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 감독
- 레베카 홀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테사 톰슨, 루스 네가, 안드레 홀랜드,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빌 캠프
복장전환(cross-dressing) 영화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960년대에 정점을 찍는다. 복장전환 영화는 당대 성별성의 역동적 변화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이자 퀴어적 놀이터로 작동했다. 이들 영화는 크게 남장여자와 여장남자 컨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전자는 진지한 사극에서, 후자는 그보다는 가벼운 코미디에서 발전한다. < 별 >(1961)과 < 십오야(의 복수) >(1969)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 미인도 >(2008)와 < 도리화가 >(2015)처럼 남장여자 사극은 가부장제 비판과 남성동성애의 서브코드를 수반한다. 과거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사극의 특성상 강력한 가부장제 체제에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역할은 극도로 제약되고 여성 주인공은 남장을 하고 남성동성사회에 침투할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1960년대 남장여자 사극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과시와 영웅적 모험을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무사로 성장하는 서사가 두드러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십오야(의 복수)>가 대표적이다. 적대적인 두 가문에서 동시에 태어난 남녀 아이가, 남아선호를 이유로 뒤바뀌고 여자아이는 상대방 가문의 아들로 키워져 복수의 칼을 간다. 이 과정에서 뒤바뀐 두 남녀는 사랑을 느끼지만, 남장여자인 매화(남정임)가 마지막에 남자의 부모가 자신의 친부모라는 비밀을 알고 나서도 살해를 감행하자 각자의 길을 떠난다. 성별뿐만 아니라 복수의 대상까지 전환된 상태에서 남아있는 감정을 해소하지 않은 채 끝나는 결말은 두 주인공과 관객 모두를 혼란과 당혹 속에 빠트린다. 매화는 그녀가 남자가 아닐 거라는 다른 남성들의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도 그리고 근친살해라는 도덕적 문제에도 끝내 남자의 자리를 고집한다. 마치 그녀의 목표는 사랑하는 남자도, 가문의 복수도 아닌 남성성의 획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매화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남장을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에게 특히 로맨스의 대상인 거목(남진)에게, 그가 진짜 남자인지를 의심받으며 패싱에 자주 실패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매화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그녀의 당황하는 표정과 여성스러운 외모를 스펙터클화한다. 즉 매화는 이성애 로맨스 대상으로서 그녀의 여성성을 해칠 정도로 남장이 충분치 않다. 여기서 타인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남장이 벗겨지는 순간의 취약함의 노출과 여성성이 교묘하게 결합된다. 그녀의 남장은 지워지지 않는 강력하고 진정한 여성성을 강조하는 데 이용된다. 이렇게 대부분의 남장여자 사극이 ‘남성동성애’라는 방해물을 ‘극복’하고 최종적으로는 진정한 이성애적 결합을 목표로 달려가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남성동성애적 환상이 순간적으로 무대화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십오야>처럼 자신의 남성성을 고집하는 서사처럼 퀴어적 실천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지정성별이 남성인 주인공이 여장하는 영화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장르가 주를 이루며, 여성으로 패싱될 때 전환된 욕망, 관계, 직업유지 등을 생활밀착형 에피소드로 상세하게 묘사한다. 남자들이 여장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직업이나 생계다. < 남자는 안 팔려 >, < 내 것이 더 좋아 >, < 남자와 기생 >, < 신입사원 얄개 >, < 치마 입은 남자 >의 주인공은 모두 남자로서 직업을 찾거나 거주지를 찾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 여장을 한다. 