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고다
- 감독
- 정희원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이원종, 안복자, 홍석연
서양화가 청구(靑駒) 이마동(1906-1981)은 1932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 1933년 7월부터 동아일보에 출근했다. 미술 분야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다. 그러던 1935년 여름, 이마동은 서울 시내 곳곳을 직접 돌아보고 풍경을 스케치해 '서울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1회부터 4회까지는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바라본 서울을 스케치했다. 옥상을 내려와 그린 다섯 번째 서울풍경은 종로 네거리였는데 "종로의 옛 기억을 환기시키는 현존한 유일의 기념물"이자 "침묵의 종(鐘)으로서 이 서울의 몸부림을 응시" 1 하는 보신각을 스케치했다. 그다음 연재에서는 "점쟁이, 관상쟁이, 천냥만냥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 줄 모르고 권태에 찌들은 푸념을 허구한 세월을 두고 하고 있는" 2 탑동공원(파고다공원)을, 이어서 7회차에서는 동관 네거리 풍경을 스케치했다. 이 동관 네거리 스케치에는 다음과 같은 경안(耿岸) 서항석의 감상이 덧붙여져 있다.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는 이른바 ‘대경성(大京城)’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그때, 도시 생활자의 머릿속에서 경성은 이미 ‘대경성’이 돼 있는 듯 하다. 서울이 변하여 대경성(大京城)이 되고 대경성이 나눠져 남촌(南村), 북촌(北村)이 된 오늘 북촌의 번화처(繁華處)로는 종로 네거리가 첫째요, 거기 따르려는 것이 동관 네거리다. 십자로에 가로는 전차, 세로는 버스, 제법 교통도 빈번한 편이다. 그러나 여기는 종로 네거리와는 딴 냄새가 있다. 북향하여 바라보면 좌편으로는 명월관을 앞세우고 돈의동 일대의 색주가굴이 유위(有爲)한 청년의 고혈을 기다리고 있고, 우편으로는 단성사가 신장(新粧)을 말쑥이 하고 나앉아 외국영화 봉절관은 나뿐이오, 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저 혼자 바쁘다. 말하자면 여기가 북촌의 환락경(歡樂境)이다. 저기 서있는 망대야. 너는 서울을 화재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이 언저리에서 심연에 빠지는 자들을 또한 감시해 주어야하겠다. 아차, 내가 발 앞을 보고 잔소리하기에 저기 어마어마한 돈화문이 그 옛날을 잊은 듯이 입을 닫힌 채 말없이 서있는 그 심정을 모른 체 했구나. 3 동아일보 사옥에서 시작하여 종로의 보신각과 탑동공원을 지나 동관 네거리까지, 이마동의 북촌 스케치들은 오늘날 독자들의 눈에 그저 고요하고 적막하게 보인다. ‘작은 도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제국의 화려한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남촌에 비해, 조선인들의 북촌 거리는 소박하다. 근대 건축물이 들어서고, 전봇대가 늘어서고, 전차와 버스가 다니는 풍경 속에 조선왕조의 건축물이 조용히 서 있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이마동의 스케치에 글을 보탠 동아일보 기자들의 감상에는 북촌 거리가 ‘번화한 풍경’으로 공들여 서술되지만, 종로 네거리 다음으로 북촌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동관 네거리가 서항석은 오히려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요릿집과 색주가와 극장으로 시끄럽고 요란한 이 뒷골목의 ‘환락경’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조차 ‘심연(深淵)’에 들게 하는 것이다. 그때 서항석의 시선이 자연스레 향한 대로, 동관 네거리에는 돈화문(창덕궁 정문)이 지키고 서있다. 보신각이 자리 잡은 종로 네거리처럼, 돈화문이 자리한 동관 네거리 역시 민족이라는 정체성 집단과 조선인을 매개하는 ‘기억의 터’임을, 서항석은 대경성 사업으로 한창 소란스러운 와중에 한번쯤 되새겨보았을지 모른다. 이마동이 스케치한 연작의 제목이 환기시키는 것은 그러한 기억의 장소들, ‘경성’과는 다른 ‘서울’의 풍경이었으리라. 