툼스톤
- 감독
- 조지 P. 코스마토스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커트 러셀, 마이클 빈, 발 킬머, 빌리 밥 손튼, 빌리 제인, 샘 엘리어트, 빌 팩스톤, 파워스 부스, 찰톤 헤스톤, 제이슨 프리슬리, 존 태니, 스테판 랭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는 앞서 다룬 < 데이 워 익스펜더블 >(1945), < 도망자 >(1946)와 함께 ‘어둠의 3부작(dark trilogy)’이라고 불린다. 물론 1940년대 후반의 할리우드에서, 어둠은 존 포드의 것만은 아니었다. < 시민 케인 >(오슨 웰스, 1941)과 < 말타의 매 >(존 휴스턴, 1941)에서 시작된 필름누아르의 유행은 1940년대의 할리우드를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 불안정하고 광적인 인물, 뒷골목과 그림자의 불길한 형상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2차대전을 거치면서 어둠은 필름누아르의 장르적 관습에 그치지 않고, 할리우드 전반에 스며들었다. <황야의 결투>가 등장한 해에 그토록 낙천적이던 프랭크 카프라는 < 멋진 인생 >에서 유례없이 우울한 정조를 빚어냈으며, 윌리엄 와일러는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에서 삶의 바닥으로 추락한 귀향 병사들의 어두운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 빅 슬립 >(하워드 혹스), < 길다 >(찰스 비도르) 등 필름누아르의 명편들도 이 해에 쏟아져 나왔다. 2차대전 직후의 혼란기, 그리고 필름누아르의 전성기에 어둠의 3부작이 등장한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어둠의 3부작이라는 명명이 유용한지는 잘 모르겠다. 거의 모든 존 포드 영화에서 어둠과 광기가 내재적이라는 점을 논외로 한다 해도, < 황야의 결투 >를 다른 시기의 포드 영화들 예컨대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분노의 포도 >(1940), <일곱 여인>(1963) 등에 비해 더 어둡다고 말할 수는 없다. 존 포드 영화를 말하는 데 장르 어프로치가 종종 무력해지는 것처럼 시기별 구분법 역시 개별 작품의 고유한 활력에 둔감해지게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황야의 결투>는 그저 또 다른 존 포드 영화일 뿐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전직 보안관 와이어트 업(헨리 폰다)은 세 형제와 함께 소 떼를 이끌고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툼스톤에 다른 세 명이 휴식을 취하러 간 사이에, 홀로 소 떼를 지키던 막내 제임스는 살해당하고 소 떼는 도둑맞는다. 복수를 위해 툼스톤 보안관을 자청한 와이어트는 이 마을이 도박장을 운영하는 동부 의사 출신의 닥 할러데이(빅터 머추어)와 난폭한 목장주 클랜튼 일가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 클레멘타인이 옛 연인 닥 할러데이를 찾아오면서, 클레멘타인에게 첫눈에 반한 와이어트, 클레멘타인을 거부하는 닥, 닥을 좋아하는 술집 가수 치와와 사이에 긴장이 흐른다. 우연한 계기로 범인이 클랜튼 일가임이 드러나고, 와이어트와 닥은 클랜튼 일가와 결투를 벌인다. < 황야의 결투 >의 러닝타임은 93분이다. 첫 15분간 막내 제임스의 죽음과 소 떼 절도 사건 이후에 와이어트 업이 보안관을 자청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이후 50여 분간 살인과 절도 사건은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마치 와이어트 업 자신이 그 사건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복수 이야기에서 러닝타임의 반 이상 동안 복수 모티브가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는 이상한 복수 이야기다. 대중영화에서 복수는 편리한 장치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존재(가족, 연인, 친구)를 억울하게 죽게만 하면 이야기꾼에게는 많은 것들이 거저 주어진다. 우선 슬픔과 분노(상실감과 복수심)라는 감염력 높은 정념이 자동적으로 마련된다. 서사의 행로도 분명해진다. 이제 이야기는 살인자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에 몰두하면 될 것이다. 이야기의 층을 두텁게 할 수 있는 사적 복수와 법 집행 사이의 도덕적 딜레마, 복수와 용서 사이의 윤리적 딜레마도 확보된다. 무능한 혹은 유능한 법 집행자들의 방해 혹은 협력의 서브플롯은 옵션이다. 요컨대 복수의 정념이라는 출발점, 후던잇(WHODUNIT)의 플롯, 딜레마의 해결이라는 종결 그리고 몇 가지 옵션들로 이뤄진 복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더없이 유용한 패키지 서사다. <역마차> <수색자> <황야의 결투>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복수 모티브는 세 번 등장한다. < 역마차 >(1939), < 수색자 >(1956) 그리고 < 황야의 결투 >에서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편(11회)에서 언급했듯 포드 서부극에서 공동선의 모티브와 사적 복수의 모티브는 임의적으로 일치한다. 복수의 대상이 하필이면 공동악인 것이다. 존 포드는 그 일치의 임의성을 감추지 않는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와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즈는 공동체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복수를 완수한 뒤 공동체를 떠난다. <황야의 결투>의 이상한 점은 와이어트 업이 사적 복수에도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이 도착하자 와이어트는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복수를 잊어버린 것 같다. 그는 도박하고, 먹고, 이발하고, 빈둥거리다 클레멘타인과 춤춘다. 그 사이 와이어트가 행한 공동선은 클랜튼 일가에게 붙들려 있던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를 극장에다 데려다 놓은 일뿐이다. 그렇게 50분이 지난 뒤, 죽은 동생의 목걸이가 우연히 발견되자 와이어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살인자-도둑을 쫓아 황야의 결투를 벌인다. 존 포드는 복수 이야기의 유용성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유용성을 조롱하듯 복수의 정념도 범인 찾기의 퍼즐 풀기도 딜레마의 해결도 무시해버린다. 대신 복수 모티브를 머리와 꼬리에 배치하면서 몸통은 삼각관계 연애담 중심의 에피소드들로만 채워버린다. 물론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 전개는 거의 모든 포드 영화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본론과 여담이 긴장된 매듭의 연쇄를 이루지 않고 이처럼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례는 다른 작품에선 찾기 힘들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황야의 결투 >의 서사는 실패한 서사다. 이런 시나리오를 제출한 학생은 낙제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이 실패가 존 포드의 실패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유능하지만 독선적인 프로듀서 대릴 자눅은 러프컷을 본 뒤 군더더기와 유머가 과도하다고 판단해 직접 30분가량 잘라냈다고 한다. 와이어트가 클레멘타인의 볼에 키스하는 마지막 시퀀스의 한 쇼트도 포드가 찍지 않은 자눅의 작품이다. 잘려나가 사라진 장면들이 되돌아온 또 다른 영화를 상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 황야의 결투 >의 사라진 장면들은 정말 궁금하다. 그 장면들이 되돌아온다고 이 영화가 더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대릴 자눅은 포드도 인정하는 뛰어난 편집감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전후의 포드는 자신의 제작사를 차리면서 이전보다 더욱 깊이 개인적인 비전과 비관습적인 표현에 이끌렸다. 자눅은 포드가 주류영화를 만들 때 최소한의 균형을 잡는 데 조력자 노릇을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눅이 제거한 ‘과도한’ 장면들이 돌아오면 이 영화가 도리어 더 크게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토바코 로드> 나는 더 과격하고 더 맹렬한 실패의 버전을 보고 싶은 것 같다. 