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제일검
- 감독
- 사병록, 주명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임해림, 황남도, 진복승, 황준, 지혜령, 방이, 강기, 임봉승, 김기범, 임하, 장인한, 강계식, 송미남, 임생출, 박병기, 주상호, 정도령, 전병화, 공시훈
1937년 8월 1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노인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학교 행사 일을 도맡다시피 했는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중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1953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서 도선장치기업사라는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이봉선의 집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이봉선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백화점 미술부에서 이벤트 행사를 담당하고 해방 직후에는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소속으로 작품 발표전에 참가하는 등 산업미술가로 활동하던 인물로, 1947년 계몽문화협회가 제작한 두 편의 영화 <윤봉길 의사>(윤봉춘)와 <삼일혁명기>(이구영)로 영화 미술에 뛰어들었다. 또한 그는 전쟁기에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국극과 악극의 무대 미술을 하기도 했으며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미도파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의 인테리어 복구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후 노인택은 이봉선을 도와 예그린합창단 발표회, 이승만 대통령 생일축하연 같은 행사에서 무대 미술 작업을 하는 동시에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을 시작으로 <막나니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 <처녀별>(윤봉춘, 1956) 등의 영화 미술 작업을 병행했고, 1956년부터 2년 간 일본 유학파 무대 미술가 김정환이 강의하던 동숭동 소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청강하면서 응용미술을 배우기도 했다. [사진 1] 영화 <막난이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의 한 장면 [사진 2] 영화 <처녀별>(윤봉춘, 1956)의 한 장면 노인택에 따르면, 1950~70년대 미술부의 주 업무는 세트 제작이었으며 로케이션이나 오픈 촬영의 경우엔 작품의 시대상이나 분위기에 맞게 세팅을 맞추는 작업을 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세트 제작이 끝나고 본 촬영에 들어가면 현장엔 미술부원 한 명만이 상주하며 다른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했다. 미술감독은 대개 감독이 직접 선택했고, 한형모나 유현목 정도를 제외한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 특히 김화랑 같은 연극을 하다 영화계로 들어온 감독들은 영화 미술에 대해선 거의 미술감독에게 일임했다. 1950년대 후반 영화 미술을 하던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연극이나 악극 같은 무대 작업을 하던 이들이 주로 했던 탓에 세트의 입체감 같은 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스승인 이봉선의 경우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분이라 영화 미술에 잘 맞았고 나름 일가견도 있어, 당시 영화 미술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형모 감독과 영화 미술 이봉선의 조수 시절 노인택은 김성민, 윤봉춘, 신경균, 김화랑 등 여러 감독들의 작품에 참여했지만, 특히 한형모 감독과 관련된 작품을 주로 작업했다고 한다. <운명의 손>, <자유부인>(1956), <나 혼자만이>(1958), <여사장>(1959) 등 한형모가 감독한 작품은 물론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같은 한형모가 촬영을 맡은 작품에도 참여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의 한 장면 [사진 4] 영화 <단종애사>(전창근, 1956)의 한 장면 이는 이봉선과 한형모의 오랜 친분 때문이었는데,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만주 신경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였고 1947년 이봉선을 처음 영화계로 불러들인 사람도 바로 한형모였다. 이봉선은 이를 계기로 1956년 한형모가 관여하고 있던 삼성영화사의 미술부장을 맡게 되었고, 1957년 삼성 스튜디오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인택이 이봉선의 미술 조수로 처음 참여한 <운명의 손>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세트 촬영을 감행한 작품이다. 창고를 개조한 간이 스튜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시공관 앞 은행 건물 옥상에 미군 부대에서 파는 헌 건축자재를 구입해 광목천을 덧씌워 세트를 제작했는데, 극 중 마가렛(윤인자 분)의 서양식 아파트와 바(bar)는 한형모가 구해온 미국, 일본의 잡지에서 본 사진을 참조해 만들어낸 공간이며, 마지막 격투 신이 벌어지는 동굴 내부 역시 세트였다고 한다. 한형모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답게 영화 미술에도 상당 부분 신경을 썼는데, 세트 디자인을 일일이 직접 스케치했으며 아파트 내부의 추상적인 문양의 커튼이나 형광등 스탠드, 부엉이 시계 같은 소품들 역시 한형모가 직접 일본에서 구입해온 것들이었다. [사진 5~8]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1954) 속 장면들 한형모 감독과 노인택 미술감독이 미국과 일본의 잡지들을 참고해서 만들어낸 세트 디자인과 소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부인>에서 유명한 댄스홀, 요정 별장 같은 모든 세트는 당시 불에 타 지붕도 없던 150평의 용산 RTO(미군장병안내소) 건물을 임대해 지붕에 군용천막을 덮어씌워 만든 소위 ‘창고 스튜디오’에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트 촬영보다 양품점을 비롯해 장 교수(박암 분)의 연구실과 미스 박(양미희 분)의 사무실 등 오픈에서의 촬영이 많은데, 노인택은 그 이유가 바로 제작비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양품점의 경우는 리얼리티 상으로 꼭 필요했던 거리의 엑스트라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공간들의 경우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의 한 건물을 통째로 빌려 연구실로, 사무실로, 경찰서로 활용하면서 제작비를 줄였다는 것이다. [사진 9~12] 영화 <자유부인>(한형모, 1956) 속 장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 언덕 장면이나 장 교수의 집 마당, 대문 밖 같은 공간의 낮 장면은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서도 굳이 밤 장면은 어색해 보이는 세트에서 촬영한 것은 당시 전기도 부족하고 발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밤거리를 밝힐 정도의 조명 동원이 힘들었고 단기간에 사계절을 모두 촬영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진 13~16] <자유부인>에서 같은 장소의 낮 장면(로케이션 촬영)과 밤 장면(세트 촬영) 삼성 스튜디오와 <그대와 영원히> 1957년 미국의 아세아문화재단에서 원조받은 기재를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정릉 스튜디오를 필두로, <자유부인>의 제작사인 삼성영화사의 삼성 스튜디오, 그리고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3개의 스튜디오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한국 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본격적인 촬영 스튜디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중 삼성 스튜디오는 한형모의 아이디어와 이봉선의 설계로 만들어졌는데, 이봉선은 이후 이곳에서 촬영된 <항구의 일야>(김화랑, 1957), <오해마세요>(권영순, 1957),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 <3인의 신부>(김수용, 1959) 등에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 17] 영화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이들 