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타겟
- 감독
- 셀돈 레티츠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다니엘 번하르트, 짐 피리, 로버트 잉그런드, 브라이언 톰슨, 줄리에타 로센
< 포드 v 페라리 >의 도입부, 차를 몰고 가는 캐롤 셸비. 그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은퇴한 카레이서다. 화면에 그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7000 RPM 어딘가엔 그런 지점이 있어. 모든 게 희미해지는 지점. 차는 무게를 잃고 그대로 사라지지. 남은 건 시공을 가로지르는 몸뿐. 7000 RPM. 바로 거기서 만나는 거야. 그 순간은 질문 하나를 던지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넌 누구인가?” 캐롤의 내레이션은 후반에 다시 나온다. 캐롤이 스카우트해 르망 대회에서 끝내주는 레이스를 벌이고 돌아온 켄 마일스가 시승차를 테스트하고 있을 때다. 켄이 운전을 하고 있는데 캐롤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남은 건 시공을 가로지르는 몸뿐... 가장 중요한 질문. 넌 누구인가?’ 켄이 모는 시승차의 브레이크는 작동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간 끝에 폭발한다. 캐롤과 그의 스탭들이 사고 장소로 달려가지만 이미 늦었다. 켄 마일스는 그렇게 영화에서 단숨에 퇴장한다. ‘넌 누구인가?’란 질문에 답할 여유도 없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더이상 차를 몰 수 없는 레이서 캐롤 셸비는 이미 한 번 죽은 것이다. 영화의 끝에서 켄 마일스는 물리적으로 진짜로 죽는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은 ‘죽는 존재’라는 것이다. 캐롤 셸비와 켄 마일스는 죽음과 삶의 경계가 백짓장처럼 얇은 카레이싱의 경험을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속도의 한계 끝에 다다르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어떤 도에 관해 이심전심 서로 통하는 친구들이다. <포드 v 페라리>는 카레이싱이라는 스포츠에서 전문가주의에의 헌신이 가닿을 수 있는 어떤 도의 경지를 보여준다. 캐롤 셸비와 켄 마일스는 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굳이 설명해줄 필요도 없는 것, 그렇지만 이 심원한 도의 깨달음의 끝도 다른 모든 사람들의 종말과 같이 단순하다. 그저 죽는다는 것뿐이다. 은퇴해서 스포츠카를 디자인해 파는 사업으로 성공한 캐롤 셸비에게 실적부진에 시달리는 자동차 회사 포드의 중역 아이아코카가 찾아와 솔깃한 제안을 한다. 포드의 신형 개발차로 르망 레이스에 참가하자는 프로젝트다. 캐롤은 레이서 파트너로 켄 마일스를 스카우트한다. 여전히 현역이지만 비사회적인 성격으로 인해 후원사를 구하지 못하고 근근이 레이싱 대회에 나가면서 적자투성이 카센터를 운영하며 호구하는 켄은 캐롤과 함께 레이싱 훈련에 돌입한 후에도 포드사의 마케팅 임원들과 갈등을 빚는다. 캐롤과 켄에게 그들이 만들고 타는 차는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의미이며 다른 어떤 교환가치도 갖지 않는 것이지만 포드 회사의 임원들에게 차는 셀링 포인트가 집약된 도구이자 기호이다. 캐롤과 켄은 최고 수준으로 설계된 차로 한계를 돌파하는 레이싱에 매달리지만 포드의 임원들은 레이싱에 동원된 차를 통해 새롭고 매력적인 삶의 표상을 대중에게 팔고 싶어할 뿐이다.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마케팅 목적으로 르망 대회를 이용하는 포드 사 임원들의 관료주의와 캐롤과 켄의 전문가주의가 부딪치는 대립과 갈등을 부각시킨다. 그 저류에 흐르는 것은 도구화된 삶을 지향하고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이념과 거기에 순응하는 가운데서도 끝내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개인들의 도구화되지 않는 삶에 대한 열망이다. 역설이지만 삶에 대한 자각은 너덜거리는 차의 부속에 대한 자각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켄 마일스는 레이싱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자기 훈련을 지켜보던 아들 헨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빨리 달리면 차의 속도는 올라가지만 나머진 모두 느려져. 요렇게 보는 게 아니라 이렇게 보는 거야. 그럼 다 보여... 차에겐 다정해야 해. 아래서 신음하는 그 녀석을 딱하게 느껴야 돼. 기계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면서 버텨주길 바라려면 한계가 어디인지 알고 있어야 해. 저길 봐. 저기 퍼펙트 랩이 있어. 실수도 없고 모든 기어 변속과 코너 공략이 완벽한 랩. 대부분은 존재도 모르지만 분명히 존재해.” 기계문명의 총아인 자동차를 다루면서 그걸 살아있는 생명처럼 여기고 다정하게 대하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소모되는 그걸 딱하게 여기면서 모든 기능 조절이 완벽한 ‘퍼펙트랩’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켄 마일스는 그 자신 역시 그가 다루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마모될 때까지 스스로를 혹사하면서 죽음/폐기의 경계로 다가가는 존재이다. 