실패작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진정한 예술가의 특권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잡은 균형보다 실패를 감수한 절박한 불균형이 때로 우리를 더 깊이 움직인다. 이런 말들을 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포드의 < 토바코 로드 Tobacco Road >(1941)이다. 포드가 생애 최고작들을 빚어내던 영예의 시기에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온 이 게으르고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코미디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터무니없어 머리를 멍하게 만든다. 이런 막강한 실패작은 평자에겐 최고의 난제에 속하므로 아마도 이 연재의 마지막쯤에 가서야 겨우 말하게 될지 모르겠다. < 황야의 결투 >로 돌아오자. 우리의 관심사는 물론 실패한 서사를 성립시키는 포드의 방식이다. 내가 접한 <황야의 결투> 논평들은 대개 서사의 복합성, 시적이고 음악적인 영상에 찬사를 보낸다. 예컨대 질베르토 페레스는 “이완되고 분산적이며 에피소드 중심적인 따라서 액션보다 캐릭터와 상황에 몰두하는 포드의 스타일은 진정으로 여성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두 남녀의 춤이 결투보다 더욱 중요하며 더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고 썼다.(「The Material Ghost: Films and Their Medium」) 이 영화에 완전히 빠져 포드의 열광자가 된 린지 앤더슨은 “(서부극의) 전통적 분위기와 전통적 주제를 다루면서 특별한 온기와 특별한 친숙함을 빚어낸다... 모호하면서도 심원한 무언가, 그러니까 일종의 도덕적 시학(moral poetry)로부터 이 영화의 마술이 태어난다.”고 말했다.(「About John Ford」) 토마스 샤츠는 또한 “웨스턴 장르의 친 사회적 가치와 이상이 극단적으로 단순한 그러나 영원히 기억될만한 이미지와 결합했다”(「할리우드 장르」)고 평했다. 동의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표현들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평자들에게 앞서 말한 실패가 보이지 않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단 두 대목만 말하려 한다. 정리된 줄거리에는 결코 등장하지 않을, 그러나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만취한 채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전문배우 쏜다이크다. 포드의 단골 캐릭터인 주정뱅이 철학자의 변주에 해당하는 이 인물은 와이어트와 닥의 첫 대면에서의 긴장이 가까스로 수습된 직후 등장해 두 영웅을 내면적으로 화해시키고, 클랜튼 일가의 무지와 무례를 폭로케 하며,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대사로 닥의 심경과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는 등, 미묘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 그저 칼 한 자루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끝장낼 수 있는데.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결국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쏜다이크가 공연 다음 날 떠나는 시퀀스에 있다. 주민들과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작별인사를 나눈 쏜다이크는 마지막으로 한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전날 밤부터 쏜다이크와 동행했고 이 장면 이후로 다시 등장하지 않는 노인은 이름도 정체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 작별 장면에서 그의 표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다.(#1, #2) #1 #2 쏜다이크는 역시 셰익스피어 풍의 대사로 노인에게 말한다. “진실한 영혼은 서로에게 충절과 불타는 우정을 요구하노라. 안녕히... 안녕히... 어린 왕자여.”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가 분한 이 노인의 슬픈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주정뱅이 배우가 그를 ‘어린 왕자’라고 부르며 손을 맞잡는 장면의 온기를 잊을 수가 없다. 영화의 쇼트란 아니 영화란 기묘한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이 복수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제임스 피살 장면(#3)을 기억하지 않고, 이름도 없는 단역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주인공 형제의 억울하고 비극적인 죽음보다 내력도 모르는 주변 인물의 사소한 이별 장면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가. #3 영화는 사건을 다루지 못한다. 그렇게 보이는 영화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가 가장 오랫동안 빈번히 애용해온 사건인 죽음은 너무도 많이 사용된 나머지 그것이 등장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어떤 패턴에, < 황야의 결투 >에서라면 복수 이야기의 패턴에, 편입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착한 형제가 살해당하고 나면 주인공에게 할 일이 달리 뭐가 남겠는가. 갖가지 서브플롯을 첨가해 빤한 복수의 결말에 이르는 여정을 복잡하고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소위 유능한 이야기꾼이 하는 일이다. 물론 존 포드가 그런 부류의 이야기꾼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황야의 결투>에서 포드가 택한 것은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영화가 그것을 잊어버린다. 이름없는 노인의 슬픈 표정은 리버스 쇼트인데도, 리버스 숏에 선행하는 쇼트는 그를 바라보는 쏜다이크의 시점 쇼트가 아니라, 두 사람을 잡은 투 쇼트이다. 노인의 표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인칭의 시선이며 영화의 시선이다. 이 사소한 쇼트는 살인 사건조차 잊어버리겠다고 작정하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는 위대한 결단의 쇼트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와이어트 업도 사건을 잊어버린다. 보안관이 되고 나서 그가 한 첫 일 중 하나는 도박이다. 클레멘타인이 도착한 뒤로는 오직 그녀에게 다가서는 일만이 그의 관심사가 된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유머러스하고 사랑스런 장면 가운데 하나가 등장한다. 서투르게 멋 낸 시골뜨기 모양새의 이발을 하고 향수까지 뿌리고 난 뒤, 그는 사무실 앞 현관 기둥에 발을 올리고 발 바꾸기 놀이를 한다.(#4) #4 영락없는 동네 건달과도 같은 이 행위의 숨은 동기가 클레멘타인을 기다리는 것임은 물론 짐작할 수 있다. 다음 장면에서 모두가 칭송하는, 그리고 서부극 역사의 전설이 된 두 남녀의 아름다운 행진과 왈츠가 이어진다. 하지만 그녀가 닥의 여자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 발 바꾸기 놀이는 구애의 준비도 아니다. 이 장면의 요점은 그의 행위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한심한 놀이는, 이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고 말한다. 이 순간은 복수의 목적이 망각된 시간 속에서도, 사소한 에피소드조차 멈춰버린 이야기의 완전한 진공상태인 것이다.(이 장면은 헨리 폰다가 촬영 휴식 시간에 혼자서 발 바꾸기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포드가 즉석에서 만들어냈다고 한다.) 포드에게 부과된 서부극 만들기라는 직업적 책무, 혹은 서부사나이에게 부과된 복수 혹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윤리적 책무 모두로부터 완전한 자유의 순간. 이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복수 이야기에서 출발한 포드가 왜 실패의 서사를 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포드가 말하지 않은 그의 진정한 소망은 아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위의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그런 서부극이었을 것이다. 그 소망은 포드 스스로 “내가 만들고 싶었던 서부극에 가장 가깝다”라고 말한, 또한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토록 사치스런 B급 서부극’이라고 부른 < 웨건 마스터 >(1950)에서 비로소 실현되었을 것이다. 대릴 자눅이 현명하게 제거한 장면들이 돌아온다면 그래서 더욱 무모한 실패의 서사가 < 황야의 결투 >에서 실현되었다면, 포드가 가장 사랑한 자신의 웨스턴 명단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계속)
