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 감독
- 이미정
- 제작년도
- 1999
< 오월의 눈 >(Snow in Midsummer)은 말레이시아 총 킷 옹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섹션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던 단편이자 말레이시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5.13 사건을 다뤘던 <장중한 무덤>(Cemetery of Courtesy)을 장편 프로젝트로 확장하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올해는 해외 주요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성취한 아시아 영화들이 많았던 해로 평가할 수 있는데, 특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수상한 말레이시아 출신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 호랑이 소녀 >(Tiger Stripes)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신인감독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오월의 눈>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중화권 지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만금마장 영화제 두 편의 개막작 중 한 편으로 선정되었으며, 총 9개 부문 후보지명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오월의 눈>은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으로 협업해 완성한 영화다. 말레이시아 출신이 대만으로 이주해 창작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차이밍량 감독과 호 위 딩 감독이 대표적이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수의 말레이시아 젊은 창작자나 감독지망생들이 대만으로 이주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에는 여러 배경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식 문화와 언어, 생활을 유지해온 화교 문화권이라는 공통기반이 있어서 가능한 지점일 것이다. 특히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대만으로 이주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가는 라우 켁 후앗 감독은 1950년대 말레이시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다룬 <무단 외출>(Absent without Leave)과 <오월의 눈>의 주요 소재인 말레이시아 5.13 사건을 다룬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기억한다>(The Tree Remembers), 그리고 대만인과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충돌하자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가 유혈진압을 자행해 3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대만 2. 28 사건을 다룬 <야생 토마토의 맛>(Taste of Wild Tomato) 등을 통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잊혀진 역사를 재구성하고 영화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한 <오월의 눈>은 최근 몇년간 도드라진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동남아시아국가들의 공동협업이라는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베트남 출신의 팜 티엔 안 감독의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Inside the Yellow Cocoon Shell)은 베트남, 싱가포르, 프랑스, 스페인 등이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는데, 감독의 전작이자 단편인 < 정신차려 >(Stay Awake, Be Ready)가 201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단편경쟁에서 주목 받으면서, 싱가포르 젊은 프로듀서와 의기투합해 장편 프로젝트로 개발했고, 이후 유럽에서 주요 펀딩을 받으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밟았다. 비슷한 예시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지만 자국인 말레이시아에서 개봉 당시 일부 장면이 삭제되며 검열논란을 일으켰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호랑이 소녀>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독일 등 무려 8개 국가가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프로젝트 마켓을 통해 주목을 모았던 장편 프로젝트들이 대체로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공동제작의 형태로 개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몇 년간 이러한 경향이 더욱 도드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공동제작 프로젝트에 대만 영화기관과 펀딩이 주요 파트너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파트너십과 돌파구가 필요한 한국독립예술영화계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오월의 눈>은 1969년 5월 13일 말레이계와 중국계 이주민(주로 중국남부에서 이동해온 호키엔족)이 충돌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5. 13.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계 이주민들로 연결되는 복잡다단한 말레이 반도의 역사를 단박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화교의 숫자가 많았던 싱가포르를 억지로 독립시켰고, 그럼에도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던 중국인과 인도계에 대한 차별과 분리가 이어지던 1960년대의 말레이시아는 민족주의의 발흥과 인종 차별,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폭발 직전의 인종 갈등을 촉발시킨 계기는 1969년 말레이시아 세번째 총선거 이후 3일째가 되던 5월 13일,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인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거리에 나서면서 이에 자극 받은 말레이계와 충돌하면서부터다. <오월의 눈>의 제목은 오랫동안 중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고전 희곡인 관한경의 『두아원(竇娥寃)』에서 왔다. 『두아원』은 하늘에 사무치는 두아의 원한, 이라는 뜻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이 베어지는 참형을 당한 두아(영어로는 Dou E)가 처형 직전, 내가 죄가 없다면 초여름에 눈이 내리고 가뭄이 들 거라고 외치고 처형을 당했는데, 실제 그녀의 예언대로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들자, 조정에서 재조사에 나서 그녀를 음해한 사람들을 처형한다는 스토리를 지닌 일종의 잡극.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소개되며 모든 연령대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자, 13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당시 지배계층의 착취와 혼란스런 정치로 인해 고통 받던 민중들의 현실과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극이었으며,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경우를 당하는 민중에 대한 메타포로 종종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어제목으로는 『The Injustice to You E』 또는 『Snow in June』로 번역되었는데, <유월의 눈>을 차용해 <오월의 눈>으로 제목을 지은 것은 감독의 명확한 의도가 읽혀지는 지점이다. <오월의 눈>은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진다. 첫 번째 챕터는 1969년 5월 13일, 당시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중국오페라 거리극 <유월의 눈> 공연을 준비하는 극단 사람들과 두 아이를 가진 중국인 부부의 하루를 따라가며 그날, 중국인 거주지역의 현장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두 번째 챕터는 2018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14번째 총선거 이후 4일째가 되는 날 시작하는데, 이 총선거를 통해 말레이시아에서는 61년 만에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1969년 5월 13일 당시, 살아남은 아 엥은 신문기사를 통해 5.13 사건 희생자들의 집단매장지로 추정되는 공동묘지터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50년만에 아빠와 동생이 묻혀있을 수도 있는 매장지를 찾는다. 