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 감독
- 최경옥
- 제작년도
- 1995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제, 그리고 영화 시상식을 우리는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부른다.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영화팬들 또한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에 참여한 배우, 스태프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영화에 깃든 자신만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영화인 중 누군가가 “그저 상(賞)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거나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 정말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붙어있어서 영화사에는 회사의 존폐가, 감독에게는 차기작의 유무가 걸려있었고, 이로 인해 매년 이 상을 둘러싸고 갖은 암투와 비리들이 횡행하며 영화계에 온갖 잡음을 만들어냈다. 대종상 타면, 그 상 타는 데서 심사위원들한테 로비를 해서 해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있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영화계에 스캔들이 생기고 그렇지요. 또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심사위원 안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뭐 예술회원, 유명한 작가, 다 거의 심사시켜야 된다 그래 갖고. 또 (로비 받은 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추악한 일이 오랫동안 계속 돼…. - 호현찬 , 2004 영화평론가인 호현찬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도 대종상에서는 수상작 선정 과정과 영화인들의 시상식 불참 등 해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9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논란들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1980년대까지, 대종상 하나가 정말 중요했던 이유 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스캔들 에 집중할 것이다. 사실 1990년대와 그 이후 시기 대종상과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아주 쉽게,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굳이 영화인들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궁금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날 옛날에 대종상을 놓고 영화인들 간에 온갖 정치와 거래가 오갔다는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면 우선 우리가 당시 대종상과 영화산업의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넘어가겠다. 나라에서 주는 상 대종상은 공보부 주최로 1962년 3월 30일 국립극장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상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서 가져가면서, 신필름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로 명성을 굳혀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에서도 이러한 신필름의 약진에 주목하는 한편, 처음으로 제정된 영화 시상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에 대해 고무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62년 3월 30일에 열린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사진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종상 시상식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제2회 대종상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영일 은 대종상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된 직후 신문 지면을 통해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버려야 할 전문가 기피증, 대종상 심사위 구성에 일언”, 《동아일보》, 1963. 2. 28. 6면 기사 *주1 ).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의 교체 없이 제2회 대종상 시상식은 예정대로 3월 8일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종상에 대한 논란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종상 시상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도 함께 선정했는데, 이게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작가협회에서는 며칠 후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선정에 대한 건의서를 공보부에 진정했다. 11일 저녁 6시에 모인 제작가협회 이사회에서는 공보부 당국에 대하여 아시아영화제 및 백림영화제 출품작품 선정을 재심해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근본적인 저의는 이번 대종상심사와 영화제 출품선정의 결과에 대한 영화가의 비등한 반발 여론에 비추어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불신의 표기로 짐작된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이번 심사를 ‘보이코트’하자는 여론도 높았으나, 재심으로 출품작품을 엄선하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 “아주영화제 출품작 재심 건의키로”, 《동아일보》, 1963. 3. 12. 6면 기사 이전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기된 불만을 의식한 것인지, 공보부는 제3회 대종상 시상식을 앞두고 영화평론가와 연극영화과 교수 등을 심사위원단에 포함시켰고, *주2 해외영화제 출품작의 경우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후에 별도 선정하는 것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964년 제3회 대종상부터 “우수영화를 장려하는 보상책”으로 대종상 수상작에 대해 ‘외화쿼터’를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외화쿼터 주어, 대종상시상식”, 《경향신문》, 1964. 