오래 쉬고 다시 시작한다. 9월까지 ‘영예의 시대’를 중심으로 존 포드라는 거대한 세계의 일단을 둘러보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존 포드 영화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여정을 계속하려 한다. 첫 번째 영화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The Sun Shines Bright >(1953)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포드는 이 영화를 < 젊은 날의 링컨 > < 웨건 마스터 > < 도망자 > 등과 함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감독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는 영화는 가장 좋은 영화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그의 개인적인 영화라는 뜻일 것이다.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서 작업했고 성공했지만 존 포드는 개인적인 영화 만들기의 시도를 멈춘 적이 없다. <태양은 밝게 빛난다>는 그 시도가 낳은 한 정점이다. 1. 1900년대 초, 미국 켄터키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죽은 창녀를 실은 영구 마차가 막 출발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마차에는 동료 창녀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마차는 마을 초입에서부터 지방판사 선거가 진행 중인 마을 회관을 지나 장례가 치러질 교회에 이를 것이다. 영구 마차의 등장은 마을 전체를 긴장하게 만든다. 죽은 창녀는 전직 남군 장성 페어필드의 아들과의 사이에 오래전 딸을 낳았고, 그 아들은 불명예스럽게 죽었으며, 레이크 박사에게 입양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딸 루시는 최근에야 자신의 출생 비화를 알게 되었다. 프리스트 판사와 몇몇 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근엄한 페어필드 장군은 루시가 자신의 손녀임을 부인해왔다. 병든 창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동료 창녀들은 전날 밤 프리스트 판사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부탁했다. 재선을 노리는 프리스트 판사는 이 부탁을 들어주는 순간 자신이 낙선될 것임을 알고 있다. 이미 그는 술꾼으로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막강한 부인회가 창녀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려 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을 미룬다. 창녀들의 영구 마차는 서서히 마을 중심부로 다가온다. 길 가에 서 있던 프리스트 판사는 말없이 장례 마차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부인들은 질겁하지만 몸집 큰 한 부인도 무리에서 빠져나와 판사 뒤를 따라 조용히 걷는다. 늙은 의사와 목수도, 식료품점 주인도, 이름 없는 노인들 몇몇도 그들 뒤를 따라 묵묵히 걷는다. 선거를 치르느라 떠들썩하던 마을 회관 앞에 마차가 이르자 모두 침묵에 빠진다. 그를 지켜보던 죽은 창녀의 딸 루시는 마차에 올라타 창녀들 옆에 앉고, 그녀를 사랑하는 방탕하지만 순정적인 청년 애쉬비도 그 뒤를 따른다. 우드포드 노인은 집 앞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집으로 들어간다. 고요한 장례 행렬은 그렇게 교회 앞에 도착한다. 이 영화를 본다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발자국 소리와 장례 행렬의 느린 움직임 외에는 대사도 배경음악도 없이 7분 가까이 지속되는 이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흔든다. 이 장면 앞에서 나는 넋을 잃고 눈앞이 흐려져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자문해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이 장면을 그토록 감동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장례식 행렬 2. 우선 이 장면에서 장례행렬에 가담하는 인물들의 결단 자체가 주는 감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 도덕이 아니라 윤리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선 얼마간의 우회가 필요할 것 같다. 여기서 도덕은 공동선의 규범과 실천의 영역을 지칭하는 단어로 한정해 사용한다. 도덕은 주체의 외부에서 주체 쪽으로 요구되는 준칙이다. 반면 윤리는 공동선이라는 공리적 판단이나 효용성과는 무관하게 주체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자기 명령을 지칭한다. 존 포드가 그 장르의 대부처럼 여겨지는 서부극은 가장 도덕적인 장르로 간주되어 왔다. 공동체의 악과 그에 맞선 도덕적 영웅인 서부사나이의 대결 이야기.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는 도덕적 대립 구도가 없다. 이 공동체에서 제거되어야 할 악은 특정한 실체로 등장하지 않으며, 한 에피소드의 소재인 인종주의 외에는 특정한 악덕도 지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관념을 명확히 갖고 있는 주체는 부인회이며, 그들은 술과 창녀촌을 공동악이라고 생각한다. 프리스트 판사는 기묘한 존재다. 그는 판사이고 정치인이며, 전통을 중시하는 남군의 장교 출신으로 군인의 정체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판사, 정치인, 군인은 제도가 세속적 도덕의 실행을 위탁한 직업들이다.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을 상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이름(Priest)이 뜻하는 성직자다. 물론 그는 교회에 복무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직자가 아니며 성직자 같은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수준 즉 종교적 수준의 선택이 요구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 상황이 그를 다른 의미의 성직자로 간주하게 만든다. 창녀들이, 어떤 목사도 자기 앞길을 망칠 일을 하지 않을 게 뻔해, ‘친절한’ 프리스트를 찾아와 장례식 추도사를 요청했을 때, 판사, 정치인, 군인으로서의 프리스트는 이 난제에 답할 수 없다. 그의 난제가 걸려 있는 영역은 공동선의 도덕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했던 창녀는 이미 죽었고, 다른 창녀들은 조만간 추방될 것이며 프리스트는 부인회의 창녀 추방에 반대한 적이 없다. 곧 추방될 창녀들이 주재하는 장례 참여 여부라는 극히 사소한 행위는 공동선과 무관할 것이다. 그는 또한 직업적 성직자가 아니므로 교회 제도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교리 해석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는 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없다. 달리 말하면 그의 행위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보증이 그에게는 없다. 그를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대답 없는 신의 뜻을 어떤 보증도 없이 따른다고 간주될 때이다. 여기서 대답 없는 신의 뜻과 윤리의 자기 명령은 정확히 동격이다. 두 부류의 종교적 인간이 있을 수 있다. A는 이렇게 말한다. ‘신의 뜻이 이러하다. 그러므로 나는 신의 그러한 뜻을 따른다.’ B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의 뜻을 모른다... 나는 신의 뜻을 따른다.’ 프리스트는 후자에 속한다. 