이 영화들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도시는 여자들이 살기에 더 좋은 장소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도 묘사되다시피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여성 일자리가 증가했지만 주로 제조공장, 식모, 비서, 판매원, 공연, 미용, 버스 안내양, 성판매 등의 특정 직업에 국한되었다. 노동조건이 좋지 않아서 남성이 꺼리는 직업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직업에서는 남성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여장남자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자신이 취직을 못 하는 것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도시의 젊은 여성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침입자로 묘사한다. 산업 시스템이 변하고 도시의 구성이 달라질 때, 성 역할도 변할 수밖에 없다.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전통적 남성 주체성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여장남자 코미디는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이 비난받는 이유를 여성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서사를 제공해 주는 동시에 근대 도시에 더 적합한 유연하고 '여성적인' 새로운 남성성을 연습할 수 있는 쿠션이 되어 준다. 변화에 대한 부적응 그 자체와 적응을 위한 고투로 인해 발생하는 고단함은 기존 규범에서 벗어난 신체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한편 여장남자 코미디는 근대화된 도시에서 여성의 노동시장의 진입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협상하려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들은 여장남자 주인공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통해 여성의 직업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은 차별과 혐오를 폭로하고, ‘여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또한 < 여자가 더 좋아 >나 <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 >, < 내 것이 더 좋아 >, < 남자와 기생 >, < 치마 입은 남자 >처럼 여장남자들은 이미 주류 남성들과는 이질적인 ‘여성적인’ 남성이다. 그들은 다른 남성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자신을 스펙터클화 하는 신체적 퍼포먼스에 능하며, 요리와 뜨개질을 좋아하고, 성적으로 여성에게 위협적이지 않고 잘 어울린다. 여장한 이후에는 실제로 ‘독특한’ ‘본 적 없는’ ‘다른 여자와는 다른’ 여자로 남자의 인기를 독차지 한다. 여장남자에 대한 다른 남자들의 성적 접근은 대부분 성폭력에 해당하지만 말이다.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는 앞서 말한 주제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퀴어적 관계를 가시화하는 영화다. 고향을 떠나 상경한 성춘(서영춘)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살면서 그의 아내 노릇을 한다. 봉수는 헤어진 전 아내의 체구가 성춘과 비슷하다며 이미 내재해 있는 그의 여성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봉수의 전 ‘아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시스젠더인지 트랜스젠더인지, 혹은 크로스드레서인지 알 수 없다. 낯선 성춘을 거리낌 없이 집으로 데려오는 봉수의 태도나, 체격이 비슷했음을 강조하는 것을 봤을 때 봉수의 전 파트너 역시 ‘남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춘은 주인집에 들키지 않기 위해 완벽한 ‘아내’ 역할을 하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봉수는 그들의 집 건너편에 레즈비언 커플인 강자(이금희)와 분임(고은아)이 살고 있다고 알려준다. 성춘은 남성적인 ‘바지씨’ 강자와 여성적인 ‘치마씨’ 분임을 관찰하며 ‘아내’ 역할을 수행한다. 봉수와 성춘에게 이 레즈비언 커플은 전통적 성역할을 모범적으로 제시해주는 좋은 예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부터 여성성은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눈, 입술, 코의 클로즈업은 주류 카메라가 여성성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시골에서 올라온 성춘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해 삽입한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서울에 올라와 쇼윈도우 너머에 있는 마네킹을 처음 본 성춘은 ‘고운 여자가 갇혀 있다’고 착각한다. 