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짬짜미 동영상’은 이게 진짜
- 제작년도
- 2010
지난 6월 21일, 로빈 하디의 < 위커맨 >는 개봉 50주년을 기념하는 4K 복원판이 영국에서 첫 월드 프리미어를 가졌다. 이후 미국 전역을 비롯한 각 국가 개봉에 이어 10월에는 현존하는 본편 3개 버전과 방대한 서플먼트 그리고 폴 지오바니와 밴드 마그넷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을 포함한 5 디스크 DVD 박스세트가 출시되었다. 동시에 <위커맨: 공식 스토리>라는 신간도 함께 출판되면서, <위커맨>은 올해 복원된 고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커리어(!)를 이어가는 히트작이 되었다. 이미 개봉 40주년을 기념한 디지털 복원판이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상영되었던 전력을 떠올려보면, 새로운 4K 복원판에 대한 식지 않는 관심은 진정한 컬트 고전으로서 <위커맨>이 가진 위상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인 셈이다. 요란스러운 상찬과 제사에 불구하고, 컬트의 지위를 가진 대부분의 걸작들이 그러하듯 <위커맨>은 시작부터 개봉까지 쉬웠던 순간이 하나도 없었던 고난의 영화였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말 그대로 복원과 부활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위커맨>은 < 발자국 >(Sleuth, 1972)로 유명한 작가 안소니 샤퍼가 제작사 ‘브리티시 라이언’의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제작자 피터 스넬 그리고 해머의 드라큘라 재생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와 1967년 출간된 데이빗 피너의 소설 ‘의식(Ritual)’의 영화판권을 공동으로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개발에 난항을 겪던 프로젝트는 당시만 해도 ‘듣보'였던 로빈 하디가 의기투합하면서 주말동안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순식간에 하우이 경사를 중심으로 한 제대로 된 시나리오로 전개되었다. 완성된 시나리오에 만족한 스넬은 ‘저예산으로 제작할 것'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비로소 <위커맨>은 1972년 가을 크랭크인에 들어갔다. 촬영은 약 7주 가량 25개 스코틀랜드 지역 곳곳에서 진행되었지만, 정작 로케이션 중에서 진짜 섬은 한곳도 없었다. 로빈 하디는 공간의 통일성을 위해 이곳 저곳에서 찍은 장면들을 패치워크하듯 이어붙이는 작업이 오히려 흥미로웠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으나, 가을의 스코틀랜드에서 5월 초여름의 풍경을 담아야 한다는 미션과 더불어 로케이션 중간중간 출몰하는 근대와 문명의 흔적을 피하는 촬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예산 부족과 고된 촬영, 추위와 이어지는 과음으로 하우이 역의 에드워드 우드워드는 발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윌로우 역의 브릿 에클랜드는 촬영 내내 우울증에 시달린 나머지 이후 완성된 영화를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에클랜드는 2023년 5월 <위커맨> 50주년 특별행사에 참석하여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00분이 넘는 길이로 영화는 완성되었지만 <위커맨>의 개봉은 요원했다. 20세기 초중엽 에드가 월리스, 알렉산더 코다, 캐롤 리드 등 영국영화의 대표주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던 브리티시 라이언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던 상황이었는데, <위커맨>이 완성된 시점의 사장인 마이클 딜리는 완성본을 싫어한 나머지 영화의 개봉을 거부했다. 제작자 스넬은 딜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칸 영화제에 완성본을 들고 가 쇼케이스를 진행하는 동시에 호텔 로비에 거대한 위커맨을 세워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이때 <위커맨>을 본 영화 관계자 중에는 로저 코먼도 있었는데, 드라이브 인 상영에 좋겠다고 판단한 코먼은 편집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결국 브리티시 라이언은 영화를 87분으로 대폭 가위질해서 먼저 개봉하여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니콜라스 로에그의 < 쳐다 보지 마라 >(Don’t Look Now, 1973)와 동시상영하는 조건으로 영화의 개봉을 허가했다. 크리스토퍼 리는 안면이 있는 모든 평론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좌석을 빼두는 등 공을 들이기도 했다. 20세기 브리티시 호러의 대표작인 두 편의 영화가 동시상영이라는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는 비극인지 아니면 두 편을 동시에 본다는 엄청난 기회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시 관객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처참한 박스오피스 결과를 통해 드러났다. 