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오브 프리즘 -샤이니 세븐 스타즈-
- 감독
- 히시다 마사카즈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테라시마 쥰타, 사이토 소우마, 하타나카 타스쿠, 야시로 타쿠, 아오이 쇼타
[사진] 한국전쟁 중 미군 위문공연을 하러 온 마릴린 몬로와 함께 한 최은희 최은희는 좌우익의 분열이 본격화되기 전인 민족영화 건설기에 모처럼 얻은 수확이다. 1947년 청구영화사가 제작한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에 발탁되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여배우의 삶이 시작된다.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 나갔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어촌 청년들이 마을 처녀들과 힘을 모아 황폐한 어촌을 재건해 나간다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잘사는 집 외동딸 역을 맡아 애인 역인 최운봉과 그의 어머니 김연실 등과 함께 공연했다. 은막으로 이끈 순진한 얼굴 <노도(怒濤)>를 개작한 최금동 각본의 <새로운 맹서>는 46년 기획 단계부터 여주인공은 신인을 쓰기로 방침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마땅한 후보 깜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에 투자할 전주(錢主)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을 때 회현동에 있는 영화사 사무실로 한 손님이 찾아왔다. 신경균 감독은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기 주연 깜이 한 명 나타났으니 와서 보라고. 이 처녀가 바로 최은희(崔銀姬)였다. 감독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람은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카메라맨, 뒷날 그녀의 남편이 된 김학성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최은희는 ‘큰 키에 때 묻지 않은 촌스런 얼굴, 가꾸지 않은 엉성한 몸매에다 집안에만 있다가 배우가 되겠다고 뛰쳐나온 순진한 모습’이었다. (김학성, 「30년을 하루 같이(6) 원로 연예인의 수기」, 『일간스포츠』, 1978.3.20.)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좋게 본 감독과 작가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그녀가 영화사 사무실을 찾게 된 데는 이 무렵 토월회 연극무대에 함께 섰던 최운봉이 제 상대인 배역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며 지원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촬영에 들어가자 감독으로부터 오버 액션이라는 질책을 받았다. 아버지가 딸에게 준 돈이 애인의 서울 유학비에 쓰인 사실을 알고 꾸짖자 딸이 용서를 비는 장면이었다. 관객들이 없이 스태프들만 바라보는 가운데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해야 하는 연기는 허공에 뜬 것처럼 와 닿지 않았다 .(최은희, 『고백』 영화에 데뷔하다, 2007, 랜덤하우스 코리아, 46쪽)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듯이 하다 보니 감정이 과장됐던 것이다. <새로운 맹서>는 제재(題材)와 내용이 과거 무성영화 <바다와 싸우는 사람>이나 <바다여 말하라>에 비하여 별다른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금룡, 최운봉, 김연실 등과 함께 신인 최은희가 열연했다. (「신영화평, ‘새로운 맹서’」, 『대동신문』, 1947.6.30.) 는 평을 들었다. 이 영화에 이어 캐스팅된 것이 수도청 경우회가 제작한 <밤의 태양>(1948, 박기채)이었다. 대규모 밀수단을 추적한 끝에 일망타진하는 경찰관의 이야기로, 김동원의 상대역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되자 수도청 기자단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언론인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장면이 있으니 삭제해 줄 것과 사과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진] 최은희는 <마음의 고향>에서 젊은 미망인 역을 맡았으나 연기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다 세 번째 출연한 <마음의 고향>(윤용규, 1949)에서는 홍역을 앓다가 죽은 어린 아들의 49제를 지내려 절을 찾아온 젊은 미망인 역을 했다. 정적 연기가 요구되는 캐릭터 때문이었는지 주지 역(변기종)과 미망인 어머니 역할(석금성)에 비해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태우, 「조선영화의 발전, ‘마음의 고향’을 보고」, 『경향신문』, 1949.1.6.) 모두 6.25전쟁 이전의 출연작들이다. [사진] <젊은 그들>에서 남장 여인으로 분한 최은희 최은희의 연기 활동은 그로부터 5년 만인 1954년 신상옥 감독의 문화영화 <코리아>(1954)를 계기로 재개된다. 잇따라 신 감독의 <꿈>(1955)을 비롯한 <젊은 그들>(1955), <무영탑>(1957), <지옥화>(1958)에 주연으로 기용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승려 조신의 꿈을 통해 애욕의 덧없음을 깨우치게 되는 이광수 원작의 〈꿈〉, 실각한 대원군의 복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열혈 청년들의 사투기 김동인 원작의 <젊은 그들>(1955), 불국사의 석가탑 건립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엮은 현진건 원작 〈무영탑〉(1957)에서는 승려를 홀린 달례(꿈)와 정혼자가 있는 남장 여인(젊은 그들), 그리고 석공 아사달을 사랑한 구슬아기(무영탑) 등 다양한 역할을 해낸다. 그녀는 어느새 ‘신상옥의 전속배우’나 다름없는 부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고전미에 상응한 도발적 여성의 욕망 그러나 <지옥화>에서는 앞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전후 아프레 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기지촌의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양공주 쏘냐 역 최은희는 미군부대의 창고를 털어 내다 파는 일이 주업인 사내(김학)의 정부 노릇을 하면서도 그의 동생을 유혹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쏘냐는 동생과 도망가기 위해 정부 일당의 음모를 헌병대에 신고하지만 도망쳐 나온 정부의 칼에 찔려 죽고 사내도 총에 맞아 죽는다. <지옥화>에는 통속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6.25전쟁을 겪은 궁핍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식이 담겨 있다. 깊게 파인 검은 드레스와 짙은 화장으로 빗나간 여성의 욕망을 표출하고 그동안 한복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농염한 몸매를 드러내면서 기존의 정적 이미지를 탈색시키는데 성공한다. [사진] <지옥화>에서 최은희는 형제를 동시에 유혹하는 악녀 쏘냐 역을 맡아 변신에 성공한다 이 작품을 전후하여 농촌을 무대로 한 김소동 감독의 <돈>과 김성민 감독의 액션 영화 <형제>(이상 1958)에 출연했으나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고아인 법대생이 부정한 방법으로 신분을 세탁, 변호사의 꿈을 이루게 되는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과 <동심초>(1959)의 전쟁미망인 역할에 이르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동심초>의 경우 양장점을 경영하다가 사기꾼에 걸려 파산상태에 이르렀을 때 도움을 준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물러서는 미망인의 연기는 ‘최은희가 발산하는 고절(高節)한 미망인다운 애절감이 좋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연일 대성황을 이룬 이 영화는 신상옥프로덕션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다. [사진] <동심초>에서의 최은희와 김진규 김기영 감독의 <슬픈 목가>로 1960년대 신년 벽두를 연 최은희는 <동심초>의 변주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포함, <청춘의 윤리>(김화랑), <려인(麗人)>(이봉래),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등 타사 영화 5편과 신상옥프로덕션 10주년 기념작 <이 생명 다 하도록>을 비롯한 〈로맨스 빠빠〉, 〈사랑의 역사〉, 〈백사부인〉(이상 신상옥 감독) 등 4편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 <이 생명 다 하도록>은 6,25 전쟁 때 참전했다가 척주마비로 하반신 불구가 된 남편(김진규)과 어린 딸을 돌봐야 하는 인고(忍苦)의 여인상을, <로맨스 빠빠>에서는 가부장적 질서와 해체의 경계를 넘나든 영악한 맏딸의 모습을 보여 관심을 끌었다. 