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 감독
- 알버트 루인
- 제작년도
- 1951
- 출연
- 에바 가드너, 제임스 메이슨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연재를 시작한지 2년이 되었고 완성은 커녕 시작도 제대로 못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쏜살 같은 건 우리 자신이며 한국영화고 시네마 그 자체다. 사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우리는 시간을 볼 방법이 없다. 움직이는 초침을 보거나 스마트폰의 숫자를 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첫 연재 분에서 금정연과 나는 서교동의 콜마인이라는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연재를 위한 기획회의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카페 콜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카페 직원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폐업했으며 그 자리엔 오버트라는 이름의 다른 카페가 들어섰다. 그 사이 니콜라스 케이지가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 영화 < 미친 능력 >이 개봉했고(졸작) 최동훈의 야심작 < 외계+인 1부 >가 개봉했고(ㅠㅠ) 장 뤽 고다르와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죽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서울 아파트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루나코인의 권도형은 도망자가 됐으며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샀고 윤석열이 해외 순방을 다니고 문재인이 추천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친구에 의하면 문재인과 윤석열은 오바마와 트럼프의 거울쌍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닌다. 완전히 다르지만 완전히 같은 존재,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인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가 픽션처럼,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예견하고 습격한다. 2022년이 끝나가는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한국 영화는 < 압꾸정 >, < 데시벨 >, < 올빼미 >, < 인생은 아름다워 >, < 동감 >, < 우수 > 등이다. 내 주변에 이 영화들을 본 사람은 없고 보러갈 사람도 없다. 한국 영화는 괴멸한 것처럼 보이지만(내 주변에서)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청룡영화상에서 박찬욱의 < 헤어질 결심 >이 상을 독차지한 것을 생각해보라. 1960년대 TV의 습격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영화는 십년 후 블록버스터 군단으로 세계 문화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OTT도 게임도 두려워할 것 없다. 전 세대의 거장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할 것도 없다. 그보다 더한 거인들도 일찍이 명을 다했지만 영화는 끄덕하지 않았다. 영화는 영웅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영화는… 영화는……. 지그프린트 지린스키는 과거의 영화를 임대업으로 간주했다. 영화의 본질은 돈을 받고 2시간 동안 특정 공간의 좌석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TV는 사람들이 기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데 방점이 찍힌다. 그러므로 TV는 가구이며 인테리어 업종이다. 디지털 이후에는 문학적인 텍스트에만 해당했던 선택적인 명령과 속도, 중단 가능성, 반복에의 의지, 표시와 보관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영화 그 자체가 소유되고 이용되기 시작했다. 시청각의 서적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상 파괴의 도구로 미디어 이론만큼 유용한 게 없다. 이러한 관점은 경주마처럼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과도한 감정 이입을 막아준다. 극장이 중심인 영화가 임대업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보자. 그렇게 생각하면 OTT가 기승을 부려도 시네마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신체의 부동성을 강제하는 임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나윤이 아버지인 금정연씨와 정원이 아버지인 오한기씨가 극장에 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TV용 영화가 큰 의미없이 사라진 이유도 여기 있고 OTT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OTT는 개별 콘텐츠가 아닌 리스트의 문제다. 개별 작품은 빨리 감기나 건너 뛰기로 감상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영원히 보지 않더라도 무엇을 볼 가능성이 있느냐다. 선택되지 않은 잠재성, 가능세계가 OTT의 우주를 이룬다. 우리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소유한다. 반면 극장은 지금 당장 행동하고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용산 아이맥스는 매진되고 영화는 내려갈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시간성에서 중요한 건 러닝타임이 아니라 상영 기간이다. 영화는 점점 더 이벤트화 되고 이 이벤트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OTT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닌자처럼 통장에서 구독료를 가져가게 허락만 해준다면 가능세계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존재론적 불안을 잠재워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때울 수 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 < 수리남 >을 볼 것이다. 언제 볼진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종말은 없다. 시네마에는 새로운 시작 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원했던 방향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가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금정연은 말했다. 한국 사람이 한국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가 한국 사람을 만든다고. 영화 이전의 나는 목적도 의미도 불분명한 떠돌이 개에 불과하지만 영화 이후에야 비로소 K정연이 될 수 있었다고, 그게 바로 존 포드가 말한 픽쳐의 의미라고 말이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2005년, 정성일은 씨네21에 신설된 코너 《전영객잔》에 들어갈 글을 청탁받으면서 당시 편집장인 남동철에게 “꼭 영화에 관한 평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첨언을 들었다. 남동철은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전영객잔의 소개에 덧붙인다. 정성일은 2005년에 쓴 이 글을 2010년에 책으로 묶으면서 5년 동안 상황이 어떻게 후퇴했는지 돌아본다고 쓴다. 아마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그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첫 꼭지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영화비평에 대한 근심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재밌는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분야에나 반복되는 후렴구이기 떄문이다. 이제 문학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전시를 진지하게... 