다시 말해 이마동의 「서울풍경」은 도시 개발과 근대화가 진행되던 당시의 '경성'을 스케치의 여백 너머에서 읽게끔 두고, 현재 발 딛고 생활하고 있는 '서울'을 기억이 공간화되는 장소로 바꿔놓는다. 신축한 3층 건물에 RCA 발성영화 영사기를 들여놓고 토키라는 시대적 변화에 드디어 발을 맞춰가기 시작한 단성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남촌에 화려한 외관의 명치좌와 약초극장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외국영화 봉절권은 나뿐이오"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더 좋은 설비와 안락한 편의시설을 갖춘 극장에서 최신의 명화를 감상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토키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극장'이라는 구획은 이전만큼의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채권자와의 분쟁으로 이미 안팎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단성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외국영화 필름 임대료가 폭등하자 신작 상영도 힘들어졌다. 일본의 배급 체인과 손잡지 못한 채 필름 수급에 난항을 거듭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바쁘다는 서항석의 비아냥은 차라리 그리운 것이 된다. 사진1. 토키 극장으로 개축한 단성사 출처: 『조선과 건축』 1935년 2월호 사진2. 남촌에 신축 개장한 명치좌 출처: 『조선과 건축』 1936년 12월호 조선극장이 화재로 전소(1936)된 이래 북촌 유일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는, 결국 1939년 명치좌 관주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인수된다. 쇼치쿠 체인의 제2봉절관으로서 '대륙극장'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30여 년의 단성사 역사도 시대의 저편으로 기울어 간다. 제 기능을 잃은 보신각과 돈화문을 보며 조선왕조를 떠올리듯, 대륙극장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북촌의 밤을 지키는 단성사도 누군가에게 '기억의 터'가 되었으리라. 1)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5)」《동아일보》 1935년 7월 2일자, 석간 3면 2)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6)」《동아일보》 1935년 7월 7일자, 석간 3면 3) 이마동 그림·경안 서항석 글,「서울풍경 (7)」《동아일보》 1935년 7월 9일자, 석간 3면 상단 그림 1. 동관 네거리 출처: 이마동, 「서울 풍경」 연작 중에서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백암동인(白岩洞人),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비판』1938년 10월호, 74~76쪽. 지금이나 조금 오래 전이나 사십만 부민 때나 칠십만 부민 때나 경성의 소위 북촌에 극장이라는 것은 늘은 것은 없고 오히려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이면 기생퇴물 같이 얼굴이 시퍼러둥둥한 헌 건물의 우미관과 싸움투성이의 단성사라는 것이 있고, 조선의 흥행극장이나마라도 기업적으로 연극단체를 조직해놓고 통제적으로 극장을 경영하는 동양극장이 새 깃발을 들고 나온 것뿐이다. 우리들이 무엇이나 지나간 것을 너무 캐고 비판한들 돌아오는 그 문제만큼은 신통할 것 없으니 조선극장, 단성사에 대해서는 현재가 너무 비참하니 윤곽만 잠시 말하고 동양극장에 대하여 아는 데까지 써보기로 하자. 