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명 8호
- 감독
- 최영철
- 제작년도
- 1978
- 출연
- 김향미, 이대엽, 박암, 최봉, 최성호, 진봉진, 최무웅, 전숙, 이강조, 최재호, 김민규, 김영인, 한정수, 나갑성, 한명환, 황건, 안진수, 주상호, 홍충길, 홍성중, 조춘, 김기범, 임해림, 추석양, 윤일주, 박일, 박광진, 오세장, 박복남, 최성관, 문미봉, 신동욱, 김승남, 김월성, 서평석, 문신억, 백송, 최성, 길다로, 기정수
“요즘 우리나라에 웨스턴 붐이 일고 있잖아. 야 일본에 < 요짐보 >라는 죽여주는 영화가 있는데 이런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대충하나 만들어 볼텨?” 이탈리아의 어떤 영화제작자는 두 패의 악인들이 대립하는 어느 장소에 홀연히 나타난, 선인인지 악인인지 하여간 건달 같은 작자가 문제를 해결하고 멋지게 사라지는 이 이야기에 무척 끌린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세르지오 코부치라는 감독을 불러들여 시나리오도 없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완전한 무명배우였던 프랑코 네로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고, 관을 끌고 다니는 남자, 깜짝 등장하는 무기, 황당하도록 화끈한 결말 등 당대의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들과 함께 장르의 클리셰라고 불릴 만큼 후대에 반복되는 요소들을 정립했던 이 영화는 1966년에 제작된 < 쟝고 > 다. 최근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장르를 아예 통째로 떠다가 본인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재해석해 < 쟝고 : 분노의 추격자 >를 만들기도 했다. < 쟝고 >(1966)와 < 삿갓 쓴 장고 >(1985)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5년.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영화 강국이라고는 부르기는 아직 어려웠던 한 나라에 이 비슷한 생각을 한 제작자가 또 있었다. 그는 많은 연출 경험으로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한 감독을 기용했다. 이미 34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또 반 이상의 각본을 직접 쓴 사람이었다. < 대근이가 왔소 > < 특명 8호 > < 맨발로 왔다 > 같은 다수의 다찌마리 영화로 액션 연출에 경험이 많았고 < A*P*E 킹콩의 대역습 > 같은 영화로 미국과 공동작업 경험마저 있어 글로벌 인재로 손색이 없었다. 최영철 감독은 자작 시나리오로 배우를 캐스팅했고, 영화는 공개되었다. 천인공노할 사기꾼들을 정의로운 두 사내가 쳐부순다는 내용의 < 삿갓 쓴 장고 >는 대충 이렇게 제작되지 않았을까? 삐용삐용B무비의 마지막 원고를 어떤 영화로 해야 할지 나름대로 고민했다. 사실 이 분야가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겠지만, 영상자료원 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가 정말 많았다. 필름으로는 존재하지만 다른 포맷으로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 한녀 >나 < 관속의 드라큐라 > 같은 영화를 꼭 다루고 싶었다. 앞으로 더 나아지리라 믿는다.) 결국 고민은 마지막 회이니, B스러운 재미가 있으면서도 괜찮은 영화를 소개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갈 데까지 간 영화를 소개할 것이냐 하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 삿갓 쓴 장고 >는 후자에 포함하는 영화다. 몇 편의 허탈한 영화를 놓고 고민을 하였으나 이만한 것은 없었다. <삿갓 쓴 장고>와 함께 최종후보까지 올라간 < 햄버거 쟈니 >는 주인공 쟈니 윤 의 카리스마가 김인문-한무의 협공을 이기지 못해 탈락하였다. 장고와 소림사의 만남 영화가 시작되면 한 사내가 관을 끌고 나타난다. 승마 부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리고 판초를 걸치고 카우보이모자를 쓴 그는 터덜터덜 밤길을 걷고 있다. 그때, 반대편에서 한 사내가 또! 관을 끌고 나타난다. 뭔가 비슷한 듯한 복장이지만 삿갓을 쓰고 거적때기를 어깨에 얹은, 비닐 장화를 신은 사내.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삿갓: 너 뭐야. 빨갱이가 아니면 신분을 밝혀 신분을. 카우보이모자: 내 이름은... 장고. 성은 장 씨고 이름은 높을 고자여. 그러니께 장하고도 고. 이제 알았능가. 근데 넌 뭐여. 삿갓: 난 소림사다. 성은 소씨고 이름은 임할 림에 스승 사. 고로 소 하고도 림사. 소림사. 장고( 김인문 )와 소림사( 이승현 )의 첫 만남이다. 음악이나 문학, 그리고 영화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창작과 감상에 모두 작용하는 예술들이 있다. 앞서도 몇 번 말했듯, ‘시작’은 그 미메시스의 시간에 진입하는 관문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이렇듯 다짜고짜 전라도 사투리로 한자 풀이를 하며 관객을 인도한다. 이들이 통성명하는 계기도 엉뚱하다. 그냥 지나가고 있는 장고에게 소림사는 토마토인지 핏덩어리인지 뭔지 모를 것을 집어던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림사는 그때 마네킹을 해체하고 있었다. 