어떻게든 제작비를 환수하려고 애썼던 브리티시 라이언은 로저 코먼을 비롯, 미국 배급을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결국 미국 배급권은 워너 브러더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워너는 개봉 전 테스트 상영을 했지만, 버라이어티를 비롯 지면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상영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위커맨>은 순식간에 시네필 그리고 영화학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볼 수 없는 걸작'이 되면서 컬트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6년 할리웃으로 와 각본작업을 하던 로빈 하디는 <위커맨>의 부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워너 브러더스는 이미 미국 배급권을 단돈 2만불에 아브락사스라는 소규모 회사에 넘겨버린 상태였고, 하디는 아브락사스를 설득해서 난도질당한 <위커맨>의 부활 작업의 허가를 얻었다. 하디는 바로 피터 스넬, 앤드류 샤퍼 그리고 크리스토퍼 리에게 연락을 취했고, ‘위커맨 4인방'은 가위질 이전의 롱 버전 프린트 사냥에 나섰다. 개봉버전과 로저 코먼에게 견본으로 보냈던 오리지널 프린트를 찾아낸 하디는 결국 1977년 가을 미국에서 첫번째 디렉터스 컷이라고 할 수 있는(현재는 ‘미들 버전’이라 불리는 버전으로 4K 복원 상영본인 ‘파이널 컷’의 원형이 된 판본이다) 92분 버전의 <위커맨>이 상영되었고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위커맨>은 숏 버전과 미들 버전이 번갈아가며 TV와 홈비디오 시장을 통해 배급되었지만, 본격적인 복원은 2001년 영화의 세계배급권을 갖게 된 스튜디오카날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 완성된 100분이 넘는 오리지널 프린트는 찾지 못했지만 현존하는 프린트와 텔레시네 버전들을 조합한 99분 버전의 ‘디렉터스 컷’이 DVD로 출시되었다. 스튜디오카날은 <위커맨>의 복원을 위해 프린트 사냥을 멈추지 않았는데, 하버드대 필름보관소에서 92분 버전의 필름 4K 버전을 입수하면서 제대로 된 디지털 복원의 신호탄을 쐈다. 로빈 하디는 페이스북에 올린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영화의 디지털 버전을 복원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는데, 복원 과정에서 하디는 섬머아일로 가기 전 경찰서 등 하우이의 일상 장면을 포함, 디렉터스 컷에 삽입되었던 장면들을 제외한 92분 버전의 복원에 동의하고 이 버전은 2013년 크리스토퍼 리가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던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 버전이 올해 4K 복원판 상영으로 이어진 이른바 ‘파이널 컷'으로, 국내에서는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을 처음 만났다. 영생을 믿는다며 부활을 울부짓었던 하우이의 희생 덕분이었는지, 아이러니하게도 불굴의 4인방의 <위커맨>은 부활에 성공하여 영생을 얻은 셈이다. 영화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영화의 부활 서사때문에라도 <위커맨>은 수많은 관련서와 팬매거진을 거느린 컬트 고전이자 아리 에스터 등 현대의 감독들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된 걸작이지만, 역경을 딛고도 부활할 수 있었던 영화의 저력은 전무후무한 전복적 상상력에서 나온다. 지난 10여년 간 글로벌 호러의 지배적인 서브장르로 급부상한 포크 호러 열풍과 더불어, <위커맨>은 < 심판 >(Witchfinder General, 1968), < 사탄의 피부 >(The Blood on Satan’s Claw, 1971)과 포크 호러 장르의 ‘불경한 삼위일체'라는 명성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중 <위커맨>은 근대 서구 문명의 이성과 기독교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과 완전한 전복을 스크린에 구현했다는 점에서 다른 두 편과 궤를 달리한다. 엄격한 교리와 도덕률 그리고 사법제도의 규칙으로 무장한 채 아버지의 법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근대적 남성주체 하우이는 로완 모리슨의 실종을 추적하는 탐정으로서도, 순결한 총각으로서도, 무엇보다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 채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섭리라는 말로 수렴될 수 없는 자연의 동학을 긍정하는 섬머아일에서 섹스와 남근, 수확과 재생산은 하우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질서를 구성한다. 그 안에서 당혹과 충격 그리고 어이없음과 무력함을 넘나들며 심리적 폐소상태에 놓인 하우이의 클로즈업과 영화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 메이데이의 현기증나는 의식은, 종교적 이성과 원시적 이단이라고 재단된 양립할 수 없는 두 질서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라고 너스레를 떠는 로빈 하디의 코멘트에 충분히 고개가 끄덕이면서도 왠지 영화의 강열도를 축소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
