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자이아 : 팬텀 트리거 02. 소울 스피드
- 감독
- 타나카 모토키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우치다 마아야, 사쿠라 아야네, 나즈카 카오리, 타네자키 아츠미, 난죠 요시노, 요나가 츠바사, 유키나리 토아
똑바로 보자. 파국이 아니라 난국이다. < 기생충 >(봉준호, 2019)의 기택(송강호)과 충숙(장혜진) 가족은 지배계급에 제대로 손상을 입히지도 못하고 폐허의 잿더미에 올라서 미래를 볼 용기도 없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다시 말하면 재현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태로, 순간적으로 출현했던 계급의식을 계급상승 욕망과 부유층 선망으로 다시 환원하며 건축가 남궁현자의 집을 떠나지 못한다. 유령은 애도를 가능하게 하며 마침내 무엇이 끝났는지 역사로부터 어떤 유산을 물려받을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한다. 파국은 과거를 파괴하는 폭력적 힘을 갖고 있지만 그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기택은 햄릿의 아버지처럼 유령이 되지도 못하며, 이 모든 연극의 조종자를 노출시키고 완전한 파국을 이끌어 낼 저력도 없다. 결말에서 기택은 박사장(이선균)을 죽인 후 방공호에서 근세(박명훈)가 있던 자리를 문자 그대로 대신한다. 기택은 자기 가족들한테 ‘친절했던’ 박사장에 미안함을 느끼고, 근세처럼 고장 난 복도의 센서등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켜고 끈다. 한편 장남 기우(최우식)는 아버지가 실패한 신분상승의 꿈을 꾼다. <기생충>의 난국을 응시해보자. 이 영화에서 각 계급이 처한 환경에 대한 묘사는 매우 디테일하다. 계급의 물질성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감각의 클로즈업'을 동원한다. 촉각, 후각, 시각, 운동감각 등 다채로운 감각을 동원해 부유층의 대저택과 다가구 반 지하 생활을 생생하게 시뮬레이션 한다. 햇빛과 비 같은 자연적 현상마저도 계급화된다. 햇빛이 안 들어오는 반 지하는 늘 축축해 빨래가 잘 마르지 않으며 수압이 낮아 변기에 역류현상이 일어나고 하룻밤 비에도 집이 물에 잠긴다. 하지만 큰 통창과 완벽한 배수시설을 갖춘 언덕 위의 대저택에서 비는 가족캠핑을 취소하게 만든 정도의 가벼운 방해꾼이자 다음날 미세먼지를 날려주고 상쾌한 공기를 안겨주는 고마운 자연현상이며 운치있는 풍경이 된다. 이러한 디테일 묘사는 부자와 빈자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승인되고, 관객들은 '맞아. 진짜 저렇지.'라고 존재하는 것을 승인하는 구조를 취한다. 이것은 기존의 것의 인정형식이다. 이러한 감각의 클로즈업은 계급화된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실 각 계급, 직업, 세대, 거주지역 등에 따른 특징들을 추출해 그 디테일을 적확하게 묘사해 내는 표현물은 최근 <피식대학> 같은 유튜브 기반의 코미디 프로그램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특정 집단 시뮬레이션이 더 뛰어나다. <기생충>은 시뮬레이션을 넘어 오늘날 계급의식의 발현 계기를 목도하고, 그를 통해 누가 적대계급인지를 파악하며, 어떻게 적대계급을 무너트리거나 혹은 좌절하게 되는지 까지 가려 한다. 문제는 <기생충>이 그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난국에 빠졌다는 데 있다. 그 난국은 단순히 오늘날 계급구조가 극심한 양극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의 출현, 생존게임에 가까운 경쟁사회, 지배계층에 대한 선망의식에만 있지는 않다. 사실 재현 그 자체의 난국도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이미 계급의식의 출현과 혁명, 그리고 실패 및 대안에 대해 진지한 우화를 만든 적이 있다. 전작 < 설국열차 >에서 기후재난으로 빙하기에 접어든 지구에서 꼬리칸에 있던 잉여 취급받던 사람들은 영구엔진을 가진 기차에서 지배계층이 있는 앞 칸으로 직선적인 전진운동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미 이 움직임을 예측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기획하고 혁명 그 자체를 이용하는 시스템 내에서 '단순하고 뻔한' 전진운동의 계급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존의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영구엔진의 신화, 즉 시스템을 멈추고 아시아 소녀, 흑인 소년, 백곰으로 은유화된 소수자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직선운동의 실패는 고전적인 진보서사의 몰락을 의미한다. <기생충>도 <설국열차>처럼 양극화 현상과 계층의 이동 사다리를 알레고리화 하기 위해 수직운동을 부각시킨다. 언덕 위의 부유한 단독주택과 저지대의 다가구 반지하 주택, 반지하 주택과 아예 보이지 않는 지하의 방공호, 실내외의 오르내리는 계단들, 하강하는 비, 산수경석은 모두 계급의 위계화와 계층이동을 알레고리화 한다. 여기에 수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운동(pedestal down)은 그러한 수직운동을 더 부각시킨다. <설국열차>가 전진운동에서 탈출해 체제 바꾸기의 희망을 엿보는 것으로 끝났다면, <기생충>은 계층이동을 시도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비극을 제시한다. 그 비극의 심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기생충>은 계급재현의 곤란함을 자기 반영적으로 시각화하고 서사화한다. 기택(송강호) 가족은 몰락한 중산층으로 프레카리아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알바를 전전하며 안정된 직장 없이 살아간다. 영화 초반 그들은 전원 백수로 묘사된다. 그들의 유일한 자산은 가족 네트워크이다. 장남 기우(최우식)는 명문대생 친구 민혁(박서준)이 연결시켜준 고액 과외자리를 소개받고 학력을 위조해 IT 기업 CEO인 박사장의 딸 다혜(정지소)를 가르치게 된다. 기우는 박사장의 아내인 연교(조여정)의 의심을 받지만 수업참관 이후 신뢰를 얻고 동생 기정(박소담)을 아들 다송의 미술심리치료교사로 소개한다. 이후 기우와 기정은 계략을 세워 원래 근무하던 문광(이정은)과 윤기사(박근록)를 쫓아내고 아버지 기택과 어머니 충숙(장혜진)을 각각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로 채용시킨다. 모두가 불안정한 생존게임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유사계급에 속한 이들을 가차 없이 사다리에서 밀어낸 기택(가족)은 당연하게도 계급의식을 가질 수 없다. 