어쨌든 화가 난 두 사람은 통성명 이후 시비가 붙는다. 장고: 근디 내가 니놈의 관상을 보니께 영락없는 쾡이여 쾡이! 명심보감에 대장부는 당용인이언정 무위인소용이니라 하였거늘... 소림사: 대장부는 마땅히 남을 용서할지언정 남의 용서를 받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이지? 장고: 허! 소림사: 너도 글깨나 아는 모양인데 내가 딴 건 몰라도 명심보감 하나만은 줄줄 외고 있지. 후후 장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부해서 남 주는 거 아니니께 참말로 다행일세. 하지만 네놈은 푸줏간 신세도 되지 못하는 쾡이 신세여 쾡이! 소림사: 니놈은 너구리 신세고 너구리! 장고: 너구...!? 명심보감 웬 뜬금없는 명심보감 타령이며 쾡이, 너구리 타령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이들의 싸움을 이해해보려 해도, 영화 시작 5분 내에 펼쳐진 일이라 물리적인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뒤에 어떤 전사가 나오느냐? 그런 거 없다. 그냥... 싸운다. 게다가 이놈의 명심보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하는데 이들의 삶의 지침 같은 것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 보도록 노력을 해보자. 하지만 가슴 한 켠에 늘 육법전서를 넣어놓고 언제든 꺼내어 읽는 장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물론 시골에서 경찰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이라는 이유는 있다. 경찰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육법전서를 늘 품에 담고 다니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30살의 장고는(당시 김인문 씨 나이 46세) 그렇게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경찰이 되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장고. 서울에서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관 같이 생긴 궤짝에 새끼돼지 수십 마리를 데리고 왔으나, 악당 두꺼비(한무) 일파의 사기에 당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한 편 장고와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교통경찰이 되기 위해 관 같이 생긴 궤짝에 강아지를 잔뜩 데리고 올라온 소림사 역시 두꺼비 일파에게 걸려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들은 우연히 만나 시비가 붙었던 탓에, 서로가 상황이 이렇게 만들었다 생각하고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그러던 중 장고는 무일푼인 상황이라 한 레스토랑에 웨이터로 취직을 하고, 두꺼비 일당을 찾아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우연히 부모의 원수가 두꺼비 일파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 장고는 그들을 추적하던 도중 필름을 입수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 마약상의 루트를 정리한 필름이었다. 한편 소림사 역시 일자리를 찾던 도중 우연히 장고가 일하는 레스토랑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어 함께 일하며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나 두꺼비는 소림사에게 접근하여 필름을 훔쳐오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유혹하게 되고 소림사는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는데... 머릿속에서 내용을 끼워 맞추어 정리하긴 했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들이 끌고 다니는 관 속에는 새끼 돼지들과 강아지가 들어 있었고, 장고는 육법전서를 들고 다닌다. 소림사는 부모님이 뺑소니로 돌아가셔서 교통경찰이 꿈이다. 그러나 공부 밑천이었던 강아지를 두꺼비에게 다 뺏기고 ‘세계교통정리 선수권대회에 출전해서 챔피언도 따먹으려 했던 꿈’이 좌절되어 절망한다. (이게 내가 정리해서 쓴 것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다. ‘뺑소니 없는 명랑 교통질서 확립’이라는 대사는 내가 웃기려고 쓴 거로 생각할 것 같아 아예 뺐다.) 만약에 장고가 칼이라도 맞았는데 그 자리에 육법전서가 있어서 목숨을 구했다던가, 소림사가 교통정리 스킬을 발휘해 위험에서 벗어난다든가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런 거 없다. 이들이 아는 건 명심보감 뿐이다. 자꾸 장고와 소림사 얘기만 하니까 악당들은 좀 악당다운가 보다 싶으실 수도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 악당 중간보스 두꺼비도 사연이 있다. 시골에서 상경해 돈을 벌어 금의환향해 두 동생들과 행복하게 살려 했지만 ‘여자 좋아하다가’ 결국 악의 길로 빠져든 안타까운 인물인 것이다.(이것도 대사를 통해 스스로 도출한 결론이다.) 