조선극장이 처음 세워지기는 현재 불탄 자욱만 남은 인사정 [필자 주: 仁寺町, 인사동] 인데 내지인 조천(早川)이란 사람이 세워놓고 얼마하다 이태진(李泰鎭)에게 넘어가고 그 후 김찬영에게 그리고 현재 제일극장의 관주인 미나토(ミナト)에게 팔려 넘겼었는데, 물론 그 사이에 현철, 신용희, 김조성 등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추잡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많고 또 어느 때는 양화(洋畫) 제일봉절(第一封切)로 경성에서 내로라 하고 행세한 적도 있었으나 그나마라도 지금 극장이나 있고 무엇을 한다면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문제라도 붙여보겠으나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느니만큼 가정적으로도 불행한 일청년(一靑年)의 성냥불 장난으로 다 타버리고 땅덩어리만 남아 겨울에는 가련하게도 스케이트 장, 그렇지 않으면 시골로 다니는 곡마단 부스러기가 와서 지나가는 행인의 고개를 기웃거리게 할 뿐이요, 우미관이래야 5전 입장료를 받을 때를 최고로 지금은 경성 내에서 제일 더러운 집으로 소위 “겡가도리" [필자 주: 喧嘩どり, 싸움꾼이라는 의미] 의 소굴이던 우미관패의 잔해가 그저 남아있는 것 같고, 제일극장이래야 그 역 우미관류이며, 오직 북촌에서 문제되어 때로는 서로 경영상 혹은 영업상으로 경쟁도 하고 흥행방식을 때때로 꾀하는 것도 결국 동양극장과 단성사뿐이다. 단성사라면 조선사람의 머리에는 아직까지도 머리에 인상이 깊은 것은 고(故) 박승필 씨가 처음 시작해서 중간에 그 분이 돌아가고 박정현 씨가 맡아 하게 되고 그 후의 여러 가지 추문, 소문 등이 많았어도 경영체는 늘 박씨의 일파에서 해온 것으로 북촌에서 조선사람의 극장 경영은 오직 이 하나뿐이었고, 무성영화 시대의 조선영화는 거의 다 단성사에서 봉절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극장을 신축하고 최신 RCA 영사기를 배치하여 한때는 전 경성(全京城)의 양화 봉절관으로 수위를 점령했던 것도 지금에는 옛 꿈, 갖은 비화(悲話), 애화(哀話)만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단성사가 오늘날 이렇게 쇠퇴하게 된 제일의 원인은 물론 가급적 현대적 설비를 해놓은 명치좌, 약초극장 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2류 극장으로 아니 떨어질 수 없었지만, 결국 단성사를 오늘날 비경(悲境)에 빠지게 한 것은 신무대 때문이요, 지엽적으로 조그마한 문제를 든다면 내부의 추잡한 문제를 들 수 있으나,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성사를 신축할 때에 그 설계의 빈약함을 지금 또 탓을 아니 할 수 없다. 일지사변 [필자 주:日支事變, 중일전쟁] 이 나기 전까지도 조선극장이 그 뒤터를 더 사서 늘여서 크게 지려다가 옆집에서 땅을 아니 파니까 할 수 없이 그냥 그 터로 4계(階)로 짓는다고 했고 구(舊) 종로서 터에 모(某)가 극장을 짓는다는 둥 또는 공평정 [필자 주:公平町, 공평동] 공설시장 비스듬히 건너편 광장에 내지(內地)의 재벌이 나와 극장을 짓는다는 소문의 소문이 돌아다녔으나 북지(北支)의 총소리 한방으로 그런 말은 꼬리를 없애버리고 오직 현재는 숨넘어가는 어린애와 같은 운명에 있는 단성사와 조선 흥행극계에 무적함대와 같이 돌진해가는 동양극장이 있을 뿐이다. 동양극장이 처음 개관식을 하기는 소화(昭和) 10년 가을인 모양인데 지금은 고인이 된 홍순언 씨가 극장 명의 관계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씨와 형식상으로 손을 잡고 실상의 극장의 경영은 한때 조선문단에 너무나 거탄적 존재이며 신문연재소설의 왕좌격이던 최독견 씨를 지배인으로 맞아들인 홍순언 씨의 두뇌의 명석함을 가히 짐작할 바니, 최독견 씨가 동양극장의 모든 일을 맡아가지고 오늘날까지 일하여 왔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연극은 기업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조선에서 뚜렷이 보여준 이가 최씨이며 배우들도 연극으로 생활을 안정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넣어준 것도 최씨이니 현재 동극 [필자 주: 東劇, 동양극장의 줄임말] 에서 매월 월급을 먹고 있는 사람이 이백여 명이요, 배우들도 전부 매월 최저 사십오 원에서 최고 백여 원의 월급을 받고들 있다. 동극이 처음 탄생할 때에 큰 공로를 한 분이 현재 동극 문예부에 있는 이운방 씨인데, 그 분의 알선으로 청춘좌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그의 멤버는 대개 토월회의 후신이라고 할 만한 송영, 서월영, 박제행 씨 등이 중요한 멤버이었다. 