이 시기에 그녀와 대적할 만한 여배우는 연배가 비슷한 황정순과 주증녀, 이민자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아 내 가슴에>(1958)의 히트 이후 기세가 오른 젊은 김지미였다고 할 수 있다. 최은희에게 신상옥이라는 배경이 있듯이, 김지미에게도 남편인 홍성기 감독이 있었다. 그래서 영화계에서는 그들의 판세를 ‘연기와 미모의 대결’로 받아들였다 .(「라이벌」, 『씨나리오문예』 4호, 40쪽, 1959, 12) 이 무렵 최은희는 연기 잘 하는 스타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40고개를 바라보아도 잔주름을 연기력으로 너끈히 카버하고 젊은 주역을 해내는 데보라 카처럼 연령적 육체적 조건을 극복하고 톱스타의 자리를 차지할 것’ (「‘배우동서(俳優東西)’ 데보라 카와 최은희」 , 『경향신문』, 1960.8.13.) 이란 전망을 갖게 했다. [사진] 흥행 신기록을 세운 <성춘향>의 한 장면. 오른쪽은 월매 역을 맡은 한은진 그런 점에서 1961년 시네마스코프 색채 대형화면 시대를 연 구정 대목 프로 <성춘향>(신상옥)은 이와 같은 세간의 평가와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더욱이 최은희는 역대 <춘향전> 영화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35세의 중년 춘향 역에 도전했다. 같은 시기에 경쟁한 21세인 <춘향전>(홍성기)의 김지미와는 무려 14년이라는 차이가 났다.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명우, 1935)의 문예봉이 19세에, 1955년 한국영화 중흥기의 <춘향전>(이규환, 1955)의 조미령이 27세에, 그리고 뒷날 <성춘향>(박태원)의 장미희가 21세에 춘향 역할을 맡은 것과는 대비되는 무리한 캐스팅이었다. 감당하기엔 어려운 배역이었으나 당시의 매스컴은 <성춘향>에 대해 성의 있는 고증과 색조, 허장강의 방자 역에 호의를 표명 (「예술과 기업의 대결, 매니큐어 반짝이는 두 편의 춘향전」, 『조선일보』, 1961.1.30.) 하면서도 최은희의 과년한 춘향 역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손에 바른 ‘반짝이는 매니큐어’만 지적했을 뿐이다. 이는 분장과 연기력으로 나이의 약점을 극복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성춘향>(명보극장)은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국제, 국도극장)에 참패를 안겨주며 서울에서만 74일간 38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기업적 기반을 마련한 신상옥은 신필름을 확장하고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춘 영화사로 키워 나갈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성춘향>에 이어 최은희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연산군>(이상 신상옥),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등 5편과 이만희와 유심평의 감독 데뷔작 <주마등>과 <군도(群盜)> 등 2편이 포함된 9편에 출연하였다. 여섯 살 소녀 옥희를 화자로 내세워 어머니와 사랑방에 세든 중년 남성과의 애틋한 사랑을 보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의 여주인공은 <마음의 고향>(1949), <동심초>(1960)에 이은 미망인 소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깨끗이 빗어 올린 쪽진 머리와 하얀 저고리, 절제된 미소, 조신한 동선(動線)으로 ‘동양적인 청결과 멜랑콜리한 분위기’ (「신영화, 담담하고 격조있는 가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국일보』, 1961. 8.26.) 를 자아내며 인내와 수절이 미덕, 가부장 중심 사회의 단면을 애잔하게 보여 주었다. 그 반면에 <상록수>(원작 심훈)에서는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에 나선 일본 식민지시대의 농촌 여성 채영신으로 변신해 역할의 확장을 꾀하였다. 이 시기야말로 최은희 연기 생애에 있어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최은희 연기 인생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영화 중 하나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한 장면 〈산색시〉(박상호), <29세의 어머니>(이강원), <무정>(이강천) 등 외부 작품을 포함 12편에 캐스팅되면서 최다 출연 기록을 세운 62년은 <열녀문>과 <로맨스그레이>(1963, 이상 신상옥)로 자칫 굳어질 뻔한 ‘청상과부’의 이미지를 탈색시키는 효과를 거두게 했다. 그런 잔제는 <29세의 어머니>와 같은 캐릭터에 남아 있긴 했으나 <열녀문>의 경우처럼 양반집 과부 며느리(최은희)가 머슴(신영균)과 정분에 빠져 임신을 하거나, <로맨스그레이>에 나타나듯이 단란한 가정의 가장인 대학교수(김승호)를 유혹해 돈을 뜯어내는 꽃뱀 수준의 호스티스(최은희)로 전환, 지금까지와는 상반된 여성상을 그려 보였다. 특히 <로맨스그레이>에서 여주인공 민자의 입술 오른쪽 볼에 그려놓은 검은 점은 화류계 여성다움을 나타낸 차밍 포인트로 작용하였다. 이와 같은 캐릭터는 <지옥화>의 양공주 쏘냐와 함께 최은희 연기세계의 동적인 한 축을 형성하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사진] <로맨스 그레이>에서 김승호와 한 장면 [사진] <민며느리>에서 최은희는 연출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벙어리 삼룡>(1964, 신상옥)과 직접 메가폰을 잡은 <민며느리>(1965), 신상옥 감독의 옴니버스 사극 〈이조여인잔혹사〉(1969) 등에 출연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봉건주의적 인습에 희생 되는 여성의 틀을 유지한 채 <날개부인>(1965, 김수용),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 나봉한) 등에 출연, 밀수품 장사에 뛰어든 공무원(김진규)의 아내, 쇄국정책을 펼치는 대원군(김승호)의 섭정에 맞서 개혁·개방 정책을 추구하다가 죽음을 맞는 민비 역 등을 통해 연기의 폭을 넓혀 나갔다.
1950년대 후반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과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로 포문을 연 한국의 코미디영화는 본격적인 장르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청춘쌍곡선>을 시작으로,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한 <오부자>(권영순, 1958), <사람팔자 알 수 없다>(김화랑,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등의 코미디언코미디 1) 가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의 주류를 형성했다면,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과 <흥부와 놀부>(김화랑, 1959), <탈선 춘향전>(이경춘, 1960) 등 시대극을 표방한 코미디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등의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도 관객들을 찾아갔다. 1960년대 초에는 가족드라마가 주요 장르로 등장하여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등의 가족희극드라마가 다수 제작되었는가 하면, 1960년대 중반 유행했던 청춘드라마의 영향으로 <총각김치>(장일호, 1964),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등의 