게다가 그는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조직원들과 함께 ‘두꺼비 합창단’을 만들어 언젠가는 가수로 데뷔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와 함께하는 부하인 빈대, 벼룩, 모기, 파리 등등이 합창단의 멤버다. 그는 아지트에서 부하들과 함께 ‘두란두란’(아마도 80년대 보이그룹으로 유명했던 ‘듀란듀란’을 지칭하는 모양이다.)을 들으며 미래의 자기 모습을 그리곤 한다. 구수한 사투리 이 정도만 설명해도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가장 충격적인 연출은 아직 말도 안 꺼냈다. 장고는 악당들의 끊임없는 음모와 협박에 필름을 돌려주기로 한다. 두꺼비 조직의 보스 김달성( 김기주 )은 해변가에 가면 외국인 여자가 한 명 있을 것이니 그녀에게 필름을 주고 전달했다는 표식으로 장미를 받아오라고 말한다. 해변으로 간 장고, 과연 금발의 외국 여인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서 있다. 할 일이 있어 오기는 했지만 외국인은 어색한지라 “헤...헬로” 하고 말을 거니, 그 외국인 여인은 “아따 이제 왔능가. 싸게싸게 필름 내놓더라고!” 라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대꾸한다. 이에 놀란 장고가 아니 어째서 사투리를... 하고 묻자 금발의 백인 여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야 내 고향이 전라동께 그라지. 어여 필름이나 내놔야?”라며 구수하게 말을 한다. 로버트 할리도 있는데 이게 무슨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악당의 함정이었다. 가까스로 아수라장을 빠져나온 장고는 결국 그와의 마지막 대결을 준비하게 되는데. 엿장수 가위 최종 보스 김달성과 장고의 대결은 영화 역사상 가장 성의 없는 대결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김달성은 웬일인지 미국식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나타나 장고를 위협한다. 그를 위협하는 무기는 총? 아니다. 칼? 그것도 아니다. 그럼 하다못해 야구방망이? 역시 아니다. 엿장수 가위다. 이유? 없다. 왜 두꺼비파 최종보스 김달성이 살상무기로 엿장수 가위를 사용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이에 맞서는 장고의 밥주걱은 대사로 처리를 해주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림사는 영화 중간에 악당 패거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 ‘엄마의 유물’이라고 쓰여 있는 빨랫방망이를 선보인다.) 김달성: 아니 밥주걱? 장고: 그래 너는 악당 베르나도 산초가 아니라 국산 놀부니께!! 김달성: 놀부...?? 장고: 그래 놀부가 싫으면 어서 이 오동나무 코트를 입어! 끌고 온 관을 가리키며 ‘오동나무 코트’를 입으라 불호령을 내리는 장고의 굽히지 않는 모습에 응원을 하고 있자니 조금 머리가 아파오는데, 대결을 마치고 부모님 운운하며 앞으로 착실하게 살라고 일장연설 하는 장고의 뒤로 구슬프게 흐르는 ‘어머님 은혜’를 듣고 있으면 결국 효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차오르며 결국 다른 생각은 모두 잊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후다닥 스크린에 차오르는 엔딩 크레딧. 이상하게 슬픈 크레딧이다. 몇 번을 돌려봐도, 감독 이름이 안 나온다... 한국에도 ‘알란 스미시’ 같은 이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알란 스미시’는 미국에서 제작자의 간섭 혹은 스태프와의 불화 등 영화가 의도대로 제작되지 않아 연출자가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 거부할 때 대신 올리는 이름이다. 대표작으로는 < 헬레이저4 >가 있다.) Directed by Alan Smithee 최영철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주로 액션영화에 치중되어 있다. 간간이 다른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곤 했는데, 이번에 소개한 < 삿갓 쓴 장고 >를 포함해 , < 백백교 >와 같은 괴작들이 있다. 특히 < A*P*E 킹콩의 대역습 >은 이 분야에서 국내외 모두 알아주는 작품이라 굳이 소개하지 않았을 정도다. 그래도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으로 꾸준히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인데, 사업 파트너의 배신으로 수익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92년 이후 작품 활동이 중단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김인문 이승현 한무 감독: 최영철 각본: 최영철 개봉극장: 명보(서울) 관람인원: 573명
