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커보이 토토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윤성혜, 김아영, 박선영, 정소영, 김영선, 엄태국, 김용준, 김호성, 변종필, 최한, 이의선, 기연호, 최원형
2010년, 제 14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한 저예산 영화가 상영되었다. 초저예산 영화로서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구현된 CG, 당시로서는 그리 흔하지 않았던 인터넷 커뮤니티 담론을 전면 수용한 영화로 소소한 화제를 일으켰다. 이 바람을 타고 ‘장기하가 에드우드를 만났을 때’(영화평론가 이동진), ‘지구를 지켜라 이후 가장 발칙한 데뷔작(영화평론가 김도훈) 등의 평을 들으며 극장 개봉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B급 영화, 맛이 간 영화, 아무튼 뭔가 이상한 영화에 꽂혀있던 나는 그 실체를 확인하러 한 달음에..!는 아니고 버스를 타고 걸어서 이대 후문 필름 포럼에 갔던 것이다. 좌석에 앉아 있으니 불이 꺼졌고 영화가 시작하나 보다 싶어 시선을 앞에 두었던 그 때, 갑자기 스크린 옆의 문이 열리며 왼손으로는 턱 밑에 둔 핸드폰으로 플래쉬를 켜 얼굴을 비추고, 오른팔은 위쪽으로 쭉 편 채 스크린 중앙까지 말없이 걸어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졌다. 사내는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불청객을 만든 이응일이올시다.(‘이올시다’라고 하시지는 않았을텐데, 상황과 분위기가 너무 잘 어울려 그냥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다.) 갑자기 이 영화를 떠올린 이유는 역시 ‘삐용삐용 B무비 시즌 2’에 원고를 쓰기 위해서이다. 시즌 1을 할 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루한 영화만 잔뜩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옛날에도 지금은 흉내도 못 낼 ‘충분히 맛이 가버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박노식 감독의 < 왜? >나 최영철 감독의 < 삿갓 쓴 장고 > 같은 영화들은 지금 생각해도 (두 영화는 정 반대 방향에 있긴 하지만) 매우 썩 훌륭하게 미친 그런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이 때 소개한 영화들은 영상자료원에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그 땐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끝내주는 영화들이 있으니 영상 도서관에 오셔서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2023년에 다시 ‘삐용 삐용 B 무비’를 시작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도 아주 좋은 영화가 많이 올라가 있고, 여러 OTT를 통해서 영화를 접하기 매우 쉬운 환경이 된 지금,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라는 건 예전보다 마음의 거리가 훨씬 멀게 느껴진다. 이번 시즌에서 소개할 3편의 영화는 되도록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리라 마음을 먹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이응일 감독의 < 불청객 >이다. 이응일 감독은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영화 전편을 올려놓아서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서울시 관악구의 어느 자취방. 고시생 진식은 오늘도 공부에 여념이 없다. 함께 살고 있는 취준생 강영과 응일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빠져 자고 있지만, 시골에 혼자 계시는 홀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그는 오늘도 양치를 하며 민사소송법 제90조 소송대리권의 범위...를 중얼중얼 외우고 있다. 그 때 택배가 하나 도착한다. 택배에는 ‘개봉이파괘되면계약을성맆댄것으로간주함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꺼림칙한 마음에 쉽사리 열지 못하던 그 때, 방금 잠에서 깬 응일이 방에서 나와 택배를 뜯어 버린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은하계 론리스타 금융그룹에서 포인트를 관리하는 ‘포인트맨’. 그는 진식, 강영, 응일의 수명을 지금 포인트로 적립하면 나중에 영원한 삶으로 전환하여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들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에 당황하며 거부한다. 이에 화가 난 포인트맨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라!’라고 일갈하며 이들의 자취방을 우주 어딘가로 날려버린다. 여기서부터, 이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SF를 독립, 아니 이 정도라면 개인 영화라고 부르는게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 규모에서 시도하는건 매우 드문 일이다. 