청춘코미디가 한동안 코미디 시장을 휩쓸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서영춘, 구봉서를 투 톱으로 하는 코미디언 코미디가 다시 주류를 형성하면서, 구봉서 주연의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 <남자기생>(심우섭, 1969) 등의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 <팔푼며느리>(심우섭, 1968),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 등의 팔푼이 시리즈, 서영춘의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운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 등이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코미디영화는 197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코미디영화의 제작 비율은 연평균 12%에 이르렀다. 2) 코미디영화는 한국영화 시장에서 멜로드라마에 이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주요 장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코미디영화, 그 중에서도 특히 코미디언코미디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홀쭉이와 뚱뚱이’ 양석천(1921~1990)과 양훈(1923~1998)에서 김희갑(1923~1993), 구봉서(1926~2016), 서영춘(1928~1986), 배삼룡(1926~2010)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남성 코미디언들만으로 명단이 완성된다. 같은 시기, 이들에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거나 이야기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불출의 유일한 여성 제자이자 인정받는 만담가로서 신불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김윤심(1914~1997)을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 코미디언들의 활약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윤심은 한국 최초의 여성 코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쇼 무대의 인기 출연자였다. 김윤심의 활약이 만담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박옥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에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박옥초(1920-1984)는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의 입지를 다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소녀가극단 낭낭좌에서 데뷔한 이래 남성 역을 도맡아 여성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박옥초는 코미디로 연기 영역을 넓힌 뒤 1950-60년대에는 악극단과 쇼 무대, 영화와 라디오, TV까지 각종 매체를 넘나들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이 시기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활약했던 유일한 여성 코미디언으로 약 7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박옥초의 첫 영화출연은 안종화 감독의 영화 <수우>(1948)였다. <수우>는 알려진 바대로 ‘경찰정책영화’였는데, 김소영, 전택이, 신카나리아, 서월영 등이 주요 출연자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두 번째 영화는 6.25전쟁 이후, 한국영화가 새롭게 발돋움하던 시기에 제작된 1956년 영화 <애정파도>(문화성)였다. (그림1) <애정파도>(문화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위 전옥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는 이예성과 안나영, 오른쪽 맨 아래 수영복 차림의 박옥초와 구봉서가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예성과 안나영, 전옥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애정파도>는 구봉서의 데뷔작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구봉서와 콤비로 재미있는 장면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의 오른쪽 아래에 등장한 수영복 차림의 두 사람이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급증하던 이 시기에, 박옥초의 영화 출연도 한층 활발해졌다. 박옥초는 이 시기에만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이 시기에 유행했던 코미디영화였다. <봉이 김선달>(한홍열, 1957), <공처가>(김수용,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 등에서 박옥초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림2)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의 한장면. 박옥초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정혜선)의 집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아낙으로 등장했다. 박옥초는 빠른 템포로 수다를 늘어놓으며, 특유의 표정 연기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솜씨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3)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죽음 이후 다른 사람으로 빙의된 주인(구봉서)이 유령인 것 같다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식모로 등장하여 짧은 순간에 웃음을 자아내는 신 스틸러였다. 이처럼 조연이나 단역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코믹한 순간의 웃음을 담당했던 박옥초의 경력은 196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미 악극단과 쇼 무대의 유명한 배우였던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출연자였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가진 코미디언이었다. 1960년대에는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사극, 멜로드라마, 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 안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그림4)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장면 기생점고에 나타난 나이든 기생 박옥초를 변사또 이예춘이 타박하는 장면이다. 박옥초의 표정연기가 돋보인다. 이 장면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중 변학도(이예춘)가 남원에 부임하여 기생들을 불러 모아 점고를 하는 씬이다. 맨 끝에 서 있던 기생 박옥초를 발견한 변학도가 몇 살이냐고 묻자 천연덕스럽게 “열여섯이옵니다”이라고 대답하며 교태를 부리다가, 타박을 받고 돌아서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가 하면, <민며느리>(최은희, 1965)에서는 무당으로 등장하여 강한 존재감을 발휘했고,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서는 곽규석과 함께 미국 유학을 다녀와 허세를 부리는 박사 부부로 출연하여 이 진지한 영화에서 단 한 번 웃음을 유발하는 씬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림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의 한 장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박사 부부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오른쪽부터 신성일, 백일섭. 박옥초와 곽규석이 출연했다. 