영화는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지지만, 두 개의 챕터를 연결하는 역할은 거리극 <유월의 눈>의 주인공인 “두이 Dou E”가 맡는다. 중국인 거주지역에서 거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극단의 주연배우인 두이는 첫 번째 챕터에서는 마제스틱 극장 지붕에서 유혈현장을 바라보며 위무의 노래를 부르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집단매장지에서 죽은 자들과 무명묘를 위해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첫번째 챕터는 역사서에 기록된 문장에서 시작한다. “말레이 연대기 The Malay Annals”에는 “왕의 한센병은 감히 말라카 술탄에게 탄원서를 보낸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선 술탄의 발을 씻은 물을 마셔야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말레이인과 중국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주요한 영화적 상상으로 재연된다.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딸을 데리러 온 엄마는 버스를 타고 아빠 아쿠와 아들이 있는 신사로 향한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을 위해 Datuk Gong (말레이와 중국의 신이 혼재된 형태의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부부. 아빠는 인근 마제스틱 극장 티켓 2장을 구했다며 아들과 극장으로 향하고, 엄마는 딸과 함께 거리극 <유월의 눈>을 관람한다. 당시 마제스틱 극장에는 대만영화 <부심적인 負心的人>(The Jilted)이 상영중이었는데, 상영 전 광고로 보여지는 차기 개봉작은 말레이시아 영화 <송곳니를 가진 왕>(Raja Bersiong, The King with Fangs)인데,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민담을 영화화한 것으로, 우연하게 음식에 들어간 피맛을 본 왕이 그 맛에 취해 더 많은 피를 원하게 되면서 민중들을 학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방화와 살인이 시작되고, 엄마와 딸은 극단원을 따라 무대 뒤 공간으로 숨어들지만, 외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피하지 못한 극장 안 사람들은 모두 살육당하고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영화의 두번째 챕터. 2018년 5월 13일. 당시 엄마와 함께 살아남은 아엥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남편의 구박에도 무기력하고 지쳐보인다. 오랫동안 아빠와 동생의 시신을 찾아 다녔지만, 그동안 엄마는 죽었고, 아무 기록도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아 엥은 무력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시 5. 13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집단 매장지가 재개발된다는 기사를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쿠알라룸푸르로 향한다. 당시 중국인 집단거주지역이었던 푸두 Pudu는 이제 고층빌딩이 들어선 도심으로 변했지만 마제스틱 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다. 어려서 다녔던 초등학교 옆 가게에서 차를 마시는 아엥은 옆 자리에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공연에 늦었다며 재촉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 뒤로 남아 있는 낡은 신사에는 버려진 두리안 껍질들과 쓰러진 작은 불상들이 있다. 택시를 타고 숭가이 불로에 있는 지역 집단 매장지로 향하는 아엥에게 택시기사는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도착한 아엥은 그곳에서 아까 가게에서 만났던 무리들이 무덤 주변에 공연을 위한 무대를 설치하려 하지만, 공무원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말리자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두이가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시대를 구분하여 두 개로 나눠진 영화의 구조는 완전히 다른 양식과 형식미를 보여준다. 학살의 순간, 극장 공간 안과밖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던 한 가족의 비극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우아한 움직임과 다다미 쇼트를 연상시키는 낮은 앵글, 그리고 형식미를 강조한 미장센은 일본과 대만의 고전영화로부터 받은 영화적 유산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여러 지점에서 허샤오시엔 감독의 < 비정성시 >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거리극의 공연장면을 삽입하고 거리극과 현실 사건의 스토리를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방식과, 코끼리를 탄 말라카 술탄이 등장하는 장면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마술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데, 이를 다루는 신인 답지 않은 영화적 야심과 완숙미가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2018년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챕터는 동남아시아 예술영화의 전통과 특징들이 묻어나는데,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아엥의 무료한 일상과 지근거리에 있는 신사의 존재, 그리고 산 사람인지 영혼들인지 불문명한 사람들이 등장해 도시를 지나 집단매장지에 이르는 동안, 카메라는 유령을 쫓듯 계속 흔들리고 유동하듯 움직인다.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실체. 남은 기록이라곤 증언과 기억밖에 없는 그날의 진실을 매년 5월 13일이 되면 집단매장지를 찾아와 제사를 지내는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빼어난 사운드로 그날의 현장을 영화적으로 복원해낸 감독의 뚝심과 용기에 찬사를.
2018년 사사로운 리스트 슬럼프가 왔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영화들을 봤지만 감흥이 느껴지는 영화가 드물었다. 머리로는 얼마나 좋은 영화인지 알겠는데, 심지어 영화를 보면서 울컥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영화들은 마음에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래서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한 해 동안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의 제목을 살펴보면서 막막해졌다. 그러다가 간신히 추려낸 약 20여 편의 리스트에서 한국에서 정식으로 볼 수 없는 영화, 이미 많이 봤을 법한 영화, 다른 분들이 언급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들을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올해 이 사사로운 리스트는 말하자면, 개인적인 올해의 영화 리스트라기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특별한 추천작 목록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델마 먼저 < 델마 Thelma>(2017), 요아킴 트리에는 우울과 불안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만 이것을 주인공의 성장 서사를 위해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영화 언어로 자기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몇 안 되는 동시대 감독 중 하나다. 어떤 장르의 외투를 둘러도 그의 영화의 중심에는 인물의 내면이 있다. 따라서 그의 모든 영화는 본질적으로 심리 드라마다. 초능력 소녀가 주인공인 평범한 스릴러 공포 영화일 수도 있었던 요하킴 트리에의 네 번째 장편영화 <델마>가 특별했던 건 이 때문이다.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을 다루는 모든 영화는 기본적으로 성장영화다. 성장 드라마가 주는 진짜 감동은 주인공이 겪는 고난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순간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때 찾아온다. 좋은 성장영화에는 항상 이런 영화적 순간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오 자오의 두 번째 장편영화 < 로데오 카우보이 The rider >(2017)와 앤드류 헤이의 네 번째 장편영화 < 린 온 피트Lean on pete >(2017)은 웨스턴 무비와 로드무비라는 각기 다른 영화적 틀을 빌려왔고, 두 감독의 나이도 성별도 문화적 배경도 다르지만 서로 닮은 구석이 많은 꽤 괜찮은 성장영화들이다. 살다 보면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다.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누군가는 견딜 수 있지 않으냐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스러운 현실의 깊이를 판단할 수 없다. 