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와 레비
- 감독
- 라이모 오 니에미, 빌레 수호넨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리스토 투오리라, 크리스티나 할투, 아르노 술카넨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나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감상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후반 즈음해서 비평에 보다 진지하게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비평을 쓰는 일이 내 정체성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2010년대까지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란 내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그리고 정확히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반추해보건대, 내가 20대를 통과하며 겪어온 삶의 주요한 분기점들이 내가 영화와 비평을 대하는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의 변화와 불가분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나뿐만 아니라 다수에게도 그렇겠지만, 내게 있어 비평이란 언제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밀접한 활동이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본인의 작업과 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걸 민망해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 꺼리곤 하지만, 나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는 걸 즐기곤 한다. 글의 문체와 내용, 그리고 그것들이 문자로 새겨졌던 순간의 어룽거리던 공기를 떠올리며, 나는 글을 썼을 당시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와 만나거나 멀어져 가며 걸어왔는지 하나 둘 반추해보곤 했다. 때때로 흔적으로나마 내 안에 남아 희미하게 가물거리고 있거나, 아니면 사라져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느끼는 시절의 잔재를 감촉하며, 그 시절의 감각이 어떤 식으로든 내가 써온 글 안에 박물학적으로 새겨져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나의 글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하는 말, 그가 써온 글에 투영된 시대의 감각에 관해 생각해보곤 했다. 한국영화 몇 편에 대한 생각과 함께, 국내 비평계에 대한 소견을 밝혀야 하는 이 지면에서 이런 이야기로 말을 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코로나 뉴노멀을 기점으로 영화 이후의 미디어가 급격하게 확산해가는 국면에 서 있는 지금의 영화계와 비평계를 떠올려볼 때, 그 공동체가 맞이한 급격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 중 하나가, 나와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거나 쓰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때때로 우리 시대의 영화 속 대화가 변화하는 양상과도 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글에 대한 청탁을 받은 직후, 나는 즉각적으로 내가 몇 년 전 경험했던 그러한 대화의 유형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최근의 비평계는 물론 일부 문화예술계가 처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에피소드일지 모른다고 느끼며 곱씹었던 그 대화는 몇 년 전, 내가 한 영화제에서 짧게 일했을 당시에 발생했다. 영화제가 진행되던 어느 날, 스태프 한 분이 갑자기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겨 긴급한 공지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기이한 점은 그분이 사람을 불러 모아놓고도 자꾸 미적거리며 본론으로 단도직입하지를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시 “음… 어…” 와 같은 말이10초간 이어진 이후에 결과적으로 내가 들은 말은 이랬다. “아, 그…… 여러분 이게 제가 직접 말씀을 드리기는 좀 뭐한데…… 혹시 얼마 전에 약간 논란이 된 적 있는 그거 아시죠?” ……? 나는 이게 당최 무슨 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3분의 1 정도가 맥락을 전부 다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 네네~! 그럼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러자 스태프분은 이렇게 말을 이으셨다. “아아… 아시는 분들도 있으시구나! 그럼… 최근에 어떤 분이 그 일이랑 관련해서 약간 문제제기를 하셨었는데 혹시 그건 아시는 분도 있으신 거죠~” 나를 포함한 몇몇은 이게 대체 무슨 화법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몇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까 별 건 아니지만, ‘그거’만 좀 신경 써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걸 더 이상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려고 하셨다. 이에 나를 포함한 몇 분이 당황해서 방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건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부연 설명을 요청해서 겨우 내막을 듣게 됐다.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영화제가 개최되는 장소와 관련해서 최근에 SNS에 문제를 제기한 포스트가 올라왔으니 영화제 차원에서 공식적인 대처를 하기 전에는 가급적 관객들 앞에서 ‘그거’에 관해 입을 담지 않도록 신중해달라는 말이었다. 당시에 SNS를 하지 않던 나, 그리고 평소에 영화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지 않던 여타의 스태프들이 대화의 맥락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체 그분은 그런 얘기를 왜 그냥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셨던 걸까? 이미 내가 말한 이야기에 그 답이 암시돼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 같은 걸 늘어놓지 않아도 알아들을 사람은 대강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대강 맥락을 파악할 정도로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사람이 ‘실제로’ 다수이기 때문에, 어떤 사안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을 시도하거나 요청할 필요성 자체가 사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오가는 소식이라는 게 알만한 사정을 공유하는 내부자들에게(만) 다 알려져 있어 별도의 대화나 인식론적 합의를 거칠 필요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전제가 다수에게 묵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접하는 알고리즘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외주화하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왔던 시대를 지나, 이제 애초에 그런 인식에 합의하지 않은 이가 본인의 내집단에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 시대. 그래서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가 동반사멸”( 이광호 )한 시대. 온라인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그…… 어…… 음… ‘거기’(비평계)에서 이런 경향이 더 만연해졌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체감상 이런 경향성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기점이 2018년에서 2020년 사이라고 느낀다. 그 시기는 내 친구와 지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SNS 계정을 옮겨가던 시기였으며, 무엇보다도 현재까지도 예후적인 여파를 남기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하며 스마트폰이 일상적 시민의 사회적 관계를 보다 미시적이고 근본적인 수준에서 재편하던 시기였다. 특별히 그 시기 즈음해서 내가 경험한 영화제 일화를 언급한 이유는, 그 스태프 분께서 구사하시던 화법이 어느 순간부터 전혀 예외가 아니게 됐다는 점을 블로그나 각종 SNS의 공론장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영화비평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2010년대 초중반 무렵의 블로그·페이스북 문화와 이 시기 블로그·인스타그램에서 유저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비교하면 그런 폐쇄적 경향성에 입각한 아주 확연한 차이가 발견되곤 한다. 가령 코로나 전후 블로거는 물론 공식적인 지면에 글을 쓰는 평자들조차 본인의 내집단에서만 통용되는 맥락이 남에게도 당연하게 수용될 거라고 전제하는 것은 물론, 그 내집단 밖에 위치한 이들과 애초에 소통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상정하는 폐쇄적인 화술을 구사하기 때문에 객관화된 언어로 토론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일단 대체 무슨 상황이나 맥락을 지칭하는 건지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상황을 자주 마주하곤 했다. 가령 “이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해진 얘기들”이라고 말하며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맥락과 그 맥락에 관해 본인과 내집단이 느끼는 감정이 다른 독자에게도 선험적으로 합의돼 있다고 상정하면서도 도통 본인이 말하는 그 얘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아 공론장에 피로감을 유발하는 서브트위팅과 수동공격적 표현들, 혹은 “이렇게 말하면 분명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텐데", “보나마나 어떤 식으로 반응할 특정한 부류들”과 같은 표현을 통해 본인의 입장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조차 사전에 다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례들이 여기 해당한다. 이후에 부연하겠지만 나는 이런 식의 개별적 발언들을 일일이 비판해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을 펼치려는 게 아니며(보다 현명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발화의 태도만을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 그런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을 배태한 실질적인 원인을 지목해야 한다고 느낀다. 또 개인적으로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차원에서만 글을 끝내고 싶지 않고, 우리가 적어도 영화와 픽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금 직면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을 비롯한 여러 한계로 인해 단지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시기 동안 비평계와 영화계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이 고립되고 있다는 인상만을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그와 관련해서 다시 말을 잇자면, 최근 몇 년 전부터 나는 예술 비평과 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은 덜 읽고 비평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접하는 분야의 텍스트나 1차 사료를 직접 파고들거나, 아니면 직접 예술과 무관한 공동체를 경험하자고 다짐하곤 했다. 이러한 실천은 물론 개인적 필요에 따라 수행했던 사항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하나는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각종 SNS 등지에서 전술한 것처럼 직간접적인 공격성을 함유한 언행을 발설하는 유저 혹은 평자들이 너무 증가한 상황으로부터 유발되는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런 분위기와 아울러 점차 폐쇄적으로 표준화되는 비평 글들의 관성에 저항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이 또한 새삼스러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엇비슷한 온라인 서점의 추천 알고리즘, 엇비슷한 SNS 계정으로부터 유사한 정보망을 공유하는 시네필 커뮤니티의 일원들이 한정된 반경과 관점의(가령 실증주의적 사료와 경제적 현실감각에 기반한 정치학적 통찰이 결여된 채 현대 프랑스 철학적 형식논리를 다루는 텍스트만 근친상간적으로 편식하기 때문에 현실과 복잡계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이 아연할 정도로 단순해져버리는 경향성으로 대표되는) 글을 제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때로는 적잖은 평자들이 어디서 무슨 글을 읽고 특정한 문장을 인용했는지조차 투명하게 들여다보일 정도로(그걸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은 이전의 나 또한 그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집단적인 지각의 반경이 수축되고 있다는 점을 체감하곤 했다. 실제로 가령 허문영과 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와 질베르토 페레스의 글을 탐독한 후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 관한 아나크로니즘적 애착도를 형성하거나, 유운성 평론가가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는 소식을 공유하는 다수의 시네필 집단은 종종 영화와 비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몇 가지 디지털 채널을 일종의 단일 신경망처럼 공유하는 초개체 생물 군집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서로 SNS를 팔로우하고 있으며, 팔로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인터넷 포스트에 입력된 좋아요 버튼이나 댓글을 통해 서로의 흔적을 암암리에 인지하며 은밀한 친밀감과 경쟁심을 공유하는 내집단의 구성원으로 포집된다(이건 함부로 추측한 바가 아니라 내 주변의 여러 젊은 시네필과 비평가들에게 물어봤을 때 거의 다 동의한다는 답변을 들은 사항이다). 이런 생태는 그 자체로는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생성하는 문화적 요소로 기능하곤 하지만, 동시에 그 친밀감에 기반한 비평계 내부의 공론장이 점점 불가측한 변수를 수용하거나 건전한 합의를 도출하는 역량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개인은 온전히 정치적이거나 객관적인 자아의 일면만을 간직한 존재가 아니다. 그가 정치적 존재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객관성의 영역에 노출되지 않는 사적 영역의 안식처가 불가결하게 요청된다. 하지만 그러한 공사 영역 간의 시공간적 구별을 어느정도 유효하게 전제할 수 있었던 전통적 공동체와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 2인칭적 친밀감의 정동은 네트워크 전반에 보다 탈중심적으로 산포되어 안식만이 아닌 통제의 효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바로 온라인 공론장에 소속된 내부자들의 친밀감을 거스르는 객관화된 논의가 발설되는 것을 강력하게 방지하는 검열의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영화계나 인문예술계 네트워크에 속한 평론가들은 본인 이웃들이나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논평은 ‘굳이’ 쓰려고 하질 않는다는 얘기다. 비평이란 대개의 경우 상대적 객관성을 염두에 두며 세계를 더 자세하게 해석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반면 아렌트가 “보호받은 존재의 어둠”이라 이른 내밀한 공간은 그런 분석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와 무관하게 완전한 의존성에 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안식처로 기능한다(물론 성숙한 사람이라면 친밀한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니 공적 담론장으로 기능하면서도 동시에 전적인 의존성에 관한 요구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SNS 공론장의 유저들은 점점 이웃이나 팔로워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글을 쓰지 않는다. 