여성성이라 것이 프레임, 즉 무대에서 수행되는 것이라는 것을 성춘의 순진함을 이용해 형식화한다. 또한 봉수와 성춘이 함께 데이트를 나간 장면에서 둘은 영화관을 지나가는데 간판에 구봉서와 서영춘이 주연한 ‘내 것이 더 좋아’라는 제목의 영화가 걸려 있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프레임 속의 프레임,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젠더, 특히 여성성이 수행적이고 구성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든다. 이중 가장 중요한 프레임은 바로 강자와 분임이 사는 집의 창문이다. 봉수는 성춘이 다른 아내들과 달리 애교가 없다고 타박하고 성춘은 건너편 창문을 통해 분임의 얼굴표정, 제스처, 분임이 강자에게 하는 ‘애교’를 모방하고 학습한다. 성춘은 분임이 강자에게 회사에 잘 다녀오라고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출근하는 봉수에게 키스를 해준다. 성춘과 분임이 동일하게 가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퍼포먼스가 강조되는 가수라는 꿈은 분임의 여성성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성 역할을 수행하고 노력한 결과라는 것을 드러낸다. 성춘이 옆집 창문에서 보이는 분임의 제스처와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고 따라할 때, 창틀로 프레이밍된 그리고 무대화된 여성성의 수행은 정확히 이중적으로 영화적인 것이 된다. 창문은 젠더의 표정을 드러내는 ‘얼굴’이 된다. 분임을 보는 성춘과 성춘을 보는 관객. ‘여성적인 남자’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을 학습하고 장착하는 과정은 충분히 퀴어적이다. 하지만 다른 복장전환 영화들처럼 이 영화도 성춘의 여장을 벗겨내고 이성애 관계로 짝을 교정하면서 퀴어적 실천과 욕망을 봉합하려 한다. 결말에서 성춘은 분임과, 봉수는 강자와 새롭게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짝짓기는 이성애적 결합이나 ‘규범적 정상성’으로 보기에 매우 의심스럽다. 커플 스와핑이라는 실천과 이성애적 교정을 통해 오히려 동성애적 함의가 더 짙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분임은 성춘을 여자로 알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또한 성춘은 부부란 모름지기 아들 딸 낳고 살아야 한다며 ‘정상성’을 강조하고 공원에서 분임에게 해코지 하는 남자들을 물리치며 자신의 ‘규범적 남성성’을 과시한다. 하지만 분임을 괴롭힌 남자들은 성춘이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다. 이 장면은 남성성 역시 수행되고 구성됨을 강조할 뿐이다. 한편 봉수와 강자는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아내들’ 욕을 하며 친해지게 된다. 봉수는 수염 많은 집사람보다 피부도 부드러운 강자가 더 마음에 든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강자도 성춘처럼 봉수와 이어지기 위해 치마를 입고 귀걸이를 하며 자신의 여성성을 찾으려 하지만 이 역시 여장을 한 부치처럼 보일 뿐이다. 결국 강자는 봉수의 집에서, 성춘은 분임의 집에서 함께 산다. 마지막에 영화는 두 집의 창문을 번갈아 보여주며 끝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규범적 정상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창문을 통해 여전히 서로를 모사하고 구성하며 초월해 나가는 방식으로 젠더(적 관계)가 구성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동일하게 남성성을 수행하는 봉수와 강자, 여성성을 수행하는 성춘과 분임은 어느 커플보다도 더 동성애적이다.
“한국영화의 얼굴들”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재개하게 됐다. 이 연재에선 한국영화에서 얼굴이 된 클로즈업(close-up) 쇼트들을 관찰하고 이야기하려 한다. 클로즈업으로 프레이밍된 인간의 얼굴뿐 아니라 동물, 사물, 풍경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응시(gaze)를 돌려주며 기어이 얼굴이 되는 클로즈업까지 포괄하려 한다. 클로즈업은 영화사 초기부터 어떤 다른 영화 쇼트보다도 영화이론가들을 사로잡아 왔다. 특히 클로즈업은 이전의 시각매체가 보여준 적 없는 시점과 크기를 표현하면서 영화 고유의 매체성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평가되곤 했다. 