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 사냥꾼
- 감독
- 안드레 오브레달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오토 제스퍼슨 , 글렌 에런드 토스터, 조한나 모르크 , 토마스 알프 라르센, Urmila Berg-Domaas, 한스 모르텐 한센, 로버트 스톨텐베르그
고백하자면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못한다. 반응속도가 느려 적을 처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방향치에 지도 독해력까지 떨어져 게임 공간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다. 연결/협력 플레이도 선호하지 않아 다중접속롤플레잉 게임들은 피하고 콘솔용 싱글 플레이에 집중해왔다. 선호하는 게임 장르도 편협하다. 게임 자체에 깊은 재미를 느껴서라기 보단 디지털 영화 연구의 연장선에서 게임을 시작해 그런지 게임 목록은 주로 ‘영화적인’ 스펙터클의 체험을 제공하는 오픈 월드 어드벤처나 영화적 장르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롤플레잉 장르로 한정된다. 게임도 잘 못하고 좋아하는 게임도 많지 않은데 도대체 무슨 재미로 플레이 하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고독을 즐기기에 게임 세계만큼 좋은 장소는 없다.’ <폴 아웃>, <엘더 스크롤>,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 같은 오픈 월드 어드벤처 게임을 할 때 (자의든 타의든) 이곳저곳을 헤매다 어느 새 미션은 잊고 압도하는 자연 풍경 속에서 디지털 시뮬레이션이 만들어 놓은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때면 평온하면서도 비로소 고독할 수 있다고 느낀다(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디테일한 미션이 많은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개인적으로 불호였다). 특히 주요한 서사적 장소 혹은 필수적인 미션 수행의 장소가 아님에도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곳에 할 일 없이 내가 플레이 하는 아바타를 그저 존재하게 할 때면 더욱 그렇다. 아바타는 거기에 어떤 목적 없이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플레이어와 아바타 간의 연결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다. ‘거기 있음’이라는 액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게임 플레이의 수많은 다른 순간들과 달리 목적 없는 순간은 아바타와 그 아바타에 연결된 플레이어의 존재의 감각을 고조시킨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있다. 다수는 아닐 테지만 어느 플레이어든 그 장소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창조적 노동의 호의가 한편에 있다면, 그 세계가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나’와 상관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디지털 객체의 존재론적 감각이다.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고, 인공적이면서도 자연적이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흔들리는 갈대, 나의 움직임에 상호작용하는 부서지는 햇빛들, 너른 지평선 같은 자연풍경속에 서 있을 때면 낯선 친숙함, 언캐니(uncanny)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지평선을 바라볼 때면 그 세계가 무한으로 연장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트루만 쇼’의 바로 그 벽, 즉 게임에서 늘 더 이상 접근 불가능한 바다, 넘어갈 수 없는 높은 산과 절벽들에서 버둥거려 본다. 이번에 선정한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작품성이나 영화적 쟁점에 있어 < 니트 아일랜드 >보다 뛰어난 영화들이 다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가 정말 사사롭게 나의 어떤 마음을 정확하게 건드렸기에 리뷰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내가 디지털 게임의 가상 세계에서 느꼈던 그 존재론적 외로움을 발화하다. 장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니트 아일랜드>의 감독은 세 명의 프랑스 청년, 에키엠 바르비에, 길렘 코스, 캉탱 렐구아크이다. 이들의 영화제작 현장은 <DayZ>(Bohemian Interactive, Dean Hall, 2013)라는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생존 게임의 가상세계이다. 가상의 소비에트연방 공화국, 체르나루스가 배경인 게임 세계는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공간과 사물에 접근할 수 있는 오픈 월드로 구성되어 있고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션이나 주요한 서사진행이 많지 않아 높은 자율성을 보장한다. 