써봤자 어차피 토론 같은 건 일어나지 않고 그냥 어느샌가 줄어든 팔로워 숫자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렌트가 말했듯 개인이 소외를 유발하는 공적인 페르소나를 장착하기 이전에 전적인 의존성을 보장받아야만 한다면, 친밀감과 배치되는 담론과 정서를 배타적으로 받아들이는 네티즌들의 심경도 납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가 가족이나 회사, 또래집단처럼 오프라인에서 안정적인 보살핌의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실패한 상황에서, 온라인에서 친밀감을 찾으려는 유저들에게 “온라인에서도 객관적인 태도로 토론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후기 자본주의의 통치술에 굴복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중하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이다(사실 나도 예전에는 좀 그랬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 현상은 애초에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양면성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유저들이 친밀감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온라인 공론장에서 객관적 논의를 창출하는 비평의 역량이 기능 부전에 처한다는 점 또한 솔직하게 시인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이유에서인지 2010년대 중후반을 건너오면서 블로그의 댓글창 같은 곳에서 토론이 벌어지는 일을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유저들은 점점 좋아요만 누르거나 비밀 댓글만 달곤 한다. 2010년대 중반 즈음의 영화비평 블로그들의 댓글창과 지금의 댓글창을 비교하면 그런 확연한 차이를 체감할 수 있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평자들도 애당초 건전한 토론이 발생하기 어려운 내집단의 분위기를 잘 알기 때문인지, 종종 논쟁적 사안이 발생해도 서로 상반되는 기조의 포스트를 올리는 식으로 수동공격적인 기싸움만 할뿐 본인이 당최 누구의 무슨 글을 염두에 두고 쓰는지는 절대 말하지 않는 상황을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다(어차피 이 공론장이란 대충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청자만을 선험적으로 상정한 채 발화되는 공간으로 변질됐기 때문에 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이런 현상은 상기했던 것처럼, 합리적 의미를 공유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정동적 소통에 입각한 폐쇄적 화술이 비평계 공동체 내부에 만연해지는 원인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의 층위를 하회하는 신경학적 회로가 이미 통합돼 “그거", “저거”라고만 말해도 서로 다 알아듣는 상황에서 뭐하러 굳이 의미론적 담화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주로 비밀 댓글이 게시되곤 하는 영화비평 블로그 댓글창 아마도 최근의 예술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소수의 평자들의 글이 과잉된 영향력을 행사하며 폐쇄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제도 비판이 이뤄졌던 상황 또한 이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계가 폐쇄화하거나 고립된 현상이, 예술계 바깥에서 미디어와 산업적 환경의 변화가 불가항력적인 압력으로 작용하며 생산과 소비의 흐름을 급격하게 수축하거나 표준화한 후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예술계 내부에 잔존하는 몇몇 권력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복잡계에 대한 시각을 결락한 표면적 진단이 될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예술계 내부에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 못지않게, 그 폐쇄성의 원인을 예술계 내부 제도, 혹은 상대적으로 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몇몇 평자들의 책임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주장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계 내부 담론만 소비하는 이들에 특징적인 폐쇄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가령, 영화비평이 이전보다 훨씬 위기에 처했거나 고립된 상황의 원인이 정성일 평론가의 배타적인 태도나 《씨네21》 평론가들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익숙한 견해들을 참고해보도록 하자. 정성일 평론가가 가끔 왜 저러시나 싶을 정도로 유아론적이고 배타적인 면모를 내보인다거나(가령 최근에 < 희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6)이 개봉했을 때 그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숏바이숏과 같은 분석을 불허하는 신비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정교한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다 틀렸다고 말했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숏바이숏이 명백하게 가능한 유형의 작품이다) 《씨네21》에서 생성되는 비평이 종종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그 자체로는 타당한 지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비평계가 수축한 직접적 원인이라고 규정하는 건 기초적인 경제적, 산업적 현실감각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재하다는 점을 시인하는 처사다. 이 세계가 구조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처럼 인문예술계에서나 유행하는 담론이 설명하는 권력관계로 축소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문약하기 그지없는 젊은 인문예술학도들의 머릿속에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복잡계가 작동하는 현실의 이치와는 제대로 조응하지 않는다. 중산층이나 인문예술계 바깥에 지인이 몇명만 있어도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정성일 평론가와 《씨네21》이라는 잡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다. 그들을 포함한 다수의 국민이 비평을 덜 읽게 된 이유는 이 나라 정부와 동시대 산업이 직장생활하고 퇴근해서 유튜브 보는 게 편한 생체리듬을 구조화한 영향력이 훨씬 크지, 그들이 피곤함을 무릅쓰고 골치 아픈 영화를 보거나 비평을 읽기로 결심한 다음, 한달에 원고료를 20만원 남짓 받을까 말까한 《씨네21》의 평론가들이 광고에 밀려 잡지 맨 뒷쪽에 있는 A4용지 2페이지짜리 분량의 비평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 다 잘라내고 짤막하게 써낸 글이 설득력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언어라는 매체만 다루거나 인문예술계 담론에만 익숙해서 바깥 분야에 문외한인 이들은 이 업계가 고사 직전인 이유가 자체의 잘못에서만 유래했다고 오인하곤 하지만, 사실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책이나 글 같은 건 본질적으로 무기력한 매체다. 그렇기에 유명무실하게 남아있는 잡지나 제도들은 비평의 위기를 촉발한 근본적 원인이 아니라, 이미 외부의 산업적, 경제적 불가항력이 가해진 상황에서 겨우 생존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계든 어디든 예술계 내부자들의 폐쇄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게 비판하는 이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본인조차 마찬가지로 폐쇄적 시각에 빠져드는 나선에 갇히게 된다. 예술계나 비평계에서 실질적인 원인을 초래하지도 않았으며, 그 원인에 관해 책임지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 인식을 외면한 채 상황의 책임을 안쪽으로만 돌리며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데, 사실 그 윤리적 책임 자체가 환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내가 말한 이런 얘기조차 그렇게까지 새로운 통찰은 아니다. 적당한 현실감각을 가지고 있는 평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내가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공격적인 팔로워들 심기를 거스르기 싫어서 방 안의 코끼리를 못 본 척하듯 침묵하고 있을 뿐. 비슷한 맥락에서 버나드 조지건은 인문학계가 기술권력이 지배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파급력을 행사하거나 유의미한 해석을 제출하기 어렵게 되면서부터, 산업적으로 파생된 여러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간과한 채 세계를 구조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등 인문학계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담론 간의 사상적 대립으로 축소시키는 현실 인식을 확산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이 글에서는 비평계 공론장이 점차 고립된 상황, 그리고 그게 고립된 원인이 비평계 내부에 있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고립이 생성되는 상황의 원인을 몇몇 평자들의 책임으로 환원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그러한 경향성의 근저에 놓여있는 이면의 맥락을 간단하게만 말하고자 한다. 그 후 그 현상이 동시대의 영화에서도 상호연관된 증상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을 짚고자 한다. 물론 KMDb 영화글이라는 알만한 사람만 알고 있는 페이지에 게재될 이 글 또한 한정된 유형의 군상에게만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지금 나는 결론을 전제하는 그런 식의 경향을 문제시하는 글을 쓰고 있으므로, 이 문장 이후에는 더 이상 무슨 무슨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은 불가피한 설명을 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제할 계획이다. 오프라인에 앞서는 온라인의 우위와 선취매개라는 경향성 위에서 내가 언급한 사항을 염두에 둔다면, 나는 내가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때 소속되곤 했던 공동체와 작금의 변화한 공동체를 비교해보며 한 가지 대표적 차이를 거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사람들이 영화나 텍스트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흐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전복되고 있다는 상황이다. 박은하 기자는 언젠가 80년대생과 90년대생이 각각 경험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차이를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학과 선배들이 프리챌 커뮤니티에 가입하라고 했어요. 반면에 지금 세대들은 대학에 가면 “너 오유하니, 아니면 일베하니?”라고 묻겠지요. 즉 과거에는 오프라인을 경유해 온라인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많았다면, 지금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정체성을 확인하는 식이지요.” 그가 2010년대 전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며 지적한 소통 과정의 역전을 나 또한 지난 10년 동안 체감하곤 했다. 내가 2014년에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오프라인에서 학과 친구나 선배들이 그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 그녀 >(스파이크 존즈, 2013),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델라티브 케시시, 2012),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과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같이 보러 가자고 제안해줬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야 나는 각종 영화제 수상작과 걸작 목록을 검색하며 온라인으로 관심사를 확장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 또한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관한 정보를 다양한 지인에게 소개해주는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나는 내 주변에 약 열다섯 명의 영화평론가나 영화기자의 MBTI를 알고 있는데, 그중에 외향형은 나밖에 없다), 원래 영화나 비평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 다크 나이트 >(크리스토퍼 놀란, 2008)처럼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의 취향을, 내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 엉클 분미 >(2010)나 알랭 기로디의 < 호수의 이방인 >(2013)을 좋아하는 취향으로 바꿔놓은 경험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물론 그때의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했던 과정에서도 온라인의 선험성이 끼치는 영향력을 온전히 삭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내가 예술과 관련된 학과에 다니고 있었다는 특수성을 배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영화와 예술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흐름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벡터를 띠고 있었다. 현실에서 영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오늘날 이 벡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이제 시네필 취향이라고 선험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지인이 아닌 이와 서울아트시네마 같은 공간에 동행하는 일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오프라인 공동체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접하는 일이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되고 싶다는 자의식의 계기로 작용하는 일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사정은 비슷한지라 누군가가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사전에 섭렵하지 않으면 국적이 똑같더라도 외국인과 다름 없을 정도로 대화가 교통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 인랜드 엠파이어 >(2007)에서 어느 미국인과 폴란드인이 각자 자기만의 언어로 떠들어대며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저 괴상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오늘날 나의 현실감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느끼곤 했다. 부분적으로 이 상황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공동체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자아와 친밀감조차 고도로 정보화된 사물 인터넷 경제의 선험성에 의존하게 된 현상과 밀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범세계적 물류 경제와 디지털에 기반한 고부가 가치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세계가 우리의 현실에 나타내는 변화 중 하나는, 이전에는 자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으로 여겨졌던 일상과 사회적 관계의 물질성에도 보다 많은 지식이 축적된다는 점이다.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는 경제학 서적의 제목이 의아스럽지 않은 것은 물론, 미국 연준의 반응을 참조하지 않으면 부장님의 기분을 이해할 수조차 없는 세계. 그래서 우리의 취향과 일상적 감각조차 대역적 질서와 불가분한 맹약을 맺은 세계. 대학 동아리 같은 현실의 공동체에서 상대적으로 무매개적이었던 우정을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시네필 공동체가 2010년대를 지나오며 점점 사전에 영화와 커뮤니티의 정보망을 공유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기 어려워지는 현상 또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동시대 영화의 상황으로 우회를 하자면, 이 변화는 개별적인 영화들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징후를 발현하곤 한다. 가령 이제 가령 세르주 다네가 말한 것처럼, 영화 안에서 역사와 사건에 방점을 두는 “지리학의 영화”와 그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자연의 시청각적 물성에 주목하는 “지질학의 영화"라는 이분법적 계열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 자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 자체가 전지구적으로 편재한 비즈니스 모델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 증거하는 예시로, 최근으로 올수록 비판적 성찰의 도구로 기능하는 고도의 전문지식을 학습하지 않는다면 동시대적인 물질성을 재현하는 예술적 과제조차 점점 어려워지는 현상이 관측되고 있다. 가령 내게 2010년대 이후의 지경학적 환경에 관해 가장 놀라운 감각을 제공해줬던 두 걸작, 노엘 버치와 앨런 세쿨라의 < 잊혀진 공간 >(2010)과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 당나귀 EO >(2022)가 모두 나이가 든 남성 지식인 거장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두 영화는 모두 초국적 자본주의의 연결망에 지배된 이 세계의 물질성을 경이로울 정도로 감각적으로 도려낸 보고서다. 하지만 여러 국가의 경계를 초월해 주유하는 카메라의 동선은 세계의 지형학을 고도로 객관화한 지성의 산물이므로, 더 이상 역사적, 지리학적 통찰과 분리할 수 있는 지질학적 감수성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잊혀진 공간>, <당나귀 EO>, <파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 “ The Forgotten Space ”, IMDb) 올해에도 비슷한 경향은 의미심장하게 나타나서 장재현의 < 파묘 >(2024)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3)처럼 땅을 주제로 삼는 개봉작에서 토착적 지질과 무관한 고도로 지식인적이고 전문가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작위적 위화감을 선사하곤 했다(물론 우리가 이미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어진 세계에 실제로 서식하게 된 상황에서 그런 황당한 작위를 전략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을 기성의 비평적 관점에 따라 비판하는 작업이 과연 얼마나 유의미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반면 그런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에의 접근성과 서사적 감각의 숙련을 결여한 채 유튜브 숏츠를 마구자비로 넘기는 듯한 디지털 기기의 마취적 혼돈에 노출된 젊은 창작자들은 점점 자신이 위치한 장소의 물질성조차 오롯이 담아내길 버거워하는 경향이 발견되곤 한다. 여러 장소와 형식을 부단히 오가지만, 그중 어디에도 융화하지 못하는 청년 몽상가의 일상을 다룬 양근영 감독의 < 모르는 이야기 >(2023)는 그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일 것이다. 