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 감독
- 구자환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강희권, 손동일, 김영오, 배광모, 송사성, 정용찬, 강흥식, 최희순, 안경호, 이성범, 박선주, 김장호, 국응순, 김용호, 전용유, 김기성, 한원석, 이윤달, 함재기, 서차랑, 함정만, 전인환, 정석희, 전정자, 정낙관, 이복만, 박민교, 박성헌, 안상순, 박중헌, 이숙자, 정만호, 가재인, 가세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회원,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공동조사단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감독의 투신자살 시퀀스로 담긴 충격적인 영화가 있다. 심지어 연기한 사람은 해당 영화의 감독( 이장호 ) 본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들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국회의사당에서 기괴한 춤을 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바로 1984년 개봉작, 영화 < 바보선언 >의 도입부와 결말이다. 개봉 연도를 보면 금세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제5공화국 전두환 독재 정권의 악행이 가장 극에 치달을 때 제작되고 개봉된 영화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을 검색해 보면, 이 영화는 서슬 퍼런 정부의 검열을 피하여 어떻게든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자포자기한 상태(김동원, 2008)’에서 만들어진 괴작이자 걸작이라는 평이 대다수이다. 검열을 피하고자 극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행으로 채워놓고, 촬영조차도 기행 그 자체였던 사실 덕분에 역설적으로 1980년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초현대적인 함의와 시사점을 주는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신군부 검열 당국이 풍자와 해학에 조예가 깊었거나, 혹은 영화를 보는 눈(교양)을 더욱 갖췄더라면 이 영화 또한 가위질을 당했을 수 있었겠으나 천만다행으로 그러지 못했던 듯 하다. 덕분에 우리는 1980년대 초반 서울을 중심으로, 비인간적인 현대사회(혹은 정치 환경)에서 소외당한 이들이 거니는 한국의 도시공간을 ‘괴상한 시각’으로 2024년 지금 이 시점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는 어떤 공간이 어떤 시각으로 담겨져 있는지 주요 장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하월곡동 빈민가 영화의 인트로는 주인공인 동칠( 김명곤 )이 하월곡동 빈민촌 주거지를 걸어 내려오는 시퀀스로부터 시작된다. 수 초 동안 마을 주민들이 마치 축제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는 잠시 비추는데, 이 영화에서 ‘인간적인 도시공동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실상 마지막 장면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다리가 불편한 동칠이지만, 수많은 자동차가 오고가는 큰길에는 횡단보도가 없기 때문에 육교를 지나가야만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지역들에서는 재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영화 속에 담긴 야트막한 서민 주거지의 모습은 머지 않아 완전히 사라질 지도 모른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하월곡동 빈민가.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하월곡동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 이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일지도 모른다. 명동과 을지로입구 아마 동칠은 영화 속에서도 잠시 비춰진 8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한 것일까, 다음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명동과 을지로입구 일대를 비춘다. 깔끔하게 정리된 길가, 산뜻한 중형차(현대 그라나다), 고동빛깔의 미도파 백화점과 갓 개업한 롯데백화점 본점과 누가 봐도 썩 세련되지 못한 모습의 동칠은 내내 부조화를 이룬다. 카메라가 미도파와 롯데백화점을 올려다보는 씬은 영화 < 오발탄 >(유현목, 1961)에서 주인공 철호( 김진규 )가 이 부근을 걷는 씬을 연상케한다. 촬영 각도와 흑백·컬러 여부가 다르긴 하지만, 소외되었거나 불쌍한 시민과 화려한 서울 속 백화점 간의 대비만한 극적인 표현 수단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끊임없는 자동차의 행렬과 미도파 백화점(좌측), 롯데백화점 명동본점(우측)이 추레한 차림의 동칠 뒤편을 장식한다. 당대 최고급 승용차였던 현대 그라나다와, 명동 거리를 정처없이 누비는 동칠의 조우. 이대 앞과 신촌 이윽고 동칠은 청계5가 부근의 어느 빌딩에서 투신한 의문의 영화감독의 옷가지와 장신구 등을 탈취한다. 카메라는 빌딩의 옥상에서 청계고가도로와 그 인근 평화시장을 훑다가, 이화여대 정문 앞 번화가를 타임랩스로 추적한다. 장장 1분 동안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4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감탄을 절로 자아낼 정도로 지극히 현대적이다. 