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의 결투
- 감독
- 킹 비더
- 제작년도
- 1946
- 출연
- 제니퍼 존스, 조셉 코튼, 그레고리 펙, 라이오넬 배리모어, 허버트 마샬, 릴리안 기쉬
아네트는 두 발로 걷지 못한다. 침대에 혼자 남겨진 앤(마리옹 코티아르)의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몇 걸음 걸어오다가 쓰러지고 만다. 앤이 “그대로 계속 걸으렴, 한발 한발씩”이라 격려의 노래를 부르지만 결국 실패한다. 걷지 못하는 대신 아네트는 침대에 눕거나 바닥에 앉아 있고,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눕거나 앉을 수 없는 무대 위에서는 차라리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오른다. 레오스 카락스는 < 아네트 >에서 앤과 헨리 사이에 태어난 어린아이 아네트를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표현했다. 단순히 촬영하는 데 있어서 실제 어린아이 배우가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보다 수월하다는 이유로 결정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인형이라는 소품의 의미를 짚어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아네트가 영화에 부여하는 조건을 말해보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처럼 두 발로 걷지 않는 마리오네트 피사체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화면의 부자유이기 때문이다. 말과 걸음이 금지된 마리오네트 인형이 이야기의 중심에 배치되면서 영화는 불가피하게 숏의 형식을 전환한다. 설계된 장면의 동선을 교정하고, 공간과 다른 공간을 비약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이제 <아네트>의 인물들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멈춰 서서 침묵하는 아네트를 품에 안거나, 그녀가 노래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반응할 따름이다. 아네트가 닫힌 입을 열고 노래할 때까지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영화의 마지막 공연에서처럼 말이다. 녹음실에서 시작해 한밤의 거리까지 이어지는 첫 장면에서의 연속적인 롱테이크는 성립되지 않는다. 앤과 헨리가 바이크를 타고 도로를 이동하는 매혹적인 순간도 마찬가지다. 앤의 죽음으로 경찰 조사를 받던 헨리의 거짓 변명은 이런 차원에서 의미심장한데, 아네트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다는 그의 말은 영화 전체에 드리워진 역학적인 층위의 속박처럼 들린다. 아네트가 머무는 자리에서 영화는 벗어날 수 없다. 이 마리오네트 인형을 주시하기 시작하면서, <아네트>를 관류하던 통상적인 영화의 규칙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아네트라는 인형극의 기호가 실사 영화의 세계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한몸을 이루며, 두 인물이 대화하고 움직이고 행동을 주고받는 통상적인 화면의 규범에서 벗어난 영화의 논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네트가 처음으로 무대에서 공연하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이 마리오네트 인형은 고정된 기반(Grund) 위에 발을 디디는 대신 바닥없는 심연(Ab-grund)을 날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른다. 좌표를 가늠할 수 없는 암흑 속에서 빛을 발하며 부유하는 아네트의 움직임은 기존의 영화적 공간을 추상적으로 뒤튼다. 아네트는 그 어두운 평면 위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어둠을 영화적 무대의 공간으로 재편하는 것은 이 광학적 인형(Optical toy)이 만들어내는 한없이 가벼운 움직임이다. 물리적인 발걸음과 탈것으로 이곳과 저곳을 오가던 영화는 공중에 떠오른 아네트의 신체를 빌려 가상의 스크린에 펼쳐지는 모든 곳으로 움직인다. 아네트의 변형된 움직임이 곧 영화의 변형된 형태가 된다. <아네트>가 구축하는 영화적 세계의 이미지는 혼종적이다. 그 가운데에는 영화의 순수한 형태를 위협하는 서로 다른 무대들의 표상이 있다. 관객들을 웃음으로 ‘죽여주는’ 헨리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과 사람들을 ‘구원하는’ 앤의 오페라 무대, 그리고 앤의 목소리를 이어받아 노래를 부르는 아네트의 무대는 각각의 상이한 속성과 외형을 드러내며 한 영화의 내부에 이질적으로 접합해 있다. 카락스는 객석을 가득 메운 극장의 관객들을 묘사한 킹 비더의 <군중>(1928)의 한 장면과 헨리와 앤의 공연을 지켜보는 무대의 관중들을 수평적으로 배치하고,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라이브 공연의 롱테이크와 스마트폰으로 촬영되어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조각난 영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네트>라는 독특한 뮤지컬 영화는 영화의 옆자리에 무대와 객석을,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영상의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이 혼종적인 결과물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영화적’인 걸작이 아니다. 