제작팀은 전작에서는 <Grand Theft Auto 5>(록스타, 2013)의 게임 플레이 장면을 녹화하고 편집해 단편 <말로위 드라이브>(2017)를 만든 바 있다. 이 경험을 바탕삼아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인 <DayZ>를 963 시간 플레이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엔딩씬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게임 내의 플레이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나기 위해 긴 거리를 떠돌아다닌다. 당연하게도 실시간 게임 플레이와 결과물로서의 영화는 다르다. 최종적으로 영화에 무엇을 담았는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영화는 ‘게임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963 시간을 플레이하기 위해 좀비와 싸우거나, 다른 생존자와 전투를 벌이거나, 아이템을 찾거나, 때로는 죽어서 게임이 초기화되는 과정을 여러 번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점진적으로 흑백으로 변하고 죽고 나면 기본 아이템만 소지한 채 해변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들은 가상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지 않게 생명력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일종의 카메라 뒤의 장면, 즉 그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 플레이했던 게임적 순간들은 편집되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작팀은 가능한 사살되지 않기 위해 ‘PRESS’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카메라를 들고 인터뷰 대상을 찾아다닌다. 좀비로 인해 인류가 멸망해 가는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뿔뿔이 흩어져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듣고 기록한다. 국가를 비롯한 기존의 사회 체제가 사라진 세계에서 개인 혹은 부족은 자기들만의 삶의 모습과 가치를 만들어 간다. 아포칼립스의 그리스 어원은 ‘덮개를 걷어내다(uncovering)’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를 반강제적으로 제한하고 정의하는 기존의 체제가 무너질 때 우리는 오히려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회와 관계를 만들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사실 그다지 원하는 바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더불어 인터뷰 대상과 세계가 제작자들에게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의 제작 조건을 새삼 고심하게 된다. 제작팀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좀비나 적대적인 생존자들에게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물과 음식, 의류, 의료 용품, 무기 등의 보급품을 수색하고 채집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서도 강도는 다르지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이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신념과 생존방식을 취하는 부족들에 대한 민족지적(ethnographic) 호기심 그리고 비의미의 풍경으로서의 지평선을 조명한다. 제작팀은 처음부터 신뢰를 얻을 수는 없기에 우선은 ‘PRESS’ 뱃지에 의존해본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그들을 보호하는 무기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화제작팀이라 밝히고 죽이지 말라고 요청한 후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간다. 900 시간이 넘는 긴 여정에서 약탈적인 갱단, 자기들만의 신과 교리를 만들고 사마리아 윤리를 따르는 종교적인 집단, 호박을 키워 자급자족하는 사람들, 사람이 거의 없는 광활한 자연 속에 자기만의 비밀 아지트를 만들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호기심 많은 방랑자들을 만난다. 특히 오프닝에서 제작팀과 관객은 윤리적인 충격에 직면한다. 카니발리즘으로 악명 높은 갱단 ‘다크 에즈 미드나잇’의 리더 아이리스는 게임에서 현실에서라면 하지 못할 짓을 마음껏 하며 플레이 한다. 제작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장난감’이라 부르는 죄수를 말 그대로 가지고 놀다가 총으로 쏘아 죽인다. 선정적인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윤리적 갈등을 드러낸다. 아이리스는 카메라, 즉 제작팀이 있기 때문에 더 위악적으로 행동했을 수 있다. 