작품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그대와 영원히>는 당시 삼성 스튜디오의 위용과 유현목 감독의 정교한 미장센(mise-en-scène)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노인택은 유현목이 당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세트를 제작할 때 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세트 도면을 보고 철두철미하게 콘티를 짜 세트 활용을 굉장히 잘했던 감독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교도소 세트라든가 댄스홀, 병원 특실, 지하실 세트 등에서의 세트 활용은 매우 돋보인다. [사진 18~21] 영화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에서 재현된 '2층 구조' 세트들 특히 이 영화의 세트들이 대부분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 물론 전체적인 미술 컨셉을 잡을 때부터 미리 계획된 것이었지만, <자유부인> 이후 크레인 같은 장비가 좋아지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좋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세트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나 ‘크라운 맥주’ 같은 상표는 당시 이봉선이 이들 회사의 로고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댄스홀 장면 등에서 노출 시킬 수 있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위스키와 맥주 등을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협찬받았다고 한다. [사진 22, 23] <그대와 영원히>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 상표(상)와 '크라운 맥주'의 상표(하) 미술감독 노인택과 김기덕 감독 노인택은 1961년 이봉선이 제작에 관여하기도 한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로 미술감독으로 데뷔했다. 이미 4~5년 전부터 이봉선이 담당한 영화의 미술 작업을 도맡아왔던 그에게 사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때부터 노인택은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작품을 수주받고 능력을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노인택은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소속으로 ‘미술 노인택’은 물론 ‘미술 이봉선’의 작품들까지 모두 자신이 진행했다고 한다. [사진 24, 25] 영화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1961)의 세트 촬영 현장 미술감독으로 데뷔한 후 노인택은 <원효대사>(장일호, 1962), <언니는 좋겠네>(이형표, 1963), <밤안개>(정창화, 1964), <십년세도>(임권택, 1964), <협박자>(이만희, 1964) 등 이봉선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수 시절 한 번도 같이 작업해보지 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그리고 <악인은 없다>(김기덕, 1962)부터 한형모의 조감독 출신인 김기덕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함께했다. 당시 극동흥업에서 전무이사 겸 전속 감독으로 활동 중이던 김기덕은 연간 5~6편의 작품을 연출했던 당대 ‘흥행 랭킹 넘버 원’ 감독이었으며, 멜로드라마, 사극영화, 전쟁영화, 스릴러 영화, 코미디 영화, 스포츠 영화, 심지어 SF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 영화를 만든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다. 그래서 김기덕과의 작업은 노인택에게 다양한 장르 영화의 미술을 섭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신성일-엄앵란 콤비의 <가정교사>(1963), <맨발의 청춘>(1964) 등을 통해 196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였던 청춘영화의 미술을 선도할 수 있었다. 김기덕에 따르면, <맨발의 청춘>에서 구현된 레슬링 경기장, 당구장, 댄스홀, 음악다방 같은 장소는 당시 젊은이들의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었으며, “가보고 싶지만 못 가본 그런 장소,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창조”한 것이었다고 한다. 요안나(엄앵란 분)의 서양식 침대 방이라든가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빌트인(built-in) 방식의 두수(신성일 분)의 방 세트 역시 노인택과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것이었다. 김기덕: 두수 방에서 침대 나오는 거. 내가 다 하여간 그런 것들을, ‘아, 이런 게 있으면 재밌겠다’ 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거를 반영했는데. 그때 마침 그 미술 담당이 노인택 씨라고. 노인택 씨 조수 때부터 나도 조감독 할 때부터 같이 호흡을 맞췄거든. 그래서 굉장히 내 의도를 잘 알고 아주 나하고 호흡이 잘 맞았어요. 1 [사진 26~29]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 속 장면들 노인택은 또한 한국 최초의 SF 영화인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에도 참여해 일본에서 온 특수미술감독 미카미 무츠오(三上陸男)로부터 미니어처 제작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다. 이전에도 <그 여자의 일생>(김한일, 1957) 등에서 미니어처 촬영이 시도된 바 있지만 조잡하고 어설픈 수준이었는데, 미카미 무츠오가 알려준 축적법 등으로 정교한 미니어처 설계와 제작 기술을 터득했고 이후 <증언>(임권택, 1973) 등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진 30~3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다작의 시대, 다작 감독과 다작 미술감독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는 다작의 시대였다. 1966년 공보부가 국산영화의 무분별한 제작을 막고 초과 공급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제작 쿼터제를 시행하고 1967년에는 등록기준을 강화해 25개의 영화사를 12개사로 정리하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1968년부터 한 해에 무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 노인택은 1968년 32편, 1969년 49편, 1970년 47편의 작품에 미술감독 크레딧을 올렸다. 해당 시기 한국영화 총 제작 편수가 1968년에 212편, 1969년 229편, 1970년 209편임을 생각해봤을 때, 노인택이 참여한 작품수는 당해 제작된 작품 중 거의 1/5에 해당하는 편수이다. 여기에 크레딧에는 이봉선의 이름으로 올라갔으나, 노인택이 참여했던 작품들의 수(1968년 12편, 1969년 7편, 1970년 7편)까지 더하면 1/4에 이른다. 물론 당시 스타 배우들과 감독, 촬영기사, 조명기사 등 메인 스태프들도 하루에 서너 작품씩 겹치기 촬영을 하던 시절이었다지만, 한 해 제작된 작품의 1/4을 혼자 감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믿기 힘들다. 사실 당시 노인택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삼성 스튜디오를 비롯해 정릉 스튜디오, 미아리 한국영화촬영소,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 뚝섬 극동영화촬영소 등 여러 개의 촬영 스튜디오를 관리하며 40~50명의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로테이션으로 작업했고, 자신은 미술감독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감리만 맡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옷 갈아입으러 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들어가서 잘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 또한 이 시기 노인택이 다작 미술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우선 늘 함께해오던 김기덕이 다작 감독이었던 데다 1967년부터 또 다른 다작 감독들이었던 고영남, 최인현 등의 작품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영남과 최인현은 연간 8~10편씩 양산해내던 유명한 다작 감독들이었는데, 노인택은 매년 이들의 작품들 중 한두 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미술을 담당했다. 