최고 시속을 오래 버텨내는 최고의 자동차는 그 대가로 짧게 존재하고 대체되지만 인간은 대체될 수 없다. 새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자동차 기계의 부속품들과 새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인간존재의 유한성을 같은 열에 놓고 대하는 켄과 마일스는 결국 여러 겹으로 꼬인 삶의 모순을 받아들여 견딜 수밖에 없는 비극적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동차를 그들의 분신으로 여기고 대하지만 그걸 팔거나 타서 마모시키고 그들을 고용한 포드사는 그들을 도구로 이용해 하찮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롤과 켄은 그들의 운명에 장쾌하게 대들고 즐긴다. <포드 v 페라리>가 자동차 레이싱을 소재로 한 여타 영화들과 다른 우월한 개성을 갖는 것은 속도의 쾌감에 화면의 리듬을 종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레이싱의 경쟁상태를 묘사하면서도 초점은 레이서와 차의 혼연일치 상태, 나아가야 할 때와 늦춰야할 때를 의식하는 레이서의 마음으로 관객을 안내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켄이 마지막 스퍼트를 올려야할 때 캐롤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아직 아냐...아직 아냐...지금이야’라고 외는 주문과 그에 조응하는 켄의 운전은 속도와 경주에 주목해 즐기는 이 장르의 관성을 깨트린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애초 약속과 달리 켄 마일스를 르망 레이스 팀에서 제외하려는 포드 2세 회장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그를 레이싱카에 태운 캐롤은 전속력으로 차를 모는데 회장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가공할 속도에 공포를 느끼고 눈물을 질질 짠다. “난 몰랐어. 우리 아버지가 살아서 이걸 보셨어야 했는데. 이걸 느껴보셨어야지.” 보통 사람들에게 극한의 스피드는 눈으로 즐기는 것이지 몸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포드 v 페라리>에서 포드 2세 회장을 비롯해 삶과 비즈니스의 철학에 관해 장광설을 펴는 인간들은 결정적 순간에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비루한 존재임을 감추거나 쉽게 망각해버린다. 포드사가 애초 인수하려 했던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의 회장 페라리는 자기 회사를 인수하려는 포드 경영진의 제안을 일축하면서 “포드 2세는 포드 1세가 아니다.”라고 인수 제안 책임자 아이아코카에게 쏘아붙인다. 르망 레이싱 경기장 현장에서도 포드 2세 회장은 개막식 행사 참석 후 곧바로 현장을 떠난다. 포드 마케팅 수장의 잔꾀로 포드 차가 나란히 결승지점에 골인하는 희대의 이벤트가 일어난 후에 1등을 달렸던 켄 마일스는 자기 보다 뒤에서 출발했던 같은 회사 동료 레이서에게 우승을 도둑맞는다. 망연자실한 켄 마일스에게 관중석에서 경의를 표하는 유일한 이는 페라리 회장이다. 황당하고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캐롤에게 마침내 사태를 파악한 켄은 말한다. “차를 팔아야 한다 이건가?” 그리고는 시상을 하는 포드 2세 회장과 중역 일행을 본다. 그는 이어 말한다. “차를 파는 게 저 사람들 일이니까. 네가 약속했던 건 레이스였어. 우승이 아니야. 끝내주는 레이스였어. 끝내주는 차야. 빠르지. 더 빠를 수 있었어. 7리터 엔진은 좋지만 차대는 지금보다 가벼워야 해. 접합 알루미늄이 어떨까 싶은데. 더 갈아엎어야겠지만 효과 좋을 거야. 한 100kg 줄일 걸. 그럼 여기서 뭐하고 있어? 샤워하고 차도 좀 마시고. 샌드위치나 하나 먹고 가자. 내년에 전부 다 박살내버리자고.” 적재적소로 대사를 아끼면서 과시적이지 않은 스타일로 드라마를 운반하고 미국 작가주의 영화의 무궁한 소재인 전문가주의의 내밀한 본질을 장쾌한 시각적 묘사로 그려낸 <포드 v 페라리>는 다른 한편으로 할리우드의 위선적인 프로파간다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스템의 도구화를 거부하는 두 주인공 장인을 통해 은밀히 수행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감독 제임스 맨골드는 부담 없이 영화를 보게 하면서도 곱씹을 것이 많은 이미지와 대사의 절제된 인장을 통해 장르영화의 작가주의가 여전히 가능한 미국영화의 위대함을 역설한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끝 장면에는 시스템의 도구일 수밖에 없는 개인들의 운명을 긍정하는 재치있는 언급이 나온다. 켄 마일스가 죽은 후 차 세일즈 비즈니스에 심드렁한 채 시간을 죽이던 캐롤 셸비는 켄 마일스의 집을 찾았다가 그의 아들 헨리를 집 앞에서 만난다. 안부 인사를 전하다가 캐롤은 켄이 쓰던 렌치를 헨리에게 건네주며 말한다. “공구는 쓸모 있지. 이걸로 뭘 만들거나 고치기도 하거든.” 그는 말을 잇지 못한다. “네 아빠는...” 헨리가 말을 이어받는다. “아저씨 친구였죠.” “그래. 친구였지.” 인간이든 공구이든, 각자의 쓰임대로 뭘 고치거나 만들면서 존재할 이유를 얻는다. 그리고 친구가 된다.