3. 5. 8면 기사). 대종상은 (공보부) 영화과에서 맹글었어요, 우리가. …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제를 하나 맹글자, 영화상을’ 그래서 ‘상의 이름을 뭘루 허느냐?’ 게 생각허다가 ‘대종상으로 허자’ 이렇게 된 거예요. (우수영화) 장려를 말로만 허믄 또 시비가 되니까, 실제적인 실리를 주는 방향으로 허자. 그게 뭐냐? 쿼터. 우수헌 영화 장려하는 방법으로 쿼터를… 뭐 이렇게 된 거죠. - 이성철, 2009, 309~310쪽 1961년부터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장으로 일했던 이성철은 대종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덧붙여, 우수영화 제작 장려 및 그 보상의 일환으로 ‘쿼터’가 주어지게 된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래도 ‘상(賞)’이니까, 무언가 그에 맞는 적절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쿼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쿼터란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외국영화 수입 권한을 뜻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갈등의 씨앗은 바로 이 ‘외화쿼터’로부터 나온다. 외화쿼터라는 것은 왜 그렇게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억’ 소리 나는 쿼터의 가치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사와 외화수입업을 일원화시키는 동시에 이들 영화사의 수는 국가에서 등록제를 통해 조절하고 있었다(영화업 등록제는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으로 허가제로 바뀌며, 기존 20개사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12개로 줄어든다). 매 시기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허가된 영화사의 수나 외화수입쿼터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산업은 소수의 영화사들이 제한된 ‘쿼터’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독과점 체제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영화 수입편수 및 상영편수(1964~1985) 위의 표를 보면, 그래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는 1년에 50~7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배정⋅수입되었다(쿼터 수와 실제 검열을 받은 영화의 수가 다른 이유는 이전 해의 쿼터의 ‘이월’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표]에서 상영편수가 실제 수입편수보다 많은데, 이는 전 해에 수입되었지만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인기 있는 영화를 재상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입추천(외화쿼터) 수가 줄면서, 외국영화의 수입이나 상영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외화쿼터를 둘러싼 각종 문제 역시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심각해진다. 그때는 외화를 들여오면 1년에 20~25편이야. 그러니까 외국영화를 보려고 하면 하여튼 1년에 고것밖에 못 봐. 다른 작품은 들여오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건 정말 커다란 특혜지, 그냥. 그 대신에 쿼터를 어떻게 해서 얻느냐. 1년에 4작품을 해야 돼. 그래야 인정을 받아, 영화사 영업하는 걸. 그러고 저 우수작품 뭐, 대종상 에서 상을 탔다든지, 뭐 아세아영화제 이런 외국 가서 (상을) 탔다든지 그러면 쿼터 하나씩 나왔다고. … 또 뭐 반공영화를 만들면은 좀 점수를 줬고. … 그렇게 하고 인제 수출을 많이 해서 실적을 올려서 (쿼터를) 타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이 그렇게 돼 있었지. - 강범구 , 2011 , 268쪽 외국영화도 상을 타면 쿼터 하나. 근데 쿼터 값이 얼마냐면, 국산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700만 원 내지 800만 원인데, 쿼터 하나 값이 1,500만 원이었어 , 외화 들여오는 거. - 최경옥 , 2008, 143쪽 그게 내가 파라마운트(극장)에 있을 당시니까, 66년도부터 72년도까지 있었거든요? 나도 거기서 외화를 우리 사장님이 쿼타를 사오고 팔고 해가지고, 나도 그때 쿼타를 사가지고 네 편을 수입해 봤거든요. 쿼타를 사고 팔고 했지, 그때는. (쿼터 하나에) 천만 원 했나? 그거 하나 있음으로 해서 내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니까. {그때 개봉관이 60원 정도할 때} 맞어, 60원. {그럼 억 단위네요, 지금은?} 크지. 그 당시에 60원 하면 요즘은 (입장료가) 6천 원이니까, 100배인가? 10억인가, 지금 돈으로? - 김성근 , 2010, 122~123쪽 그 대종상에서 작품상 타면 외화수입쿼터 하나 준 거야, 그냥. 그 외화쿼터 하나, 수입권을 얻으면 요새 가치로 봐서 약 한 50억 돼, 50억. 가서 외국영화 하나 괜찮은 거, 외국영화 수입을 무제한 개방해 놓은 게 아니고 1년에 20편, 24편 내외 수입쿼터로 맨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들어오면 그냥 어떤 거든지 그건 (관객이) 30~40만 들어간다니까? 음, 그러니깐 외국 나가서 한 10억 주고, 판권 10억 주고 외국영화 하나 사왔다 이거야. 근데 이게 여기서 100억이 되니 이게 얼마나 되냐, 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황금알 채 생긴 거위야. 