그런 기택이 마침내 계급의식을 갖게 된 것은 이성적 논리나 도덕률이 아닌 '냄새' 때문이다. 기택은 자기를 고용해주고 매너도 좋은 박사장에게 고마워한다. 심지어 같은 가장으로서 동일시를 한다. 그러나 근세가 다송의 생일 파티에 난입하고 박사장이 더러운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기택은 즉각적으로 분노하고 그제야 계급의식을 갖게 된다. 그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는 이전에 박사장이 기택에게서 유일하게 선을 넘어 오는 것이라고 했던 것으로 언어화되기 이전에 신체적으로 환기되는 즉각적인 혐오다. 기택은 근세와 구별 지으려 했지만, 박사장은 냄새로 그들을 같은 계급으로 묶는다. 그에 반응해 기택은 박사장을 적대적 계급으로 파악하고 그를 살해한다. <설국열차>의 '혁명을 위한 직선운동'처럼 <기생충>에 나온 수많은 계급적 상징과 알레고리는 체제 균열을 가져올 행동이나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 그것은 산수경석처럼 낡고 닳았기 때문이다. 직선적인 전진이나 수직운동과 구도는 이미 영화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기호이고 지나치게 자명하다.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독해를 요청하며 수많은 약호해독의 비평들을 양산해내지만 비판적 힘을 갖지 못한다. 오늘날의 '웰메이드'영화는 좁은 의미의 미스터리 장르가 아닐 때조차도 관객들의 문제해결을 기다리는 미스터리가 된다. 이것은 또한 비판이론과 비평이 처한 난국이다. 이론과 비평은 결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양과 접근성의 측면에서는 흥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보제공 혹은 연쇄적인 동어반복의 재승인과 서사풀이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어쩌면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봉준호 감독이 정교하게 여러 기호들을 흩뿌려 계급의 의미작용을 설계하면 할수록 암호해독의 쾌락만 커질 뿐 그 비판적 힘은 더 약화된다. 이미 <기생충>은 텍스트 내에서 비평을 초청하고 있으며 그 쾌락은 텍스트 가장자리의 안쪽을 끊임없이 맴돌도록 설계되어 있다. 봉준호 감독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는 “상징”이라는 말이 기우의 입을 통해 두 번 언급된다. 기우는 영화 초반 민혁에게서 할아버지가 수집하고 있다는 수석을 선물로 받고 말한다. “민혁아, 이거 진짜 상징적이다.” 클로즈업된 수석은 영화 전체를 은유화 하는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안이 이미 텅 비어 있고 믿음만으로 유지되는 물신(fetish)에 불과하다. 가부장제와 계층이동을 통한 계급상승은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가능성을 잃은 오래다. 기우는 수석 선물을 받고 집 앞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행인에 대적할 용기를 얻는다. 그 싸움은 슬로우모션으로 스펙터클하게 그려지지만 그래봤자 오줌을 뿌리는 순간일 뿐이며, 이미지의 스펙터클화는 기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이다. 수석은 자명하게 계층상승과 출세의 욕망 그리고 가부장의 힘을 ‘상징’한다. 기택을 원망하는 충숙이나 기정과 달리 기우는 장남으로서 자기가 앞으로 물려받을 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택을 존중하고 보호하고자 한다. 하지만 대책 없는 기택처럼 그 수석은 텅 비어있는 기호다. 심지어 기우가 빗물에 잠긴 집에 돌아왔을 때 수석은 말 그대로 물에 뜬다. 기우는 수석이 자신을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텅 비어있기 때문에 가벼워 물에 떴을 뿐이다. 유기성과 총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상징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 의미의 무게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봉준호 감독이 시각적 기호와 의미가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꽉 짜여 있는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 반복했던 모티브, 상징, 알레고리를 통한 의미화(signification) 작업 자체에 회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계급혁명이든 계급의식이든 문화재현의 정치학으로는 비판적인 무게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것이 정교하게 구체적 공간과 소품들을 통해 은유화 되고 시뮬레이션 될수록 오히려 모방과 복제의 과정을 거치며 온라인에 빠르게 퍼져나가는 ‘밈(meme)’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수석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수석은 낡은 자명한 상징이지만 외국인들에게 수석은 미스터리하고 동양적이며 아름다운 소품으로, 수수께끼 같은 재밌는 밈이 된다. 한국인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외국인 관객에게 산수경석의 의미를 해석해 주며 문화적 우위도 가질 수 있다. <기생충>은 위에서 기술한 계급 재현의 곤란함을 모두 반영하고 의미화하면서도 물에 뜬 수석처럼 그 의미의 정치적 힘은 텅 비어 있다. 텅 빈 수석은 정치적 힘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산되는 관객의 암호해독 쾌락을 응시한다. <기생충>은 문화재현의 정치학의 아포리아를 수석에 이입시킨다. 재현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난국이다. 기우는 다송의 그림을 처음 볼 때 또 다시 "상징"을 언급한다. 기우는 벽에 걸린 다송의 그림을 보고 “진짜 상징적이다”라고 말한다. 기우는 기정을 미술교사로 데려오기 위해 다송의 그림 뒤에 해석할 많은 것이 있는 것처럼 과장한다. 기정 역시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 연교에게 다송의 그림이 정신분열과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해석해 준다. 사실 다송의 그림은 어떠한 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 그림은 다송이 밤에 목격한 근세를 그린 것이다. 