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인터뷰]김애리 05 터닝포인트를 만든 책이 있다면
- 제작년도
- 2011
비장의 OST가 연재되고 거의 십년이 지나 시즌2를 앞둔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코로나라는 팬데믹 상황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극장가와 더불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약진은 문화산업의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영화들은 제작되고 있고, 새로운 감독들과 스타들도 어김없이 탄생한다. 영화음악도 마찬가지. 돌아오는 비장의 OST 시즌2에선 이제 막 신인의 티를 벗고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비장의 OST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 클로버필드 10번지 >의 독특한 점은 영화에 참여했던 그 어떤 누구도 이 영화가 8년 전 깜짝 히트한 파운드 푸티지 방식의 ‘클로버필드’ 프랜차이즈가 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각본을 쓴 작가 조시 캠벨과 맷 스투큰, 연출을 맡은 댄 트라첸버그는 물론, 주연 배우들마저도. 할리우드에선 종종 전혀 상관없는 원작을 들고 와 속편으로 뜯어고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월터 웨이저의 스탠드 얼론 소설 <58시간>은 < 다이하드 2 >가 되었고, 조너선 헨즐리가 쓴 ‘사이먼 세즈’란 각본은 < 다이하드 3 >로 탈바꿈되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영화가 제작되던 중간까지도 ‘the Cellar’라는 각본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스릴러가 될 예정이었다. 최연소 오스카 감독상에 빛나는 데이미언 셔젤은 이 히트리스트에 올랐던 각본을 각색하며 연출까지 고려했는데, 그가 고친 부분이 바로 지상에 나온 후 펼쳐지는 뒷부분, 이른바 반전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셔젤은 애초 계획대로 < 위플래시 >의 기회를 거머쥐었고, 댄 트라첸버그 감독에게 바톤이 넘어간 이 프로젝트는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가 클로버필드와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프로덕션 중에 세계관 확장(?)이라는 놀랄만한 방향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베어 맥크레리 이에 당황한 건 영화 촬영 전부터 참여해 후반을 앞두고 있던 영화음악가 베어 맥크레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TV쪽에서 꽤 잘 나가던 것과 달리 영화 쪽에선 호러나 스릴러, SF 등 b급 장르에서 행보를 이어온 신인에 가까웠는데, 모처럼 손 내민 파라마운트라는 메이저 스튜디오와 J. J. 에이브럼스라는 거물과의 협연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대학 시절 할리우드 영화음악 레전드인 앨머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영화음악가 리처드 깁스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는데, 리처드 깁스가 스케줄 충돌로 인해 TV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의 대타로 메인 음악가로 들어가게 되며 작곡가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후 <휴먼 타겟>과 <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 >, <유레카>, < 워킹 데드 >, <쉴드 오브 에이전트>, <아웃랜더> 등 손대는 작품마다 반향을 일으키며 TV시리즈 음악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행보를 이어왔는데, 이런 광폭적인 업자들의 인기에 대해 선수 중에 선수인 제작자 쌍제이 에이브럼스도 모를 리 없었다. 베어 맥크레리는 매주 반복되는 TV를 넘어 더 큰 스케일에 도전을 원했고, 갑작스런 클로버필드 세계관으로의 편입은 그래서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점에서 베어 맥크레리가 <클로버필드 10번지>에 온갖 정성과 야심을 갈아 넣은 건 당연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제리 골드스미스와 버나드 허먼이라는 불세출의 영화음악가가 들려줘왔던 장르의 토대를 자양분 삼아 그는 고전 할리우드 장르 스코어가 가진 장기와 미덕이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도 십분 발휘되길 원했다. 영화 후반이 프로덕션 과정에서 변경되긴 했어도 여전히 주된 무대가 되는 건 벙커였고, 그는 여기서 음악 색채에 대한 전체적인 모티브를 얻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뉴올리언스의 벙커 세트장에 방문해 며칠을 보냈고, 어두운 통풍구, 답답한 콘크리트 감방, 비좁은 복도 등을 경험하며 그 공간 안에서 나올 소리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운드 팀을 동원해 양철 쓰레기통, 환풍기소리, 전동기구 고주파, 벽돌, 유리, 톱, 체인, 징, 에어로졸 스프레이, 각종 기계 등 다양한 소리들을 채집해 샘플링하고 왜곡·변형하며 음악 전반에 효과로, 타악기로, 그리고 엠비언트로 상당수를 녹여냈다. 