윤리의 자기 명령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진다. ‘나는 이것을 해야하는 다른 이유를 모른다... 다만 나는 그것을 해야하므로 한다.’ 프리스트의 선택을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 행위의 동기를 어디에도 귀속시킬 수 없을 때, B의 경우라면 그 동기를 귀속시켜야 할 신의 뜻이 텅 비어있을 때, 그것은 온전히 자기 명령이 되며 우리는 그 행위를 윤리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정의를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교통사고의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도 크게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지금 질문에 정확히 답하고 있는 게 아니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그래야 하니까 그랬다’라는 건 대답이 아니다. 자기 명령으로서의 윤리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동기, 이유, 원인의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조리 있게 대답하는 사람보다 대답을 찾지 못해 난처해 하는 사람이 더 윤리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우리가 윤리의 중핵이 온전히 자기 명령에 있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고전적 서부극이 도덕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서사의 차원이고, 서부사나이는 오히려 윤리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의 준칙은 ‘남자는 할 일을 한다’는 것이고 일이 끝나면 말없이 뒤돌아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의 과묵함은 단순한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결단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윤리적 차원에 있음을 방증하는 표지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이 단순하고 흔해빠진 표현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다. “정언명법은 더 이상의 어떤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실천이성비판」) 가언명법은 반대로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칸트는 윤리의 자기명령이라는 차원을 가혹할 만큼 엄격하게 정식화한다. 윤리(도덕적 가치)는 정언명법에 따라 “오직 의무로부터” 행위할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은 공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념을, 심지어 우리가 보통 선하다고 간주하는 감정인 연민과 동정심마저 배제한다. 만일 아이를 구한 의로운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이므로’, 혹은 ‘아이가 불쌍해서’라고 대답한다 해도 칸트는 그 행위에 ‘도덕적 가치’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에게 윤리는 ‘순수 형식’이다. 칸트의 정언명법으로서의 윤리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많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정언명법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실은 사회적 규범이 내면화된 초자아가 아닌가(프로이트). 순수 형식이 어떻게 행위를 촉발하는 동기라는 질료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욕망 혹은 충동의 문제가 아닌가(라캉). 칸트의 의무는 결국 선험적으로 식별될 수 있는 악을 전제한 뒤 그것의 반대편에 자리잡은 자명한 규범들의 체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바디우). 이런 질문들에 답하려는 치열한 사유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 사유가 진리의 윤리학으로 귀결되지 않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진리(혹은 실재, 사건)에의 충실성이 윤리라면, 윤리라는 영역이 따로 설정될 필요가 있을까. 달리 말해, 진리가 총체적이거나 규범적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사건적(혹은 위반적)이며 열린 지평으로 개시되는 것이라면 윤리의 내용은 이미 진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또한 정신분석학자들의 논변 혹은 진리의 윤리학이 흔히 인용하는, 자기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의 사례에서처럼 상징계의 의미가 완전히 소진되고 실재와의 대면이라는 무시무시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윤리가 드러난다면, 일상적 영위에서 윤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반문은 이론적인 수준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에서 프리스트의 행위를 진리-사건-실재의 영역에 위치 짓지 않고도 윤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방금 구운 빵을 대접하는 빵집 주인의 행위는 진리나 미의 추구와 무관한 지극히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된 윤리적 행위가 아닌가. 혹은 TV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곧 요양원으로 보내져야 하는 치매 노인을 콜라텍으로 데리고 가서 마지막 춤을 추게 도와주는 창만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우리를 종종 감동케 하는 건 그 순간의 충만함 외에는 어떤 효용도 어떤 깊이도 없는, 카버 소설의 제목대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런 단순한 선의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프리스트와 빵집 주인과 창만에게 행위의 동기를 듣지 못했고, 그들의 행위를 자기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물론 말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정념적 동기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그 행위가 그것을 목격하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도 일정한 기쁨과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을 그 텍스트들은 감추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칸트의 정언명법에 동의한다 해도, 일체의 정념 배제라는 차원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어려우며, 윤리와 정념의 관계가 매우 엄격한 사유를 요구하는 까다로운 의제임을 뜻한다.(이것은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칸트의 윤리를 재해석하려는 「실재의 윤리」(알렌카 주판치치)의 중심 의제이기도 하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와 연관 짓는 것은 사실상 엄격한 사유로부터 퇴각하는 것이다. 윤리에서 선의의 정념을 배제하지 않으며 진리-사건-질재의 영역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지향한다고 가정되는 진, 선, 미의 영역을 어느 정도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선을 ‘(진리의) 깊이도 (공동선의) 효용도 없는 자기충족인 선의’라는 선험적인 명제로 받아들여 이것을 윤리의 내용 가운데 하나로 삼는 절충적인 사고이다. 이것은 사실상 진리의 윤리학과 (공동선이 아닌) 선의 윤리학을 동시에 긍정하는 엄격하지 않은 지적 태도다. 그것이 자기명령인 한 주체의 수만큼 많은 윤리학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며, 윤리가 일반 명제의 주어가 아니라 개별 진술의 술어 자리에 놓여야 함을 뜻한다. 사소한 선의의 행위를 윤리적이라고 말하기 위해, 이런 퇴각과 절충이 불가피해졌다. 