기호 해독의 과장되고 과잉된 의미화는 타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기호가 더 이상 의미작용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엉뚱한 것을 가리킬 때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으며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은, 무게를 갖고 중력에 영향을 받으며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자연과 신체이다. 기정이 살해당했을 때에도 계급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던 기택은 박사장이 근세에게 불결한 냄새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곧 자신이 적대해야할 계급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를 깨닫는다. 비판적 의식은 기호화하기 어려운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신체성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박사장의 태도는 근세의 신체와 기택의 신체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즉각적으로 계급 정체성과 집단성을 구성한다. 냄새가 유발하는 구분 없음은 언어적이고 의식적인 기호를 초과한다. 그리고 드디어 행동을 할 힘을 얻게 된다. 비, 돌, 냄새 같은 자연적인 것의 사용은 유사한 맥락에서 고려될 수 있다. 계급의식은 계단과 산수경석처럼 의미화 되자마자 즉자적으로 가벼워지고 '밈'화 되는 기호 이전의 원초적인 기호들, 즉 보다 자연적이고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이미지 기호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영겨진다. 기우가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고 사라진 후 텅 빈 기호가 된 산수경석을 다시 산 속 시냇가, 즉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역으로 홍수나 냄새와 같은 자연적이고 신체적인 단위가 아니면 계급의식은 형성될 수 없다는 뜻이며, 이러한 자연화 된 기호화의 반복은 저소득층 혹은 가난한 자들을 문명과 대립되는 비체적 존재로 낙인을 찍는다. 냄새로 엮인 그들은 개별적 존재로 구분할 수 없다. 계급화된 얼굴의 자연화는 계급재현의 실패와 계급의식에 대한 냉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재현 실패의 원인은 오히려 과잉될 정도로 스펙터클하고 세련된 스타일, 디테일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클로즈업된 감각들, 정합적이고 정교한 의미작용으로 인한 약호해독의 '쾌락' 그 자체의 몰두와 네트워크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정보화된 영화 이미지에 근거한다. 기택은 근세와의 계급적 친화성을 신체적으로 자각한 후 방공호에 기거했던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다. 근세의 자리를 차지한 후에는 박사장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근세와 구분되지 않는 비체적 상태의 기택은 순응적인 근세의 의식을 받아들인다. 근세와 기택의 몸은 그 자체로 센서등을 대신 작동하며 자본에 복종하는 부품이자 모스부호를 보내는 몸-기호가 된다. 몸이 아니면 의미화가 불가능하다. 기우는 산수경석의 상징, 즉 가부장의 자리와 신분상승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어와 가시화된 재현을 포기하고 얻은 센서등을 통한 몸-기호로 주고받는 그들의 대화는 생존 신호 정도에 국한되며 계급의식이나 체제균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어떤 면에서 <기생충>은 오마주한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와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 보다도 퇴행적이다. <하녀>에서 하녀 명숙(이은심)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중산층 가족에 불길함을 불어넣고 그들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인지를 폭로하게 만들며 마지막까지도 그 불온함을 거두지 않는다. <설국열차>는 미미하지만 체제 바깥으로의 운동을 시도한다. 반면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은 계급 상징과 알레고리가 더 이상 정치적 언어로서 작동하지 않는 재현의 난국을 회피하기 위해 하층계급을 자연화하며 생존만이 겨우 가능한 방공호로 추락시킨다. 의미의 무게를 만들고 물질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들은 몸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급의식은 개별 신체가 구분되지 않는 자연적이고 비체적인 상태가 되어서야 가능하고 그마저도 지속되지 못한다. <기생충>은 결국 계급화된 얼굴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설국열차>에서 '멈춤'이라는 다른 속도를 상상했던 것처럼, 수직 사다리를 흔들어 놓는, 전혀 다른 계급을 창안하고 호출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언제나처럼 열편의 영화를 골랐다. 작년 말에서 올해 초에 개봉된 아카데미 영화나 영화제 수상작 상당수는 뺐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필자들이 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 중 < 우연과 상상 >과 < 나의 집은 어디인가 >를 골랐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년 최고 히트작은 < 드라이브 마이 카 >였지만 스토리텔링의 도구로서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주었던 영화는 <우연과 상상>이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 번’는 내 머릿속에 아주 오래 남을 것 같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애니메이션이면서 다큐멘터리이다. 이 기법을 이 영화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올바르고 정확하게 사용된 영화는 극히 드물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올해 뽑은 네 편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이다. 그 중 두 편인 < 미싱타는 여자들 >과 < 수프와 이데올로기 >는 한국사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이다. 