특히 ‘사극의 대인(大人)’, ‘생각하는 황소’ 등으로 불렸던 최인현 감독과의 작업은 그를 다시금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부터 사극영화의 미술도 꾸준히 작업해오긴 했지만, <풍운삼국지>(1967), <총각원님>(1967), <천도화>(1967), <칠부열녀>(1967), <나그네 임금>(1967), <자주댕기>(1968), <방랑대군>(1968), <만고강산>(1969) 등 일련의 최인현과의 사극영화 작업은 그에게 고증과 관련된 더 깊고 폭넓은 공부를 하게 했고 사극 미술에 대한 실력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사진 33] 영화 <풍운삼국지>(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4] 영화 <총각원님>(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5] 영화 <천도화>(최인현, 1967)의 포스터 또한 노인택은 1968년 최인현의 <이상의 날개>, <로맨스마마>, <백야>, <5월생> 같은 현대물의 미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 중 이상의 삶을 소재로 한 <이상의 날개>는 일반적인 전기영화처럼 이상의 생애를 따라가기보다 그의 실존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이상의 내면을 연극 무대나 설치미술과 같은 초현실주의적 세트로 구현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노인택: 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가니까 이거 모르겠다, 세트를 어떻게 지어야 될는지 그랬더니, 마음 내키는 대로, 이해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세트를 구상해라 이거야.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 맞추겠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의자면 발이 네 개 있어야 되잖아. 발 세 개 가지고 의자를 만들라 이거야. 사람이 다리 하나 없다고 못 서 있는 거 아니다 이거야. 걷지를 못할 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라는 거야. 2 [사진 36] 영화 <이상의 날개>(최인현, 1968)의 포스터 영화진흥공사 미술참사와 촬영 스튜디오 대표 1973년 노인택은 제4차 개정 영화법에 의해 설립된 영화진흥공사에 미술참사로 입사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는 ‘국산영화의 표본이자 바람직한 제작방향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증언>,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태백산맥>(권영순, 1975) 같은 대작 국책영화를 직접 제작했는데, 노인택은 이들 작품에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팀을 투입시켜 영화 미술을 총괄 관장했다. [사진 37] 영화 <증언>(임권택, 1973)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사진 38] 영화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의 한 장면 [사진 39]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의 한 장면 이후 노인택은 1975년부터 그동안 이봉선이 대표로 있던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의 대표직을 이어받는다. 1979년에는 세경흥업촬영소의 대표직도 갖게 되지만, 이때부터 노인택의 필모그래피는 우성사의 <왕십리>(임권택, 1976)를 제외하고 <춘자의 사랑이야기>(이유섭,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산불>(김수용, 1977),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1978), <밤의 찬가>(김호선, 1979), <애권>(이형표, 1980) 등 모두 태창흥업의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더욱이 1975년 5편, 1976년 4편, 1977년 9편, 1978년 12편, 1979년 5편, 1980년 7편 등 참여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데, 당시 한국영화계는 장기 불황에 빠져있었고 제작 편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반 방송과 영화가 컬러로 바뀌면서 진행된 한국 표준색상 선정 작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노인택은 1985년부터 남아진흥촬영소 대표로 재직하며 영화보다는 광고영상(CF) 미술을 주로 작업했다. 이 시기 영화 미술 작업은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 단 한 편뿐이다. 1992년 남양주의 한국종합촬영소 건립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93년 남아미술센터(개명) 대표이사, 고문 등을 역임하며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미술감독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사진 40] 영화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의 한 장면 [사진 41] 영화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한 장면 1) 공영민⋅김기덕,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변화 1권-김기덕⋅김수동⋅김종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13쪽. 2) 박진호⋅노인택, 『2004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노인택 편』, 한국영상자료원, 2004, 82쪽.
박남옥 , 홍은원 , 최은희 의 뒤를 이어 네 번째로 한국 여자감독이 된 황혜미 는 1970년대 유일하게 활동했던 여성감독이었다. 홍일점 영화감독 자체로도 유명했지만, 더욱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소르본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거의 정설처럼 회자되었던 소문이었다. 간혹 남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했다는 낭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 아름다운 생존 >에서 프랑스에 잠시 가있었을 뿐 소르본느를 졸업하지도 않았고 조지타운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활동 당시에 그녀는 내내 여류감독과 소르본느를 졸업한 재원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되었다. 황혜미는 1936년 만주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63년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황종률이며, 아마도 부친이 일본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만주국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이화여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였고, 1961년 미국에서 김동수와 결혼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바로 미국으로 가느라고 등록만 해놓고 수업을 거의 불참했고 대신 하루에 3편을 볼 정도로 열성적으로 영화관에 다녔다고 술회한다. 1) 인터뷰에서는 그 당시 <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 >(1959) 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본 추억을 생생히 기억해내고 있다. 황혜미는 어릴 때부터 이미 영화광이었는데 중학교 2-3학년이었던 부산 피난시절부터 미성년자 입장불가의 극장을 출입하는데 능숙했었다고 한다. 이 시기 기억나는 영화로 <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1937)이나 < 망향(Pepe Le Moko) (>(1937)을 몰래 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때부터 유럽영화에 깊이 심취해있었으며 프랑스 유학시절에는 유럽 모더니즘 영화,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혜미는 인터뷰에서 스스로 전후 세대로 규정하면서 성장과정에서 카뮈나 사르트르에 영향받았고 헤르만 헤세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언급하면서 특히 영화제작에 대해서는 푸도프킨의 서적을 중요하게 참조했음을 밝혔다. 2) 첫 경험 미국에서 돌아와 김승옥 의 소설을 읽고 매료되었던 황혜미는 남편 김동수 의 도움으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화하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 안개 >(1967)의 감독을 맡기 위해서 소공동의 사무실에서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엘리트’였던 제작자 김동수와 황혜미 커플을 만났고 그 자리에는 당시 신문에 열정적으로 글을 쓰던 이어령도 참석하고 있었다. 3) 태창흥업의 대명제작을 하는 프로듀서로 황혜미는 <안개>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고, 그녀의 표현처럼 ‘처음이라서 재미있으니까 일일이’ ‘로케이션 헌팅까지 쫓아다니’면서 완성한 영화였다.