왕시린. 한자 이름으로 王西麟(pinyin_Wang Xilin). 1936년 12월 13일에 중국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서 태어났다. 연도를 유심히 읽어 주기 바란다. 아직 국공내전은 끝나지 않았고,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군을 이끌고 18개의 산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 1만 2,500킬로에 이르는 대정정을 끝낸 이듬해이다. 왕시린은 음악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다. 시골에서 악기를 변변히 가르쳐주는 교사가 없는 데도 스스로 음악책을 읽으면서 12살에는 중국 전통악기인 후친(胡琴). 아코디언, 그리고 몇몇 관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고,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되었다. 1949년, 13살 소년 왕시린은 그게 무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 왕시린은 간쑤성(甘蕭省) 핑량(平凉) 미션스쿨 졸업반이었다. 인민 해방군의 행진을 보았다. 그러면서 소년들에게 입대를 선전하였다. 가난한 왕시린은 가족 중의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입대하였다. 여기서 왕시린은 1957년까지 근무하였다. 음악과 먼 생활이었지만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때 군부 위원회에서 군악대 지휘자를 양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왕시린은 지원을 했고, 여기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래서 우수 인재로 발탁되어 상하이에 있는 상하이 음악학교(上海音樂學院)로 전출되었다. 왕시린은 여기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이 학교에는 유럽에 음악 유학을 다녀온 선생님들과 연주자들이 있었다. 대기근으로 알려진 대약진의 시대를 왕시린은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천안문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965년 11월 10일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吳晗)이 쓴 경극 희곡 <하이루이의 파면(海瑞罢官)>을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대약진운동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지도자는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에 마오쩌둥은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강령. 이 문장에 들어있는 단어, 척결(剔抉).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바르듯이 나쁜 부분들을 깨끗이 없애버려라. 부주석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손에 피를 묻히는 역할을 맡았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앞에 100만 명의 학생들이 집합하였다. 그들에게 붉은색의 비단 완장이 배급되었다. 해가 떠오르자 연단에 마오쩌둥이 나타났다. 붉은 완장을 두른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열광하였다. 린뱌오는 “착취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도하라”고 호소하였다. 지도자는 인자한 표정으로 그들의 환호에 응답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홍위병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교사를 공격하였다. 상하이 음악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시린의 선생님들은 자아비판에 불려갔고, 그 과정에서 자살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아니면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다음에는 그들의 동료가 목표가 되었다. 그 중의 한명이 왕시린이었다. 왕시린은 학교를 비판하는 대중연설을 요구받았다. 왕시린은 거절하였다. 청년동맹에서 악질분자로 분류한 다음 10번도 넘은 자아비판을 요구했고, 그런 다음 “인민 속으로 들어가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다시 학습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시린은 시골로 하방(下方)되었다. 그가 보내진 곳에서 왕시린은 주자파로 분류되어 한밤중에도 불려 나가 사람들 앞에 서서, 자아비판을 하고 야유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른바 제트기 자세라고 불리는 사상개조 고문을 받았다. < 흑의인 >이 시작되자마자 왕시린이 허리를 숙인 다음 두 팔을 길게 뻗고 서 있던 그 자세, 이 자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지금 이 글을 읽는 걸 멈추고 일어서서 해보길 바란다. 