그리고 지금이야 말로 한국 근대사를 <삼국지>스러운 관계성을 파는 양복입은 중년남자들 주인공의 유사조폭영화로만 그리는 것만큼 나태하고 부정직한 것은 없고 누군가는 이 따분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외칠 때다. <미싱타는 여자들>과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 지루함의 풍요로운 실제로 그런 영화들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올해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충무로에서 나온 대부분의 극영화보다 더 재미있었다. 리스트엔 넣지 않았지만 < 성덕 >은 올해의 한국 코미디 영화 중 하나였고 < 작은새와 돼지씨 >는 올해의 한국 로맨스 영화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 넬리와 나딘 >도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절절한 로맨스이다. 많이들 ‘허구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라고 할 텐데, 사실은 대체로 같은 시공간을 그린 허구보다 더 다채롭고,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은 종종 이를 놓친다. 씨네필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가 두 편 있었다. < 놉 >과 < 썸머 필름을 타고! >인데, 망설이다가 <썸머 필름을 타고!>를 골랐다. 영화쟁이의 광기를 보여주는 인물로 <놉>의 앤트러스 홀스트도 멋지지만 <썸머 필름을 타고!>의 맨발만한 캐릭터는 없다. 일본 청춘영화의 대단한 팬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장르가 정말 완벽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제목을 제대로 적었는지?)>는 올해의 SF이다. < 애프터 양 >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는데, 인형눈을 이마에 붙인 양자경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완벽성’은 훌륭한 영화에게 필수조건이 아니다. ‘완벽성’과 상관없이 재미있고 좋은 것이 엄청나게 많은 영화들이 있고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도 이에 속한다. 이제 한국 극영화가 세 편 남았다. 모두 재미를 기준으로 골랐다. < 헤어질 결심 >을 제외하면 충무로 영화가 한 편도 없는데, 그건 올해 나온 기획 영화들 대부분이 더럽게 밋밋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들은 제대로 나쁘거나 지루하지도 못했다. 실패할 위험부담이 없는 도전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영화들은 심지어 실패도 따분하다. < 성적표의 김민영 >은 올해의 코미디다. 사실이더라도 한국 독립영화스럽게 실없게 웃기는 영화가 아니냐고 따질 수 있을 텐데, 맞는 말이지만 그 실없고 의뭉스러운 웃음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곡을 찌르고 더 웃긴다. 어떤 관객은 이 영화 유머의 ‘충청도스러움’을 지적했는데, 이게 ‘요새 애들’의 유머 감각이라는 분석보다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리고 훌륭한 코미디 대부분이 그렇듯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헤어질 결심>은 좋은 고전 영화들이 가진 복잡하고 다층적인 매력을 잔뜩 가진 영화로, 정말로 로맨틱하고, 정말로 어이없고, 정말로 변태스럽고, 정말로 서스펜스 넘치고, 정말로 웃긴다. 하지만 이 불균질적인 매력이, 감독이 박찬욱이라는 대스타였기 때문에 ‘허락되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가 없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영화이다. 폭력적인 모녀 관계를 다룬, 유명한 배우는 한 명도 안 나오는 2시간 20분짜리 한국독립영화를 도대체 왜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다. 올해 나온 한국 극영화 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만큼 자극적이고 생생한 재미를 가진 작품은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꼭 즐거운 경험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트리거 워닝이 필요하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니까. 하지만 그런 경고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관객들이 이 영화를 건너 뛰어야 한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 반대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바로 그런 관객들에게 최적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상당수는 (전부일 수는 없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며 극장문을 나설 것이다. 제목부터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영화이다. 이정과 엄마 수경은 서로에게 진저리를 치면서도 같은 아파트에 살며 같은 속옷을 공유한다. 이정은 벌써 20대 후반이지만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교통사고에서 시작된다. 언제나처럼 마트에서 치고받고 나왔는데, 그만 수경이 탄 차가 이정을 들이받은 것이다. 수경은 차가 급발진했다고 주장한다. 이정은 엄마가 자기를 일부터 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오싹한 건 후자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정은 그런 주장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이정이 견뎌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의 원인 대부분은 엄마다.