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수
- 감독
- 강원주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엄앵란, 최삼, 추석양, 조연미, 김동원, 복혜숙, 조향랑, 한은진, 박정임, 김정림, 박조, 최동선, 최경환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생물학, 북극의 얼음, 동물의 살점, 알프스의 풍광, 채식주의, 생과 사, 언데드. 당신은 메리 셸리의 소설이 이런 맛깔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에, 이 작품에 대한 생태비평이 수백 편쯤 제출되었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티모시 모턴은 2016년 “『프랑켄슈타인』과 생태비평”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약 2천 5백여 편에 달하는 관련 비평에서 생태학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1%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주변적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인류세’ 담론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판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이 위대한 고전에 대한 생태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어쩌면 가장 흥미로운 생태비평은 지면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 프랑켄슈타인 >(2025)을 떠올리고 있다. 2025년 겨울,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최신작에서 델 토로는 셸리의 원작에 내재되어 있는 생태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끌어내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여기서 생태적 관점이란 단순히 기후재난이나 생태위기 등의 문제를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건 문명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非)생명적인 것 사이에 그어져 있는 허구적 경계를 질문하고 폭로함으로써 문명적인 것의 폭력성을 성찰한다는 의미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잃고 한낮 물질로 ‘전락’한 시체의 생기 없는 신체 조각들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했다. 누더기처럼 짜깁기한 피조물의 몸은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을 체현하는데, 사실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사실이다.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명확한 경계란 것은 없다. 예컨대 바이러스는 동물의 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바이러스는 생명인가 비생명인가? 모턴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생명체는 이미 “좀비”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빅터가 피조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드러내는 임계점,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쾌한 골짜기 역시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근대적 사유가 빚어낸 허상이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야말로 인간이 ‘자연’, 즉 ‘대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모턴은 불쾌한 골짜기가 확장되면 비로소 ‘유령적 평원(spectral plain)’이 열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태적으로 각성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주제는 델 토로보다는 셸리가 더 잘 다루고 있다. 피조물에 대한 빅터의 혐오를 매우 세밀하게, 기이한 열정을 담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델 토로는 피조물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재창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만든다. 피조물의 피부는 유약을 바른 것처럼 반짝이고, 봉합선은 괴물성이 드러나는 벌어진 틈새라기보다는 공들여 세공한 예술작품 같다. 그는 선하고 서글픈 눈매를 한 패셔니스타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귀한 타자로서 우리에게 불쾌함의 작은 조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화려한 미장센에 접붙여진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지만, 생태비평의 관점에선 가장 큰 약점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생태비평의 관심을 견지하고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피조물은 단지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인간이 인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한 어떤 생태적 실재에 대한 의인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델 토로의 작품 목록 안에서 견지되어 온 파시즘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논해질 수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중 사진: “ The Shape of Water ”, “ Guillermo del Toro’s Pinocchio ”, IMDb (© 2017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 © 2022 Netflix, Inc.) 델 토로는 < 악마의 등뼈 >(2001)와 < 판의 미로 >(2006) 등의 인상적인 초기작에서부터 전쟁이 세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특히 아이들의 생을 어떻게 박탈하는지 강변해 왔다.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와 <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2022)에서는 이 문제의식이 생태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물고기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말살당하고 있는 아마존의 생태적 타자성에 대한 은유로서 등장했고, ‘피노키오’는 숲의 정령의 생기를 나눠 받은 ‘기물(器物)’로서 인간의 얇고 가벼운 시간을 넘어 심원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제 <프랑켄슈타인>에 이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세계에 대한 정복으로 이해했던 북반구 근대주의자들의 탐욕과 광기가 어떻게 전쟁 및 자연에 대한 식민화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루되어 있는지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심사는 엘리자베스 캐릭터를 통해서 다루어진다. 그는 강인하고 우아한 사마귀처럼 스크린을 활보하면서, 원작과 이 작품이 가장 극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담당한다. 셸리는 엘리자베스를 빅터의 고귀한 사촌이자 지고지순한 연인으로 묘사했다. 델 토로는 엘리자베스에게서 순정을 지우고 일종의 매개자(medium)로서의 자질을 더했다. 이성과 과학, 정복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자연’과 만날 수 없는 빅터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세상의 “가장 작은 것들,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들”의 다채로운 모양과 빛깔에 감응하는 자다. 그가 곤충학에 조예가 깊은 이유다. 피조물은 근대적 지식의 격자 속에서 탄생했으나, 그 격자로는 충분히 포착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스케일을 초과하는 생태성을 그 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근대적 이성과 비인간적 감응 사이에서 진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피조물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유령적 평원’의 유일한 목격자다. <프랑켄슈타인> 중 엘리자베스 사진: “ Frankenstein ”, IMDb (촬영: Ken Woroner, Netflix / © 2025 Netflix, Inc.) 엘리자베스는 확신에 찬 반전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생과 사를 정복하겠다는 꿈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빅터와의 첫 식사 자리에서 전쟁과 빅터의 야망을 비교하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이상을 품었을 때” 벌어지는 비극이며, “그 비극을 부추긴 자”들은 죽음 앞에서 “모르는 척한다”라고 분노하는 이유다. 델 토로의 피조물은 피노키오의 또 다른 판본이다. 인간(혹은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조립되었지만, 그 총합은 인간의 의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만 델 토로는 언제나 이 ‘기물’들에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선한 마음을 부여한다. 델 토로의 아름다운 판타지 월드의 또 하나의 한계는 어쩌면 이런 선량한 마음일 지도 모른다. 자연이란 그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제임스 러브록의 경고처럼 ‘가이아’는 자신의 시스템을 망치는 존재를 오작동으로 인식하는 냉정한 피드백 루프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손희정(문화평론가) l 미디어 그룹 '프로젝트38' 멤버.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2024) 집필.