중국 전역에서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이들에게 요구된 자세. 그 자세를 추운 겨울날 운동장에서 밤새도록 요구하고,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세워놓고 종일 그렇게 서 있어야 했다. 쓰러지면 무서운 매질이 기다렸고,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 계속해야만 했다. 왕시린은 문화혁명 기간 중에 자신의 치아를 잃었고, 청력의 20퍼센트를 상실했다. 왕시린은 음악가이다. 왕빙은 왕시린의 음악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극영화 < 바람과 모래 (The Ditch, 夾邊溝)>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복잡한 사정으로 잘 안 되었다. 하지만 계획을 바꾸어서 왕시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왕시린은 2017년 10월 24일 그의 거주지를 베이징에서 독일 라인할트- 팔츠주(州) 마인츠로 이사했다. 왕빙은 왕시린을 찾아가 집에서 인터뷰했고, 또 왕시린이 지휘하는 무대도 찍었다. 하지만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거기에 빠졌다고 느꼈다. 계속해서 완성을 미루었다. 방법을 바꾸었다. 왕빙은 왕시린을 단 하룻밤 극장 무대에 세우기로 하였다. 프랑스 파리 10구 샤펠가 37번지에 자리한 극장 떼아트르 데 부프 뒤 노르(Théâtre des Bouffes du Nord)에서 2022년 5월 27일에 촬영하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극장. 왕시린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발가벗고, 몸의 어떤 부위도 가리지 않고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온다, 이때 우리는 그 몸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몸에 새겨진 역사. 달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몸에 피어난 검버섯.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살. 몸은 아직도 문화혁명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대에 서자마자 제트기 자세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이 처음 인민해방군의 행진을 보던 날부터 시작해서 긴 증언을 시작한다. 아니, 차라리 이건 공연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왕시린은 기억의 무게 앞에서 몸서리치면서 견딜 수 없는 그 시간을 물리치기라도 하듯이 노래 부르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쾅쾅 두들긴다. 그건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다. 노래는 비명을 지르는 것 같고, 건반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다. 그렇다. 이것이 왕시린이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와 싸워온 방식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나는 오직 작곡을 하고 또 하면서 그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렇게 악보에 그걸 기록했습니다. 누군가 그걸 연주할 때 그건 그 시간을 살았던 인간을 다시 불러내고 그 시간의 무게를 듣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에 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黑衣人)’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왕시린은 마지막에 노래를 부른다. 노래 가사만으로는 이 내용을 따라올 수가 없다. 이 노래는 왕시린이 작곡한 ‘흑의인지가(黑衣人之歌,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노래)’이다. 이 노래 가사는 소설가 루쉰이 1926년에 쓴 소설 <주검>(鑄劍, 쇠붙이를 녹여 칼을 만들다, 한국에는 <도공의 복수>라고 김시준이 번역했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알지 못하면 이 가사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단조롭게 줄거리를 소개하겠다. 열여섯 살이 되는 소년 미간척은 어머니에게 칼을 만드는 천하제일의 명인이었던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다. 왕은 어느 날 신비로운 쇳덩어리를 얻게 되고 미간척의 아버지를 찾아와 검을 만들어달라고 한다. 아버지는 삼 년에 걸려 두 자루의 검을 만든 다음 아내에게 한 자루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의심 많은 왕은 틀림없이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을 바치면 자신이 또 다른 검을 만들지 못하게 자신을 참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아이가 열여섯 살이 되면 자신의 복수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왕궁에 가서 검을 바치고 참수당한다. 