이 리스트를 빌어 최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했던 현대 중국영화의 성취에 관해 언급하고 싶다. 기술과 물질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정신과 제도의 불모성에서 비롯된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의제화한 과거 중국영화의 흐름과 결별하려는 시도들이 최근 등장한 몇몇 젊은 작가들에게서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이 리스트에 올린 < 지구 최후의 밤 >(2018)의 필감, 중국 현대영화의 지배적인 조류로부터 벗어나 장르의 스타일로 세공된 < 백일염화 >(2016), <더 와일드 구스 레이크>(2019)의 디아오 이난,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위업을 보여주는 <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2018)의 후보 등이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였다. 이들의 뒤를 이어 올해 등장한 저우타오의 < 오스모시스 >, 주셩저의 < 프레젠트.퍼펙트 >, 우 린펑, 이반 마르코비치의 < 내일부터 나는 >이 돋보인다. <오스모시스> 위에 거론한 세 편의 영화는 해석적이고 의미지향적인 중국영화의 과거 경향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점에서 한 맥락을 형성한다. 현대 미술가로 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저우타오의 <오스모시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올해 가장 눈에 띄는 중국영화 중 한 편이었다. 디지털 기술의 도입 이후 예술 장르 간 융합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현대미술 분야에서 활동해 온 저우타오의 이 영화는 ‘무빙 어헤드 Moving Ahead' 라고 이름 붙여진, 올해 로카르노국제영화제의 신설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다.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이 결합된 저우타오의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비엔날레나 각종 기획전을 통해 간간이 소개되었다. 중국 서부의 위구르를 배경으로 한 <오스모시스>는 원시적 삶의 조건이 온존하는 마을에서 공생하는 인간과 동물들을, 서사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제시한다. 이 영화의 설정은 문명사회에 사는 우리들이 한낱 동물과 다름이 없고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고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 같다. 저우타오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침투하면서 그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경관을 묘사하면서 현실과 초현실이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리얼리티를 재구성한다. <오스모시스>는 먼지와 눈보라, 변화하는 계절 같은 자연 경관들과 그 속의 인간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생존을 위해 싸우는 다른 종족(동물)들을 교차하며 풍부한 이미지의 레퍼토리를 쌓아간다. 이야기의 계율을 따르지 않는 이미지의 흐름 안에서 인간, 동물 및 자연과 같은 일상적인 대상들을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충격을 준다. 광대하고 숭고한 자연 환경조차도 인간의 흔적에 의해 새롭게 변형된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다. 동물에 대한 일부 묘사는 가학적이고 따라서 논쟁을 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미지의 외설성을 강조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높은 해상도의 카메라로 촬영한 <오스모시스>의 이미지는 영화 기술을 생태화하려는 작가의 일관된 관심이 나타난 것으로, 지각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재고(再考)하기 위해 기술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를 수정한다. 촬영, 구도 및 프레임은 엄격한 형식적 고려로 선택되었고 이미지의 서술은 서사에 종속되기보다 의식의 움직임을 따른다. 이미지를 만드는 모든 행위는 현실과 직접적인 접촉이고, 촬영 과정에 연루된 지각, 느낌, 기억은 이미지를 통해 개조될 수 있다는 신념을 이 영화는 품고 있다. 영화를 포함한 시청각 미디어의 진화로 인한 감각과 반응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영화 표현이 도달할 수 있는 극점에 가닿는 작품이다. <프레젠트.퍼펙트> 주셩저의 세 번째 장편영화 <프레젠트.