일부러 간판과 옷차림과 자동차만을 옛날 것을 가져다가 요즘 찍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1983년의 이대 앞은 40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건너뛰어 2024년 시청자의 눈동자에 내리꽂힌다. 나아가 이대 앞의 상권은 육교에서 동칠이 한눈에 반한 ‘가짜 여대생’ 혜영( 이보희 )이 도시적인 소비를 마음껏 누리는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부족함 없이 해낸다. 실은 매춘부이지만 그림 같은 대학생의 생활을 동경하는 혜영과, 그 뒤를 쫓는 동칠, 그리고 이 둘을 포착하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1983년의 대학가 상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번화하기 그지 없는 이화여대 정문 앞의 풍경. 지금도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대 앞 골목을 누비는 여대생들과 차량의 행렬. 40년이 지난 지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이 씬을 재현하면 어떨까. 이런 혜영을 어떻게든 납치하고자 하는 동칠은 우연히 마주친 자동차 정비공인 육덕( 이희성 )의 택시에 올라타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포니 택시가 이대 앞과 신촌 기차역 앞을 위험천만하게 종횡무진하며 사실상 카 체이스와 비슷한 활약을 펼치는 점도 볼 만한 부분이다. 16분 언저리에 누가봐도 교통 통제라곤 없이 이대 정문으로 포니 택시가 돌진하는 씬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거 무슨 짓인가?” 싶을 정도로 제법 긴박한 느낌을 준다. 이대 정문으로 돌진하는 육덕의 택시. 깜짝 놀란 학생들과 달려나온 경비원의 모습이 뚜렷하게 담겼다. 청량리역 앞 광장 40분부터 45분까지 장장 5분 동안, 이번에는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의 시퀀스가 이어진다. 이대 앞 시퀀스가 그랬듯이, 제법 멀리서 망원렌즈로 인파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주인공들을 담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든 ‘장사’를 하려고 남자에게 접근하는 혜영,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칠과 육덕의 씬이 교차되는 와중에,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인파의 모습은 한 편의 역전 광장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화 속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지금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 롯데백화점과 코앞에 들어선 200미터급 초고층 주상복합, 현대적인 버스 승강장으로 인해 이 시절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당시에 갓 등장했던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롯데리아의 광고, 청량리역 맞은편의 미주아파트와 그 상가건물의 모습만이 40년 전과 지금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여겨진다. 망원으로 담아낸 청량리역 앞 광장 씬. '장사' 대상을 물색하는 화면 정가운데의 혜영 너머로 지하철 출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의 고급 유행 식품이었던 롯데리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육덕과 동칠의 뒷모습. 태안군 연포해수욕장 동칠과 육덕, 그리고 혜영은 매춘부의 거주지에서 도망쳐 나와 충남 태안군의 연포해수욕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아마도 이 셋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사이 좋게 버스를 타고 태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54분경, 즐겁게 뛰노는 세 사람의 머리 위로 큼지막하게 비춰지는 ‘연포해변무대’라는 여섯 글자는 이 곳을 찾지 않았던 이라 할지라도 단박에 촬영장소를 캐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지금도 야외 무대는 리뉴얼을 거쳐서 그대로 존속하고 있으며, 부근에는 이 영화의 촬영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다고 하니, <바보선언>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안성맞춤아라 할 수 있겠다. 연포해수욕장의 야외무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세 사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혜영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후, 동칠과 육덕은 대관령의 목장에서 그들의 방법으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장례’ 의식을 치러준다. 그리고 이 둘은 비가 쏟아지는 국회의사당 앞, 여의도 광장에서 또다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웃통까지 벗어 던진다. 이대 앞과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그랬듯이, 이 장면도 사전에 촬영 허가 없이 기습적으로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런 장면을 찍겠다고 사전에 촬영 허가를 낸다고 해서, 수리될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것이다. 