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
- 감독
- 윤영욱
- 제작년도
- 2010
<찬실이는 복도 많지>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영화의 위기라는 수사가 익숙해진 지금, 영화 비평 그리고 영화 비평지의 지속 가능성 역시 요원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햇수로 5년간 총 17권의 책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연말연시가 두렵다. 새해가 밝아 오면 그해에 다룰 영화들을 독자들 앞에 선보여야 하는데, 영화관에 가는 일조차 드물어진 시대에 영화 비평을 읽는 일이 쉬울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자들을 만족시키고 안정적인 판매량을 담보하며 업계의 사정 또한 해치지 않는 작품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내가 꼭 다루고 싶은, 혹은 꼭 다루어야 한다고 여겨 온 작품이 누락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허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일을 하는 걸까, 이 일은 영화 산업의 어디쯤에 놓여 있는 걸까?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삶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김초희 감독의 <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예술영화 PD로 일하던 찬실( 강말금 )은 영화 인생 내내 따르던 지 감독( 서상원 )이 사망한 후 망연자실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속세(?)를 떠나온 찬실은 영화 없이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 과정에서 소피( 윤승아 )와 김영( 배유람 ), 하숙집 할머니( 윤여정 )와 장국영( 김영민 )을 만나는 찬실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치열한 삶의 양식 또한 마주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의 삶과 관계가 우선하는 가운데, 영화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게 뭐 허는 사람이냐고.” 지 감독의 죽음 이후 찬실은 달동네에 위치한 하숙집에 숨어든다. 어느 날 그곳의 주인 할머니는 찬실에게 어떤 일을 했었냐고 묻는다. 찬실은 허둥대며 영화 PD가 하는 일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러니까 그게 뭐 허는 사람이냐고”라는 퉁명스러운 답변만이 되돌아올 뿐이다. 조금 우습게도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찬실과의 동질감을 느꼈다. 나의 가족과 친구들은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을 잘 모른다. 나를 만날 때면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 ‘언제 옳게 된 직장을 잡을 거냐’고 묻는다(‘옳게 된 직장’이 어떤 직장인지는 잘 모르겠다). 질문을 받은 나는 영화와 비평을 둘러싼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보고, 그 영화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들을 구조화하고, 그것을 멋지게 써낼 수 있는 필자들과 소통하고, 그들이 쓴 글을 보기 좋게 다듬어 독자들 앞에 내어놓는 일이라고. 종국에는 찬실처럼 멋쩍게 웃으며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게 되지만 말이다. 프리즘오브 33호 《작은 아씨들》을 제작하며 “프리즘오브 작업은 어떤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개인적 취향으로 인해 다루고 싶지 않았던, 혹은 비평적 측면에서 논할 지점이 적다고 생각했던 작품을 선정하게 되어 곤란할 때도 있다. 하지만 한 영화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돌려 보고, 그에 대한 수많은 말들을 뒤적이다,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과 소통하고 있자면 그 영화의 사랑스러운 부분들이 자연스레 떠오르기 마련이다. 또한 그 작품이 내가 살아가는 이곳, 누군가가 살아온/살아가는/살아갈 저곳과 얼마나 깊이 맞닿아 있는지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 비평을 엮어 책으로 만드는 일을 통해 영화에 대한 숱한 이들의 사랑을, 그리고 영화가 일종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영화는 숫자가 아니야, 별 하나 별 두 개도 아니야.” 김영과 찬실 새 영화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고사를 지낸 지 감독은 술에 흠뻑 취해 말한다. “영화는 숫자가 아니야, 별 하나 별 두 개도 아니야.” 이런 지 감독과 오랜 시간 작업해 온 찬실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 없는 생활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며 김영과의 로맨스를 꿈꾼다. 하지만 김영은 오즈 야스지로가 아닌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 말하고, 찬실은 경악한다. 나도 한때 지 감독, 그리고 찬실과 같은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다. 영화에는 숫자 따위로 가치를 매길 수 없으며, 돈 같은 것에 얽매여 비평을 써서는 안 되고, 예술영화가 대중영화보다 더 ‘옳은’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애당초 예술영화란, 대중영화란 무엇인가?) 그러나 누군가에게 영화는 숫자고, 누군가에게 영화는 별 하나, 별 두 개다. 누군가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누군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좋아한다. 때에 따라 영화를 숫자로 평가할 수도 있는 거고, 삶이 필요로 하기에 돈을 위해 비평을 쓸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그것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프리즘오브의 편집장직을 맡은 후 이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상당히 내향적인 사람이다. 요즘 말로 하면 ‘대문자 I’랄까. 