절충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의 길을 탐색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과 내 능력 밖에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혹시 사소한 선의에 대한 이런 열중이 일종의 도피주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진리의 개시, 해방의 정치에 대한 체념과 반지성적 염세주의가 ‘투쟁의 형식’으로서의 윤리가 아니라 사소한 선의에 몰두하게 만든 건 아닐까. 혹시 절충이라고 말하면서 내심으로는 진리의 윤리학을 사실상 포기하고 이젠 사소한 선의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서부사나이는 더 이상 ‘남자는 할 일을 한다’가 아니라 이제 ‘남자는 (사소한 선의의 행위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요컨대, 21세기의 관객인 내가 프리스트의 선택에 감동받는 건 이런 도피의 차원과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질문을 짊어지고 있을 뿐 그것에 정확히 답할 수 없다. 다만 이 질문이 존 포드 서부극의 근본적 질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 상기하고 싶다. 단지 ‘서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만 빼면 여타 서부극과 무관해 보이는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존 포드의 서부극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 질문 때문이다. 그 질문을 말하기 위해 하나의 도식을 제시하고 싶다. 3. 고전적 서부극에서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 일은 공동악을 제거하는 것 즉 공동선으로서의 도덕적 행위이다. 도덕적으로 자명한 일을 서부 사나이는 윤리적으로 행한다. 하지만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일치는 사후적인 것일 뿐 선험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전적으로 임의적이고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서술하는 이순신의 태도도 이것이다. 이순신을 움직이는 건 왕에 대한 충심도 애국심도 아니다. 다만 그가 ‘해야할 일’이 충과 애국에 결과적으로 부합했을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적의 적’이라는 이미 주어진 자리였을 뿐이다.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바랐다.” 도덕과 윤리의 동반은 임의적이고 불안정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그 임의성과 불안정성을 노출한다. 포드 서부극에서도 남자는 할 일을 한다. 그런데 그 일은 ‘우연히’ 공동선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죽은 형제의 복수를 위해 플러머 형제를 처단한다. 그런데 마침 그들은 공동체의 악이었다.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는 형의 가족의 복수와 납치된 조카 데비의 구출을 위해 코만치 일당을 추격한다. 그런데 마침 코만치 일당은 공동체의 위협이었다. 링고와 이산은 공동체에 근본적으로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다. 링고는 탈옥수이자 범법자로서 결국 공동체를 떠나며, 이산은 자신의 복수 시도가 공동체에 더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을 사람들의 경고를 무시한다. < 황야의 결투 >에서 와이어트 업은 자신의 소 떼가 도둑맞지 않았다면 툼스톤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도덕과 윤리는 위태롭게 연대하거나 간혹 대립한다. 어느 경우에도 공동선의 도덕은 자명한 것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영웅의 사적 복수와 공동선의 사후적 일치의 서사 조작술은 오늘의 대중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동선을 사적 복수라는 정념으로 보충하는 데 그친다. 공동선의 도덕은 질문되지 않은 채 다만 사적 복수라는 공동선 외부의 동기로부터 정념의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이다. <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세지, 1976)는 이 임의적 일치의 가장 냉소적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며, 미국 TV드라마 < 덱스터 >는 가장 영리한 패러디 가운데 하나이다. < 데쓰 프루프 >(쿠엔틴 타란티노, 2007)는 임의적 일치 여부를 놓고 벌이는 교활한 게임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영화의 영웅서사에서 그 일치의 임의성은 감춰진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공동체에는 공동악이 등장하지 않으며 복수 서사도 작동하지 않는다. 남군 문화와 북군 문화, 백인과 흑인, 부인과 창녀의 차이가 갖가지 갈등을 빚어내지만, 공동체 전체의 생존이 걸려있던 다른 서부극에 비하면 이런 갈등들은 사소한 것이다. 이 사소한 갈등들을 정돈할 수 있는 공동선의 도덕적 규범은 불투명하다. 창녀들의 장례식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갈등들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것이다(예컨대 창녀들의 생존권이 걸려 있는 창녀 추방 여부보다 훨씬 사소하다). 가장 사소한 의제에 프리스트 판사의 명예와 사회적 지위 전부가 걸려 있다. 포드는 여기서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관계로부터 오직 윤리만이 문제 되는 상황으로 이행한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도덕의 서부극이 아니라 윤리의 서부극이다. < 역마차 >의 주정뱅이 의사 닥 분은 “내가 누구라고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겠어”라고 중얼거리는데, 포드의 영웅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부’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오직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포드 서부극의 윤리의식이 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리스트 판사는 공동선으로 보충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는 윤리의 실행자라는 점에서 포스트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리스트가 사는 세상은 이런 것이다. 적이 사라지거나 비가시화하면 적의 적이라는 나의 자리도 확정되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나쁘지만 희생양(강간범의 누명을 쓴 흑인 소년)을 가상의 적으로 삼아 분노를 해소하려는 것은 집단적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일상의 진부함과 그 진부함을 버텨내는 기교만 남아 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심장박동이 회복되지 않으며 적의 적으로 싸웠던 시절의 향수에 젖는 것 외엔 낚시와 춤과 소란, 로맨스의 대리만족에 몰두한다. 이 모든 건 프리스트의 증상이다. 그러다 죽은 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 가장 사소한 요청에 응하기 위해선 목숨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 사소한 행위야말로 이 늙은 서부사나이에게 남겨진 마지막 윤리이다. 그의 선택이 감동적이라면 그 감동은 승리의 쾌감이라기보다는 이 사소성에 새겨진 거대한 퇴각의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운명적 비애감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 4. 상황과 선택이라는 서사적 요소만으로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아름다움은 포드의 다른 걸작들이 그러하듯 질서와 소란, 심판과 축제, 이성과 도취, 비극과 유머의 종잡을 수 없는 배열이 빚어내는 천의무봉한 합주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례행렬 장면은 다른 점에서 특별한 것 같다. 프리스트는 말없이 걷기 시작한다.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자였고 권력과 법의 인간이었지만 이제 권력도 법도 없이 그냥 걷는다. 작고 늙은 그가 걷는 형상은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내려다보인다. 