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타임
- 감독
- 한정길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전성일, 김철윤, 송아경
자르고 붙이기(cut and paste)는 예술 분야에서 전통적인 제작 방식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사회, 문화, 경제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우리 삶의 주요 양식이기도 하다. 영화의 몽타주, 예술의 콜라주, 대중문화의 리믹스는 모두 자르고 붙이기의 전략을 따라 하나의 대상을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뜨리고 그것을 새로운 자리에 위치시켜 의미의 전복을 꾀한다. 한편, 자르고 붙이기는 동시대의 삶의 양식이기도 하다. 가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공간은 잘게 쪼개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의 신체 또한 하나의 사물처럼 조각난다. 예를 들어, 노동 현장은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로 채워지고, 주거 공간은 대부분 성냥갑처럼 만들어진 구조물을 켜켜이 쌓아 올려 완성된다. 만약 우리 삶이 자르고 붙이기를 하나의 양식으로 채택하여 따르고 있다면, 그런 삶은 분명 누더기처럼 기운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런 불완전한 것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김효준 감독의 < 자르고 붙이기 >는 경제적으로 파산의 상태에 이른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의 소재는 1990년대 후반의 IMF 시기와 2000년대 후반의 금융위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빚의 굴레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할 때 자주 쓰이던 신용불량자, 카드빚, 고시원과 같은 것들이다. 정호는 수산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는 고시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정호와 그의 어머니는 카드빚을 두고 심한 갈등을 빚는다. 어머니는 아들 몰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그것으로 빚을 갚으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호는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지만 모든 소리는 새어 나가는 고시원 방에서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다. 정호와 어머니의 갈등은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정호는 어머니가 숨기고 있던 카드를 빼앗아 그것을 가위로 자르려고 하고, 어머니는 그런 정호를 말리다가 손가락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신용카드를 놓고 분열된 모자의 관계는 두 동강이 난 신용카드와 상처 입은 어머니의 손가락을 통해서 형상화된다. 대다수의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스스로 비극을 초래하는 것처럼, 주인공 정호의 우발적인 행동이 그의 비극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자르기’에 해당하는 부분과 ‘붙이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신용카드를 자르다가 어머니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정호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런 정호의 행동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정호의 어머니가 손가락을 다쳐 응급실에서 간단한 봉합 수술을 받는 이야기와 어머니의 치료비를 내기 위해 자신이 가위로 잘랐던 신용카드를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로 붙이는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대구를 이룬다. 잘린 사물이 다시 붙고, 잘린 신체가 다시 붙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전반부의 위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된다. 흥미로운 것은 ‘붙이기’에 해당하는 이 영화 후반부의 내용이 갈등과 위기의 완벽한 해소가 아닌 비극의 심화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수술을 끝낸 것이지 치료가 끝난 것이 아니며, 셀로판테이프로 붙인 신용카드는 정호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카드라는 소재를 중심에 놓고 보자면, 정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채무자의 신세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부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행했던 행동이 그를 다시 부채의 늪으로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르고 붙이기>는 빚이 또 다른 빚을 낳고,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는 아이러니를 통해서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극적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호의 행동, 즉 그가 무언가를 자르고 붙이기를 행할 때 그의 손은 두려움에 떨고 있음에 주목하자. 그의 손은 가위를 들고 신용카드를 자를 때 또는 셀로판테이프로 잘린 카드를 다시 붙일 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린다. 물론 각각의 상황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신용카드를 자를 때 정호는 분노, 짜증, 흥분 속에서 반대로 신용카드를 붙일 때 정호는 불안, 초조, 긴장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정호의 신체적 떨림은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겪는 고통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체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고통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정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빚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정호는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빚과 그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 동시에 어머니, 아내, 딸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정호가 겪고 있는 이 이중의 고통은 고시원 고유의 독특한 건축적 공간 구성에 따라서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쓰인 고시원을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면, 그것은 전체를 작은 부분들로 자르고 이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건축적 공간에서 정호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대물림되는 가족의 해체를 겪으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받는 것이다. 