미간척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나지만 그만 왕의 부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미간척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난다. 그리고 두 가지 제안을 한다. “만일 나에게 너의 목과 검을 바치면 네 복수를 해주마” 미간척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칼로 자신의 목을 자른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미간척의 목과 검을 들고 왕에게 세상에 없는 구경거리를 보여주겠다고 아뢴다. 그러면서 큰 솥에 물을 끓여달라고 요구한다. 물을 끓이자 그 속에 미간척의 목을 집어 던진다. 그런 다음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솥 안에서 노래에 맞춰 미간척의 목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런데 오르락 내리락 하던 그 목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왕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솥 안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가까이 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아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왕이 솥에 가까이 와서 목을 들이밀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왕의 목을 자른다. 솥 안에 굴러떨어진 왕의 목을 미간척의 목이 물어뜯으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눈을 찡긋 맞춘다. 왕시린이 부르는 노래는 여기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사내가 부르는 노래를 가져와서 작곡한 곡이다. 루쉰의 소설에 관해서는 많은 해설이 있다. 아마 <흑의인>을 보고 나면 당신의 해설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왕시린은 평생동안 싸웠다. 어디서? 그의 악보 위에서. 혁명 속에서의 혁명. 선율과 피비린내. 리듬과 비명.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난 다음 왕시린은 무대를 떠난다. 왕빙은 텅 빈 극장을 둘러본다. 그런데 저기 누가 앉아있다. 왕시린이 앉아있다. 왕시린은 누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까. 왕빙을? 영화를? 천안문의 지도자를? 아니면 역사를? 아니면 우리를? 아마도, 아마도 그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왕시린, 그 자신을,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는 금녀의 벽이 여태껏 깨진 적이 없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 상임지휘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우상 레너드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천부적인 재능과 악마 같은 권력욕을 과시하며, 클래식 스타로 세계 각국에서 쏟아지는 러브콜들에, 일거수일투족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그녀는 ‘교향곡 5번’만 연주하면 꿈에 그리던 말러의 교향곡 전곡 지휘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절정의 순간, 클래식계에서 제명당한 한 젊은 여성의 자살과 성추문 미투(Me Too) 그리고 새로 뽑은 단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리며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흡사 실제 음악업계 인물의 추락을 담아낸 듯 생생한 디테일과 불편한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토드 필드 감독의 16년 만의 연출 복귀작 < 타르 >는 굴곡진 서사와 드라마틱한 비극 대신 섬세한 인물 직조와 그 배경을 리얼하고 꼼꼼하게 스케치하며 권위적이고 욕망이 꿈틀대는 예술의 뒷면을 고스란히 까발린다. 가상의 음악가를 다루는 만큼 이를 진짜처럼 연기해 낼 주연배우와 진짜 음악을 구현해 낼 음악감독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토드 필드는 영화 제작을 진행하며 캐스팅 1순위로 주연 배우인 케이트 블란쳇을, 그 다음으로 음악가 힐두르 구드나도티르를 섭외하는데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1982년 아이슬란드에서 출생한 힐두르는 영화 초반 실명으로도 잠깐 언급되는데, 클래식과 영화음악, 아방가르드 사운드를 넘나들며 현재 가장 주목받는 여성 음악가 중 한 명이다. 