카메라는 접사도 앙각도 없이 대개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 왜소한 노인의 걸음을 보여준다. 그는 행진 장면의 어느 쇼트에서도 프레임을 물리적으로 장악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사소한 피사체로 아니 그저 피사체들의 하나로 느리고 조용히 움직인다. 행렬을 따라 걷는다는 이 사소한 동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프리스트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걷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기에 걷는다. 장례행렬은 마을의 큰 길을 따라 창녀촌이라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출발해 마을 사람들의 생활공간 그리고 정치와 사교의 공간인 마을 회관을 거쳐 교회라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세속적 삶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 운동이다. 존 포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말이 달리는 모습과 커플이 왈츠를 추는 모습”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찍은 사람이다. 그가 말하진 않았지만 포드가 좋아한 또 다른 모습은 행진이다. 한 감독의 영화에서 그처럼 많은 행진 장면이 등장하는 다른 사례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행진이 일상인 전쟁영화나 유사 전쟁영화들을 제외해도 포드 영화에서 행진은 때로 승리의 자축연으로(< 저지 프리스트 >), 때로 죽음 같은 공포의 형상으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때로 그 자체가 거대한 축제로(< 조용한 사나이 >), 때로는 삶 자체의 율동으로(< 도노반의 산호초 >) 빈번하게 등장한다. 행진이 시작되면 마치 행진 스스로 저 자신의 생동에 도취되어 서사를 잊어버린 듯 하염없이 지속된다. 존 포드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 태양은 밝게 빛난다 >의 행진과 같지 않다. 이 행진은 창녀촌에서 교회로의 이동이라고 해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혹은 세속에서 숭고로, 혹은 죄에서 대속으로의 은유적 이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차이를 행진의 느리지만 강력한 운동성으로 일거에 무화시키는 움직임이다. 오직 하나의 운동이 존재한다. 이 운동이 시작되면 어떤 다른 방향의 움직임도 상상될 수 없다. 장례 행렬이 출발하고 프리스트가 그 뒤를 따라 걷는 순간 누구도 이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조용하고 느린 걸음에 한 노인의 생애 전체 어쩌면 그보다 더 거대한 것이 걸려있어 어떤 힘이 그를 멈춰 세우려는 순간, 그가 폭파되든 세상이 폭파되든 둘 중 하나다. 그 운동의 힘이 서사 안에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라고 이제 물을 수 없다. 이 기적 같은 운동은 더 이상 서사적 탐문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그것에의 감화를 요청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행진에 이어진 장례와 선거가 이 영화의 결말이다. 행진 장면의 기적과도 같은 힘을 생각하면 결말은 오히려 느슨한 후일담처럼 느껴진다. 프리스트가 마지막으로 투표하고 단 한 표 차이로 승리한다는 만화 같은 설정은 차라리 유머에 가깝다. 잊혀지지 않는 건 마지막 쇼트다. 선거 승리를 축하하는 무리들이 집 앞을 지나갈 때 프리스트는 물끄러미 지켜보다 돌아서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뒷모습은 어둠에 잠겨들고 문이 닫힌다. 사건 전개와는 무관하게 장례 행진의 운동은 바로 이 쇼트로 맺어진다.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며, 그는 이제 어둠 속에 머물 것이다. 세속적 승리와 은유적 죽음 사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대체될 수 있는 사건과 결말은 관심을 둘만큼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좀 전에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영화적 순간을 이미 경험해버렸다.(계속)
< 역마차 >와 직접 관련 없는 객담 하나. 미국에서 <역마차>가 개봉된 해인 1939년 초의 어느 날, 대서양 건너 프랑스 남부도시 마르세유의 알카자르 극장에선 비쩍 마른 꺽다리 청년 하나가 무대에 올랐다. 뜬금없이 노란색 머플러에 하얀 카우보이모자를 쓴 이 청년은 뻣뻣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머나먼 서부 평원에 어둠이 찾아오면... 야영지 옆에서 카우보이들은 잠이 들었네...” 처음엔 시큰둥해하던 청중들은 노래가 끝나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큰 무대가 처음인 이 18세 신인 기수는 그칠 줄 모르는 앙코르 연호에 얼이 빠진 채 무대로 되돌아가 ‘머나먼 서부 평원에서’를 한 번 더 불러야 했다. 모리스 슈발리에가 대표하는 프랑스식의 유쾌한 환상파적인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에 난데없이 카우보이 노래를 불러 프랑스인들을 열광케 한 이 청년은 후에 프랑스 문화계의 큰 별이 된 이브 몽땅(1921~1991)이다. 이탈리아 출신 골수 공산당원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15, 6세 무렵에 나는 이미 공산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이브 몽땅은 동시에 열렬한 미국영화 찬미자이기도 했다. 게리 쿠퍼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이 할리우드 키드는 “서부 영화를 보고 나올 때는 카우보이처럼 걸으면서 권총을 찬 사내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고 회고한다. ‘머나먼 서부 평원에서’라는 노래는 카우보이라고는 평생 본 적이 없는 한 맹인 작곡가에게 이브 몽땅이 자기가 본 서부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탄생한 곡이다.(이 일화는 그의 자서전 「세기의 연인 이브 몽땅의 고백」(임자영 역, 꿈엔들)에 실려 있다.) 이브 몽땅보다 40여 년 늦게 아시아의 한 귀퉁이에서 태어난 내게도 서부극에 연관된 사소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에서 팔던 보안관 배지와 장난감 권총, 그리고 권총 주머니가 달린 혁대는 우리 대부분이 갖고 싶어 하던 사치품이었다. 검지에 권총을 걸고 두 바퀴 돌리면서 바로 권총 주머니에 집어넣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우리는 며칠씩 연습을 했다. TV에선 ‘주말의 명화’ 시간에 수시로 서부극이 방영되었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된 서부극 ‘미드’ < 보난자 >는 이미 언제나 거기에 있었으며,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지도 가운데가 불타오르면서 그 사이로 네 명의 서부 사나이가 말을 타고 등장하는 이 드라마의 오프닝은 유년기의 내 뇌리에 가장 깊이 새겨진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우리가 흑백으로 본 이 시리즈 서부극은 미국 TV 최초로 컬러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1959년부터 1973년까지 15년간 430회차 상영되었다. 이 시리즈의 감독에는 로버트 알트만과 자크 투르뇌르도 포함돼 있다.) 미국 영화학자들이 건국 초기 미국의 서부개척이라는 역사적 경험의 모태에서 태어난 가장 미국적인 장르로 이해하는 서부극이 대서양 혹은 태평양 너머 그것도 서로 완전히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살던 이들을 어떻게 사로잡게 되었을까. 그것도 그냥 인기가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는 서부극이 있다. 아니 서부극 속에 내 무의식이 있다”(아오야마 신지)라고까지 말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정답을 알고 있지 않다. 물론 서부극이 지닌 몇 가지 보편적 호소력을 나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총과 황야로 환유되는 사라진 야성 혹은 고독하고 유능하고 강인한 마초에의 노스탤지어, 대단원의 결투라는 서사적 기술, 서부라는 공간의 시각적 스펙터클 등등.