드물게 허위의식에 가득 찬 상류층으로 등장했던 <장군의 수염>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박옥초가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들은 주로 식모, 동네 아낙, 무당 등 하층계급의 여성들이었다. 주인공이 아닌 여성, 그 중에서도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중년의 여성이 당시 한국영화 속에서 맡을 수 있었던 캐릭터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박옥초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이런 역할들로 채워갔다. 그럼에도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모으고 웃음을 유발하는 개성 있는 배우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코미디언이었다. (그림6)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의 한장면. 박옥초는 코미디영화 제작이 드물었던 197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톱스타 코미디언 이주일의 출세기를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박옥초가 출연했던 마지막 코미디영화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김수형 감독의 1981년작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7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박옥초는 심우섭, 이형표, 김화랑 등 주요 코미디 감독들의 코미디 영화 및 신상옥, 최은희, 이성구 감독 등의 다양한 장르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하는 씬 스틸러로 출연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로 기억될 만하다. 박옥초가 주로 조연배우로, 다작을 한 경우였다면 백금녀는 여성 코미디언으로 드물게 주연작을 가진 배우였다. 백금녀(1931-1995)는 김정분이라는 본명으로 부산 지역 악극단에서 데뷔한 뒤, 서울중앙방송 성우 제1기로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청춘극장과 황금좌 등의 악극단에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 후반 서영춘과 콤비를 이루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갈비씨와 뚱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서영춘과 백금녀는 쇼 무대와 라디오에서 큰 활약을 했다. 백금녀는 여기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도 진출, <공처가>(김수용, 1958)로 데뷔했다. 또, 1964년에는 박노식과 함께 악극 재건을 목표로 ‘11인 백합회’를 결성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중반에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유일하게 고소득 연예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데뷔작 <공처가>에서 백금녀는 장소팔과 부부로 등장하여 곰탕집을 운영하는 여걸 역할을 맡았다. 장소팔은 당시 악극단과 라디오 만담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 만담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장소팔의 ‘대화만담’ 파트너였던 고춘자나 고백화가 아니라, 백금녀가 상대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채로운 일이라 할 만하다. 아마도 백금녀가 ‘공처가’의 부인이라는 컨셉에 더 적합한 유형의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신인 배우 백금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캐스팅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림7)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장소팔의 등에 업힌 백금녀가 포스터 전면에 위치하여, 이 영화의 코믹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백금녀라는 예명은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김수용이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정분에게 ‘하얗고 돈 많은 여자’가 되라고 지어준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백금녀가 다시 주연 배우로 등장한 영화는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코미디언들을 주연으로 하는 영화들의 제작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초까지도 지속되었는데 여성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남자는 싫어> 단 한 편이었다. (그림8)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백금녀가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960년대 여성 코미디언을 단독 주연으로 삼아 제작된 유일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백금녀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여성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포스터, 시나리오, 개작 전의 원작 시놉시스, 백금녀-서영춘 만담 레코드 등이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어 대략적인 내용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림9) <서영춘과 백금녀, 폭소가요 코메듸- 갈비씨와 뚱순이의 애정행진곡> 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서영춘-백금녀 만담 레코드의 표지. 이들 콤비 코미디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스타 코미디언이자 중견 악극 배우였다. 이 같은 백금녀의 스타성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던 <남자는 싫어>는 기획부터 개작까지, 백금녀를 통한 웃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였다. 애초에는 서영춘과 백금녀 콤비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거꾸로 부부’를 차용한 ‘역할전도 부부 코미디’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검열에 의해 전면 개작을 하게 되면서 이 영화가 택한 두 번째 길은 백금녀를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언코미디가 다시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서 여성 코미디언 중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백금녀를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기획은 일견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개작된 <남자는 싫어>에서 백금녀가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금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이다. 즉, 백금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남성) 공동체에서 배제하면서 배타적인 웃음을 만드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백금녀가 자신의 스타 페르소나와 레퍼토리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웃음의 유발자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스타 코미디언으로서의 장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코미디언코미디의 특징이기도 하다. 