대중문화에 큰 영향력을 지닌다는 영미권의 4대 트로피 EGOT(에미, 그래미, 오스카, 토니) 중 EGO를 달성한 채 토니상만 남겨두고 있는 그녀는 음악가 집안(아버지는 작곡가이자 클라리넷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 남동생은 밴드 음악을 하며, 남편은 음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첼로에 빠져들었다. 아이슬란드 예술원과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작곡 및 뉴 미디어를 전공한 힐두르는 연극과 무용, 공연을 위한 곡들을 썼고, 최근 오스카를 수상하기도 한 하우슈카나 <다크>의 벤 프로스트, < 파친코 >의 니코 뮬리 등 여러 아티스트들과 밴드에서 연주 및 녹음을 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아울러 첼리스트로 활동하는 틈틈이 네오 클래식과 힐링 뮤직, 아방가르드한 현대음악 사이에 위치한 독특한 자신의 솔로 앨범 5장을 발표하며 좋은 평가도 얻었다. 2011년부터는 영화음악으로 저변을 넓혀 핀란드와 브라질, 슬로바키아, 터키 등 여러 국적의 작품들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게 된 건 같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영화음악가 요한 요한슨이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일련의 작품들에 참여하면서부터다. 힐두르 구드나도티르 힐두르는 이미 2006년 요한 요한손이 작업한 곡들이나 앨범 그리고 힐두르 자신의 솔로 앨범에 참여하며 여러 차례 교류한 바 있는데, 공감각적인 엠비언트가 몽환적으로 발휘되는 드론 사운드에 중후하면서도 매혹적인 어쿠스틱 음색의 스트링(첼로)을 조화시켜 음악적 방향성과 색채를 공유했다. 요한 요한손이 안타깝게 약물 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그가 진행하려 했던 시카리오의 속편 <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와 TV시리즈 < 체르노빌 >을 이어받아 호평을 받았고, 공동으로 작업하던 <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까지 마무리 지으며 명실상부 그의 사운드를 계승한 새로운 음악가의 출발을 알렸다. 여기에 스판덱스 쫄쫄이 유니폼이나 입고 돌아다니는 유치한 슈퍼히어로라는 장르의 편견과 한계를 부셔버리고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 조커 >의 음악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 되는 찰리 채플린의 아이러니와 마틴 스콜세이지의 비정하고 시니컬한 기운을 잔뜩 물려받은 이 고전적인 영화는 힐두르의 슬픔을 잔뜩 머금은 스산한 사운드로 광기어린 애수의 초상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조커>로만 힐두르는 20개가 넘는 음악상을 휩쓸었으며 골든 글로브 최초로 음악상을 단독으로 수상한 여성 작곡가이자, 오스카 음악상이 단일부문으로 합쳐진 이후 최초 여성 수상자고, 역대 오스카에서 3번째로 음악상을 수상한 여성 작곡가가 됐다. 토드 필드는 음악을 리허설 하는 것은 무엇인지, 음악을 작곡하는 건 어떤 것이고, 그 과정에서 왜 좌절하게 만드는지, 그 심리적이고 정서적 측면을 샅샅이 담아내고 싶었기에 <조커>로 날개를 단 힐두르 구드나도티르가 모든 제작 과정 전반에 관여하길 바랐고, 그 열의와 진심에 반해 그녀는 자신이 맡을 예정이었던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암스테르담>에서 하차하면서까지 <타르>에만 1년이 넘는 시간을 집중해 매달렸다. 힐두르는 <타르>에서 보통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3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하나는 이른바 ‘템포 매핑’이라 부른 - 영화와 캐릭터 간의 사운드 동기화를 이루는 - 비공개적인 음악 과정을 거쳤고, 다른 하나는 리디아 타르가 극 중에서 작곡하던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은 영화를 위한 진짜 스코어 작업이었다. 본 영화 내에서나 앨범에서 결코 들을 수 없는 ‘템포 매핑’ 작업은 상당량의 곡들이 상황이나 캐릭터에 맞는 BPM과 템포로 만들어져 리허설과 세트장에서 배우들이 착용한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왔고, 캐릭터 내면의 리듬을 음악적으로 안내하고, 이를 통해 배우들이 몸짓 언어로 구현할 수 있게 도움을 줬다. 이는 음악을 전공했고,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걷기도 했던 토드 필드 감독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자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사운드 작업을 두려워하지 않는 힐두르였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극중에서 리디아 타르는 딸에게 바치는 곡을 작곡하느라 안 풀리는 멜로디를 잡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메인 테마로 등장하는 “For Petra”다. 힐두르는 대본에서 이 장면을 읽자마자 상승 기조의 멜로디 단서를 바로 떠올렸는데, 작곡가이자 음악가가 외부 세계의 소리나 요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용시켜서 음악으로 완성하는지, 또 그 집착이나 탐구의 과정 속에서 음악이 되기 전의 소리들과 마주할 수 있단 점에서 인상적인 결과물로 다가온다. 