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오늘의 액션영화들에 더욱 강렬하고 다채롭고 세련되게 구현되어 있지 않은가. 서부극에는 쉽게 의미화할 수 없으나 우리 무의식의 지층에까지 스며드는 무언가 주술적인 혹은 마신(魔神)적인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여기서 서부극 전체를 가로지르는 포괄적인 정답을 찾는 대신, 전 회의 마지막 대목에서 말한 모뉴먼트 밸리의 문제로 돌아오고 싶다. < 역마차 > 이후 < 황야의 결투 >와 < 수색자 >를 포함한 9편의 존 포드 영화에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는 오슨 웰즈의 말대로 다른 감독의 영화에 나오면 표절처럼 보일 만큼 존 포드의 영화 세상에만 존재하는 지명이자 가상의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모뉴먼트 밸리는 서부극의 주술적 매혹이 집약된 장소라는, 논증할 수 없으나 확신에 가까운 인상을 버릴 수 없다. 모뉴먼트 밸리는 애리조나 주 북쪽과 유타 주의 남쪽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원의 황무지다. 이곳은 1950년대까지도 제대로 된 교통로가 없어, 일반인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고 한다. < 역마차 > 제작이 준비되고 있을 무렵, 존 포드가 대작 서부극을 찍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 지역 상인의 추천으로 모뉴먼트 밸리를 처음 알게 된 포드는 그때부터 이곳을 자신의 서부극의 고향으로 삼는다. 여느 감독과 마찬가지로 제작자의 간섭을 지긋지긋해하던 존 포드는 제작사 간부들이 찾아올 엄두를 내기 힘든 이 고원의 오지를 사랑했고, 이곳에서의 야영과 집단생활, 그리고 매일 밤의 주연을 즐겼다. 모뉴먼트 밸리는 목초지가 드문 황야와 그 지명을 유래케 한 첨탑 형태의 암석봉 및 갖가지 모양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바호족의 성지로 불리는 이곳은 미국 개척민들의 공동체가 들어선 적이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던 황무지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모뉴먼트 밸리는 실제 지리와 무관한 장소라는 뜻이다. 실제로 < 역마차 >와 < 황야의 결투 >의 서사가 전개되는 극 중 무대는 멕시코 국경과 인접한 애리조나 남부이며, < 수색자 >에선 텍사스 평원이다. 물론 미국의 지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 차이는 잘 인지되지 않는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장소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 당대의 미국 관객들에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존 포드의 서부극들이 극 중 지명과 무관하게 항상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곳이 같은 장소임을 알려주는 것은 황야가 아니라 기괴한 형상의 암석봉들이다. 그곳이 모뉴먼트 밸리임을 알게 해주는 이미지도, 존 포드의 서부극을 상징하는 표상도 그 암석봉들이다. 이제부터 모뉴먼트 밸리라는 단어는 주로 이 암석봉들을 지칭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모뉴먼트 밸리를 선회한다. 아니, 이 표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모뉴먼트 밸리에 사로잡혀 있다. 역마차가 끝없이 달려도(< 역마차 >), 툼스톤이라는 고유 지명이 등장해도(< 황야의 결투 >), 농사짓는 개척민이 정착해 있어도(< 수색자 >) 그곳은 여전히 흙바람이 휘날리며 지평선 위로 솟아오른 바위산들이 굽어보는 모뉴먼트 밸리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는 없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은 인물과 사건에 습관적으로 몰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편의 존 포드의 서부극을 연속적으로 본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형상이 우리가 매우 이상한 곳에 도착해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 곳은 실제 서부이지만, 오직 존 포드의 서부극에만 존재하는 거대한 오픈세트와도 같은 장소로 점점 깊이 각인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선회 혹은 사로잡힘의 과정은 한 편의 영화 안에서도 은밀하게 일어난다. 모뉴먼트 밸리가 처음 등장한 < 역마차 >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2 #3 #4 #5 오프닝 장면에서 황야를 향해 달려가는 역마차의 단독 쇼트(#1), 역마차와 그 뒤를 따르는 기병대 쇼트(#2), 그리고 기병대 단독 쇼트(#3)와 아파치 단독 쇼트(#4)가 이어진다. 감독의 이름이 떠오르는 오프닝의 마지막은 다시 역마차의 단독 쇼트(#5)이다. 쇼트들의 의미만 따지면 위태로운 역마차, 기병대의 일시적 보호, 아파치의 위협 등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를 간결하게 요약한 효과적인 오프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모두 제각각인 역마차, 기병대, 아파치의 동선을 머리 속에 일관되게 정리할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서사가 진행되기 전이고 관객은 이 곳의 지형을 전혀 알지 못하므로 이것이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존 포드는 5가지 동선 중에서 #3과 #4만 일치시켜 놓았다. 동선뿐 아니라 카메라 앵글까지 유사하다. 두 쇼트에서 각각 기병대와 아파치는 같은 곳에서 출발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들 뒤로, 이 영화에서 그리고 이후 존 포드 영화에서 줄기차게 나타날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이 최초로 등장한다. 두 쇼트는 점프컷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병대 주제음악과 아파치 주제음악 역시 점프컷으로 이어져 있어, 이 대목은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시각에 은밀한 잔상을 남긴다. #3과 #4는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을 최초로 각인시킨 쇼트라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롭지만 그것의 의미를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특이한 형상의 바위산이 포진한 영화사상 가장 특별한 장소 가운데 하나에 이제 막 도착한 것이다. 이 장소가 특별하다는 것은 이후 서사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난다. 승객 7명을 태우고 마차 운전자와 보안관이 이끄는 역마차는 이제 톤토를 출발해 드라이포크, 아파치웰스, 리스페리를 거쳐 최종 목적지 로즈버그로 갈 것이다. #6 #7 #8 #9 #10 #6~#10은 톤토를 출발한 역마차가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다음 정차지 드라이포크에 이르는 여정의 쇼트들이다. 마차의 동선은 대각선, 좌우를 일정하지 않게 오간다. 그런데 여기엔 명백히 동선의 오류가 있다. #9와 #10은 승객 간의 사소한 언쟁 앞뒤에 붙여져 있는 연속적 움직임 안의 인서트 숏들이다. 그런데 마차의 방향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9에서는 마차가 두 암석봉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지만 #10에선 전 쇼트에서보다 오히려 가까워진 상태로 그 곁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오류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두 암석봉의 유난히 기괴한 형상이다. #10에서 분명히 드러나지만 두 암석봉은 같은 바위산의 좌우를 바꿔놓은 듯 흡사한 모양이다. 마치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두 바위산은 한번 쉬이 잊힐 수 없는, 모뉴먼트 밸리를 상징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편의상 앞으로 왼쪽 암석봉을 모뉴먼트1, 오른쪽 암석봉을 모뉴먼트2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대목에서의 오류를 제작의 편의에 치중하다 발생한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오류가 마치 자신을 전시하듯이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 모뉴먼트1, 2의 강렬한 형상 덕으로 우리는 그 오류를 이제 조금은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11 #12 역마차는 드라이포크와 아파치웰즈, 리스페리를 거쳤고, 이제 곧 로즈버그에 당도할 예정이다. 