이제 브릿팝을 진지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이 후렴구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문학비평의 경우에는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에 대한 담론, 영화 글이 진지하게 소비되고 이야기된 시기는 언제일까? 그런 시대가 있었나.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남동철이 한탄한 바로 그 시절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아무도 안 읽어!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아직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책을 읽고 분노하고 절망할 때라는 것이다.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5년에 글을 쓴 정성일은 왜 영화비평에 관한 해묵은 수사에 동의한 걸까. 그는 이렇게 쓴다. “위대한 영화를 쓸 때 우리는 위대한 생각을 해야한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영화를 쓸 때 우리는 하찮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위대함과 하찮음을 점점 구분하지 못한다. 혹은 하찮은 영화 앞에서 자기만 위대한 척한다. 눈이 멀어 갈 때 점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영화비평을 읽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평이나 리뷰를 쓰긴 쓰고 읽긴 읽는데 거기에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사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준과 권위가 사라지고 하찮음이 위대함으로 둔갑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내가 종종 농담 삼아 어둠의 정성일이라고 칭하는 임재철 역시(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사과를) 금정연과 내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영화도 아닌 걸 영화라고 한다고 말이다(인용은 정확하지 않음). 그러면서 그가 우리에게 건네준 책은 V. F. 퍼킨스의 「영화로서의 영화」(1972)였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빅터 퍼킨스의 유일한 단행본인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영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준(표준)criteria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성일, 임재철 두 선생님의 훌륭함과 무관하게 나와 정연씨가 하려고 했던 것은 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처음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그랬고 영자원 연재를 시작하고 한국영화에 대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그랬다. 우리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단지 교란, 전복, 위반, 철폐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기준과 규칙, 권위, 규범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개별의 특수성들이 특수성인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공통의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취향, 상호존중 따위로 퉁 쳐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영화경험. 쑨거에 따르면 1950년대 말 미국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독특한 상태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모든 지역이 공유하는 지리적 특징을 수집해야하는지 여부였다.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왔다. “특수성의 상태로 재현된 대상이 일반적 규칙으로 다듬어지거나 추상화되지 않은 채 여러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때 리처드 하트숀은 유사성에 대해 인습과 다른 정의를 내리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정의하는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지엽적인 부분을 쳐낸 후 남은 주요 차이”였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성질”인데, 유사성이 바로 차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떻게 특수성들 속의 차이가 우리를 연결하는 보편적 고리가 될 수 있을까. 좋고 나쁨,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고 분별하지 않는 기준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얼마전에 만난 강보원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심심해서 Dbpia에서 금정연과 정지돈이 과거에 쓴 글을 보는데요, 아니 이 사람들이 자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더라구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러는 거죠. 아니, 자꾸 그러지마, 그걸 왜 열어, 이사람들아.” 글쎄, 그걸 왜 열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을 하는 강보원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5월 31일 월요일 500미터쯤 걷고 카프성모병원에서 처음으로 멈추었다. 거기서부터 서쪽으로 꺾어 걸어갈 생각이었다. 카카오맵으로 아람누리도서관 방향을 헤아렸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겠다. 오전에 영상자료원 담당자에게 메일이 왔다. 바쁘신 와중에 혹여 (이미 한 번 미룬) 마감일을 잊으셨을까 하여 리마인드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럴 수 없다, 지금은 안 된다, 이 시점에 한국 영화계가 이런 글을 읽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이 마감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노트북과 기계식 키보드, 그 외에 필요한 책들을 백팩에 챙겼다. 슬리퍼는 새것이고 푹신해서 충분히 믿을 만했다. 걸어서 가면 어리석은 초고를 돌이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거라는 확신을 품고, 나는 아람누리도서관으로 향하는 최단 거리의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이기를 원했다.* 어제까지 내가 쓴 초고는 왜 우리의 비디오 에세이가 박무석이 곽철용 앞에서 ‘불나비’를 부르는 < 타짜 >의 장면에서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금정연(V.O.) : 저는 늘 최동훈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해왔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배역 대신 배우의 이름을 말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다른 많은 영화들과 달리 고니나 아귀 같은 이름은 제게 이아고나 오셀로처럼 대체할 수 없는 고유명으로 느껴집니다. 둘.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를 즐겨 인용하듯 한국인들은 <타짜>를 인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타짜>가 21세기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은유, 나아가 일종의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흥행=도박이라는 오래된 비유. 두 개의 충무로가 있다. 올드 충무로와 새로운 충무로. 올드 충무로는 충무로에 있다. 새로운 충무로는 강남에 있다. 그런데 왜 충무로지… 최동훈의 영화에서 올드 충무로를 대표하는 건 곽철용이다. 그는 올드 충무로의 큰손으로 박무석 같은 감독들을 고용해서 영화를 찍어내는 제작자다. 새로운 충무로를 대표하는 건 물론 고니다. 그는 신진 제작자 정마담, 동료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고광렬과 손잡고 올드 충무로의 아성에 도전한다. 