이 사운드 디자인이 가미된 스코어는 벙커 안에 벌어지는 세 주인공들의 불안한 심리 싸움은 물론, 벙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을 상상하게끔 만들며 들려주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스코어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독특한 소리들이 <클로버필드 10번지> 스코어의 근간이 되었지만, 베어 맥크레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더 주안점을 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벙커라는 공간 그 자체를 들려줄, 아니 바로 그 공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블래스터 빔’이란 악기와 주인공 미셸의 캐릭터를 형상화하기 위해 동원된 터키의 민속악기 ‘야일리 탐부르 yaylı tambur’다. 제리 골드스미스가 <스타트렉: 극장판>에서 사용해 충격과 명성을 안긴 블래스터 빔은 페달 스틸기타를 큼지막이 확장시킨 것과 같은 대형악기(길이가 무려 3-5m에 이른다)로, 수많은 와이어가 연결된 본체를 손가락이나 막대, 활, 파이프 혹은 타피 같은 물체로 치거나 문지르거나 튕기며 연주한다. 이름만큼이나 어둡고 불길하며 환상적인 특유의 깊은 음색으로 SF나 호러 장르에서 사랑을 받았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어 제임스 호너가 <우주의 7인>에서, 존 배리가 <블랙홀>, 모리스 자르는 < 드림스케이프 >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7-80년대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20년간은 어느 영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이 독특한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 생명을 부여했다. 그랜드 피아노나 업라이트 베이스, 콘트라 바순의 가장 낮은 음보다 훨씬 더 깊은 아래의 저음을 으르렁 울리며 저돌적으로 휘몰아치는 긴장감 넘치며 파워풀한 소리는 가히 이 스코어의 백미로, 지하라는 공간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벙커 안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무력감, 그리고 지상의 인류 전멸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큰 일조를 한다. 반면 야일리 탐부르의 깊고 신비스러우며 풍부한 음색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흐르는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섯 노트 주제부’와 결부되며 주인공 미셸의 미묘한 심리를 표출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소리는 모든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던 피동적인 모습에서 점차 적극적으로 의지를 드러내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취적인 자세로 변해가는 성장형 캐릭터의 이중적인 면모를 담아내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앨머 번스타인은 영화가 시작될 때 비주얼도, 스토리도 진행되지 않을 찰라 음악만이 관객들의 모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며 영화를 대표하는 악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베어 맥크레리는 이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여 배급사와 제작사 크레딧이 뜨는 동안 야일리 탐부르의 기묘한 소리로 연주되는 테마를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뒤로 갈수록 두텁고 큰 스케일의 관현악이 합류하고, 이른바 ‘미스터리 스트링’이라 이름 붙인 여덟 노트의 휘몰아치는 오스티나토(어떤 일정한 음형을, 악곡 전체에 걸쳐,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고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가 덧입혀지며 벙커 안의 긴장감 넘치는 주도권 싸움과 탈출 과정의 빌드 업을 묘사해 가는데, 영화 내내 단 3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공간만이 나오는 단출한 구성임에도 다이내믹하며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다양한 시도와 고전적인 방식을 교차로 활용했는데, 영화 초반의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던 불안한 상황에선 현악 콰르텟 편성을 위주로 디테일한 지점 묘사에 신경 쓴다면, 중반부에 이르러선 벙커의 깊이감이나 풍부한 미스터리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무력감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전혀 없는 30대의 첼로와 8대의 업라이트 베이스만 편성해 저음 위주의 공격적이고, 강력한 무게감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지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모든 비밀들이 밝혀지는 영화 후반에 이르러선 90인조 풀 관현악단을 활용해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케일의 영화음악으로 대장정을 마친다. 