개념이나 논리적인 부분으로 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눈으로 보이는 우주를 구현하겠다는 야심은 대단하다. 특히 영화의 가장 주요한 아이디어인 ‘자취방 창문 밖은 우주’라는 점을 쉽게 처리하고자 한다면 그냥 말로만 때웠으면 될 텐데 굳이 창문을 열고 우주를 보여주며 불사조 성운, 블랙홀까지 구현하고 있다. (우리 같은 백수가 밖에 더 있어! 라고 외치는 장면 뒤에 국회의사당이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붙어있다.) 상업영화에 비교할 수는 없는 CG이지만, 영화 전체의 톤앤매너와 착붙는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서 이 만듦새 자체가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여러번 돌려볼 수록, 이상하게 촬영과 CG가 절묘하게 훌륭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데 이거 혹시 진짜 되게 잘한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을 다 쓸무렵에는 아. 진짜 잘 만든거 맞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농담들이 정말 재밌어서 많이 웃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괜시리 반복적으로 리코더를 찾는 강영이나(중반부 쯤에 왜인지 ‘울밑에 선 봉선화’를 연주한다), 포인트맨의 초능력으로 갑자기 영어만 사용하게 된 응일, 포인트맨과 싸우다가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해서...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 호강시켜드려야 되는데... 이젠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씁쓸히 되뇌이는 진식 등 전반적으로 뜬금없고 어설프며 지금 보면 예스러운 농담들이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고시생, 취준생이라는 신분으로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어색한 위치가 되어 곰팡이 가득한 자취방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청년들. 그들에게 ‘수명’을 강탈하려는 포인트맨. 그는 자취방 브라더스의 수명을 앗아가려는 명분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성공한 사업가와 정치인을 욕만 할 뿐. 그들을 따라잡려 노력할 의지도 없는 녀석들! 인구는 해마다 감소하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으며 산소와 영양분을 소비하며 지구의 공간만 차지하는 놈들! 너희는 잉여인간이야! 쓰레기 같은 쓰레기들! 빌어먹을 루저들! 내가 너희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을 할 기회를 주겠다.” 그 보람된 일은 수명을 포인트로 바꿔 미국 앨러배마에 거주 중인, 민간의료보험을 경영하며 국가에 헌신한 77세의 잭 도슨씨에게 넘기는 것이다. 너무 직접적이라 뭐 더 해설이 필요없는 정도의 직유다. 마치 UCC를 보는 듯한 화질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2006년쯤부터 촬영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화질이었을 것이다. (SONY의 PD-150을 사용했다고 한다.) 4K, 8K도 접하기 쉬운 지금 본다면 아쉬울 순 있지만, 이 부분만 견딘다면 굉장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며 여러번 돌려보았는데, 묘한 것이 개봉 당시에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재밌고, 이야기 또한 더욱 시의적절하게 느껴져 웃다가 괜히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나 꼭 한 번쯤은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2010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크게 들었다. 이응일 감독은 <불청객> 이후 몇 편의 단편, 웹드라마 등을 연출했고 현재는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신다고 한다. 언젠가의 그의 작품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이런 재능을 단 한편으로 갈음하는 건 관객으로서 정말이지 너무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이응일 감독의 유튜브 채널 ‘토토모’에서 관람할 수 있다.