영화가 이런 현실에 처한 주인공을 다룰 때 취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방법은 현실에 대한 설명을 아예 생략하고 현재만을 보여주거나 관객에게 고스란히 현실의 고통을 체험케 하는 것이다. 데브라 그래닉의 < 흔적 없는 삶Leave no trace >(2018)이 전자의 경우라면 자비에르 르그낭의 <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 >(2017)는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이야기나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 특별하진 않지만,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 개봉한 대표적인 해외 전기 다큐멘터리는 < 맥퀸Mcqueen >(2018)과 < 휘트니Whitney >(2018)였다. 두 영화 모두 재미있게 봤지만 새롭진 않았다. 그럼에도 <휘트니>에 더 관심이 갔던 건 인터뷰 장면에서 감지되는 긴장 때문이었다. <맥퀸>의 인터뷰는 매우 신중했고, <휘트니> 속 인터뷰는 종종 공격적인 동시에 방어적이었다. 두 영화 모두 유명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지만 <맥퀸>에 비해 <휘트니>가 상대적으로 영화가 다루는 인물의 깊숙한 내면과 뒷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터뷰어의 태도와 질문,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 만들어진 긴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반면 EBS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18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 < 레노와 엔젤피쉬Lenno and the angelfish >(2017)는 현실을 재구성해내는 스토리텔링과 영화적인 편집이 인상적이었다. 올해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히 많은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행동장애를 가지고 있는 10살의 남자아이의 내면과 일상의 긴장을 이 정도로 밀도 있고 생생하면서도 깔끔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를 적어도 올해에는 본 기억이 없다. 넷플릭스가 코엔 형제의 <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 >,(2018) 폴 그린그래스의 < 7월 22일 22 July >(2018), 알폰소 쿠아론의 < 로마Roma >(2018)를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손 웰스의 미완성 유작 <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 >(2018)이 넷플릭스를 통해 완성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문득 앞으로 예술영화도 결국 더 큰 욕망을 가진 자본으로 지속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40여 년이 지났어도 모던함을 잃지 않은 오손 웰스의 세련된 영화적 감각에 감탄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어떤 투자사도 수익을 보고는 감히 투자하지 못했을 이 영화에 돈을 댄 넷플릭스의 욕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올해 리스트의 유일한 한국영화인 김보라 감독의 < 벌새 >(2018)는, 맥락은 다를 수 있겠지만, 68년 프랑스의 신좌파로부터 시작되어 최근 페미니즘 논쟁에서 종종 회자되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는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벌새>가 정치적인 영화라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영화가 되려는 욕망 없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한 시대를 온전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영화를 또는 다큐멘터리를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현실을 담아내는 도구로 활용하곤 하는 최근 독립영화의 어떤 경향 속에 튀어나온 이 영화가 그래서 무척 반가웠다. 올해 사사로운 리스트에 언급한 10편의 영화 중 8편은 네이버, EBS D-Box, 넷플릭스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정식으로 볼 수 있고, 영화제에서만 공개되었던 <벌새>는 멀지 않아 극장에서 개봉할 것이다. 혹시 언급된 영화에 관심이 생긴 분들은 찾아보면 좋겠다. 이제부턴 올해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유일하게 특별한 기회가 오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없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고도 그 흔한 감상평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러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이번 기회를 빌려 꼭 소개하고 싶은 잉량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 가족 여행A family tour >(2018)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영화가 바꾼 삶 2012년 4월,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를 1주일쯤 앞두었던 어느 날이었다. 영화제 준비로 어수선한 사무국에 동네 아저씨 같은 차림을 한 까무잡잡한 얼굴의 한 남자가 찾아왔다. 이름도 말하지 않고 연변에서 온 사업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사람은 ‘상하이에 있는 자신이 아는 사업가가 중국의 잉량 감독이 완성한 영화의 판권을 사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는 영화 제목은 물론이고, 영화의 내용도 잘 모르는 듯했다. 영화를 사면 영화제에서 상영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물었고 자신은 중국 정부가 보내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잉량 감독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잉량 감독 2012년 당시 잉량 감독은 장 위엔, 왕 샤오수와이, 지아 장커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 6세대 감독 이후 국제 영화계에 등장한 중국의 대표적인 신진 독립영화감독 중 하나였다. 197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베이징사범대학 예술학과와 중경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방송국에서 조연출 생활을 했지만 그에게 방송국은 창작할 여지가 없는 상업적인 공간일 뿐이었다. 1999년부터 틈틈이 매년 2편 정도의 단편영화를 만들어왔던 그는 2003년에 단편영화 <잃어버린 집 Missing Home>을 완성하여 홍콩국제단편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감독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영화사 ‘90분’을 설립했다. 이후 2005년, 3만 위안(한화 500여만 원)의 제작비로 장편 데뷔작 < 아버지를 찾아서 Taking Father Home >를 완성했다. 이 영화는 도쿄필름엑스, 샌프란시스코, 런던, 밴쿠버 등 전 세계 영화제에 상영되었고 여러 개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단번에 주목받는 중국의 독립영화감독이 되었다. 이듬해 그동안 받은 상금과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후벌트 발스 펀드의 지원으로 2006년 두 번째 장편영화 < 다른 반쪽 The Other Half >을 완성했다. 이 영화 역시 호평을 받으며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우석상을, 도쿄 필름엑스에서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세 번째 장편영화 < 호묘 Good Cats >를 완성했고, 이후 세 편의 단편영화를 연달아 연출했다. 그중 버스가 강으로 추락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이야기를 한 개의 쇼트로 담아낸 단편영화 < 위문 Condolences >(2009)은 로테르담영화제 단편부문 대상(타이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5년 데뷔작을 완성한 후 2011년까지 그는 총 3편의 장편영화와 4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그의 모든 영화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들을 결합하여 중국의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비판해왔다. 