<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 은 헌법 제14조 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 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 >(1961), < 잉여인간 >(1964), < 순교자 >(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 >(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 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 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 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날의 국가정보원, 80-90년대 국가안전기획부의 전신이자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핵심 권력기관, 수많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곳. 바로 중앙정보부다. 그런데 국가안보라는 거창한 임무를 수행하던 이곳이 영화검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공식적이고 제도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은 그저 원로영화인 몇 분들의 증언으로 전해져 왔을 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영상자료원이 검열서류들을 공개한 후에야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는 못했다. 이 글은 그 예비적인 시도로, 중앙정보부가 영화검열에 참여했던 역사와 방식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 초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한 검열 개입 필자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선에서 볼 때, 중앙정보부가 검열서류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는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재검열 문서다. <오발탄>은 1961년 4월에 개봉하였으나, 5.16쿠데타 직후 상영중지가 되었다. 이후 7월 20일 재검열을 거쳐 상영중지가 공식화되는데, 이때 재검열의 주체 중 하나로 처음으로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이 1961년 6월이니, 한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오발탄>에 대해 “치안면에 있어서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다분 내포하며 현 시국으로 보아서 상영불허함이 가하다고 사료됨”이라 밝혔다. 이후 <오발탄>은 1963년까지 상영정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정보부가 영화검열에 개입한 최초 사례로 추정되는 <오발탄> 재검열 문서 다만 <오발탄>은 특수한 사례로, 아직은 정보부의 영화검열이 일상적이거나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전수조사를 해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략 1961년 9월경이 되면 정보부가 빈번하게 검열에 개입하는 것을 서류로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첫 사례는 < 붉은 두목 >(이영, 1961)이라는 반공영화의 본편 검열서류이다. 이후 정보부는 주로 국가 안보와 결부된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검열자로 참여했다. 1962년 영화법 제정 후 제작신고라는 이름으로 시나리오 검열이 점차 (준)제도화되면서, 정보부는 본편뿐 아니라 시나리오 검열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가 국가 안보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정당화되었던 것일 텐데, 역으로 보자면 중앙정보부가 관심을 가짐으로써 반공영화가 국가의 안보 이익을 해치거나, 나아가 불온한 영화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 *주1 사건일 것이다. 당초 공보부와 정보부의 합동 검열에서 이 영화는 소수의 제한사항만으로 통과되었으나, 이후 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고 반공법 위반으로 감독이 구속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검열 후 돌연 <7인의 여포로>의 상영보류를 지시한 중앙정보부의 서류(전언통신문) 반공영화만이 중앙정보부가 개입하는 장르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임원식·나봉한, 1964)와 < 춘몽 >(유현목, 1965)의 사례를 들 수 있겠다.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는 내용상의 불온성이 문제가 되었다기보다는 제3공화국의 초기 위기를 낳은 한일협정 반대 시위라는 시국상황과 관련되어 영화의 반일적 톤이 민감하게 포착된 것으로 보인다. 서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1964년 12월, 공보부 검열을 마쳤으나 돌연 1965년 3월 6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중앙정보부가 추가 검열사항을 전달함으로써 검열 결과가 변경되었다. 이에 관해 신상옥 감독은 중앙정보부가 개봉을 반대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개봉이 가능해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의 검열이 반드시 서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춘몽>이 형법에 저촉되는 영화이므로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하라는 내용의 정보부 전언통신문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의 경우 그 맥락상 정보부의 개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란, 외설이 문제가 된 <춘몽>의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 영화의 검열에 참여한 정보부는 “자학적 변태성향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 국민 여론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 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할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제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 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보부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공보부는 문제 장면의 대폭 삭제 후 상영허가조치를 하였지만, 이후 감독 유현목 은 음화제조반포죄로 기소되어 유죄 취지의 판결(선고유예)을 받기에 이른다. 