퍼펙트>는 현대적인 인간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라이브 스트리밍의 세계에 초점을 맞춘 독창적인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의 전작 <또 다른 해>(2017)의 정적인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대다수의 이미지가 픽셀화 되어 나타나고, 흑백 화면과 총천연색 텍스트의 대비가 선명하다. 800시간에 달하는 라이브 스트리밍 영상으로부터 추출한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개인방송 진행자들이다. 노동의 공간을 엔터테인먼트의 장소로 전환시키는 공장 여공과 건설 노동자, 익명의 거리 퍼포먼스로 존재감을 어필하려는 댄서, 끔찍한 화재사고로 화상을 입은 남자, 성장 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왜소증 사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에게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소녀 등 다면적 인물들의 사연을 배치한다. 현대 중국 사회에 관한 인상적인 초상화를 만들기 위해 채택된 삽화들은 오래 지속되는 쇼트와 관찰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일상적 세계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에 대한 이 감독의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프레젠트.퍼펙트>는 미학과 양식, 윤리의 관점에서 강력한 논쟁을 야기하는 영화이다. 정형화된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부터 멀리 나아간 이 영화는 중국의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 지형을 가상공간의 변화로 지도 그린다. 라이브 스트리밍은 오늘날 중국 사회 안에서도 위력적인 엔터테인먼트의 보고(寶庫)일 뿐 아니라 이 새로운 관계의 네트워크에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거대한 기회이고, 수입원이다. 이 영화는 그들의 퍼포먼스가 돈이나 영향력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다루면서, 라이브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수집한 다채로운 장면들을 편집하였다. 직접 접촉이 아닌 가상의 네트워크에 의해 운항되는 관계라는 사안을 다루는 관점과 태도, 탐구의 스타일, 형식의 긴장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주셩저는 10개월 동안 12명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관계하면서 그들이 온라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수집하였다. 다 보고 나면 시공간의 리얼리티, 실재성에 기초한 다큐멘터리의 기록적 특성이 이러한 대상을 다룰 때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라는 본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내일부터 우리> 다네 콤렌의 <북쪽의 모든 도시들>(2016), 앙겔라 샤넬렉의 <나는 집에 있었지만>(2019)의 촬영감독이자 영화감독인 이반 마르코비치와 중국의 독립영화 감독 우 린펑이 공동 연출한 <내일부터 우리>의 주인공은 거대 도시 ‘베이징’이다. 놀랄만한 이미지의 조형과 세공으로 도시의 구성요소들을 탐구하는 이 영화는 베이징 교외에 거주하는 노동자의 일상을 추적한다. 내면을 읽기 힘든 주인공 리의 욕망과 기대는 삶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시대의 조류에 몸을 실은 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반복적인 일상의 루틴에 갇힌다. 다른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리는 지하의 작은 방에 산다. 후미진 지하실에서 그는 친구로 짐작되는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다. 현실에 좌절하거나 또는 항복하여 리는 도시가 요구하는 반복 작업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빠르게 팽창하는 도시는 그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미스터리를 품고 있어서 이 도시를 완전히 탐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모든 등장인물을 비전문 배우로 채운 <내일부터 나는>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요소를 혼합하여 도시화의 맥락 안에서 개인과 군중, 그들과 건축물 간의 관계를 기록한다. 달리 말할 것도 없이, 영화의 테마는 도시와 건축, 그 앞에서 위축되어 가는 인간 존재의 미미함이다. 