아귀나 짝귀 같은 타짜들이 올드 충무로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들은 올드 충무로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다만 지나치게 성공한(성공했던) 아웃라이어일 뿐, 제작자 중심의 시스템 속의 플레이어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고니를 가르친 평경장 역시 타짜지만, 다른 타짜들과 달리 시스템에 한 발만 걸친 일종의 독립영화감독이라고 할까, 상대적으로 인지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결국 <타짜>의 심층 서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고니가 박무석이 만드는 독립영화에 우연히 제작부로 참여하며 영화라는 도박판에 발을 들이고, 독립영화계의 거장인 평경장 밑에서 본격적인 연출을 배우며, 신진 제작자 정마담과 의기투합해 메이저 영화판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지만, 정마담 또한 기존의 제작자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절-홀로서기 하는 이야기, 다시 말해 충무로가 제작자 주도의 영화판에서 감독 주도의 영화판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영화다… 금정연: 박무석이 노래하는 장면의 메시지는 분명해요. 그는 자기 자신이나 관객이 아닌 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월급 감독입니다. 따라서 박무석은 곽철용에게 망한 흥행은 뒤로 하고,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해주기를 구걸하고 있는 거죠. 노래를 통해서.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이, 그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들어보세요.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이는 그가 마음 속에 아직 도박/영화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무엇보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게 정확히 영화의 중간, 정확히 중간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영화의 구조에서 주인공의 결심이나 변화, 커다란 고난이나 가짜 희망 같은 중요한 사건에 할애되어야 할 중간점을 박무석에게 주고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는 박무석 또한 고니와 같은 꿈을 꾸던 감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박무석이 고니와 손잡고 곽철용의 뒤통수를 칠 거라는 복선이잖아요. 더불어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안 좋으셔도 어쩔 순 없지만, 최동훈이 선배 감독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윙크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제 최동훈은 감독인 동시에 스스로 거대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최동훈의 윙크를 전유하고 싶은 겁니다. 정지돈: …… 금정연: 지돈 씨, 평경장의 죽음을 생각하세요! 정마담의 제작부장인 빨치산에게 하필 ‘오른팔’을 잘려 ‘기차’에서 떨어져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게 과연 우연일까요? 정지돈: (대체 무슨 말인지?????) 머릿속으로 정지돈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계속 걸었다. 숏/리버스 숏. 그런데 그걸 대화라고 할 수 있나. 아까부터 정지돈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모르겠다. 이참에 나는 그를 JD로 부르기로 한다. 불만 있으면 말을 하겠지… 문득 장 루이 뢰트라가 [영화의 환상성]에서 소개한 일화가 떠오른다. 앙토냉 아르토의 장례식에서 알랭 게르브랑은 퍽 기이한 일을 겪는다, 아르토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게르브랑의 앞을 막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영구차의 운전사가 고개를 돌려 게르브랑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운전사의 얼굴이 다름 아닌 죽은 아르토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마주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도 대화가 아닐 리 없다. 그리고 나는 대화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적어도 우리가 도서관에 도착할 때까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백일 정도 지났을까,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에 앉아 울고 있었다.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었다. 르네 도말은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주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고 썼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이고, 생일을 맞은 영화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콜린 파렐, 그리고 JD. 나는 여전히 피곤한 얼굴의 JD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생일 축하해요, JD. 6월 1일 화요일 영화 보기를 미루는 건 영화 만들기를 미루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책 읽기를 미루는 건 책 쓰기를 미루는 것이다. 예전에는 읽기=쓰기가 싫어질 때면 영화를 봤다. 그때 내가 보던 것은 농담으로라도 훌륭하다거나 예술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 나이스 가이즈 > < 털기 아니면 죽기: 제한시간 30분 > < 위험한 패밀리 > < 홀패스 > < 쥬랜더 리턴즈 > < 베일리 어게인 > <비트윈 투 펀스: 투어 스페셜> <미스터 롱> < 22 점프스트리트 > <기동순찰대> < 젠틀맨 > 등등… 도대체 왜 그런 영화를 보면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거죠? 모르겠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좋다고 말하는 영화는 안 보고 쓸데없는 영화만 보는 마음에는 약간 판도라의 상자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1)호기심에 이끌려 영화라는 상자를 엶 2)형편없는 영화들의 면면에 화들짝 놀라 상자를 닫음 3)상자 속 깊은 곳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좋은 영화들이 남아 있음 4)세상엔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좋은 영화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거친 현실을 묵묵히 살아갈 용기를 얻음… 영화를 만들기로 한 다음부터 모든 종류의 영화를 보기가 싫어졌다. 아니, 싫어졌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 선박왕과 그 아내의 관계, 다시 말해 아내를 사랑하는 유부남이지만 아내를 최대한 안 보려는 관계 같다고 할까. 그때 JD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그는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무언가를 말했는데, 아마 ‘꼰대’라고 하는 것 같았다. 확신할 순 없다. 코로나 이후로 많은 것들이 종종 흐릿하게 보인다. 심지어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도… 나는 예전에도 볼라뇨의 저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유부남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유부남이라는 것. 유부남이 하는 유부남 농담만큼 소름 끼치는 것도 없다. 군필자가 하는 군대 이야기를 제외하면… 어젯밤에는 아내와 함께 영화 VOD 몇 편을 구매했다. 이사하며 IPTV를 바꾸고 사은품으로 받은 5만원 쿠폰의 사용기한이 어제까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영화를 지독히도 증오하는 사람이 만든 게 분명한 IPTV의 영화 메뉴를 탐색한 끝에 7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 포드 V 페라리 > < 더 파더 > < 스파이의 아내 > < 노매드 랜드 > < 테넷 > < 소울 > < 자산어보 >. 대여 아닌 영구소장으로. 남은 500원은 가볍게 포기하기로 했다. 