새로운 시도를 펼쳤던 < 혹성탈출 >과 < 에이리언 >, <스타트렉>의 제리 골드스미스와 긴장감 넘치는 현악으로 대표되는 < 싸이코 >와 < 현기증 >의 버나드 허먼에게 경배를 바치는 이 놀라운 작업물은 베어 맥크레리를 단순한 TV시리즈에서 활약하던 일개 젊은 작곡가 유망주에서 단숨에 차세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이끌 다크호스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베어 맥크레리가 현재 위치까지 오게 된 초석이자 가장 야심 있고 강력한 비전을 발휘해냈던 승부수이자 비장의 OST였다. 그는 계속해서 <클로버필드 패러독스>와 < 해피 데스데이 > 시리즈,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 등 메이저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콜 오브 듀티: 뱅가드>나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등 인기 게임은 물론, 코로나로 인해 OTT 세상이 도래한 현재 가장 비싼 드라마 중에 하나인 아마존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와 애플TV+의 <파운데이션>, 넷플릭스의 <위쳐: 블러드 오리진> 등 새 미드에서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며 눈코 뜰 새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Track List 1. Michelle 2. The Concrete Cell 3. Howard 4. A Bright Red Flash 5. At The Door 6. Two Stories 7. Message From Megan 8. Hazmat Suit 9. A Happy Family 10. The Burn 11. Up Above 12. Valencia 13. The New Michelle 14. 10 Cloverfield Lane
영화 < 콘택트 >가 아닌 < 컨택트Arrival >를 본 관객이라면 오늘 소개할 이 영화의 제목을 듣자마자 ‘논 제로섬 게임’이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올 텐데 (아쉽게도) 하등의 관계없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지겨울 정도로 자주 만들어지는 ‘가족 영화’이며 스포츠 물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믿고 보는 배우 폴 지아마티가 시작하자마자 러닝을 한다. 집에서는 귀여운 딸이 엄마에게 질문한다. “아빠 뭐 해?” “달리기(Running.)” “왜?(From What?)”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 뜻이 잘 살지 않지만 엄마는 그저 달린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딸은 그것을 ‘도망’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무엇으로부터?’라고 되물은 것이다. 어쩌다 보니 설명충 같은 이야기를 쓰게 됐는데, 어쨌든 이 간단하면서도 다소 철학적인 조크로부터 이 영화는 시작된다. 관리하지 않아 부러진 관상수도 보여주고, 단란한 가족의 평이한 일상을 보여준 뒤 주인공 마이크, 그러니까 폴 지아마티의 출근길을 배경으로 무심히 감독 크레딧이 뜨는데 그 이름은 토마스 맥카시다. 토마스 맥카시. < 스포트라이트 >로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바로 그 양반이다. 미국은 워낙 변호사가 많은 나라니까, 우리나라의 편의점만큼 많은 게 변호사 사무실이니까 그 대단해 보이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때로는 생활고에 허덕이기도 한다. 여섯 살짜리 딸, 그리고 이제 말하기 시작한 딸. 그리고 현명해 보이는 아내와 함께 생활하는 마이크는 취미 삼아 봉사 삼아 동네 레슬링팀의 코치를 맡고 있다. 이 중년 남성은 웃기는 감초 캐릭터인 친구 테리와 함께 조깅을 하다가 호흡곤란을 일으킨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스트레스의 이유는 돈이다. 마이크는 레오라는 어느 노인의 변론을 맡았다. 노인은 치매 환자다. 하나 있다는 딸과는 연락조차 하지 않은 지 오래 됐다. 법원에서 금치산 판정을 하고 노인을 요양원에 보내려 하는데 마이크는 자청해서 이 치매 노인의 후견인이 된다. 왜? 돈 때문이겠지. 변호사 사무실에는 돈 들어갈 일 천지.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현재의 수입으로는 턱도 없다. 이 노인의 후견인이 되면 달마다 돈이 나온다. 마이크는 레오를 그의 집에 살게 하겠다고 증언하고는 곧장 요양원에 집어넣어 버린다. 그런데 누군가 마이크를 찾아온다. 바로 레오의 손자 카일이다. 카일을 요양원으로 데리고 가지만 이 노인은 자기에게 손자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마이크는 카일을 자신의 집에서 하루 재우고는 고속버스에 태워 보낸다. 하지만 얼마 후 연락이 온다. 경찰서다. 소년은 골초인 데다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는 불량소년이었건 것이다. 