도시는 현대화되었지만, 이 현대화에 기여한 사람들은 성장의 과실로부터 배제되어 그 이후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이반 마르코비치와 우 린펑 감독은 베이징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리듬과 빠르게 현대화되어 가는 그곳의 경관을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일견, 도시의 역사를 탈각하고 외경에 밀착하여 다루는 이러한 태도는 이방인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장, 거리, 건물, 장막, 창문, 거울, 스마트폰 등의 장치를 활용하여 캐릭터를 격리하면서 억류된 존재의 조건을 형상화하는 영화는 도시 환경의 축소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밀려나는 소외감을 전달한다. 사회적인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기운이 전편을 장악한다. 이 세 편의 영화를 통일된 경향으로 묶기는 곤란하다. 정치적, 문화적 동류의식에 기초한 이전 세대를 거스르면서 개개인의 개성을 분방하게 표출하는 반(反) 세대 영화들이라고 해야 할까. 출신성분과 세계관, 주제, 미학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는 젊은 작가들이 과거 중국영화에서 무시되거나, 강조되지 않은 요소를 조명함으로써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완전 범죄는 있다 2018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 암수살인(暗數殺人) >( 김태균 )이었다. ‘보이지 않는 숫자’는 모든 정치의 열쇠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대표적인 숨겨진 범죄(hidden crimes)다. 신고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범죄라는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문제, 보지 않으려는 문제, 왜 어떤 문제는 드러나고, 어떤 문제는 덮어지는가, 어떤 문제는 문제로도 상정되지 않는가. 누구는 보호받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람의 살인은 과실치사인데(폭력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다가 피해 여성이 사망하는 경우), 어떤 사람의 살인은 교묘히 계획된 범죄인가(남성의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를 행사한 여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누가 정하는가? 차이와 배제, 범주를 둘러싼 권력과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는 말은 생각보다 심오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완전 범죄는 머리 좋은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암수살인처럼 피해를 파악할 수 없는 범죄가 완전 범죄다. 신고도, 시신도, 증거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유일한 증인은 범인이다. 미제 사건도 아니고 범죄 자체가 가시화되지 않은 경우, 그것이 완전 범죄다. 하룻밤에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가정폭력으로 혹은 성 산업에 종사하다가 사망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강남역 사건은 드러났을 뿐이다. 암수살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이주자, 난민, 노약자, 빈곤층, 노숙자, 여성 등 취약 계층이 대부분이다. 글쓰기나 인문학 강의를 하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지식과 지식인의 개념이다. 다른 문제에 비해 이 이슈는 자신 있게(?) 대답하는 편이다. “지식의 개념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지식인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모르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르는 것을 모르는데...” 지식인의 개념보다는 지식인에게 필요한 태도를 묻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식인이나 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사명이나 역할이 아니다. 윤리에 대한 추구와 지향.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자세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지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기 하므로 지식은 발명(making)되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시각이 앎을 결정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 색깔에 달려 있다. 등록되지 않는 죽음 영화 <암수살인>의 미덕은 윤리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형사 영화는 범인과의 심리 게임이나 액션(폭력), 스릴러를 강조한다. 주제는 남성들 간의 승부이고, 피해자(주로 여성과 어린이)는 그들의 대결이 가능하도록 기능하는 도구다. 그런 영화 중에서 가장 웰메이드를 꼽으라면 < 살인의 추억 >( 봉준호 , 2003)이 될 것이다. <암수살인>은 반대 입장을 취한다. 