처음 편집장 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막연히 나의 천직일 것이라 예상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방에 틀어박혀 내가 좋아하는 영화만을 파먹을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영화 비평지 편집장은 오히려 그와 정반대에 놓여 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 호 다른 필자들과 소통하고, 인터뷰이를 만나고, 독자(의 반응)와 마주해야 하는 일이 산재해 있었다. 나에게는 유난히 어려운 미션이었지만 그들과 만나야만 했기에 영화와 숫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며, 세상에는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저런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 역시 깨달았다. “반지하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니고.” 그렇다면 다시, 나의 일은 복잡하게 맞물린 영화 산업의 톱니바퀴 속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걸까.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일에 관해 “영화를 사랑하는 첫 단계는 두 번 영화를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라고 말했다. 나의 영화 사랑은 ‘반지하도, 사각형도 아닌’ 찬실이의 방처럼 애매모호한 위치에 놓여 있다.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일도 아니고, 영화를 만드는 일도 아니다(물론 영화를 보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이들과도, 영화를 만드는 이들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트뤼포 귀신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의 영화 사랑은 두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 사이 그 어디 즈음에 놓여 있다고 말해 주지 않을까? 누군가는 ‘애매모호한’ 나의 일을 폄하할지도 모른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속 제작사 대표( 최화정 )가 “찬실이 같은 PD가 없어도 영화는 만들어진다”라며 찬실의 노고를 몰라봤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글을 읽고, 고치고, 묶는다. 내 이름을 내세우지 않지만 그 글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양지바른 자리를 다진다. 제작자와 비평가, 비평가와 관객, 관객과 제작자를 연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애매모호한’ 나의 일이다. 찬실이 선행하는 삶 속에 놓인 영화를 발견하였듯, 나 역시 이제는 안다. 영화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나의 일 역시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프리즘오브 33호 <작은 아씨들>, 34호 <너와 나>, 특별호 <헤어질 결심>, <파묘> 안정윤(프리즘오브 편집장) l 페미니즘과 영화, 영화제 등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글을 쓴다. 계간 영화잡지 《프리즘오브》 편집장.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집행위원.
‘봉테일’이 화제다. 봉준호 영화의 매력을 설명하는 단어인데 아카데미 4관왕 이후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 된 것 같다. 봉테일은 그가 촬영현장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 미리 완벽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촬영에 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봉준호는 준비된 감독이다. 머리 속에 찍고 싶은 영화의 그림이 이미 완벽하게 들어 있으니 꼼꼼하고 치밀하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 살인의 추억 >(2003)에서 형사가 갖고 다니는 수첩에 농협 마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거나 < 기생충 >(2019)에서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 등이 사례로 거론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디테일을 이렇게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영화에서 디테일이란 성격이 세심하다거나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디테일은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흥미로운 속성 중 하나다. <기생충> 1막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일명 ‘믿음의 벨트’ 시퀀스가 있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 집의 가정부 문광을 내쫓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대목. 문광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택이 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문광의 모습을 촬영하고 마침내 문광이 기침을 하는 사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끄집어내는 장면까지 5분여의 장면이다. 물 흐르듯 우아하게 편집된 장면들은 관객을 현란한 사기극의 현장에 초대한다. 기택 가족의 계획은 착착 맞아 떨어져서 그것이 악행이라 하더라도 마음 졸이며 응원하는 심정이 된다. 마침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집어들 때 저절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여기서 봉테일은 소품이나 세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이 어떻게 설계되고 이어지는가에 있다. 피자 가게에서 기택 가족이 피자를 먹으며 핫소스를 뿌리는 장면은 휴지통의 핫소스와 연결되고, 감정이 고조된 기택의 대사는 기우가 연기 연습을 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는 장면들이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쾌감으로 상승된다. 영화사에선 몇몇 범죄영화에서 이런 류의 디테일에 특별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줄스 다신의 < 리피피 >나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같은 영화다. 