이러한 그의 영화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도시의 주변부를 부유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어려운 일상과 복잡한 심리를 담아내고 결국 중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했던 중국의 6세대 감독들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는 6세대 영화감독, 특히 지하전영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의 지아 장커의 영화적 자산을 독창적으로 계승한 거의 유일한 중국 감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영화들은 선배들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먼저 상영되었고 주목받았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중국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일은 당연히 쉬운 일 일리 없었다. 2008년 이후 그가 단편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건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전주국제영화제는 1회 영화제부터 세 명의 감독을 선정해 5천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하여 세 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단편영화 제작 프로젝트 ‘디지털 삼인삼색’을 운영해왔다. 당시 전주국제영화제는 매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대륙별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2012년 디지털 삼인삼색의 기회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었던 아시아의 젊은 감독 3인에게 돌아갔다. 필리핀의 라야 마틴, 스리랑카의 비묵티 자야순다라, 그리고 중국의 잉량이 그 주인공이었다. 5천만 원의 제작비는 유럽 감독들에게는 단편영화를 만들기에도 적당한 돈이 아니었지만, 아시아의 젊은 감독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잉량과 라야 마틴은 5천만 원의 제작비로 각각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잉량 감독이 4번째 장편영화를 위해 선택한 이야기는 2008년 상하이에서 여섯 명의 경찰이 살해된 실제 사건이었다. 이후 중국 사법제도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진 이 사건에서 중국 정부는 재판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경찰을 살해한 범인의 어머니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어머니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채 판결 후 7일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영화는 범인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탄원서를 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면서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중국의 이러한 독단적이고 불합리한 사법제도를 날카롭지만 은유적으로 비판했다. 제작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던 이 영화는 완성될 무렵 그 존재가 알려졌고, 실제 영화의 내용과 관계없이 소재만으로 중국 정부의 심기를 자극했다. 잉량 감독을 통해 나중에야 들었지만, 그가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압박은 단순한 압력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만났던 연변 사업가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중국 정부와 상하이 공안은 2012년 2월부터 전주국제영화제가 개최되었던 5월까지 약 4달간 감독에게는 물론이고 중국의 여러 도시에 있는 감독과 아내의 부모와 지인을 수십 차례 찾아가 다양한 방법으로 재편집과 상영 취소, 영화 폐기를 강하게 요구했다. 말이 요구였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회유와 압박을 거부하고 영화 상영을 강행했다. 돌이켜보면 영화의 판권은 영화제가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감독이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영화제 측에 상영 취소나 영화 폐기를 요청했다면 영화제는 이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 영화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이 문제에 관해 망설이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이렇게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세상에 공개된 <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When Night Falls >(2012)은 그의 전체 필모 중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큼 좋은 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에 그동안 축적해온 영화적 자산과 재능을 온전히 쏟아부었고 부조리한 현실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만의 영화적 감각과 리듬으로 재구성해냈다. ‘다큐멘터리적인 영화’ 또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서 쌓아 올려왔던 그의 영화 세계는 그렇게 완성된 모습을 드러냈다. 첫 상영 이후 곧바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함께 수상했다.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2012년 말에는 미국 영화 전문지 필름코멘트가 선정한 미국 미개봉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네 번째로 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다시는 자신이 태어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영화 한 편은 이렇게 한 영화감독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삶은 다시 영화가 되다 홍콩에서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홍콩 영화 아카데미 등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태어난 아이를 돌보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2016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로테르담 도시 재건 75주년을 맞아 기획한 ‘재건의 시작 This Is Where Reconstruction Stars’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단편영화 < 9월 28일, 맑음 A Sunny Day >를 완성했다. 홍콩 행정장관 선거의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79일간 이어진 민주화 시위 ‘우산 혁명’이 시작된 첫날, 2014년 9월 28일 오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시위에 참여하기 전에 오랜만에 아버지 집을 방문한 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성찰케 하는 따뜻한 가족 드라마다. 그러나 잉량 감독은 ‘시위에 참여하려는 딸’이라는 설정과 TV 뉴스, 라디오, 휴대폰 등을 활용하여 당시 홍콩의 첨예했던 현실을 영화에 끌어들이며 영화에 자신의 인장을 새겨 넣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가족 이야기는 이렇게 그의 손을 거치면서 당시 홍콩의 현실을 은유하는 사회 드라마로 확장, 변화되었다. 그는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도, 중국의 외교 정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예민한 소재인 ‘우산 혁명’의 순간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담아내며 자신의 영화가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지난 6년간의 자신의 실제 삶을 토대로 한 다섯 번째 장편영화 <가족 여행>을 완성했다. 2018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이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든 후 5년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홍콩에서 살고 있는 중국의 여성 영화감독 양수다. 양수는 홍콩 국적의 남편과 4살이 된 아들과 살면서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대만의 가오슝에서 열리는 한 영화제에 초청받게 되자, 남편의 도움을 받아 대만에서 5년 만에 엄마와 다시 만나기로 한다. 중국의 단체 여행객 틈에 섞여 대만에 온, 그러나 곧 큰 수술을 앞두고 쇠약해진 엄마와 오랜만에 재회한 양수는 서로 떨어져 살았던 시간을 절감하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낸다. 사실 <가족 여행>은 2017년 대만의 가오슝 필름 펀드의 지원을 받아 완성한 흑백 단편영화 < 엄마의 고백 I Have Nothing To Say >과 한 쌍인 영화다. 장편과 단편 시나리오 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고, 촬영도 마찬가지였다. 두 영화 모두 양수와 엄마의 재회를 다루지만 <가족 여행>이 딸인 양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인 반면, <엄마의 고백>은 같은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겪은 엄마의 여정을 엄마의 독백으로 담아낸 영화다. <가족 여행>에서 오랜만에 만난 모녀는 애틋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주 소소하게 다툰다. 