그리고 귀찮은 일이 연속으로 생긴다. 마이크는 정의감 넘치는 아내 덕분에 갈 데 없는 미성년자 소년을 떠맡게 된다. 마이크는 할 일도 갈 곳도 없는 카일을 데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레슬링팀의 연습장에 간다. 이런 영화의 주인공이 맡고 있는 팀이라는 게 다 그렇듯이 오합지졸에다가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녀석들이다. 이런 영화가 다 그렇듯이 카일은 감독이 정해놓은 대로 레슬링에 관심을 보이고 팀에서 함께 훈련을 하게 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카일은 레슬링 천재였다. 할리우드에서 한 700편쯤 돌아다닐 만 한 이런 설정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묘한 집중력을 가진다. 그 이유는 현재 할리우드 최고의 각본가 중 한 명인 토마스 맥카시가 구성한 시나리오의 힘이다.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뻔한 플롯 안에 재치있는 농담과 비범한 복선들을 설치하고 또 폴 지아마티를 비롯한 베테랑급 연기자들의 설득력 있는 연기로 봉합한다. 소년 카일 역을 맡은 알렉스 샤퍼는 마치 숀 펜의 어린 시절처럼 보인다. 원래 레슬링 선수였던 카일은 다시 레슬링을 하게 되면서 담배도 끊고 새벽 구보도 열심히 하는 등 성실한 모습을 보이며 불량소년 이미지를 벗어버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이크의 팀은 이 소년 덕분에 승승장구를 거듭하게 된다. 마이크의 아내 재키는 처음에 좀 꺼려하던 카일에게 자신의 문신을 보여주며 마음을 연다. 부러진 나무도 함께 정리하며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된다. 이쯤 되면 장애 요소가 하나 등장해 극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 줘야 하는데 그 아이템은 바로 카일의 엄마, 치매 노인 레오의 딸인 신디다. 마약 재활원에 들어가 있던 이 여인은 등장하자마자 가련한 딸 액팅을 하며 2막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이 글의 목적은 영화의 리뷰가 아니라 영화를 볼 것을 꼬여내는 것이므로 더 이상의 내용 소개는 좋은 감상에 방해만 될 뿐이다. 감독이자 각본가인 토마스 맥카시는 미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가족관계의 상실과 그 회복을 잔잔하면서도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로 조판한다. 언제나 엉뚱한 소리를 해 대는 친구 테리를 이용한 클로짓 게이 농담들이 다소 거슬리는 면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가족 윤리에 대한 짙은 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선한 의도와 악한 의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어른들의 지질한 사정을 그 상태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극의 중요한 맥락으로 활용하고 또 수습한다. < 스포트라이트 >를 감명 깊게 본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 역시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토마스 맥카시는 오래된 차로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기법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스포트라이트>에서 마이클 키튼의 신형 캠리와 마크 러팔로의 구형 캠리를 대조하는 방법을 썼다면 이번엔 마이크의 구형 스바루를 등장시키는 것만으로 그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드러낸다. 소박하고 또 귀여운 유머 감각은 영화 전편을 휩싸고 있다. 감독은 <스포트라이트>에서, 널리 알려진 사건을 관객들에게 환기하고 다시 주목하게 만든 바 있다. 전형성 강한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볼만한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토마스 맥카시는 잘 알고 있다. 훔치고 싶은 재능이다. PS. 존 본 조비를 좋아하는 분들이 보면 대폭소를 터뜨릴만한 장면이 있다.
1989년엔 두 편의 ‘검은 비’ 영화가 만들어진다. 하나는 일본에서 < 구로이 아메 >로, 다른 하난 할리우드에서 < 블랙 레인 >으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지만 검은 비가 상징하는 바는 같았다. 원폭. 떨어진 도시에선 삼일 밤낮으로 검은 비가 내렸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특유의 무뚝뚝하고 시니컬한 화법으로 패전 직후 그 빗속에 놓인 피해 가족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리들리 스콧은 스타일리쉬한 감각으로 그 비를 맞고 자란 야쿠자의 역습에 고군분투하는 미국 형사의 액션 느와르를 완성해냈다. 