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모성 서사와 여성 서사라는 용어를 끄집어 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어권에서 이와 관련된 용어는 언급이 꺼려질 정도로 오염되었고 이상할 정도로 납작하게 사용되고 있어 나로서는 쓰고 싶지가 않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모성 신화를 깨부순다’나 ‘모녀 서사의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같은 말을 들으면 ‘과연 그런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익숙한 ‘모성 신화’를 깬 ‘모녀 서사’인 서사 예술은 원래부터 엄청나게 많았고 여성창작자들의 접근성이 높아진 영화 매체에서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중년여성으로서의 엄마를 내세운 영화는 올해만 해도 꽤 여러 편 나왔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도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수많은 다양한 영화들 중 하나이지, ‘모성 신화 파괴’의 전위를 걷는 작품은 아니다. 그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다. 스코빌 지수를 따지는 매운닭발집도 아니고, 그렇게 보면 오히려 영화들이 납작해지는 것 같다. 영화가 세게 나가는 것은 사실이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딸을 차로 둘이받았을 수도 있는 엄마가 등장하면 아무래도 관객들은 긴장하게 된다. 영화의 재미를 주는 것 대부분은 바로 그 강한 자극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강한 감정과 자극의 연속 속에서 캐릭터를 다루는 고유의 방식에서 진짜로 완성된다. 김세인 감독은 종종 인터뷰에서 엄마인 수경이 비호감으로 보일까봐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정도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수경이 심각할 정도로 비호감인 사람인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경은 영화 내내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온갖 다양한 행동을 한다. 이정에게는 당연히 끔찍하고 남자친구의 딸에게는 더욱 끔찍하다. 단지 이런 캐릭터를 만들 때 창작자는 딸 캐릭터에 100퍼센트 몰입해서 엄마를 공격하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게 김세인의 첫 의도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는 이정도 수경 못지 않은 비호감으로 만든다. 특히 이정이 친구가 되고 싶어 접근하는 소희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면 공감성 수치 때문에 질식할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이정에게 치우친 채로 영화를 본다. (아니, 딸이 그 꼬라지가 된 건 엄마 잘못이 맞다니까!) 하지만 이정과 수경을 붙여 놓고 일정 거리에서 떨어져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의 풍경이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동안 두 사람이 특별히 좋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불꽃처럼 강렬한 캐릭터들은 존재하기 위해 굳이 우리의 애정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변명과 타협없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 과정 중 관객들에게 엄청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가 들쩍지근하고 익숙한 타협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완벽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김세인이 이 둘, 그리고 이들이 속한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완벽한 관찰자 시점을 찾아냈음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현재 방영 중인 TV 애니메이션 <시로바코>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배경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내용을 그린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설명이지만, 실제로 그런 내용의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2014년 10월부터 애니플러스 채널에서 방영 중인데, 아직 미완의 작품을 이번 칼럼에서 다루고자 생각한 것은 이 작품 자체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통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시로바코>란 제목은, ‘하얀 상자’라고 하여 비디오테이프의 하얀 박스를 가리킨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면, 수많은 제작 스태프들에게 완성된 본편을 녹화해서 돌리게 되는데 그때 일일이 발매된 소프트(DVD나 블루레이 등)를 주려고 하면 그 많은 인원에 대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기도 하거니와 애니메이션이 소프트로 출시되는 것은 TV 방영 이후 한참이 지난 다음이니 너무 늦다. 그러니 공테이프에 녹화해서 나눠주다 보니 그 공테이프가 담겨 있는 ‘하얀 상자’ 모양을 빗대어 완성본을 ‘시로바코(하얀 상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더 이상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 CD-ROM 혹은 DVD-ROM 등의 매체로 배포되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용어는 그대로 ‘시로바코(하얀 상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시로바코(하얀 상자)’ <시로바코>의 주인공은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제작진행’이란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사원이다. 그렇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서 말하는 ‘제작진행’의 역할은 무엇일까. 주로 TV 애니메이션 제작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직책명인데, 간단히 말해 애니메이션의 중심 스태프를 보좌하며 잡무를 담당하는 역할이 된다. 자세한 것은 일본어 위키피디아를 참고해보자. 직접 번역을 해보았다. 작화, 배경미술, 채색, 촬영, 현상, 편집 등 애니메이션 제작 공정은 분업화되어 외주프로덕션으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제작진행은 TV 애니메이션에서 해당하는 담당 화를 연출자(‘각화 연출’이라 불리우는 각 화별 담당 연출자)의 지시를 받아 각 제작 외주 프로덕션 사이에 제작 도중의 작품 작업물을 옮겨야 한다. 