양수는 양수대로 지난 5년간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혼자 사는 나이 든 엄마는 엄마대로 딸 때문에 중국 정부로부터 어지간히 시달리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고, 매일 안부를 주고받으며 영상통화를 했지만 그건 한 공간에서 일상을 부대끼며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상황을 헤쳐나가기에도 바빴던 무뚝뚝한 딸은 엄마와의 소통을 남편에게 미뤄두었고, 엄마는 딸의 상황을 헤아려 자신이 겪어야 했던 모든 것들을 말하지 않았기, 아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짧은 만남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면서 소원해진 엄마와 딸이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복원해가는 시간임과 동시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각자의 사랑의 방식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오랜만에 만난 모녀가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하고, 소리 내어 웃거나 우는 장면 따윈 없다. 그저 담담하게, 하지만 아주 세심하게 두 인물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를 포착하면서 그들의 여정을 따라갈 뿐이다. 영화에 이렇게 밀도 높은 인물의 감정이 담길 수 있었던 건 감독을 포함한 세 명의 작가가 신중하고 꼼꼼하게 쓴 시나리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연 배우들의 공이 크다. 양수를 연기한 공저(Gong Zhe)는 전문 배우는 아니었지만 매일 양수 입장에서 일기를 쓰며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면서 이방인의 정체성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감독의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한다. (그의 일기는 나중에 정리되어 영화에 담겼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2012)에서 살인자의 어머니 역을 맡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오랫동안 로우 예 감독 영화의 프로듀서를 맡아온 베테랑 배우 나이 안 Nai Ahn은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엄마 역을 맡았지만 그야말로 원숙한 연기력으로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는 딸을 둔 엄마의 심정을 사실적으로 연기해낸다. 말레이시아 독립영화에서 주로 악역을 소화했던 테오 펫(Teo Pete)는 고집 센 양수의 곁을 지키는 이해심 많은 남편 역을 맡아 이야기의 한 축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잉량 감독은 세 배우의 연기 앙상블을 통해 자칫 너무 감상적이거나, 너무 무거울 수 있는 영화의 톤을 적절한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가족 여행>은 기본적으로 픽션이다. 잉량은 자신의 개인사와 분리시킬 수 없는 이 영화를 더욱 픽션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영화와의 거리를 두기 위해 처음에 남성이었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었고, 대만에서 가족을 만난다는 설정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3명의 작가 중 한 명이자 영화에서 중국 단체 관광객의 인솔자로 출연한 배우이기도 한 아내 펭샨의 경험에서 빌려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양수와 엄마가 겪은 에피소드들은 지난 6년간의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 영화에는 2012년 이후 만든 그의 모든 영화들이 호명되는데, 양수가 만든 정부 비판 영화는 제목을 바꾸고, 다시 찍은 장면을 썼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과 같은 영화이고, 양수가 만들고자 하는 차기작은 장편영화이긴 하지만 <9월 28일, 맑음>과 같은 영화다. <가족 여행>에서 차기작을 위한 오디션을 보는 장면에 등장하는 배우는 <9월 28일, 맑음>에서 실제 아버지 역을 맡았던 배우다. 따라서 <가족여행>은 픽션영화이긴 하지만 2012년 이후 잉량 감독의 인생과 그가 만든 영화들의 총합인 동시에, 잉량 감독의 영화 인생에 있어 중간 결산과도 같은 논픽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9월 28일, 맑음 잉량 감독은 2012년까지 최소의 예산으로, 자신이 주도하는 최소한의 제작팀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동안 그는 말 그대로 중국의 독립영화감독이었다. 중국의 독립영화는 단순히 자본과 영화의 내용으로 규정되기보다 일반적으로 ‘검열의 유무’로 규정되어 왔다. 잉량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국의 많은 독립영화감독들이 해외의 국제영화제들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것은 이 검열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시진핑이 국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던 2013년 전후로 검열받지 않은 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강하게 규제했다. 중국독립영화를 의미하는 ‘지하전영’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시기도, 2006년 시작된 중국의 대표적인 독립영화제였던 베이징독립영화제가 2012년과 2014년 사이 중국 공안의 방해로 열리지 못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와 오버랩된다. 이제 중국에는 정부의 승인 없이 만들어지는 영화도, 개최되는 독립영화제도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독립영화를 매핑하기에는 본 영화의 숫자가 적어서 정확하게 말할 순 없겠지만, 그리고 왕빙을 비롯한 몇몇 감독들이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며 여전히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잉량 감독의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은 우리가 알고 있던 중국 독립영화의 생명이 다할 무렵 만들어진 마지막 중국 독립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족 여행>은 잉량이 중국에서 만들었던 장편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영화다. 여전히 적은 예산으로 제작되었지만 이번 영화는 처음으로 투자의 과정을 통해 제작비를 확보했고, 여러 분야의 전문 스텝이 참여했다. 일반적인 영화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전작에 비해 영화 곳곳에서 훨씬 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신경 쓴 흔적들이 많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족 여행>은 중국이 아닌 홍콩에서 만든 첫 장편 영화다. 비록 홍콩이 중국의 특별자치구이긴 하지만 영화의 제작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홍콩이고, 그는 이제 중국 독립영화감독이 아니라 홍콩의 독립영화감독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 양수를 이해하고 온 힘을 다해 아내를 지키는 남편이 홍콩 사람인 건 잉량 감독에게 홍콩이라는 제2의 고향이 가진 의미의 표현일 것이다. 또한 대만을 배경을 한 이번 영화에서도 변함없이 대만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이슈인 ‘양안 문제’를 택시 기사와 TV 뉴스를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화에 끌어들이고, 양수가 3명의 투자자가 실종되는 사건을 겪으면서도 홍콩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이슈인 ‘우산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기어이 영화에 넣어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의 진로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의 이번 영화가 소재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분명히 2012년 이전보다 훨씬 다듬어졌고, 세련되어졌으며, 이른바 ‘다큐멘터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전 영화들에 비해 훨씬 더 극영화스러워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족 여행>은 잉량 감독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화의 영역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선택하지 않은 걸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잉량 감독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고, 지금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자주 지금의 삶이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의 복잡한 심정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의 마지막, 양수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자신의 영화를 아이와 함께 다시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가기 직전, 기자가 묻는다. “당신은 홍콩 사람입니까? 