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방가르드’한 기획을 밀어붙여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하였고 젊은 여성 기획자로서 황혜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문예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획득한 2편의 외화수입권은 영화계의 초짜였던 황혜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4) 차기작으로 < 감자 >(1968)를 선택했고 김승옥에게 감독을 맡겼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검열에 시달렸던 <감자>는 원래 기획의도와 멀어지면서 흥행에도 실패하였다. 이러한 힘든 경험을 겪은 후 김동수와 황혜미 부부는 1970년 마벨코리아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첫 작품으로 황혜미 각본, 감독의 < 첫경험 >(1970)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말 영화사는 보한산업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첫경험>은 1970년 11월 27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영화예술』에서 선정한 1970년 베스트 영화 4위에 올랐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황혜미는 신인상을 받았고 흥행 역시 무난히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을 황혜미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영화가 개봉하기 전 “우리영화의 시장조사 및 수출-입 문제에 관한 현지답사”를 위해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황혜미에게 이러한 성공을 안겨준 영화 <첫경험>은 중년을 바라보는 부부인 기준( 남궁원 )과 지숙( 김지미 )은 권태로운 일상을 다룬다. 5) 부산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에서 기준은 대학자퇴생 인애( 윤정희 )와 만나게 되고 밀회를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를 눈치 챈 지숙은 방황하게 되고 탈선을 시도한다. 그러자 인애가 기준과의 지난날을 소중한 첫경험으로 남겨두고 떠남으로써 그들의 가정은 파탄직전에서 구출된다. 당시 유행하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이야기 자체만 본다면 평범할 수 있으나 권태로운 부부의 일상 그리고 탈선 및 좌절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다. 슬픈 꽃잎이 질 때 이후로 황혜미는 < 슬픈 꽃잎이 질 때 >(1971)와 < 관계 >(1972)를 연이어 제작, 각본, 감독한다. 황혜미가 사업차 3개월의 외유 끝에 돌아와서 집필한 작품인 <슬픈 꽃잎이 질 때>는 고아인 서은희( 문희 )가 수녀님의 소개로 부호인 엄상훈(남궁원)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상훈은 이름난 바람둥이 홀아비이고 방치 속에 자라는 두 자녀는 개구쟁이들이다. 은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아이들과 친해진다. 이 과정에서 점차 상훈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전부인의 가족이 벌인 흉계에 휘말린다. 결국 상훈과 은희는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게 되지만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은희는 죽게 된다.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 및 등장인물들의 구도는 < 제인에어 (Jane Eyre)>(1944)와 <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1965)의 구조를 차용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영화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도 크게 실패하였다.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한 기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 관계 세 번째 작품인 <관계>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 < 졸업(The Graduate) >(1967)을 패러디한 것인데 원래의 설정에서 남녀를 변경한 영화이다. 홀어머니( 김신재 )와 살고있는 인애( 박지영 )은 근무하는 회사의 전무 기택( 남궁원 )의 유혹에 몸을 버리게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이를 알게된 어머니는 충격으로 숨진다. 여행사에 취직한 인애는 손님인 준호( 신영일 )의 적극적 구애로 사귀게 되고 준호의 부모님과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준호의 아버지가 기택임을 알게되고 결혼을 피하게 된다. 힘들어하는 준호에게 기택은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인애는 자살을 기도하나 준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된다. 너무 힘들어하는 준호를 보던 준호의 어머니( 문정숙 )은 사실 준호가 기택의 자식이 아님을 밝힌다. 진실을 알게 된 기택은 깊은 참회에 괴로워하고 인애는 병실에서 나와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지만 준호는 차를 몰고 와서 버스를 막아서며 인애와 재회한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 성역할을 변경시켰을 때 그 이야기는 당시 흔한 불륜의 소재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과 결국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준호와 인애가 맺어질 수 있다는 결론은 한 신문평의 언급처럼 “<졸업>의 경우 기존윤리를 정면에서 초극하려했던데 비하면 <관계>는 끝내 한국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6) 현재 황혜미가 감독한 이 세 영화 모두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적인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부재는 안타깝다. 이 한계는 황혜미의 문제의식과 그 영화들이 가지는 당대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인터뷰와 당대의 평가들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조망해볼 때 우리는 당시 남성감독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감성 혹은 윤리적 길항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황혜미가 감독으로 활발하게 작업했던 1970년대 초반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경험>이 상영된 해인 1970년을 평가하면서 이영일 은 해당년도 영화계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하나는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로 떠오른 < 미워도 다시한번 >류의 범람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확연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7)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1,2,3편 모두 흥행에 성공하면서 1970년대 초반 멜로드라마의 주류서사가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항상 ‘한 남자의 비틀거리는 행위 때문에 그의 아내와 다른 하나의 동거여인 사이에 ...끝없는 자기희생’을 반복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8) 반면 이러한 보수적 이데올로기 반대편에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을 그린 성 주제 영화들이 존재했다. 이영일은 <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 >(1960) 나 < 페드라(Phaedra) >(1962) 처럼 파격적인 윤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성을 타부시했던 한국의 상황에서 성을 주제로 한 이 영화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반체제적인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9) 황혜미의 <첫경험>은 위의 두 경향이 기묘하게 길항하고 있다. 당시 유행하는 불륜의 소재를 차용하지만, 불륜으로 인한 신파적 희생은 부재하다. 더구나 불륜 자체는 등장인물들에게 기성의 사회가 가지는 틀에 박힌 질서나 윤리의식을 벗어나는 상황으로 변주된다. 