원화가 완성되면 동화 담당 업체로, 동화가 완성되면 채색 담당 업체로 운반한다는 식이다. 제작 중간 과정의 어떤 작업물을 지금 어느 부서가 갖고 있는지, 항상 변화하는 최신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납품일까지 남은 날짜와 필요한 작업량을 계산하여 확인하고 조정하는 일도 필요하다. 연출가만이 아니라 작화감독 등 개별 부서의 팀장 및 이하 스태프들과 스케줄 관리를 위해 절충을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을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 콘티 등 여러 인원이 공유할 필요가 있는 자료는 복사해둬야 하고, 가끔씩 스태프를 자택과 제작 스튜디오 사이에 이동시켜주기도 해야 한다. 업무 내용이 실로 다양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화려하지 않고 눈에 잘 안 띄는 직책이지만, 제작진행이 없으면 애니메이션 제작은 불가능하다. (중략) 애니메이션 스태프의 생활 리듬은 불규칙적이기 마련이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고, 일이 끝나면 그 즉시 다음 공정으로 작업물을 옮겨야만 한다. 따라서 근무 시간이 불규칙할뿐 더러 장시간 걸리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제작진행은 항상 과중 노동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육체적 피로뿐 아니라 항상 긴박한 스케줄 탓에 정신적으로도 힘든 직책이라 할 수 있다. 업무 시간이 길고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급여가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다. (중략) 가혹한 업무 탓으로 단기간 만에 그만두는 이가 많아, 매해 여러 번씩 직원을 모집하는 회사도 있다. (중략) 셀화로 제작되던 시절에는 연출조수를 겸직하는 경우도 있어, 연출자 옆에서 촬영 준비(필요한 작업물을 모아놓는 작업)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경우에, 각화마다 제작진행 담당자가 별도로 복수 존재하여 교대로 스케줄을 짜서 담당하게 된다. (후략) 이처럼 ‘제작진행’은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의 거의 전체를 지켜볼 수 있고, 또 연출가(감독)와 프로듀서 등 작품의 중심적 인물들과 직접 대화를 하게 되므로 제작진행 출신이 나중에 프로듀서나 감독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로바코>에서 제작진행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도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의 전반을 다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도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쿠로미 양>(다이치 아키타로, 2001)이란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이 일본의 소위 ‘업계 애니메이션’ 중에서 최초로 애니메이션 업계를 무대로 삼았다고 일컬어지는데, 말하자면 <시로바코>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출을 맡은 다이치 아키타로 감독은 < 후르츠 바스켓 > 등의 대표작이 있다. <시로바코>는 애니메이션 제작이 풀 디지털화된 현재 시점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크게 참고가 되는 작품이다. 특히, ‘꿈과 희망’만을 갖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뛰어들고자 하는 지망생들에게는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그런 현실 위에서 꿈을 잃지 않고 어떻게 해서 ‘직업’과 ‘자아실현’을 연결시킬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고교 시절 함께 아마추어 애니메이션 서클의 멤버 중에 유독 성우 지망생 한 명만이 작품 중반을 지난 현시점에서 특별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성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어 가장 화려한 것이 성우이고, 일본의 성우는 거의 연예인 수준으로 인기가 높지만 그만큼 경쟁률이 무지막지하게 높다. 간혹 한국인인데도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꿈을 갖고 성우학교에 입학하는 이를 볼 수 있는데, 국적만 한국일 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교포가 아니라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입장에서 사실상 외국인이 성우로 기용되기는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꿈을 갖고 많은 비용을 들여 일본의 성우학교에 입학하는 외국인은 비단 한국인만이 아니라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로바코>를 보면 일본인이어도 성우로서 데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가 있다. 성우를 소재로 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시로바코> 외에도 많으니, 최소한 그런 작품은 본 후에 일본 유학을 결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쪽이나, 혹은 촬영, 컴퓨터그래픽 등 다른 분야에서는 외국인이 참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거에는 한국 회사가 일본으로부터 소위 ‘하청’을 받아 작업에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아예 일본 회사에 직접 입사한 한국인 애니메이터도 많다. 또 그림 분야만이 아니라 다른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직원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도 <시로바코>와 같은 작품은 참고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과거에도 이런 식의 ‘직업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꽤 많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소위 ‘만화가 만화’ 같은 케이스다. ‘만화가 만화’란 만화가가 만화를 그리는 자체를 소재로 한 만화를 뜻한다. 