첫 번째 방식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은 백금녀의 몸을 희화화하고 객체화하는 여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이들에 의해 가학적이고 공격적인 웃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웃음은 사회적 전형화typification의 하나로, 남성들만의 세계all-male-world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4) 따라서 그의 신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동안 백금녀 자신은 코믹 행위의 주체이거나 능동적인 주어가 아니다. 즉, 영화 속에서 백금녀는 유머의 주체로 기능하거나 유머를 적극적으로 주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함’으로 인하여,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비정상적인 신체’로 규정됨으로 인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객체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의 코미디성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범주에서이다. 즉, 기존의 퍼포먼스와 스타 페르소나를 활용한 코미디를 선보일 때, 백금녀는 능동적 주어로 활약한다. 성량이 풍부한 가수인 백금녀의 화려한 노래와 코믹한 춤 솜씨를 볼거리로 제시하는 장면, 서영춘과 함께 ‘거꾸로 부부’와 같은 남녀 역할 전도의 코미디를 선보이는 장면, 여성 레슬러로 활약하는 장면 등은 백금녀 코미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특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림10)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이 영화는 서영춘의 출세기를 다룬 것으로, 주연 서영춘(왼쪽)과 함께 스타 배우였던 김희갑(오른쪽)이 포스터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은 서영춘과 사랑하는 사이로 등장하는 강문, 그 아래 서영춘을 제압한 백금녀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출세해서 남주나>와 같이 서영춘과 함께 출연하는 코미디영화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가 만들어졌다. 첫 번째 범주에서 금순의 신체가 ‘비정상적’이므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운 ‘비체abject’로 여겨져 왔다면, 레슬링 장면 등을 통해서 금순의 신체는 ‘단련된 스포츠’의 신체이면서 동시에 ‘요절복통할 폭소’를 유발하는 슬랩스틱의 신체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특히 레슬링 복장을 하고 신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장면은 남성들이 부과한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깨뜨리는 것이며, 이는 훨씬 더 풍성하고 더 문제적인 신체의 가능성’들’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 5) 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백금녀의 ‘신체’는 배제와 폭력을 통해 규정되는 ‘대상’ 혹은 ‘비체’의 경계를 넘어, 주체됨을 통해 웃음을 만드는 ‘여성 코미디’의 신체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백금녀가 주연으로 등장한 마지막 영화는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이다. 이 영화는 화재로 전소한 고아원의 원장으로 등장한 백금녀는 김희갑과 함께 감동적인 고아원 재건 스토리를 그렸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와 <팔도강산>(배석인, 1967)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백금녀와 김희갑은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고아원 재건 비용을 마련한다. 백금녀는 한편으로는 김희갑의 코미디를 보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으로 사기꾼을 제압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11)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의 한장면 고아원 원장 역의 백금녀와 고아원 운영을 돕는 김주사 역의 김희갑. 이들은 고아원을 재건하기 위해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재건 자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전국을 여행하며 자녀들을 만나는 김희갑 부부가 출연하는 영화 <팔도강산>와 같은 계열의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밖에 영화에서 백금녀의 활발한 활약상은 다음과 같은 영화들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림12)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백금녀는 코미디영화가 아닌 여타 드라마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였다. (그림1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에서 백금녀는 ‘파이 던지기’라는 고전적 코미디의 한 장면을 차용한 레스토랑 신에 등장했다. (그림 14) <팔도노랭이>(심우섭, 1970) 포스터 <팔도노랭이>는 팔도의 구두쇠들을 사위로 삼은 김희갑의 이야기. 가운데 김희갑이 보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딸로 등장한 백금녀는 오른쪽 맨 아래. (그림15)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의 한 장면. 왼쪽 붉은 원피스 차림으로 춤추는 백금녀. 왼쪽 끝이 김희자, 백금녀의 오른쪽 옆이 양석천, 갓 쓴 할아버지 역의 김정훈, 그 오른쪽으로 검은 양복 차림의 허장강과 흰 재킷에 권색 바지 차림의 배삼룡이 보인다. 1) 코미디언코미디는 이미 잘 알려진 스타 코미디언의 개성과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워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들을 일컫는 장르 명칭으로, 미국의 코미디 영화 연구자 스티브 사이드만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Steve Seidman, Comedian Comedy-A Tradition in Hollywood Film, UMI Research Press, 1981 참고.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는 기존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의 스타성과 레퍼토리, 퍼포먼스 등을 전시하면서, 195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에 영향력 있는 장르로 형성되었다.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 형성과 전개에 대해서는 박선영, 「한국 코미디영화 형성과정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 참고. 2)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초창기~1976』, 영화진흥공사, 1977, 46~48쪽의 “국산극영화 내용별 제작실황”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이 수치는 멜로드라마가 거의 60-70%를 차지했던 상황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율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연예인고액납세”, 『중앙일보』 1966.8.5.3쪽; “늘어가는 스타의 자가용차”, 『서울신문』, 1966.9.17.5쪽; “납세액으로 본 인기 바로미터”, 『조선일보』 1967.3.26.5쪽. 백금녀는 1965년 연예인 고액납세자 중 가수 분야 3위로, 이미자, 박재란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 코메디언 4인(구봉서, 김희갑, 후라이보이, 백금녀) 중 한 사람이었다. 또, 1966년에도 가수 중 8위로 링크되어 고액납세자의 명단에 올랐다. 4) Helga Kotthoff,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2006, p.12. 5) Andrew Stott, Comedy, Routledge, 2005, p.104.