이 청춘좌는 주로 동양극장에서 경성 손님을 상대로 하려고 조직한 것이니 그 다음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하여야 하겠으므로 동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험으로 조선에서도 손님을 웃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을 조직해보겠다는 것이 주점(主點)으로 희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해서 수차 흥행을 하여보았으나 아직 조선에서는 일러(그렇다면 오늘의 조선의 연극팬은 눈물을 즐겨하는 모양이다.) 결국 실패하고 동극좌와 희극좌와 합병을 시킨 것이 결국은 금일의 호화선이라는 것인 게, 결국 동양극장의 달러 상(箱)은 청춘좌이다. 그러면 오늘날 연극을 궤도에 잡아 올리고 통제와 기업적 조직 아래에서 연극흥행을 해나가며 배우의 이상과 출세의 길을 열어준 것이 오늘의 동양극장이라면 그것을 운전해온 사람이 즉 최독견 씨이다. 조선의 연극흥행에 있어서 그의 공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년 봄에 들어가 동양극장에서는 이중흥행을 하여 낮에는 영화를 2회 상영하고 야간에만 평상대로 연극을 상연하는데 이것이야 재래의 연극 주야 2회 상연으로 인한 배우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로에 완전히 구해냈다고 볼 수 있으며, 극장 경영상이나 연극의 질적 향상이나 사회적 문제로 보더라도 배우들의 보건을 위하여 크게 기뻐할 바다. 그런데 그 극장의 설계가 얼뜬 보기에는 객석을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으나 실은 무대에 돈을 더 들이고 연구를 하여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회전무대라는 것을 만들어왔다. 이렇게 비약과 진전이 있는 데는 물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없을 수 없어, 혹은 청춘좌의 일부 배우가 탈퇴를 하여 중앙무대라는 것을 조직해서 중간극이니 무엇이니 해봤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금년 5월 1일 동양극장은 여러 가지 풍문 속에서 극계의 성공아 최독견 씨의 손에 경영일체가 넘어가고 말았다. 과거의 동양극장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현재의 동극의 전권을 장악한 최씨의 수완을 크게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나 벌써 들리는 말에는 조선영화 배급계의 오소리티 [authority] 인 이창용 씨와 같이 경성촬영소를 매수하여 조선영화제작도 한다 하니 불행과 비운만 거듭하던 조선흥행계에서 기린아 최독견 씨의 앞날의 원대한 성공을 빌며 붓을 놓는다.
< 야광(Glow Job) >(2018)은 임철민 감독의 (공개된) 5번째 작품이다. < 프리즈마 >(2013)에 이은 두 번째 장편영화이고, 1인 제작 작품이었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소규모 스태프들과 함께 한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프로젝트 <야광>’은 영화와 공연예술 형태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 프로젝트는 2017년 12월 광주 아시아문화전당(ACC)의 ‘젊은 공연예술 창작자 인큐베이팅 SHOWCASE’에 선정되어 먼저 공연 형식으로 소개되었고, 영화는 2018년 8월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야광> 프로젝트의 출발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던 개인적 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라져 가고 있는 어떤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다. 잠이 들었다 깨어난 순간의 몽롱하고 기이한 느낌은 임철민의 영화 세계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티브다. < 골든 라이트 >(2011)와 <프리즈마>도 바로 그 순간의 체험에서 비롯된 영화다. 