지금 예를 들자면 대표적으로 「바쿠만」(오오바 츠구미 원작, 오바타 타케시 만화)과 같은 작품이 있겠는데, 그 외에도 좀비만화인 「아이 앰 어 히어로」(하나자와 켄고)에서도 주인공이 만화가 화실의 스태프(어시스턴트)라서 초반 1~2권에는 일본에서 만화가 및 만화가의 화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참고가 되는 내용이 나온다. 또 「외쳐라 펜」(시마모토 카즈히코)은 전형적인 ‘만화가 만화’로서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만화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화를 그리며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작품이다. 「G전장 헤븐즈 도어」(니혼바시 요코)는 만화가와 편집자의 자식들이 주인공인데 일본의 상업만화 세계에서 마치 전쟁처럼 살아가는 만화가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밖에도 ‘만화가 만화’는 많이 존재한다.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 작년 일본에서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화제를 모은 만화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시마모토 카즈히코)의 경우엔, 작가 시마모토 카즈히코가 대학 시절 자신과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안노 히데아키(신세기 에반게리온), 야마가 히로유키(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아카이 타카미(게임 ‘프린세스 메이커’ 제작자) 등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를 설립시키는 중추가 되는 인물들과 만났던 때를 회고하는 자전적 만화로서 1980년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하던 젊은이들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계 를 짊어지는 인물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로바코>나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과 같은 작품들을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을 알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무조건 ‘애니메이션 선진국’, ‘만화의 왕국’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서양, 특히 미국과 비교할 때 상당히 종사자에게 있어서 불리한 업무 환경이라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앞서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기재되어 있는 제작진행 담당자의 업무 내용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급여는 매우 낮은 편인데 업무 시간도 상당히 길고 아주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이는 제작진행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터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그나마 회사 소속인 제작진행에 비해(제작진행 역시도 대개 계약직이라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지만) 애니메이터는 대부분의 경우 프리랜서이므로 아무런 보장이 없어 더 불리한 직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는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프리랜서인 애니메이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일종의 고용보험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일본에서는 상당히 오랜만에 ‘모든 애니메이터를 사원으로 고용’하는 형태를 추진했는데, 회사의 양대 기둥이 되어 온 두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고령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이미 종래의 ‘완전 고용’을 포기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알 수가 있다. 아주 예전, 일본을 대표하는 유서깊은 애니메이션 회사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동화)을 필두로 애니메이터들은 전부 회사 소속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일본영화계 자체가 대부분의 스태프, 심지어 배우들까지를 회사에서 고용하는 형태였다. 오히려 그때에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능력 있는 연출자나 배우들은 회사와의 계약 기간이 빨리 끝나고 프리랜서로 나가려는 분위기였다. 스포츠 선수나 요즘 연예인과 소속사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즉 당시에는 영화제작사가 제작 스태프도 고용했고 연예인 매니지먼트도 담당했다는 뜻인데, 지금 국내에서 가수 분야의 경우 매니지먼트와 음반(음원) 제작을 같은 회사에서 담당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때는 왜 영화 분야에서도 그런 식이었는가 하면, 간단히 말해서 할리우드도 그랬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니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소위 ‘할리우드 황금기’ 시대에는 할리우드 영화사에서도 스태프와 배우들이 영화사 소속인 경우가 많았다. 2011년에 발표된 영화 < 아티스트 >를 떠올리면 되겠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 일본 영화계도 마찬가지 방식이었고, 영화 제작사가 애니메이션도 제작하던 초창기에는 애니메이션 업계도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업계가 점점 변화하면서 모든 애니메이터를 회사가 고용하여 급여를 주는 형태가 점점 불가능해졌고, 결국 전체 사원 애니메이터를 해고하고 외주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분야별로 생기기 시작하면서 현재와 같은 형태가 일본 애니메이션(그리고 미국에서도 비슷하게 바뀌었다)의 주류 시스템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도 시스템이 바뀌면서 많은 배우나 스태프들이 그 변화 속에서의 소위 ‘패러다임 시프트’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했는데, 사회 전체가 보다 좌파적, 사회주의적이었던 과거 일본에서는 그 과정이 보다 과격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당시 토에이동화 소속의 애니메이터 노조에서 서기장(직함 자체가 매우 공산주의적이지 않은가)을 맡기도 했고, 역시 토에이 노조에서 부위원장을 맡았던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최근까지도 일본공산당 지지를 공표했던 것이다. 