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 감독
- 리차드 버튼, 네빌 코길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차드 버튼, 안드레아 터버, 이안 마터, 엘리자베스 오도노반
한 가지 사실을 먼저 환기해야 할 것 같다. 로베르트 비네의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은 첫 번째 표현주의 영화가 아니다. 순서대로 따라가야 한다면 1913년 파울 베게너의 < 프라하의 학생 >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미 이 영화에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보여줄 거의 모든 것을 선취하고 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소설과 <파우스트>를 느슨하게 각색한 시나리오, 도플갱어의 등장,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명암대조법(chiaroscuro) 촬영, 환상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오가는 진행.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왜 영화사의 순간을 건너뛰었나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독일 영화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표현주의에 대해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칸딘스키,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것이다. 파울 힌데미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물론 그 배경에는 저 멀리는 독일 낭만주의가 자리 잡고 있고, 배경에는 바이마르 문화가 음산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몇 번이고 영화사의 섬광 같은 순간으로 뛰어들고 싶다고 말했다. 내 목표는 체계적인 영화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사에는 가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전혀 훌륭하지 않다. 이 영화를 연출한 로베르트 비네는 영화사에서 이 영화 단 한편으로만 기억된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영화사의 섬광이 되었다. 일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온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는 두 사람은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다. 모두 6개의 막(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공원 벤치에서 시작한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마지막에 스포일러가 있다. 원치 않는다면 여기서 다음 문단으로 건너뛰기를 바란다) 한 청년이 곁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그 앞을 지나간 여인이 자신의 약혼녀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긴 이야기를 한다. 청년과 그의 친구는 약혼녀를 사이에 놓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중인데 마을에 칼리가리 박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조수 체자레를 이끌고 나타난다. 칼리가리 박사는 체자레에게 최면을 걸어서 예언을 요구한다. 체자레가 죽음을 예언하면 다음 날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해서 발견된다. 청년은 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칼리가리 박사와 조수 체자레를 뒤쫓는다, 그리고 그들의 은신처인 정신병원에까지 따라간다. 거기서 알게 되는 건 청년이 정신병원 환자라는 사실이다. 이 각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독일 영화사들의 경제적 연합인 Ufa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영화사 데클라(Decla)를 운영하던 에리히 포머였다. 그는 다른 영화사들과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했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각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에리히 포머와 두 명의 시나리오 작가 사이에서 의견 일치를 본 것은 아니다. 제작자 에리히 포머는 돈을 벌기를 기대했고,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는 자신들이 예술적인 무언가를 썼다고 믿었다. 이 시나리오의 세트를 지어야 했고, 그때 프라하에서 온 세트 디자이너 알프레드 쿠빈에게 제안했을 때 관심을 보였다. 이 도시에서 공무원 프란츠 카프카가 퇴근하면 밤마다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생각을 함께 떠올려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에리히 포머가 제작비를 받아들고 일부만 세트를 짓고 배경은 그림을 그려서 대신 하자는 제안을 했다.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프리츠 랑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찍었을 것이다. 프리츠 랑은 이 영화의 테이블에서 빠져나갔다, 영화사의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 배경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슈트룸' 그룹의 헤르만 바름이 가세하였다. 혼자서 그 많은 벽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그의 동료인 발터 뢰리그와 발터 라이만이 함께 작업하였다. 그들은 이 세트를 그리면서 자신들의 '표현주의' 그림 속을 몽환적인 시나리오의 영화가 산책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은 미술관의 벽에 걸려서 멈춰 서 있었다. 이제 그림 속을 미친 영화가 최면에 빠져 유괴를 하고 살인을 저지르면서 홀린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위한 세트 제작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영화는 아벨 강스가 1915년에 연출한 실험영화 <튀브 박사의 광기>였다. 아벨 강스는 이 영화에서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이용한 '요술 거울의 방' 효과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알프레드 쿠빈과 헤르만 바름은 렌즈에 의한 이미지 왜곡을 만들어내는 대신 세트 자체를 왜곡해서 디자인 하고 그걸 바탕으로 벽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제작비를 절감하려는 에리히 포머의 결정과 그 한계 안에서 세트를 자신들의 인스톨레이션(이 도착도 하기 전에 그런 미술관)처럼 만들어버린 세트 디자인 팀은 그저 불합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차원으로 갑자기 도약시켰다. 이제까지 꿈속에서 만나는 불안과 두려움은 문장 속에 있거나 그림을 바라보면서 상상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미지가 펼쳐지고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관객들이 본 것은 기기 묘묘한 이야기, 액자 형식의 서사. 빛과 그림자. 굴곡지어지고 왜곡된 세트,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배우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영화가 갑자기 내면의 형상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제까지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서 멈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영혼의 삶에까지 밀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을까. 영화는 역사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멈추지 않으면 다음에는 현실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찍고 있을 때 빈에 있던 프로이트는 "(...)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결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경우"(정잔진 옮김) 에 관해서 정식화시킨 <친숙한 낯섦(Das Unheimliche, Uncanny)>를 발표했다. 한 가지를 더 부언해야 할 것 같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해 국가방위군의 명령으로 독일 노동자당을 감시하기 위해 위장 가입하였다. 독일 노동자당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되었다. 간단하게 줄여 부르는 말. 나치 정당.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사의 순간은 역사의 순간과 헤어진 적이 없다.