이 시퀀스는 사전 지식 없이 보더라도, 동칠과 육덕이 작중에서 겪어 온 부조리함과 그에 기인한 울분을 국회의사당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향해서 남김없이 토해내는 의미로 단박에 이해될 수 있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의 제11대 국회에는 야당다운 야당이라곤 일절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두환이 속한 여당 민주정의당과, 국가가 개입한 ‘관제 야당’만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만큼 이 시퀀스는 더더욱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군사정권의 거수기 역할을 하던 제11대 '괴뢰 국회' 앞에서 반라의 광기를 보여주는 동칠과 육덕의 뒷모습. 이상으로 꼭 40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바보선언>의 주요 공간을 짧게나마 돌아보았다. <바보선언>은 감독 스스로가 평했듯이 제대로 ‘각을 잡고’ 찍은 것이 아니라 군부독재와 검열이라는 사회적 한계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면서 제작된 덕분에, 당대의 공간적 배경이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꾸밈없이 담겨진 영화가 되었다. 40년 전과 비교하여 물질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도시 곳곳이 말끔하게 새단장을 거친 지금이지만, 영자원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 에 올라온 이 영화의 덧글란에 ‘걸작’이라는 상찬이 계속해서 달리는 것은 분명 이 영화가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원, “ 사전검열이 만들어낸 명작 <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2008. 9. 2. 김성욱, “ [한국영화걸작선]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홈페이지, 2012. 11. 28.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유신체제기 | 1975~1979년 197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유신헌법에 근거해 1974년부터 발동된 긴급조치와 1975년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의 시행은 한국 사회를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국회 동의 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행위다. 특히 1975년 5월 13일 시행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집회·시위 그리고 언론이나 표현물을 일절 금지했다. 물론 영화 검열도 강화됐다.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영화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1974년 41% 수준이던 수정·반려 비율이 1975년에는 80%에 이르게 된다. 한국영화산업의 수치도 불황을 증명한다. 한국영화 제작/상영 편수는 1975년 94/115편, 1976년 134/106편, 1977년 101/66편, 1978년 117/69편이었고, 외화 상영 편수는 1975년 70편, 1976년 71편, 1977년 47편, 1978년 41편, 1979년 68편이었다. 편수로는 한국영화와 외화가 엇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관람객도 상영 일수도 외화 쪽이 2배 이상 많았다(서울개봉관 기준). 명백하게 외화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 시기 제작사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국산영화를 만들었다. 1975년을 기준으로 보면 서울 소재 극장에서 일주일 이상 상영한 6편을 기준으로 수입권 1편을 부여하는 식이었다. 또 분기별로 5편을 뽑는 우수영화에는 각 1편의 수입쿼터가 주어졌다. 1976년부터는 정의조차 모호한 ‘우수영화’ 제작이 아예 의무화되었고, ‘국책영화’를 제작할 경우 수입쿼터를 주는 조항도 추가되었다. 제작사들은 일단 저예산 제작으로 작품 편수를 채우는 데 치중했으므로, 작품의 질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액션 장르를 중심으로 호스티스·에로영화가 판을 쳤다. < 바보들의 행진 >은 1975년 1월 말까지 진행된 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곳곳에 개작과 삭제 통보를 받았고, 그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2월부터 2개월간 촬영을 마친 후 4월 초 다시 본편 심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15군데의 삭제와 단축 통지를 받았다. 영화는 4월 3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 49일 동안 17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검열에 시달린 감독으로서는 예상조차 못한 히트였다. 그리고 당국은 이 작품에 ‘우수영화’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국가의 폭력과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새긴 영화를 통해 당대 관객들은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 하길종 감독이 있었다. 