이 둘은 마지막까지도 토에이동화가 사원 애니메이터를 해고하는 데에 대해 노동쟁의를 통해 꽤나 과격하게 반대한 바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스튜디오 지브리는 애니메이터를 사원으로 고용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계약직 형태가 많은 것 같기는 해도.) 지금은 < 에반게리온 > 시리즈를 가지고 가이낙스에서 독립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스튜디오 카라 역시도, ‘애니메이터의 노후 보장’ 등을 고민하면서 사원 제도를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같은데, 어쨌든 지브리나 카라 모두 일본에서 흥행면에 있어 가장 성공한 작품을 이미 내놓았기 때문에 그 바탕 위에서 직원들의 복지 혜택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겠다. 국내에서도 영화 분야에서 소위 ‘열정 페이’ 문제가 많이 논의되는 상황 속에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의 회사가 스태프들과 표준 근로계약서를 통해 작업했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실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 역시도 여전히 ‘열정 페이’ 위에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고,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이 이제야 시작되고 있는 단계라고 보면 되겠다. (따라서, 작품의 연출 방식이나 제작 방법 등을 참고한다면 모를까, 제작 시스템이나 회사의 구조 등에 있어서는 미국이 아닌 일본을 참고로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라고 해서 물론 전부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보다 합리적인 시스템을 위해 세세한 스태프들까지 각종 단체를 통해 표준적인 계약서와 계약 관계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좀 더 참고할 만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어쨌든, 이런 ‘시스템’이나 ‘절차’에 대해서는 사실 외국이 정확하게 실무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기는 쉽지가 않다. 직접 외국의 해당 업체에 들어가서 몸으로 부딪혀보지 않으면 체험하기가 어렵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기에는 언어의 문제도 있고 상황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체험자들의 경험담이 소개되어야 하는데, 관련서적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담을 듣는다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우연하게 동료나 선배를 통해 잠깐잠깐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고작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로바코>와 같이 전체적인 업계 사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만화 업계에 대해 <바쿠만>이 국내의 독자들의 이해도를 많이 올렸듯이, <시로바코>도 그런 역할이 되었으면 생각한다. 물론 <바쿠만>에서 일본만화의 모든 측면이 다 소개된 것은 아니고 거기에 다뤄지지 않은 내용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킨 면도 있었듯, <시로바코> 역시도 한계는 있겠으나 워낙 참고할 자료가 없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는 그나마 목마른 자에게 잠깐의 소나기 역할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트리거류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독본」 사실은, 작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트리거류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독본」(이 책의 저자는 애니메이션 <킬라킬>을 만든 제작사 ‘트리거’의 이사 겸 프로듀서 마스모토 카즈야) 등과 같이 실제로 참고가 될만한 관련서적이 국내에도 번역되는 편이 더 확실할뿐 더러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선 기왕에 수입된 <시로바코>라도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국내에도 애니메이션 업계가 존재하고 있고 지망하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좀 더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련된 서적이 많이 출간되길 희망한다. 구도나 데생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작법서’는 이미 많이 나왔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위한 ‘스토리 작법서’ 역시 고전이 될만한 프로프나 캠벨의 저서는 물론이고 재작년부터 화제가 된 오쓰카 에이지의 저서도 번역판이 나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분야에서 그런 작법이 아니라 ‘업계 상황’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서적은 아직 거의 없고, <시로바코>나 <바쿠만>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아쉽다. 또 이 작품들은 일본 업계가 아니라 한국의 업계를 다룬다는 한계점도 있으니 더더욱…. 한국의 업계는 좁다 보니 건너건너 다들 아는 사이라서 비판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만화든 게임이든 지망생이 존재하고 매년 신입이 들어오는 업계이니만큼 입에서 입으로 소문만으로 돌고 끝날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상황을 정리해주는 서적이나 직접적으로 업계를 보여주는 작품이 국내에도 좀 더 나와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