이처럼 불륜이 무겁지 않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은 별다른 윤리적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를 하게된다. 그들이 느끼는 탈선의 근거는 징후적으로 소품이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거나 간결한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설명이 결여된 채 이미지의 단상들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권태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평론가들이 호평하였던 영화의 도입부인 기준과 지숙의 섹스 장면은 “차가운 금속성의 탁상시계 소리를 에펙트로 넣고 그 속에서 부부의 냉각된 섹스”를 보여줌으로써 “부부의 성 자체가 이미 단순한 생활 속의 반복으로 리듬같은 일상으로 변했음”을 드러낸다. 10) 인애 역시 대학이라는 제도 자체에서 막 벗어난 젊은 여성으로 둘은 부산이라는 비일상적 휴양지에서 해방 혹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에 쉽게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영화들에서 섹스와 불륜은 엄중한 도덕적 문제였다. 성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결혼을 전제로 하는 약속된 행위여야만 했고, 남성의 기만에 속아서 순결을 지키지못한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첫경험>에서 섹스는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둘의 밀회는 계속되고 눈치를 챈 지숙은 배반감에 탈선을 시도한다. 기준은 아들과 아내가 있는 가정이 점차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인애 역시 유부남이라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그 무게감이 점점 힘들어진다. 지숙의 탈선시도는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되고 인애는 담담하게 기준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일상은 봉합된다. 게다가 ‘첫경험’을 한 인애가 파멸을 한다는 암시도 없다. 영화는 치정이나 불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감정적 격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일상성을 강조하며 영상언어를 통해 그 감성들을 유려하게 그려나간다. 공허함을 느낀 지숙이 아들이 동물원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거대한 코끼리와 대조되는 지숙의 왜소함을 이미지화함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이 느끼는 위축감을 드러내거나 기준과 인애의 이별 장면에서 문을 사이에 두고 외부에 있는 남성과 내부의 젊은이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젊은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각각 속해있는 세대 차이를 강조하는 장면 등 11) 은 어떠한 발화적인 설명 없이 결국 각자의 벗어나려했던 기존의 틀로 돌아가는 행위의 당위성을 납득시켜준다. 12) <첫경험>의 불륜을 보는 여성적 시선이나 <관계>가 드러내는 한 여성을 둘러싼 부자관계의 비윤리성은 한국사회의 기본 윤리에 대한 저항적 도전이었다. 그러나 황혜미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안도할만한 결론을 내면서 그 저항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 무뎌지는 저항의 감각이 그녀 본래의 윤리의식의 한계인지 상업성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업적 압박이 아니었다면 황혜미는 더 강하게 도전적인 시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개>를 제작하는 도중이었던 1967년 9월, 그녀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실험적인 시도는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밑지는 일이 싫어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13) 아이러니 하게도 <안개>는 황혜미가 관여한 영화 중 가장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 되었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을 했다. 그러나 <첫경험>과 이후 작품을 통해 작가적 의식과 상업성은 점차 균형을 잃었다. ‘월리엄 와일러’같은 분위기의 상업영화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녀가 가진 성과 결혼에 대한 시대감각, 그리고 1970년대라는 현실상황은 매끄럽게 조화되지 못했다. 황혜미는 세 편을 끝으로 영화활동을 접었으며 몸담고 있던 보한산업주식회사 역시 1973년 이후에는 제작을 중단했다. 1)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8면. 2) 이 글에서 주가 없는 황혜미의 소회나 발언 및 인용문은 모두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2001)에서 채록한 것이다. 3) 김수용, 『나의 사랑 시네마』, 시네21, 2005. 105쪽. 여타 자료나 당시를 회고하는 글들을 참조하면 이어령은 시나리오의 감수를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4) 황혜미, 「연패 끝에 <첫경험>의 메가폰」, 『여성동아』 1970년 12월호, 179쪽. 5) 기준이라는 이름은 <안개>의 남주인공 이름과 동일하다. 그 연결점을 의도적으로 설졍한 것으로 보인다. 6) 「타협으로 끝난 애정모럴의 갈등- <관계>」, 동아일보 1972.4.25.8면. 7) 이영일, 「마비와 혼미의 시대」, 『영화예술』 1970년 12월호, 32-36쪽. 8) 이영일, 위의 글, 34쪽. 9) 이영일, 위의 글, 35쪽. 10) 이서림, 「참신한 영화감각의 가작」, 『영화예술』. 1971년 1월호, 72쪽. 11) 「<첫경험>, 처녀의 불장난을 영상화」, 동아일보, 1970.11.28. 5면. 12) 이러한 서사구조와 영상미의 성취는 당시 프랑스 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 1966)와 <파리의 정사>(Vivre Pour Vivre, 1967)의 표절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13) 「영화제작계의 홍일점 황혜미씨」, 경향신문, 1967.9.2. 8면. 황혜미 감독
임원식 감독의 대표작은 일제감정기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관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일 것이다. 임원식 감독이 연출, 제작한 작품 중 두 편이 상영중지를 당했는데 그 중 한 편이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간판이 내려졌는데 당시 옥중에 있던 사회운동가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에 항의해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에 갇히기도 했다. (사진1) 임원식 감독이 대표작으로 뽑은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포스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개봉 전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는 포상으로 외화수입쿼터를 받았다. 임원식 감독은 그 전해에 새마을정신을 구현한 영화 <어머니>(1976)를 연출해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황해도 월남민 출신인 그는 남한에 대한 첫 인상으로 ‘육탄 10용사’의 용맹함을 꼽을 정도로 애국심 투철한 인물이었음에도 당시 정부의 강박증적인 검열 관행은 피할 수 없었다. 해방정국과 월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성장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감독으로 데뷔해, 70,80년대 검열로 위기를 겪고 파산해서 재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줄곧 아이러니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때로는 예기치 않은 실패로, 때로는 뜻밖의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임원식 감독은 1932년 생으로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의병 출신인 부친 슬하의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고, 곡창지대의 부농이었던 집안 덕에 일제 강점기는 큰 고통 없이 보낸다. 하지만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그의 가족은 월남을 결심한다. 먼저 월남한 서북청년단 특공대장인 큰 형님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24일 38선을 넘어 서울 회현동 적산가옥에 자리 잡는다. 