차이가 있다면, 전작들에서의 그것이 잠에서 깨어나 마주한 창밖의 빛 체험이었다면, <야광>에서 그것은 영화관 스크린의 (명멸하는) 빛에 대한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작들이 그 순간의 느낌을 영화를 통해 되찾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야광>은 처음부터 ‘영화관’ 또는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단지 개인적 체험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인 문화적 체험의 차원으로 그 질문을 확장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에서 집단으로의 확장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 과거(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로의 확장이기도 하다. (이미 사라진) 파고다극장, 극동극장, 성동극장, 그리고 (이제 사라지게 될, 즉 아직은 그 ‘흔적’이 남아있는) 바다극장 등은 6~90년대에 영화관이자 남성 성 소수자들의 ‘크루징 스팟(cruising spot)’으로 향유되었던 장소들이다. 남성 성 소수자들은 영화관이라는 공적 공간을 공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리비도의 장소로 점유/전용했다(일종의 ‘스쾃 운동’). 디지털의 도래와 함께 그 남성 성 소수자 하위문화는 사라졌고, 그 문화의 물리적 토대였던 극장도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다(이제 그 문화 또는 커뮤니티는 인터넷과 미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가상공간으로 이동했다). <야광>은 이 사라진 장소와 문화의 흔적을 찾아 탐색하는 영화다. 그 과정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영화관’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의 과정이기도 하다. <야광>의 구체적 내용은 몇 마디 말로 요약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자기중심적 서사 구성의 욕망에 저항하는 영화이고, 쉬운 대답을 제시하기보다 기꺼이 실패 가능성을 무릅쓴 수행적 질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영화’ 또는 ‘과정으로서의 영화’인 이런 텍스트에 대해서는, 안이한 요약과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거듭 보면서 함께 그 질문을 수행할 파트너로 삼는 것이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그 동참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콘텍스트 또는 정보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앞서 이야기한 이 프로젝트의 (식별 불가능하게 혼합된) 두 가지 계기이고, 둘째는 임철민의 영화 만들기가 보여주는 어떤 특징이다. 임철민은 먼저 계획(시나리오 또는 구성안)을 세우기는 하지만, 정작 영화 만들기를 시작하면 그 틀을 깨고 과정에서 마주친 우연적 요소들을 수용한다. 이 비우기와 채우기의 과정은 매우 직관적이지만, 최종적인 전체의 구성은 매우 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프리즈마>와 마찬가지로 <야광> 또한 매우 논리적인 3부 구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직관적으로 선택된 우연적 요소들과 논리적으로 배치된 3부 구성은, 매우 특이한(풍부하고 깊이 있는 질문으로 확장되는) 상징체계를 설립한다. 물론 이런 영화 만들기의 과정은 <야광> 또는 임철민만의 특징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좋은 작품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야광>에서 특별한 것은 그 상징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의미론적으로 충전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가령, <야광>의 첫 쇼트에서 들리는 ‘빗물 소리’는 그냥 채집된 소리가 아니라 만들어진 소리다. 임철민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과거 필름 시대 영화관 스크린에서 ‘비가 내리는’ 현상(일종의, ‘시각적 노이즈’)을, ‘빗물 소리’라는 청각적 요소로 전환하여 현재로 옮겨 놓는다(이 빗물 소리는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직접 제작한 ‘빗물 장치’를 통해 얻은 소리다. 그 빗물 장치는 앞서 말한 공연에서 매우 중요한 무대 장치로 사용되었다). 