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산케이 서울지부서 비빔밥 퍼포먼스
- 제작년도
- 2010
<장손>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곰곰이 뜯어보면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오묘하다. 비평(critic)이 위기(crisis)를 전제로 한다는 통설에 근거하자면, 비평이란 그 성질상 한사코 안녕(安寧)할 수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안녕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비평가는 위기를 발견하고, 때로는 그것을 인식의 표면에 올리고자 위기를 조장해야 한다. 통념과 상식의 범주에 포착되지 않는 요소를 끝내 사유의 영역으로 회수해내는 일—그곳에 비평가의 덕목과 기쁨이 있다. 물론 이러한 덕목을 실천하고 기쁨을 누리는 비평가도 안녕하기는 어렵다. 상식과의 불화를 견지하면서 평안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녕한 비평’은 존재할 수 없고(안녕하면 비평이 아니다) ‘안녕한 비평가’는 소속감을 불안으로 받아들이고, 불화에서 안정감을 찾는 사람들의 희귀한 기질을 갖춰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존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잊음(oubli)이다. 나는 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잊음이다.” *주1 ) 비평가는 탄탄대로를 지척에 두고도 굳이 외줄을 탄다. 탄탄대로처럼 보이지만 실은 앞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마땅히 안녕할 수 없는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이렇게 읽힌다. ‘비평, 설마 안녕히……하고 계신 건 아니죠?’ 내게 비평가란(등단 등의 제도를 통해 부여되는 자격이 결코 아니고) 비평의 기능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사람의 총칭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조금만 비평가다. 그렇지만 질문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다. 그러니 질문을 핑계 삼아 외줄에 올라보자. 다시 한 번, 김현은 이렇게 쓴 적 있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 없이는 느낄 수 없다.” *주2 비평가는 투사와 예술인의 세계를 오가고, 부지런히 샛길을 만든다. 잠깐, 자부심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나는 부끄럽기에 아주 멀리 우회하고 감추고 파편화할 것이다. 2. 이두용 의 < 장남 >(1984)은 고향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노부모가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상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장남( 신성일 )을 중심으로 담은 극영화다. 오즈 야스지로의 < 동경 이야기 >(1953)처럼 처음 장남의 집에 모셔진 노부모는 도시화된 생활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집터로 사둔 변두리에 잠시 머물고 결국 노인에게 불편한 아파트로 옮겨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제주도로 장남이 출장을 간 사이 노모는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틀니를 전달하지도,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 장남이 도착한 건 엘리베이터에 실을 수도 없어 관이 ‘짐짝’처럼 곤돌라로 내려지고 있는 때였다. (상) 아파트로 이주한 노부모와 노모의 관이 내려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장남 (하) 공중전화에 두고 간 수첩을 전달받는 장남 이렇게 글줄로 옮기니 장남이 적극적으로 불효를 저지른 것 같지만, 장남은 결코 지탄받을 정도의 불효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잘 잊는 사람’일 뿐이다. <장남> 그리고 이두용의 탁월함은, 이 성격을 구축하는 표현법에 있다. 5분, 장남이 공중전화에서 막내에게 전화를 하고/다음 이용객이 장남이 수첩을 두고 갔다고 불러/수첩을 전해주는 장면이 있다. 슬래쉬(/)를 기준으로 세 컷으로 이뤄진 이 장면은, 장남이 ‘잘 잊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의도(intention)를 드러낼 정도로 강조되어 있지만, 몰입을 저해할 만큼 웅변조는 아니다. 이 장면을 계기로 시작된 ‘잘 잊는 사람’이란 성향이 연속되며 결말이 엄습해온다. 장남의 유실물이 점점 중대해진다. 그는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을 잊고, 어머니의 틀니를 해주는 것을 잊고,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말을 했음에도) 결국에는 어머니의 다가오는 죽음을 잊는다. 그 제목만으로 <장남>과 ‘ 각각의 영화사 ’를 상상하게 하는 < 장손 >(오정민, 2023)은 여러모로 다른 영화다. 노부모가 장남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상경한 손자가 가족이 사는 대구의 고향 집으로 내려온다. 장남과 달리 장손 김성진( 강승호 )은 자동차를 몰지 않는다( 임권택 은 언젠가 영화평론가 정성일 에게 “남자가 말이오,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안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운전밖에 없어요”라고 말한 적 있다. 남성성과 운전). 그리고 무엇보다 장남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한다. 그렇지만 장손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장손은 조부모의 영정사진을 찍는 일을 회피하고, 할머니의 장례식장으로도 곧잘 들어오지 않으며, 병실 바로 앞에서도 고모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창밖의 햇볕에서도 눈을 돌리듯, 가족의 문제를 외면(外面)한다. 