서울에 정착하기 위해 그는 얼마간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의약품을 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고 경제적 안정을 찾을 무렵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한다. (사진2) 1948년 경 서울 성도중학교(현재 용문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임원식 감독 (사진3) 임원식 감독은 서울 성도중학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지냈다.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있고 찍은 사진 중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4) 학도호국단 제복을 입고 야외훈련 중인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 초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잔류하게 된다. 징집연령이었던 그는 집에서 숨어 지내다 배고픔 때문에 결국 인민의용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전선으로 배치되기 직전 탈출해 누나와 함께 전주로 피난한다. 9.28 수복 직후 피난지 전주에서 임호 라는 예명으로 학도의용군에 지원한다. (사진5) 1950년 학도의용군 서북지구대가 전주에 주둔하던 당시 단체사진이다. 아래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6) 1950년 학도의용군 특공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찍은 것으로 오른쪽이 당시 특공위원회 특공대장으로 있던 임원식 감독이다. 그리고 학도의용군과 함께 대구로 이동한 후 전선에 배치되기를 기다리다, 대구에서 홀로 국민방위군에 입대한다. (사진7, 8) 1950년 19살의 앳된 나이에 국민방위군 즉 자신보다 나이 많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대원 2천명을 인솔해 도보로 경남 사천에서 한산섬으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이다. 완장을 차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국민방위군에서 그는 대원 2천명을 경남 사천에서 한산도로 도보로 이동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다시 대구에서 벨기에 부대의 보급부대로 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240명의 부대원과 240개의 지게를 기차에 싣고 대구를 출발, 고랑포에 도착해 벨기에 부대에 합류한다. (사진9) 1951년 임원식 감독이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써 함께 종군했던 29영국 여단 벨기에 부대의 군복으로 환복해 입은 모습이다. 이제 그는 국민방위군 18중대 CTC부대 중대장으로 벨기에 부대와 함께 전방에서 종군한다. 그는 고지에서 전투 중인 벨기에군에게 총탄을 조달하기 위해 지게에 총탄을 싣고 고지를 오르내리는 민간인 보급부대를 이끌었다. (사진10) 1951년 한국전쟁기 벨기에 부대 군복에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10대 후반의 앳된 얼굴이다. (사진11) 벨기에 부대와 배구를 하던 네트 너머로 천막으로 된 막사가 보인다. 오른쪽이 임원식 감독이고 왼쪽은 함께 종군한 국민방위군 18중대 취사병이다. 국민방위군은 벨기에군이 제공하는 부식과 벨기에 군인들이 주는 팁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전쟁은 길어지고 전투도 생활이 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주둔지 주변의 주저 않은 집터를 뒤져 주인 잃은 쓸 만한 물건들을 내다 팔고 때로는 피난민들이 버리고 간 농작물을 거두어 팔아가며 생존을 이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으로 위장한 뒤 외인부대가 있는 전방까지 들어온 양공주들 또한 그가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일상이다. 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외인부대와 함께 종군하는 국민방위군 부대원들은 적절한 대우와 보수가 주어지지 않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불만에 공감한 중대장 임원식은 대구로 내려와 국민방위군 본부, 육군본부를 다니며 국민방위군의 권리와 보상에 대해 묻고 따졌지만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소득 없이 부대로 복귀하기 직전 우연히 대구의 우체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아버지를 만나 가족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는 10대 후반의 어린나이에 겪은 전쟁을 통해 성장해갔다.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생존의 형태들을 목격하며, 요령 있게 살아 나가는 방법을 배우며 성숙해갔다. 그리고 감악산 전투 등 치열한 고지전을 치르고 난 뒤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는 시기에 가족들이 피난 중이던 제주도로 내려간다.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사진12) 1952년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교복을 입고 제주도의 돌담위에 올라가 있는 임원식 감독이다. (사진13) 제주도 피난 시기, 오현고등학교 재학 중 부산으로 수학여행 가 찍은 사진으로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여준다. (사진14) 제주도 오현고등학교에서도 임원식 감독은 자연스럽게 학도호국단 간부로 활동했다. 학도호국단 대대장 복장을 한 임원식 감독으로 배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때 그는 제주도 육군훈련소 군예대로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체가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며 연극에 눈을 뜨게 된다. (사진15, 16) 한국전쟁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예대가 주최한 학생연극경연대회에서 남자 학교에 배당되었던 <붉은 기 땅에 떨어지다>라는 연극의 한 장면이다. 임원식 감독은 제주도의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고등학교 시절의 연극경험을 살려 서라벌예술대학 2학년으로 편입한다. (사진17) 1954년 남산 후암동 교사 시절 서라벌예술대학 본관 앞에서 찍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단체사진이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두 번째가 임원식 감독이고, 앉아있는 인물 중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가 김규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무용가 은방초, 앉아있는 인물 중 왼쪽에서 첫 번째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사진18) 8.15 해방 기념 시가행진에 참여한 서라벌예술대학 사진으로 임원식 감독은 이때도 서라벌예대 학도호국단 대대장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시절에는 대학연극경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연출가 김규대 선생을 필두로 학생들과 함께 실험극단 창조극회, 원방각, 청협을 만들어 활동했다. (사진19, 20)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 대학연극경연대회 참여 작 유치진의 <통곡>에 출연한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사진21) 1960년 극단 원방각의 연극 입센의 <유령> 공연모습이다. (사진22) 학생들이 주축이었던 젊은 극단인 창조극회의 멤버들이다. 아랫줄 왼쪽부터 임원식 감독, 황용하 감독, 성우 남성우, 연극배우 조광일, 윗줄 왼쪽부터 촬영감독 전조명, 연극배우 김광도, 연극연출가 장순환, 사진에는 없는 배우 김보애까지 더해져 창조극회가 탄생했다. 