임시연 감독이 연출한 < 햄스터 죽이기 >의 주인공 효정은 존재감이 없는 아이다. 그녀는 15살 동갑내기 수정과 일란성 쌍둥이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구분된다. 수정이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효정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불분명한 상태로 그려진다. 수정은 신분과 소속이 분명하지만, 효정은 신분과 소속이 불분명하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효정을 수정으로 착각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효정의 존재론적인 지위는 불분명하다. 영화 초반, 효정은 내레이션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5년 전 엄마는 쌍둥이를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이건 마지막으로 내가 김효정이었던 때의 이야기이다.” 이 독백이 암시하는 것처럼, <햄스터 죽이기>는 타자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비교적 덤덤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도플갱어는 오랜 시간 동안 문학과 영화의 주요 소재로 쓰였다. 사전적으로 도플갱어는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을 뜻하며, 그것은 자아의 증식, 복제, 분할, 분열 등과 같은 함축적 의미를 포함한다. 도플갱어가 자아의 증식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욕망의 발현과 관련이 있으며, 도플갱어가 자아의 분열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이성에 의한 억압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도플갱어의 의미를 자아의 분할, 구분, 교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억압된 대상이 회귀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도플갱어는 억압된 주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반발을 표현하고자 했던 낭만주의 문학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다룬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다. < 프라하의 학생 >(1913),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19), < 노스페라투 >(1922), < 마부제 박사 >(1922)가 도플갱어를 영화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작품들은 거울 이미지, 괴물, 광인 등으로 도플갱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인물과 그것의 유령적인 대응물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조력자이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장애물일 수 있다. 도플갱어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자아와 타자는 서로 운명 공동체를 형성한다. <햄스터 죽이기>의 효정과 수정 또한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 두 사람은 모종의 협상을 맺고서 서로의 분신이 되기로 약속한다. 수정은 효정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지 묻는다. 파우스트적인 거래에 가까운 이 협상이 맺어진 결과 수정은 효정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그동안 효정은 수정을 대신해 학교에 간다. 영화는 효정의 변화된 삶에 주목한다. 그녀는 수정의 명찰이 붙은 교복을 입고, 수정이 다니는 학교에 가서, 수정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수정을 대신해서 시험을 본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효정은 자신을 수정이라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수정을 연기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효정의 억압된 욕구가 현실로 회귀하고,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효정의 욕망은 그녀가 수정의 분신이 되었을 때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한계를 갖는다. 또한, 효정이 수정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그녀의 소원 성취는 일시적으로 혹은 무기한 유예된다. 이것은 타자의 도플갱어가 된 한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모든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분신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햄스터 죽이기>는 우화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삽입한다. 이 영화는 한 쌍의 햄스터가 있을 때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도플갱어로 맺어진 효정과 수정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 수정은 학교 앞에서 사 온 것이라면서 한 쌍의 햄스터를 집에 들인다. 수정이 햄스터에 대해서 비교적 무심한 것과 달리 효정은 케이지 안에 들어 있는 한 쌍의 햄스터를 유심히 관찰한다. 