그래서 그냥 서로가 별짓을 다하고, 인제 사회상은 그랬어요. - 김영효 , 2013, 430~431쪽 위의 구술도 대체로 이 시기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김영효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외화는 일단 상영을 하면 그게 어떤 영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30~40만의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들은 위험성이 큰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상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최소의 비용만을 가지고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쿼터를 가지고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하거나, 아니면 그 쿼터 자체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자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강범구 감독의 구술에서 이 외화쿼터 획득 방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각 회사들은 할당된 한국영화 제작 편수를 채우거나, 우수영화로 선정되거나, 대종상을 수상하거나(시기에 따라 걸린 상의 개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면 1편씩 쿼터가 지급됨), 해외 수출 실적이 있거나,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하는 방법으로 외화쿼터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영화사들은 최소한의 예산을 가지고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한다(제작권도 쿼터가 있어서, 이 숫자도 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4편의 영화에는 우수(반공)영화 또는 대종상용 영화 1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외화쿼터 외에도 추가로 1편의 외화쿼터를 더 얻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신필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구술자 최경옥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 1편 제작에 7~8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외화쿼터 2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영효 감독이나 외화수입사와 극장에서 일했던 김성근의 구술을 보면 그냥 외화쿼터를 팔았을 때는 오늘날 물가로 약 10억 원의 가치가, 직접 외화를 수입해서 상영했을 때는 적어도 50억 원의 이익이 보장되었다(심지어 이 역시 10년 전 물가를 기준한 것으로, 2024년의 물가를 반영하면 더 큰 금액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은 최소 10~50억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입해온 외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김영효 감독의 말처럼 100억 이상의 가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종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대종상을 잡아라!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대종상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로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대종상이 문제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예요. 형식은 이런 겁니다. 심사위원을 누가 맡았다 하면은, 그 심사위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로비대상으로 정해 만나는 거예요 . 가령 당시 심사위원 가운데 소설가가 있다면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 하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도 원작료를 주고 입수하는 거예요. 그거 안 받을 수 있어요? 명분이 있는데. 그게 시가(市價)보다 많아요. 그런 식으로 로비를 합니다. 그 당시 Y 모라는 유명한 심사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에 문어발식으로 관계했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A영화상, B영화상 다 해요. 그럼 A영화상에서 로비 받아가지고 안 된 경우가 있어요. 로빈 받았지만 작품이 밀리니까. 그러면 B영화상 시상식 때 그것을 갚아요. 그럼 이쪽에선 불만이죠. 저쪽은 쿼터가 걸려 있고, 이쪽은 상금이 없다 보니까. 이런 식이에요. - 김종원 , 2008, 355쪽 누구한테 욕먹을 소리겠지만은, 대한민국 영화 대종상은 절대 정상으로 한 영화가 없어. 보믄 뒷거래가 다 있어. …내 누구라고 얘긴 하지 않지만은 대종상 시상날이야. 근데 인제 그날 6시부터, 6시 반부터 시상식을 하는데, 그날 최우수작품을 갖다 결정하는 날이 그때가 5시 반쯤 될 때, 막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그 안에서 인제 투표를 허는 거야. 하기 직전에 누가 문을 탁 여는 거야. 문을 탁 열어가지고 “어이구, 죄송합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문을 닫은 거야, 그 사람이, 응? 그 사람은 왜 그거 문을 열었겠느냐? 자기가 만난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길 잊을 수도 있잖어? 그니까 도장 찍을라고 문을 연 거야, 일부러. 그러구선 모르는 척하고 “어구, 이거 잘못 찾았습니다.” 문을 탁 닫은 거야. 그러니 그 만났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나중에 탈이 날 거 아니야. 그 < 경찰관 >(이두용, 197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합동영화사. 그러구 우성영화사에서 < 세종대왕 >(최인현, 1978)이란 영화를 맨들었어. 막말로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갖다 보여줘서, “이 영화가 좋으냐, 저 영화가 좋으냐?” 할 때 영화적으로 좋은 건<세종대왕>이 좋대는 건 다 인정될 거야. 돈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가 결과적으로 6:5로 졌어. … 쿼터가 걸린 데는 쫙 시커먼 게 쫓아댕겼으니까, 그때. - 양춘 , 2009, 210~211쪽 (상) 제1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경찰관> (하) 남녀조연상⋅미술상을 받은 <세종대왕> 위 구술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우성영화사에서 말 그대로 ‘대종상을 노리고 만든’ 제작비 2억 5천여만 원에, 등장 인원만 16,000명이 동원된 대작 사극이다. 거기에다 교육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부터 자료제공과 협찬을 받는 한편, 역사학자 10명의 고증⋅감수를 받았다. 그러나 흥행업자들로부터 영화적 재미가 없는 ‘교과서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외면당해, 완성한 지 4년이나 지난 1982년 3월 5일 대한극장 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열심히 구애를 했으나 대종상에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과 관객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대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화제작자 양춘의 구술에서 언급된 합동영화사는 대종상 스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특히 우성사와 합동영화사의 대종상 경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더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들어보자. 