나도 아내도 딱히 그 영화들을 보고 또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영구소장의 매력은 지금 당장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니까 일석이조인 셈이다. 쿠폰도 쓰고 영화도 안 보고, 원한다면 영원히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최근 내가 가장 사고 싶은 책은 크리스티안 키슬리와 제이슨 미텔과 캐더린 그랜트가 함께 쓴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The Videographic Essay]다. 출판사는 이모션북스. [The Films of Bong Joon Ho](Rutgers University Press, 2020)를 쓴 Nam Lee의 트위터에서 표지 사진과 함께 올라온 출간 소식을 본 게 5월 26일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직까지 어느 서점에도 DB가 등록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넷 서점에서 제목을 검색했다. 그러면서 당장 책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도 더해졌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1985년 제니 홀저는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에 이렇게 썼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그럼 나는 내가 읽고 싶은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책을 사려는 걸까(Protect me from what I want to read by buying them)? 그와 함께 기껏 책을 만들어놓고 팔지는 않는 출판사에 대한 의구심도 생겼다. 어쩌면 이건 일종의 복수 같은 게 아닐까? 영화도 출판도 모르는 세상에 대한? 밑도 끝도 없지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모션북스의 대표는 임재철이다. 이사 온 집은 1층, 우리집 베란다 앞 작은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아직 눈곱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새끼 세 마리를 키우는 고양이 가족에게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집을 나왔다. 작업실에 도착하니 택배 상자가 쌓여 있었다. 일을 할 수 없는 주말에 인터넷 서점을 신경질적으로 뒤지며 헌책 새책 가리지 않고 산 책들이었다. [르 코르뷔지에 - 자연, 기하학 그리고 인간] [보이는 기호학 제3판] [영화음악의 실제] [그림편지]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 [알기 쉬운 현대미술의 개념풀이] [얼트 문화와 록음악 1] [파운드 푸티지] [소외과 가속] [밀수 이야기] [젊음의 코드, 록] [영화 같은 시간] [매체로서의 영화] [영상 미디어와 보도] [하이퍼건축]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영화 음악의 이해] [예술가로 살아남기] [나의 사랑 씨네마] [할리우드의 영화산업] [데뷔의 순간]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죄수 운동법] 등등. 모두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다. 책의 단점은 VOD와 달리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몇 주 전에는 읽지도 않을 책을 쌓아두기만 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서관에서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라는 책을 대출했는데, 아무것도 바뀌진 않고 연체만 되었다. 정작 책은 읽지도 못했어. 6월 2일 수요일 2016년 가을 나는 지금은 사라진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린 임재철의 6강짜리 강의 ‘스탠리 카벨의 세계’를 들었다. 어느 날의 강의에서 임재철은 이렇게 말했다. 도서관이 없다고 상상해야 한다. 자기 집 책장에 있는 책들을 가지고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할 필요가 있다. 고민하고 준비하고 모으고 계속해서 부족한 부분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끝이 없다. 목숨을 건 도약이 필요하다(비평가들이 이 말을 할 때마다 500원씩 받았다면 나는…). 그는 또 예전에는 외국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책이나 잡지에 소개된 짧은 글만 보고 영화를 상상해야 했는데 나중에 영화를 보면 십중팔구는 자기가 상상했던 영화가 훨씬 더 재밌었다는 말도 했다.* 그날 임재철과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오며 나는 충무로 아저씨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는데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내가 요즘 하고 싶은 일은 비디오 에세이를 만드는 건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유튜브는 곧 시작할 거라는 등의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택시가 밤의 도시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불빛들. 그림자들. 사라지는 시간들. 차창에 비친 임재철의 얼굴이 유령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그는 내게 언제 유튜브를 시작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2023년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는 그게 좋은 대답처럼 느껴졌는데. 모르겠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했던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오늘도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는 등록되지 않았고, 나는 머릿속에서 나의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를 빠르게 훑어본다. 그리고 JD에게 말한다. 금정연: 그러니까 일종의 '제텔카스텐' 같은 거예요. 인덱스카드와 펜, 그리고 상자만 있으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자, 인덱스카드의 한쪽 면에 영화 정보를 적어요. 제목, 감독, 배우, 몇 분 몇 초에 나오는 씬이다 같은 걸. 그리고 뒷면에는 해당 씬에 대한 짤막한 메모를 남기는 거죠. 그런 다음 이걸 레퍼런스 박스에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얼마가 지난 다음, 상자를 열어 짤막한 메모를 들여다보면서 생각을 정리해요. 그리고 새로운 상자를 열고 빈 인덱스카드에 방금 레퍼런스 박스의 메모를 보며 떠오른 아이디어, 이런저런 생각들을 적어서 넣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하나의 카드에 하나의 생각만 적는 거예요. 물론 각각의 카드의 한 면엔 레퍼런스가 되는 영화의 씬 정보를 적고요. 그리고 거기에 적절한 흐름대로 번호를 매겨서 새로운 상자(영화 메이킹 박스라고 할게요)에 보관해요. 추가할 카드가 생기면 역시 적절한 위치에, 이를테면 97과 98사이에 넣어야겠다면 97-A라는 식으로 번호를 매겨서, 끼워넣고요. 시간을 들여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상자가 꽉 차게 되고, 그안에서 자기들끼리 상호작용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죠. 그러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어느날 상자를 열고 인덱스카드를 꺼내서 차례대로 늘어놓으면 짜잔, 한 편의 비디오 에세이가 완성되었습니다! JD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혀를 차는 것도 같았다. 나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제텔카스텐 – 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는 [죄수운동법]과 함께 다름 아닌 JD가 내게 권해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정연 씨, 새로운 육체에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책을 추천하며 정지돈이 말했다. 그 책들의 제목을 들으니 문득 조정래가 떠오르네요. 그러자 정지돈이 반문했다. 조정래…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한다는 투였다. 예전에 등단 40주년을 맞아 [황홀한 글감옥]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에세이를 냈거든요. 