물론 그 무력감을 촉발한 원인 자체가 기성세대가 빚은 세계의 질서에서 유래했으므로 그 성취도가 미비하다는 점만을 근거로 젊은 창작자들을 비판하는 것만이 온당한 논의는 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오프라인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정보를 재확인하는 하위적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논점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일상적 순간의 대화에서조차 유튜브 콘텐츠나 <흑백요리사> 같은 온라인 콘텐츠를 보지 않으면 오프라인 대화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을 종종 직면하곤 한다. 비평계에서도 온라인 공간의 선험성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점점 오프라인 지면의 영향력을 초월하고 있기에, 잘 알려진 잡지의 고정된 지면에서 글을 쓰는 한 평론가 또한 SNS 계정을 만들지 않으면 영향력을 확산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압력을 느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부터는 이런 종류의 온라인의 선험성에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된 논의를 떠올려보도록 하자. 리처드 그루신은 언젠가 9.11 테러 이후 미디어에 보편화된 경향을 “선취매개premediation”라는 용어로 명명한 바 있다. 9.11 테러는 글로벌 세계의 지정학적 불화가 선진국 시민의 일상적 생활공간 안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린 상징적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래의 모든 일상적 위협마저 사전에 제어하려는 욕망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심화됐다. 잠재적 범죄자를 사전에 제압하려는 경찰력에 관한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 마이너리티 리포트 >(2002)의 흥행, 그리고 각종 방위 산업과 보험 산업, 제약 업계의 성장은 그러한 제어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사건들이다. 그루신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핵심적 요소로, 핸드폰이나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의 출현을 거론한다. 영화가 대중에게 이미지를 보급하던 20세기의 과거에 이미지란 롤랑 바르트와 앙드레 바쟁의 말처럼 재현하는 과거의 흔적을 기록하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는 일기예보를 하듯 미래의 주식시장, 미래의 기후위기가 우리에게 끼칠 영향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고지해준다. 그리고 그런 정보의 송신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미래의 위협을 사전에 고지받는 것을 허가한 스마트폰과 노트북과 같은 개인용 디지털 기기들이다. 대중적인 예술작품에도 이 같은 선취매개적 욕망에서 비롯된 시대정신은 은밀하게 투영된다. 그래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와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진도준( 송중기 ), 그리고 이 분야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박마: 거짓말 사냥꾼 바쿠>의 마다라메 바쿠처럼 미래에 발생할 변수를 사전에 전부 다 예측하는 비현실적인 수싸움에 능란한 캐릭터들이 동시대 시민의 문화적 자아 이상형으로 출몰하곤 했다. 선취매개의 욕망이 투영된 작품과 인물들_<마이너리티 리포트>, <다크 나이트>의 조커 (사진: " Minority Report ", " Dark Knight ", IMDb) 선취매개라는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공간의 물질성과 사회적 관계를 경험할 때도 사전에 온라인에 집적된 정보를 거쳐가는 현상을 해명하는 데 유용하다. 그리고 그러한 취사선택에 기반한 온라인 공동체들이 점점 고립되는 상황 또한 이런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2020년대에도 완전히 유효한 진단이라는 점을 증거하는 대표적 사례는 바로 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MBTI 검사가 폭발적으로 유행한 상황이다. 코로나19와 MBTI는 서로 우연의 일치로 같은 시기에 확산된 사건이 아니다. 코로나 뉴노멀은 미래에 발생할 감염의 확률값을 사전에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일반화된 세계관이었고, 이는 오프라인에서 조우할 인격체의 행동반경을 예측 가능한 범주로 파악하려는 온라인 MBTI 검사의 일상적 용법과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그리고 미래의 불가측한 변수를 제압하고자 하는 두 욕망을 부채질한 요소는 때마침 방역을 목적으로 스마트폰의 활용을 확대한 정책적 차원의 조치였다. 이는 정확히 9.11 테러 이후 핸드폰의 존재가 선취매개라는 미디어적 경향을 보편화했다는 그루신의 논점과 상통하는 현상이다. 물론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그루신이 글을 썼던 시기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암울해지고 확정적으로 변함에 따라, 최근 들어서는 비관적인 미래의 확률값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보다 현실적인 순간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를 투영한 콘텐츠들이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시민들이 더 이상 기후위기나 정치 뉴스와 관련한 추상적 현안과 거국적 이상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워크맨>의 오해원이나 <솔로지옥2>의 덱스처럼 일상적 순간의 욕망과 책임에 현실적인 방식으로 충실한 캐릭터들의 소박한 정감에 열광하는 현상 또한 그런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불가측한 위협을 제어하려는 선취매개라는 경향 또한 결국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를 둘러싼 위협이 적어도 현실적으로 제어 가능한 수준으로 여겨지는 시기에만 한정적으로 출현하는 현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의 오래된 풍요가 마침내 종식을 고하는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선취매개라는 경향이 점점 약화되는 국면을 목도할지 모른다. 사전에 예측하거나 제어할 여력도 없이 밀어닥치는 온갖 위기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잠재적 위협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매몰돼 있는 것만큼 현실적이지 못한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서도 지면의 한계상 선취매개의 영향력이 끼친 파장에 관해서만 취사선택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그것이 적어도 내가 영화와 비평에 관심을 가져온 지난 10년 동안의 온라인 환경에서는 상대적 보편성을 지니고 지속됐던 현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전도된 영화 창작의 과정에 대하여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오프라인에서 상호작용하기보다는 온라인에서 선취매개적 경향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해온 우리 세대의 특징이, 오늘날의 영화 안에서도 의미심장한 변화를 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기했던 것처럼 한때 우리가 오프라인을 중심축으로 데이터와 정보의 수집을 확장하던 시기가 과거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20세기의 영화사적 진보 또한 대체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말할 수 있다. 누벨바그와 네오리얼리즘의 작가들이 스튜디오 시스템을 거부한 채 거리로 뛰쳐나가 보다 정제되지 않은 이미지를 포착했듯, 그리고 오토 플레밍거의 < 돌아오지 않는 강 >(1954)에서 뗏목을 타고 계곡을 누비는 장면이 베르너 헤어조크가 아마존에서 직접 찍은 < 아귀레 신의 분노 >(1972)에 이르러 훨씬 야만적인 생동감을 띠게 됐듯, 영화사에서 진보적 실천이란 곧 오프라인 현실로 나아가 보다 확장적인 물질성을 수집하는 방향으로 특징지어지곤 했다. 디지털이 보편화한 이후, 오프라인에서의 경험을 온라인의 선험적 기준에 종속시켜 온 최근의 세대는 이 방향성을 반대로 역전시킨다. 말하자면 현실의 물질성을 접하기에 앞서 온라인에서 ’현실이라고 상정되는 어떠한 상(像)’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선취매개적으로 구성한 뒤, 그 상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작업의 방향성이 “오, 어제 어디를 갔는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런 구체적인 경험을 했어. 그럼 그 고유한 감각을 담아낸 영화를 만들어볼까?”가 아니라, “오, 어제 어떤 영화나 인터넷 게시물을 봤는데 내가 저 정보들이 비추는 현실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란 아마 ‘대체로’ 저것과 비슷할 것으로 ‘예상’해. 그러므로 나도 내가 본 그 대체적인 상을 영화라는 결과물로 출력해볼까?”라는 식으로 창작의 과정이 역전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미 20세기 후반의 서브컬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이 현실을 참조하지 않은 채 작품 속 시뮬라크르적 기호를 재생산하는 경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례가 바로 츤데레와 같은 캐릭터의 ‘모에’ 요소다. 신죠 카즈마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녀석은 분명 그러한 일을 할 거야’라는 확률분포를 여러 겹 겹쳐놓은 것”으로 정의한 모에 요소란 21세기의 시초에 이미 선취매개적 국면이 창작자의 작업 과정으로 스며든다는 점을 알리는 사례였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가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추상적 캐릭터들에 한정해 분석을 전개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과 실사라는 기준 또한 사실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을 경계를 획정하는 절대적 준거가 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지도 어플에서 검색한 후 맛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오프라인에서 직면할 경험을 온라인을 통해 시뮬레이션적으로 정위하는 절차가 일반화된 세계를 살고 있다. 이에 따라 현실 자체도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런저런 예상가능한 확률값을 근사치에 가깝게 추상한 존재로 축소되는 경향이 생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미 20년도 전에 페드로 코스타는 새로운 세대가 점점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 영화 이외의 것을 참고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경향을 문제적으로 지목한 바 있다(물론 이런 주장은 이미 그보다 더 전에 다른 이들도 주장했지만). 어째서일까? 아무리 예술적 창조에서 상호참조나 오마주가 낯설지 않아졌으며 그것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좋은 예술작품이란 다른 작품을 보고 ‘뭔가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가가 세계를 보는 태도와 방법을 배워 나만의 시각으로, 내가 관심 있는 세계를 바라본 주관으로부터 비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시네필들이 열광하기 좋은 의미 불명한 수사학일 뿐이며, 예술작품이란 결국 고유한 주관과 세계가 맺는 긴장으로부터 비어져 나온 부수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근래의 전도된 영화 창작 과정에서 사진적 이미지란 경험적 현실(혹은 구체적 사료)로부터 도려낸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 창작자의 머릿속에 내재된 ‘현실이란 어떠할 것이다’라는 추정치를 근삿값에 가깝게 출력해낸 정보로 나타난다. 그때 사진적 이미지의 물질성이란 지표적 단독성을 보증하는 요소라기보다 이미지의 확률론적 추상성을 은닉하는 날조된 하드웨어로 기능할 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포착된 현실의 존재를 기록한다는 사진적 이미지의 제작 과정이란 이제 미래에 경험할지 모르는 현실에 대한 확률론적 관념을 사전에 투영한 결과물로 전환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나는 2020년대 전후의 영화적 이미지를 ‘사진적 이미지’라기보다 ‘확률론적 이미지’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표방하는 사진적 이미지조차 확률론적 이미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면모를 노출하곤 한다. 가령, 필름 시대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환기하기 위해 시공간적 경계를 무화하는 디지털 미디어의 속성을 의뭉쩍게 누락한 <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가 이런 사례다. 박동수 평론가는 <패스트 라이브즈>에 관한 예리한 비평에서 극중 노라(그레타 리)가 향수하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 해성( 유태오 )이 실재하는 인격체라기보다 한국계 미국인인 셀린 송의 머릿속에서 한국에 관한 향수어린 관념을 추상적으로 육화한 존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추상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는 해성을 연기한 유태오 배우가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셀린 송에 의해 쓰인 어색하기 그지없는 번역투 대사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 더해서 박동수는 해성의 직업과 생활세계의 구체적인 정체성이 탈각됐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실제 한국을 살아가는 개별적 인격체라기보다 셀린 송-노라라는 작가적 자의식이 배태한 인위적 피조물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런 기준만으로 한 편의 영화에 내재한 가치를 온전히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동시대의 여러 영화 속 캐릭터들이 구체적인 인격적 속성을 결여한 채 작가가 상상한 어떤 관념의 복화술 인형으로만 제시되는 현상은, 그들이 현실에서 작가들이 직접 경험하고 취재한 존재하기보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정보를 확률론적으로 추상한 결과물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작년에 개봉한 < 너와 나 >(조현철, 2022)에서 기괴하기 그지없는 이물감을 발한 박정민 배우의 배역 또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극중에서 하은을 스토킹하다가 적발된 후 하은의 동급생들과 언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 나 잘생김~ 어 너 못생김~ 어 너 남자친구 없음~”이라는 푼수 같은 대사를 내뱉는 그는 시종 하나의 고유한 역사를 간직한 인격체가 아니라, 적당한 타이밍에 찌질한 스토커를 플롯에 외삽하고 싶다는 감독의 욕구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현된 추상적 존재로 나타난다. 물론 모든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감독의 욕구에 따라 구현된 존재이므로 진정한 문제는 그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다. 핵심은 오늘날의 미디어적 조건이 창작자가 현실을 접하는 생활감각을 변형시킴으로써, 캐릭터에 고유하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량을 점점 쇠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냥 각본을 대충 써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를 확률론적 이미지의 패러다임에서 조감한다면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가능하다. 영화적 현실을 구현해 기댓값을 넘어서는 고유한 인식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인식을 영화적 현실에 역투사하는 제작과정이, 영화적 이미지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 관념적으로 종속시키는 양상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겨울 이야기> 전술했듯이 이 경향이 배태한 대표적 증상은 작가 자신의 생활반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사회적 인격체를 그릴 때 위화감이 들 정도로 생활감과 디테일이 부족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변화 중 하나는 오늘날의 작가들이 점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대화를 쓰는 능력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안에서 대화라면 의미로 충만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진정으로 탁월한 작가적 자질은 아무런 의미론적 쓸모가 없는 대사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있다. 가령 마틴 스콜세지의 < 좋은 친구들 >(1990)에서 토미(조 페시)가 “funny how?”라는 의미 불명한 말을 연발하며 헨리(레이 리오타)를 윽박지르는 장면, 그리고 에릭 로메르의 < 겨울 이야기 >(1992)에서 펠리시(샤를로트 베리)와 막상스(미셸 볼레티)가 느베르의 길가를 산책하며, 아무런 의중도 없이 마주치는 간판과 사물의 명칭을 무심코 중얼거리는 순간들. 이 대화들은 어떤 서사적 효용과 주제의식도 부재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이 지금, 이곳에서 어떤 확률론적 추상성으로 흩어질 수 없는 단단한 시공간적 구체성으로 빛난다는 감미로운 잔향을 새기고 간다. 마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론적 환원을 거절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으로 존재한다는 단독성의 확신을 남기는 절대적 순간처럼 말이다.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나는 위에서 디지털과 현실의 경계를 이분법적으로 획정한 뒤 전자에는 물질적 속성이 탈각되어 있다는 단순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마거릿 모스가 텔레비전을 통한 소통에 고유한 물질성과 친밀감이 깃들어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디지털 기기에 단독적인 소통의 물질성이 종종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메신저를 통해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지인들과 대화하거나 이모티콘이나 말장난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분명 의미론적 제약을 초과하는 반언어적 활력과 친밀감이 발생한다고 느낀다. 