팬데믹 시대의 호접몽: < 바람 > ( 백미영 , 2015) #01. 지금, 봄은 창 밖에 있다. 우리는 창 너머로 봄꽃을 바라보고, 봄볕을 느낀다. 자연은 보이지만 닿지 않는다. 익숙했던 자연은 이제 이미지로서 스스로를 격리시킨다.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미 있었음에도 드러나지 않았던 자연의 미세한 존재가 갑자기 등장했다. 맨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는 포착되는 코로나 19. 신종 바이러스는 실제 크기보다 확대되어 모든 매체를 뒤덮고 있다. 지극히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 바이러스는 확대되고 복제되고 매일 재생산되는 이미지로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02. 몇 해 전, 독립애니메이션 협회가 매달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작품 상영을 전시와 함께 꾸린 <애니살롱> 프로그램에서 백미영 감독의 GV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감독의 작품 세계를 “독립 애니메이션의 청록파”라고 수식하면서, “미세먼지로 뒤덮힌 요즈음, 감독님의 작품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청정함을 느낀다”는 멘트를 날렸다. 그때는 다분히 쇼맨십에서 비롯된 말이었지만, 현재 백미영의 작품을 다시 보니, 나름 적확한 평가라고 여겨진다. #03. 한국의 독립 애니메이션에서 서정성은 다루기 쉽지 않은 테마이다. 서정성은 독립 애니메이션의 덫이자 독이기 십상이었다. 외따로 고독하게 작업하는 창작자는 곧잘 자신의 내면 세계에 빠져들어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곤 했다. 개인적 서정은 쉽사리 자기 연민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지나친 관념이라는 블랙홀에 삼켜져 버린다. 서정성을 오롯이 생기있게 만드는 것은 구체적인 감각과 이로 인해 포착되는 섬세한 디테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이 담아낸 서정은 모호함 속에서 헛돌았다. 애석하지만 이를 부정할만한 작품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이 점에서 백미영의 <바람>과 의 김도연 의 < 6월의 산 >은 주목할 예외작이다. #04. <바람>은 바람과 마주한 나비의 날개짓을 한껏 담은 작품이다. 이상으로 작품 설명 끝…?! 백미영의 작품들은 멀리 떨어져 닿지 않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다루고 있다. 그리움은 합일에 대한 열망을 낳고, 작품들은 그렇게 ‘대상과의 하나됨’을 향해 나아간다. 전반적으로 그러한 작품들은 마지막에 이루어낸 ‘물아일체’를 보여주며 끝맺는다. 그런데 <바람>은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난다. 나비의 날개짓은 자기가 소망하는 것에 다다르지 못하고 멈추어 버린듯 싶다. 거기까지가 이 작품의 첫 마디이다. 그리고는 또다른 날개짓으로 다시 날아오른다. 또다른 마디의 시작이다. 작품 제목 <바람>이 wind이면서도 desire인 까닭이다. 날개짓을 이끄는 것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바람’에 대한 소망이다. #05. 바람wind을 그려내기란 쉽지가 않다. 형체없는 공기의 움직임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이 건드리는 것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존재를 형상화할 뿐이다. 머리카락이나 옷이 나부끼는 식으로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웃집 토토로>에서 바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고양이 버스를 고안해 냈다). 백미영이 바람을 다루는 방식은 자연에 충실하다. 아무 것도 그려내지 않는 정공법! 바람이 머무는 자연조차도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두고 모두 거둬냈다. 수묵화의 미덕인 여백을 고스란히 애니메이션으로 옮겨왔다. 충실하게 집중할 것은 오직 나비의 날개짓 뿐이다. 그 날개짓은 바람wind을 마주하고, 새로운 바람desire을 향해 퍼덕이는 존재의 춤사위이다. #06.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욕망을 꿈꾼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존의 욕망이 필요하니까. 백미영의 <바람>이 바로 지금, 비로소 존재의 의의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가 잊어왔던 본래 그대로의 자연을 이제서야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람> 속에서 나비는 안에 갇혀있는지, 밖에 나와있는지 분명치 않았다. 나비는 자연 안에 있었던가, 자연 밖에 있었던가? 나비는 스스로 자연의 일부였던가, 아니면 자연을 동경하는 외부인이었던가? <바람>은 한두번의 감상만으로 쉽게 그 답을 드러내지 않는다. 쉽사리 깨어날 수 없는 장자의 호접몽이 그러했듯이…
‘트렁크 소설(trunk novel)’이라는 말이 있다. 작가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고 묵혀 두었던 원고를 사후에 책으로 펴내는 경우, 또는 작가가 묵혀두었던 원고를 모종의 사유로 출판사가 요청하여 생전에 책으로 펴내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존 인물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대개는 작가의 작품 목록에서 B급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아직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는(심지어 살아서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이라면 어떨까? 10년 전 기준으로 이미 전 세계에서 3억 부가 넘게 팔린 책들을 써온 작가 스티븐 킹이 무려 33년에 걸쳐 완성한 7부작 판타지 소설이라면? 