제작팀은 이미 아바타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상황은 게임이기 때문에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리스와 그녀의 무리들이 인간의 형상을 한 아바타를 포박하고 죽이면서 노는 것을 기록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픽션은 아니다. 오픈 월드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충격과 두려움, 호기심과 경외가 뒤섞인 제작팀의 가상 카메라의 움직임과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제작진의 실제 숨소리는 이 상황이 현실의 삶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디지털 시대에 다큐멘터리 윤리가 어떻게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처럼 게임 플레이와 영화제작, 현실과 가상세계는 구분되지 않고 서로에게 침투한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감독들과 다큐멘터리 등장인물들은 게임 속 아바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현실에서의 그들의 외양과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성별, 인종, 패션 등은 아바타를 꾸미기 나름이다. 하지만 아바타의 움직임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조종되고 행동되어진다. 더 중요하게는 마이크를 통해 플레이어들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대화뿐 아니라 마이크를 통해 현실에서 들려오는 앰비언스 사운드는 실제 삶의 레이어를 중첩적으로 드러낸다. 사운드가 다큐멘터리에서 리얼리티를 뒷받침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예증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꼽는 장면 중 하나는 아이를 재우고 밤에 게임을 하는 여성 플레이어와의 만남이다. 이 플레이어는 지하에 있는 방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이 양육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 넘어져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현실의 삶이 게임에 깊숙이 들어온다. 플레이어는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돌보러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난다. 플레이어의 컨트롤이 해제된 아바타는 말 그대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흔적이나 유령 같은 몸은 외로워 보인다. 이 장면은 두 세계가 나눠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신체가 현실에도 가상세계에도 분주하게 분유되어 있음을 각인한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위악적인 기행보다는 다른 감정과 가능성들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제작되는 중간에 코로나19가 발발한 것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지구의 일부 지역들은 봉쇄되었고 고립된 그들은 그들의 아포칼립스 세계를 닮아가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 게임공간에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우정과 공존의 실마리를 찾는다. 특히 하늘에서 헤엄칠 수 있게 디자인된 자신들의 비밀 아지트에 초대해준 부부 플레이어, 채소를 키우고 자립생활을 하는 농부 플레이어들, 고립된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적인 단체, 밤에 함께 캠프파이어를 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지친 현실을 위로한다(DJ가 된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음악을 재생하고 마이크를 통해 공유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장 강렬하게 남기는 감정은 실존적 외로움이다. 현실의 봉쇄에 지친 이들은 함께 게임세계의 끝으로 모험을 떠나기로 한다. 하염없이 몇날 며칠을 지평선을 향해 걸었지만 광활한 공간 뒤에는 다시 광활한 공간이 나올 뿐이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얼마만큼 가야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울감에 빠졌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저 함께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게임 속에서 자살한다. 자살한 후 남겨진 아바타 주위에 모여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뭉클한 감정을 자아낸다. 그들은 외로움을 공유한다. 부재와 상실을 애도하는 순간(사실 플레이하는 동안 현실의 일부를 잃고 게임에 몰입한다는 점에서 게임하기는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장면,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걷는 사람들, 의미를 넘어선 ‘거기-있음’, 그저 함께 있음을 즐기는 사람들, 바다에 다다라 유유히 헤엄치던 종교집단의 리더인 카우보이 스톤 목사가 그의 현실 이름을 말하며 “나는 프랭크일 뿐이에요”라고 나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은 모두 외로움과 상실의 감정을 자아낸다. 