그러나 창조극회를 기성극단 청협으로 만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제주도 출신 여성과 이미 결혼했던 임원식 감독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HLKY 기독교방송에서 성우와 연출자로 활동했고 이광래 선생의 추천으로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옮겨가 대북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극단과 방송에서는 임무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에서 제작한 김수용 감독의 군영화인 <윤 일등병>(1957)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23) 김수용 감독의 <윤 일등병>(195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임원식 감독(미개봉 추정) 영화계로의 진출을 꾀하던 그는 일본 교포 출신인 유진식 감독의 <불멸의 성좌>(1959)와 <대원군과 민비>(1959)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유진식 감독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의 작품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필름에서 제작하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조감독으로 참여하게 된다. <돌아온 사나이>에는 4.19 당시의 거리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신상옥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촬영한 장면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24)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 촬영 당시, 4.19로 인해 촬영이 중단됐을 때 신필름이 있던 광화문 동아빌딩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시위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오른쪽부터 편집기사 오성환, 그 옆이 임원식 감독, 왼쪽 첫 번째가 배우 정동일이다. <돌아온 사나이>의 조감독이었던 그가 스웨덴 대사의 집에서 촬영한 가든파티 장면 준비를 탁월하게 해내자 신상옥 감독은 그를 스카웃한다. 신필름에 입사하게 된 그는 신상옥 감독을 도와 신필름이 다작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데 일조한다. 신필름에서 여러 번의 감독 데뷔 기회가 있었으나 1965년 개봉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가 그의 데뷔작이 된다. (사진25)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나봉한, 1960)의 촬영장소였던 경복궁에서 민비를 연기한 최은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실 임원식 감독의 초기 연출작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숙부인>(1966)이다. (사진26) <숙부인>(임원식, 1966) 포스터 당시 신필름의 제휴극장이었던 명보극장에 걸기로 한 영화에 문제가 생겨, 신필름에서는 열하루 만에 누군가가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이때 임원식 감독이 <숙부인>을 9일 만에 완성시켜 검열을 받고 무사히 개봉 한 것이다. 신필름은 당시 전속 감독의 월급이 15만원이었는데 <숙부인>을 단시간에 무사히 완성하자 보너스로 15만원을 더 받았다고 한다. (사진27) <숙부인> 촬영현장의 임원식 감독 이후 그는 쇼브라더스와 신필름의 합작영화 <대폭군>(1966)의 연출을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대폭군>의 로케이션 촬영은 한국에서, 세트촬영은 중국에서 이뤄졌다. (사진28) 1966년 <대폭군>의 촬영을 위해 홍콩에 갔던 시기 쇼브라더스가 초대한 식사 자리이다. 서있는 왼쪽 끝 남자는 쇼브라더스의 엄준 감독이고 그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엄준 감독의 부인이자 주연 배우인 리리화이다. 가운데는 묘장왕 역을 한 김승호가 앉아있고 서 있는 남자들은 오른쪽부터 장군역을 맡은 배우 성소민, 임원식 감독, 최경옥 감독이다. 앉아있는 오른쪽 끝 여자는 배우 고선애이다. 나머지는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다. (사진29)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의 모습으로 감독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뒤편에 안경을 쓴 이가 홍콩 측 프로듀서 미스터 주이다. 그 옆으로 미첼카메라를 잡고 있는 홍콩촬영감독과 조수가 보인다. 연출자가 신상옥 감독이 아니라는 이유로 홍콩 스태프들의 파업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이 홍콩에 들려 무마시키고 임원식 감독이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며 <대폭군>을 완성한다. (사진30) <대폭군>(1966)의 홍콩 촬영장에서 홍콩 여배우 리리화와 세트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의 배경에 있는 다리모형은 세트로, 한국의 팔당에서 찍은 강 장면에 이 다리를 합성하기 위해 무척 정교하게 촬영해야만 했다. 촬영현장에서의 갈등도 극복해야 하고, 대규모 촬영에 특수촬영까지 해야 하는 부담 속에서도 비자 갱신을 위해 들른 대만에서 <나는 매국노>(1966)까지 연출한다. 1년여를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머물며 대규모 합작영화를 연출한 것보다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쇼브라더스의 라이브러리와 편집실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본의 검객 영화들을 보며 연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 돌아와 <풍랑객>(1968), <영>(1968), <맹수>(1969) 등을 연출하며 검술액션영화의 유행을 이끌게 된다. 독고성을 주인공으로 한 검객 영화 <영>은 사무라이액션과 <장고>(세르지오 코부치, 1966)같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참고해 만든 작품으로 평단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만화 같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사진31) <영>(1968)에서 요동 실향민 마을에 등장한 주인공 영(독고성)의 모습이다. (사진32) <영>(1968)에서 마적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다. (사진33, 34) <영>(1968)에서 독고성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임원식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후속작으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남정임을 협객으로 출연시킨 <풍랑객>을 직접 제작하려고 했으나 신상옥 감독의 설득으로 제작을 양보하게 된다. (사진35) <풍랑객>(1968)에서 남정임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는 남정임에게 액션시범을 보이다 다리가 부러져 보름간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액션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임원식 감독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신필름 파견 감독으로 대양영화사와 세기상사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한다. 제작자 한갑진의 요청으로 대양영화사에서 액션영화 <심야의 대결>(1969)과 액션사극 <의적 홍길동>(1969)을 연출했고 세기상사에서는 오수미 주연의 멜로드라마 <벌거벗은 태양>(1970)을 시작으로 검술액션사극 <민비와 마검>(1970), 공포영화 <춘색한녀>(1971), <설야의 여곡성>(1972), 에로틱사극 <대감신랑>(1971), 액션영화 <분노의 세얼굴>(1972) 등을 연출한다. (사진36) <설야의 여곡성>(1972)의 촬영현장으로 분장을 한 신인 여주인공 윤세희의 모습이 보인다. 윤세희는 당시 유명한 워커힐 카지노 딜러 출신으로 세기상사의 국쾌남 사장이 발굴한 배우이다. 1970년대 중반 임원식 감독은 신필름에서 충무로로 나와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가 선택한 첫 작품은 삼영필름의 우수영화인 <아리랑>(임원식, 1974)이다. (사진37) <아리랑>(1974)의 촬영현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가 임원식 감독이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그는 나운규 감독의 원작을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장윤환과 시나리오 작가 장천호 형제가 야심차게 각색한 각본을 보고 반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 참의원 출신 부호의 아들 영진이 영화 <아리랑>을 보고 감화되어 광화문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일본 경찰이 그를 박해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작을 왜곡했고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문공부 시나리오 사전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작기간이 늘어지자 제작사는 원작대로 각본을 수정하도록 권했고 제작비가 들지 않는 방향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임원식 감독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못한데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그에게 아쉬운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삼영필름은 외화수입쿼터를 받게 된다. 