등장인물은 형사와 범인이지만, 서사의 흐름은 철저히 피해자 중심이다. 또한, 이 영화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다루고 있다. 이로 인해 <암수살인>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 ‘되었다’. 이 지면에서 굳이 언급하자면, 당대 한국의 남성 영화감독 중에서 시대의 윤리, 재현의 윤리를 가장 고민하는 이는 이창동 감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윤리성은 실화를 바탕 하는 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범죄자 강태오( 주지훈 분)는 김형민( 김윤석 분) 형사에게 진부한 대사를 던진다. “당신은 나 못 이겨”. 형사는 진부하지 않게 받는다. “내가 너를 이겨서, 뭐 할 긴데?” 그는 이기고 지는 것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런 장면을 두고 “진짜 이겼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역시 승부의 관점이다. 인간의 생명을 두고 승부가 중요한가? 형사의 관심사는 범죄자와의 심리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피해자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있다. 때문에 (실화와 달리), 김형민은 재소자 강태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등의 불법 행위도 불사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대립 구도가 사회운동에서도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적’과의 싸움, 이기는 것에 무게를 두는 반면 어떤 이들은 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들의 상황을 더 걱정한다. 물론, 피해는 사회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전자의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피해자는 사회운동의 명분, 증거로 전락하게 된다. 피해자를 ‘앞세우거나 동원하는’ 사회운동가, 페미니스트들이 의외로 많다. 이들의 변(辨)은 한결같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긴 이야기다.) ‘완전 범죄’라는 표현은 가해자의 관점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완전 범죄는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해서도 안 된다. 사람이 범죄의 대상이 된 현실이 완벽하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도 넌센스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은 완벽했다”는 말이 가능한가? 피해가 퍼펙트 했다? 영화에서는 “암수살인이 한 해 200건”이라는 대사가 나오지만, 이 숫자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법무부 장관도 알 것이다. 경찰이 인지한 사건만 이 정도라는 것이다. 실제는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실종 사건에서 남겨진 이들의 고통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확인하는 문제다. 기다리는 이들의 고통. 이들은 고통이 끝나길 원한다. 여기서 딜레마는 그것은 범인만이 알고 있으며, 그것이 그의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수사 기관이 파악하지 못한 범죄를 범인이 자백하는 조건으로 형량 거래가 이루어지거나 이 영화에서처럼 형사가 자기 돈을 써가며 범인과 적극적으로 협상한다. 요컨대 <암수살인>은 고통, 가시성, 윤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상업 영화로서 성공했다는 점은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봤다. 암수살인의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라는 점, 피해자의 신분이나 언론의 관심도에 따라 사회적 자원(수사)은 다르게 분배된다는 현실. 용의자만 유전무죄가 아니다. 안전 역시 사회적 공공재이기 때문에, 잠재적 피해자들도 유전무죄다. 등록되지 못한 피해 정찬의 소설집 『새의 시선』(2018년, 문학과 지성사)에 수록된 단편 ‘등불’은, 세월호에 승선한 사람 중에 명단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에 탄 모든 이들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있는가? 세월호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가. 만일, 운임이 없어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아이와 함께 배에 탄 가난한 여성이 있다면? 이제 세월호 사건의 정확한 피해자 숫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등록된 자의 죽음. 역사도 우주도 저 하늘의 별도, 그 어디에도 흔적 없는 죽음이다. 