그가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발표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책상 앞으로 돌아와 마침내 완성한, 그리하여 일생의 역작이라고 자부하는 대하 판타지 시리즈라면? 그렇다면 뭔가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의 답이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다크 타워 The Dark Tower’ 시리즈다. < 석양의 무법자 >(1965)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시리즈의 2부인 「세 개의 문 The Drawing of the Three」에서 스티븐 킹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다크 타워 시리즈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서사시 「롤랜드 공자 암흑의 탑에 이르다 Childe Roland to the Dark Tower Came」에서 시작됐다. 메인 주립 대학교 영문과 2학년이던 1967년, 킹은 전공 강의에서 그 시를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브라우닝이 쓴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시는 롤랜드라는 주인공이 어딘지 알 수 없는 황량한 대지를 지나 암흑의 탑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킹은 암울하고 스산한 상징으로 가득한 이 시를 너무나 감명 깊게 읽은 나머지 주인공 롤랜드의 여정을 언젠가 판타지 소설로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0년, 킹은 우연히 보러 간 영화 한 편에서 주인공 롤랜드의 모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영화는, 하필이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 Per qualche dollaro in piu>(1965)였다. 영화를 채 절반도 보기 전에 킹은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은 톨킨풍의 원정과 마법을 담은 이야기이되, 배경은 레오네 풍의 터무니없을 만큼 장대한 서부여야만 했다.” 그리고 물론 주인공 롤랜드는 “물 빠진 리바이스 청바지 같은 연청색 눈, 차갑고, 예리하고,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조준경 같은 폭격수의 눈”을 지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여야 했다. 이로써 킹은 세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다크 타워 시리즈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 목표란 다음과 같다. 1) <석양의 무법자>처럼 장대한 서부의 풍광을 배경으로 2)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총잡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3) 그냥 긴 책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긴 대중소설을 쓴다. 1)과 2)는 그렇다 쳐도 어쩌다가 3) 같은 목표를 세울 마음이 들었냐는 물음에 킹은 시리즈의 ‘여는 글’에서 이렇게 답한다. “그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거든요.” 3)은 (다행히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실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미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5부까지의 분량만 해도 200자 원고지로 15,000 쪽이 넘는 데다, 출간을 기다리는 6부와 7부 및 시리즈의 외전 격에 해당하는 「열쇠 구멍으로 부는 바람 The Wind Through the Keyhole」의 분량을 합치면 무려 8,000쪽이 넘기 때문이다(6부와 7부의 한국어판은 내년에 나올 예정이다). 스티븐 킹이 1970년에 타자기로 친 문장 한 줄, 즉 “검은 옷의 남자는 사막을 가로질러 달아났고, 총잡이는 그 뒤를 쫓았다.”에서 시작하여 200자 원고지 24,000매에 이르는 대하 판타지 소설로 완성된 다크 타워 시리즈를 단선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중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 ‘순서쌍과 좌표’ 단원의 핵심 개념인 엑스축과 와이축을 이용하여 시리즈 전체의 얼개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크 타워 시리즈 다크 타워 시리즈의 줄거리를 뭉뚱그려 요약하면 ‘가상의 세계에 사는 총잡이 롤랜드가 현실 세계의 인물들을 자기 세계로 끌어들여 파티를 구성한 다음, 모든 세계의 중심축인 암흑의 탑을 파괴하려는 크림슨 킹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각각의 인물들이 합류하는 과정을 엑스축이라고 하면, 이 축은 미국 환상 문학의 금자탑인 「오즈의 마법사」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다.