이 장면들은 오히려 대립되는 세계라고 여겨지는 현실과 가상이 모두 물질적으로 절실하게 촉지되는 순간들이다. 간격이 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체를 매개삼아 레이어링되는 두 세계의 물질성은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 외로움은 세계가 내가 있든 없든 존재한다는 진실이다. 그것이 실제 삶이든 게임의 가상세계든 말이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혹은 지금은 보고 있지 않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소외가 아니며 오히려 부재이고 상실을 통한 강력한 실존적 감각이다.
나쁜 놈들에게 개과천선은 가능한 걸까? 성악설을 따로 들먹이지 않아도 늑대, 뱀, 피라냐, 상어, 거미 등 오래 전부터 무섭고 위험한 존재로 취급 받아온 이들이 새롭게 거듭나겠다며 착한 일에 도전한다. 하지만 기니피그로부터 제안된 이 실험은 시작부터 그리 녹녹치가 않은데, 지독한 편견과 고정관념 탓에 뭔 일을 시도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질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숨마저 내어줄 만큼 가장 친한 친구 사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 배드 가이즈 >는 변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서투른 고백이자 위로이고, 환대받지 못한 아싸들의 진솔한 우정을 그린 헌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15권까지 출간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호주의 배우 출신의 아동 작가 애런 블레이비의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영화는 크게 1권과 3권의 기둥 줄거리를 바탕으로 < 펄프 픽션 >과 <오션스 시리즈> 등의 전통적인 범죄 장르 영화들과 < 루팡 3세 >나 < 명탐정 번개 (홈즈)> 그리고 <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 같은 다양한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아 재해석되었다. 특히나 실사적인 움직임을 강조해오던 그간의 미국 전통적인 CG 애니메이션 경향에서 벗어나 만화 특유의 과장된 움직임과 가변 프레임적인 연출을 강조하는 스타일은 <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공유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음악을 맡은 이도 다니엘 펨버튼으로 동일하다는 것! 다니엘 펨버튼 1977년생의 다니엘 펨버튼은 현재 가장 핫한 영화음악가인 동시에,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온 뮤지션이다. 1994년 그의 나이 약관에도 미치지 않은 16살 때 만든 데뷔 앨범을 들은 TV연출자 폴 윌름스우스트(다큐 연출을 하다 방향을 틀어 <스트라이크 백>과 <다빈치스 데몬스> 등의 시리즈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베테랑) 눈에 띄어 픽업돼 그때부터 17년간 TV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경력을 쌓아왔다. 그 필모 안에는 <핍쇼>나 <헬스 키친>, <공룡 구출 대작전>, <더크 젠틀리의 전체론적 탐정사무소> 등 제법 우리 귀에도 익숙한 영국 프로그램들도 보인다. 그러다 2011년 비로소 경력에 비해 늦은(그러나 여전히 젊은 나이인 30대 중반에) 닉 머피 감독의 < 어웨이크닝 >으로 장편 극영화음악 데뷔를 한다. 그 후 리들리 스콧과 대니 보일, 가이 리치, 아론 소킨 등 여러 잘 나가는 감독들을 단숨에 만족시키며 영화계 주류 작곡가로 편입되었다. 그가 이처럼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명징한 멜로디 감각과 탁월한 아이디어, 재기발랄한 편곡 솜씨를 보유한 실력 덕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진지한 드라마를 필두로 다큐멘터리, 범죄물, 블록버스터 액션 히어로, 시대극, 판타지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게임)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편식 없이 가리지 않고 모든 스타일의 음악을 매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엔 길고 길었던 TV시절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다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 <배드 가이즈>에서도 이런 그의 유연한 다재다능함은 빛이 난다. 다니엘 펨버튼은 이번 애니메이션이 전통적인 하이스트 영화들에 기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착안, 1960-70년대 사이에 제작됐던 수많은 할리우드 케이퍼 영화들이나 캅 영화들의 스코어에 경배를 바치고 있다. 