뉴웨이브의 기수 하길종 1941년 4월 부산에서 태어난 하길종 은 1959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데모대의 최전선에서 4·19 혁명을 경험했다. 문학 활동을 했지만 후배 김승옥 등에 비해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졸업 후 항공사에 입사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를 만든다. 1965년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해 정규 영화교육을 받았고 M.A(이론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영화계 데뷔 전 하길종의 일부 이력에 대해서는 신화화된 점이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지만(안재석, 「하길종 감독 바로보기」, 『영화연구』, 2009), 그의 미국 체류가 이후 영화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미국은 저항운동과 청년 문화가 주도한 변혁의 시기였고, 특히 그가 미국에 도착한 1960년대 중반은 미국영화의 뉴웨이브 즉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태동한 때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또 영화언어적으로 청년 하길종의 이성과 감성의 각 회로는 쉴 틈조차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1970년 한국에 돌아온 하길종의 연출 활동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김지하와 야심만만하게 개발한 시나리오 「태안전쟁」은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효석 원작을 동생 하명중 이 각색한 < 화분 >의 촬영도 예산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1972년 데뷔작 <화분>을 완성했지만, 영화가 내포한 정치성으로 대중적인 호응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시나리오들 역시 대중성 부족과 검열의 문제로 좌초되었다. 미학적 실험이 이어진 1974년 < 수절 > 역시 흥행에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하지만 1975년 세 번째 연출작 < 바보들의 행진 >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청년들의 감수성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던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최인호 의 원작이었고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단성사 시사가 끝난 후 김수용 감독이 영화의 대중적 감각을 칭찬하자 하길종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는 그래서 유명하다. 검열로 인해 117분의 영화가 99분가량의 작품이 되었지만, 청년 관객들은 열광했다. 물론 감독 하길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지만, 그는 이 영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한국영화 10선으로 선정될 만큼 높게 평가받는 작품이고 하길종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대표작으로 <화분>을 뽑았다. 영화가 성공한 그해 하길종은 ‘영상시대’ 동인이 되었고, 서울예전 영화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그는 < 여자를 찾습니다 >(1976)와 < 한네의 승천 >(1977, 미개봉)으로 다시 주춤했고, < 별들의 고향(속) >(1978, 32만), < 병태와 영자 >(1979, 18만)로 흥행에 성공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세 작품 모두 최인호의 원작과 오리지널 시나리오라는 점은, 서구의 ‘뉴웨이브’ 영화언어라는 이상과 통속적 대중문화라는 현실 사이에 놓인 하길종의 복잡한 고민을 짐작하게 만든다. 1979년 2월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단 7편의 극영화를 남기고 요절한 하길종 감독 빛나는 감각 그리고 검열의 흔적 사운드 없이 대학생들이 팬티만 입고 연병장을 행진하는 장면으로 갑갑한 병영 사회임을 암시하며 시작하는 < 바보들의 행진 >은 검열과의 고투를 텍스트 곳곳에 노정하고 있는 영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102분 버전의 영화(블루레이 출시본)는 당시 개봉 때보다 2분 29초 더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네거티브(원본) 필름 자체에서 삭제된 15분 정도의 분량은 심의대본을 통해서만 상상해볼 수 있다. 병태( 윤문섭 )와 영철( 하재영 )이 참가한 입대 신체검사 장면이 끝난 후, 영화는 대학 캠퍼스로 자리를 옮겨 철학과 학생들이 인근 여대 불문과 학생들과의 미팅을 계획하는 장면을 담는다. 목욕탕에서 광을 낸 병태와 영철은 미팅 장소로 향하다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린다. 이 에피소드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영화 화법을 고민하고 완성시킨 하길종의 감각이 제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경찰과 마주친 순간 병태와 영철이 도망가기 시작하면 송창식의 ‘왜 불러’가 흘러나오고, 가사와 이미지가 맞아떨어지는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이 계속된다. 