또, 이 글만 보면 내가 선취매개적 경향 때문에 MBTI 검사를 뭐 대단히 나쁘게 생각한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는데, 일상에서 나는 애인이나 친구나 지인들과 MBTI 얘기를 안 하는 날이 없을 지경으로 과몰입하고 있다. 핵심적인 것은 단순히 우리 시대에 고유한 문화적 산물이 그 자체로 쓸모없다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에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체의 단독성과 물질성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그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익숙하게 받아들인 세대가, 대체로 시공간을 3인칭적으로 조감하는 영화적 현실을 인위적으로 구현하려고 할 때 일종의 작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이행하며 나타나는 변화는 이런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쩌다보니 상황에 대한 비관적이고 익숙한 진단만 늘어놓은 것 같은데 벌써 주어진 지면을 상당히 초월해버렸다. 확률론적 이미지, 그리고 그것의 현존과 공명하는 공론장에서의 ‘확률론적 대화’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은 내가 여기서 간략하게 기술한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국면에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미학적 실천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유가 된다면 그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지금은 이미 웹페이지로 읽기 불편할 정도로 내게 주어진 분량을 너무 많이 초과해버렸으므로,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김신(영화평론가) l 시각예술, 비평과 저널리즘에 관심이 많다. 진지한 얘기를 가볍게 하고 싶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을 비롯한 곳에 종종 영화비평을 기고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과거의 사건은 때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어떤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분명 그걸 그곳에 갖다놓은 누군가가 있고 또 그렇게 한 이유도 있을 테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냥 ‘그것이 거기에 있음’이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리 듯, 역사적 사건에 대해 ‘그때는 그런 시대였으니까’라며 그 자체를 하나의 시대성으로 이야기하고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때가 딱 아시안게임, 올림픽 겹치면서, 비디오가 보급되고, 말 그대로 80년대 초반부터 컬러 방송은 있었지만, 시각문화적으로 정권에서 “국산 애니메이션 TV 시리즈를 만들어라!” 호돌이 캐릭터 만들고 그래서 완전히 애니메이션 영상이 그 이전에서 그다음으로 확! 업그레이드 되는, 예. 그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 이용배 , 2020, 79쪽 위 구술을 통해서도 충분히 1980년대 중후반의 한국 애니메이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과 같은 국제적인 행사를 앞두고 정부에서 한국의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 없다. 하지만 저 말들 하나하나에는 또 다른 의문들을 달 수 있다. 정부는 ‘한국의 문화’ 중에서도 왜 ‘ 애니메이션 ’의 제작을 꾀했는가? 그 직전까지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방송국에서는 어떻게 저 ‘명령’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을 당시 MBC에서 애니메이션 연출PD를 담당했던 황선길 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1987년에 정부에서 KBS하고 MBC한테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라는 권유사항이 내려온 겁니다. 근데 KBS하고 MBC는 “우리 제작비 많이 그래서, 못 하겠다.” 전부 그냥 사양했죠. 방송국은 언론기관이니까, 못 하겠다면 못 하는 거죠, 뭐 어떡해. 나라에서 어쩔 수 없죠. 근데 정부에서는 “내년이 88올림픽 대회 아니냐. 그러니까 외국에서 관객들이 와 가지고, 호텔에 묵으면서 텔레비전을 틀면 맨 노랑 머리, 빨강 머리, 그 외국 애니메이션만 나오니까, 우리 애니메이션을 해서 보게 해야 되지 않느냐 .” 이런 권유사항이 내려온 거예요.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KBS, MBC가 “그러면 한시적으로 출발하자. 내년 올림픽 때까지만 제작을 하고, 그리고 이제 끝! 안 하겠다.” 이렇게 한시적으로 출발을 한 겁니다. 그래서 갑자기 한국 TV 애니메이션이 시작이 된 거죠. 개인이 기획한 것이 아니죠. - 황선길, 2020, 76쪽 위 구술에서 정책결정자의 저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이 호텔에서 TV로 외국 애니메이션을 보는’ 상황에 대한 상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재미있다. 그는 평소 한국의 어린이들이 외국 애니메이션만을 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국제 행사를 앞두고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의 텔레비젼 방송을 바라보며, ‘영화나 드라마, 쇼 프로그램은 자국에서 만들어 방영을 하는데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모두 외국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 국가의 문화산업에 있어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은 그렇게 아주 사소한 상상력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의문점도 생긴다. 미국이나 유럽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들은 어떻게 국내에서 수입⋅방영이 가능했을까? 분명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였다. 그중에서도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1⋅2⋅3차 개방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고, 2004년 4차 개방 대상에 들어가긴 했지만,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6년에서야 전면 개방 되었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오랫동안 수입⋅상영이 불가능했던 반면에, 왜 시리즈물은 그 이전부터도 가능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2020~2021년 진행한 ‘한국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채록’에 참여했던 45인의 구술에서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던져준 이들은 있다. 조금 지난하지만, 지금부터 하나하나 그들의 말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그들의 말이 주는 단서들 속에서 각자 그 이유를 재미있게 추리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건의 실마리 1: <손오공의 대모험> KBS는 1970년 4월 16일부터 <손오공의 대모험>이라는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아동 프로그램의 황금시간대인 6시 30분에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일본의 ‘무시’ 프로덕션과 ‘후지’ 텔리비전방송회사가 공동제작한 30분짜리 39편의 어린이용 천연색 만화영화를 흑백으로 방영한다. 우리나라선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일제 필름. … 비록 고대 중국을 배경으로 했지만 등장인물 중 일본 인명이나 사물 명칭의 일본어 사용 등은 문제가 있을 듯. - 《경향신문》, 1970. 4. 16. 8면 기사 당연하게도(?) <손오공의 대모험> 방영은 여러 가지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언론 보도를 보면 아이들의 동심이 ‘일본색’으로 물드는 것을 걱정하는 한편, 문공부가 한국영화제작자협회에서 추진 중이던 ‘일본영화감상회’는 허가해주지 않으면서, 정작 산하기관인 KBS에서는 버젓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있어, 문공부의 일본문화 규제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 또한 공영방송에서 일본(만화)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방영하게 되면, 이후 민간상업방송에서 각종 일본(만화)영화를 들여올 수 있게 되는 구실을 만들어준다는 것도 논란의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의 애니메이션 산업과 그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손오공의 대모험> 이전에도 분명 < 황금박쥐 >(야나기다 큐지로, 1968), <요괴인간>, < 마린보이(바다의 왕자 마린보이) >(토미노 요시유키, 1969)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방영된 바 있는데, 위 기사는 이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일본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래의 기사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TBC TV의 <황금박쥐>나 <요괴인간>, MBC TV의 <마린보이> 등은 완제품이 아니고 보세가공식의 한일합작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일본 작품을 도입했던 케이스들. KBS는 민방이 이미 일본만화를 방영했다는 전례를 구실로 삼고, 또한 우리의 동화산업이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비록 일본영화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건전한 영화를 도입하는 쪽이 어린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동아일보》, 1970. 4. 22. 6면 기사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손오공의 대모험>은 중도 폐지되지 않고 39회차까지 방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일으킨 파장은 방송계에 한동안 영향을 미쳤다. TBC와 MBC는 미국의 애니메이션들(<우주철인 사이퍼>, <자니 게스트의 모험> 등)을 수입⋅방영했고, 심지어 < 우주소년 아톰 >(린 타로, 1963)을 미국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것처럼 소개하며 방영하기도 했다. *주1 KBS도 <손오공의 대모험>이 종영된 이후에는 프랑스의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 < 틴틴의 대모험 >(스테판 베르나스코니, 1991)을 방영했다. *주2 하지만 논란이 있고 1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 타이거 마스크 >(타미야 타케시, 1969), < 철인 28호 >(1963)와 같이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로부터 하청(OEM)을 받은 작품들을 합작인양 은글슬쩍 방영하는 일이 다시 반복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TBC 방송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타츠토코 거 < 독수리 5형제 >다, < 개구리 왕눈이 >다, 수입을 하는데 한국에서 수탁 가공(OEM)을 해서 한 그거를 이 회사에서 수입을 해왔다 해서 수입허가가 떨어져요. 제가 또 수입대행사가 된 거예요. … 애니메이션 영화를 갖다가 유니버설아트가 수입을 하는 것처럼 형식을 갖췄어요. 유니버설하고 상관도 없어요. 그런 서류만 만들어주면 되는 거예요. - 정병권 , 2020, 132쪽 <손오공의 대모험>이 불러일으킨 논란은, 당시 한국사회 내에 여전히 일본문화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이를 의식한 정부 당국의 규제 또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방송사들은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한국에 준 하청 작업물들을 ‘합작’ 또는 ‘보세가공품’이라는 이름으로 편법 승인을 받아 방영할 수밖에 없었다. 어레레,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왜 이런 눈치 보이고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 가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방영하려 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 방영주체인 방송국 의 입장을 들어보자. <독수리 5형제(과학닌자대 갓챠맨)>(토리우미 히사유키, 1972~1979)의 국내 개봉 포스터(좌)와 <개구리 왕눈이>(사사가와 히로시, 1973)의 한 장면(우). 두 작품 모두 일본 타츠노코 프로덕션 작품으로 유니버설아트 프로덕션에서 하청을 맡아 작업했다. 사건의 실마리 2: KBS⋅MBC 1980년대 초 KBS에 입사하여 영화부에서 < 우주 해적 캡틴 하록 >(린 타로, 1978), < 딱따구리 >(사이드 마커스 등 5인, 1957), < 개구쟁이 스머프 >(레이 피터슨 등 4인, 1981) 등의 해외 애니메이션 더빙 연출과, < 떠돌이 까치 >(조봉남, 1987), < 달려라 하니 >(홍상만, 이학빈, 1988) 등의 녹음 연출을 담당했던 최수형 은 1970~80년대 국내 방송국에서 미국⋅일본 애니메이션을 주로 방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80년대 초중기, 이때는 일본만화영화가 굉장히 싸게 공급 이 됐었어요. (중략) 우리한테 거부감 없이, 전 세계에 거부감 없이 배급할 수 있는 만화가 뭐였냐면, 세계명작동화’가 원작인 만화애니메이션을 제작해서 많이 보급했는데. 우리도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압박을 받았던 분들이 아직 생존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은 기모노만 봐도 그때 트라우마 때문에 견디지 못하시고 텔레비전, 영화에 기모노가 나왔다 해서 전화하시는 분들도 계셨거든요. 이런 거를 꼭 내보내야 되느냐구. 그러니까 그런 애니메이션은 방송사에서 소개할 수가 없었죠. 그러니까 대부분 동화나 명작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많이 소개했었던 거 같구요. 미국과 일본의 컨텐츠가 많이 소개된 이유는 이 두 나라가 비즈니스 시스템이 참 잘돼 있어요 . 그리고 일본어나 영어에 능통한 인구도 우리나라에는 많이 있고 그러니까 비즈니스 하기에 참 편했던 환경이었고. - 최수형, 2020, 40쪽 구술자는 첫째로 일본만화영화의 수입 단가가 매우 저렴했다는 것, 둘째로 비즈니스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수입과 방영을 위한 절차들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던 점 등을 이유로 꼽았다. 하지만 방송국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시청률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애니메이션도 수입하고 그랬는데, 수입을 해보면 미국 애니메이션도 있고, 유럽 애니메이션도 있는데. 틀면은, 시청률이 많은 차이가 나요 , 일본 애니메이션은. 왜냐? 미국하고 유럽 쪽엔 정서적인 차이가 있고, 근데 일본은 우리랑 가깝잖아요. 모든 게 가깝고, 스토리든 뭐든 가까우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이 시청률이 높은 거예요. 그래서 거의 7~80프로, 일본 애니메이션 수입을 하죠. 특히 유럽은 너무 루즈하고, 스토리도 쳐지고 그래서 별로 유럽은 안 하고. 유럽에도 이탈리아, 프랑스 있는데 애니메이션 제작 많이 하죠. 근데 거의 수입 안 하고, 미국 것, 디즈니 같은 건 좀 하고 그랬죠. - 황선길, 2020, 105쪽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굳이 내가 보고 있는 TV 애니메이션의 제작국가가 어딘지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묘하게 미국이나 유럽의 애니메이션과 일본 애니메이션은 구분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스누피Peanuts>(1965)의 캐릭터도 좋아하고, < 컴퓨터 형사 가제트Inspector Gadget >(데이브 콕스 등 5인, 1983)나 < 핑크팬더Pink Panther Show >(게리 치니퀴, 프리츠 프레렝, 1969)도 재미있게 봤으며, 일요일 아침에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디즈니 만화동산>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눈이 번쩍 떠지고 그랬지만, 그럼에도 기억 속에서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실제로 수입하고 OEM 작업을 진행했던 애니메이션 회사 의 입장을 들어볼 차례가 된 것 같다. 1983년 MBC에서 방영된 < 독고탁 태양을 향해 던져라 >(박시옥, 1983/좌), 1987년 KBS에서 방영된 <떠돌이 까치>(우).두 작품 모두 대원동화에서 제작했다. 사건의 실마리 3: 대원동화 물론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을 진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일본 대중문화개방 이전에도 수입과 방영이 가능했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음은 대원미디어의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안현동 과 구술 면담자의 대화이다. (면담자) 《슬램덩크》를 연재할 당시에는 일본만화 수입개방 전이었는데요, 어떻게 수입을 하게 되고 또 일본만화 개방 전이기 때문에 이름도 일본어 이름이 아니라 우리식 이름으로, ‘강백호’ 이렇게 바꿔서 출판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런 과정들은 생각이 나시나요? (구술자) … 한일문화개방이 아직 안 된 시점이라도 도에이 작품 같은 경우는 우리가 얼마든지 들여와서, 개방되기 전에는 규제나 이런 게 좀 따랐지만은 … (면담자)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인데 < 은하철도 999 >(린 타로, 1977)나 그런 애니메이션, (구술자) 그건 순전히 OEM만 제작을 갖다 한 거예요. 우리가 거기 제작이 돼서 관여할 수도 없고. 그다음에 우리가 여기에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는 거고. … 일본 대사관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왜 연락이 왔냐면 우리가 수출을 하는 것도 좋지만은 이게 일본하고 이런 문제가 있는데. < 천년여왕 > (니시자와 노부타카, 1981)같은 경우는, 작품의 어떤 기본적인 컨셉이 여러 가지 일본하고, 우리가 해서는 안될 이런. … 그래서 우리를 조사를 하겠다 그래가지고. 