범죄의 모의와 실행을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들로 디테일이 어떻게 영화적 감흥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장면들이 빈 틈 없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이런 극적 흥분은 잘 만든 액션영화에서도 두드러진다. < 본 얼티메이텀 >의 워털루 역 장면 같은 경우다. 제이슨 본이 비밀정보를 가진 기자와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워털루 역에 한번도 못 가본 관객도 그곳을 알 수 있게끔 정확하게 촬영됐다.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에서 꼭 필요한 시각적 정보를 주기 때문에 관객 또한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그릴 수 있다. 덕분에 영화는 현장에 있는 듯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아마도 우리는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알 것이다. 장소와 동선과 연기가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영화들은 배우들이 그냥 영화를 흉내 내는 느낌을 준다. 값 싼 전쟁영화 속 총격 장면에서 총소리만 나면 아무 데로나 나뒹굴며 죽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연상해보면 알 수 있다. 디테일이 없으면 영화는 아이들의 병정 놀이가 되고 만다. 디테일이 특정한 장르영화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 흐트러지다 >에서 등장인물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자. 새로 생긴 슈퍼마켓의 식료품 가격이 얼마나 싼 지를 수치까지 들어 정확히 알려주는 대목에서 나루세 감독 특유의 디테일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한 경제적 디테일을 더하며 비범해진다. 이처럼 영화에서 주인공의 가난 혹은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는 장면은 흔하지만 그런 만큼 예리한 묘사가 필요하다. <기생충>에서 무선 인터넷을 잡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그렇듯 단순한 디테일로 많은 것이 설명될 수 있다. 켈리 레이차트의 < 웬디와 루시 >에선 주인공이 수첩에 돈의 수입, 지출을 기록하는 장면으로 한눈에 그런 디테일을 전달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장면 하나만으로 주인공이 처한 난관이 실감나게 전해지는 것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작품 선정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에도 당연히 디테일이 들어간다. 다른 영화나 TV 드라마, 뮤직비디오에서 너무 반복해서 지겹게 느껴지는 장면 묘사,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디테일 같은 것을 보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디테일이 좋은 영화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감독이 완벽주의자여야 한다거나 자잘한 세부가 전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가 원래 디테일의 예술, 이라 그렇다.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은 연예인의 삶이 자신들의 삶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다르지 않은지 궁금해 한다. 그 마음은 지금껏 기자나 PD와 같은, 연예인과 비연예인을 잇는 중간자들에게 접수되어왔다. 그들에 의해 연예인의 일상은 ‘리얼’, ‘관찰’과 같은 수식어가 붙어 방송되고, 연예인이 SNS에 올린 글과 사진은 기사화된다. 이제는 연예인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유튜브 계정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요구와 응답이 적극적으로 만나, 어쩌면 우리는 관계 맺지 않은 타인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 이상으로 알게 되어 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관계 맺지 않은 타인을 보는 시선은 자주 왜곡된다. 우리는 한계를 인정하고, 때로 이용하면서 연예인의 삶을 가벼운 스토리 콘텐츠로 소비해버린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쉽고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데 연예인이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제목삼아 직접 감독하고 주연한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문소리가 ‘문소리’로 등장하는 그의 첫 연출작 < 여배우는 오늘도 >( 문소리 , 2017)의 외피는 일면 ‘여배우’라는 소재를 앞세워 흥미를 유발한 후 ‘여배우’지만 별 거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모큐멘터리 내지는 시트콤처럼 보인다. 실제로 문소리는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서 흡사 3부작짜리 ‘인간극장’의 주인공 같다. 자신을 향하는 여러 눈길을 영화상에 배치한 후, 그 사이에서 요리조리 분투하는 ‘여배우.’ 그에게 꽂힌 시선의 주인은 친구, 가족에서부터 동료 영화인들, 그를 알지만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이들, 즉 대중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자신이 문소리에게 지닌 애정이나 관심의 크기를 핑계 삼아, 가끔은 그것과 관계없이, 오직 각자의 렌즈로 그를 훑어낸다. 하지만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서 자신을 설명하려거나 그 시선에 대항해 자신을 변호하려는 알량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시선들의 존재양식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전면에 내세워야지만 ‘여성’이자 ‘배우’인 자신에 대해 이야기 꺼내기를 시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꺼이 객체가 됨으로써, 주체로서의 자신이 지닌 이상과 현실이 또 다른 여러 주체들에 의해 위협받아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영화는 논증의 과정에 심각한 표정으로 뛰어들기보다 가볍고 유쾌한 톤으로 일관한다. 영화 속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도 유쾌하지도 않지만. 