헨리 맨시니의 < 핑크 팬더 >이나 <피터 건>, 퀸시 존스의 < 이탈리안 잡 >, 랄로 쉬프린의 < 블리트 >, 데이빗 사이어의 <지하의 하이젝킹(펠햄 123)>, 돈 엘리스의 <프렌치 커넥션>, 그리고 존 배리의 007시리즈 등 당대 가장 인상 깊었던 그 쿨한 재즈 사운드가 고스란히 그의 손에 의해 재현되는데, 이를 위해 휘황찬란한 브라스 섹션에 그루브한 하몬드 오르간과 펑키한 퍼즈 기타,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리드미컬한 봉고 드럼, 짜릿한 무그 신디사이저 등 그 당시 악기들을 이용했다. 이미 앞서 다니엘은 그 시절 첩보물의 리메이크인 < 맨 프롬 엉클 >과 오션스 시리즈의 스핀오프 < 오션스 에이트 > 그리고 진지한 누아르 < 머더리스 브루클린 >에서 재즈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실력을 마음껏 피력한 바 있기에 <배드 가이즈> 스코어의 완성도를 의심하는 건 시간낭비에 가깝다.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적재적소에 위치하는 활력 넘치는 레트로 사운드는 교활함과 긴장감, 위트와 낭만, 감동과 눈물을 동시에 아우르며 10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중 거의 내내라 할 수 있을 정도인 80여 분간 깔리며 기둥 분위기를 잡아준다. 하지만 단순한 스타일의 재현과 답습을 넘어 자신만의 색채를 입히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힙합 비트에 심포닉 사운드를 섞어 삽입곡들과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새로운 슈퍼히어로 스코어를 완성시켰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처럼 다니엘 펨버튼은 고전 하이스트 장르물 스코어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색다른 악기들이나 모티브를 도입해 기발한 재미와 흥미를 자아내게 만든다. 인도의 전통 악기 ‘반수리(대나무 플루트)’로 재즈에서 사용되는 플루트를 대체해 작전 이나 잠입 시 독특한 은밀함과 영화 중반 등장하는 크림슨 포의 신비주의를 선사한다던지, 하프와 아코디언, 치터가 뒤섞인 것 같은 음색을 들려주는 일본의 전통악기 ‘다이쇼고토(大正琴)’를 들고 와 그 특유의 서늘한 공명감으로 섬뜩한 빌런의 음모를 암시하는 등 기존 장르 스코어에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실험을 펼쳐 보인다. 복잡한 사연을 지닌 입체적인 기니피그 캐릭터 마멀레이드 교수를 위해선 바흐에서 영향을 받은 피아노(대체적으로 영화에서 컨벤션화 된 악당 캐릭터들이 바흐 음악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를 대입하고 있으며, 후반 들어선 의도적으로 역시 바흐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프로콜 하럼의 히트곡 “A Whiter Shade of Pale”의 하몬드 오르간 전주를 따와 반전의 전조로 써먹는 재치도 발휘한다. 시종일관 질주하는 다니엘 펨버튼의 음악은 마치 갱단의 노련한 움직임처럼 지치거나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앤서니 라모스 이기 팝과 함께 작업한 영화 <골드>의 주제가 “Gold”로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셀리스트와 함께 한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의 주제가 “Hear My Dream”으로 오스카 주제가상에 올랐던 만큼 다니엘 펨버튼의 송 라이팅 실력 또한 무시 못 하는데, 이번 <배드 가이즈>에선 흥겨움을 담당하는 두 곡 “Good Tonight”과 “Brand New Day”를 들려주고 있다. 영화 중반 스네이크가 위기에 빠지자 피라냐가 마이크를 잡고 주위 환기용으로 불렀던 “Good Tonight”는 실제 목소리를 맡은 앤서니 라모스의 출중한 노래 솜씨를 맛 볼 수 있는 곡인데, 그는 뮤지컬 <해밀턴>과 < 인 더 하이츠 >, < 트롤: 월드 투어 > 등으로 이미 검증된 바 있는 가수이기도 하다. 주제가라 할 수 있는 “Brand New Day”는 영국의 소울 충만한 펑크 락 밴드 더 헤비가 소화해 그들 특유의 신명나는 그루브함과 화려한 스윙감을 선사한다. 그 외 배우이자 코미디언 롭 슈나이더의 딸로도 알려진 엘르 킹이 부른 “Feelin' Alright”도 쿨한 <배드 가이즈>만의 색채를 빛내주고 있으며, 사운드트랙 안엔 포함돼 있지 않지만 영화에서 흐르던 줄리 런던이 부른 고전 스탠다드 팝 “Fly Me to the Moon”이나 아니타 오데이의 “Whisper Not”이 분위기를 돋아주고, 더 블랙키스의 “Howlin' for You”, 케미컬 브라더스의 “Go”, 캔트 스톱 원트 스톱의 “Stop, Drop, Roll” 등이 유쾌함을 더한다. 개봉 전 예고편에선 재밌게도 빌리 아일리시의 딱 한글자만 틀린 제목의 노래 “Bad Guy”가 사용되기도 했다. 코로나 기간에 제작되고 상영돼 제약이 많았음에도 전 세계적으로 2억 5천만 달러가 넘는 흥행을 올린 <배드 가이즈>이기에 속편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있다. 실제로 넷플릭스에선 23년 연말을 목표로 홀리데이 스폐셜이 제작 중에 있다. 다니엘 펨버튼이 직접 참여할 진 미지수지만, 현재 애플TV+에서 <에프터파티>와 <슬로 호지스> 시리즈를, 24년 개봉 예정이었다가 무기한 밀린 대망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삼부작을 마무리 짓는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를 작업하는 등 바쁜 스케줄을 이어가고 있어 그의 주가는 더욱 폭등할 것으로 보인다. 