햄스터를 관찰하는 효정의 모습은 이 영화 전체의 구조와 어우러져 관객인 우리가 그림 속의 그림을 바라보는 듯한 착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관객이 효정과 수정 사이에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정은 한 쌍의 햄스터 사이에서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본다. 이 미장아빔(mise en abyme)의 구조에 의해서 영화의 안과 밖 모두 도플갱어가 관계의 중심을 이루는 세계처럼 지각된다. 그리고 이 액자식 구조 속에서 관찰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문자 그대로 잡아먹는 잔인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 도착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인 동시에 먹는 행위를 통해서 정령, 타자, 초월적 존재가 현현(incarnation)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자의 그림자에 갇힌 도플갱어를 넘어서 타자를 집어삼킨 도플갱어의 모습에서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햄스터 죽이기> 후반부의 일부 장면은 너와 나의 구분이 무너진 도플갱어의 관계를 암시한다. 효정이 두 마리 햄스터 중 한 마리의 사체를 화단에 묻고 난 직후 그녀는 교복을 입은 수정과 마주한다. 여기서 영화는 효정과 수정의 모습을 각각 풀 샷, 바스트 샷, 클로즈업 샷으로 담은 이미지를 쇼트와 역-쇼트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 쇼트들의 교환 속에서 효정의 얼굴과 수정의 얼굴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그 교환의 구조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증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효정과 수정을 구분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명찰이 없는 교복을 입었기에 효정인지 수정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누군가가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근데 쥐새끼도 제 자식은 알아보는 게 아닌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것은 분명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 영화 속 누군가의 자조 섞인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리라.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영화 초반부 가족 구성원들은 도시적 삶 속에서 누릴법한 로맨틱한 순간을 선보인다. 막내딸은 버스에서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여배우와 연애를 하는 큰아들은 멜로 영화를 찍고 있으며, 첫째 딸은 동물원 데이트를 즐긴다. 이러한 낭만의 중심에는 가장 ‘로맨스 빠빠’가 있다. 궁핍한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양, 그가 매일 출근길에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은 꽃다발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세상에 없을 듯한 이상적 가족이다. 홈드라마 < 로맨스 빠빠 >( 신상옥 , 1960)는 일반적으로 1960년대 한국사회가 요청한 서민 가족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돼왔다. 로맨틱한 가장과 개성 강한 자식 세대의 조화, 실직으로 인한 위기를 쾌활히 극복해나가는 어질고 고운 이야기는 폭넓은 관객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작품은 오프닝에서부터 가족 구성원의 간명한 캐리커쳐를 제시한다. 탈세속적 로맨티스트 아버지( 김승호 ), 현실주의자 주부 어머니( 주증녀 ) 그리고 2남 3녀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울 거주 가족이 모델이다. 매사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막내( 신성일 ), 서울깍쟁이 여고생 넷째( 엄앵란 ),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여대생 셋째( 도금봉 ), 대학 자퇴 후 영화계에 투신한 자유주의자 둘째( 남궁원 ), 결혼적령기의 현모양처형 첫째( 최은희 )는 당대 청년층의 보편적 범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막내는 4.19를 선도한 신세대를 대변하고 있다. 여기에 과학자 맏사위로 김진규 가 측은한 도둑으로 주선태 가 등장하니 작품 자체가 1960년대를 이끌 배우들의 온상으로 보일 정도다. 당시 신필름 소속 신예 신성일은 이 작품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등장인물을 통해 이성·지성·감성의 분배, 문화적 육체적 건전성의 조화, 공동체와 가족 윤리까지 고려된 인상이며 좀도둑까지 의리와 인정을 따지는 형국이니 참으로 다사롭고 호혜로운 소우주다. 김희창의 동명 인기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하였으니 자연스레 영화의 전개는 에피소드식이다. 드라마틱한 갈등과 불화보다 소소한 상황 속 유머와 페이소스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감독 신상옥이 다양한 영화형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영화 중반에 가족 모두가 안방에 모여 시나리오를 창작하는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 신파 멜로, 사극 등 다양한 형식이 가족의 상상력에 동원되며 이는 실상 신상옥이 이전과 이후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전개해간 작품들의 다양성을 이룬다. 