(「오즈의 마법사」와 반대로 현실 세계의 인물들이 가상 세계의 총잡이에게 납치당하다시피 합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주인공인 총잡이 롤랜드 디셰인이 어떤 인물인지부터 알아보자. 롤랜드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변질된’ 세계다. 폐허가 된 주유소나 수도 펌프, 모노레일 열차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뜨문뜨문 남아 있기는 하지만, 종이가 금처럼 귀하고 총은 그보다 더욱 귀한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총을 사용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총잡이는 아서 왕 이야기의 기사와 같은 존재이고 그런 총잡이를 돕는 것은 마법사들의 일이다. 총잡이 가문의 후계자인 롤랜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시국가 길르앗의 군주가 될 운명이었지만, 마법사 마튼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역에 가담하면서 나라를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는 마튼이 변신한 인물로 추정되는 ‘검은 옷의 남자’ 월터를 쫓아 광대한 사막과 산맥을 지나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면서 서쪽 바닷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월터와 기나긴 대화를 나눈다(여기까지가 1부 「최후의 총잡이 The Gunslinger」의 내용이다). 독자들은 시리즈의 서장 격인 1부를 읽으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를 연발하다가 2부 「세 개의 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1부의 결말에서 검은 옷의 남자는 타로 카드로 총잡이의 미래를 점치며 ‘뱃사람’과 ‘사로잡힌 남자’, ‘그늘 속의 여인’, ‘죽음’, ‘탑’이 그려진 카드를 보여준다. 이 카드의 상징들이 바로 총잡이가 앞으로 만날 인연들인 것이다. 2부 첫머리에서 가재 괴물 떼에게 습격당해 총잡이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오른손 손가락을 두 개나 잃어버린 롤랜드는 바닷가 백사장에 서 있는 수수께끼의 문을 통해 현실 세계로 건너가고, 뉴욕에 사는 에디 딘과 오데타 홈스를 자기 세계로 데려간다. 3부 「황무지 The Waste Lands」에서는 에디와 오데타, 롤랜드가 힘을 합쳐 뉴욕에 사는 소년 제이크를 불러낸다. 롤랜드와 함께 운명 공동체인 ‘카텟’을 결성한 세 사람의 면면은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와 함께 위대하고 무서운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는 양철 나무꾼과 겁쟁이 사자와 허수아비만큼이나 범상치 않다. 1980년대의 마약 중독자 에디는 형을 인질로 잡은 마피아에게 협박을 당하여 바하마에서 뉴욕까지 헤로인을 운반하는 와중에 비행기에서 롤랜드를 만난다. 1960년대의 오데타는 흑인 민권 운동에 헌신하는 부유한 지식인 여성이지만, 지하철에 다리가 잘리는 사고를 당한 이후 조현병을 앓으며 ‘데타’라는 난폭한 인격을 숨기고 있다. 1970년대의 제이크는 전형적인 중산층 콩가루 집안의 외아들로 등굣길에 검은 옷의 남자 월터에게 떠밀려 차에 치여 숨을 거두면서 롤랜드의 세계로 건너가는데, 이곳에서 검은 옷의 남자를 쫓으려는 롤랜드의 욕심 때문에 또 한 번 죽음을 맞고(1부) 다시 한번 부활한다(3부).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의 동료들은 두뇌와 마음과 용기를 얻고자 마법사가 있는 에메랄드 시를 찾아 노란 벽돌 길을 따라 희망찬 모험에 나서지만, 「다크 타워」에서 롤랜드의 동료들은 자기가 왜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세계에서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탑을 찾아 ‘빔(beam)의 길’을 따라 무시무시한 모험을 거듭한다(물론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도로시 일행에 강아지 토토가 있었듯이 롤랜드 카텟에는 개와 너구리를 합친 것처럼 생긴 개너구리 ‘오이’가 함께한다. 스티븐 킹 멀티버스 시리즈의 4부 「마법사와 수정 구슬 Wizard and Glass」까지 거울에 비친 「오즈의 마법사」를 엑스축으로 삼아 진행되던 이야기는 5부 「칼라의 늑대들 Wolves of the Calla」에 이르러 또 하나의 축을 따라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되는데 이 와이축은 다름 아닌 ‘스티븐 킹 멀티버스(multiverse)’, 즉 킹이 쓴 여러 소설의 시공간과 등장인물들로 구성된 ‘다중 우주’다. 사실 스티븐 킹 멀티버스는 시리즈의 4부 「마법사와 수정 구슬」에서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폭주 모노레일 블레인을 상대로 수수께끼 대결을 벌여 승리한 롤랜드 카텟은 캔자스주 토피카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킹의 다른 소설 「스탠드」에서 인류를 절멸의 위기에 몰아넣은 슈퍼 독감이 휩쓸고 지나간 현실 세계의 캔자스였다. 시리즈의 5부 「칼라의 늑대들」에서는 롤랜드 카텟에 새로운 동료가 합류한다. 현실 세계의 미국 뉴욕에서 온 그 동료의 이름은 도널드 캘러핸, 바로 킹의 소설 「살렘스 롯」에서 흡혈귀의 피를 마시고 신앙을 저버린 가톨릭 신부다. 