그 순간 제로니모와 아파치 무리가 마침내 등장한다(#11). 그런데 아파치 무리 뒤로 #9와 #10에서 우리가 보았던 모뉴먼트1이 다시 나타난다. 아파치의 시선을 받는 #12의 역마차의 작은 형상 뒤로는 멀리 모뉴먼트2가 보인다. 이야기상으로는 그 사이 며칠의 시간이 흘렀고 거센 물살의 강을 건너기도 했건만, 역마차는 여전히 두 기괴한 암석봉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 명백한 오류 역시 실수라고 봐야 할까? 잠정적 결론을 말하기 전에 < 역마차 >의 마지막 쇼트를 보고 넘어가자. #13 아파치의 습격을 벗어나고 로즈버그에서 악당 플러머 형제를 해치운 무법자 링고 키드와 매춘부 댈러스가 국경 너머를 향해 달린다. 문명의 축복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향하는 지평선 너머에 희미한 형상이 하나 보인다. 그 형상은 어쩐지 모뉴먼트1과 2를 닮아 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뇌리에 은밀히 새겨진 모뉴먼트 밸리의 강렬한 형상들의 잔상이 그 연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나는 이 오류들이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이미 43편의 무성 서부극을 만든 존 포드는 앵글을 조금만 바꾸면 특정 지역을 연상시키지 않는 평야와 지평선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 그중에서도 가장 기괴한 모뉴먼트1과 2를 과시하듯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이것은 기획된 오류다. 사건과 무대는 선형적으로 배열되는데도, 장소와 동선은 일종의 원환 운동을 반복하는 이상한 구조의 < 역마차 >는 고전적인 서사 영화의 외양 안에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만큼 기괴한 실험극의 성격을 감추고 있다. 앞서 존 포드의 서부극들이 모뉴먼트 밸리를 선회하거나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지만, 포드의 선택은 서사의 개연성을 무시한 로케이션 설정에 그치지 않는다. < 역마차 >에서 그 선회 혹은 사로잡힘은 서사의 운동을 이중화함으로써, 서사의 논리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다. 나는 여기서 존 포드가 랜드스케이프의 표현주의라고 부를만한 특별한 형식을 창안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 포드 서부극의 위대성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한 반문 하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그건 존 포드 개인의 취향에 불과한 건 아닌가. 서사의 논리를 위험하게 만들면서까지 반복적으로 돌아올 만한 가치가 모뉴먼트 밸리에 있는가. 그것이 하나의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면 < 역마차 >라는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모뉴먼트 밸리의 영화적 작용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모뉴먼트 밸리가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의 낯설고 기괴한 형상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형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화산처럼 노골적인 위협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낯선 행성의 암괴, 대재난 이후의 잔존물, 악의적인 신이 빚은 불길한 조각, 잘려진 거대 신체의 일부... 일련의 두려운 연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끝없이 시선을 유혹하는 괴이한 존재. 존 포드의 인물들은 모뉴먼트 밸리에 가까이 다가서기는커녕 잘 쳐다보지도 않는다(물론 < 웨건 마스터 > 같은 예외도 있다. 또한 인디언들은 #11에서처럼 종종 그것에 바짝 다가서 있다.) 그들은 대개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지나쳐간다. 그럼에도 그 주변으로 반복해 불려 온다. 여기서 회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미술에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이 그림을 접했을 때 곧바로 모뉴먼트 밸리를 떠올렸다. Arnold Bocklin ‘Wyspa umarłych’ ‘죽음의 섬’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스위스 출신 화가 아놀트 뵈클린(1827~1901)이 1880년 남편을 추모하려는 한 피렌체 미망인의 의뢰로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보고 받은 즉각적인 느낌은 내가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바다 위에 솟은 괴이한 형상의 섬 그리고 그것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조각배가, 황야를 뚫고 일어선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과 그 주위를 선회하는 서부의 인물들을 연상시켰다. 그림 속의 섬도 < 역마차 >의 모뉴먼트 밸리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장악되지 않는 거대한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다. 그림 속의 섬이 죽음의 표상이라면, 모뉴먼트 밸리는 무엇일까. 둘의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생각은 없다. 이 그림이 내 시선을 이끈 것은 그것의 형상이지만, 영화의 풍경이 우리 감각에 작용하는 것은 형상뿐만 아니라 서사의 배열과 시간적 지속에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의 시선으로, 누군가를 불안이나 공포에 빠트리는 시선”으로서의 ‘응시’(다리언 리더, 「모나리자 훔치기」) 개념을 끌어들여, 히치콕의 < 사이코 >에 나오는 언덕 위의 검은 집과 같은 것으로서 모뉴먼트 밸리를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히치콕의 검은 집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은 절도를 저지른 인물의 죄의식이라는 사건의 효과와 식별되지 않으며, 검은 집은 곧 사건에 연루된다. 하지만 모뉴먼트 밸리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 모뉴먼트 밸리가 우리를 은밀하게 불안에 빠트린다면 그것의 형상 때문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서사의 논리를 붕괴 직전까지 이르게 하는 사건과 움직임의 분리를 이 서사 외적 사물이 주재하고 있다고 감지되기 때문이다. 다른 지면에서 썼던 구절을 옮기자면 모뉴먼트 밸리가 ‘서부 공동체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서사, 그 오이디푸스적 궤적을 상대화하고 결국 사소화하는 비지(非知)와 무시간성의 심연’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 감지는 사건을 쫓는 것이 아니라 모뉴먼트 밸리라는 대상을 ‘보는 것’으로써, 그리고 그 보는 것에 의해 우리가 동요함으로써만 이뤄진다. 끝내 사건과 연루되지 않는 모뉴먼트 밸리가 영화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할 방법은 없다. 마신(魔神)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 존재는 말해질 수 없는 영역에서 보이는 것으로 작동하며 사건의 서사를 동요하게 하고 분열하게 하며 사소화거나 무화한다. 따라서 좀 더 까다로운 반문은 이것이다. 영화를 볼 때 그러니까 영화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흐르고 있을 때 우리는 사건과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는가. 혹시 스틸들을 통한 앞선 분석은 실제적인 영화관람 체험과는 무관한, 디지털 기술에 기대 사후적으로만 포착 가능한 사실들을 놓고 분석가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 아닌가. 역시 답이 쉽지 않은 이 반문에 대한 고민은 다음 회로 미뤄야 할 것 같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