영화는 정호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거나 반대로 그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않는다. 정호가 어머니의 손을 다치게 만든 그날은 하필 그의 딸의 생일이었다.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딸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그 기묘한 상황은 앞으로 정호가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정호의 미래에 대해서 그 어떤 판단도 그리고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정호의 삶이 누군가의 무차별한 가위질로 난도질당하여 찢김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제 정호에게 과거를 박차고 일어서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하나의 신호를 준다.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호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연신 헛구역질을 한다. 만약 정호의 헛구역질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구토의 전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를 떨쳐 낼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의 제스처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경제적 파산이 초래한 찢김의 고통을 다룬 이 작품은 어딘가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모를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극약처방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활기와 권태, 기쁨과 슬픔을 껴안는 방식에 관하여 ‘나’는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청년이다. 어느 날 퇴근길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치코와 동행한다. 사치코는 한 잔 할 것을 제안하고 ‘나’는 몇 시간 후에 문자하겠다고 하고 헤어졌지만 ‘나’는 그만 잠을 자느라 약속시간을 어긴다. 그 날 ‘나’는 룸메이트 시즈오와 밤새 술을 마신다. 다음날 ‘나’는 카페에서 점심을 해결하다 사치코를 또 만난다. ‘나’는 어제의 약속을 어긴 것을 사치코에게 희미하게 사과하고 사치코는 애매하게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 관계인 듯 아닌 듯한 관계가 시작된다. ‘나’와 사치코가 처음 섹스하던 날 귀가하던 시즈오는 두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시즈오가 두 사람 곁에서 물러나는 건 이때가 마지막이다. 그 후로 세 사람은 거의 늘 함께 한다. 함께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당구 치고 탁구 치고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운다. ‘나’는 누구의 삶에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삶을 원하며 사치코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태도로 대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치코는 그런 ‘나’의 쿨함 또는 무심함에 슬쩍 마음이 상한다. ‘나’와 사귀기 전 서점 사장과 연인관계였던 사치코가 그 관계를 정리하려 할 때 ‘나’는 그런 사치코의 결정을 남 얘기 듣듯 하고 사치코는 ‘나’의 진지하지 못한 반응을 나무란다. 그 후 사치코는 ‘나’보다는 시즈오에게 끌린다. 뭔가 슬픔을 품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 시즈오는 뚜렷한 직업 없이 하루 하루를 소일하며 친구들에게 사심 없이 마음을 내어준다. 그런 시즈오에게 사치코는 ‘나’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사치코가 말한다. “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시즈오가 말한다. “그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거야.” 시즈오의 말은 빈정거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그런 척 한다. 약간의 선의를 품은 채 ‘나’는 가급적 세상으로부터 벽을 치고 방해받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한다. 연애도 ‘나’에게는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다. 사치코가 시즈오와 더 가깝게 지내자 ‘나’는 그런 사치코의 변화를 기꺼이 수긍한다. 미야케 쇼 감독의 세 번째 장편 <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2018)는 사토 야스시의 소설이 원작이며 요절한 작가가 서른 한 살에 쓴 작품을 역시 서른 한 살의 영화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원작을 읽어보진 못했으나 감독의 말에 따르면 원작의 비극적 결말을 소거하고 좀 더 무채색에 가까운 감정으로 옮겨낸 이 청춘의 이야기에서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환희와 피로는 불가해한 형태로 뒤엉켜 공존한다.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파트타임 직업으로 호구를 삼고 미래에 대한 별다른 계획도 없으며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출구 없는 삶을 사는 젊은이들의 전형이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견디고 있는 상태에서 바깥으로부터 오는 행복의 신호에 부드럽게 반응한다. 사치코는 권태와 무의미의 극단에 삶이 처해 있는 듯한 서점 사장과의 관계를 가만히 견디면서 ‘나’를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구애의 의사를 전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가족 관계가 화면에 상술되지 않는 사치코는 ‘나’와 시즈오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며 그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밤새 바에서 술 마시고 춤을 출 때 무리에서 빠져나와 DJ 앞에서 홀로 자기만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치코의 모습은 관계에 매달리지 않으면서도 어떤 순간의 농도를 제공하는 관계의 즐거움을 기꺼이 만끽하며 동시에 자기만의 영역을 세심히 지키는 행동을 보여준다. 