임원식 감독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교구에서 안수를 받은 장로였다. 어느날 이사례 여사가 찾아와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보>라는 영화의 연출을 그에게 의뢰한다. 그러나 그는 유신 초기,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기독교계를 예의주시하는 정부의 분위기를 고려해 교회전도용 영화로 만들자 설득해 이 작품을 16미리로 연출한다. 이 영화는 후에 그가 종교영화로 재기하는데 교두보가 된다. 1975년에는 몇몇 영화계 인사들과 함께 새마을연수원 지도자교육을 받는다. 이신명, 변장호, 최하원, 고영남, 임권택 감독 등이 임원식 감독과 함께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는 동안은 술, 담배를 끊어야 했기에 고영남과 임권택 감독은 금단현상 때문에 퇴소한다. 새마을연수원의 교육내용에 감동받은 임원식 감독은 정부에서 영화계에 의뢰한 새마을영화의 연출자로 선택된다. 이때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상이군인에게 시집온 여성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의 영화 <어머니>(1976)를 감독협회 기획, 합동영화 제작으로 연출하게 된다. (사진38) 새마을영화 <어머니>(1976)의 한 장면이다. 상이군인(이순재)에게 시집 온 여성(윤연경)이 아이를 키우며 자주적으로 마을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관객수 10만이 넘으면 홈런이라고 여기던 시절 16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흥행에도 성공하고 15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포함해 3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다. 그 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를 합동영화사에서 연출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다룬 종교영화로 이 작품은 문화공보부의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합동영화사는 외화수입쿼터를 받는다. 그러나 개봉 당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중지가 내려진다. 상영중지에 항의하는 임원식 감독은 남산 정보부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지만,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유신시대에 탄압받고 있던 종교지도자를 떠올려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중앙정보부의 설득에 그는 결국 상영중지를 받아들인다. (사진39)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의 촬영 현장이다. 977년 상영중지를 당했으나 1981년 재개봉되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1981년 이 작품의 해금이 풀려 재개봉되자 20만 1천명의 관객이 들어 그해 한국영화 관객동원 3위를 차지한다. 그 덕에 1982년에 그는 영화인협회에서 흥행영화 감독들에게 주는 할리우드 연수여행 포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개봉이 중지되고 고초를 겪다보니 그의 작품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합동영화사에 들어가 전무이사 겸 기획실장으로 5편의 작품을 기획했고, 2년 뒤에는 화풍흥업의 기획실장으로 4편의 작품을 기획하며 영화계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김태수 대표의 제안으로 태창흥업의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외화는 김태수 대표가 맡고 한국영화는 임원식 감독이 책임지는 구조였다. 중견영화사인 태창흥업의 사장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는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한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이다. (사진40)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 사장으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0)의 포스터이다. 일류 배우의 개런티가 2백만 원이던 시절 그는 조용필에게 5백만 원의 출연료와 추가로 2백만 원의 작곡료를 주고 캐스팅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과도한 개런티로 영화인들의 빈축을 사 영화인협회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 전에 이미 제작비의 두 배가 넘는 지방 투자자들의 투자금이 몰려들었고 완성 후 흥행에도 성공해 큰 수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은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이다. 첫 제작 작품의 상업적 성공 이후 인권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는 『기름밥』이라는 논픽션 단편에서 영감을 받아 버스안내양의 실상에 대한 각본을 작가 김승옥에게 맡긴다. 무사히 잘 완성되고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었으나 이 작품은 개봉 후 위기를 맞게 된다. (사진41) 임원식 감독이 태창흥업에서 두 번째로 제작한 작품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의 한 장면이다. 자동차노조와 한국노총의 상영중지 요청이 제기된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삥땅검사, 알몸수색, 운전기사와 안내양의 부적절한 관계, 노조를 어용화해 묘사한 점 등이 운수노동자들의 인격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 작품은 상영 7일 만에 자진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영화계에는 이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문공부가 노동자들의 상영중지 여론을 종용했다는 의혹이 떠돌았고 영화인들은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4군데 장면을 자르고 1군데 장면을 재촬영해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을 다시 받은 후 1982년 6월에 재개봉을 했지만 흥행은 요원했다. 결국 임원식 감독은 지방 흥행사들의 이어진 손해배상 소송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고 재기불능 상태로 제주도로 낙향하게 된다. 제주도에서 영화계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중, 그는 교계에서 만든 종교영화제작소로부터 선교영화 연출을 제안 받는다. 그가 연출한 선교영화는 곧 교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게 되고 그 즈음 비디오문화가 확산되어 그가 제작한 종교영화 비디오테이프 판매 또한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 케이블텔레비전이 등장하던 때에는, 기독교방송국의 초대 전무이사 겸 방송본부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을 퇴직하고 난 뒤 1999년부터 8년 동안 20대, 21대 영화감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춘사영화제를 재개하고 스크린쿼터 투쟁을 벌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2001년에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사진42) 1999년부터 8년간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 21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임원식 감독 모습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도에서 지내며 제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지냈고 제주 4.3항쟁에 관한 현기영의 소설을 영화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임원식 감독의 구술은 어린시절 고향인 사리원의 풍경, 청소년기 월남민으로 한국사회에 적응해갔던 경험,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으로 종군한 경험, 학창시절 학도호국단 활동 등 한국현대사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경험들로 가득하다. 또한 영화계에 입문한 뒤에는 거대 영화 기업 신필름의 체계와 쇠락, 한홍합작영화 경험, 유신시기 영화검열의 폐해 등에 관해 의미 있는 증언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