중국 사람입니까?” 그는 대답한다. “나는 이방인입니다.” 망설임 없이 답변하는 양수 뒤편으로 자신과 자신의 영화를 초청해준 영화제의 포스터가 보인다. 그 포스터의 중앙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어떤 사람도 아웃사이더로 계속 살 순 없다. No One Can Stay an Outsider.’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량 감독이 견뎌낸 지난 6년 동안의 인생의 결산과도 같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바친다고 말하며 끝난 <가족 여행>이 반갑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 영화가 잉량 감독이 앞으로 다시 한 발짝 전진할 수 있을 기회가 되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들 저런 인생을 살았다면 한 번쯤은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갖고 싶을 것이다. 잉량 감독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화로 인생의 한 챕터를 정리해냈다. 영화가 바꾸어 놓은 삶은 다시 이렇게 영화가 되었다. 그는 이제 과거와는 다른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언제나 그의 삶을 응원하면서 다음 영화를 기다릴 것이다. (보태기)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영화 웹진 리버스의 요청을 받아 <가족여행>의 상영을 위해 부산을 방문한 잉량 감독과 인터뷰를 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 인터뷰를 살펴봐도 좋겠다. ( http://www.reversemedia.co.kr/article/89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서영춘의 코미디와 검열의 관계를 살펴보는 두 편의 글 중 첫 번째 글이다. 서영춘의 코미디에 집중해서 검열 서류를 살펴보는 이유는 그가 악극이나 쇼 무대의 활동을 넘어 라디오와 영화 등 대중매체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난 뒤부터 끊임없이 ‘저속성’ 논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서영춘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저속 코메디언”으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최고의 체크 기록”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1) 말하자면 서영춘의 코미디는 ‘저속함’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의 통속성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검열은 코미디에서의 ‘저속’과 ‘건전’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글에서는 서영춘의 영화 출세작이었던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와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왔으며 공보부의 검열 강화 기조에 일조했던 <오대복덕방>(이형표, 1968)을 중심으로 검열의 추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는 성적인 표현과 동성애 코드를 둘러싸고 검열에 재검열을 거쳐 상영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영화검열의 기조와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과 ‘통속’ 코드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본격적인 코미디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악극단의 인기 배우들이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끌던 시점이기도 했다. 식민지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코미디영화들도 이 시기에 다양한 하위 장르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다. 악극단과 라디오에서 주가를 올리던 코미디 배우들은 영화에서 자신들의 장기와 퍼포먼스를 발휘하면서 코미디영화의 활황을 이끌었는데, 가장 먼저 스크린을 점령했던 것은 양석천과 양훈, 홀쭉이와 뚱뚱이 듀오였다. 뒤를 이어 등장했던 구봉서와 김희갑은 검증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수많은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서영춘은 다소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악극단과 라디오, 쇼 무대를 거쳐 1960년대 스크린 코미디의 총아가 되었다. 서영춘(1928~1986)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서영은의 동생으로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52년 악극단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백금녀를 만나 뚱뚱이-홀쭉이 콤비를 이루면서 유명세를 탔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반 라디오 코미디의 전성기에 동양라디오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TV쇼의 사회자이자 백금녀와 함께 하는 만담의 출연자로 등장하면서 서영춘은 “여보 마누라 가갈갈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뿜빠라뿜빠 뿜빠빠”, “살살이, 요건 몰랐지?” 등등의 유행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로 시작되는 일종의 만요와 “시골영감 기차놀이”의 리메이크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스타 코미디언으로 발돋움했다. 서영춘의 영화 데뷔작은 1961년 <인생갑을병>(박성복)으로 여기서 그는 엑스트라 급 조연을 맡았으나, 1964년 <총각김치>(장일호),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서영춘은 이 영화의 흥행을 시작으로 라디오와 TV, 스크린,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여자가 더 좋아>는 서영춘을 스타 배우로 만든 영화일 뿐 아니라 1960년대 후반 유행했던 여장남자코미디의 시초이자 이 시기 코미디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 즉 코미디언코미디의 활황을 선도한 영화였다. 여장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성전환 수술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코미디이지만 검열에서는 거의 지적된 바가 없으며 오히려 흥행을 통해 재평가된 지점이 존재했다. 한편, <오대복덕방>은 서영춘이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출연하는 영화여서 전체적인 비중으로 볼 때 ‘서영춘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온 영화였고 공보부의 검열강화 기조에 일조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여자가 더 좋아>를 살펴보자. 코미디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였던 <여자가 더 좋아>는 오랫동안 유실된 필름이었다. 다행히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 ‘한우섭-한규호 父子 컬렉션’이 기증되어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2016년 5월 31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최초로 일반 상영되었는데, 후반부 20여 분의 싱크가 맞지 않고 마지막 씬이 유실된 불완전판으로 공개되었다. 유실된 부분에 대하여 시나리오, 검열 서류 및 각종 기사들과 스틸 사진 등의 자료를 보충하여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는 흡사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남녀가 뒤바뀐 설정의 코미디 버전처럼 보인다. 여자직업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일하던 규철(서영춘)은 동거하고 있던 애인 영숙(최지희)이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하자 여장을 하고 그 집의 식모로 들어가 복수하고자 한다. 영숙이 규철을 배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의학적 소견 때문이다. 이를 인정할 수 없는 규철은 변심한 애인을 벌하고자 규화라는 이름으로 여장을 하고 영숙의 집에 식모로 들어간다. 시아버지(김희갑)의 못된 버르장머리 때문에 “식모란 식모는 모조리”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던 이 집에서 애교스럽고 일 잘하는 규화는 시아버지의 총애(를 가장한 성추행)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규철은 뛰어난 피아노 실력으로 영숙의 남편 박문기(남궁원)에게도 호감을 사며 문기의 동료이자 악극단의 지휘자인 선우광(양훈)으로부터는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인하게 된 규철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질주한다. 