촬영된 화면에는 구경하는 인파가 그대로 등장하지만 경찰과 장발 대학생들의 추격전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결국 둘은 경찰서로 잡혀가고, 경찰은 미팅이 있다는 둘에게 “흔해빠진 게 대학생인데 너희들은 혼이 나야 해, 너희들은 괴질이야”라고 나무란다.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경찰조차 장발이라는 점이다. “순경의 머리 긴 장면 클로즈업된 곳 단축”이라고 지시한 심의서류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연히 검열 과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102분 버전에는 살아있는 덕분에, 정부 권력에 대한 하길종 의 조롱과 야유를 읽어낼 수 있다. 둘은 경찰이 한눈판 틈을 타 경찰서에서 도망가고, 경찰이 “야 임마, 학생” 하고 둘을 부르자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 왜 불러”라는 가사가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온다. 이후 영화는 대학생들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분위기와 암울한 정서를 오가며 ‘파편적’으로 진행된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의 심의 사항을 반영한 117분의 텍스트에서 또 20분 이상 잘라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길종은 검열 당국의 요구 사항을 반영한 영화를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신을 흩트리고 다시 배치하는 과정을 수없이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초입의 ‘왜 불러’ 시퀀스가 보여주는 영화적 감각이, 전체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반부로 가면서 감독은 검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불균질한 텍스트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특히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이후 급격히 무너지는 리듬은 프랑스 누벨바그식의 형식 실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 포기한 채 단순히 나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유다. 심의대본에서 영화로 옮겨지며 크게 바뀐 장면 중 하나는 학생들의 시위로 휴강하는 신이다. 대본상으로는 학생들의 시위가 묘사되고(물론 이는 유신 반대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시위로 표현된다), 교수는 참가할 사람은 나가라고 말한다. 결국 교수는 휴강하겠다며 강의실을 떠나고, 칠판을 지우던 병태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상국가’의 획을 지우고 덧붙여 ‘사구라’로 바꾼다. 원래의 연출 의도는 학생들의 시위로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한 캠퍼스 풍경과 강의실에 홀로 앉아 고민에 빠진 병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에는 시위 장면을 모두 연고전으로 추정되는 여러 운동 경기의 실사 영상으로 바꿨다. 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 감독이 더 진전한 부분도 있다. 최종 대본(녹음대본)에는 아예 글자를 고친다고만 지시하며 한발 물러나 있지만, 사구라에서 ‘사쿠라’로 한 획을 더 쓰려고 하는 순간 커트하는 것이다. 이상국가에서 바뀐 사쿠라는 일본어로 벚꽃이기도 하지만 사기꾼, 야바위꾼, 한통속 같은 의미도 있다. 한국에서는 가짜라는 의미로도 즐겨 쓴다.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장면. 맨 아래 줄 왼쪽이 소설가 최인호, 오른쪽은 코미디언 이기동 한국의 ‘뉴 시네마’가 태어나다 < 바보들의 행진 >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비롯해 전 세계적 뉴웨이브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청년 문화를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그들이 놓인 배경을 다큐적 질감으로 제시하고 또 거칠지만 인상적인 숏 배열을 보여준다. 과감하게 줌을 쓰는 장면들도 그렇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기성곡을 영화음악으로 활용하며 뮤직비디오 신을 만든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을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해 영화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날이 갈수록’은 영화가 엔딩을 준비하면서 흘러나온다. 무기한 휴강이 결정된 캠퍼스에서 “들립니까”라는 외침이 들리고 병태는 구역질을 하는 듯 괴로워 보인다. 그리고 예쁜 고래를 잡겠다고 버릇처럼 얘기하던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떠난다. ‘고래사냥’이 힘차게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영철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신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뽑힌다. ‘그냥’ 입대를 선택한 병태는 빡빡 머리를 하고 입영열차에 타고 있고, 영자( 이영옥 )가 플랫폼으로 뛰어와 그를 찾아낸다.