최훈 감독이 감독한 그걸 골랐는데, 얘길 들어보니깐 얘기가 쪼금 낯익은 것 같기고 해서 시나리오를 봤더니 시나리오가 표절이라. 그래서 이걸 좋은 영화로 만들 순 있지만 소위 대종상이나 우수영화로 내놓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세 번인가를 뜯어 고쳤어, 시나리오를. 그걸 뜯어 고쳐가지고 < 수선화 >(최훈, 1973)로 결정을 졌어. 그 최훈 감독이 대종상을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을 고르자 그래서 최훈 감독을 줬고,또 출연자들도 좀 그렇게 대종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 그래서 장동휘 씨 뭐 이래 가지고 배역진을 골라가지고 시작을 했고. … {그런데 이게 감독상하고 몇 가지 상을 받기는 했는데, 작품상은 못 받았더라고요} 작품상은 아마 < 비련의 벙어리 삼용 >(변장호, 1973)이 받았나? - 박행철 , 2014 , 295~297쪽 그다음에 <비련의 벙어리 삼용>을 우성영화사에서 했더니… 아침에 사장한테 대종상에서 11개 부문이 상이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대종상에는 쿼터가 붙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오니까 김용덕 씨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밤에 대가릴 짤라 갔어요.” “그게 무신 소리요?” 그랬더니, 최우수작품상에만 쿼터가 붙어 있는데 나머진 다 놔두고 최우수작품상만 딴 데로 돌렸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요?” 그랬더니,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 홍의장군 >(이두용, 1973)이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태권도영홥니다. 그게 대종상 작품상 탈 영화가 못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엊그저께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에 대종상을 휩쓸어 버리면 우린 뭐냐! 이거 우리를 아주 그냥 밟어 버리는 거 아니냐!” 굵직굵직한 회사 다섯 사람이 안기부국장을 만나자고 그래서, “이건 말이 안된다. <벙어리 삼룡> *주3 은 포르노영화다” (웃음) 그때 국시가 ‘자국안보’ 이런 거였어요. 그럼 “대통령의 뜻을 따르려면 <홍의장군>이 상을 타야지, 어떻게 포르노영화 상을 주느냐.” 국장이 어떨결에 “<홍의장군>이 타야지.” 그래서, 그때 문공부에서 주관을 했으니까, 상당한 돈도 오고 갔대요. 그러니까 밤에 소집을 했어, 심사위원들. “다시 심사해라. 국책영화에다 상을 줘야지 말이 되냐?”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다시 투표를 해서 작품상을 <홍의장군>으로 바꿔쳤어요. 그러니깐 영화계가 “말이 되냐, 어떻게 <홍의장군>이 작품상이냐?”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우리는 <홍의장군>을 뽑은 일이 없다. 안기부가 동원을 했다” 막 시끄러워지니까 문공부도 골 아파지고. 이걸 수습할라고 그러는데 여론이 워낙 나빠지니까. 그래서 그러면 <벙어리 삼룡>도 쿼터를 하나 더 주자. 그래서 우수작품상까지 쿼터를 타 먹었어요. - 변장호 , 2016, 122~123쪽 <수선화>(좌)와 <비련의 벙어리 삼용>(우)은 모두 우성영화사 작품으로 제1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수선화>는 감독상⋅각본상⋅편집상⋅녹음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우수작품상⋅촬영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미술상⋅조명상을 수상해, 총 11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박행철은 1970년대 우성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수선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대종상을 노리고 기획된 것으로, 사실 일본영화 < 24개의 눈동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4)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절작은 대종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종상을 받지 못한 뉴 페이스 최훈 감독에게 기회를 주고, 캐스팅은 ‘대종상이 사랑하는’ 배우들로 뽑았다. 그 결과 <수선화>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녹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품상은 받지 못했다. 박행철은 자신이 작품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 빼앗겼다고 기억했다(<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같은 우성사 작품이다). 하지만 박행철의 기억과는 다르게 <비련의 벙어리 삼용> 역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우수작품상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홍의장군>에게 돌아갔다(변장호 감독은 <홍의장군>을 태권도영화라고 표현했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다룬 대작 사극영화이다). 변장호 감독의 구술은 한 줄 한 줄이 정말 흥미로운데,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비롯한 ‘친구들’이 달려가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버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 후, 한국영화제작업은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면서 기존 영화사의 몇몇이 정리되고, 소수의 신생 회사들이 새롭게 인정받았다. 