1960년대와 70년대, 80년대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역사는 다사다난하다. 영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정치적 환경, 제작 여건,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씨줄, 날줄로 얽히면서 어느 한 가지 시선이나 가치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참으로 많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이끌어온 영화계의 인물이 누구였는가를 평가하는 일조차 간단치 않은 문제가 되는 것도 영화를, 그 당시의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역사를 평가할 때 가장 자주 드러나는 경향은 ''스타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느 감독, 어느 배우, 어느 제작자 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선정하고 그들이 이룬 업적을 예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한국영화의 역사는 스타의 역사, 주인공의 역사라기보다는 무명의 역사, 패자들의 역사처럼 보인다. 영화인들은 그들의 생존을 모색하는 동안 사회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냉대를 받았고, 한국영화의 제작 여건은 참으로 오랫동안 너무도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서 영화인들은 자신의 꿈을, 집념을 키우고 지켜왔다. 최영철 감독도 그런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963년 < 잉꼬부부 >라는 영화를 감독하고 < 백백교 >(1992)라는 영화를 제작, 감독할 때까지 8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영화의 중요한 스타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의 전환점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한국영화계에서 평생을 바쳐 일한 감독이고 누구보다도 영화를 사랑한 영화인 중의 한 명이다. 최영철 감독은 1933년, 서울 광희동에서 아버지 최석운과 어머니 김준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철물점을 하며 생계를 꾸렸던 아버지 덕분에 생활은 웬만큼 살 만한 정도였다. 어린 시절의 최영철은 다부지고 잽싼 날쌘돌이였다. 체격은 또래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는데도 운동이나 싸움이라면 마다하는 적이 없었고, 져본 적도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의 운동감각은 남달랐다. 특히 야구와 축구에 대한 감각과 재능은 놀라울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지역별 소년단 야구시합에서 3년 연속 우승하는 데 중심 노릇을 할 정도여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축구 솜씨 또한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는 선수급의 수준에 이르렀다. 보성중학교(5년제)에 진학한 것도 축구 덕분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특채된 것이다. 당시 서울의 고등학교 중에서 한양공업고등학교와 선린상업고등학교는 축구 명문으로 꼽히며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보성중학교에 다니던 축구선수 최영철 은 한양공고 축구팀의 스카웃 제의에 따라 학교를 옮겼다. 얼마동안 그곳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그는 다시 선린상고 쪽으로 소속을 옮겼다. 두 학교 모두 그의 재능을 그만큼 높게 보고 있었다는 뜻이지만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학교의 축구부를 오간 일은 그의 인생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소속하고 있던 선린상고의 축구코치가 학교 건물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축구부를 해체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수들 대부분은 한양공고 팀으로 합류했으나 그 곳에서 이적해온 최영철은 그럴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는 광신상업고로 옮겼으나 그곳의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축구부가 개입한 싸움이 벌어지는 바람에 또 다시 덕수상고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수상고에서의 생활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멈추고 말았다. 축구선수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학도병으로 지원해 제8사단 21연대 수색중대에 소속되어 전쟁을 치렀다. 1.4후퇴 때 대구로 내려온 그는 영남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했다. 축구부가 없었던 그 학교에 최영철은 축구부를 창설하는데 앞장섰다. 학교 측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이때 같이 활동한 선수들 중에는 최정민, 문정식 같은 인물들이 있었고, 이들은 1957년, 한국이 처음으로 월드컵 대회에 참가할 때 한국대표로 활동했던 스타들이었다. 최영철 역시 당시 축구계에서 주목받는 유망한 선수였다. 덕분에 영남고는 잠시나마 당시 축구계의 스타들이 몰린 축구 명문으로 이름을 얻었다. 전쟁의 상황이 변하면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다시 배제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갔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마쳤다.