영화학자 매리 앤 도앤은 이러한 매혹에 대해 클로즈업이 양가적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클로즈업은 근접성, 내밀함, 디테일, 부분, 정서, 인칭화된 시점, 닮음, 연속성, 인간화, 주체화, 의미작용의 집중화 공간이면서, 반대로 거대함, 외부성, 총체성, 디제시스로부터의 자율성, 비례에 맞지 않음, 노출, 탈인칭화된 응시, 낯선 기이함, 불연속성, 비인간화, 객체화, 의미화 할 수 없는 잔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아이콘으로서의 스타를 표현하는 주된 기법이자 높은 주목도 때문에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상품-물신이 될 수 있는 반면, 압도와 경외감을 일으키는 낯선 타자로서 탈약호화된 기호가 될 수도 있다. < 국가의 탄생 >(1915)의 미국감독 D.W. 그리피스와 < 전함 포템킨 >(1925)의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은 두 대립된 관점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그리피스는 친밀감과 정서적 집중을 활용해 멜로드라마적 순간과 영화스타를 창조했고, “롱 쇼트의 코끼리떼보다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더 무섭게 보인다.”고 피력했던 에이젠쉬쩨인은 일상을 넘어선 낯선 충격으로 계급화된 현실을 깨닫고 혁명의 깃발을 들게 만들었다. 이 연재는 클로즈업의 양가성 중 어느 한쪽을 옹호하기 보다는 이 대립된 잠재성이 교차하면서 혼란과 붕괴를 야기하고 무너져 내린 파편더미들 속에서 영화적 응시가 드러나는 순간들에 더 집중할 것이다. 또한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보다는 휴대가능한 스몰 스크린이 지배적인 상영 플랫폼으로 부상하면서 영화의 개념과 범주가 달라지는 가운데 위에 언급한 클로즈업의 잠재성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로 다룰 클로즈업은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 >(1991, 이하 <이태원 밤하늘>)의 마지막 쇼트로, 샤니라는 인물의 얼굴이다. <이태원 밤하늘>은 < 고교우량아 >(1977), < 깊은 밤 갑자기 >(1981), < 장군의 아들 >(1990) 등의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윤삼육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영화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이태원으로 오게 된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린다. 여기서 이태원은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받아주는 포용적 공간이자 미국이라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탈)식민적 공간이다. 미군에게 성판매를 하는 기지촌 클럽의 ‘양공주’, 클럽댄서로 일하는 트랜스젠더 여성들, 조직폭력배들, 미군과 ‘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가진 것 없지만 기성세대에 질린 젊은 청춘들이 그곳에 산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 마지막 순간에 도청을 탈출해 동두천 기지촌으로 숨어든 대학생이 민중의 삶을 지척에서 경험하고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룬 < 오! 꿈의 나라 >(이은, 장동홍, 장윤현, 1989)가 취했던 반제국주의 관점과 1980년대 상업영화의 에로티시즘 경향을 절묘하게 섞는다.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씬은 “미국 UPI 영화 직배저지투쟁에 앞장서온 모든 영화인에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당시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1988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 직배가 허용되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10%대로 떨어지는 가운데 한국영화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투쟁이 영화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었다. ‘한국영화 위기’의 감각은 이 영화에서 민족-국가 및 이성애중심의 ‘정상’가족 위기와 남성성 재건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샤니가 있다. 다수의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클럽댄서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이고 레즈비언으로서 애인 금자(임주연)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샤니는 마지막까지 영화의 주제를 운반하는 동시에 비트는 인물이다. <이태원 밤하늘>이 제작된 시기는 사회 진보운동이 통일, 계급, 민주화 운동에서 인권운동으로 확장되어가던 시기였다. 