반대로, <아네트>는 놀라우리만큼 다면적인 비영화적 장치들로 편재한 비순수 영화의 한 사례다. 영화적인 것들과 비영화적인 것들이 분열적으로 경합을 벌이는 <아네트>에서 ‘영화적인 것’의 주요한 참조물 가운데 하나는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선라이즈>(1927)이다. 차 안에서 악몽을 꾸고 깨어난 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양식적인 제스처, 침대에 앉은 헨리의 불안한 신체 위로 유령이 된 앤의 형체가 겹쳐지는 이중인화의 표현은 무르나우의 영화에 담긴 세부를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 영화가 강렬하게 공유하는 것은 물에 빠진 여인의 이미지일 터이다. <선라이즈>의 남자와 <아네트>의 헨리는 모두 배 위에서 아내를 물에 빠트려 죽이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카락스는 “해가 뜨고 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있을 법한 범용한 이야기(<선라이즈>의 도입부에 나오는 자막의 한 부분)”를 기묘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선라이즈>에서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소리의 유혹이었다. 도시에서 온 여자의 휘파람에 이끌려 남자는 집 밖으로 나가고, 소리가 도달하는 곳에서 아내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다만 <선라이즈>는 무성영화다. 음악이 있고 대사가 있지만 목소리는 없다. 부부를 파멸로 인도하는 음성은 영화에 들려오지 않는다(<아네트>가 참조하는 두 편의 무성영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꽤나 미묘한데, <군중>과 <선라이즈>는 최초의 토키영화인 <재즈 싱어>(1927)와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의 끝자락에 있는 작품들이다). 그와 달리 <아네트>는 유성영화이며 뮤지컬 영화다. 음악과 노래, 목소리가 모든 순간에 있다. 폭풍우에 휩쓸리지만 끝내 구제되어 살아나는 <선라이즈>의 아내와 다르게 <아네트>의 앤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 위에서 헨리의 손에 의해 물에 빠져 죽는다. 이것으로 연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두 발로 서서 걷는 것조차 어려운 아네트의 뻣뻣한 신체에 앤의 목소리가 깃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선라이즈>의 부부는 죽음의 순간을 벗어나 삶의 두 번째 기회를 얻고 구제와 재회의 빛으로 향하는 결말을 맞는다. 카락스의 <아네트>는 오늘날의 영화가 놓인 조건에서 그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고전기의 무성영화가 음성의 유혹을 넘어서는 회복의 몸짓으로 연인의 영화를 완성했다면, 오늘날의 뮤지컬 영화에서 그런 순수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이는 앤의 악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헨리의 근원적인 폭력성과도 연관 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상과 소리는 불균질하게 뒤섞여 모든 곳에 비치된다. 빛을 발산할 때마다 아네트의 목소리를 일깨우는 환등 기구는 혼잡스러운 영상과 소리의 상태를 지시하는 과거형의 장치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카락스는 영화의 주변을 맴도는 서로 다른 매체와 영상의 소란을 산포하고 있을 뿐이다. 그에 조응하듯 앤의 목소리를 이탈한 음성은 아네트에게 깃들어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영화를 움직이게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아네트의 신체는 영화의 형상을 전환하는 근거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카락스는 영화를 둘러싼 모순과 변형을 간직한 마리오네트 인형과 더불어 <아네트>의 마지막 무대로 진입한다. 헨리가 갇힌 형무소의 면회실에 들어선 마리오네트는 어느 순간 인간의 형상으로 탈바꿈한다. 조르주 멜리에스가 발견한 영화의 근원적인 트릭의 원리처럼, 컷이 바뀌면 마리오네트-아네트가 사라지고 인간-아네트가 벽에 기대어 있는 식이다. 영화의 이미지란 언제든지 인형과 인간의 외형을 바꿔치기하고, 아무것도 없는 벽 앞에 피사체를 나타나게 한다. 인형극에는 영화만큼이나 마술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 카락스의 언급은 영화와 인형극을 무람없이 오가는 이 장면에서 매혹적으로 도래한다. 인간-아네트는 헨리 앞으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두 발로 걸어온다. 앤의 노랫말처럼 “그대로 계속 걸으렴, 한발 한발씩” 헨리에게 다가온다. 영화의 카메라 또한 공중으로 떠오르는 대신 지면에 멈춰 선다. 무대 위의 공연을 포착한 기나긴 롱테이크 화면과 빠른 속도의 몽타주를 오가며 운행되던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러서야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시선을 오가는 숏/역숏의 데쿠파주를 선보인다. 이 자리에서 영화에 남겨진 것은 서로의 얼굴과 시선을 주고받는 영화적 방법의 해체일까, 그것의 갱생일까? 맞부딪힌 두 얼굴이 잠시나마 한 장면에 포개진 뒤 하나의 얼굴은 화면 바깥으로 사라지고, 하나의 얼굴은 등을 돌린다. 