시즈오는 딱히 뭘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는 청년인데 길거리에서 경찰 심문에 걸려 살짝 모욕을 겪어도 실실 미소를 흘리는 여유를 잃지 않고 직업소개소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옆 자리 사람이 건네는 사탕 한 알을 물고 천진한 웃음을 짓는 만사태평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지만 그는 치명적인 병을 앓는 어머니가 있다. 가끔 술을 마시며 심드렁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이들 모자는 필사적으로 절망을 견디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그의 병상을 정리하면서 시즈오는 생각한다. “병원 냄새를 참을 수 없다. 친구들과 단골로 갔던 장소의 냄새를 기억해내고 싶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사치코와 시즈오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삶이지만 행복의 징후가 보이면 반갑게 그걸 껴안는 두 사람과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잠시 충만한 그 행복의 흐름에 무심한 척 몸을 맡기는 사람이다. ‘나’가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간섭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서점에서 책을 훔쳐가는 손님의 행동을 보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나’의 태도에 동료 점원은 분개하지만 동료점원의 자신에 대한 비난에도 태연하던 그가 사장과 바람피운다며 사치코를 비아냥거리는 동료점원의 말을 참지 못하고 혼내주는 건 누군가를 함부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무례에 ‘나’가 예민한 성격임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태도만으로 그의 삶이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사치코와 시즈오가 둘이서만 캠핑을 떠난 시간에 홀로 거리를 산책하던 ‘나’는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누군가로부터 묻지마 폭행을 당한다.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나’의 앞에 시즈오의 안부가 궁금해 찾아온 시즈오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나’는 사과가 담긴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내민다. ‘나’를 좋은 아이라고 칭찬해주며 떠나는 시즈오의 어머니는 ‘나’ 앞에서 보인 호기로운 태도와는 달리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어가며 울적한 뒷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시즈오의 어머니는 발작을 일으켜 의식불명으로 쓰러진다. 이런 장면들에서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다른 등장인물들을 담아내는 것을 통해 그들의 다면성을 이해시키는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이 드러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별 다른 사건 없이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행복한 순간만 서로 주고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일상의 순간들을 늘일 수 있는 만큼 늘이는 영화이다. ‘나’와 사치코와 시즈오가 바에서 밤새우며 노는 장면은 거의 7분 분량을 넘어서는데 별다른 사건 없이도 그들이 노는 모습만을 카메라가 따라다니는데도 화면에는 활기와 매력이 넘친다. 심지어 세 사람이 편의점 내부를 돌며 먹을거리와 마실 것을 사는 평범한 장면에서도 카메라와 인물의 움직임은 서로 조응하며 자그마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밤새워 논 다음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곤죽이 되어 졸고 있는 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이 영화가 희열과 상실의 순환으로 이어지는 젊은이들의 자잘한 일상을 궁극의 낙관적 기운으로 담아내고 있음을 알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할 것처럼 즐기고 그 다음에 오는 허무의 기운을 부드럽게 응시하며 껴안는 인물들은 자기들이 처한 존재론적 조건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각자의 존재를 스스로 보호하면서 상대에게 부드러운 선의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의 후반부, 늦은 밤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시즈오는 다음날 첫 기차를 타기 전까지 ‘나’와 사치코와 함께 단골 바에 가서 늘 그랬듯이 즐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슬픈 상황에서 그들은 함께 있음으로써 그 시간들을 견딘다. 다음날 일찍 시즈오과 집을 나설 채비를 할 때 그런 시즈오의 행장을 도와주는 ‘나’와 어둠 속에서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치코의 옆모습을 잡는 카메라는 기쁨도, 슬픔도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나누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보여준다. ‘나’역의 에모토 타스쿠, 사치코 역의 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 역의 소메타니 쇼타 세 배우는 특정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특정 역할로 특정 공간에서 살아가는 현대적 배우의 매력을 조용히 웅변한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스타일로 인상적인 걸음걸이를 보여주며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때의 표정과 동작으로 그들 각자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감독 미야케 쇼를 만났을 때 그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며 세속적인 성공을 예견하는 나의 건방진 덕담을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자신이 영화를 하는 것은 영화를 준비하고 찍으며 동료들과 누릴 수 있는 시간의 행복을 음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촬영하면서 그는 배우들과 최상의 시간을 보냈고 그들 모두 영화 촬영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회상했다. 영화 속에서 보여준 행복에의 추구가 영화 바깥의 과정에서도 관철되었다는 그의 말은 만남과 이별이 늘 한 쌍을 이루는 인생의 궤도에서 슬픔을 견디면서도 기쁨을 폭발적으로 나누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실감하게 했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젊다는 것 자체를 부러워하게 만든 드문 활기의 영화이다.