이렇듯 사라진 과거의 흔적을 현재의 물리적 현상으로 되살려낸 이 소리는, 앞서 말한 ‘극장-크루징 스팟’의 분위기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환경적 요소였을 것이다. 이 현재화된 과거의 소리는 디지털 시대 남성 성 소수자 하위문화를 구성하는 다른 청각적 요소들(미팅 애플리케이션 알림음 소리, 그 커뮤니티에서 유행하고 있는 커버-댄스 문화를 제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엔딩곡 ‘숨바꼭질’)과의 차이를 통해 일정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매우 의미론적으로 충전된 요소이다. 영화 <야광>은 이런 맥락에 대한 아무런 소개 없이 영화의 첫 부분에 던져 놓는다. 이 무심 또는 불친절은 <야광>을 또 다른 의미에서 ‘미완의 영화’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야광>은 ‘완결된 미학적 대상으로서의 작품’이라는 신화, 또는 ‘폐쇄된 극장에서만 진정으로 수행되는 영화적 체험’이라는 시네필의 신화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진정한 ‘포스트-시네마(영화이자 영화관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시네마)’라고 할 수 있다.
원신연 감독, 공유 주연 < 용의자 >는 왕년의 ‘레전드’ 스턴트맨들이 총집결하여 반가웠다. 최태환 무술감독과 원신연 감독의 동생인 배우 원풍연 , 그리고 성룡이 이끄는 무술팀 ‘성가반’에서 이충지, 박현진 등과 함께 맹활약한 한국인 이인섭 도 눈에 띄었다. 최태환 감독이 소속된 무술팀 ‘트리플A’(All About Action)는 이인섭이 < 러시아워3 >(2007)를 끝내고 돌아와 오세영 무술감독과 함께 < 왕의 남자 >(2005)에 참여하기 직전 공동대표로 꾸린 팀이다. 가장 반가웠던 인물은 바로 원진 이었다. 영화 속 청량리역에서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얼핏 왜소해 보이는 남자가 지동철(공유)과 싸우며 그야말로 날렵하고 화려한 발차기를 자랑했다. 가끔이라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스턴트맨들 중 정두홍 무술감독의 몇 안 되는 선배이자, 그가 머리 숙여 실력을 인정한 진짜 레전드가 바로 원진이다. 그들 대부분은 ‘밥풀데기’ 개그맨 김정식이 몸담기도 했던 ‘오뚜기 무술단’ 동료들이었다. 최태환 , 원풍연 , 이인섭 물론 그는 < 조폭마누라 >(2001), < 청풍명월 >(2003), < 낭만자객 >(2003), < 청춘만화 >(2006) 등의 무술감독이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실력자라 종종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무명 시절에도 왜소한 체격 탓인지 주연 여배우 대역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폭마누라>에서 신은경 대역을 한 것도 역시 그다. 다소 중국스러운 이름 때문에 중국 액션배우로 아는 사람도 많았고, 실제로 홍콩 골든하베스트사의 초청으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는 바로 < 가자왕 >(1992)에서 길게 머리를 늘어트리고, 다리를 뒤편 위로 치켜 올려 전갈 권법을 구사하는 모습이다. 그 자세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한 ‘공중 돌려 가위차기’는 홍콩 스턴트맨들도 한없이 부러워했다. 원진 을 포함해 역시 오뚜기 무술단 스턴트맨 출신의 원신연 감독이 옛 동료들을 불러 모아 완성한 < 용의자 >는 그야말로 훈훈한 ‘우정의 무대’라고나 할까. 여기서 떠오르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비록 전체적인 완성도는 미흡하지만 당대 ‘무술인’들의 ‘십시일반’ 정신으로 완성한 김춘식 감독의 < 고수 >(1997)다. 역시 스턴트맨 출신의 김춘식과 당시 홍콩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원진 이 동료들을 규합해 ‘진짜 우리들만의 제대로 된 액션영화를 만들어보자’고 품앗이하듯 의기투합한 것. 