현실과 스크린 모두에서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 여성은 사회적 차별을 당하는 민중 또는 시민으로 소환되기 시작한다. 일부 용어나 관점이 문제적이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제도적 문제들을 인권적 관점에서 조명했던 <PD수첩>의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들-‘게이’들의 삶」(1995.5.9.)이라는 에피소드가 방영되고, < 개 같은 날의 오후 >(이민용, 1995)는 가정폭력에 항의하며 옥상에 올라가게 된 여성들 중 트랜스젠더를 포함시켜 시스젠더(cisgender, 사회에서 지정받은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한다고 인지하는 사람) 중심의 여성범주를 해체했으며, <이태원 밤하늘>과 < 마스카라 >(이훈, 1994)는 트랜스젠더 여성 캐릭터에 각각 오윤희와 하지나라는 트랜스젠더 당사자 배우를 캐스팅했다. 샤니는 애인 금자의 만류에도 둘의 미래를 위해 미군을 상대로 성판매를 한다. 그러던 중 금자가 샤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오래전부터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호르몬치료를 받아온 샤니는 금자의 임신을 믿을 수 없다. 금자의 임신은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선배는 호르몬 치료에도 불구하고 간혹 “어떤 자극에 의해” “죽어있던 남성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그 자극이 무엇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민족-국가의 미래가 있으려면 반드시 이성애 부부에 의한 생물학적 친자가 있어야 한다는 목적론적 암시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샤니가 남자의 모습으로 살아달라는 금자의 청을 거절하자, 금자는 홀로 자신의 시골 고향집으로 떠난다. 결국 샤니는 고민 끝에 남장을 하고 금자를 만나러가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이 영화에는 샤니와 금자 외에도 아이가 있는 또 다른 대안 가족이 등장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클럽의 다른 ‘양공주’ 여성들과 달리 젊은 커플인 유진(최진영)과 상희(전세영)는 동생을 학대하는 엄마와 청년들을 착취하는 조폭 두목 아버지 장포 모두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이 셋은 “대안을 찾아 떠나겠다”는 분명한 선언에도 친자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민족-국가를 맡길 수 있는 이상적 가족으로 선택되지 못한다. 영화는 오히려 샤니에게서 제국인 미국에서 해방된 민족-국가의 미래 서사를 찾는다. 트랜스젠더인 샤니를 강제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재성전환 하는 혹은 드랙킹(drag king) 수행을 하게 만드는 과정은 ‘식민화되고 여성화되었던’ 민족-국가의 재건/재남성화로 은유화 된다. 이성애 부모와 친자라는 생물학적 관계로 맺어진 규범적 가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산부인과 의사의 증언처럼 죽은 줄 알았던 민족적 자존심인 ‘남성’이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샤니를 통해 효과적으로 이분법적 대립과 위계화가 형성된다. ‘근대/도시/여성/비규범적 트랜스젠더 신체/동성애/(탈)식민화된 공간/오염/헤테로토피아’인 이태원과 ‘전근대/자연/남성/규범적 시스젠더 신체/이성애/주권적 민족-국가/순수/유토피아’인 고향으로 이원화되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성장서사처럼 진행된다. 샤니는 심신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자르고, 깨진 거울을 응시하고, 양복을 입으며 남장을 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사각앵글로 이뤄진 짧은 쇼트들이 몽타주씬으로 구성되며 그야말로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엄청난 폭력과 고통을 가시화한다. 이것은 단순히 샤니에게 보존되어 있던 남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으로의 강제된 (재)성전환이자 강압적인 이성애로의 교정이다. 또한 거칠게 이어 붙어진 몽타주는 그 자체로 프랑켄슈타인의 몸처럼 남성성의 편집이 된다. 