현재는 유실되었으나 시나리오 및 신문기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엔딩 씬은 질주하던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는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 여성이 되어 병원을 나선 규철이 “교태를 부리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파격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던 <여자가 더 좋아>는 그럼에도, 검열에서 큰 지적 사항 없이 영화화되었다. 시나리오 심사의견서는 이 영화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여자 같은 남자’ 콘셉트를 베꼈다고 지적하면서 코미디에 필요한 “건전한 웃음” 없이 “난잡”하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오로지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비예술적 태도를 지양할 것을 주문했다. (그림 1) 공보자문위원회 영화분과위원회, 「“여자가 더 좋아” 씨나리오審査意見書」, 1965.4.22. <여자가 더 좋아>의 시나리오 검토는 제작자에게 “건전한 웃음”과 ‘코미디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다소 추상적이고 훈계적인 내용의 ‘의견서’로 제출되었다. 그런데 건전한 코미디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공보부에서 ‘눈깔’ 등의 대사를 시정하라는 것, 선우광과 규철의 밀회 장면을 ‘주의 깊게 취급’해달라는 것 등 5개의 가벼운 지적 사항과 함께 제작신고 수리 통보를 받았다. (그림 2) 공보국 영화과, 「극영화 “여자가 더 좋아” 제작신고 수리통보」, 1965.5.31. 그리고 실사 검열에서는 위의 밀회 장면을 단축하라는 단 한 가지 지적을 받고 상영이 허가되었다. (그림 3) 공보국 영화과, 「국산영화 “여자가 더 좋아” 상영허가」, 1965.6.19. 상대적으로 ‘반공법’ 위반에 주목하고 있었던 이 시기의 영화검열은 아직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함’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만화조 넌센스의 소극” 2) 에 불과하다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평단에서 의외로 영화가 장기 흥행 하며 관객 몰이에 성공하자 이 영화가 일종의 사회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저속’함에 대한 면죄부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영화의 장기 흥행을 보도하면서 한 기사는, 남자였을 때 누릴 수 없었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여장을 하고 난 뒤에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성전환을 택한 “서영춘의 페이소스”와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는 비평을 실었다. 3) 같은 해 11월에 개봉한 영화 <주책바가지>(심우섭, 1965)를 혹평하면서, <주책바가지>에는 <여자가 더 좋아>의 “페이소스”가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한 기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한편, <여자가 더 좋아>가 제작되었던 1965년 이후,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검열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면서 코미디영화 검열 역시 강도가 높아졌다. 1967년 말에 제작하여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제작 후 필름검열을 모두 통과하고 1968년 2월 개봉 중이었던 <오대복덕방>을 공보부가 재검열하겠다고 나서면서 이 영화는 검열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시나리오와 기사, 스틸 사진 등으로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오대복덕방>은 김해 김씨 일가 5대의 이야기로, 영화는 90세의 1대 용태 할아범이 서울에 와서 복덕방을 차려 성공하자 자손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면서 시작된다. 이후 전라도 무주에서 상경한 일가족이 한 동네에서 각자 복덕방을 차리면서 각종 해프닝을 벌인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정할 수는 없지만 추정하건대, 서영춘은 3대 김영근으로 등장하여 결혼 사기를 당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던 5대 일가족은 사기사건을 계기로 화해하고 개심하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전라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 가족의 ‘저속한’ 행태와 말투로 인해 전라도 지역 영사기사들이 영사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전북극장협회에서도 영화 상영을 거절했다. 검열 서류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전라북도 내 영사기사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는 기사와 전북극장협회의 상영 거절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5) 뿐만 아니라 김해김씨 종친회 및 전라북도 도지사의 상영정지요청도 이어졌다. (그림 4)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영화상연중지요청」, 1968.2.5. (그림 5) 전라북도지사,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 1968.2.9.) 김해김씨 종친회의 민원은 <오대복덕방>이 “우리종친인 김해김씨의 명예를 형언할 수 없을 만치 훼손한 스토리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인 종친사회를 근본적으로 모욕한 것”이므로 즉각 상연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전라북도 도지사의 이름으로 발송된 건의서에는 이 영화가 “오락적 경지를 벗어나 전래의 미풍양속을 해하고 나아가서는 혈연의식과 지역적 파벌을 조장하는 결과를 자아내”어 “전북도민으로 하여금 격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게 하고 신문, 방송 등 이 고장 언론기관이 선두에서 이를 규탄하는 일대 쎈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동시에 본도 전도민이 항의에 기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략)... 국민적 단합과 정신무장 면에 구열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면서 이 영화를 즉각 상영중지하도록 요청했다. 이 서류에는 전북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기사들도 첨부되어 있어 이 영화를 둘러싼 전북 지역의 여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에서 이 영화는 “건전하며 코믹한 오락작품이면서도 과욕과 허실된 생활을 다분히 경고적으로 풍자한 작의가 좋”다며 “극히 명쾌하고 코믹하면서도 ... 인간 본연의 자세와 선악을 도시 생활상의 일단면에서 풍자적으로 그려주고 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저속한 대사나 장면 묘사에 주의하여 제작”하라는 주의 속에서 무수정으로 검열에 통과했고, 필름 검열에서도 판잣집을 서울의 명물이라고 보여주는 장면, 화장실 씬 등 세 장면을 삭제하고 대사 한 줄 정도를 삭제하라는 수정사항을 지적한 뒤 합격증을 배부했던 것이다.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각본심의위원회,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 1967.12.14. (그림 7) 공보부, 「국산영화 “오대복덕방” 검열합격」, 1968.1.26.) 검열의 호평 속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이 시작되고 나자 앞서 언급했던 각종 투서와 건의서가 공보부에 답지했다. 이러한 여론이 비등해지자 영화의 제작자였던 주식회사 대한연합영화사의 대표이사 홍의선은 재검열과 재편집이 불가능하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서 홍의선은 상영허가검열에 합격하여 이미 상영을 시작한 지 열흘이나 경과된 시점에서 프린트를 회수, 재편집하는 것은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공보부의 “영화위원회의 심의에 회부”하여 검열해 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홍의선은 이 영화가 “정극과는 그 영역이 판이한 희극영화”로 사투리는 “코믹한 텃취로 극을 희화화해보려는 시도”일 뿐이고 전주김씨 17대손 운운은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로 표현한 데 불과”하며 “예의 17대손은 4,500년 전에 존재한 인물로 가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현재 후손들에게 불명예스럽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그림 8) 「희극영화 “오대복덕방”영화위원회심의요청의 건」, 1968.2.6.) 