이중에서도 우성사는 가장 그 설립 시기가 늦었는데, 이를 가지고 기존 영화사 대표들이 몰려가서 텃새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 ‘텃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술자가 들려준 다른 내용의 구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 변장호 감독의 기억이 완전 거짓이나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변장호 감독 구술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의장군>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 온 영화계가 반발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우수작품상인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도 쿼터 하나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종상에는 최우수작품상 외에도 쿼터가 주어지는 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수반공영화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낙 이 부문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각 영화사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을 만한 작품으로 문예영화(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예산이 많이 들어간 대작 역사영화, 새마을운동을 강조한 휴먼 드라마류의 영화들을 한두 편 제작하고,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린 전쟁액션영화나 첩보영화(이는 007 유행의 영향도 있었다)를 한 편 정도 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가 아주 막강한, 영화계에 못된 행세를 한 거지. 대종상에도 관여를 해가지고 뭐 뒤에서 압력해서 “이것 줘라” 이런 정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영화계를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맞는 정도로. … {그 압박 수단은 주로 검열…} 그렇죠. 검열 가지고 하는 거죠. 그때는 검열해서 우수영화, 좋은 영화, 또 외국 나가서 상을 타고 그러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씩 주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입김이 굉장히 셌다고 봐야죠. … < 지옥의 49일 >(이두용, 1979)이라는 이두용 감독의 울릉도 가서 찍은 영화가 있어요. 근데 그게 사실은 우수영화가 될 정도가 아닌데, 그게 반공영화라는 걸로 해가지고 그걸 압력을 좀 넣었다든지 뭐 어떻게 해가지고, 심사위원들한테 금일봉식으로 이렇게 나눠주고 어떻게 해가지고 그게 상을 탄 적도 있고 뭐 그런 예가 있어요. …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상을 타기 위해서 반공영화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이제 암암리에 “반공영화 좀 하나 해” {우수영화 타기 위해서?} 어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에요. - 주종호 , 2017, 156~157쪽 < 땅울림 >(설태호, 1980)은, 대종상에서 다 휩쓸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됐어? 심사하는데 대종상에서, 박암 만 조연상 탁 타버렸어. 그리고 또 뭐 하나 타고 그랬어. 그러구 이 양반이 화가 났어요. 중앙극장 사장이거든? 그래서 중앙극장에서 약간 (상영)한 것 같아요. 근데 손님들이 잘 안 들지만, 군에서는 괜찮았어요. … 우리 대종상 못 탔잖아요? 다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근데 안됐어요. 근데 누가 됐는가 하면, 임권택 이 한 < 짝코 >(임권택, 1980) 있지요? <짝코>가 당선된 작품이에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이제 작품상 탔어요. … {결국에 제작자는 쿼터 받아서 외화 수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 음, 그게 앞서는 거예요. 다! 그땐 다 그랬어요.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그렇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요. - 설태호 , 2010, 251~260쪽 <땅울림>은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설태호 감독의 <땅울림>은 대영영화사(영화사 대표 김인동 은 중앙극장을 운영했다)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군민 합작영화로, 제작 기간만 1년이 걸린 대작영화였다. 국방부로부터 제작비 일부와 각종 무기, 탱크, 전차, 화약 등을 지원받아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총격⋅폭파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 인천(오! 인천) >보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경쟁 상대가 <짝코>라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을 들인 대영영화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나의 상’을 빼앗는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대종상을 받을 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상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 막상 그 상을 받지 못했을 때는 빼앗긴 것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상을 빼앗았고, 어떻게 상을 빼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당시 대종상을 둘러싼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자괴감과 그 자괴감을 뚫고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모종의 암투로 인해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을 좌절감 또는 그래도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자부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들의 양가적인 감정과 그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 주1. 이영일의 해당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공개된 제2회 대종상 심사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유건호(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유석진(의사), 최정희(작가), 김대현(작곡가), 남홍우(교수), 심태진(명성여중고 교장), 김정환(미술가), 신용성(경향신문 사회부장), 이용상(공보부 공보국장). 주2. 제3회 대종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정충량(평론가), 유건호(언론인), 여석기(고려대 교수), 이청기(영화평론가), 김붕구(서울 문리대 교수), 양광남(중앙대 영화연극과 주임), 박권상(언론인),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이순근(교육평론가), 김진환(공보부 공보국장 서리), 강영수(언론인). 