물론 영화상 리디아 타르는 결코 완성하지 못하지만, 후술할 컨셉 앨범에선 첫 단서였던 1분 언저리의 보컬곡과 함께 로버트 에임스가 지휘하고 런던 컨템포러리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8분에 이르는 대곡으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유령처럼 들리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40여분에 이르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가는 스코어가 있다. 거의 후반에 몰려있는데 관객은 거의 알아차리기도 힘든 정도로 희미하고 잠재의식 수준에서 작동하는 공감각적인 사운드디자인으로, 매우 건조하고 느리지만 불안하고 섬뜩하며 흥미진진한 영화에 현재적이고, 정서적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는 영화에서 다루는 권력형 갑질과 성추문 등 불편하고 민감한 요소들을 관객의 입장에서 자극적으로 소비하거나 부각시키지 않고, 온전히 리디아 타르가 직접 마주하는 체험적 측면에 주력한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를 비롯한 여러 시상식 기준에 적합하지 않아 음악상 후보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런 연유로 <타르>의 사운드트랙은 정확히 말해 사운드트랙이 아니다. 리디아 타르가 노란 딱지로 유명한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만약 앨범을 냈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컨셉 앨범인 동시에(그래서 이 앨범에 앞서 얘기한 “For Petra”의 완성곡이 담긴 이유다!), 리디아 타르의 실시간 플레이리스트며, 토드 필드와 힐두르가 원했던 “클래식 음악을 준비하는 작업들의 모든 지저분함”을 담고 있는 체험형 실황 앨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케이트 블란쳇이 직접 지휘하는 말러 교향곡 5번의 완벽한 연주가 아닌 리허설들만 일부 수록됐고, 줄리어드에서 인상적인 수업을 하며 직접 시범을 보인 바흐의 “평균율 1번 프렐류드”나 임시 단원으로 뽑힌 첼리스트(소피 카우어)가 어린 시절 연주했던 곡이라며 보내 준 영상 속의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 그리고 영화의 시작을 여는 페루의 주술사이자 치료술사 노래나 오래된 뮤지컬 넘버에, 리디아 타르가 만들었다는 가정 하의 힐두르 구드나도티르가 작업한 결과물과 그 단서들로 다시 재구성된 3악장짜리 현대음악 소품까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영화의 세계가 현실 속으로 확장돼 발휘된 비장의 OST인 셈이다. 이 앨범만으로 온전하게 <타르>의 음악을 모두 즐길 순 없지만, 적어도 리디아 타르가 어떤 음악 세계에 살아왔고, 또 추구해가고 있는가 가상의 방향성을 생생하게 제시하고 전달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힐두르 구드나토티르는 2024년 자신에게 놀랄만한 명성을 안겨다 준 조커의 속편 <조커: 폴리 아 되>로 다시금 영광을 재현할 준비를 하고 있다. Track List 1. For Petra (Vocal Version) - Hildur Guðnadóttir 2. Mortar - Hildur Guðnadóttir 3. Introductory Words 4. For Petra (Recording Session) - Hildur Guðnadóttir 5. Hildur's Impressions 6. Tár: I. Largo - Hildur Guðnadóttir 7. Tár: II. Allegro - Hildur Guðnadóttir 8. Tár: III. Moderato - Hildur Guðnadóttir 9. Symphony No.5 in C-sharp minor / Pt.1: I. Trauermarsch & II. Stürmisch bewegt (Rehearsals) - Gustav Mahler 10. Symphony No.5 in C-sharp minor / Pt.3: IV. Adagietto (Rehearsals) - Gustav Mahler 11. Introductory Words (Recording Session) 12.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IV. Allegro (Recording Session/First Take/Excerpt) - Edward Elgar 13. Control Room Talk (Recording Session) 14.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IV. Allegro (Recording Session) - Edward Elgar 15. Applause (Recording Session) 16.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I. Adagio – Moderato (Recording Session/Excerpt) - Edward Elgar 17. Here's That Rainy Day - Jimmy Van Heusen / Johnny Burke 18. Prelude in C major, BWV 846 from The Well-Tempered Clavier (Lesson/Excerpt) - Johann Sebastian Bach 19. Lydia Tár Field Recording 20. Cura mente - Fernand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