결국 공보부에서는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영화의 재검열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월 1일부터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신고시 첨부되는 각본에 대하여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각본을 검토하도록 했는데, 각본심의위원회는 영화법 저촉사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영화계 내부에서 스스로 조직한 단체였다. 각본심의위원회의 검토를 통과하고 나면 제작이 시작되고, 제작이 완료된 필름은 실사심의를 거치는 이중의 검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심의 제도는 1967년 12월 1일 공보부에 6인으로 구성된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설치되면서 3중의 제도로 변경된 바 있었다. 따라서 <오대복덕방> 상영 분쟁이 생긴 뒤 소집되었던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와 동일한 심의기구로 추정할 수 있다. 1968년 2월 7일 공보부가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재심을 한 결과 “사회적 물의와 진정의 대상이 되는 저속한 부분은 추가 제한 조처함이 가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일단 상영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추가제한 조치로 30여 곳을 삭제, 단축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가락중앙종친회에는 “종친을 특정하는 대사, 화면 및 저속한 대사, 화면을 추가 삭제 조치”했음을 알리는 공문을, 전라북도지사 공보실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대사삭제 29개처, 화면삭제 15개처, 화면 단축 2개처”를 제한조치하여 상영하도록 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그림 9)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 날짜 미상(2.7-2.9일 사이로 추정) (그림10)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 1968.2.9. (그림11) 「진정에 대한 회신」, 1968.2.9.; 「극영화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 1968.2.20.) 그런데 이때 재검열의 내용은 신문기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다소 저속”하지만 “넌센스 코메디임을 감안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다”는 결과를 회신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서류는 확인할 수 없다. 6)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일종의 중재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추가제한 조치에 따라 이후 필름들이 회수, 수정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과 2월 말까지도 이 영화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계속되었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처음부터 상영을 중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재검열을 요구했던 여론의 흐름과 투서를 보냈던 단체들에 보낸 회신으로 미루어볼 때, 필름 회수 후 수정본을 다시 상영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재검열 소동 이후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필름의 상영본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대복덕방>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재검열 사건으로 인해 검열에 대한 여론의 문제제기가 한층 높은 강도로 진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가혹하기로” 이름 높은 검열에서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저의 태작”이라고 평가받는 <오대복덕방>에 별 다른 문제없이 상영허가를 내 준 것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7) 이처럼 상황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홍종철 공보부 장관은 이 영화의 상영허가가 “사무적 미스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고 변명하면서, 이 영화의 재검열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2중, 3중으로 실시되는 영화검열의 엄격함과 그 자의성에 대한 비난이 거세짐에도 불구하고, 홍종철은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것과 윤리적 도덕적인 것에 위배되는 것은 계속 커트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8) 그간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해 왔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이후 공보부의 실사 검열은 <오대복덕방> 검열 논란이 있었던 직후인 1968년 4월 1일부터 각본심의위원회와 영화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합동으로 사전 시나리오 검열을 실시하고 검열의 강도도 강화하는 방침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70년 2월 20일 극영화시나리오 검열 업무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으로 이관될 때까지 이러한 검열의 주체와 기조는 지속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재검열 소동이 벌어졌던 와중에서 <오대복덕방>은 <남자 식모>(심우섭, 1968)와 더불어 개봉관에서 10만 관객을 넘겼다. <남자 식모>가 18만, <오대복덕방>이 10만을 넘기며 그 해 흥행 순위 2위와 5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크린 히트”와 함께 평단에서는 코미디영화 검열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검열에서 “대중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 되었던 <남자 식모>와 “저속”하지만 “코미디”이므로 “웃고 넘길” 수 있다는 정도로 평가 받았던 <오대복덕방>은 검열의 위계상 분명히 같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평론에서는 함께 엮여 “관객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마구잡이로 찍은” “저질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었다. 9) 이 시기, 검열과 평가의 기준을 달리 했던 평단은 서영춘 코미디와 구봉서 코미디를 한 데 묶어 “저질” 코미디로 분류하였으나 검열은 “저질 코미디” 안에서 또 다른 위계를 설정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저속’에 대한 검열의 문제제기와 위계화에 대해서는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의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남자 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 미용사> 등 이른바 ‘남자 시리즈’의 검열서류를 비교하면서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본다. 1) “방송가에 또 하나의 불씨/ 막다른 골목에 이른 코메디 프로 방륜마저 가벼운 경고 정도의 조치 뿐”, 《서울신문》, 1966.9.15. 2) 만화조 넌센스 소극 여자가 더 좋아”, 《조선일보》, 1965.7.15. 3) “우울한 동정에 기대어 롱런 한달 째나 「여자가 더 좋아」”, 《신아일보》, 1965.7.20. 4) “희극배우들의 여성숭배열/ 주책바가지”, 《신아일보》, 1965.11.6. 5) “복덕방 상영거부”, 《대한일보》, 1968.2.10. 6) “말썽난 70여 곳 삭제 항의 속에/다시 검열대 앞에/ 「넌센스 코메디」 오대복덕방”, 《신아일보》, 1968.2.13. 7) “「오대복덕방」 시비를 계기로 본/ 영화검열의 문제점/ 무정견한 양식의 기준/ 제 나름의 주관/ 툭하면 가위질. 영화 드라마의 뼈대를 손상시키기도/ 윤리적 면서 타락, 검열은 계속 강화 공보부의 견해”, 《조선일보》, 1968.2.22. 8) 앞의 기사, 《조선일보》, 1968.2.22 참고. 9) “한계 흐린 가위질/ 영화검열 시비/ <처제>는 저속, <엄마기생>은 OK/ 귀걸이 코걸이 재단/ 업자 당국 반성하고 전문위 두도록”, 《중앙일보》, 1968.5.25.; “관객 동원수로 본 상반기 영화/ 이상기류/ 철저한 오락물 추구/ 난센스 코미디와 검객영화 판쳐/ 흥행서 실패한 올해 수확작”, 《대한일보》 1968.7.9.; “하반기의 영화제작 경향/ 소극, 합작물의 범람/ 거의 예술성을 외면 /아이디어 부족 소재도 저속/ 관람 성향에 편승/ 인니, 태국과 합작도 기획”, 《대한일보》, 1968.7.20.) * 참고문헌: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51집,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