무지가 권력인 사회에서, 소수자를 함부로 하는 사회에서, 시민권의 의미가 좁은 사회에서는 누가 인간이고 성원권을 가졌는지는 언제나 논쟁거리다. 태아는 생명권, 선거 연령, 동성애자의 숫자, 인터 섹스(間性), 누군가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는 투쟁을 통해서만 확보되는 진실이다. 우리는 통계를 통해 현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통계는 그 사회가 합의한 개념에 따라, 그에 맞는 수준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예를 들어 무엇이 폭력일까. 무엇이 위계일까. 가해자, 피해자, 조사자의 개념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학교폭력이든 가정폭력이든 군대 내 폭력이든 실태 조사가 어렵다.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다. 통계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통계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는 (『한국기지촌여성인권운동사』를 쓴 적이 있어서) 주한미군 기지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당황한다. 통상, 기지(bases)의 개념에는 다양한 ‘시설’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a military base, camp, post, station, yard, center, homeport facility...) 이는 번역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이처럼 팩트는 단 한 번도 팩트일 수 없다. <암수살인>은 고통, 지식, 권력의 문제를 연결한다. ‘통찰’을 뜻하는 영어 ‘insight(in + sight)’는 “눈을 감아야 새로운 것이 보인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을 잠시 잊거나 상대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지식은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절충’을 가장 싫어한다. 여성주의 지식이나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적 저항이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과 연결된 문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과 협상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다. 환경운동은 발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이 당파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때부터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상은 매 순간의 긴장을 요구하는 만만치 않은 삶이다. <암수살인>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장면. 처음 두 남자가 비 오는 자갈치 시장을 걷는다. 바로 다음, 칼국수 집 장면은 화면 밖으로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경찰서나 관공서에 박카스류를 사 들고 오는 민초들, 실종자 할머니 역의 허진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그지 맹크로(거지처럼)” 같은 부산 사투리(서울말도 사투리지만)는 중독성이 있었다. 6년간에 걸친 감독의 필드웍은 이 속도의 시대에도 창작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음을 일깨운다. 김윤석 배우의 형사 영화를 모두 보았지만 비슷한 장면이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 천하장사 마돈나 >( 이해준 , 이해영 , 2006)다. 여성이 되기를 꿈꾸는 뚱뚱한 씨름 선수( 류덕환 분)의 아버지로 나오는데, 그는 상흔이 가득한 얼굴로 학대를 대물림한다. 상처 입은 남자가 아들에게 휘두르는 폭력. 나는 그의 ‘루저 한국 남성’ 연기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변호사 역의 김중기 배우는 오십대 초반인데, 아주 젊게 나온다. 택시 안의 구토물을 닦아내는 여성 노동자들의 일하는 장면. 강태오‘도’ 하지 않는 노동이다. 구토기와 눈물이 동시에 나왔다. 영화를 본 이들은 그 식사 장면을 기억하리라. 두 명의 형사(김윤식, 진선규 )가 포크레인 기사에게 ‘애원’하는 장면은 굉장한 기시감이 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일도 아닌데 늘 손해를 보면서 남을 돕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일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처럼 상관, 후배, 검사, 가족... 그러니, 이들의 인생은 늘 “미안하고 죄송하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일은 혼자 못하기 때문에 주변에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