우리가 대사관에 가서 설명을 했죠. 그 작화하고 다 갖고 가서. 우리가 여기에 권리가 하나도 없다. 우린 단지 수출, 가공해 가지고 다시 거기 갖고, 직원들 인건비 주고 이런 거지, 여기에 대해서 없다 전혀. … 이것도 누가 이제 계통에서는 ‘대원이 일본 앞잡이 아니야?’ 이렇게 돼서 그때 한번 곤욕을 치른 적이 있고 그렇죠. (면담자) 근데 당시 말씀하신 것처럼 반일 감정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도 어쨌든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국산 애니메이션처럼 인식되는 방식으로 국내에서 방영이 계속되었잖아요. TV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방영을 계속했었구요. 그게 가능했던 이유가 뭐였었나요? (구술자) 근데 원작이 너무 특이하고 재밌어요. 일본에 그 원작은 우리가 참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다가. < 드래곤볼 >이라든가, < 슬램 덩크 > 라든가, 뭐 < 원피스 > 이런 것들은 너무 작품들이,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러다 보니까 이 작품을 방송을 한다던가 하게 되면은 시청률도 높고 이러니까, 이걸 뭐 안 할 수가 없고. 그런 상황이 돼 버리는 거죠. (면담자) 그럼 정부나 심의기관이나 이런 곳에서도, (구술자) 이걸 방송하는 데 큰 하자가 없고, 문화개방 안 돼도 이 작품이 들어와서 유익하고, 뭐 시청률도 높고 이러다 보니까 한 거지. 안 그러면 이게 문제가 되면은 컷이 됐겠죠. 근데 그러진 않았어요. - 안현동, 2020, 119~121쪽 이 대화 속에는 아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일본문화개방 이전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면담자와, 이에 대해 정확한 답을 주지 않는 구술자 간의 숨막히는 줄다리기.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치 쫓고 쫓기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구술자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해주고 있다. 대원동화는 1970년대 그 전신인 원 프로덕션 시절부터 일본의 영화회사 도에이(東映)와 전속계약을 맺고 하청을 맡았다. < 우주전함 야마토 >(마쓰모토 레이지, 1974), <우주 해적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 <천년여왕> 같은 작품들이 그렇게 진행된 작품들인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OEM을 진행했던 작품들을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보세가공품’으로 국내에 허가를 받아 방영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일본’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동시에, 자신의 회사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지나치게 조심스러워져 이야기가 다소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점이 오히려 구술자가 질문의 내용과 자신이 하고 있는 답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천년여왕>은 1983년 1월부터 MBC에서 방영되던 중, 같은 해 3월 전체 42회차 중 10회를 방영한 후 돌연 개편을 핑계로 프로그램이 폐지되었다. 그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방영되고 있는 어린이용 공상과학 만화영화가 대부분 일본에서 그곳 어린이들의 취향에 맞게 제작됐거나 심지어는 일본의 설화를 원전으로 삼은 것도 섞여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MBC TV는 일본 동영동화주식회사가 제작, 동영주식회사를 통해 배급한 <은하철도 999>의 방영에 이어 같은 제작⋅배급망을 거친 <천년여왕>을 지난 1월 23일부터 매주 일요일 상오8시에 내보내고 있다. (중략) <천년여왕>은 MBC가 방영에 앞서 미 유니버설 작품이라고 밝혔었고 방송심의위원회도 그렇게 알고 있다. 방송심의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천년여왕> 심의 당시 유니버설 작품으로 돼있었다고 밝히고 “일본만화영화의 방영금지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일본극영화의 수입이 허락되지 않으며 한국영화에 일본 배우의 출연도 막고 있다. 그런데도 만화영화만은 예외인 듯 방송망을 타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일보》, 1983. 3. 10. 12면 기사 MBC TV는 23일 어린이 대상의 공상과학만화영화 <천년여왕>을 도중하차 시켰다. MBC의 한 관계자는 이 만화영화가 일본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에 의해 제작된 것이어서 어린이 교육 상 문제가 있다는 여론에 따라 이 프로를 도중에서 폐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후략) - 《한국일보》, 1983년 3월 24일자 12면 기사 사실 《한국일보》의 기사 이전에 이 작품이 ‘일본 작품’이라는 데에 문제를 제기한 이는 시청자였다. *주3 하지만 이 글을 쓴 시청자는 일본 작품의 방영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일본의 만화영화가 방영되면서 일본식 표현을 번역함에 있어 미흡함이 있음을 꼬집고 있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기사 속 방송심의위원도 ‘일본만화영화의 방영금지규정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TV를 통해 많은 일본 작품들이 국내에 방영되고 있고 그 자체를 문제삼는 분위기는 아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천년여왕>은 일본 대사관까지 그 문제를 조사하고 나설 정도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주4 1982년에는 제2차 한일경제협정안을 놓고 양국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득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일본 교과서의 역사 왜곡 사실이 드러나며 1983년 초까지도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구술자가 들었다는 ‘일본 앞잡이’라는 표현도 당시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주5 다시 말해, 평소에는 일본만화영화를 가져와서 방영을 해도 눈치껏 잘 넘어가주던 방송심의위원회에서도 이렇게 외교적으로, 그리고 국민정서 상 일본문화에 대해 반감이 커지는 시기가 오면 갑작스레 방송 중단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애니메이션 하청⋅수입업자의 입장에서 사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사업을 하나의 ‘산업’으로 키우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때 하나의 문화가 산업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국가 정책에 따라 규제가 뒤따르기는 하겠지만, 경제적으로 권익을 ‘보호’를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같이 기업적 규모의 인력이 투여되어야 하는 문화의 경우 산업으로 인정받고 장려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일본대중문화개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애니메이션 제작⋅배급업자들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당시 정부는 미래의 먹거리로 ‘소프트 산업’을 지목하며, 제재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지원은 최대로 한다는 정책방향을 세우고,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애니메이션 종사자들도 구술을 통해 ‘실제로 김대중 정부 때 가장 많은 지원을 받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일본대중문화가 개방되면, 일본만화 및 그와 관련된 콘텐츠를 수입⋅배급하던 회사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사업을 양지화할 수 있었다. 특히나 이 시기 대부분의 한국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자체적으로 작품을 제작함과 동시에 일본 콘텐츠에 대한 수입⋅배급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이는 VCR이 국내 널리 보급되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아동용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것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러 모로 회사의 규모를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1980~90년대 대원동화에서 애니메이션 연출과 기획팀장으로 일했던 황정렬 은 1990년대 말, 일본대중문화개방과 관련한 자신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구술자) 사실은 일본문화가 우리나라에 수입이 정식적으로, 공식적으로 돼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특히 대기업 같은 경우는 뭐 일본영화라든가 일본만화라든가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죠. 그리고 실질적으로 국내에서 일본애니메이션이나 일본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사실 대원이 거의 유일했었어요. 70년대 말부터 대원 같은 경우는 애니메이션 OEM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라든가 그 제작사하고 연계된 캐릭터 사업을 하는 회사라든가 ‘반다이’ 같은 회사들, 그런 회사들하고 계속 지속적으로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해왔었기 때문에 사실 대기업이 아무리 뭐 해외지사가 있고 정보 수집 능력이 크다고 하더라도 애니메이션 분야에 있어서는 대원을 따라갈 국내 기업은 없었다고 봐요. (중략) 문화개방을 풀려면 제일 먼저 부딪쳐서 해결해야 될 부분이 공무원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문화관광부 담당 공무원들 만나서 설득하는 작업을 저하고 회장님하고 같이 했었는데, (면담자) 그러면 정책이 나오고 나서 대원은 ‘대중문화 개방 됐으니까 수입하자’가 아니라 좀 더 발빠르게 ‘수입해야 하니까 정책을 만들자’ 이렇게, (구술자) 그렇죠. 현실적으로 일본문화가 이미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고 청소년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만화라든가 애니메이션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것을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막는다는 게 무슨 시효가 있겠느냐, 차라리 개방을 해서 (사이) 양지로 끌어올려가지고 정말 정서적으로 저해가 되는 것들은 법으로 막고 다음에 그 수입을 자유롭게 해야 우리나라의 캐릭터 시장이라든가 애니메이션도 경쟁력이 생겨서 나중에는 오히려 우리가 수출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그런 논리로 계속 설득을 했죠. - 황정렬, 2020, 120~122쪽 <드래곤볼>, <슬램덩크>, < 달의 요정 세일러문 >(사토 쥰이치, 1992), < 포켓몬스터 >(유야마 쿠니하코, 1997)는 모두 대원동화(현재 대원미디어)에서 수입⋅배급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자, 여기까지가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를 진행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 TV에서 방영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구술자들에게 들었던 단서들이다(그리고 이보다 많은 단서들을 한국영상자료원 2층 영상도서관에 비치된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코난은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외치지만, 사실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은 진실의 뚜렷한 실체를 들여다 보는 것보다는 그 실체가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원래의 실체가 어떻게 생겼던 것일지를 추리하는 일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방영될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냥’이라든가, ‘심의기관에서 굳이 막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같은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반 마련이 정책결정자의 작은 상상력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처럼 구술채록문을 보며 추리와 상상을 쌓아가다 보면 또 다른 출발점이 보일지도 모르니, 다들 시도해보자! ※ 인용된 구술채록문들 김성희⋅이은솔,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2권: 안현동』, 한국영상자료원, 2021. 나호원⋅임정연,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8권: 이용배』, 한국영상자료원, 2021. 배수경⋅남기웅⋅박현선,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35권: 정병권』, 한국영상자료원, 2021. 박경진⋅현찬양⋅공영민,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2권: 최수형』, 한국영상자료원, 2021. 장유진⋅김은하⋅한솔,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4권: 황선길』, 한국영상자료원, 2021. 맹우영,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45권: 황정렬』, 한국영상자료원, 2021. *** 주1. “KBS 명화극장에 액션 사극물 <코사크>”, 《조선일보》 1970. 9. 20. 8면 기사. 이 기사에서는 <우주소년 아톰>을 미국 NBC-TV의 인기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주2. “[하일라이트] TBC TV 예그린뮤지컬 <재미있는 세상>, KBS TV 어린이 만화영화 <틴틴의 모험>”, 《경향신문》, 1971. 1. 20. 8면 기사. 주3. “[민성-독자가 만드는 조선일보]일서 수입한 TV만화 용어까지 그대로 방영”, 《조선일보》 1983. 2. 12. 8면 기사. 주4. 사실 <천년여왕>의 방영 중단을 놓고, 일본 대사관이 이를 문제 삼아 조사를 했다는 구술자의 말은 조금 의구심이 남는다. 물론 도에이에서 직접적으로 한국 정부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 대사관을 통해 항의를 하고, 이를 일본 대사관이 대원동화에 전달할 수는 있겠지만, 일본 대사관에서 어떠한 권한을 가지고 국내 기업을 조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는 시간이 지나며 구술자의 기억이 왜곡되어 관련 기관을 잘못 말한 것이거나, 실제로는 ‘조사’가 아닌 흔히 ‘초치’라고 표현하는 외교 상 강력한 항의를 받는 수준의 대처를 과장하여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주5.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놓고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나, 사실 ‘한국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채록연구’를 진행하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을 주로 담당했던 구술자들이 들었던 비난으로 ‘친일’과 함께 자주 언급했던 표현 중 하나이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미국의 애니메이션 하청을 주로 맡았던 구술자들이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태도를 이들과 비교해보는 것도 ‘애니메이션 종사자 구술’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지점 중 하나이다.
2020년 7월 7일부터 2021년 2월 10일까지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해방 공간의 영화인들: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라는 전시가 열렸다. 전시장에 설치된 ‘북한영화특별관’에서, 모니터와 헤드폰을 이용해 북한영화 13편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이들 중 극영화 〈용광로〉(민정식, 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윤용규, 1952), 〈정찰병〉(전동민, 1953), 기록영화 〈수풍에프런공사〉(천상인, 1948), 〈영원한 친선〉(1948), 〈38선〉(강홍식, 1948), 〈남북련석회의〉(천상인, 1948), 북조선 국립영화촬영소 제작 〈조선시보〉 4편 등 11편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이었다. 이 전시를 공동주최한 한상언 영화연구소와 한국영상자료원에 감사드린다. (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의 전시 소개 에서 전시 리플렛과 도록을 내려받을 수 있으며, 지금도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해당 메뉴 에서 온라인 전시 를 체험할 수 있다. 또,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계정에서 한상언 박사가 전시 내용을 설명하는 강연 도 볼 수 있다.) 위 13편 중 〈 내 고향 〉( 강홍식 , 1949)과 〈 신혼부부 〉( 윤용규 , 1955)는 2003년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른 북한 영화 5편과 함께 상영된 적이 있다. 2000년 6월 사상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이 대표단을 파견하며 남북 문화교류 바람도 촉진되어, 2003년 봄 전주국제영화제·대종상에서 북한영화 신작〈 살아있는 령혼들 〉(김춘송, 2000), 〈 청자의 넋 〉(표광, 2003) 등이 소개되었다. 또, 2002년 10월 이두용 의 〈 아리랑 〉(2002) 평양 상영회 때 남한 영화인들이 방북했고, 2003년에는 ‘남북영화교류추진특별위원회’가 조직되어 2차 교류가 이어졌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 및 비디오 심의에서 제한상영가·등급 보류 판정을 연거푸 받기는 했지만 개봉 및 비디오 출시를 목적으로 북한 다큐멘터리 〈동물의 쌍붙기〉(1987)가 이즈음 수입되기도 했다. 이전에 남한의 극장에서 공개 상영된 북한영화라고는 2000~2001년에 연이어 개봉하거나 특별상영으로 소개된 신상옥 · 최은희 부부의 〈 불가사리 〉(1985)와 〈 소금 〉(1985)뿐이었으니 변화가 실감되는 시기였다. 물론 노태우 정권이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1990년에 관계부처가 북한영화를 신청자에게 제한상영하거나,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엄길선, 1979)가 TV에서 방영된 사례가 있긴 했다. 