저도 모르게 황홀한 글감옥에서 죄수운동법으로 운동을 하면서 제텔카스텐으로 글을 쓰는 이미지가 떠올라 버렸네요. 네… 정지돈이 한숨을 내쉬듯 대답하더니 덧붙엿다. 조정래랑 정연 씨랑 두 분이 비슷한 연배신 거죠? 6월 3일 목요일 나는 날씨에 따라 사는 것 같다. 업과 다운을 반복하면서. 맑은 날에는 그늘 찾고 흐린 날이면 짜증난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거의 죽어 있다.* 우리는 메세나폴리스에서 만났다. 정지돈과 나 그리고 ㅍ출판사의 편집자 s. 만남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다. 나는 비가 와서 반쯤 죽어 있었고, 정지돈은 마감에 치여 반쯤 죽어 있었다는 것 말고는. s와 헤어지고 정지돈과 둘이 남아 밥을 먹으러 갔다. 우리는 닭콩국수를 먹으며 글쓰기와 인간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을 쓰는 일은 쓰는 사람을 강퍅하게 만들고 주변을 짜증나게 만든다, 물론 우리가 글을 안 쓴다고 더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당장의 작은 마감들이나 이런저런 쪽글들을 줄일 필요는 있다, 그렇게 남는 시간과 체력을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쪽글을 안 쓰고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하려면 먼저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이 상업적으로 터져줘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쪽글을 안 쓰고 큰 기획이나 한 권의 책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건너뛰거나 비약하거나 반복하거나 스스로의 말을 취소하고 모순된 말을 하는 게 두렵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자꾸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움츠러들게 돼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정연 씨, 정연 씨가 올해 몇 살이에요? -서른아홉이요, 만으로… -하, 우리 아빠보다 나이 많아! 나는 깜짝 놀라 정지돈을 쳐다봤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먼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약이라는 감각은 인식의 너비와 관련되어 있어요. 반복이나 모순도 마찬가지죠. 만약 지적인 거인이 있다면 우리의 어떤 말도 비약이라거나 모순이라고는 느끼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제가 지적인 거인이 아니라는 사실 아닐까요. 뱁새가 황새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 모르세요? 정지돈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뭐라도 찢었네요… 그날 저녁 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 고양이를 부탁해 >를 봤다. 얼마 전에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을 SNS를 통해 들었다.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볼 수 있는 곳을 검색했는데 온라인에는 서비스하는 곳이 없었다. 어째서?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작업실을 뒤지다 먼지 쌓인 디비디를 발굴한 것이다. 오프닝. 인천의 만석 부두에서 교복을 입고 깔깔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는 다섯 명의 친구들. 이제는 일종의 유사 아날로그적인 감성마저 느끼게 하는 지글지글한 저화질의 디비디를 통해 그 장면들을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20년 전에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모르긴 해도 엄청나게 공감하거나 몰입하면서 봤던 것 같지는 않다. 내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자친구들의 이야기, 서울 아닌 인천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겠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순전히 내가 있는 우물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재미있게 봤고, 디비디로도 몇 번 더 봤을 것이며, 특히 모임 별이 작업한 사운드트랙 씨디는 닳도록 들었다. 하지만 중반을 향해가면서 영화는 내게 점점 낯설어졌고,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영화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그냥 흔들리는 청춘?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친구들의 이야기? 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계급과 주거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것도 노골적인 계급과 주거에 관한 이야기였어. 특히 지영의 집이 무너지고 경찰의 강압적인 태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며 감옥에 들어가는 부분은 지금-여기의 상황에서도 곱씹어 볼 부분이 많을 것 같았다. 내가 곱씹어 보기에는 너무 큰 조각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집 앞 고양이 가족들에게 써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쓰지 못했던 고양이 번역기 어플로 조부모의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지영의 품에 안겨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의 말을 번역해보았다. 고양이: 기분이 좋지 않아요. 고양이: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요? 밤. 아내와 와인 마시며 TV 보다가 예전에 사놓았지만 당연히 읽지 않은 [씨네21]을 충동적으로 펼쳐들었다. ‘영화를 향한 질문들’이라는 기획으로 유운성과 김소영과 정성일의 글들이 두 호에 걸쳐 실려 있었다. 그중 김소영의 '영화의 피는 응고하지 않아 - <기생충>을 중심으로 쓴 영화의 (신)물질론'을 읽다가 번쩍!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액체 근대 사회에서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라는 마거릿 대처의 악명 높은 구호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기정의 발언, “그 누구도 돌보지 마”가 번개 천둥을 불러왔다면”이라는 구절을 읽는데, 머릿속에 순간 번개 천둥이 쳤다. 움찔하며 놀라는 JD를 뒤로하고, 나는 급히 노트북을 열어 정지돈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한다. 금정연(V.O.): 저 역시 가끔은 깜짝 놀랄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연결되는 걸 느낍니다. 그것들은 순간이지만 놀라운 형태의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아니면 단지 제가 취했거나요. 그러나 의식은 그 자체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연결은 내용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핵심을 빼놓는 행위입니다. 텍스트가 매순간 스스로 재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오늘 지돈 씨를 만나고 돌아온 후 제 머릿속에서는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사가 새롭게 쓰여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할게요. 지돈 씨, 박무석과 '불나비'는 잊으세요. 우리의 비디오 에세이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시작해 <기생충>에서 끝날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렇다면, 나중의 나중은 어떨까요? 