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병태에게 영자가 키스하려 하고, 낭만적이게도 헌병이 그녀를 들어 키스를 도와준다. 심의대본에서 “입술을 맞추는 영자, 말리는 헌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영화는 당대의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한국영화의 뉴웨이브에서 가장 중요한 인자는 검열이었을지 모른다. 할리우드에서 작가주의 영화가 자본과 제작 현장의 소음을 뚫고 나온 것이라면 1970년대 한국영화의 작가주의는 당국의 가위질을 견디는 것까지 추가해야 했다. 하길종이 만들고 싶었던 ‘새로운 영화’는 당국의 집요한 검열로 파편화된 불균질한 텍스트가 되었고, 이는 당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의 ‘뉴 시네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검열과 자본과 창작자가 빚어낸 한국영화사의 비극적인 순간들은 1980년대로 이어졌다. 영철 역의 하재영(왼쪽)과 영자 역의 이영옥(오른쪽) 침체의 연속 1970년대 후반 한국영화가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낸 것은, 1960년대 대표적인 감독들과 영상시대 동인 덕분이었다. 유현목 , 이만희 , 정진우 가 각각 < 장마 >(1979), < 삼포가는 길 >(1975), < 심봤다 >(1979) 등을 내놓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켰고, 김호선 , 홍파 , 이원세 등 영상시대 동인들의 작품이 또 다른 축을 버텨냈다. 특히 영상시대 활동은 동인으로 참가한 평론가 변인식 의 평가처럼 비록 ‘바보들의 행진’으로 끝났지만, 1980년대 초반의 사회비판적 리얼리즘 영화, 더 나아가 ‘코리안 뉴웨이브’의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 정권이 무너졌지만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신군부의 영화 정책은 유신 체제의 기조를 이으면서 반공안보영화의 제작을 추가했다. 당국의 요구대로 반공영화를 만들었지만, 반공영화가 아닌 반공영화가 등장한 것도 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장르영화로 연마한 임권택 의 구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 (... 그리고 계속)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전혀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작년에 나는 이 지면에서 장-피에르 레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마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자기의 방식으로 장-피에르 레오의 영화를 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첫 번째 영화에 14살의 나이에 출연한 소년. 앙뜨완 드와넬이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를 달려가다 말고 문득 멈춰 서서 우리를 바라볼 때 그 하나의 쇼트는 영화사의 사건이 되었다. 다섯 편의 앙트완 드와넬. 그 곁에는 장-뤽 고다르와 함께 68년 5월을 기다리면서 파리를 서성거리는 청년 장-피에르 레오가 있다. 혁명에의 예감. 그러나 장 외스타슈의 영화에서 레오는 실패한 혁명의 멜랑코리에 관해 카페에서 장황하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 사이에 12시간 30분 동안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자크 리베트의 장-피에르 레오가 있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에서 레오는 여전히 철들지 않는다. 베르날도 베르톨루치는 누벨바그에 적대적인 감정을 안고 말론 브란도의 맞은편에 세워 놓았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와 글라우베 로샤를 빼놓고 싶지는 않다. 장-피에르 레오는 종종 영화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누벨바그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도 장-피에르 레오는 살아남았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장-피에르 레오를 브레송 영화의 모델처럼 찍었다. 그리고 난 다음 전혀 예상하지 않은 순간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레오를, 나이 든 레오를, 거의 낙엽이 된 것만 같은 레오를 만났다. 청춘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슬픈 마음으로 알베르 세라의 영화에서 내내 침대에 누워있는 장-피에르 레오를 보았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이 소년을 볼 날이 많지 않겠구나. 그런데 갑자기 가을에 전화를 받았다. “장-피에르 레오를 만날 볼 생각이 있으세요?” 나는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편의 영화. 장-뤽 고다르의 1985년 작품 <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 >와 스와 노부히로의 새 영화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을 상영하면서 두 편의 영화의 주연인 장-피에르 레오를 초대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곁들여 알려주었다. 장-피에르 레오라니!