심사방식도 완전합의제로 변경되었으며, 기준 또한 이전보다 분명해졌는데 "①자기 목소리로 녹음하지 않은 연기 ②‘오리지널’이 아닌 음악 ③표절작품"은 수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6일에 대종상시상식", 《조선일보》, 1964. 3. 5. 5면 기사; "제3회 대종상 수상자 결정", 《동아일보》, 1964. 3. 7. 5면 기사 참조.) 주3. <비련의 벙어리 삼용>(변장호, 1973)을 의미한다. ※ 인용 구술 목록 한국영상자료원, 「호현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이채, 2005.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1: 최경옥⋅박행철⋅최승민⋅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2008.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2: 임원식⋅이형표⋅이상현⋅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2008.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4권: 양춘』, 한국영상자료원, 2009.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이성철』, 한국영상자료원, 2009. 권용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성근』, 한국영상자료원, 2010. 김승경,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설태호』, 한국영상자료원, 2010. 권용숙, 『2011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강범구』, 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 『2013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영효』,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승경,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권: 박행철』, 한국영상자료원, 2014.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5권: 변장호』, 한국영상자료원, 2016. 공영민⋅송영애, 『2017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변동: 조관희⋅주종호』, 한국영상자료원, 2017.
우리는 모두 코로나라는 하나의 시기를 통과했다. 얼마 전까지도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모두가 거리를 두었던 시기였는데, 또 조금 지나갔다고 그랬던 시기마저 생경하게 느껴진다. 코로나 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꼈겠지만, 문화예술계통에 있던 사람들은 더 극명하게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랬고. 배우들은 자신의 능동성이 기반되어야 하는 직업이지만, 외부의 선택에 의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에, 선택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필요한 직업이다. 어떠한 작업이 들어가게 되는지, 또 그 작업 안에서 내가 어울리는 배역이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시대의 흐름 속에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코로나 시기에 우선 영화작업이 많이 줄어들었고, 그에 반해 OTT 작업들은 늘어났지만, 그 역시도 배우들에게는 하나의 장벽이었다. 대부분의 1차 오디션들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오디션 현장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가 없고, 결과에 대해서도 자세한 피드백을 들을 수 없었다. 에너지를 주고받는 직업인데, 혼자서 해나가야 하는 영역이 더 늘어났다. 또 독립영화는 현장에 대한 통제가 늘어나다 보니 자본이 더 필요해졌고, 촬영 중에도 어떠한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촬영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이 더욱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원래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작업들인데, 이를 더 가중시키는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배우라는 직업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거리두기가 시작될 때, 문화예술계는 바로 직격탄을 맞았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재가 아니라는 감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오던 일들은 의미 없는 일인 걸까. 그러한 고민의 시기에 나는 <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우.천.사) >(이하 <우천사>) 작업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한제이 감독의 캐스팅 제안 전화가 걸려 왔고, 그 당시 제목만 듣고도 이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 왜 천국에 갈 수 없고, 왜 사랑은 할 수 있는걸까. 천국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듯이, 동성애와 관련된 영화였고 진한 첫사랑 이야기였다. 한제이 감독은 이와 더불어 현실이 비록 천국 같진 않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첫 미팅은 마포역 근방 한제이 감독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다. 한낮이었고, 아늑한 공간 속에서 수줍은 미소의 한제이 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 담쟁이 > 포스터가 벽면에 붙어있었고, <우천사> 관련 캐스팅 보드가 반대편에 있었다. 한제이 감독은 강한 자신감으로 이 영화를 소개했다. 누군가의 강렬한 확신은 다른 이들을 확 이끈다. 한제이 감독이 그런 경우였고, 나는 감독의 그 자신감을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 내가 하게 될 역할은 ‘주영’이라는 캐릭터였다. 첫사랑에 빠져 사랑만 믿고 돌진하는 사랑 그 자체의 캐릭터. 한제이 감독은 실사영화보다, < 벼랑 위의 포뇨 >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나 박수연이라는 사람의 밝은 부분을 최대한 꺼내 쓰고 싶다고. 주영이는 예지라는 첫사랑에 빠지게 되는 인물을 만나게 되고, 태권도를 같이하는 성희, 오래된 동네 친구 민우, 엄마와 태권도 코치 등 여러 관계 속에 있었다. 