비록 스타급 배우는 없고 제작비는 넉넉하지 못 했지만 스턴트맨들끼리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거기에는 ‘액션을 영화의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주재료로 써보자’, ‘우리도 남들 대역만 하지 말고 진짜 배우가 되어 보자’는 생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배경은 1930년대 일제치하, 친일파인 기봉( 장정국 )은 딸 승희( 김지은 )를 일본의 실력자 노무라( 최성 )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이에 승희는 연인 형철( 우승봉 )과 함께 돈을 훔쳐 달아난다. 전국을 떠돌던 그들은 우연히 차례로 변소동( 오동영 ), 조달구(김춘식)를 만나 도움을 얻게 된다. 기봉이 보낸 조직 ‘야수파’ 등에 맞서 승희와 형철을 도와주는 그들은 물론 돈 때문이다. 한편, 한 손에 갈고리를 하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고수(원진)는 조달구를 쫓는다. < 고수 > 출연자들 아쉬운 점은 역시 어설픈 유머가 난무하는, 물론 보다 보면 귀엽기도 한 이야기의 완성도다. 승희와 형철을 추적하는 조직의 이름이 야수파인 이유는 그들의 별명이 하나같이 멍멍이, 풍뎅이, 메뚜기, 반달곰, 올빼미 등 ‘야수’ 혹은 ‘동물’들이기 때문이다. 개의 귀 모양을 한 모자를 쓴 멍멍이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이인섭 이며, 승희와 형철을 쫓는 또 다른 3인조 중 핑크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바로 오세영 무술감독이다. 또한 ‘홀쭉이와 뚱뚱이’처럼 반목하는 변소동과 조달구는 서로의 이름으로 장난을 친다. 자신을 ‘조달구’라고 소개하자 변소동이 “좆 안 달고 태어나는 남자도 있당가?”라고 놀리고, 이에 질세라 조달구는 ‘변소똥’이라 부르며 달려든다. 이들이 등장해서 완성한 추격의 로드무비가 B스러운 것은, 바로 등장인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동료들을 규합해 영화를 찍고자 합의는 하였으나, 이 사람도 눈에 밟히고 저 친구도 눈에 밟히니 그저 엇비슷한 분량으로 몽땅 출연시킨 느낌이다. 그래서 친일파 기봉은 딸을 잡아들이기 위해 아무런 원칙도 없이 야수파도 보내고, 혼성 3인조도 보내고, 다시 남성 2인조까지 보낸다. 게다가 서로 각자의 실력을 자랑해야 하니 의욕에 넘쳐 그야말로 영화 내내 묘기 대행진이다. 별것 아닌 동작도 굳이 날아오르거나 몇 번 굴러서 ‘짠’ 하고 잡아내는 식이다. 당연히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한 덤블링 하는’ 스턴트맨들이다. 단지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킬러를 보낸 인해전술의 추격극이 과연 있었던가. 원진 그래도 역시 실질적인 주인공은 가장 화려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원진 이다. < 가자왕 >을 연상시키는 돌려차기에다 쉴 새 없이 ‘날고 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분명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지만 적어도 액션에 있어서만큼은 대역도 속임수도 없는 진짜 퀄리티 높은 액션영화인 것. 원진의 또 다른 추천할만한 한국 액션영화로는 < 용호취 >(1988)와 <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 >(1989)가 있다. 코흘리개 신인 정두홍이 참여한 <밥풀떼기 형사와 쌍라이트>는 그가 실력을 인정하는 두 선배 류창국 과 원진의 대결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랬던 그들이 이른바 ‘아동용 영화’의 긴 암흑기를 지나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된 건 무척 뿌듯한 일이다. 한동안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김춘식 감독은 작년 조주현 , 전세홍 주연의 ‘리얼 액션영화’를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진짜 완성됐는지 어땠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 아는 여자 >의 패러디인지 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쨌건 제목은 < 패는 여자 >였다. 오동영 김지은 감독: 김춘식 각본: 이무섭 개봉극장: 바다, 파고다4관(서울) 관람인원: 1,300(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