이것은 계급과 거주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길고양이를 자기보다 조금 형편이 나은 친구에게 '부탁'하는 것과 모략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리를 차지한 후 "그 누구도 돌보지 마"라고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 김소영이 말하는 <기생충>의 큰 비=도시의 유동성=액체근대와 고양이의 액체성=청춘의 유동성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는 이야기, 동시에 그것은 어느 소설가가 일간지의 지면을 통해 “나는 속으로 ‘공각기동대’ 실사 영화를 다시 찍는다면 세트를 만들 필요 없이 그냥 여기서 촬영하면 될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사이버펑크 전사가 아니므로 그 단지에 살면 틀림없이 불행해질 거라고 느꼈다”*라는 문장을 아무런 수치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쓸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크리스티앙 메츠가 말한 시네마의 실행, 적어도 실행의 한 시도가 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여기, 두 영화에서 생각나는 장면을 급히 쓴 인덱스카드를 스캔한 이미지 파일을 동봉합니다. 지돈 씨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두서없는 메일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무척 살고 싶습니다. 당신의 K정연 나는 발송 버튼을 누르고, 그리고 기다린다. 정지돈의 답장을 [비디오 에세이 만들기]가 출간되기를 충동구매한 존 그레이의 [고양이 철학]이 배송되기를 밝은 미래를 아마겟돈을 핵폭탄을 나는 늘 기다린다 come, come, come, nuclear bomb…* *참고자료 [얼음 속을 걷다](베르너 헤어초크, 안상원 옮김, 밤의책, 2021) (*첫 문단 전체는 위 책의 서문과 1974년 11월 23일 일기의 일부를 변형한 것이다) [영화의 환상성](장 루이 뢰트라, 김경온 긴김, 동문선, 2002) (*알랭 게르브랑의 일화를 19쪽에서 인용했다) [마운트 아날로그](르네 도말, 오종은 긴김, 이모션북스, 2014) [참을 수 없는 가우초](로베르토 볼라뇨,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2013) [담배와 영화](금정연, 시간의흐름, 2020) (*임재철에 관한 일화를 149쪽에서 인용했다) [제텔카스텐-글 쓰는 인간을 위한 두 번째 뇌](숀케 아렌스, 김수진 긴김, 인간희극, 2021) [I Seem to Live: the New York Diaries, 1950-1969: Volume 1](Jonas Mekas, Spector Books, 2020) (*1950년 1월 1일 일기의 일부를 변형했다) '영화의 피는 응고하지 않아' (김소영, [씨네21] 1301호) [모든 것은 영원했다](정지돈, 문학과지성사, 2020) (*159쪽에서 연결과 재현에 관한 부분을 인용하며 인용자가 일부 변형했다) ‘지금 무엇이 끝나고 있는 걸까’ (장강명, https://news.joins.com/article/24077719) Morrissey, 'Everyday Is Like Sunday'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1. 2015년, 뜬금없이 눈앞에 다시 나타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의 매혹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36년 만의 귀환이다. 특히 1981년에 개봉했던 < 매드 맥스 2 >와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이미 이 당시 <매드 맥스 2>는 묵시록 이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펼쳐내면서 당대 유행했던 사이버 펑키한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흙먼지 날리는 웨스턴의 풍경으로 되돌렸었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낙후할 것이며, 이성과 합리성이 아니라 동물적 생존 본능과 폭력의 강인함이 지배할 것이라는 잔혹한 비전은 당대 날것처럼 생생했다. <매드 맥스 2>는 영화의 혼종성이 성취할 수 있는 쾌감을 이미 보여준 작품이었다.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풍경으로 제시되었다. 불모한 서부의 풍경이 미래 사회의 폐허를 대체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득세했던 80년대 초의 살벌한 정치 사회(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는 야만과 폭력이라는 무정부 상태와 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폐허의 풍경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속도전이었다. 지금 이 영화 속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동차’로 대변되는 문명의 흔적뿐이었다. 굉음과 속도로 질주하는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생존의 유일한 무기이자, 사실 이 영화 <매드 맥스 2>에서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2015년에 귀환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다시금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서사의 측면이나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속도전의 전략에서 이 영화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이 영화 개봉 이후 많은 글들이 페미니즘적 요소와 대사가 필요 없는 무성 영화적 수사학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과연 그러한 요소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쾌락할 수 있게 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영화가 즐거웠던 것은 여성들이 연대하고 해방을 이끌어서도 아니었으며, 또한 대사가 억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성영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근거도 되지 못한다. 2.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 유독 나의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 있다. 할리우드의 대자본과 기술적 숙련도, 그리고 산업 내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감독들에 의해 추동되는 일련의 SF 대작 영화들 말이다. < 프로메테우스 >의 리들리 스콧, < 그래비티 >의 알폰소 쿠아론,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가능한 미래’를 재현해 왔던 < A.I. > < 우주전쟁 > < 마이너리티 리포트 >의 스티븐 스필버그. 이들과 좀 다른 위치에서 주목할만한 감독으로서는, ‘쾌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란 개의치 않는 마이클 베이, 올드한 리버럴리스트 마인드와 고전적 영화 서사를 고수하는 < 아바타 >의 제임스 캐머런,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실사(live action) 영화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이미 오래전부터 개의치 않고 작업하고 있는 < 하늘을 걷는 남자 >의 로버트 저메키스. 그리고 드디어 36년 만에 자신의 존재를 새삼 입증한 < 매드 맥스 >의 조지 밀러가 그중 한 명이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 중 어느 한 지점과 유사점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손쉽게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리들리 스콧의 < 프로메테우스 >일 것이다. 70년 이상의 삶을 훌쩍 살아낸 두 노장들이 할리우드 내에서 여전히 대규모 예산의 SF영화들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할리우드 시스템의 노련함과 영악함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감독은 이제는 ‘아날로그’로 치부되는 이미지의 ‘물질성’에 천착하는 감독들이다. 