그러고 나면 바닥에 떨어진 마리오네트-아네트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인형이 움직이지 않는 지점에서 영화도 화면을 멈춘다. 카락스가 당도한 영화의 심연이 거기에 있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보고 난 첫 느낌은 그저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빛과 소란과 움직임만으로 이뤄진 온전한 축제를 치른 느낌. 여기엔 장식도 도식도 클리셰도 없다. 계획과 우연, 작위와 즉흥이 일견 무질서하게 조우하는데 어떤 파열도 마찰도 없이 불협화음조차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기적 같은 세계. 장 르누아르와 존 포드와 킹 비더와 자크 베케르와 장 비고의 어떤 영화들에서 우리가 만났던, 생의 송가(頌歌)라고 부르고 싶은 순간들의 파노라마.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만든 어설픈 공포영화를 보고 장(장 피에르 레오)은 “단순하고 아름답다. 영화 만들기의 기쁨이 느껴진다.”고 말하는데,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영화에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도 축제도 삶도 끝을 피할 수 없다. 모든 건 언젠가 막을 내리고 사라져갈 것이다. 장은 “모든 이야기의 끝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끝이 없다면 이야기는 아름다울 수 없고 축제의 신명은 없을 것이며 생은 빛날 수 없을 것이다. 소멸과 죽음의 예기는 축제의 오점이 아니라 동반자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축제의 영화는 동시에 죽음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노배우 장은 영화 속 영화에서 지금 죽음을 연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죽음을 연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며 투덜거린다. 72세의 이 사내는 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의 불안한 눈빛은 관조와 달관이 아닌 생의 집착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죽음에 너무 가까이 있어 죽음을 연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역 여배우의 잠적으로 그에게 며칠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촬영지 가까운 곳에 40여년 전 그가 떠나온 여인의 집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텅 빈 그 집을 그는 찾아간다. 그곳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아이들 무리를 만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도처에 죽음이다. 죽음을 연기하려던 노배우는 죽은 옛 연인의 무덤을 다녀온 뒤 ‘죽음의 위험’이라는 조악한 팻말이 붙어있는 폐가에서 그녀의 영혼을 만난다. 아이들은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를 찍으려 하며, 아이들 중 하나인 쥘은 죽은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한다. 죽음에 너무 가까워 굳어가는 노인과 죽음에 너무 멀리 있어 오히려 죽음을 마음껏 유희하는 아이들이 모여 죽음의 영화를 만들고 죽음의 노래를 부른다. 극 중에서 아이들과 노인이 함께 부르는 노래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Le lion est mort ce soir’는 그대로 영화제목이 되었고 일본어 제목도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ライオンは今夜死ぬ’이다. 그 노래는 아프리카 줄루족 출신의 솔로몬 린다가 'Mbube'라는 제목으로 처음 불렀고(그는 정글에서 사자를 만났을 때 겁에 질려 ‘사자야, 가만히 있어’라고 반복적으로 흥얼거렸고 이 흥얼거림이 노래가 되었다), 피트 시거를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가수들이 다시 불렀다. 영어권에선 <라이언 킹>의 주제곡으로도 사용된 ‘사자는 오늘밤 잠든다 The Lion Sleeps Tonight’로, 불어권에선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Le lion est mort ce soir’로 널리 알려졌다. 불어와 일어 제목의 죽음이 영어와 한국어 제목에선 잠으로 바뀐 셈이다. 잠과 죽음 사이. 죽음을 연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노배우 장(장 피에르 레오)에게 극 중 감독은 “죽음은 잠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장은 “죽음은 조우”라고 말하지만, 무엇과의 조우인가, 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장은 옛 연인의 집에 자꾸만 잠든다. 우리는 그의 반복된 잠이 죽음에 이르는 노쇠의 증상인지, 죽은 연인과의 재회를 위한 시도인지 식별할 수 없다. 다만 ‘죽음의 위험’이라는 집에서 그는 자꾸 잠들고, 죽은 연인 쥘리엣을 만난다. 여기엔 한 가지 이상한 규칙이 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옛 연인 쥘리엣은 장의 잠 속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등장한 직후에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오자 죽은 옛 연인도 뒤따라온다. 