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너무 감사한 나머지 내 쪽에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해버렸다. 해운대의 호텔에서 장-피에르 레오를 만난 것은 10월 13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이 몹시 불었으며 창문 바깥의 구름은 저녁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앞에 나타난 장-피에르 레오는 < 400번의 구타 >의 소년이 아니라 < 루이 14세의 죽음 >의 저물어가는 태양왕이었다. 그는 거동이 몹시 불편했고,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 의자는 최고급이었으며, 마치 침대처럼 푹신한 것이었다. 나는 세세한 디테일을 쓸 수 있지만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장-피에르 레오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앉자마자 내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고다르와 함께 작업한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아아, 고다르라니! 장-피에르 레오는 내가 만난 고다르 영화에 출연한 두 번째 배우이다. 첫 번째는 태안반도에서 만난 (< 다른 나라에서 >를 찍으러 방문한) 이자벨 위페르였다. 그런 다음 장-피에르 레오는 주머니 속의 구슬을 꺼내듯이 차례로 이름을 호명했다. 그는 말할 때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정확하게 그 자세로) 커다란 제스처로 양팔을 치켜들고 웅변하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가엾게도 이미 목소리는 지쳐서 갈라졌고 종종 가까스로 힘을 내서 말했다. 게다가 발음은 불분명하게 뒤섞였고 내가 알고 있는 영화 제목들도 때로 놓쳤다. 하지만 몹시 산만하게 이야기를 하다말고 문득 내게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 배운 게 뭔지 알아요? 배우에게 연기는 철학하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고다르가 내게 해준 말이에요. 영화는 그 방법을 쳐다보는 예술인 거죠” 나는 갑자기 누벨바그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만으로 충분해. 이걸로 나는 충만해. 두 번의 토크, 나흘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누벨바그의 작은 영화사에 관해 절대 알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장 외스타슈에 대해서도 들었다. 차이밍량의 연기 지도에 대해서도 들었다. 하지만 장-피에르 레오는 정말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토크를 원치 않았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한국의 시네필들이 간절히 원한다고 애절할 정도로 간청했다. 한 가지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장-피에르 레오가 그렇게 당신들 앞에 의자에 오래 앉아있었던 건 내 간청에 대한 대답이었다. 장-피에르 레오와의 두 번의 토크가 끝났다. 두 번째 토크가 끝난 다음 그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그는 문이 닫히기 전에 내게 말해주었다. “당신도 트뤼포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군요” 그리고 포옹을 해주었다. 나보다 키가 작았지만 약간 힘겹게 고개를 들고 내 뺨에 그의 뺨을 비벼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그런 다음 순식간에 내 앞에서 사라졌다. 약간 멍한 기분으로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문득 내가 평생 동안 꿈꾸었던 일 중의 하나가 이루어진 순간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달리 말할 수 있을까. 2. 올해 나의 영화는 망설일 필요 없이 데이빗 린치의 < 트윈 픽스: 더 리턴 >(시즌 3)이다. 그저 괴이하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이 시리즈는 여전히 데이빗 린치가 우리 시대에 가장 멀리 나아간 예술가 중의 한 명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게다가 (역시)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올해 1월 3일 나의 첫 토크는 데이빗 린치의 < 블루 벨벳 >이었다. 그런 다음 데이빗 린치에 관한 다큐멘터리 < 아트 라이프 >를 진행했고, 가을에는 < 이레이저 헤드 > < 트윈 픽스: 불바다를 나와 함께 건너자 > < 로스트 하이웨이 > < 멀홀랜드 드라이브 >를 차례로 진행했다. 12월에는 데이빗 린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리가 기다리는 중이다. 말하자면 올 한 해는 내게 ‘다시 찾아온’ 데이빗 린치의 한 해였다. 왕빙의 두 편의 영화는 한 마디로 굉장했다. < 15시간 >은 15시간 40분 동안 진행된다. 쯔린성에 자리한 아동복 피복 공장 15,000개 중의 한 작업실을 막 일이 시작되는 아침 시간에 찾아간 다음 하루 종일 그 장소에 머물면서 그들이 퇴근하는 한밤중까지 하루 종일 버티고 있는 이 영화는 (좀 이상한 의미에서) 왕빙의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이다. (아마 이 영화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할 다른 자리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 편 < 미세스 팡 >은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할머니 팡슈잉(方?