근년에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이은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으로 다시 여러 영화제에서 북한영화들을 소개하려는 바람이 일었으나, 2019년 베를린 교류추진특별위원회 회담은 불발로 끝났다. 2019년 제1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당시 명칭은 평창남북평화영화제) 개막작이 〈 새 〉(림창범, 1992)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엔, 이 영화를 ‘불법’ 상영하던 90년대 초의 대학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사회주의 정권 수립 과정을 다루는 〈내 고향〉은 국정원이 상영불가 의견을 낸 바람에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선 배지 소유자만을 대상으로 제한상영 되었다. 이와 달리 〈신혼부부〉는 같은 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 상영되었기에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제 개막 직전에 언론들은 〈신혼부부〉의 감독을 (이번 전시에서도 〈신혼부부〉 시나리오 작가인 주동인의 동생으로 소개되었고, 영화제작자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알려진) ‘주동진’이라고 보도했다. 2003년 영화제 개막이 임박해서야 성사된 고 안상영 당시 부산시장 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의 방북, 그에 이은 북한영화 상영 결정 과정 및 영화제 폐막 이후 상영작 프린트의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경위 등은 고(故)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부산일보에 연재한 칼럼으로 꽤 소상히 알 수 있다(김지석, 〈[스무 살 BIFF, 뜨거웠던 순간들] 19. 또 다른 전쟁 ‘프린트 반입’〉 (《부산일보》, 2015년 5월7일자). 한데 2015년에 게재된 칼럼인데도, 〈신혼부부〉의 감독 이름을 ‘윤룡구’라며 여전히 부정확하게 썼다. 이는 북한으로 간 윤용규의 활동과 영화를 남한에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해방 후 조선영화의 최고봉의 신기록을 지은 수작”(이태우, ‘조선영화의 발전’, 《경향신문》, 1949년 1월 6일자, 이준엽·함충범, 2018:2 재인용)이라는 윤용규의 대표작 〈 마음의 고향 〉을 제작자 이강수 가 파리에서1993년에 다시 공개하고,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해 문화재 등재 필름으로 2008년에 등록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듯하다. 국내에서 ‘연출 윤용규’라는 이름이 적시되어 〈신혼부부〉가 일반 공개된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1. 북으로 간 영화감독 일본으로 건너간 윤용규는 도요타 시로 감독의 〈항구는 바람풍 港は浮気風〉(1937) 등 ‘도쿄발성’이 제작하고 ‘도호’가 배급한 작품들의 연출부로 활동(이준엽·함충범, 2018:11)한 뒤 귀국했다. 1939년 초연된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영화화한 〈마음의 고향〉(1949)으로 윤용규는 감독으로 ‘입봉’했다. 〈마음의 고향〉은 공개되자마자 서울특별시 문화상 영화부문상을 받았고, 경무대에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관람할 정도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또, 최초의 한불 영화 교류작으로 1950년 파리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에 쏟아진 갈채와는 별개로, 윤용규가 남한에서 활동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윤용규는 해방 직후 잇달아 설립된 ‘조선영화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1945년 12월 16일 통합한 조직인 ‘조선영화동맹’ 서울시 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하여 윤용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감시 받았으며, 〈마음의 고향〉 촬영 현장과 후반 작업과정도 경찰이 사찰했다.(박철, 「서정적 수법이 탁월한 공훈배우 윤룡규」, 《조선예술》, 1957.8., 90쪽. 이준엽·함충범, 2018:14). 윤용규가 북으로 간 계기를, 2000년 12월 1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초창기 북한 영화와 일본인〉에서 일본 영화연구자 몬마 다카시가 진술한 바 있다.(지금은 온라인에서 해당 기사를 볼 수 없다.) 초창기 북한영화 편집에 참여한 키시 토미코에게 들은 내용을 근거로, 몬마는 윤용규가 ‘월북’하지 않고 ‘납북’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키시 토미코는 닛카츠 영화사 등에서 편집을 배운 뒤 ‘만주영화협회(이하 만영)’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 패전을 맞는다. 이후 만영은 중국 공산당 정권 하에서 ‘동북전영제편창(東北電影制片廠, 이하 동북전영)’으로 개편되었다. 키시는 동북전영에서 북한영화 제작에 조력했는데, 처음 담당했던 북한영화가 바로 윤용규의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이었다. 영화 제작 중에 윤용규는 자신이 북한으로 간 경위를 키시에게 설명했다 한다. 전쟁 중 찾아온 북한군 병사들이 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20분 내로 준비하라고 했고, 윤용규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나거나 준비할 틈도 없이 따라 나섰다고 키시는 전한다. 기실, 윤용규는 서울영화사의 창립 4주년 기념작 〈하얀 쪽배〉를 만들려던 참이었다.(〈서울영화사서 「하얀 쪽배」 제작〉, 《자유신문》, 1950년 5월 18일자. 이준엽·함충범, 2018:15~16 재인용) 결국 전쟁 중 북한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윤용규는 〈소년 빨치산〉(1951)과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을 연출한다. 이즈음, 한국전쟁 초기부터 제공권을 선점한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 시기의 참상은 전후에 프랑스와 북한이 합작한 〈모란봉Moranbong, chronique coréenne〉(1958, 이 영화에 강홍식 과 함께 출연한 엄길선은 후일 1원짜리 구 화폐에 등장할 만큼 북한을 대표하는 감독 겸 배우가 되었고, 〈신혼부부〉의 주연 배우 김현숙과 1962년에 결혼했다.)을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연출자 장클로드 보나르도와 각본을 쓴 극작가 아르망 가티가 크리스 마커·클로드 란즈만 등과 방북하여 제작한 〈모란봉〉은 유엔군의 평양 폭격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도 2010년까지 상영할 수 없었다. 1947년 건립된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도 파괴되어 촬영은 물론 후반작업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폭격을 피해 강계로 소개했던 북한영화인들은 1951년 5월부터 1953년 11월까지 장춘의 동북전영에서 중국 정부의 인력 협조와 물적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든다. 기록영화와 시보 여러 편 외에도 〈소년 빨치산〉(윤용규, 1951), 〈또 다시 전선으로〉(천상인, 1952), 〈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윤용규, 1952), 〈비행기 사냥꾼조〉(강홍식, 1952), 〈정찰병〉(전동민, 1953) 등 5편의 ‘예술영화’(극영화)가 장춘에서 제작되었다. 북한 정부는 이 시기 중국의 도움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며, 평안북도 의주·수풍·창성과 자강도 만포군 등에 소개한 촬영소에서 김일성이 영화 제작을 지휘하여 온전히 북한 영화인의 힘으로만 전쟁 시기를 극복했다고 주장한다.(유우, 2010:249~250) 1954년 말에야 촬영 및 제작 기반 시설이 복구되어 북한영화인들은 1955년을 전후해 평양으로 모두 귀환했다. 한데 휴전 이후 윤용규가 연출한 〈빨치산의 처녀〉(1954)는 장춘에서 평양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제작되었기에 마무리가 늦어져 1955년 1월에야 공개되었다.(한상언, 2011:289~290) 작업이 지연된 이유는 김일성이 외국영화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며 추가 촬영 및 보완을 지시했기 때문으로 일단 알려졌다. 그런데, 장춘에서 제작 중이던 〈빨치산의 처녀〉 작업이 늦어진 데는 주연배우 문예봉 이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 참석한 직후에 사적으로 술회한 여행담 때문에 ‘반쏘분자’로 지목된 탓도 있었다. 휴전 직후부터 남로당계 숙청이 시작되어 1953년 8월에는 임화 가 처형당했고, 남한출신 인사들에 대한 견제가 이어진다. 월북 직후인 1949년에도 남편 임선규가 공격 당한 적이 있었던 문예봉은 이 위기를 어쨌든 넘긴다.(한상언, 2020:95~97) 2. 휴전 직후, 신혼부부의 세계 전쟁 중 북한이 제작한 극영화가 5편인데 그 중 윤용규가 연출한 작품이 2편이었으니, 감독 윤용규의 역량을 남북한 모두가 공히 인정한 셈이다. 윤용규 이전에 북한에서 극영화를 연출한 강홍식ㆍ 주인규 는 모두 배우 출신이었고, 연출 수업을 경험한 극영화 감독은 1951년부터 작품 활동을 한 남한 출신 민정식과 윤용규가 첫 세대였다. 윤용규가 북에서 처음 연출한 〈소년 빨치산〉은 1950년 10월 말 미군이 점령한 어느 마을에서 ‘미 제국주의’의 만행에 맞서는 소년들을 영웅으로 그린다. 이 작품은 1952년 6월 중국에서 열린 ‘제6차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특별상’을 수상하며 베이징의 13개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이듬해 중국의 ‘신년 경축 특선’에서도 북한 영화로는 유일하게 선정되는 등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유우, 2016:25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은 유엔군이 수복한 강원도 고성을 배경으로 ‘인민유격대원’들의 투쟁을 그리는 영화이고, 휴전 다음해에 나온 〈빨치산의 처녀〉는 인민군이 ‘전략적 후퇴’를 감행한 1950년 하순 후방 농촌 마을에서 투쟁을 이어가는 민간인들을 보여준다. 〈신혼부부〉를 만든 다음에 윤용규가 연출한 〈어랑천〉(1957)도 전쟁 중 그가 만들었던 작품들이 구축한 시공으로 회귀한다. 이 영화는 1950년 11월, 미군에 밀려 패퇴하다 어랑천을 사수하려는 전투원들의 영웅주의와 인민들의 지원을 다룬다. 이렇듯 1957년까지 윤용규가 만든 영화들이 당대 북한 영화의 주된 소재였던 항일·반제·반미·공습과 학살의 기억(한상언, 2011:295~301)을 되불러오는데, 〈신혼부부〉는 예외다. 휴전 성립 후 전후 복구 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는 당대를 그리며 삶을 재구축하려는 개인과 공동체, 국가의 시도를 다루는 〈신혼부부〉의 세계는, 애인이 미군 간첩임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그를 사살하는 〈어랑천〉 주인공 박순봉(조효경)의 세계와는 판이하다. 무자비한 폭격을 당했던 평양에 막 복귀한 영화인들이 갓 세운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안팎에서 만든 영화임에도, 〈신혼부부〉는 근과거였던 전쟁의 잔혹함이나 전후의 비참함을 재현하는 대신 ‘현재’라는 시공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자아내는 활력을 우선 포착하려 한다. 공장에서 5년 동안 선반 일을 하던 은실(첫 주연작 〈신혼부부〉의 연기부터 큰 호평을 받고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은실 역의 김현숙은 〈모란봉〉의 원정희, 윤용규가 시나리오를 쓴 〈정방공〉(오병초, 1963)의 최부실, 김정일의 두번째 반려자였던 성혜림 등과 함께 북한영화의 5~6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연기자이며 연기 교육자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은 철도 노동자 김영철(〈내 고향〉에서 유격대원 관필 역할을 맡았던 유원준이 연기했다. 그는 1998년 타계할 때까지 북한의 ‘아버지’ 상을 구현한 배우로 통했다.)과 결혼하며 전업주부가 된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반장(반장 역을 맡은 문예봉은 유원준과 더불어 〈내 고향〉의 주연이었다.)과 막내 옥단 등 공장 동료들이 은실을 자주 찾아주지만, ‘노동역군’의 자리를 떠난 은실의 낙담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자신처럼 결혼 후 공장을 떠났다가 공사장에서 다시 일하는 옛 동료를 우연히 만난 은실은, 일터를 떠난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여성을 집안에 잡아두고 싶다는 영철과 여성 노동자로서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다는 은실의 갈등은 그리하여 깊어간다. 철도노동자로서 목표량 달성에 성공하여 기쁨에 들뜬 영철은 은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면 당신이 한 것과 다름없는데 바깥일 참견할게 뭐 있소. 나만 보고 산다며?" 은실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소꿉놀이 같은 집 안에만 아내를 가두어 두는 태도는 잘못이며 여성을 노리개나 보상물로 보는 것이라고, 또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던 가부장적 태도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냐며, “당신을 옳게 도우려면” 자신도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은실의 싸움에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반장을 비롯해 목표 작업량을 달성하는 공장 여성반 동료들이다. 여성이 혁명투쟁과 생산에 앞장서는 모습은, 북한에서 윤용규가 연출한 영화에서 예사롭게 등장한다. 미군이 점령한 마을의 여성동맹위원장인 주인공을 유경애가 연기하는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소년 빨치산〉과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윤두헌이 숙청된 뒤부터 집체작으로 기록됐다.)이나, 〈어랑천〉(1957, 시나리오 한성)의 사례가 그러하다. 역시 여성이 주인공인 60년대 뮤지컬 영화 〈정방공〉의 시나리오도 앞서 언급했듯 윤용규가 썼다. 한편, 〈빨치산의 처녀〉(시나리오 김승구)의 문예봉과 〈어랑천〉 속 박순봉이 연기한 역할을 계승하듯 미군에 맞서는 여성전사(조유경)가 등장하는 〈녀성영웅광부〉(윤용규, 1960)의 시나리오는 〈신혼부부〉의 주동인이 썼으니, 은실과 같은 입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인물 조형은 윤용규와 협업한 당대 북한 영화인들의 공동창작 결과라 하겠다. 1955년 4월에는 ‘조중 영화배급 계약’이 체결되는데, 1956년 북한영화의 대표격으로 중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영화도 〈신혼부부〉였다. 〈신혼부부〉가 1956년 8월 15일부터 8월 21일까지 베이징에서 상영될 때, 중국 언론은 “노동경쟁에서 나타난 개인영웅주의와 여성 노동자의 가치를 무시하는 잘못된 관점을 비판하는” 작품이라 소개한다.(유우, 2020:157) 3. 소리와 노래 〈신혼부부〉에서 영철과 동료 철도노동자들은 휴식 시간에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언덕을 산책하는 부부와 은실의 공장 동료들은 창공을 배경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와 함께 푸른꿈 키우며 / 당신과 나는" 부분적으로 뮤지컬 장르 양식을 채용한 〈신혼부부〉 가 제작되기 직전에 평양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무용 가극 공연을 채록한 〈아름다운 노래〉(전동민, 1954)였다. 그리고 북한 ‘예술영화’ 중 공연 채록을 제외한 평양 복귀 후 첫 작품이 바로 〈신혼부부〉였다.(유우, 2020:142) 〈신혼부부〉가 만들어진 이듬해인 1956년에는, 광주 출신 음악가 정추의 형이며 일본 니혼대학에서 유학했던 정준채가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아 최승희의 무용극을 옮긴 〈사도성 이야기〉도 나온다. 컬러 필름으로 인민적 전통과 민족문화를 다루는 영화들의 시초라 할 작품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윤용규도 1958년에 북한의 네 번째 컬러 극영화 〈 춘향전 〉을 연출한다.( 「북한에서 만든 영화 <춘향전>」 , 한상언 블로그) 〈신혼부부〉가 나오기까지, 북한영화에 음악은 물론 사운드 기술이 도입된 기간은 기실 그리 길지 않았다. 북한의 첫 발성(토키)영화는 〈인민위원회〉(1947)였다. 정준채 감독이 다큐멘터리 제작 제안을 받아 1945년에 월북한 뒤 연출한 〈인민위원회〉는, 소련 기술진들의 도움으로 녹음설비를 구축하여 1947년 준공되었으나 전쟁으로 파괴될 평양의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서 만들어졌다. 그런 까닭에 초창기 북한 영화는 소련 영화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사운드와 뮤지컬 장르의 도입에서 그 영향은 명백하다. 소련 영화사에서 사운드 녹음 기술을 처음 도입한 작품은, 1929년 11월에 상영된 아브람 룸 감독의 〈위대한 파업의 계획Plan velikikh rabot〉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학 연구자 김수환은 〈위대한 파업의 계획〉을 예로 들며, 서구뿐 아니라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사운드 기술이 처음부터 생산 및 산업의 문제, 노동과 기계의 소리를 담았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고 분석한다. 김수환에 따르면, 소련 무성영화는 발성영화로 단숨에 옮겨가지 않았다. 소련에서 처음 토키영화가 상영된 1929년 11월은 “신경제정책이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바뀌는 시기”였고, 1920년대를 뒤흔들었던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의 실험적 미학주의가 ‘형식주의’로 공격당하고, 2년 뒤인 1934년에 소련의 문예 창작 공식 지침으로 채택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얼개를 드러내던 때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혁명기의 전위적 몽타주 영화는 “만인을 위한 영화”인 토키영화로 변모해갔다. 사운드를 채용한 소비에트 영화는 크라카우어 식으로 표현하자면, ‘대기실’의 기간을 가져야 했다.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변화되는 중에 있던, 아직 혁명이 완수되어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이전의 세계, 그런고로 불투명한 잠재성과 가능성의 다발들이 공존할 수 있었던 “끝에서 두번째 세계”. 혁명기의 “실험적인 파토스”가 잦아들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지만, 도래할 그 무엇을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 하는 때.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이를 대체할 시대가 목전에 다다른 이 상황은, 크라카우어가 말한 역사의 “대기실 풍경”, 혹은 “끝에서 두번째 세계”(크라카우어, 2012:232)와 흡사했다. 