신상옥은 이 작품을 전후로 해서 < 동심초 >(1959)나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로맨스 빠빠>는 각 캐릭터가 지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심성의 성좌를 선보이는데, 그 우아한 조화로움의 경지가 신상옥 영화의 형식적·감성적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를 유려하게 연결 짓는 것은 김승호가 맡은 로맨스 빠빠 캐릭터 탓이 크다. 김승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적 표상이었다. 그가 담당한 한국적 아버지의 전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 돈 >(1958), < 박서방 >(1960), < 마부 >(1961)에서처럼 봉건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하층민 가부장의 역할이 하나라면, 속물적 근대화의 조류를 반영한 < 인생차압 >(1958), < 삼등과장 >(1961), < 로맨스 그레이 >(1963) 등에서 최종적으로는 영악한 시대에 패배하고 마는 서글픈 샐러리맨의 모습이 다른 하나다. 보험회사 만년 계장으로 겨우 가족을 부양하는 <로맨스 빠빠>는 아마도 두 번째 경향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선뜻 영화 <로맨스 빠빠>에 ‘한국적’(근대화의 균열과 가부장주의를 동반한다는 뉘앙스에서)이라든가 ‘현실적’(4.19전후의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뉘앙스에서)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데 주저하게 되는 건 왜일까. 오히려 <로맨스 빠빠>는 세계시민적 교양과 이상적 추동으로 가득해 보이지 않는가. 그 일차적인 이유는 김승호가 열연한 ‘로맨스 빠빠’ 캐릭터가 한국의 전형적 가부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꽃다발 든 샐러리맨이자 책을 즐겨 읽으며 자식들과의 일상적 대화에도 무심치 않은 다정한 중년이다. 영화 속 빛나는 장면들은 로맨스 빠빠의 낭만적 몰입과 상상을 통해 등장하곤 하는데, 가령 이러한 장면이 있다. 동네에 기생집이 들어섰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로맨스 빠빠는 아내가 말로 일러주는 약도를 따라 골목골목을 상상으로 누빈다. 이는 기생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으로 발동된 상상적 모험이기보다, 이 마을 어느 골목엔가 있다는 어여쁜 기생아기씨라는 아름다움에 일반에 대한 상상적 지향인 셈이다. 또 이러한 장면도 있다. 아내와 사랑싸움 끝에 자식들이 부르는 합창곡을 받아 눈을 지그시 감고 부르는 세레나데 ‘기쁜 우리 젊은 날’이나 실직된 날 술집에서 부르는 ‘켄터키 옛집’과 같은 노래의 장면들 말이다. 서민 가족을 서술하는데 관습적으로 동반되는, ‘먹고살기 힘들었지만 인정만은 넘쳐나던 그때 그 시절’이라는 정서는 늘 공동체의 과거 기억과 맞닿아있다. <로맨스 빠빠>가 전달하는 가족은 서민적이고 온정 가득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 도래하지 않은 이상적 가족이자 미래의 상이다. 1960년 당시 자동차와 피아노가 집집마다 다 있다는 둘째 딸의 투정도 투정이거니와, 장성한 자식 전부가 남녀차별 없이 대학교육 이상의 문화적 수혜를 누리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일반적이지 않다. 다시금 온 가족인 둘러앉은 시나리오 상상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소환된 상상적 이야기들은 사실상 이러한 교양에 기반을 두고 있다. 둘째의 시나리오 버전은 <춘희>나 <안나 카레니나> 등에서 보암직했던 치정 서사를 전제로 정서적 모더니즘을 선보인다. 둘째의 이야기가 삼강오륜에서 벗어날 것이라며 경쟁에 나선 아버지는 초로의 남자와 젊은 여성과의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절대적 진리와 아름다움의 추구를 바탕에 두고 있다. 어머니 버전은 어떠한가. 그녀는 값싼 연애물을 비판하며 <춘향전>과 같은 한국 고전에 나타난 정서와 윤리를 강조한다. 한편 실직당한 날 밤 바에서 술을 마시던 로맨스 빠빠는 맥주병 뚜껑을 머리에 뒤집어 얹고 왕관을 쓴 양 “오늘부터 난 자유의 왕자야”라며 외치는데 대사의 어조가 사뭇 셰익스피어답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대 초 요청되었던 문화와 교양의 심상적 분배를 서민가족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위트 있고 관용적이며 낭만적인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휩싼다.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장르를 경유하는 한편 정서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고전을 바탕에 둔 문화적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다. 그런 점에서 <로맨스 빠빠>는 비슷한 시기 제작된 서민적 홈드라마인 <삼등과장>이나 < 서울의 지붕 밑 >보다 한국적 현실에 덜 긴박되어 있으며 세태풍자적 요소도 적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영화 속에는 당대적 터치가 가미되었는데 투쟁과 반항을 고유한 개성으로 삼던 막내가 아버지 실직 후 기성세대와의 투쟁을 포기하고 협력을 택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저돌적 아들을 포함한 전 가족의 자력갱생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을 가부장의 복권과 명랑한 근대화의 지향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좌에서 물러나 권력을 잃은 아버지가 비로소 진정한 가족의 중심이 된다는 아이러니야말로 <로맨스 빠빠>가 영민하게 시대에 응답하는 한편 능청스레 시대를 넘어서는 지점일 것이기 때문이다. >> 로맨스빠빠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