英)을 찍었다. 여기서 찍은 것은 말 그대로 ‘죽어가는’ 시간이다. 왕빙은 죽음을 착취하지 않는다. 그저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미세스 팡>은 죽음 앞에서 영화가 가져야 할 태도를 다시 한번 질문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한 편은 한 장소에 대해서, 다른 한 편은 한 사람에 대해서 찍는다. 왕빙은 점점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부산에서 만난) 프랑스 프로듀서에 의하면 왕빙은 이미 다음 영화를 파리에서 편집하는 중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다음 영화에 대해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아마 2018년에 만나게 될 왕빙의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왕빙의 영화가 고통스럽다면 프레드릭 와이즈만은 잠시 동안 천국에 다녀온 기분을 안겨준다. <미세스 팡>에 올해 본 최고의 클로즈업 쇼트가 있다면 <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에는 최고의 롱 쇼트가 기다리고 있다. 프레드릭 와이즈만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롱 쇼트를 가장 의미 있게 찍는 감독이다. 거의 천국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가 와이즈만도 미처 예기치 않게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영화가 된 것은 동시에 이 영화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프레드릭 와이즈만의 21세기 영화가 항상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걸작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낸 두 편의 기괴한 영화 <자네트>와 < 재키 >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굉장하다. 아마 <자네트>는 찬반이 갈릴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브뤼노 뒤몽의 새로운 뮤지컬에 완전히 승복한다. 올해에는 두 편의 파블로 라라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다른 한 편도 마찬가지로 전기영화인 < 네루다 >이다) 나는 이 사람의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다. 원작에 기대어 만든 두 편의 서사 에픽 < 잃어버린 도시 Z >와 <자마>는 영화와 ‘자연’이 만나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탐구이다. 점점 영화에서 자연을 그래픽으로 그려내는 동안 어떤 영화들은 ‘생생한’ 자연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영화라는 장치 자체가 경험하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올해 가장 신선한 영화는 조쉬와 베니 사프디 형제의 < 굿 타임 >이다. 아마 사프디 형제는 점점 더 놀라워질 것이다. 이 선택은 지지의 표명이다. 물론 마지막에 선택한 스와 노부히로의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는 단지 장-피에르 레오를 만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념으로 포함시킨 것이 아니다. 스와 노부히로는 여기서 매우 느슨하게 진행하면서 마치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가져온다. 물론 이 영화의 대부분에서 보여준 그의 연출방식, 즉 배우에게 영화를 그저 맡긴 채 그 리듬을 따라가는 흐름은 스와 노부히로만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까지 항상 어떤 긴장을 품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드물게도 기분 좋은 한여름의 휴가를 즐기러 온 것만 같다. 아마 이 영화 속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그 자연스러움이 한몫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 퍼펙트 커플 >이 로셀리니의 < 이탈리아 여행 >의 오마주라면 분명히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는 < 400번의 구타 >의 오마주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 영화 속의 영화에서 잠든 연기를 하던 장-피에르 레오가 문득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볼 때 거기서 어린 앙트완이 우리를 바라보던 그 장면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추신: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영화를 뽑지 않긴 했지만 올해의 연기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서 김민희 는 정말 아름답고 애처롭다. 특히 어둠이 다가오는 커피숍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의 롱 테이크 씬은 홍상수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슬픈 장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