남성성이 편집된 자국과 인공성은 사라지지 않고 드랙킹 공연처럼 샤니 혹은 오윤희 배우의 신체의 표면에서 이질적으로 겉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몽타주씬 이후 쓸쓸하고 황폐해 보이는 이태원 낮의 거리를 걷던 중 샤니는 남자 행인에게 부딪혀 욕을 먹는다. 남자는 “야 임마! 똑바로 보고 다녀, 이새끼야!”라고 소리친다. 순간 샤니는 자신이 남성으로 패싱(passing,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겉보기 성별)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샤니는 옅은 미소를 띤다. 이중의 성전환 속에서 분명히 정체성과 존재가 파괴되고 분열되는 고통을 겪지만 또한 그녀의 (재)성전환 혹은 드랙이 제대로 통했다는 복잡한 트랜스젠더의 쾌감을 보여준다. 품이 커서 어색해 보이는 남자 양복을 입은 샤니는 산으로 둘러싸인 금자의 시골 고향에 도착한다.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과 비교되는 새소리가 들리는 자연풍경 속에서 놓인 샤니를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뒤쫓는다. 금자는 전통적인 초가집 가옥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금자의 신체는 샤니가 트랜스 여성으로서 동일시하는 여성 신체인 동시에 레즈비언으로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말에서 원초적으로 보이는 그 젖가슴은 오직 가부장제-이성애 중심적인 재생산만을 위해 거리를 두고 타자화해야 할 자연적 신체로 묘사된다. 재생산이 가능한 모성성으로 환원된 시스젠더 여성의 신체는 트랜스젠더 여성은 근접할 수 없는 원본의 환상을 만든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신체화된 금자와 대비되게 카메라는 역쇼트로 손을 허리에 얹고 우뚝 서며 역광을 받고 있는 샤니를 로우앵글을 시각화하며 남성성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로우앵글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잡힌 샤니 얼굴 뒤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고 전통음악이 깔린다. 샤니의 얼굴은 모성적 자연 풍경에 빨려 들어가며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이자 남성적 민족-국가의 얼굴로 이론의 여지없이 알레고리화 된다. 여기서 샤니의 여성 정체성과 퀴어한 섹슈얼리티는 폭력적으로 부정되고 제거되며 남장을 한 샤니는 한국영화와 민족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구원해내고 동질화하는 얼굴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완전히 의미화 되지 않는 잔여가 남는다. 줌인 클로즈업의 순간 샤니의 얼굴에는 찡그린 미소가 각인된다. 이 미소는 다시 줌아웃하며 풍경 속에 작게 남아있게 되는 샤니와 독립되어 부유한다. 샤니/오윤희 배우의 얼굴은 산으로 병풍 쳐진 자연, 즉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뜯겨져 나와 자율성을 갖는다. 어떤 고정된 의미로 해석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 미소는 샤니가 남장을 하고 패싱된 후 짓는 미소, 오윤희 배우가 느끼는 잘 수행된 드랙킹의 쾌락, 그리고 여성성을 지워내고 남성성을 인공적으로 편집하는 쇼트들의 봉합솔기와 겹쳐진다. 그 미소는 감독이 설정한 엔딩씬의 샤니 캐릭터를 떠나와 이물감을 느끼고 있는 오윤희 배우의 트랜스젠더 신체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찡그린 미소는 가부장적 민족-국가의 시스젠더 응시 아래 억눌리지만 곧 슬며시 고개를 들며 벌어진 봉합 솔기를 비집고 되돌아오고 마는 트랜스젠더의 응시로 전치된다. 누구의 모습과 수행으로, 어떤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로, 어떤 마음으로 짓는 미소인지 알 수 없는 여러 얼굴이 레이어된 마지막 클로즈업은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를 재건하려는 욕망과 끊임없이 오염되고 변용되며 이질적인 장소로서의 트랜스 신체성이 교차하는 마디점(nodal point)이자 영화적 응시가 된다. * 샤니의 남장 혹은 재남성화를 드랙킹으로 보는 아이디어는 김일란 감독과의 대화중에 나온 것임을 밝힌다.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의 해석은 필자의 논문 「헤테로토피아 공간과 트랜스젠더 여성 재현-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중심으로」(『한민족문화연구』, 2023.3)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1. 미셸 푸코가 이야기했듯이, 내 몸, 그것은 나에게 강요된, 어찌할 수 없는 장소다. 몸은 감각의 원천이자 세상을 받아들이는 영도(point zero)의 장소 그리고 ‘나’라는 환영이 생성되는 물리적 공간이다. 