거장이 되어갈 다니엘 펨버튼을 지켜보며 <배드 가이즈>라는 제목과 달리 썩 나쁘지 않은 비장의 OST 하나를 기억해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Track List 1. The Big Bad Wolf 2. Meet The Bad Guys 3. Let's Bounce 4. Push Pop 5. Step 3 6. Security Surprise 7. The Dolphin Heist 8. Going to Go Good 9. Turn on the Charm 10. Marmalade Prelude 11. A Heist for Good 12. The Sharing Laboratory 13. Save the Cat 14. "Good Tonight" by Anthony Ramos 15. So Long Suckers 16. The Lair of Loot 17. Loot Loops 18. Bedtime Story 19. Double Crossed 20. Tricky Fox 21. The Crimson Paw 22. Secret Hideout 23. Evil Masterplan 24. The Sad Guys 25. One Last Push Pop 26. Finish Them 27. Huff + Puff 28. Just Robbing This Place 29. Freeway Escape 30. Who Said It Was the End? 31. Redemption 32. The Old Switcheroo 33. "Feelin' Alright" by Elle King 34. "Brand New Day" by The Heavy
< 놉 >을 처음 봤을 때 선명한 지향점을 지녔음에도 부분적으로 불투명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던 필의 전작인 < 어스 >(2019)처럼 구조의 뼈대가 매우 앙상하여, 숭숭 뚫린 구멍과 같은 알레고리가 여러 의미를 불러들이는 형태가 아닌, ‘영화’와 스펙터클이라는 분명하고 직선적인 길을 따라가다 여러 갈래의 분기점으로 갈라진 후, 분명 가려고 했던 목적지에는 도착했지만, 어느 것이 중심 도로였는지 잃어버리게 되는 영화 말이다. 때문에 갈림길 없이 메시지의 대로를 따라 장르가 지닌 속도와 감응하며 시너지를 내었던 < 겟 아웃 >(2017)과 비교하면 <놉>은 장르적으로도 어느 정도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명한 듯 불투명하게 보이는 알레고리와 장르적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놉>에는 분명 기이한 매혹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선명하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상황이 매혹을 만든다 말하고 싶다. 똑똑히 눈으로 보았지만 구름과 언덕 사이를 유영하여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UAP(미확인 항공 현상)를, 보았다고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로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처럼 말이다. 당연히 <놉>을 향한 많은 해석과 이 글 또한 이러한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메랄드(키키 파머)가 일명 오프라 쇼트라고 언급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두려움을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미지를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을 따라 <놉>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영화를 두 번째 감상했을 때 하나의 의미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힘든 두 요소가 마치 카메라와 피사체처럼 마주 보며 반복적으로 얽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메라와 피사체라는 비유는 비유일 뿐 아니라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만큼 <놉>을 ‘영화’에 관한 영화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등장하는 ‘고디가 왔다’ 에피소드를 통해 피사체와 카메라의 권력 관계에 관한 이야기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관음의 대상이던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스크린과 카메라 뒤편의 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 이창 >(1954)처럼, 카메라 뒤편에 선 제프리(제임스 스튜어드)와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는 쏜월드를 완전히 분리시켜 카메라-피사체의 권력 관계를 도식적으로 구조화하는 영화 말이다. <놉>은 당연히 <이창>처럼 딱 떨어지는 구조를 지닌 영화는 아니다. 쏜월드와 달리 진 재킷은 피사체이면서 동시에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진 재킷의 입/눈은 직관적으로 카메라를 유추할 수 있게 시각화되어 있으며 먹이를 먹기 직전에 내는 효과음 또한 셔터의 사운드와 닮았다. 