시나리오는 한 번에 후루룩 읽힐 정도로 재밌었다. 캐릭터도 살아있고, 주고받는 대화들도 흥미로웠고, 사건도 큼직해 인물들의 삶을 이끌고 있었다. 다만, 폭력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생기는 몇 가지 염려되는 지점도 있었다. 영화 속에서 성추행 피해자에게 책임을 단 한 번이라도 묻지 않았으면 하는 점,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서 시각적인 자극이 덜했으면 하는 것. 나는 이 영화가 폭력을 보여주되, 보는 이로 하여금 2차 가해는 절대 없었으면 했다. 한제이 감독에게 이 지점을 말하였고, 같은 지점에서 한제이 감독도 우려를 하고 있었기에 서로 이런 부분을 이야기하고 조율해 가며 함께 영화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 태권도 선수인 주영이를 위해, 태권도를 한 달 반 정도 화, 금 2시간씩 오서독스 무술팀에게 배웠다. 태권도부를 연기할 배우 친구들과 함께 훈련했다. 처음엔 기초체력, 점차 촬영할 씬 동작들로 진행되었다. 태권도 씬들과 더불어 주영이는 맞는 씬들이 몇 개 있어서, 보호구를 착용하고 최대한 통증이 없을 방법을 오서독스에서 열심히 구상해 주었다. 아예 타격감이 없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으로 보호구를 착용했고 이러한 배려들에 감사함을 느꼈다. 현장에서도 무술팀은 액션 씬에 항상 동행해 주었고 먼저 몇 번의 시범 리허설을 해보았다. 그 공간에 맞게 동작을 수정해 주었고, 그 덕분에 안전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리딩은 전체 리딩으로 진행되었다. 그날 예지 역의 이유미 배우를 처음 만났었고, 둘 다 낯가림이 있어 긴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인사만 나누었다. 성희 역의 신기환 배우는 같이 태권도 훈련을 하면서 더 친구처럼 친해진 상태였고, 민우 역의 김현목 배우는 여러 번 작업을 같이 했었어서 사적으로도 친했던 친구였다. 영화 속의 상황과 배우 개개인의 친밀도가 비슷한 수준으로 시작되었다. 사랑 이야기이다 보니 배역의 몰입도가 중요했는데, 사실 나는 상대역이 이유미 배우라는 말을 듣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기존의 스크린에서 보아왔던 이미지가 있었고 그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내가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불덩이처럼 몸을 내던져야 하는 첫사랑이기에, 상대 배우가 매우 중요했고 유미에게는 사랑의 이미지가 있었다. 촬영을 하면서는 모든 씬들의 앞뒤 연결을 생각하고, 그 순간에 살아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씬들을 꼽아보자면 노래방 씬과 바닷가 씬이다. 노래방 씬은 내가 사랑을 인지하게 되는 첫 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가슴 떨림을 정말 잘 표현하고 싶었다. 촬영하면서 예지의 음성을 자세히 들었고, 예지의 눈빛을 열심히 흡수했다. 이 씬을 준비하면서 자우림의 '애인발견' 노래를 꺼내 들었었고, 촬영에 들어가자 노래 전주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렸던 것 같다. 떨림을 느껴 예지와 눈을 못 마주치는 그 순간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또, 바닷가 씬은 둘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기억으로 주영이는 계속 살아갈 테니까. 그 씬을 정말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마음을 꺼내 보이는 순간이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에 드는 부끄러운 두근거림들. 실제로도 그 두 씬을 찍을 때 예지만 보고, 다른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촬영이라는 것을 지우고, 예지에게 더 집중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건 사랑만은 아니다. 주영이에게는 소중한 친구인 성희와 민우가 있었다. 민우는 나를 웃게 하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 친구였다. (같이 텐션이 올라가는 사이가 얼마나 소중한지!) 또, 성희는 같이 태권도부에 있는 친구인데, 내가 만든 전사 속에서 주영이는 성희가 태권도를 해서 따라 한 것이라 생각했다. 열심히 하는 친구가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태권도에 있어서 실력차가 발생할지라도, 주영이는 성희에게 열등감이 없었다. 성희는 원래 잘하니까. 질투하지 않았고, 응원하는 관계였다. (이런 순수한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원하는 친구 사이의 관계성을 민우나 성희에게 반영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성희에게 일어난 일에 주영이는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사랑에 빠진 동안, 성희에게는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성희를 챙기느라 예지를 못 챙기는 순간들이 너무하지 않냐는 피드백도 있었는데, 나는 주영이라면 그 순간에 미안함으로 성희를 더 챙겼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영화 전체 촬영 20회차 중 주영의 회차는 총 19회차였다. 주영이는 영화에 흐르고 있었어서, 거의 매 회차에 출근했다. 사실 독립영화에서는 체력을 쥐어짜서 매 회차를 촬영해 내기 때문에, 매일 전력을 다해 임했던 것 같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지방을 다니고 체력을 써가며 촬영을 해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영화를 정말 좋아하니까 연기를 한다는 자체에서 쾌감을 느껴 이를 지속해 가는 것 같다. 함께하는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자신들의 사랑을 담아내는 작업. 배우 개인적으로 늘 최선을 다해도 아쉬운 순간은 늘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기에 한 씬 한 씬이 소중하게 남아있다. 코로나가 만연하던 시기였음에도 <우천사>는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 다다음해인, 코로나가 잠잠해진 올해 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하게 되었다. 위기를 넘긴 후 만나게 된 영화제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관객들을 만나고, 반응을 듣고, 내가 더 힘을 얻게 되는 순간들을 선물 받았다. 이러한 상영의 경험까지가 영화의 완성이라고 느낀다. 내가 연기한 순간들이 그들에게 가 닿고, 또 자신들의 인생을 돌아보는 순간들을 선사하는 것. 이 순간 때문에 나는 계속 연기를 해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시기에 개인적으로 배우라는 직업에 무력감을 느끼긴 했었지만, 영화작업을 하고 나니 또다시 해나갈 힘이 생겼다. 