아이들의 소란이 불러일으키는 생의 활력이야말로, 장이 죽음의 의미라고 믿는 조우를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아이들이 영화 만들기 놀이를 시작하자 비로소 불가능한 조우가 시작된다. 이 영화의 심장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지금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죽음을 찍고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을 연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장의 말은 ‘죽음은 연기될 수 없다’는 말로 들을 수도 있다. 유능한 연기자라면 그가 연기해야 할 모든 감정을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어떻게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는가. 그는 죽은 척할 수는 있지만 죽음을 연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화는 죽음을 기록할 수 있지만 재현할 수 없다. 장은 죽음을 끝내 연기하려 하지 않고 영화 속 영화 역시 죽음의 촬영에 실패한다. 그 실패가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여있다. (영화 속 영화를 찍는 첫 장면에서 죽음을 연기할 줄 모르겠다던 장은 영화 속 영화 촬영이 재개된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척하기’를 거부하고 눈을 부릅뜬다.) 죽음이 그렇다면 놀이는 어떠한가. 놀이는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활동이다. “누구든지 마음만 내킨다면 정의, 아름다움, 진리, 선함, 마음, 신 따위의 거의 모든 추상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겠지만 놀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요한 호이징하) 부정될 수도 한정될 수도 없는, 그 자체로 온전한 놀이는 극영화라는 허구의 세계 안에서 적절한 기능적 자리가 배당된 행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노는 척할 수는 있으되 놀이를 연기할 수는 없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놀이를 기록할 수 있지만 재현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죽음과 놀이는 상연될 수 있되 연기될 수는 없다. 스와 노부히로가 믿는 것은 아이들의 육체이며 아이들의 놀이다. 그는 아이들처럼 놀 수 없고 아이들처럼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이들의 놀이를 기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아이들을 놀게 한 뒤 그것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는다. 사랑스럽지만 통제할 수 없는 노인 장 피에르 레오 역시 그에겐 또 다른 아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멈춘 적이 없었던 즉흥 연출과 즉흥 연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늙고 어린 이 아이들의 놀이에서 발견한 것 같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죽음을 번민하거나 재현하기를 멈추고(장의 대사를 빌자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기를 멈추고) 아이들의 놀이를 찍기로 결정한 스와 노부히로 자신의 선택에 관한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 남부 소도시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모네의 그림을 보는 듯한 빛의 난장인데,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그중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존재는 바로 아이들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아이들의 소란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아이들과 노인이 호숫가로 소풍을 떠나며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함께 부르는 장면보다 아름다운 장면을 2017년의 다른 영화에서 보지 못했다. 이 아름다움에는 해방감에 가까운 자유의 향기가 있다. 일본의 한 평자는 “이 영화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라고 말했는데 동의할만한 말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마치 영화사를 잊은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영화 이력조차 잊은 것처럼 우리에게 영화 만들기의 행복감이 영화 그 자체를 통해서 전염될 수 있음을 믿고 이 영화를 만든 것 같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차 없이 이 영화를 보는 103분 동안의 상영 시간 내내 우리를 소란의 축제로 이끌고,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누벨바그보다 더 누벨바그적인 영화, 누벨바그가 한 시대의 사조가 아니라, 영화의 영원한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다짐과도 같은 영화다.