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다난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대학 역시 축구 인생의 연속이었다. 축구 특기생으로 국민대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다시 고려대학교 농림대학 임학과로 편입했다. 이때도 역시 그의 특기는 축구였다. 고려대학교 축구부에서 그가 맡은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공을 막을 때마다 날쌘 몸놀림으로 눈길을 모았던 그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날만큼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그의 축구인생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곳에서 멈춘다. 재능에도 불구하고 작은 키는 선수로서의 약점으로 작용했고,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자 결국 축구선수로서의 생활을 접고 말았다. 대학생활도 함께였다. 축구와 함께 성장한 청소년 시절의 마감이나 다름없었다. 최영철 이 시작한 새로운 인생은 영화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촬영가로 활동했던 김명재 촬영감독의 조수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김명재 촬영감독은 최영철의 4촌 매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가 축구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입문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 유전의 애수 > < 오발탄 > 등을 촬영한 김명재는 미첼 카메라를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해서 ''코첼''(Kotchell)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촬영분야에서는 현장에서의 작업 뿐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두드러지게 활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최영철은 김명재의 소개로 안현철 감독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물일곱살 되던 해였다. 연출부에 서드(3rd)로 들어간 그는 < 낙화유수 >, < 백진주 > 등의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계의 분위기를 익히며 영화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경험을 쌓았다. 촬영을 전담하던 김명재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백진주>에서 그는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주로 맡았다. 이 영화에는 훗날 한국영화계의 중요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이만희 가 역시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몇 년간 조감독생활을 하며 영화계에서 기반을 쌓아가던 최영철은 마침내 < 잉꼬부부 >(1963,동아영화사 제작)라는 영화를 직접 연출함으로써 감독으로 데뷔했다. 축구에 인생을 걸었던 그가 영화감독으로 인생을 바꾼 후 첫 번째 만든 영화였다. 그는 ''영화감독이 된 것은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또 하나의 꿈을 이룬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도 축구만큼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옆 집에 왕평 (王平)이라는 배우가 살았다. 해방 전부터 < 군용열차 > < 나그네 >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그의 부인은 나풍심이란 이름의 만담가로, 남편 못지 않은 유명인이었다. 유명한 스타 부부와 이웃하여 살고 있었던 셈인데, 어린 최영철 은 나풍심의 귀여움을 받았다. 덕분에 나풍심의 손에 끌려 부민관(府民館)이나 단성사, 우미관 같은 극장을 자주 출입하게 되었고 영화의 매력에 일찍부터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성장하면서 축구선수로 길을 잡는 바람에 영화와는 멀어졌지만 마음 속에는 영화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떠나지 않았다. 4촌 누이가 영화촬영감독과 결혼한 것도 영화와의 인연을 새삼스럽게 부추기는 중요한 일이었다. 최영철이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접었을 때 주저없이 영화인이 되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의 그런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였다. < 잉꼬부부 >는 김진규 , 문정숙 등이 주연한 홈 드라마. 