안보나 사상이 아닌 풍속 문제의 영화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이유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면 관계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유현목 감독이 반공죄로 투옥되었던 이만희 감독을 옹호한데 대한 보복성 조치로 이해되고 있다. 상시적 검열자가 되다(1968년 말~ ) 1968년 말에 접어들게 되면 중앙정보부의 영화검열 참여 방식이 전환된다. 개봉되는 모든 영화에 대한 상시적인 본편 검열자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정보부의 본편 검열이 제도화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0월 5일에 검열에 합격한 < 일본인 >(김수용, 1968)의 경우에는 기존 방식대로 검열이 이루어졌으나, 10월 15일 시행된 < 수전지대 >(김수용, 1968)의 검열서류에서는 정보부의 영화검열의견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10월 중순(늦어도 11월 초순)경부터 정보부가 검열에 참여하는 관행이 시작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수전지대>의 정보부 영화검열 의견서(삭제 대상으로 명시된 "집단 난투장면") 현재 시점에서 중앙정보부가 상시적인 검열자로 등장하게 되는 구체적 배경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김신조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같은 1968년의 안보적인 위기 상황, 1968년 7월 말 공보부가 문공부로 전환되었던 행정체제의 개편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새로 개편된 체제에 따라 상시 검열은 정보부 외 내무부(치안본부)와 주무부처인 문공부 세 곳이 담당했다. 이전의 주체와 비교할 때, 문공부(주)와 내무부(부)에 정보부가 추가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세 주체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1970년대 문공부의 영화검열 담당 직원이었던 이남기 의 증언을 참고할 수 있다. 근데 그 검열관 구성은, 국산영화 경우에 대개 인제 과장하고 국산영화 담당 사무관하고 그 실무자까지 들어가요. 에. 들어가서, 그러고 인제 외부에서는 인제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파견된 이 검열관들이. 그래서 문공부하고 중앙정보부하고 그 저 치안본부하고 결국 세 개 기관이 맡아 전담하게 되죠. 그리고 인제 ... 안기부(정보부의 착각)에서 온 분들은 주로 인제 국가안보에 그 위해, 저해요인 같은 거. 우리가 남북분단 된지도 참 오래됐지만은 이런 긴장관계에 있으니까북한을 찬양한다든지, 요즘 어떤 세태하고는 전연 틀렸죠, 그 당시는. 그 엄격히 영화든 처리할 때니까. 그 북한 찬양 이런 문제. 그러고 인제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나오는 거는 결국 인제 청소년의 유해여부, 이런 걸 인제 보고. 그리고 요즘도 그 하지만은 청소년 그 관람 등급가부 이런 걸 주로 결정하게 되고. 그러고 그 유해성 저 윤리성, 이런 문제도 그때는 상당히 그 시기에는 엄격히 다뤘어요. - 채록연구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147-148쪽, 강조는 필자 즉, 사상 및 안보에 관한 사항은 중앙정보부, 미성년자 보호(미성년자 관람가부 판정 포함)에 관한 사항은 치안본부가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공부는 전반적으로 검열 진행과정을 조율하고, 의견을 종합하여 제작사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공윤의 본편 검열 이후(1979년 4월~ ) 약 10년 이상 유지되었던 본편 검열 체제는 1979년 4월, 문공부가 본편 검열권을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에 이관함으로써 변경된다. 공윤의 1기 영화 심의위원은 20인 이내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심의위원 17인은 공윤위원장의 추천에 따라 문공부 장관이 위촉였고, 3인은 당연직으로 구성되었다. 이 당연직에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의 검열관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체제는 1980년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어느 시점에 종료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확인되지 않는다. 보완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1979년 7월 24일, < 간첩잡는 똘이장군 >(김청기, 1979) 공연윤리위원회 위원별 검열의견서 중 하나. 검열자 임광수는 중앙정보부 검열위원이었다. 요컨대 중앙정보부는 1961년 설립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영화의 검열자였고, 특히 1968년 하반기 이후에는 상시적으로 영화 검열에 참여했던 가장 중요한 검열자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정보기관이 영화검열에 제도적이고 상시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당시 정부가 대국민 선전전을 광범위하게 수행했고, 영화의 대중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초기에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만 관여하던 정보부가 1968년 말 이후 모든 영화의 본편 검열에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이 시기 국가 안보라는 것이 단순히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화가 다루는 국민의 일상에까지 확장해 가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1970년대 유행했던 “총력안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부기해 둘 사항이 있다. 간혹 검열서류에서 CIA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검열자료 연구 초기, 필자를 포함 관련 연구자들이 이를 미국의 정보부로 오인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CIA가 언급된 다양한 검열자료들을 볼 때, CIA는 KCIA(중앙정보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차후 연구를 통해 보다 분명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 주1.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1965년에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