그렇기에 <놉>의 진 재킷과 에메랄드와의 관계는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카메라이자 피사체면서 주프(스티븐 연)의 테마파크처럼 서부 총잡이들 간의 대결 구도와 같다. 대신 서로 한 방을 맞는 순간 끝이 나는 저격수들의 싸움이다. 촬영되는 순간, 찍히는 순간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놉>은 ‘영화’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시선의 권력만으로 선명하게 의미화되지 않으며 피사체/카메라라는 이중 정체성으로 마주 보는 복합적 형태를 이룬다. 한쪽에만 카메라가 지닌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 서로를 찍으려 하는 대결 구도는 자연스럽게 영화에서 스펙터클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놉>에서 스펙터클을 다룰 때 중요한 지점은 <이창>이 지닌 관음의 구조가 아니라, 볼거리를 볼 수밖에 없는 본능 그 자체에 있다. 물론 주프가 어린 시절 겪었던 1998년 ‘고디가 왔다’ 생일 파티 에피소드는 피사체에 대한 존중 없는 스펙터클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또한, 보면 안 된다(Nope)는 장르적 조건과 영화의 제목은 스펙터클에 맹목적으로 이끌리는 관객과 사회에 대한 비판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사-고디라고 할 수 있는 진 재킷이 UAP가 아니라 동물이자 괴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중반부 이후에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두 명의 사람이 사망한 참사에서 살아남은 주프는 고디-진 재킷으로 은유 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매혹을 느낀다. 또한, 보면 죽는다는 조건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두려움에 의한 것이든 시선을 사로잡는 시각적 매혹에 의한 것이든, 진 재킷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보면 잡아먹힌다는 조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수밖에 없다는 스펙터클의 매혹을 강조하는 장치로서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행위에 관한 비판적 은유를 넘어선다. 부분적으로 아이맥스로 촬영된 영화와 진 재킷의 본 모습이 발산하는 거대하고 매혹적 자태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놉>은 스펙터클에 대한 경고이면서 찬사이기도 한 모순적 상태를 카메라이자 피사체인 진 재킷과 피사체인 OJ(대니얼 칼루야)와 촬영자인 에메랄드 두 명의 주인공으로 구조화하고 있다. 주요인물인 OJ와 에메랄드가 각각 피사체와 카메라라는 것은 단순히 비유적 과장이 아니다. OJ는 전반부에서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던 인물이었지만 동생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진 재킷 앞에 서는 것으로 쇼맨(피사체)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에메랄드는 말-진 재킷을 갖지 못했던 과거를 괴물-진 재킷의 사진이라는 이미지 획득하며 촬영자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극복한다. 이 중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촬영자인 에메랄드이다. 이는 스펙터클에 관한 찬사가 비판을 넘어섰다고 말한 것처럼 <놉>에서 나타나는 양가적 구도 중 핵심이 되는 것은 피사체가 아닌 카메라이며,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볼 수밖에 없다는 본능과 스펙터클을 촬영해서 이미지로 소유하고자 하는,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있음을 방증한다. 주프 또한 ‘고디가 왔다’의 참사를 겪으면서 자신이 봤다고 믿는 놀라운 광경을 단순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여 소유하고 증명하려 한다. 당연히 타인의 죽음과 비극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사무실 속 비밀의 방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 않아야 하는 전시와 쇼를 알면서 비밀스럽게 행하는 주프처럼, <놉> 역시 할리우드와 쇼 비즈니스, 황색언론 그리고 그것들을 소비하는 인간을 풍자하고 비판하지만 동시에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쇼로 재구성하며, 스펙터클로 만드는 고전적 구조와 장르적 쾌감을 재생산한다. 