자식 없이 사는 부부와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살면서 힘겨워하는 두 집안을 대조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신상옥 감독의 < 로맨스 빠빠 >, 이형표 감독의 < 서울의 지붕 밑 >, 강대진 감독의 < 마부 > < 박서방 > 등 60년대 한국영화계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던 홈 드라마의 경향을 잇고 있는 <잉꼬부부>는 최영철 의 영화감독 데뷔를 무난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 로맨스 가족 >이라는 영화를 또 한편 감독한 그는 주위로부터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감독''이란 평을 얻으며 비교적 빠르게 감독의 자리를 다져나갔다. 성격적인 요소도 있고, 운동을 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멜로드라마와 더불어 그가 관심을 가진 장르는 액션영화였다. < 낙인찍힌 사나이 >(1964), < 저 자를 쏴라 >(1964) < 무명가의 지배자 >(1965) < 악인가 >(1967), < 여선장 >(1969), < 암흑가의 지배자 >(1969), < 사나이중 사나이 >(1969), < 홍콩의 마도로스 >(1970), < 홍콩의 단장잡이 >(1970), < 동경의 호랑이 >(1971) 등을 내놓으며 이른바 60-70년대 한국영화계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던 ''충무로 액션'' 장르에서 손꼽히는 감독으로 활동했다. 부족한 자본, 미약한 기술 등으로 대작을 만들기 어려웠던 당시 한국영화계 사정에 비추어 최영철 감독의 활동은 적은 제작비로 흥행성 있는 영화를 무난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로 평가받았다. 그의 활동은 80년대까지 이어진다. < 괴도출마 >(1981), < 화야 >(1983), < 삿갓쓴 장고 >(1985), < 비내리는 영동교 >(1986) 등은 그의 후기 목록들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 편수가 80여 편에 이르는 것은 그의 활동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다. 영화계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란 평가를 많이 받았다. 마음에 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남의 환심을 사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경우에 벗어나는 일은 하려 들지도, 하지도 않았다. 운동선수나 건달들의 세계에서 흔히 보는 ''정정당당''이나 ''의리'' 같은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작 본인이 피해를 입을 때가 많았다. 흥행을 끝내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일한 비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오죽하면 그러겠는가''하는 마음으로 물러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영화감독 최영철 은 두 편의 영화를 직접 제작까지 했지만 영화제작은 그를 회복할 수 없는 형편으로 몰아붙이고 말았다. 감독 생활을 오래 하기는 했지만,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맡긴 일들에서 사기를 당하면서 곤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 비 내리는 영동교 >(1986)와 < 백백교 >(1992)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까지 맡았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작업 기회가 멀어진 그가, 사재를 털다시피 하여 기획한 영화들이었다. 마지막 혼신을 다한다는 각오로 작업에 몰두한 그는 시나리오, 연출 등의 분야에 힘을 기울였고, 흥행은 그쪽 일을 잘 안다는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나 어렵게 제작을 마치고 흥행을 했지만 그는 ''10원짜리 동전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다. 젊음을 바쳐 영화계에서 일했던 그는 그 영화계로부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셈이었다. 그는 영화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미국처럼 제작여건이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만들고 싶은 영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의 표시였다. 조희문 (상명대교수) / 2003년 <프로필> 1933년 8월 25일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임학과 졸업 1963년 < 잉꼬부부 >로 데뷔 <작품 연보> 1963 잉꼬부부 / 로맨스 가족 1964 낙인찍힌 사나이 / 저 자를 쏴라 1965 무명가의 지배자 1966 나그네 밤거리 / 그늘진 삼남매 1967 악인가 1969 사나이 중 사나이 / 죽어도 좋아 / 암흑가의 지배자 1970 동경의 무정가 / 여선장 / 홍콩의 마도로스 / 홍콩의 단장잡이 1971 맨발로 왔다 / 맨주먹으로 왔다 / 54번가의 마담 1972 동경의 호랑이 1973 사나이 훈장 1974 낙인 / 후계자 / 흑백대권 1975 검은띠의 후계자 / 황금마담 / 천의 얼굴 1976 킹콩의 대역습 / 거대한 음모 1977 7호실 손님 1978 특명 8호 1979 여호신 1980 대근이가 왔소 1981 괴도출마 1983 화야 1984 돌아온 장고 1985 비내리는 영동교 1993 백백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