흔히 ‘실재의 힘’ 또는 ‘지표(index)의 힘’(퍼스와 마노비치의 개념으로서)이라고 부를법한 그들의 영화적 스펙터클의 공통점은, 영화란 여전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라는 데에 방점을 둔다는 점이다. 70년대부터 영화계에 적용되기 시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화계 전반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필름의 역사로 대변되는 영화의 프로-필르믹한 속성(실재를 기록-촬영한 것)은 디지털카메라와 제반 기술의 변화로 더 이상 ‘찍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에 기반한 ‘그리는’ 작업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캐머런 감독의 판도라 행성도, < 스타워즈 >의 우주공간도,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도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실체일 뿐이다(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 프로메테우스 >와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두 노장들은 여전히 영화적 이미지를 ‘찍는’ 행위에서 창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실재하는 대상이 발휘하는 물질적 크기와 중력의 힘을 믿는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면 관객에게 이미지와 시각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들은 증명한다. (< 인셉션 >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도 대부분 실제 이미지를 찍는다) 그리고 시네필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 긴장이 여느 그려진 세계들과는 차원이 다른 체험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간혹 의구심도 생겨난다. 괴력의 영화적 체험을 제공했던 <프로메테우스>나 < 매드 맥스 >의 힘은 정말 ‘실재의 힘’, ‘찍는’ 영화적 힘에서 생겨난 것일까? <인톨러런스>(위) <카리비아>(아래) 3.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 중, “영화, 그것은 ‘나는 본다’가 아니라 ‘나는 난다’이다”라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비릴리오는 비행술과 영화가 19세기 말,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미래파의 속도와 운동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영화적 비전과 유사한지, 무엇보다도 전쟁과 비행과 시각 사이의 접합으로서 항공투시법의 순간성과 ‘질주하는 관찰’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특히 이를 설명하는 중에 D.W 그리피스의 좌절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피스가 < 인톨러런스 >라는 작품으로 위대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무렵,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지오바니 파스트로네의 1914년 작 < 카비리아 >를 보고 의기소침해진다. 그 영화에 비하면 자신의 영화가 너무 뒤처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비리아>는 “기술효과와 시점 촬영의 역동적 완벽성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의 내러티브적 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품이었다. 파스트로네는 3차원적 공간에 집착하면서, 카메라를 지속적으로 움직여 시각적 구도를 분리함으로써 깊이의 환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이동 촬영기(카렐로)를 사용하고 남용하면서, 카메라가 사물의 크기와 차원을 조작하고 위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전쟁과 영화, 60-62p) 나에게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가 창조하는 시간과 운동. 그리고 속도의 문제. 이러한 키워드는 위에서 언급한 최근 할리우드 특수 장르 영화의 디지털 미학으로서 주목받는 지점과 다시금 연결된다. < 그래비티 >의 탈육화된 롱테이크 쇼트와 유동적 프레이밍, 이냐리투가 < 버드맨 >에서 위장된 롱테이크를 통해 만들어내는 공간의 통제와 시간의 재창조, < 인터스텔라 >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병렬하거나 중첩된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시간적 디제시스, 그리고 이 영화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제시되는 속도와 시간. < 매드 맥스 >에서의 시간 역시 여러 층위로 구성된다. 일단 두 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으로서의 시간, 영화적 디제시스에서 제시되는 비확정된 미래사회-포스트 묵시록적 세계의 시간, 그리고 각 쇼트가 각자의 자율성(고속과 저속 촬영 등)을 통해 획득하는 파편화되고 분리된 시간. 그런데 이 모든 시간에 대한 창조와 감각은 하나의 목표로 집중된다. 그것은 ‘속도’라는 개념이다. 다시 비릴리오로 돌아가자면, 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른 지점을 카메라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시점의 유동성에서 읽어낸다. “영화에서 가짜인 것은 원근법의 효과가 아니라, 깊이 그 자체이며, 투사된 공간의 시간 거리다. 여기서 속도는 이미지의 본원적 위대함으로써 나타나며, 깊이의 근원으로서 나타난다” <제너럴>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기계 4.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초창기 영화와 연결짓는 지점은 대사의 억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온전히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체험(속도체험)을 목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초창기 영화연구에서 제기된 일명 ‘매혹의 시네마’라는 개념은 오늘날 디지털로 재구성된 영화 전략의 주요 수사학이기도 하다. 초창기 영화 관객들에게 영화가 제공했던 것은 서사나 주제의식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였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매체-시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의 핵심에는 영화가 현실의 속도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속도를 구성하고 질주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열차 체험이 근대적 시각 경험의 혁명이었던 것처럼, 영화 역시 <열차의 도착>과 함께 관객들에게 도착했다.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 상영관에서 관객들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열차에 놀라 뒤로 도망쳤다는 그 유명한 일화는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대 관객들 역시 자신들이 보는 것이 환영이고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이미지의 사실성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지각하는 이미지 매체의 낯섦이었다. 낯선 이미지 형식이 제공하는 두려움과 경이. 그것이 근대의 새로운 ‘경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초창기 영화는, 할리우드가 영화를 서사적 체계로 표준화하기 이전, 지각과 경험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로서 소구되었다. 이 형식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구성하는 경이로운 매체였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에서, 꿈을 꾸는 영사기사가 스크린 내부의 세계로 들어가 경험하게 되는 시공간의 불가해 한 전환능력은 초기 영화적 매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어쩌면 버스터 키튼이 < 제너럴 >에서 당대의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증기기차의 육중한 무게와 속도감,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인간의 지배능력은 2015년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가 취하고자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경험하는 영화: <그래비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하늘을 걷는 남자> 5. < 제너럴 >에서 버스터 키튼은 질주하는 증기 기관차를 빈번하게 부감의 롱숏으로 제시한다. 