구하기 위해 그가 세운 타개책은 포주가 되는 것이다. 파티에 온 콜걸에게 연락을 하며 대학 경영학과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자본주의 생존법을 알게 된다. 청춘물의 아이들은 이렇게 고난을 통해 어른이 된다. <위험한 청춘> 초반, 혼자 남은 톰 크루즈가 거실을 누비며 에어 기타를 치는 장면이 있다. <사탄의 베이비시터>에서 콜과 비가 함께 거실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며 톰 크루즈의 에어 기타를 떠올렸다. 도망치는 콜을 쫓는 비는 < 13일의 금요일 >의 효과음을 연상시키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도망갈 생각만 하던 콜이 용기를 내서 하나씩 비의 친구들을 물리치면 < 나 홀로 집에 >가 된다. 혼자 집에 남은 소년이 악당들을 물리치기 위해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싸우는 영화.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오가잡탕인데 꽤나 맛있다. 한때 < 미녀 삼총사 > 1, 2편을 만들며 각광받다가 <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2009) < 디스 민즈 워 >(2012) < 쓰리데이즈 투 킬 >(2014) 등 실패작을 연속하며 움츠러든 맥지이지만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아기자기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성공작인 <미녀 삼총사>와 <사탄의 베이비시터>에 공통점이 있다면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적절하게 뒤섞었다는 것과 1980년대에 대한 향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주도했던 80년대 장르 영화 트렌드를 뭉뚱그린 소년소녀 모험백서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 구니스 > < 그렘린 > < 빽 투 더 퓨처 > 등의 영화로 대표되는. 토비 후퍼를 초빙하여 만들었던 < 폴터가이스트 >(1982)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 시절에 이미 청춘 호러가 득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80년대는 청춘보다 호러에 방점을 둔 슬래셔 영화가 절정이었고, 이후 케빈 윌리암슨이 그 시대 슬래셔 영화를 패러디한 < 스크림 >(1996)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청춘 호러는 개화했다. 청춘 호러를 너무 어둡게 가기보다는 케빈 윌리엄슨처럼 적절히 유머를 섞어가며 다루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호러와 코미디의 결합은 어려운 선택이지만 피터 잭슨의 < 데드 얼라이브 >와 샘 레이미의 < 이블 데드 > 시리즈가 보여준 스플래터의 감각을 더욱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80년대 감각의 청춘 호러 코미디를 매끈하게 엮어낸 영화라 할 수 있다.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영리하게 향수를 끌어낸다. 마당에서 프로젝터로 보는 영화는 1971년 작인 <빌리 잭>이다. 기존의 영웅들로 은하계 드림팀을 만드는 게임을 하는데, 비가 선택한 드림팀은 < 스타 트렉 >의 커크와 피카드, <에일리언>의 리플리, < 인디펜던스 데이 >의 윌 스미스와 제프 골드블럼이다. 콜은 < 배틀스타 갈락티카 >의 아다마 제독, <스타 트렉>의 데이터, 프레데터 그리고 콜과 비였다(1978년 작 <배틀스타 갈락티카>가 있다). 이렇듯 <사탄의 베이비시터>는 영화 내내 과거의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문화의 기억들을 소환한다. 또한 < 사탄의 베이비시터 >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은 캐릭터다. 콜은 비를 짝사랑한다. 멜러니는 콜을 짝사랑한다. 전형적인 스토리라면 비가 악녀로 밝혀지고, 비를 물리치는 모험을 한 후 멜러니와 맺어져야 한다. 하지만 <사탄의 베이비시터>를 보고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비를 미워할 수가 없다. 싫어할 수가 없다. 예뻐서만은 아니다. 콜을 괴롭히는 소년에게 비가 귓속말을 한다. 지독한 말에 놀란 소년은 잔뜩 겁을 먹고 도망친다. 비는 기존의 여성 캐릭터인 비치(bitch), 빅센(vixen), 팜므파탈 무엇으로 규정하기 힘들다. 뭔가를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맞는데, 그것 말고는 미워할 지점이 없다. 동정인 남자의 피가 필요해서 콜이 필요했을 뿐, 나름 성심껏 대해준다. 최선을 다해서 콜의 부족한 단점을 메워주고 용기를 준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는 콜의 질문에 비는 답한다. 원하는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나는 너무 작았고 두려움에 떨곤 했지. 지금은 강하지. 두려움도 없어.” 라고. 비도 콜과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더 약하고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는 선택했을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더라도 강해지겠다고. 그리고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콜이 비에게, “누나는 <매드맨>의 주인공 같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멋지고 잘 생겼지만 바람이나 피우는 놈.’ 하지만 그만의 이유가 있고, 매력이 있는 놈이 아닌 X인 비. 콜은 비를 사랑했고, 결코 미워할 수가 없다. 하지만 비가 정체를 드러내고, 콜의 친구를 죽일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콜은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비로소 콜은 어른이 된 것이다. 비를 통해서, 비와 맞서고 극복한 후에 콜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 위험한 청춘 >에서 톰 크루즈가 콜걸인 레베카 드 모네이와 섹스를 하고 포주가 되는 경험을 한 후 어른이 된 것처럼. 과감하게 대학을 포기하고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듯이. 2014년, 아직 제작되지 않았으나 가장 좋아하는 시나리오인 ‘블랙리스트’, 2015년(에도) 아직 제작되지 않은 가장 좋아하는 호러 시나리오인 ‘블러드 리스트’에 꼽혔던 브라이언 더필드의 시나리오는 전형적인 장르 요소들을 도발적이고 역전된 캐릭터와 훌륭하게 결합시킨다. 킬링타임 용 오락영화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듯 한 기분이다.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2015년 완성되었지만 2017년 10월 13일의 금요일에 넷플릭스를 통해서 공개되었다. 사족. 최근 넷플릭스에서는 스티븐 킹 원작의 <제럴드의 게임>과 <1922>, 애나 릴리 아미푸르의 < 버려진 자들의 땅 The Bad Batch >, 제러미 러시의 <겟어웨이 드라이버 Wheelman>, 닉 다미치의 <부시윅> 등 다양한 장르영화들을 직접 제작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자체 제작 장르 영화들은 오래 전 할리우드 동시상영시대에 만들던 B-Movie 같다. 스타가 나오는 대작을 메인으로 상영하면서 열혈 팬이 있는 액션, 호러, SF 등을 저예산으로 만들었던 B급 영화. 넷플릭스는 기존 채널에서 모두 거절당한 드라마 <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 >를 제작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SF <익스팬스>와 호러 <헴록 그로브> 등 장르물에서 더욱 두각을 보이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 블레임 > <아인> < 사이보그 009 >를 자체 제작하고 기존 작품 판권도 대거 사들이는 중이다. 소수 취향이지만 전 세계로 동시에 내보내면 시청자는 아주 많아지니까. 앞으로 넷플릭스는 < 사탄의 베이비시터 > <제럴드의 게임> 등 재기 있고 발랄한 영화들의 수원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