<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은 영화배우들 사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나탈리 우드, 킴 노박, 존 웨인 같은 외국 스타들, 또 김지미 , 남정임 , 김진규 같은 충무로 스타들의 사진들을 배경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뜬다. 말하자면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자기 반영성’의 테마를 전제하며 시작하는 것이다. 세계영화사에서 영화가 스스로를 거울에 비추는 태도, 곧 자기 반영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이다. 이 해에 두 개의 중요한 영화, 곧 페데리코 펠리니의 < 8과 1/2 >, 그리고 장-뤽 고다르의 <경멸>이 발표됐다. 주로 외부로 향해 있던 영화의 시선이 자기 내부로 향하는 성숙한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김수용 감독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한국영화사에서 자기 반영성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작품이다. 충무로의 영화 만들기 과정 전부가 영화의 중요한 스토리로 이용되고 있어서다. 영화가 자신을 거울에 비추다 보니,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현실과 허구는 뒤섞인다. 그래서 주요 인물들은 전부 실제 이름 그대로 나온다. 김진규 는 과거 충무로의 스타였다. 영향력 있는 제작자와 상대 배우 캐스팅 문제로 다투다가 눈에 나는 바람에 영화계에서 쫓겨났다. 지금은 형편이 궁색하여, 거의 숨어 살다시피 한다. 우연히 옛 동료 황정순 을 만나, 과거 상대 배우의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진규는 연인이었던 그 배우가 출산하다 죽는 바람에 딸도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그 딸, 남정임 은 술집을 운영하는 집에 입양돼 있다. 김진규는 딸의 외모에 깜짝 놀란다. 죽은 배우와 너무 닮아서다. 김진규는 자신의 궁색한 처지가 부끄러워 신분을 밝히지는 못하고, 남정임을 스타로 키우기 위해 뒤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당시 데뷔 2년 차였던 22살의 남정임은 실제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은 1960년대 특유의 눈물을 자극하는 ‘최루성’ 멜로드라마다. 할리우드의 고전 영향도 느껴진다. 무명의 여성을 스타로 길러내는 조지 쿠커의 < 스타 탄생 >(1954, 이 작품도 영화에 대한 영화다), 딸의 신분 상승을 위해 궁색한 처지를 숨기는 엄마의 희생에 관한 킹 비더의 < 스텔라 달라스 >(1937)의 서사구조가 자주 겹친다. 남정임 은 점점 스타로 성장하고, 김진규 는 그 과정에서 딸의 미래에 방해가 될까 봐 점점 뒤로 물러난다. 오로지 희생으로만 묘사되는 헌신적인 부성이 ‘최루’의 무기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충무로 세계가 그대로 노출된다. 감독( 전창근 )은 최선의 화면을 잡기 위해 재촬영을 거듭하고, 필름 값을 아끼려는 제작자( 허장강 )는 감독의 그런 태도에 화를 낸다. 다섯 편에 겹치기 출연하는 스타 배우( 한성 )는 촬영현장에 늦게 오기 일쑤고, 스타덤에서 밀려난 배우( 전계현 )는 질투심에서 신인 남정임 에게 못되게 군다. 남정임은 사라진 김진규 가 간혹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양어머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하루 일하다 감독으로부터 ‘스캔들’ 주의를 듣는다(충무로에서 가끔 일어나던 일이다). 스타의 품위를 지키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충무로의 이런 ‘현실’들이 ‘허구’와의 경계를 자주 허무는 점이다. 전계현 은 신인 남정임 이 스타로 급성장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좋아했던 남자 배우 한성 (1960년대 미소년 같은 외모로 인기를 끌었다)과도 친해지자, 깡패를 동원해 두 사람의 관계를 깨려고 한다. 충무로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두 배우가 깡패의 폭력 앞에 놓여 있는 긴장된 순간에 감독의 “컷”하는 소리가 들리는 식이다. 우리가 보고 있던 영화 속의 현실은 사실 허구였던 것이다. <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은 현실이 허구이고, 허구가 또 현실일 수 있는 공간을 세련되게 교차하고 있다. 자기 반영적인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영화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약간 높은 시선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 되돌아보는 성찰적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브레히트의 용어를 빌리면, ‘비판적 관객’이 되는 셈이다. 동시에 단점도 있다. 일반영화에서 기대되는 ‘환영적 쾌락’, 곧 주인공과의 동일시와 감정이입이 종종 차단된다. 남정임 이 아버지의 헌신을 뒤늦게 알고, 오열하고 있을 때, 관객은 이것이 현실인지 연기인지 고민하기 때문에 배우에게 감정 이입하기가 머뭇거려지는 것이다. < 어느 여배우의 고백 >은 이런 형식상의 도전 때문에라도 소중한 작품으로 남는다. 당시의(사실 지금도) 영화 환경에선 반상업적, 반대중적으로 여겨질 주제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지은 까닭이다. 아마 그런 형식의 남다름 때문에 내용은 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파조로 흐른 것 같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 덕분에 한국영화사는 형식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