한국영화의 전설로만 내려오는 1955년의 <춘향전>(이규환)에서 이몽룡 역을 맡아 불시에 ‘영화계의 귀공자’로 떠오르며 장안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이민은 1950년대 또 다른 흥행작 <자유부인>(한형모)과 홍성기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미국화’된 한국 청년의 표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미국문화의 홍수 속에서 한국영화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는 영화의 스타일이나 배우들의 이미지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민은 특히 미국식 스타일과 미국문화를 전달하는 ‘스타’로 상징되었다. 그렇다면 할리우드 영화가 범람하던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 속에서 이민이 어떠한 과정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문화’를 보여주는 스타 이미지를 획득하게 되었는지 구술 1) 과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림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홍보용 스틸, 이몽룡 역의 이민과 성춘향 역의 조미령 영화 스타 이민의 탄생 192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이민(본명 이시중)은 영화 속 이미지를 통해 얻은 ‘귀공자’라는 호칭이 무색하리만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 앞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며 울며 보채던 어린 소년은 중학교에 입학한 후 대학진학을 위해 장기간의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상급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하여 “꼬박 3년 동안 광고 철판을 모아 팔아” 어렵게 여비를 마련한 그는 1940년 스무 살의 나이에 “무릎 기운 옷을 입은 거지꼴”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명문’ 우라와(浦和)고등학교의 입학시험에 강원도 산골 청년이 합격한 ‘사건’은 급기야는 신문 기사화되어 조선의 유지들로부터 집 한 채 값에 버금가는 장학금을 지원 받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숙환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교 예과를 거쳐 당시 졸업 후 가장 전망이 좋다는 광산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어느 날 길거리에서 강춘 감독의 눈에 띠면서 평탄할 줄만 알았던 미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춘 감독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16밀리 영화인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와 <연화>(강춘, 1949)에 출연하며 영화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한두 번의 외유로 그칠 줄 알았던 영화 일은 전쟁 때문에 지속되었다. 엘리트 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영화계의 그 누구보다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던 그는 한국전쟁 시기 피난지의 영화인들에게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며 필연적으로 영화계와 인연을 맺어나갔다. 영화 현장에서 도움이 되었던 서울대 출신이라는 타이틀과 배경은 활동하는 내내 그가 맡은 배역과 스타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2) <불멸의 밀사>(김영순, 1947) 신문광고 (그림 3) <연화>(강춘, 1949) 신문광고 한국전쟁 시기 그는 전장에서는 군영화 <화랑도>(강춘, 1951)의 주연을 맡았으며, 영화인들의 새로운 아지트가 되었던 피난지 대구에서는 환도 후 같이 작업을 하게 되는 전택이, 노경희 부부와 홍성기, 한형모 감독뿐만 아니라 평생 잊지 못할 가르침을 준 스승 이규환 감독을 만났다. <춘향전>(이규환, 1955)의 이몽룡 역을 맡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이때의 인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구술에서 그는 전쟁시기의 경험으로 <화랑도>의 촬영을 맡은 이학순에게는 미군부대 PX를 통해 현상 재료를 조달한 것을, <춘향전>의 감독 이규환에게는 대구 은성다방에서 차 대접을 한 것을 에피소드로 풀어놓기도 했다. (그림4) <화랑도>(강춘, 1951)의 신문광고 전쟁 후 제작된 <춘향전>의 대구 촬영현장에서도 본의 아니게 인맥을 총동원해 현장에 도움을 주었다. 산 속에서 진행된 촬영현장에 조명기를 설치하기 위해 이민은 광산학과의 인맥을 동원해 인근의 달성광산에서 전신주 17개를 설치해 전기를 조달했다. 그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촬영을 못했을 수도 있었던 이 일화에 대해 “망신은 당했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쳐 흥행으로까지 이어져 다행”인 일로 회고했다. 얼결에 발 디딘 당시의 한국영화계는 이렇듯 그가 배우뿐만 아니라 제작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림5) <춘향전>(이규환, 1955)의 경복궁 촬영 스틸, 방자 역의 전택이와 이도령 역의 이민 (그림6) 연출 중인 이규환 감독(가운데)과 전택이(좌), 유현목 조감독(우) 한편 춘향 역의 조미령을 비롯해 변사또 역의 이금룡, 방자 역의 전택이, 향단 역의 노경희 등 <춘향전>에 함께 출연한 대부분의 배우들은 식민지시기부터 영화와 무대에서 숙련된 연기를 보여준 노련한 연기자들이었다. 때문에 무대 경험도, 35밀리 영화 출연의 경험도 없던 그는 모든 역할의 대사를 철저하게 암기하고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촬영에 임했다. <춘향전>의 경험은 이후 카메라가 ‘타르르륵’ 돌아가면 극중의 인물이 될 수 있는 연기습관을 몸에 배게 하고, 영화와 연기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춘향전>은 기존의 관중을 끌어들이던 무대극들을 쓰러뜨리고, “귀신이 붙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영화의 붐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민 개인에게도 영화배우라는 정체성을 깨우치게 한 중요한 작품이 된 것이다. (그림 7) <춘향전>의 대구 촬영 현장 스틸, 이민(맨 뒷줄 왼쪽), 조미령, 석금성, 이금룡, 이규환 감독(위에서부터 셋째 줄 가운데)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춘향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그는 또 한편의 성공작인 <자유부인>(한형모)에 출연했다. <춘향전>에 이은 <자유부인>의 흥행 성공, 무대예술의 쇠퇴 등에 힘입어 한국영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손>(1954)부터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운 한형모 감독은 당대 한국사회의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에 할리우드 스타일을 매치해 ‘양화’와 경쟁할 수 있는 ‘방화’를 탄생시켰다. 