많은 이들이 주프와 OJ를 비교하며 이미지와 피사체에 관한 존중의 유무를 두고 둘의 차이에 주목하지만, 사실 통제 되지 못한 스펙터클로 발생한 참사라는 점에서 ‘고디가 왔다’의 사건과 진 재킷과의 마지막 결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디, 진 재킷과 교감하고 있다고 믿는 주프와 눈을 마주치면 공격한다는 동물의 습성을 파악한 것만으로 진 재킷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OJ는 크게 다르지 않으며, 주프가 진 재킷을 비밀스러운 쇼를 통해 스펙터클로 소비한 것처럼 에메랄드 또한 진 재킷을 오프라 쇼트라는 상업적 이미지로 포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놉>에서 말하려는 스펙터클이란 통제 되지 못했을 때 참사가 발생하는 불안정하고 위험천만한 이미지가 아니라, 반대로 통제되지 않아야 볼거리가 발생하고 갈등과 사건이 증폭되는 큰 그림 안에 놓인 하나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주인공이 해결함으로써 큰 그림의 쇼가 마무리된다. 그것이 통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쁜 기적(Bad Miracle)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재구성하여, 스펙터클로 만드는 ‘영화’라는 쇼의 구조이다. <놉>의 진정으로 탁월한 지점은 이와 같은 ‘영화’와 인간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본질을 직접적이고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라는 외피 안에 자연스럽게 배치했다는 것에 있다. 아니 반대로 ‘영화’라는 은유적 외피를 두르고 벌이는 기이한 장르 영화라는 것 때문에 매혹이 발생한다. 예컨대 진 재킷의 자기장에 의해 디지털 카메라에서 원시적 카메라로 퇴행하는 촬영 방식은 인물들의 목적이 쉽게 성취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자 액션 시퀀스의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장르적 제한이면서, 일명 오프라 쇼트라 불리는 결정적 이미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촬영 과정의 매혹을 고전적 틀 안에서 직관적으로 담아낸다. 이처럼 쇼트(Shot)가 총을 쏜다는 행위와 카메라로 찍는다는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을 활용했을 때의 비유 자체는 진부하지만, 게걸스럽게 먹이를 찾아 탐닉하는 진 재킷이라는 스펙터클/카메라가 볼거리와 위협을 동시에 만들어 스펙터클-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어 하면서 이미지의 대상으로 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양면적으로 비추며 진부함과 도식성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본성이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경고를 장르적 즐거움 안에 놓으면서 스펙터클의, 촬영한다는 것의, ‘영화’ 자체의 비윤리적 본질과 매혹을 모순적이고 기묘한 감흥 안에서 감각하게 한다. <놉>의 이러한 기묘한 감각은, 실제 말이든 말을 모사한 모형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빨아들였다 내뱉는 진 재킷처럼, ‘영화’라는 시각 예술이 움직이는 대상을 이미지화 할 수 있게 된 이후에 획득한 의미망들을 수집광처럼 모아 광범위하게 발산시킨다. 그 과도함이 의미적으로 혹은 장르적으로 영화를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미지를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하여 찾아오는 위기가 영화라는 쇼 안에 포함된 하나의 과정인 것처럼, 결말에 이르러 과도하게 펼쳐진 의미망들을, 또 하나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이미지의 마주 봄으로 탁월하게 ‘영화’의 본질로 수렴시킨다. 그 본질이란 영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카메라/피사체의 구도와 같이 두 개의 쇼트가 거울처럼 마주하는 엔딩에 있다. <놉>의 마지막 두 쇼트는, 영화 내적으로 카메라로 포착된 실재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컴퓨터 그래픽의 환영일 뿐인 진 재킷의 사진과, 영화 내적으로는 에메랄드의 눈으로 포착된 ‘저 너머(OUT YONDER)’라는 죽음과 삶 사이의 환영적 이미지면서 영화 외적으로는 인간이 연기했음이 분명한 실재의 마주 봄이다. 이 엔딩은 오프닝 크레딧 위로 영사 됐던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The Horse in Motion>(1878)처럼 ‘영화’란 실제 운동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재현한 것이며, 완전한 환영도 실재도 아닌 모호한 이미지임을 아이러니를 통해 꿰뚫는다. 그리고 마이브리지의 영상에서의 흑인 기수가 <놉>의 OJ로 재생산된 것처럼,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스펙터클을, 나쁜 기적(Bad Miracle)을, 영화를 필요로 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위험한 즐거움이라 하더라도 인간과 ‘영화’가 무언가를 본다는 시각적 유사성을 공유하기에 맞이하는 저주이자 축복인 운명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장면과 <놉>은 동양인 주프가 만든 서부극-테마파크에 서부 영웅이 되어 서 있는 흑인 O.J라는 결말처럼, 눈과 카메라, 인간과 ‘영화’의 핵심을 유머와 아이러니로 정확히 명중시키는 조던 필 다운 탁월한 오프라 숏이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