< 앨라니스 >는 제 19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전주에서만 상영되었을 뿐 국내 개봉 계획이 없다. 2005년에 <사랑없는 일년 A year without love>로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통해 데뷔했고 <앨라니스>가 다섯 번째 장편영화인 여성감독 아나이 베르네리는 그간 베를린, 토론토, 산세바스찬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국제적 명망을 얻었다. 올해 전주영화제 준비를 하면서 한국경쟁영화를 선정하는 작업을 막 마치고 다른 프로그래머들이 고른 해외 출품작들을 점검하면서 보게 된 이 영화는 내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주로 젊은이들의 박탈감에 주목하며 출구 없는 삶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담는 대다수 한국독립영화와는 달리 <앨라니스>는 황폐한 삶의 조건에 포위당해있으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는 인간상을 담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는 ‘앨라니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매춘부이며 18개월 된 단테라는 아들을 둔 싱글맘이다. 마리아는 친구이자 동료인 매춘부 지젤라와 함께 사는데 거주지에서 매춘하는 것이 적발되자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옷가게를 하는 숙모 집에 잠시 머무르면서 매춘 일을 계속하지만 사는 게 녹녹치 않다. 일단 마리아는 다른 매춘부들이 이미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거리에서 영업을 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몰래 고객을 유인해 자동차 등에서 일을 계속하지만 보는 사람도 끔찍한 상황만 계속 이어질 뿐이다. (이를테면 발기하지 않는 늙은이를 상대로 차에서 영업하는 장면이 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마리아가 일하러 나갔을 때 단테를 봐주는 숙모는 마리아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마리아를 비난한다. 네가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는 게 아니냐, 어린 아들을 생각하라고 그녀는 다그친다. 숙부는 그런 숙모를 말리지만 내심 숙모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하다. 임시로 숙모 집에서 얹혀살 처지의 마리아는 당장 항변하지는 않는다. 대신 매춘 혐의로 경찰에 출두해 심문을 받는 상황에서 마리아는 더 좋은 삶을 찾으라고 훈계하는 담당 경찰에게 거세게 쏘아붙인다. 함께 아이를 책임져야 할 남자친구는 마리아가 임신을 하자 도망친 상태에서 일자리가 없는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이래 자신이 얼마나 살기 위해 처절히 일했는지, 매춘 외에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인지를 말하면서 마리아는 어떤 동정도, 이해도 필요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앨라니스>는 점점 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공간으로 들어가 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일하는 마리아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녀는 잠깐 숙모 집에서 쪽잠을 잔 후 거리로 나와 일을 하고 거주할 곳을 찾다가 애타게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 돌아와 젖을 물리고 잠시 쉰 후 잔소리하는 숙모를 피해 다시 일하러 나가며 심지어 모두 잠이 든 심야에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가 다른 매춘부들의 구박을 받으며 몰래 일을 한다. 어디를 가던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공간을 통제할 수 없다. 이는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쓰이는 거울, 유리창 등의 반사면을 이용한 복합적인 장면 설계로 인해 점층적으로 아이러니 효과를 만들어낸다. 영화 초중반까지 이런 반사면 활용에 기초한 미장센은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그녀의 여신 같은 외형이 주는 위엄을 강조한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마리아가 비스듬히 누워 있을 때 반사면의 미장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중 삼중으로 화면에 배치하며 우리는 그 공간의 볼륨에 압도당한다. 반면 그녀가 거리를 헤매며 필사적으로 푼돈을 버는 중반부 이후의 화면들에서 유사한 장치의 프레임들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그녀의 연약한 삶의 환경을 냉정하게 증거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마리아는 심야의 거리에서 호객을 하고 다른 매춘부들을 피해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뭐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남자의 선택을 받아 그의 집에 가서 매춘을 하는데 관객은 잘못하면 그녀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인상을 받는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유사 변태적 행위를 강요당한 끝에 겨우 돈을 받아낸 마리아가 다시 거리에 나섰을 때 근처의 매춘부들은 그녀가 자기 영역을 침범했다며 그녀를 붙잡고 단체로 린치를 가한다. 