「칼라의 늑대들」의 절반가량은 캘러핸이 살렘스 롯을 떠난 이후 미국 전역을 방랑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우리는 그의 사연을 통해 현실 세계에 수많은 ‘비밀 고속도로’가 있으며 이 길이 여러 다중 우주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캘러핸의 뒤를 쫓는 크림슨 킹의 부하들은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에 등장하는 ‘노란 코트를 입은 사내들’이다(크림슨 킹이라는 존재 자체는 킹이 1994년에 발표한 「불면증」에 처음 등장한다). 「칼라의 늑대들」의 결말 부분에서 캘러핸은 자신이 「살렘스 롯」이라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것을 발견하고 경악하는데, 아직 한국어판이 나오지 않은 6부 「수재나의 노래 Song of Susannah」에서는 아예 스티븐 킹 본인이 메인주에 사는 소설가로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메타 픽션의 성격을 띠게 된다. 또한 시리즈의 대단원인 7부 「암흑의 탑 The Dark Tower」에서는 (역시 올해 영화화되어 개봉을 기다리는) 킹의 소설 「그것」에 나오는 ‘거북이’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여 마침내 다중 우주의 비밀이 밝혀진다. < 다크 타워 >(2017)의 이드리스 엘바 이처럼 스티븐 킹의 작품 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판타지 시리즈를 영화계에서 가만둘 리가 없다. 할리우드에서는 오래전부터 다크 타워 시리즈에 눈독을 들였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에 마침내 감독이자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와 아키바 골즈먼이 영화화 계획을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2008년에 에이브럼스가 손을 뗀다고 발표한 이후 다크 타워 영화화 프로젝트는 한동안 표류했고, 2010년 론 하워드 감독이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다시 추진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하워드 감독은 심지어 영화 3부작과 드라마 2시즌을 함께 제작하여 ‘영화-드라마-영화-드라마-영화’의 순서로 시리즈 전체를 영상화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포부가 너무 야심 찼던 걸까. 이듬해인 2011년에 유니버설 픽처스는 프로젝트를 포기한다고 공식 발표했고, 영화화 판권은 다시 워너브러더스로 넘어갔다. 워너브러더스는 러셀 크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영화화를 추진했지만 이듬해인 2012년에 역시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그로부터 한동안 소식이 없었던 영화화 프로젝트를 2015년에 소니 픽처스와 MRC가 다시 재개한다고 발표하더니, 이번에는 정말로 영화로 만들고 말았다. 연출은 < 미결처리반 Q > 시리즈의 각본가 출신으로 < 로얄 어페어 >를 연출하여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린 덴마크의 니콜라이 아셀 감독이 맡았고 주인공 롤랜드 역은 이드리스 엘바가, 검은 옷의 남자 역은 매슈 매코너헤이가 맡았다. 미국에서는 이미 개봉해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8월 23일에 <다크 타워: 희망의 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될 예정이다(영화판 한국어 제목의 부제가 암흑의 탑(dark tower)이 아니라 ‘희망의 탑’이 된 까닭은 아마도 흥행을 간절히 바라는 수입사의 희망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모델로 창조한 총잡이 롤랜드 역을 어째서 이드리스 엘바가 맡았을까 하는 의문의 답은 아마도 다음의 한 줄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그때는 1967년이었고 지금은 2017년이므로.” 우여곡절 끝에 영화화되기는 했지만, 이 한 편으로 다크 타워 시리즈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물론 책을 읽으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번 영화의 흥행 성적에 따라 후속편의 제작 여부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3부작 영화와 2시즌 드라마로 예정된 다크 타워 영상화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든 아니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건드리는 모든 대상을 파괴하며 살아온 주인공이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거머쥔 암흑의 탑에 이르기까지, 그리하여 그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또는 없을지) 밝혀지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스티븐 킹이 2부 「세 개의 문」의 닫는 글에 적은 한마디를 되뇌며 기다릴 때다. “그리고 탑은 더욱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