사람들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하는 이 작업들은 이 연결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기에 독립영화 작업이 잠시 줄어들지언정, 아예 끊어지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코로나 시기를 지나고 개인적으로 배운 점도 있다. 함께 하기 위해서는 혼자 서는 힘도 필요하다는 것. 혼자서 해내는 연기의 책임감들을 더 배우게 되었고, 혼자있는 시간도 잘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코로나 시기가 잘 지나간 것처럼, 인생 역시도 계속 흘러간다. 앞으로도 내가 어떤 시대를 마주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두 발을 땅에 잘 붙이고 서서 시대와 함께 걸어 나가려 한다. 무력하기도, 씩씩하기도 하면서. 코로나 시기를 무사히 지나 보낸 우리 모두의 동료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옛날 한국영화를 보려고 하는 현대 관객들의 발목을 잡는 것 중 하나는 이런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이 대부분 끔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형표의 < 아가씨 참으세요 >가 남자주인공 김민욱을 등장시키는 첫 장면을 보자. 조깅을 하고 있던 민욱은 여자주인공 진리화가 타고 있는 차를 아무 이유도 없이 가로 막는다. 항의하는 리화에게 리화의 폴크스바겐을 달구지라고 놀려대더니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리화의 차 지붕 위로 뛰어오른다. 여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남자주인공에게 이런 짓을 시키면 재미있는 놈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게 겨우 1981년 일이다. 이 ‘재미있는 놈’을 연기한 사람은 당룡이다. 본명이 김태정인, < 사망유희 >에서 이소룡의 대역으로 나왔던 배우다. 당룡의 캐스팅은 ‘홍콩영화’가 되려고 하는 이 영화의 욕망을 반영한다. 당룡의 무술은 이 영화의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렇다고 그게 영화에 엄청난 긴장감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 일단 이 영화는 코미디이고 둘째로 코미디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악당들이 너무 무능해서 주인공들이 잘못될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예를 들어 진리화와 리화의 친구는 둘 다 영화 초반에 납치되지만 모두 남자주인공의 도움없이 탈출에 성공한다. 리화의 친구는 태권도 유단자로 설정되어 있고 액션신도 많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그냥 남자주인공 없이 가도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진리화라고 하는 홍콩인 교환학생을 여자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홍콩영화’가 되려는 욕망의 또다른 표현이지만, 이 캐릭터를 연기한 사람은 당시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7,80년대 한국 여자배우 3대 트로이카였던 정윤희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정윤희의 ’외국인‘ 연기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썼던 시대가 아니다. 전문성우가 후시녹음을 하던 시절엔 언어의 사실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1981년작이니 정윤희의 두 영화 대표작인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와 같은 시기에 나왔다. 정윤희는 이 두 편의 영화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연달아 받았으니 배우로서도 절정기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정윤희의 연기는 대부분 명연기와 거리가 멀다. 나는 진리화가 친구 앞에서 태권도 도복을 입고 발레, 또는 발레라고 우기는 무언가를 하는 장면을 먼저 뽑을 거 같은데, 이건 어느 각도로 보더라도 그냥 유치원 재롱 잔치다. 정윤희는 그렇게까지 몸을 유연하게 잘 쓰는 배우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걸 코미디의 재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어떤 내용인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홍콩 재벌 딸인 진리화를 납치하려는 악당들이 있고 남자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이 리화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이 음모를 격파한다는 이야기다. 아, 그리고 < 애마부인 >으로 뜨기 직전인 안소영이 악당의 여자로 나온다. 아무도 신경 안 쓸 스포일러를 건드리자면 나중에 주인공들을 돕는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성폭행 회상 장면을 넣는다. 당연하지만 이 이야기는 코미디와 액션을 엮기 위해 간신히 존재하며 얼마든지 다른 무언가로 교체될 수 있다. 대부분 액션은 코미디에 휩쓸리며 코미디의 일부는 여장한 민욱이 악당들을 속이는 장면처럼 종종 보기 고통스럽다. 하지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악당들이 튕겨져 나가고 나중에 필름이 거꾸로 돌면서 함께 모두 다시 엘리베이터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처럼 초현실적인 개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가씨 참으세요>는 누가 봐도 정윤희의 영화이고 결국 이 배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영화는 어떻게든 당대 최고 스타였던 주연배우의 외모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하는데, 당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액션 장면 중에 원피스를 찢어 배우의 엉덩이를 노출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토착 에로티시즘 영화들과는 다른 식으로 정윤희의 캐릭터와 몸을 바라보며 여기에는 여러가지 다른 가능성이 보인다. 그리고 현대 관객들은 왜 그 가능성들이 적극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는지, 왜 당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여자 몸에 대한 상상력이 딱 그 정도에서 멈추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