버블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 패전국에서 세계 제 1의 경제 대국으로 위상이 바뀐 일본의 미묘한 지형도를 두고 공교롭게 등장한 이 두 동명의 영화는 그저 한낱 영화로만 치부하기에 서로 간의 입장과 시선이 복잡하고도 불편하게 얽혀있었다. (버블이 꺼지며 휘발되고 말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사회적 함의와 책임은 지워버린 채 민생의 고초와 오락으로 덧댄 ‘검은 비’ 재림이 조금은 아쉽고 또 무섭게 다가왔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에게 그 검은 비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리들리가 <블랙 레인>을 만났을 때 그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 에이리언 > 이후 그는 줄곧 내리막을 걸었다. 지금에야 저주받은 걸작으로 칭송받지만 < 블레이드 러너 >는 그의 의도와 달리 대폭 수정된 채 극장에 걸렸다 폭삭 망했고, 꽃미남 톰 크루즈가 비현실적인 미모를 샤방샤방 발산하던 < 리젠드 >는 많은 양을 잘라냈음에도 지루하단 평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심지어 차기작으로 찍은 톰 베린저와 미미 로저스가 함께한 범죄물 < 위험한 연인 >은 지금까지도 리들리 스콧이 감독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그저 그런 범작이 되었다. 애초의 <블랙 레인>도 리들리의 몫이 아니었다. < 로보캅 >으로 대박친 폴 베호벤이 내정된 상태였으나 < 토탈리콜 >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그러나 탐미적이고 유려한 오사카의 야경을 일본인보다 더 환상적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미국에서만 4600만 불의 흥행을 기록했고, 전 세계적으론 1억 불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 리들리 스콧은 <블랙 레인>의 성공을 발판 삼아 오랜 기간 준비했던 < 델마와 루이스 >를 찍어 처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지명을 받는다. 이후 다소 작품의 부침은 겪지만 80년대 암울했던 상황과 달리 장인으로 인정받으며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블랙 레인>이 리들리 스콧에게 가져다준 또 하나의 행운은 이 영화로 자신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 한스 짐머와 조우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 어떠한 수식어가 필요 없는 미다스의 손이 되었지만, 1989년 당시 한스 짐머는 할리우드에 갓 입성한 신성 중의 신성이었다. 1988년 < 레인맨 >의 음악을 맡기 전까지 그는 주로 영국과 유럽을 무대로 활동했다. 그룹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로 유명세를 탔지만 그 외 다른 여러 밴드들과 작업했고, 팝에서 영화음악으로 넘어온 후론 < 디어 헌터 >와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로 유명한 스탠리 마이어스 곁에서 프로듀서와 일렉트릭 슈퍼바이저, 보조 작곡가 등 전천후 포지션을 소화하며 적응력을 높였다. 이런 다양한 경험들은 다른 영화음악가들과 달리 협업 플레이도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성과 진취성을 갖게 했으며, 더 나아가 ‘미디어 벤쳐’에서 ‘리모트 콘트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팀을 갖춰 후학을 양성하고, ‘짐머레스크 Zimmeresque’라는 하나의 시대적인 조류를 형성해 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데이빗 번, 콩 슈가 함께한 < 마지막 황제 >의 프로듀싱을 물론, < 월드 아파트 >와 <페이퍼하우스> 등의 작품이 인정받으며 <레인맨>을 준비하던 배리 레빈슨에게 픽업되었는데, 그가 짐머에게 부탁한 건 단 한 가지였다. 감성적인 현악 위주의 뻔한 휴머니즘 스코어를 지양해달라는 것. 그래서 탄생한 <레인맨>의 테마가 익히 우리가 들어 알고 있는 그 쿨한 신디 사운드의 멜랑꼴리한 여운이다. 짐머는 이 인상 깊은 할리우드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에 첫 노미네이트된다. 그에게 할리우드 러브콜이 쏟아진 건 기정사실. 그중에는 전자음악과 남다른 인연(!)이 있던 리들리 스콧도 포함돼 있었다. <블랙 레인>은 한스 짐머의 첫 번째 액션 스코어이자 그의 모든 액션 스코어의 근원이다. 짐머는 조르지오 모르도나 반젤리스 이후 할리우드에서 가장 신디 사운드를 영향력 있게 사용한 영화음악가고, 제리 골드스미스나 존 배리, 모리스 자르 등이 7-80년대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실패하고만 오케스트라와의 조화를 가장 완벽히 이뤄냈다. 기술의 발전도 무시 못 할 요인 중에 하나겠지만 전자가 신디를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하나의 악기로만 활용하거나 혹은 전면적인 오케스트라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면, 짐머는 보다 실용적이고 복합적인 개념에서 신디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혹은 편곡적인 차원의 믹서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셜리 워커라는 부동의 작곡가 겸 지휘자이자 오케스트레이터와의 만남은 짐머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는 그 멀티레코딩된 소스를 다양하게 활용해 신디 사운드와 접목시켰다. 