끝으로 향하기 위한 “대기실”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행기의 영화로 김수환은 〈홀로Odna〉(그리고리 코진체프·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 1931)를 꼽는다. 〈홀로〉는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변화하는 총체적인 ‘이행기’에 출현했다.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홀로〉는 개봉 때 발성 대사를 더했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영화음악(작품번호 26번, 가사가 있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다.)을 사운드 트랙으로 채용했다.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의 ‘시작’과 ‘끝’ 사이”에 걸쳐져 있는 영화. 무성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형적 발성영화도 아닌,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 양식에서는 이미 벗어났지만, 아직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독트린으로 따르지도 않는 ‘양가성’이 〈홀로〉를 특징짓는다. ‘다수의 집단적 주체’가 아니라 한 평범한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며, 제목이 이 개인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은 1920년대의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감독들은 이 제목이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 정해졌으며, 당시로선 논쟁적인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 후 정태적 사실이 아니라 혁명 과정에서 운동하는 현실을 담으라는 정언명령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거해 소비에트 영화는 “만인을 위한 영화”를 자임하며 완전한 발성영화로 전환했으며, 그 과정에서 “승리한 계급의 요구이자 권리”로서 “마땅히 도래”해야 하며 “있어야 할” “흥겹고 즐거운” 소련을 제시하는 ‘스탈린 식 뮤지컬 코미디 영화’라는 변종을 낳는다. 이 새로운 장르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할리우드의 대체물로 작동했다.(김수환, 2017:436, 440, 443, 449, 450, 452, 457~458, 460, 462) 〈신혼부부〉의 양상들도 “이행기의 영화”인 〈홀로〉와 여러 모로 닮았다. ‘신혼부부’라는 제목이 표상하는 개인들의 내밀한 생활과 가정이라는 소우주도 ‘소년 빨치산’, ‘또다시 전선으로’,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비행기 사냥꾼조’, ‘정찰병’, ‘빨치산의 처녀’ 등 투쟁하는 공동체의 일원 혹은 집단을 호명하던 북한 ‘예술영화’(극영화)의 제목과는 퍽 다르다. 한편, “노동계급의 노동투쟁” 영화(유우, 2019:150)라고도 일컬어지는 〈신혼부부〉의 평양 선반 공장 노동자 은실, 열차 노동자인 영철과 그 동료들은 이전 북한 영화에 주로 등장했던 농업 공동체와는 절연한 상태다. 전쟁의 기억도 전혀 술회하지 않는 그들은 도시의 공장과 기관차·철로변에서 기계와 더불어 일하고, 직장 기숙사와 평양의 노동자 주택에서 여가를 보내며 평화롭게 노래한다. 신혼부부가 다투거나 속삭이는 말소리 외에도, 영화의 사운드 스케이프는 노동 생산 과정에서 분출되는 기계 소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자들의 토론과 노래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의 음성과 노랫소리는 기계음, 도시를 복구하는 건설 소음들과 함께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영화의 표면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새로운 소비에트에서 경험하는 삶의 내밀한 감정을 발산하고 때로는 당의 명령과 자신의 소명에 회의를 토로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방백처럼 들려주는 〈홀로〉의 사운드가 담당한 몫과 〈신혼부부〉의 소리와 노래의 역할은 특히 비슷하다. 3년을 넘긴 전쟁으로 초토화된 평양, 그 중에서도 집중적으로 폭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대동강변을 건설노동자들이 재건하는 장면을 익스트림 롱쇼트로 조망하거나, 평양 상공을 장식하는 불꽃놀이를 신혼부부가 바라보는 장면은, SF영화처럼 단숨에 혁명 소비에트의 수도를 세워 올리던 〈새로운 모스크바Novaya Moskva〉(알렉산드르 메드베드킨·알렉산드르 올레닌, 1938)를 떠오르게도 한다. 전쟁 중이던 1951년에 작성된 작성된 「평양시복구건설 총 계획도」는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계획의 수립과 함께 수정되었는데, 실상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한다. 평양의 도시재건도 영화 스튜디오 건립의 경우처럼 소련과 동유럽 기술진 및 건축자재 원조에 기대어 진행되었으며, 건축설계자와 건설노동자들은 휴전 후 다시 발표된 「제2차 평양시 복구위원회 결정」에 따라 평양 중심부를 재설계하고 정치적 상징공간을 조성한다. (김태윤, 2022:97, 128) 〈신혼부부〉는 한국전쟁 이전 ‘민주기지’의 중심도시였던 평양이 전후복구 과정에서 명실상부한 북한의 수도로 자리매김해가는 이 과정을 집약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스크린에 재현하기 보다는 “있어야 할 세계”를 향한 사회주의적 열망으로 평양이라는 도시의 새로운 공간들, 노동자들의 일터와 집을 묘파한다. 사람들과 사물들 사이로 신작로가 닦이며 건물이 다시 들어서고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갈 때, 인간 관계 및 계급, 유기물이나 비유기물을 포괄하는 새로운 우주가 형성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신세계에서 간간히 불리는 관조적인 노래들은, 스탈린 집권 이후의 소련 뮤지컬 코미디들이 지닌 무작정 흥겹고 쾌활한 음조나 동화와 같은 정조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고 있었다. 해방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북한 문학예술을 지배한 사조는 소위 ‘고상한 사실주의’였다. 신생 국가의 바른 ‘기풍’을 위해 고상한 덕성을 갖춘 모범인물을 창출하는 문예창작을 주문하는 지침이었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개 1930년대 이후 소련이 정초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따랐으나, 해방 직후 북한의 ‘혁명단계’는 아직 사회주의를 달성하지 못한 인민민주주의 단계로 여겨졌기에, 이행 단계를 상정하는 개념을 구상한 것이었다. 그러다 〈신혼부부〉가 세상에 나온 직후인 1956년 즈음, 김일성 일인 지도 체제가 확고해지고 중공업 우선정책을 채택하여 생산력이 증대하자 북한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사회주의 리얼리즘)’를 공식 기조로 언급하게 된다.(정영권, 〈북한영화의 역사와 미학-194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 《씨네21》, 2018. 06. 27.)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로 치부된 전시 공산주의와 달리, 스탈린의 지도 하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세계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교시로 삼았던 ‘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마지막 세계, 즉 묵시록의 시간을 이미 거친 시간이었다. 그리고 1969년에 이르러, 〈신혼부부〉의 서정적인 노래들은 피와 불의 바다를 재현하는 ‘혁명가극’으로 변모할 것이다. 4. 대기실의 몽타주 〈신혼부부〉는 뮤지컬 장르를 일부 채용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대 뮤지컬 코미디의 전형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미디엄 쇼트와 바스트 쇼트가 주를 이루는 〈신혼부부〉의 화편화 전략은 언뜻 봐선 1950년대 소련 영화의 주된 경향들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무수한 회의와 망설임 끝에야 비로소 재건 중인 국가의 부름에 응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은실이나, 자신의 아내가 사회적 노동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걸 많은 시행착오 후에 깨닫는 영철은, 유토피아 건설을 향한 무한한 신념으로 무장한 ‘전형적 주인공’들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거하자면 되레 ‘부정적 인간형’에 가까울 이들 부부가 마침내 결단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 〈현기증〉과 같은 히치콕의 연출작에서 자주 만나기도 했던 - 줌인트랙아웃 쇼트는 여전히 아방가르드적이다. 문예봉이 분한 반장이 과거의 피땀어린 작업을 술회하는 시퀀스는, 전경에 기계를 배치하고 인물은 초점을 흐린 채 후경에 둔다. 공업 중심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신생국가 북한의 이념을 형상화하는 표현주의적 연출이라고 부연할 만한 장면이다.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영철이 사과하여 공장에 복귀하기까지 은실이 주로 머무는 집 내부와, 은실을 찾아와 집 밖에서 부르는 공장 동료들의 활력을 때로는 나누고 때로는 합하며 재배치하는 〈신혼부부〉의 편집 방법론은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영화의 몽타주를 전범으로 삼은 듯 보인다. 1957년에 공개된 윤용규의 〈어랑천〉을 보고 쓴 박철(평론가로 추정)의 아래 글(「서정적 수법이 탁월한 공훈배우 윤룡규」, 《조선예술》, 1957.8)은 윤용규의 작가적 역량, 특히 그의 몽타주에 대한 당대 북한 영화계의 높은 평가를 어림하게 한다. 전문은 한상언 박사의 블로그 에서 볼 수 있다.(현재 통용되는 표준 한국어 규정과 다른 표기 용례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두었다.) “(전략) 전후에 제작한 〈신혼부부〉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복구 건설에 궐기하고 있는 인민들의 생활 화폭이 경쾌한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일군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공명주의와 개인주의가 우리의 건설 사업을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었고 한편 가정에 대한 낡은 관념이 발전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극복되여 가는가를 이야기 해 주었다. 이 영화는 평화와 행복을 창조하고 있는 공화국 근로자들의 영웅적 노력투쟁과 이 과정에서 힘차게 일떠서는 전후 복구 건설의 웅장한 모습들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노동의 빠포스를 일관시키면서 공화국의 불패의 생활력을 과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윤룡규는 창작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인민들의 사상 감정을 작품에 정확히 반영시키고 있으며 역사 발전의 중요 모멘트에서 버려지고 있는 사변들을 감동적으로 모사하면서 자기 자신도 현실과 함께 발전해 나갔다. (중략) 선이 굵고 서사적인 수법에 능한 예술가와 섬세하고 서정적 수법에 능한 연출가를 구분할 수 있다면 윤룡규는 보다 후자에 속하는 작가다. 그의 이와 같은 창작적 특성은 영화의 분위기 묘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 뜨락또르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 안 골목길들에서 아이들이 환성을 올리며 달려 나온다. 길목에서 모이를 쪼아 먹는 닭이며 돼지들이 달려드는 뜨락또르에 놀라서 기급하여 달아난다. 마을 아이들과 아낙네들의 신기로운 시선이 뜨락또르에 집중되자 운전대에 앉아 있던 명춘보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보내면서 의기 양양행서 뜨락또르를 몰아간다.…… 이것은 영화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의 한 장면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 장면은 전체 구성으로 보아 주선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심하게 살펴보면 이 장면이 전후 관계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놀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낙후한 생산도구로 농사를 지어 오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근대적 농기계인 뜨락또르의 출현은 경이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룡규는 이와 같은 정황을 신기한 괴물의 출현에 놀라서 혼비백산하는 닭, 돼지들의 유모라스한 화폭과 마을 어린이들과 아낙네들의 감정과 또 앞으로 농촌의 개변에 중요한 역할을 놀게 될 뜨락또르 운전수의 궁지에 찬 시선을 통하여 집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정적 분위기가 안받침되여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개간지에 뜨락또르가 도착하였을 때 이를 환영하는 농민들의 환희에 찬 감정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수법은 〈신혼부부〉에서도 재치 있게 적용하고 있다. 례를 들어 신혼부부들이 시내로 구경을 나왔을 때 부닥치는 분위기 묘사는 지금까지 신방을 지키고 있던 신부의 감정에 큰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게 형상되였다. 복구 건설에서 로력적 위훈을 세우고 있는 인민들의 씩씩한 모습, 힘차게 일떠서는 웅장한 거리르 이 모든 정황은 신부가 상상하던 지난날의 그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벅찬 현실 속에 신부를 안내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이 자기를 뒤에 남겨 두고 훨씬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온화하던 그의 감정 세계에서는 파문이 일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 윤용규는 인간의 감정 세계에 침투하는 예리성으로써 신혼부부의 섬세한 감정의 교차를 파악하고 형상에 옮겨 놓음으로써 백화점 장면 또는 가정 내에서의 생활 분위기들에서 갓 결혼한 젊은 부부들의 생활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윤룡규는 섬세하고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들의 생활감정에 침투하며 생활적 디테일을 발굴하여 인물들의 성격을 형상해 내는 우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중략) 우수한 몬따쥬와 영화의 정확한 리즘과 템포의 조성은 관객들의 예술적 감흥을 환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놀고 있다.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의 개간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경쾌한 리즘과 템포는 농민들의 노동에 대한 희열과 노동 과정에서 조성되는 율동과를 정확히 결부시켜 주었다. 〈신혼부부〉에서는 건설장 장면에서 얼마 길지 않은 화면들을 훌륭하게 몬따쥬함으로써 건설의 벅찬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묘사하였다.(후략)” 박철은 “역사 발전의 중요 모멘트에서 버려지고 있는 사변들을 감동적으로 모사”한다고 진술하며 윤용규 영화 속 몽타주의 힘을 꿰뚫는다. 그가 언급하는, 은실과 옛 동료가 만나는 공사현장 몽타주와 은실 부부가 산책하는 대동강변 몽타주는 인물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선명히 드러낸다. 인물뿐 아니라 꽃, 아코디언, 책, 탁자, 스탠드, 창틀, 그림 엽서, 시계, 벽에 걸린 옷과 모자, 빨래, 사과, 밥상 등 실내 정물을 비롯한 〈신혼부부〉 속 사물들은 몽타주라는 이론과 실천의 근간이 되는 ‘파편’으로 작동한다. 이 “이질적인 시간들의 파편”은 “또 다른 생성의 잠재성을 내포하며 (사유의) 섞임, 교환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잃어버린 것으로 기억된 것’이자 존재의 희미한 전조”로 현전하며 잠재적 카오스라 할 파편화 상태에서 충돌하고 투쟁하며 길항하다 어느 순간 “단박에 빛의 속도”로 결합하여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관계” (이정하, 2022:118~121, 327)를 미구에 창조할, 새로운 역사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하는 몽타주를 이뤄낸다.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전시 도록 64쪽에, 1956년 중국 영화 잡지 《대중전영》 15호 표지에 실린 〈신혼부부〉 컬러 스틸이 실려 있다. 은실은 사과를 깎고 있고 공장 막내 옥단이가 은실을 지켜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손짓을 한다. 이 장면에서 보이는 사과는 부부생활의 ‘위기’를 맞게 될 은실과 영철의 신혼집 탁자 위에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놓여 있다. 사물과 사람이 부딪히며 접속하여 구축하는 〈신혼부부〉의 리듬과 템포는, “영화의 기계적 지각으로 시각적 무의식 지대, 나아가 일상적 무의식 지대”를 목도할 수 있으며, “이 일상적 무의식 지대가 우리의 의식으로 포착되지 않고 파악되지 않는 비결정적 영역이자 역사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의 틀에서도 빠져나가는 영역”이라던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속 한 구절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벤야민의 스승 에른스트 블로흐는 당대의 현실을 복수적이고 공시적인 시간성, 곧 ‘비-동시대성’이란 개념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하며 그 방법론을 현대예술의 몽타주에서 찾으려 했다. 블로흐에 따르면 몽타주는 근대 도시의 비-동시대적 시간성에 정합적인 인식 형태이다. 장기지속된 시간 동안 과거의 지층에 잠재해 있다가 현재라는 이질적 공간에 급작스레 출현하는 ‘역사적 징후’를 현시하는 형식인 몽타주는 바로 그러하기에 ‘지금-시간’을 혁명적 아방가르드로 이행시킬 ‘중지(중단)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몽타주로 해체된 과거의 대상들에서 이전에 현실화한 적이 없는 잠재적 힘을 포착하여, 사물에 잠재한 힘들을 해방하고 해방된 힘으로 미래를 축조할 초석을 마련하자고 블로흐는 주창한다. 한편 죄르지 루카치가 정초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익히 알려져 있듯 몽타주를 리얼리즘 미학에 반하는 형식주의 방법론의 정점으로 여겼다. 루카치에게 있어 “통일성을 깨뜨리고 유기적인 것의 소멸을 야기”하는 몽타주는 역사적 데카당스의 징후를 드러내는 명백한 표징일 뿐이었다.