우선 이 영화에서 문소리는 내내 다른 인물들의 ‘액션’에 따른 ‘리액션’을 하고 있다. 1막 ‘여배우’에서 문소리는 친구가 가자고 했기에 산을 오르며, 자신을 캐스팅하지 않는 감독 및 제작자들의 선택을 두고 자신이 가진 ‘나름의’ 매력을 복기할 뿐이다. 우연히 만난 남성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그들이 던지는 무례한 언행에 통쾌히 일갈하는 대신 껄끄러워하는 표정만을 보이며 차분히 대답을 이어간다. 2막 ‘여배우는 오늘도’는 아예 가족구성원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는 문소리의 하루를 따라간다. 하루 끝에 그가 당도한 곳은 친한 프로듀서와 감독의 특별출연 요청을 ‘거절’하기 위한 자리다. 3막이자 이 영화의 가장 이질적인 에피소드 ‘최고의 감독’은 자신의 첫 주연작을 연출한 감독의 장례식장에 가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도 문소리는 상대역이었던 남성 배우가 그를 붙잡고 나서야 망자와 그의 작품을 논하는 토론의 장에 합류된다. 영화 속 문소리가 처하는 대부분의 상황은 타인들에 의해 꾸려진 판이며 그는 그 판 위에서 그들의 기대를 따르거나 배반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요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소리가 ‘액션’이 아닌 ‘리액션’으로 현현해야 했던 이유는 제목이 내포한 두 가지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첫째, 그는 배우, 곧 연예인이다. 둘째, 그는 여성이다. 분명한 것은 <여배우는 오늘도>의 방점이 문소리가 ‘배우’로서 겪는 파란만장보다 ‘여성 배우’라서 견디는 진퇴양난에 찍혀있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지만 ‘조폭 아님 경찰’인 한국 영화에 자주 초대받지 못하는 여자. “힘들면 뭐라도 줄이라”고 다정히 말해주는 남편이 있지만 유치원 가기 싫다 통곡하는 딸을 달래줘야 하는 여자. “여배우 발을 닦아줘 훌륭하다”소리를 듣는 감독의 작품 세계를 비판하다가도 그가 남긴 영상을 보며 예술을 다시 고민하는 여자. 그렇게 멀리 나아갈 수도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는 여자. 이 영화에서 문소리가 처한 모든 특수하거나 일반적인 상황들은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교묘하게 톱니바퀴를 맞물리며 진행된다. 다른 인물들의 눈짓을 앞세우고 문소리의 대꾸를 뒤세우는 영화의 흐름은 톱니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기름칠에 다름없다. 시선에 화답하기 위해 준비되는 주재료는 어김없이 ‘외모’다. 그는 산에서 만난 남성들과의 술자리, 치과의사와의 사진 촬영을 앞두고 열심히 화장을 한다. ‘여배우’로서 기대 받는 미모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러다가도 특별출연을 거절하기 위해 찾은 주점의 화장실에서는 화장을 지운다. ‘여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가꾸지 못할 만큼 힘들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또한 선글라스는 꾸미지 않은 겉모습을 가리는 용도로, 드레스는 ‘여배우’로서 기대되는 외형을 극적으로 재현하는 장치로 쓰이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물건들을 대하는 문소리의 태도다. 그는 선글라스가 없으면 불안해하다 못해 고성을 지르며 길 한복판을 달린다. 그렇다고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특별히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딸이 드레스를 입은 레드카펫 위 문소리를 가리키면 “엄마 아니야”라며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프라이빗 뱅킹 직원이 “여배우는 드레스 맨날 입고 좋으시겠다”며 웃을 땐 호응조차 안 한다. 이렇듯 문소리가 화장을 하고 지우는 장면은 그가 ‘여배우’를 보는 타인의 시선에 적당히 화답하는 방식을, 선글라스에 집착하고 드레스에 무심하게 구는 설정은 ‘여배우’를 택한 자기 자신의 다짐을 은유한다. 나는 나와 내 직업을 두고 유별나게 굴고 싶지 않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내게 갖는 당신들의 기대에는 불평 않고 따르겠으나, 그 순응은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선언. 영상을 통한 문소리의 발화는 코미디로 눙쳐지다가도 어느새 한국 영화계, 더 넓게는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환영하다가도 무시해왔는지 넌지시 그러나 적확하게 짚고 넘어간다. 그 점이 영화를 기어이 블랙 코미디로 만든다. 결국 문소리는 첫 연출작에서 자신을 시선에 둘러싸인 존재로 만들고, 늘 타인들의 반경에 위치하게 했다. 자신을 ‘고뇌하는 예술가’나 ‘고통 받는 워킹맘’과 같이 보다 본격적인 존재로 명명할 의지를 내려놓고 일상으로부터 끌어온, 조금은 소소한 이야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시도는 경력 단절 비슷한 것을 경험한 유명 ‘여배우’ 감독으로부터 관객이 기대할 ‘진짜 자기 이야기’보다는 얕은 수준일지 모른다. 영화의 코믹한 톤마저 어쩌면 진지한 논의를 빗겨가기 위한 수단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평가내리는 것은 여성 창작자의 자의식을 납작하게 관망한 결과에서 비롯된 판단이지 않을까. 실제 현실과 재현된 현실 속에서 여성이 시선의 주인이 아닌 대상으로 존재해온 역사는 뤼스 이리가라이, 로라 멀비, 존 버거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어왔다. 이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의식해야 했던 동시에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검열하며 압박해왔음을 수많은 사연과 매체를 들어 역설했다. 너무나 유구해서 학문에까지 자리 잡은 이 역사를, 20년째 카메라에 찍히다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여성 창작자가 지나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가 보여준 것과 보여주지 않은 것은 여성이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처음으로 들려준 이야기와 나중으로 미뤄둔 이야기에 다르지 않다.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이 주인이 아니었던 순간들을 먼저 꺼내 보이는 용기. 그것만으로도 언젠가 문소리가 자기만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장악하길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배우로서든, 감독으로서든 그가 계속해주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