당시 파격적인 신인의 기용(김정림)과 더불어 화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전 해 폭발적인 흥행으로 한국영화의 재건을 알렸던 <춘향전>에서 이몽룡으로 분했던 배우 이민을 주인공 김정림에 춤바람을 불어넣는 대학생 춘호 역으로 캐스팅 한 것이었다. (그림 8)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주인공 오선영(김정림)에게 춘호(이민)가 춤을 가르치는 장면 유려한 춤 솜씨를 자랑하는 “이민이 아니면 안 될 영화”였다는 이야기는 “학생 시절 책으로 배운 춤과 전쟁 시기 대구의 미군부대와 공군 댄스홀에서 춤을 춰봤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춘향전>의 이몽룡으로 쌓아올린 이미지에 손상이 날 법 한데도 화려한 춤 실력을 뽐내며 유부녀를 유혹하는 건들건들한 바람둥이 청년의 역할을 맡은 것은 아마도 주연 배우보다 높게 책정된 출연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역할에 대한 도전의식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문화가 대중의 일상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던 전쟁 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 풍자한 <자유부인>에서 대학생 춘호는 특히나 미국문화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젊은이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춘호 역에 이몽룡을 맡았던 이민이 캐스팅된 것에 세간의 비판과 비난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기 변신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부인>의 춘호는 이민의 프로필에서 <춘향전>의 이몽룡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역할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이 역할 이후 이민은 미국화된 한국 청년의 전형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미국과 미국문화를 상징하고 동경하게끔 하는 스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림 9) <자유부인>의 댄스홀 장면의 현장 스틸, 뒷줄 가운데 이민, 아랫줄 왼쪽부터 김동원, 김정림, 한형모 감독, 한 사람 건너 노경희, 안나영. 이민은 구술을 통해 사진에서 보이는 크레인을 댄스홀 장면을 위해 제작했다고 증언했다. 미국영화의 공세와 영화 스타 시대의 도래 1950년대 할리우드영화를 비롯한 미국 대중문화의 공세는 한국영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전쟁 전에 비해 한국 내 개봉 시차가 줄어들고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영화의 인기는 더욱 더 높아져갔다. 여기에 미국에서 들어온 소비재 또한 미국영화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망의 대상이자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꿈으로 남아있는 미국적 생활양식과 소비는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스타의 모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모방은 원용진의 표현처럼 “영어로 말하기, 다방에서 커피 마시기, 할리우드 영화 보기 등은 단순히 언어, 물질,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드러내는 이름표 역할을 했” 2) 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방을 가능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잡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문화 열풍”으로 영화잡지뿐만 아니라 여성지에도 영화소개와 더불어 미국 여배우의 이미지, 사생활, 섹슈얼리티 등이 전시되고 상품화 되었다. 3) 이러한 모방 혹은 “이름표 역할”은 할리우드영화와 경쟁해야만 하는 한국영화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 1950년대 제작 편수가 많지 않은 한국영화에서 배우를 스타로서 ‘추대’해주는 방식이 할리우드 스타의 모방이었고 이는 주로 잡지의 화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영화잡지에서 배우를 지칭하는 방식은 “한국의 ◯◯◯”였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김지미”, “한국의 잉그릿드 버그만=최은희”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모방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한국배우의 이미지를 상승시키는 데 있어서 유용했을 것이다. (그림10) 『스크린』 1957년 2월호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최은희 (그림11) 『현대영화』 1958년 1월호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조미령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영화와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행계의 재편으로 무대 출신의 스타 배우들이 급격히 영화로 이동한 것은 한국영화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기력과 스타성이 담보되는 배우들의 합류는 지방흥행업자들의 투자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영화 제작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국산영화 면세 조치’가 영화를 흥행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매체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이에 수반되는 배우들의 유입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급속한 성장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춘향전>과 <자유부인>으로 한국영화가 흥행 경쟁력을 인정받은 1950년대 중후반은 바야흐로 배우가 흥행 시장에서 중요한 카드로 기능하는 ‘영화 스타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무대 출신의 배우들은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과 숙련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영화에서 각자의 이미지에 맞는 연기 스타일을 빠른 속도로 구축해나갔다. 스타 이미지는 1950~1960년대 내내 겹치기 출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한국영화산업 내 인적 규모에 대비해 대량의 영화가 제작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대 출신이 아닌 영화로 데뷔한 배우들 역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연기 경험과 수련의 부족으로 이들은 시대물보다는 주로 현대물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전적인 이미지보다는 외형적인 세련됨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야 했다. 대표적으로 김지미, 최지희, 김의향 등의 여성배우들은 아프레걸 이미지로, 남궁원, 윤일봉, 김석훈 등의 남성배우들은 수트 차림의 엘리트 이미지로 멜로드라마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아직 다양한 장르 영화가 등장하기 전이었던 1950년대 중‧후반 흥행작을 내놓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이 그려지는 한국영화의 이면에는 이렇듯 배우들의 스타 이미지 찾기의 과정 또한 존재했다. (그림12) 잡지 『영화세계』 1956년 1월호에 실린 이민 화보. 왼쪽 페이지의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실린 모습이 흥미롭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이민은 미국을 경험한 지식인 엘리트 혹은 미국문화의 수혜를 받은 젊은이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자유부인> 이후 이민이 출연한 다양한 영화들에서 그는 ‘트렌치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든 ‘가장 최신식 스타일’을 한 도시적인 청년의 이미지를 전달했다. <애인>(1956), <실락원의 별>(1957)을 비롯한 1950년대 전성기 홍성기의 멜로드라마뿐만 아니라 <촌색씨>(박영환, 1958), <모정>(양주남, 1958), <남성 대 여성>(한형모, 1959),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1959),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관되게 미국화된 엘리트 남성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전성기로 기록할 수 있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작품목록을 살펴보면 외려 <춘향전>의 이몽룡이라는 역할이 생경해보일 정도로 그는 현대물에 최적화된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민이 전달한 미국의 이미지 그 중에서도 <자유부인>의 춘호는 미국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당시 젊은 세대의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이정표가 되었다. 