(이정하, 2022:326~327, 329, 332~333, 335) 블로흐의 역사의식을 빼 닮은 사유를, 후학인 모스크바-타르투 학파를 대표하는 문화기호학의 창시자이며 영화이론가였던 유리 로트만의 저작 『문화와 폭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트만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의 관계는 대칭이 아니다. 미래는 가능태의 공간이며, 현재란 아직 전개되지 않은 의미 공간의 갑작스러운 점화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미래의 모든 발전가능성을 자신 안에 담지하고 있다. 이 가능성 중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이 인과 관계나 핍진성의 법칙을 따르진 않는다. 미래의 선택은 우연히 실현된다. 그러하기에 그 선택은 극도로 높은 정보성을 지니게 된다. 동시에 폭발의 순간은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남은 다른 노선들을 잘라내고 인과 관계의 법칙이 다시 작동하게 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폭발의 순간은 체계의 모든 정보성이 급격히 늘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완만한 발전은 이제 완전히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노선으로 도약한다. 체계 내의 모든 요소가, 혹은 폭발로 인해 미래의 운동가능성이 구축한 망 속으로 우연히 들어온 다른 체계의 요소조차, 폭발의 결과로 태어나 미래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지배적 요소로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단계에서 이미 그것은 사건들의 예측 가능한 연쇄를 만들어낸다. 폭발적인 역사의 국면에서 이루어진 모든 미래 예측의 경험들이 증명해주는 바는, 역사의 급격한 전환을 정확히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폭발이 소진되는 순간은 전개 과정의 전환 국면을 표상한다. 역사의 영역에서 이는 향후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인식하는 지점에 해당한다. 이후의 발전 과정은 의식적으로 우리를 폭발의 최초 지점으로 되돌릴 터이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 관찰자의 판단에 투영되며 새로운 존재성을 획득한다. 이때 사건이 근본적인 변모를 겪게 되는데, 즉 우연히 발생했을 뿐인 사건이 이제 유일한 가능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관찰자의 의식 속에서 예측불가능성이 법칙성으로 탈바꿈한다. (로트만, 2014: 29~32) 『문화와 폭발』을 한국어로 옮긴 김수환은, 로트만이 쓴 구절을 공들여 인용해가며 다음과 같은 역자 해제를 썼다.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다룬 이 시(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예술가」)에서 제시되는 영감의 순간은 번역 불가능한 것을 번역 가능한 것으로 바꿔놓는, 예측 불가능한 폭발의 국면과 다르지 않다…. “기호학적 지층에 뚫린 창문”으로서 폭발은 불가피하다. …만일 그 창문이 없다면, ‘기호계’ 역시 존속 할 수 없다. 창문(폭발) 없는 기호계(문화)는 더 이상 약동하는 생성의 메커니즘이 아닌 죽어버린 감옥이 될 뿐이다. 폭발은…가능한 것이 아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향해 조준된 개념이다…. 문화와 폭발, 그것은 모든 허용된 예측가능성의 경계 너머로 돌파하는 예외적 사건의 행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작동의 원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뚫고 지나갈 균열의 장소, 곧 “기호학적 창문”을 요구했던바, 바로 그 창문이 ‘폭발’의 이름으로 대두한 것이다.”(로트만, 2014:310~311, 315, 329, 332~333) 〈신혼부부〉에는 말 그대로 ‘창문’이 수 차례 대두하며 다음과 같은 몽타주를 동반한다. 영철이 누워 있는 직장 기숙사 창문 밖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걸려 멈춘 달의 형상. 공장을 그만두고 답답해하는 은실이 바깥을 내다보는 창에 걸린 레이스 커튼의 미세한 흔들림. 이 장면들은 연속적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찰나의 이질적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며 새로운 시간성을 개시한다. 다시 김수환을 인용하자면, 폭발은 “기존의 상황을 급변시키는 급격한 단절의 사태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사태를 가능케 하는 어떤 조건의 급작스러운 개시”를 뜻한다. 또, 폭발은 혁명적 사건의 발생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을 위한 가능성의 급작스러운 열림이다. 이는 연속적 과정들의 시간성 안에서 온전히 재현될 수 없기에 분절되고 탈구된 시간이 되며, 이 ‘빠져나온 시간성’ 안에서 불가능했던 잠재태가 가능태로 변모한다. (로트만, 2014:332, 334)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탐색하며 창문을 바라보는 은실과 영철 부부는 이 시공에 개시되는 “폭발의 시간성”에 휘말린다. 해방공간의 전후 동안 남북 양측에서 윤용규의 동료였던 임화도 일제강점기에 쓴 글에서 벤야민과 블로흐, 로트만을 연상하게 하는 역사관을 밝힌 바 있다. 「조선영화발달소사」, 「역사·문화·문학: 혹은 시대성이란 것에의 일 각서」 등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에 임화가 조선영화 및 역사기술을 다룬 저작의 구조를 살피며, 손이레는 임화가 뒤엉킨 시간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영화의 형성 과정을 기술한다고 분석한다.(손이레, 2018:376~379) 손이레에 따르면, 시급히 과거를 탐구하기 위해, 임화는 위기라는 감각을 압도하는 지금-여기의 조건을 강조한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발견적 접근은 임화의 시간성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다. 이는, 현재의 일부분이 아직 과거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과거 가운데 살아 있는 현재가 아니라 현재 가운데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미래에 대하여 우리의 주요한 관심이 향해 있기 때문이다. 임화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이 뒤얽혀 있음을 “현실성”과 “가능성”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과거 가운데 살아 있는 현재: 과거의 가능성 중 현실화된 것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과거: 현실화된 것 중 한때 가능성이었던 것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미래: 현재의 가능성 중 미래에 현실화될 것 임화가 역사를 통해 모색하려는 바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방통행로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이는 과거의 가능성과 현실화된 가능성들의 관계,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 관계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현실성과 가능성 간의 혼종을 내비치지만, 동시에 과거와 미래의 접촉면인 현재의 어떤 가능성이 현실화되는지는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도 임화는 지적한다. 가능성과 현실성의 뒤얽힘에서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현재가 생성되고, 현실성의 조건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배태되는 것이다. 그러나 임화가 식민시기부터 암중모색했던 이 조건들의 창문은, 그에게만은 휴전 직후에 영영 닫히고 말았다. 5. 대기실 밖으로 나서다 〈신혼부부〉 제작을 전후한1954-56년 사이에 ‘전후복구3개년계획’이 진행된다. 1956년 말에는 천리마운동이 노동강화·경쟁운동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경제 자주노선 천명은 물론 정신개조를 위한 장기 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필림’ 로고조차 평양 복귀 직후엔 모스필름의 그것과 닮은 인민 형상이었다가, 천리마운동이 시작되고 사람들 사이에 말이 끼어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1956년 흐루쇼프가 소련공산당 대의원 회의에서 비밀연설을 하며 점화한 스탈린 격하 운동의 시기와도 겹친다. 따라서 북한도 소련의 상황에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55년에는 남로당계를 대표하던 박헌영이 우선 제거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 원조를 청하러 동구권 국가를 방문 중이던 김일성을 윤공흠 등이 비판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반당종파분자로 몰린 서휘 등 4인의 연안파는 중국으로 탈출한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 외에도 소련파 등과의 연합정권 성격이 짙었던 북한이 확고한 김일성 단일 체제로 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는 영화감독 정준채의 동생인 음악가 정추와 모스크바 영화학교 유학생들도 연루되었으며,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소련으로 망명한다. 영화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 김소영 , 2017)가 다루어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은 역사다. 이즈음 김일성은 영화 등 예술창작노선에도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윤용규가 〈어랑천〉을 발표하는 해인 1957년 1월17일에는 조선영화예술촬영소에서 연설했고, 1960년 무렵엔 김정일에게 영화예술 ‘영도자’의 지위를 승계한다. 이 시기에 북한은 자유주의적 문화예술인을 “반동적 부르주아 작가”라 칭하며 ‘반우파 투쟁’도 전개한다. 1956년 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문학예술분야에서 반동적 부르주아사상과의 투쟁을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내려 기석복, 정률 등을 “협애한 지방주의 및 종파주의” 혐의로 1952년에 비판 받은 김남천, 이태준 등을 지지하는 부르주아 작가이자 종파분자로 지목한 뒤, 같은 해 4월에는 “이러한 부르주아 반동 작가들이 전파한 사상적 악영향”을 완전히 숙청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또, ‘8월 종파 사건’ 직후인 1956년 10월에 열린 ‘제2차 조선작가대회’에 나선 김일성은 카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혁명으로 확립하여 “자본주의 사상잔재 버리고 당과 혁명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예술인”이 되라고 요구한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는데, 1958년에야 북한과 중국에서 ‘반우파투쟁’이 일단락되며 예술적 자율성을 침해하는 관료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을 천명하는 교조적 통제가 문화예술계마저 지배하게 되었다.(유우, 2020:148) 〈신혼부부〉가 상영된 이듬해에는 천리마노동운동을 처음 다룬 영화인 〈행복의길〉(전동민), 한설야(그는 1960년대 초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대표작 『력사』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김일성을 항일유격투쟁의 민족영웅으로 자리매김하며 일인 체제 강화를 선전하는 영화 〈백두산이 보인다〉(김락섭)가 연달아 나온다. 북한영화가 끝에서 두번째 세계의 대기실을 나와 “역사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진입한 때를 이즈음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1960년대에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지니고 생산목표 달성을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는 천리마 영웅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1960년 11월 김일성이 ‘작가, 작곡가, 영화 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에서 「천리마 시대에 맞는 문학예술을 창조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문예 창작에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현실적 주제, 즉 “천리마의 기세로 내달리고 있는 우리 인민의 이 위대한 창조적 생활”과 “천리마 시대 사람들의 보람찬 생활과 영웅적 투쟁 모습”을 형상화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유우, 2020:182) 또, 앞서 언급한 〈정방공〉을 비롯해, 〈갈매기호 청년들〉(1961), 〈붉은 꽃〉(1963) 등 스탈린 식 뮤지컬 영화들도 다수 만들어졌다.(정영권, 같은 기사) 한편, 〈신혼부부〉의 인간형은 곧 시대정신이 되는 천리마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철과 은실은 전후 복구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성심을 다하면서도 회의하고 부부싸움도 하는 평범한 소시민적 인간이다. 문예봉이 연기하는 선반 공장의 작업반장 선배도 목표량 달성을 위해 동료들을 곡진하게 추동하지만, 천리마 시대의 초인적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신혼부부〉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전후 복구와 새로운 공화국 건설 과정에서, 개인 영웅주의를 되레 비판하는 작품으로 당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세계는 천리마 운동으로 정향된 것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천리마 시대와 이후에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이 아닌 다른 시공으로 향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품고 대기실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이렇듯 사뭇 ‘비-동시대적’인 작품을 창작한 윤용규는 1955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발탁되고, 1964년에는 중앙위원이 된다. 같은 해에 그는 조선영화인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및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이 되고, 배우로도 활동하며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는다. 하지만 이후 ‘복고주의자’로 몰려 한동안 영화계에서 떠나있어야 했다. 윤용규와 여러 작품에서 협업했던 문예봉도 1969년부터 활동을 중단했다. 잡지《조선영화》 1965년 4월호에 나운규 를 회고하며 찬사를 섞은 일이 빌미가 되었다 한다. 윤용규는 1980년 〈춘향전〉을 다시 한번 만드는데, 유원준과 공동연출했다. 일제강점기의 첫 발성영화인 < 춘향전 >( 이명우 , 1935)에서 성춘향을 연기했던 문예봉이 이번엔 이몽룡의 모친 역을 맡아 북한영화계에 복귀했다. 또, <마음의 고향>에서 주인공 도성의 어머니로 분했던 김선영 이 이 작품에서는 월매로 등장한다. <춘향전> 제작 후에 다시 활동이 뜸하던 윤용규는, 1984년 5월 22일에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 하는 역사적 위업에서 연극 영화 예술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자기의 임무와 책임에 충실했”다며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이준엽·함충범은 훈장 수여의 실제 연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약 한 달 전인1984년 4월 19일, 신상옥과 함께 첫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에서의 활동을 기정사실화하고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최은희가, 〈마음의 고향〉으로 자신을 주연배우로 부상시켜 준 윤용규에게 사의를 표했다는 해석이다. 훈장을 받은 윤용규는 1986년에 〈가야금에 깃든 사연〉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북한영화 연구자들은 윤용규가 다시 활동을 중단한 까닭을 최은희·신상옥이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한 사건과 연관하여 유추한다. (이준엽·함충범, 2018:28, 46~48)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전환의 국면이 배태한 영화 〈신혼부부〉와, 시간성이 분기하는 역사와 현실을 현시하는 역량을 지녔던 영화인 윤용규가 ‘오래된 미래’인 과거에서 도래한 2021년. 지금-여기 또한 무언가 다른 것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끝에서 두번째 세계’의 대기실일 지도 모른다. 다시 김수환에 기대자면, 혁명의 진정한 아포리아는 그것의 시작이 아니라 끝의 지점에서, 그러니까 그것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모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대기실에서 〈신혼부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시네마테크 KOFA의 큰 스크린에서 〈신혼부부〉를 꼭 다시 보고 싶다. 참고문헌 - 이준엽•함충범, 「남한과 북한에서 제작된 윤용규 감독 영화에 대한 비교 연구」, 『한민족문화연구』 제63권 63호, 2018. - 유우, 「한국전쟁기 중국에서의 북한 영화에 관한 연구」, 『현대영화연구』 25호, 2016. - 한상언, 「6.25전쟁기 북한 영화와 전쟁 재현」, 『현대영화연구』 11호, 2011. - 한상언, 「전후 북한영화의 재건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84호, 2020. - 유우, 「북한과 중국의 영화 교류 연구(1956~1966)」, 『비교문화연구』 제59집, 2020. - 김수환, 「혁명과 소리」,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2』, 박종소 엮음, 문학과 지성사, 2017.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 유우, 「한국전쟁 이후 북한영화의 제작 및 중국에서의 상영(1955∼1960)」, 『영화연구』 82호, 2019. - 김태윤, 「전후복구시기 ‘수도’ 평양의 탄생과 상징공간의 조성(1953~1956)」,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29호, 2022. - 이정하, 『몽타주』, 문학과지성사, 2022. - 유리 로트만, 『문화와 폭발』, 김수환 옮김, 아카넷, 2014. - 손이레, 「도래(해야)하는 식민지 조선영화의 고유성: 임화의 조선영화론 재고」, 『동아시아 지식인의 대화-영화 이론/비평의 감정 어린 시간』, 김소영 엮음, 2018, 현실문화연구 * 가독성을 위해 본문에 필자 이름과 발행시기, 해당 쪽수만 괄호 안에 표기했던 문헌 서지정보를 인용한 순서대로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