물론 아직 <블랙 레인>에선 완벽한 조화가 이뤄지진 않지만 모든 단초와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으며, 동양과 서양, 클래식과 팝 등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사운드는 폭포수처럼 모든 장르를 융합해 휘몰아치고 경계를 지워버린다. 잘 설계된 밑그림처럼 층층이 쌓아올린 음의 견고함은 이후 바로 다음에 나온 < 분노의 역류 >에서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완벽하게 짐머표 사운드를 정립했다. 리들리 스콧이 산업화된 오사카의 정경을 모던하면서도 세련되게 소화해낸 만큼 짐머도 그 스타일에 맞게 재단된 사운드가 필요했는데, 일본의 전통악기인 사쿠하치와 코토, 후에 등을 사용해 동양적인 음색을 담아내는 건 물론, 일본 문화에서 타이고나 하야시 등의 타악기가 갖는 강한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존의 퍼커션 대신 신디와 일렉트릭 소스를 활용해 마치 총소리를 듣는 것 같은 타격음을 전면에 배치했다. 따라 초조하고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차갑고도 이국적인 선율로 인물들의 테마를 중간 중간 엮어내며 이 미칠 듯한 질주감을 조절한다. 짐머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닌 채 하나의 시퀀스 전체를 아우르는 긴 스코어링을 구사하는데, 이는 짧은 큐들과 다양한 테마로 인해 깨질 수 있는 통일감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다채로운 변주와 리듬의 배치, 테마들의 병합 등 유기적인 방식을 통해 관객들을 보다 영상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다. 이후 이런 짐머레스크 사운드는 < 크림슨 타이드 >와 < 더 록 >으로 이어지며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특히 볼거리로 가득 찬 블록버스터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스타일로 현 할리우드 스코어의 주류가 되었다. <블랙 레인>을 더욱 세련되게 만든 건 짐머의 스코어 외에도 다양한 삽입곡들의 매력에도 크게 빚을 지고 있다. 오사카 야경을 헬기 샷으로 담아낸 장면에서 흘러나온 레게밴드 UB40의 ‘The Way You Do the Things You Do’을 필두로, 나이트클럽에서 나온 소울 투 소울의 ‘Back to Life’와 짐머와도 인연이 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왜색 짙은 ‘Laserman’, 이기 팝의 ‘Livin’ on the Edge of the Night’ 그리고 짐머가 직접 작곡한 이 영화의 실질적 주제곡 ‘I’ll Be Holding On’까지 하나하나 강렬하고 독특한 질감을 갖췄다. 1989년 버진 레코드에서 나온 사운드트랙은 한스 짐머의 스코어를 20여분 정도 수록하고 있으나, 작년 9월 라라랜드 레코드에서 3,000장 한정 2CD로 모든 수록곡을 온전히 담아낸 버전이 새로 발매되었다. 초창기 한스 짐머의 재기발랄하고 패기 넘치는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 <블랙 레인>은 현재 유행하는 블록버스터 액션 스코어의 태생을 알린 작품이자 초석을 다진 역작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Track List CD1 1. Sato Pt. 1/One-Way Glass 2. Osaka/Phony Cops 3. You Gonna Be Nice?/Sato Pt. 2 4. Sato Watching/Circling Motorbikes 5. Sugai's Photo/Sato Pt. 3 6. Sato Pt. 4 7. Charlie Loses His Head 8. Sequins 9. Masa's Reprimand/Sugai Pt. 1 10. The Steel Mill 11. Steel Mill Chase/Airplane/Escape 12. Sugai Pt. 2 13. Arrival of Oyabuns/Sato's Arrival/Meeting 14. Bikes/Fight/Nick and Masa CD2 Original Album 1. Livin' on the Edge of the Night - performed by Iggy Pop 2. The Way You Do the Things You Do - performed by UB40 3. Back to Life (Jam on the Groove Mix) - performed by Soul II Soul 4. Laserman - performed by Ryuichi Sakamoto 5. Singing in the Shower - performed by Les Rita Mitsouko and Sparks 6. I'll Be Holding On - performed by Gregg Allman 7. Sato 8. Charlie Loses His Head 9. Sugai 10. Nick and Masa Bonus Tracks 11. Airplane Muzak (Source) - composed by Shirley Walker 12. Charlie Loses His Head Pt. 1 (Alternate Percussion) 13. Charlie Loses His Head Pt. 2 (Alternate With Koto and Oboe) 14. Masa's Reprimand (Alternate) 15. Bikes/Fight (Alternate) 16. Bikes (Percussion Only) 17. Charlie Loses His Head (Monks Wi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