블루종과 비니를 착용하고 사진기를 손에 든 춘호는 ‘굿모닝’과 ‘굿나잇’ 같은 인사말을 비롯해 ‘마담’, ‘익스큐즈 미’, ‘아이 러브 유’ 등 영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서양음악에 맞춰 댄스를 추며 위스키를 즐긴다. 키스하는 모습을 들켜도 “그저 프렌드인 여성과 뭐 키스 좀 했다고 해서 뭐가 상관” 있느냐고 반문하고 상대가 유부녀일지라도 “사랑하는 건 제 자유”라고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춘호는 전쟁 후 가치관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감정에 솔직하고 전통적인 규범에 반항하는 청년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입체적으로 완성된 <자유부인>의 춘호는 이후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그림13) <자유부인>에서 춘호가 오선영의 사진을 찍어주는 장면 (그림14) <남성 대 여성>(한형모, 1959)의 한 장면. 이민은 극중에서 잡지사 편집장 역할을 맡았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를 착용하고 카메라를 손에 든 이민의 이미지는 미국영화 스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춘호라는 캐릭터로 극단화된 ‘미국적인 연애 방식’은 이민의 스타 이미지에도 꾸준히 적용되어 ‘아프레 역할’을 대표하는 남성배우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이미지 캐스팅을 바탕으로 이민은 약혼자(<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나 아내(<돌아온 사나이>)의 굴곡진 과거를 고뇌의 과정 없이 ‘쿨’하게 인정하거나 하룻밤 연을 맺은 여성에게 명함을 건네며 웃으며 헤어지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모정>)으로 그려졌다. 여성 캐릭터들이 규범에 얽혀 감정과 상황에서 극단의 상황에 왕왕 처하는 것에 비해 이민의 캐릭터들은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구애(<촌색씨>, <비오는 날의 오후 세 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림15)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1959)에서 명철(이민)과 영숙(최은희)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이민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다. 또한 ‘미국행’을 앞두고 있는 춘호의 상황설정은 앞서 설명한 그의 이질적인 행동들을 설득하는 배경이 된다. ‘미국행’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춘호라는 캐릭터는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비현실적인 상황의 드라마적 첨가나 갈등 국면의 요소로 활용된다. <자유부인> 이후 그가 맡은 역할들의 다양한 ‘미국행’은 배우 이민의 스타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행’ 혹은 ‘미국에서의 귀환’은 <자유부인>뿐만 아니라 <촌색씨>나 <비오는 날의 오후3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극의 갈등 상황을 유발하거나 해결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건의 내부에서 얽히고설키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관계에 파문을 일으키는 외부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문화를 동경하고 선망하지만 우리의 내부로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 ‘양가적인 감정’ 4) 이 이민이 맡은 역할들을 통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비 오는 날의 오후 세 시>에서 그가 맡은 미국 교포 출신의 종군기자 헨리 장은 <자유부인>의 춘호와 더불어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이민이 보여주는 스타 이미지가 집대성되어 있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16)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에서 이민은 미국 교포 출신의 종군기자 헨리 장 역할을 맡았다. 그는 극중에서 군복 차림에 사진기를 소지하고 지프차를 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림17) 헨리 장은 사진을 찍으려 방문한 탑골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수미(김지미)를 숙소 아래층에 있는 클럽에 데려와 밴드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스타 이민에게는 아이로니컬하게도 195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산업의 규모가 성장하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오히려 한정되기 시작했다. 1959년까지만 해도 그가 가진 스타성으로 출연료와 작품 편수에 있어 톱스타로 분류되긴 했지만 다양한 배우들의 등장으로 경쟁력에서 뒤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착된 이미지는 오히려 그에게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가 영화 제작에 직접 나선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제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흐르는 별>(김묵, 1958),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1959),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1959) 등을 연달아 제작한 그는 흥행과 운영의 실패로 2년 여 간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재기를 위해 다작을 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 나가는가 했지만 <춘향전>과 <자유부인>처럼 대중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사업에 매진하며 영화에서 멀어졌고, 대중에게도 이민은 과거의 스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1950년대 한국영화의 성장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시대를 투영하는 이미지로 여전히 존재한다. 1) 공영민, 「이민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사 구술총서 02 :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1』, 이채, 2005 ; 이순진, 「이민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2011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 대구 경북 지역 영화사』, 한국영상자료원, 2011. 2) 원용진, 「한국 대중문화, 미국과 함께 혹은 따로」, 김덕호‧원용진, 『아메리카나이제이션: 해방 이후 한국에서의 미국화』, 푸른역사, 2008, 173쪽. 3) 강소연, 「1950년대 여성잡지에 표상된 미국문화와 여성담론」, 상허학회, 『1950년대 미디어와 미국표상』, 깊은샘, 2006, 116~117쪽 참조. 4) <비오는 날의 오후3시>가 갖는 미국에 대한 양가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조영정, 「미국영화에 대한 양가적 태도 :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를 중심으로」, 『매혹과 혼돈의 시대』, 도서출판소도, 2003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