동시에 몸은 내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흔적들로 내 앞에 나타난다. 몹쓸 주름과 벗겨지는 머리, 못생긴 코. 현존하는 몸과 내가 상상하는 몸 사이에는 항상 간격이 존재하며,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몸을 가꾸거나 다른 몸을 꿈꾸거나 혹은 몸을 넘어서는 영혼과 같은 무언가를 소환한다. 이런 방식으로 순화되고 훈육되어 규범화된 몸과 달리, 퀴어한 몸들은 그 간격을 있는 그대로 전시한다. 현존하는 몸과 상상된 몸, 그리고 그사이를 길항하는 가치와 규범, 욕망과 불안은 안전하게 봉합되지 못한 채 몸을 구성하는 물질적, 비물질적인 네트워크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성애중심주의의 규범 바깥의 몸이라는 맥락에서, 퀴어한 몸은 성적 주체의 불안과 공포를 현시하는 철창으로 재현되기도 하지만 또한 그 철창 바깥으로 몸을 탈출시킬 수 있는 역능을 갖기도 한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가 환기하는 것은 결국 온전히 자유롭게 사유 되고 경험될 수 있는 몸이라는 상상력이다. 2. 라라는 발레리나를 꿈꾸는 10대 소녀다. 여느 10대 소녀와 마찬가지로 라라 역시 집에서 간단히 옷핀으로 귀를 뚫어버리는 성마르고 조급한 소녀다. 또래보다 늦게 시작한 발레지만 프리마돈나가 되기 위한 집념은 누구보다 강하다.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 뒤에는 열정 못지않은 끈기와 성실함이 있다. 라라가 다른 소녀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다리 사이에 달린 자지뿐이다. 가끔은 귀찮게스리 아침이면 커져 있기도 한 자지는 라라의 제일 큰 골칫거리다. 발레 수업을 위해서 매일같이 그녀는 강력테이프로 자지를 다리 사이에 단단히 고정한다. 그래서 그 주변은 출혈을 동반하는 상처가 나기 일쑤다. 라라의 가족은 그 누구보다 라라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차근차근 밟고 있는 그녀의 성전환수술 준비를 함께 한다.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뒤쳐져 있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인 라라는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도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라라는 빨리 실력을 키워 프리마돈나가 되고 싶은 것만큼이나 얼른 이 귀찮은 자지를 없애고 싶다. 루카스 돈트의 < 걸 Girl >은 < 나의 장미빛 인생 My life in pink >(1997)이나 < 톰보이 Tomboy >(2011)같은 영화들과는 달리 수술 전(pre-op) 트랜스젠더의 외부와의 갈등과 이성애 규범적 폭력, 혹은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윤리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보다 영화는 의지와 희망, 집착과 불안 같은 라라의 내면과 그녀의 몸이 맺고 있는 역동적인 관계,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을 조직하는 어떤 논리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르덴 형제의 관찰적 자연주의를 떠올리는 영화의 카메라는 라라의 얼굴과 몸을 그녀의 환경 안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다양한 내적 긴장의 순간을 담아내는 고전적인 핸드헬드로 그녀의 불안한 심경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한편 돈트의 카메라는 춤을 추는 라라의 몸을 보여줄 때 가장 빛을 발하는데, 요동치는 그녀의 내면과 발레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정교하게 계획된 자연스러운 촬영을 통해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런 카메라의 시선을 관통하는 것은 ‘바라보임(to-be-looked-at-ness)’에 대한 라라의 반응이다. 트랜스젠더 주체에게 있어 자신이 바라보이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은 불안을 야기하는데, 이는 자신이 자신의 젠더로 바라보여지는 데 성공하고 있는가라는 패싱(passing)의 문제에 기인한다. 트랜스젠더 주인공을 다루는 대부분 영화들의 서사적 긴장은 이 패싱이 실패했을 때 규범적 사회가 자행하는 폭력과 그로 인한 주체의 좌절에서 발생한다. 한편 <걸>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라라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의 주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에 대한 끊임없는 통제와 자각이라는 긴장 상태에 놓인 라라를 계속 함께 보여준다. 