설상가상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튿날 숙모는 더러운 일을 하는 마리아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다며 아이를 빼앗으려 들고 마리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집을 나온다. 결말은 일시적인 해피엔딩이다. 마리아는 어느 매춘숙에 들어가고 동료들은 마리아와 마리아의 어린 아들 단테를 가족처럼 대해준다. 단테는 이 여자, 저 여자의 품에 안겨 보살핌을 받는다. 마리아는 쫓겨날 걱정 없이, 먹을 게 떨어질 걱정 없이, 아기를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불안감 없이 당분간 살 수 있다. 모던 록 가수 앨라니스 모리셋에서 예명을 딴 마리아는 자기 앞에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저 홀로 자립하기 위해 분투하며 허튼 동정이나 이해도 거부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외부인이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 것을 그녀는 거부한다. 네 삶은 이러하니 저러 해야 해, 라고 누군가 말하는 순간 그녀는 그 상대방과 절교하는 것이다. 그녀의 존엄은 그녀가 하는 일로 측량될 수 없다. 그녀는 스스로 존엄하다. 그녀는 항상 불행하지 않으며 적지 않은 순간에 행복하고 대체로 먹고살기 위해 초조하다. 어떤 때에도 그녀는 자기 자세를 잃지 않는다. 실제 아들과 함께 이 영화에 출연한 마리아 역의 소피아 갈라는 바위 같은 당당함을 화면에서 표상하는데 극단적인 삶의 남루함을 전시하는 사건들 사이에서도 끝까지 기운을 잃지 않는다. <앨라니스>의 여주인공 마리아가 드러내는 불굴의 기운과 비슷한 에너지를 한국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작인 정형석 의 < 성혜의 나라 >가 그렇다. (후일담이지만, 이 영화는 한국경쟁부문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출신 줄리에타 시첼의 열렬한 지지를 업고 대상을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고 서울독립영화제의 초청도 받지 못했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의 상당 부분 스물아홉 여성 성혜의 고단한 일상을 좇는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들어갔으나 성희롱을 당하고 항의가 묵살 당하자 인권위원회에 신고하고 회사를 나온 그는 다른 곳에 취업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파트타임 일들로 생계를 꾸린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고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는 곧잘 성혜에게 돈 융통을 부탁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성혜의 남자친구는 무능한 데다 눈치도 없다. 사방이 무심한 공기로 차 있는 숨쉬기 힘든 상황에서 묵묵히 견디며 노동하는 성혜의 모습은 별다른 극적 주름이 없는데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성혜의 나라 성혜는 자기 삶에 벌써 지쳐있지만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관성처럼 그녀의 노동일과는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지만 기적 같은 사건이 후반에 발생한다. 아직 개봉하기 전 영화이므로 그 전말을 자세히 쓸 수 없지만, 영화는 급격하게 화면의 공기를 바꾼다. 굳은 표정으로 일상의 노동에 전념하던 성혜는 삶의 반전을 맞아 아무도 예상하기 힘든 선택을 한다. 그녀의 표정과 행동은 관성적이고 기계적이던 반복적 굴레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생기를 띠고 화면에서 튕겨 나올 듯 발랄해진다. 영화의 2/3까지 애인을 포함하여 찌질하고 저렴하고 대면하기 싫었던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던 성혜는 어떤 명시적인 희망도 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성추행의 전말을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던 동료의 사과를 대신한 친절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부모의 의존적인 태도를 무시한다. 대책 없는 관성적 희망으로 자신을 속이면서도 관계에 미련을 갖는 애인에게도 고기와 술을 사준 뒤 이별을 통보한다. 곧 그녀는 삶의 대단원의 반전을 맞이하기 전에도 이미 기존 관계의 관성, 그에 따른 행동 양식과는 선을 그은 채 홀로 감당할 삶에 대해 결전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성혜는 주변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거짓 희망을 품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자립과 존엄을 위해 산다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육체적 한계와 씨름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불행과 행운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를 통해 삶의 전기를 마련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기성 삶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선택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