이 거대한 기계와 그것을 담아내는 공중에서의 롱숏은 관객에게 이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한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영화의 많은 쇼트들은 나미비아 사막을 조망하는 공중 쇼트로 구성된다. 미래사회의 폐허를 증명하는 쇼트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관객에게 쇼트-이미지에 대한 지배의 위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지배에 대한 감각은 초기 영화에서 골똘했던 ‘경험’의 사실주의와 연결된다. 즉 자신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가짜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허구적 이미지를 진짜 경험으로 쾌락하는 이중적 인식의 문제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전략. 영화라는 매체를 진짜 경험처럼 느끼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매체의 흔적 자체를 지워야 한다. 매체의 새로운 형식을 쾌락하면서도 매체 자체를 지우는 일, 즉 ‘비매개적 매체’의 환각-가상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최근 디지털 시네마의 최전선에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력하는 것은 서사의 촘촘함이 아니라, 거대한 스펙터클의 속도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 그래비티 >에서 한없이 지속되는 공중회전의 순환이나,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단순하게 반복하는 추적의 스펙터클과 카니발적 회전운동을 구성하는 쇼트들에는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메키스 감독의 <하늘을 걷는 남자>의 후반부, 오로지 텅 빈 공간을 오가는 행위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 대해 관객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과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래비티>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가속화된 시간에 대한 지배를 제공한다면, <하늘을 걷는 남자>는 위태롭게 한발 한 발 내딛는, 지연된 시간의 감각을 제공한다(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이 시퀀스들은 두 개의 경험적 위치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줄 위를 걷는 남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관객을 연루시키는 자리이며, 다른 하나는 빌딩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관람객들의 자리이다. 극장의 관객은 두 자리의 시선을 교차하며 3D 체험의 미장센으로 극대화된 영화적 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속도가 어찌하든 이러한 영화들은 모두 영화적 시간성을 영화의 비매개적 경험의 핵심 장치로서 구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오인한다. 영화, 그것은 ‘내가 본다’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다’라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비릴리오의 말을 살짝 비틀자면, ‘난다’라는 개념은 ‘경험’의 자리를 관객에게 전지적으로 제공하는 주요한 쇼트들이다. 물리적 현실에서 발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쇼트와 프레이밍의 새로운 자리를 지배하는 자리이다. 2015년 첨단의 전략으로 무장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결국 초창기 영화에 해당하는 < 제너럴 >과 유사한 쇼트의 시간 감각에 집중한다. 버스터 키튼은(존 포드 역시 그랬던 것처럼) 남북전쟁이 한창인 광대한 공간들 사이를 통과하는 기차의 물질적 거대함과 속도를 강화하기 위해 개별 쇼트들의 속도를 전략적으로 달리한다. 즉 빨리 감는 방법으로 대상의 긴박감을 배가하는 것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워보이들을 소개하는 쇼트들은 자동차들의 질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속도를 조작한다. 마치 다른 종류의 인류를 목격하는 듯한 엑조티즘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철저하게 전쟁기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후 이 영화는 질주의 숙명을 위해 내달린다. 육중한 기계들이 자신들의 물질성을 증명하듯, 폐허의 사막을 모래바람과 함께 질주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 속 자기장 속으로 질주한다. 거대한 폭발들과 그 순간 누군가의 시점인지 모를 상태로 제시되는 파편화된 쇼트들 (오로지 폭발의 외양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제시할 수 위치에서 구성된 쇼트들)은 이미지의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기 위해 주로 공중 부감 쇼트와 롱숏들로 구성된다. 이 순간 관객들이 체험하는 영화적 속도는 일명 ‘라이딩 영화’라 불리는 체험 영화로서 구성된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에서 영화산업이 위축되자, 산업은 TV와 다른 영화적 체험을 강조하기 위한 거대한 스펙터클 구성에 골몰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3D의 광범위한 활용, 와이드 스크린,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네라마나 아이맥스와 같은 그 어떤 매체도 제시할 수 없었던 거대한 크기의 제공이었다. 특히 시네라마나 아이맥스는 서사가 아니라 주로 공중에서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나 롤러코스터 같은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포착해 관객들로 하여금 체험을 하는 듯한, 라이딩 영화 경험을 제공하였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6. 2015년,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서사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거의 유아적 수준의 지능만 있다면 이해하고도 남을 스토리와 캐릭터가 제시되고 영화의 대부분은 거대한 ‘스펙터클’로 구축된다. 이 스펙터클이 가 닿고자 하는 끝점에는 롱테이크 전략(탈육화된 시선의 전능성과 지배의 감각) 혹은 극단적 쇼트 분할(주로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클로즈업 쇼트들)로 제시되는 ‘영화적 체험’의 쾌락이 자리한다. 영화는 백 년 이상의 역사적 서클을 한 바퀴 순환하고 결국 초창기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테크놀로지 매체가 구성할 수 있는 형식적 쾌락으로 되돌아왔다(매혹의 시네마). 디지털을 동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가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3D와 이미지의 극사실주의(라이브 액션과 CG의 구분이 불가할 정도의 사실주의)를 통해 비매개의 환상을 획득하는 영화적 체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영화의 최전선일까? 초창기 영화가 그랬고, 50년대 극장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던 영화체험의 극대화가 그랬듯, 지금 영화도 어떤 전환점(디지털의 광범위한 확장과 산업 시스템의 전환,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매체 시대에 반복되는 극장의 위기)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인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강조하는 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경이로움과 매혹에 탐구하는 역사적 순환의 한 국면 말이다. 어쨌거나 산업이 추동했던 영화 미학과 매혹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초창기 영화나 지금 영화나 그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영화는 운동이며, 질주이며,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경험하는 매혹의 스펙터클이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