이 시선이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관심을 패싱이라는 규범적 서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에 대한 라라의 관찰, 집착, 태도와 같은 반응에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수영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네가 우리의 벗은 몸을 보았으니 너의 몸도 우리에게 보여줘’라며 짓궂게 그녀를 몰아세우는 친구들 앞에서 곤란해하거나, 라라가 타인들과 함께하는 많은 순간 영화는 그 안에 놓여 불안한 듯 시선을 떨구거나 어딘가 화면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라라의 모습을 담아내며 이러한 라라의 불안한 시선은 곧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과 마주한다. 이 관음적이지 않은 시선은 관객으로 하여금 라라와 그녀의 몸 그리고 그녀의 몸이 처해있는 상황들과 그녀의 반응에 매 순간 적극적으로 그리고 성찰적으로 반응하게끔 한다. 3. 발레는 라라의 몸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치다. 극도로 엄격한 몸의 관리와 움직임을 통해 그 형식미를 획득하는 발레는 라라의 몸에 많은 훼손의 흔적을 남긴다. 발레리나의 서명과도 같은 붓고 무르고 찟겨지고 피 흘리는 발은 그 대표적인 신체 훼손의 이미지다. 이미 신체적 변화를 겪고 있는 청소녀 라라의 몸은 발레로 인한 극도의 통제와 고통, 몸과 마음의 젠더 불일치, 당혹스러운 성적 흥분 등 그녀의 욕망과 기원, 아름다움과 불쾌가 공존하며 경합하는 전장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전장의 주된 적으로 자지를 내세우는데 불편해하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 등장하는 라라의 나체와, 상이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라라의 최종선택 중간에는 자지가 있다. 대범하게도, 영화는 자지를 여느 신체의 부분과 다를 바 없지만 귀찮고 얼른 없애버리고 싶은 살덩이로 치부한다. 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지에 긴 인류 문명 동안 남근 이미지가 보유해온 이성애 규범의 상징적 무게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누군가 <걸>이 라라의 젠더순응적인 태도나 혹은 자칫 성기 결정주의로 간주될 수 있는 서사의 흐름을 통해 성적 주체와 몸이 맺는 관계를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불평한다면, 그 시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라라가 발, 귀, 종아리, 자지, 엉덩이 등 그녀 몸의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반응하고 감각하려 애쓰는 순간들이다. 영화가 담아내는 라라의 여정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그녀가 ‘온전한 여성이 되기 위해 겪는 고군분투’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애적이지도 규범적이지도 물질적이지도 않은 몸의 다중성을 자각하는 그 순간들이다. <린 다 케브라다 이야기> 라라가 그렇게 없애고자 애를 썼던 쓸데없는 자지는 키코 고이프만과 클라우디아 프리실라의 다큐멘터리 < 린 다 케브라다 이야기 Tranny fag >(2018)의 린 다 케브라다를 떠올린다. 수술 전 트랜스젠더 펑크 아티스트인 린의 이야기는 어두운 밤 브라질 뒷골목의 린과 “내 안의 무엇이 너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거야?”라고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공연과 라이오 토크쇼 형식, 영상 일기가 이어지는 75분의 러닝타임동안 린은 다양한 정체성, 감정, 규범, 가치들이 경합하는 적극적인 도전과 질문의 장소로서 자신의 몸을 제시한다. 섹스, 피부색, 게이성(gayness), 여성성, 마초, 항문 등 대담한 소재들로 풀어내는 린의 퍼포먼스는 유색인종으로서의 차별과 가난을 경험한 가족, 암 투병으로 인한 몸의 또 다른 자각을 들려주는 사적 고백이나 자지에 립스틱을 바르는 신체 유희 같은 행위와 병치 되면서 ‘자지 달린 여자’의 몸을 정치화한다. 젠더규범, 성기의 의미, 성별 정체성 등이 끊임없이 교란되고 도전받는 린의 몸은 퀴어 정치학을 교과서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이한 방식이지만, 자신의 몸을 탐색하고 몸이 이성애 규범이나 젠더 정체성과 맺고 있는 관계를 도전하고 있는 라라와 린은 성적 관계들과 그 불평등에 대한 관심이 폭등한 나머지 또 다른 성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 어떤 몸의 정치가 요구되는지의 고민으로 우리를 이끄는 주목해야할 여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