고모부를 보지 못하고 병실 앞에 앉은 성진 물론 <장남>의 잦은 망각도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에 검열된 결과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다만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라는 검열과 부딪칠 때마다 쌓였던 에너지는 노모의 죽음과 함께 슬픔으로 폭발하고 관객에게 전이된다. 그리하여 이두용 영화에 내재한 미묘한 냉엄함과 별개로, <장남>은 가족주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주3 이와 달리 가족의 무게를 결단코 외면하지만 (지극히 특권적이고 결단코 반항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러므로 단언컨대 성진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핵심적 구동원리인 ‘장자우선주의’의 수혜자인 덕에 가족주의의 전(全) 과정을 익히 알 수 있는 성진의 특권적 시야로 인해 <장손>은 건조한 케이스 스터디로 귀결된다. <장남>과 <장손>의 이 차이는 흥미롭다. 그렇지만 지금 남겨둘 질문은 하나다. 어쩌다 장손은 외면을 하게 되었는가? 3. 유산(heritage)은 벽이다.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수록, 그 벽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에는 모두를 병들게 한다. 이 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은 단 하나다. 그것을 정확히 대면하는 것. 나는 여기에 관한 최량의 우화를 하나 알고 있다. 남재일 : 당신의 영화는 매우 공격적이고 신랄하게 발언한다. 지금 ‘아버지’라고 표현한 부분일 수도 있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격하고 싶은 건가? 임상수 : 나는 모든 권위 혹은 권위주의를 철저하게 경멸한다. < 그때 그사람들 >(2005)을 본 사람들은 임상수가 이렇게까지 존경심이 없다는 데 당혹해한다. 좌파와 진보적인 사람들까지도. 그런 걸 보면 나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경멸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경멸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조롱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조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뿌리 깊은 속성부터 아무런 존경심이 없다. 그 근원은 내 부친이다. 그는 존경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출세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질투가 있었지만, 나는 한 세대를 겪고 나오면서, 그 질투를 정확하게 걸러냈다. 그의 경멸만을 물려받았다. 경멸하려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만큼도 존경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허투루 존경받고 있다는 치명적인 사실 말이다. (강조-인용자) ‘남한’을 구축했다고 할 만한 최대의 유산인 박정희를 경멸하기 위해 임상수 는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임상수는 박정희를 거의 촌부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 해직기자이자 영화평론가였던 아버지 임영(林英)의 덕이며, 심지어는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가 이 영화의 공동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층위는 다소 다르지만) 유산의 성격이다. (박정희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대면하면 그것을 경멸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임영이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주4 한국의 영화에도 많은 유산이 있다. 나는 이 유산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유산은 일종의 물과 어항이다. 나는 그 안에 살기에(물) 제한된다(어항). 제한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지만, 의심이 시작되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진다. 이 답답함을 외면(外面)하는 것이 ‘안녕’한 선택이다. 그리고 ‘안녕’을 위한 외면도 반복된다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다시 한 번, 비평은 어항의 ‘바깥’을 향한 몸짓이다. 그 몸짓의 방법과 정도는 가지각색일 수 있다. 어항 속의 물고기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지느러미로 어항을 가늠하고 빈틈을 탐색할 수도 있고, 눈알이 빠지도록 대가리를 어항에 처박을 수도 있다. 한국의 영화사를 돌아보면 많은 비평은 어항을 새로이 만드는 일에 참여해왔다. 초기의 비평은 세계영화에 비해 기반과 역사가 빈천한 ‘한국영화’의 위신(prestige)을 위해 투쟁했고, 1990~2000년대 ‘뜻밖의 연합(Unexpected Alliances)’ *주5 이 이뤄진 시기의 비평은 ‘스크린쿼터 운동’을 문화제국주의에 대립하는 첨예한 전선으로 잡고 독립과 인디(indie)의 기반이 되는 제도와 기금의 조성에 헌신했다. 이들의 투쟁과 헌신이 얼마나 상례적이었고 유효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제도는 분명 중요한 비평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비평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가 오늘날 영화에서의 유산이다. 나는 2010년대 중반부터 영화 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기억컨대, 2010년대의 영화계는 제도 비평의 활기가 가득했다. 혹자는 이들의 제도 비평을 두고 지면(紙面)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라고 저열한 힐난을 했지만, 내가 아는 한 제도 비평에 열을 올렸던 비평가 중 영화계에서 안정된 지면을 얻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제도 비평은 실질적으로 유효한 행정의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제기한 논점을 두고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듣는 회담이 열린 적도 없다. 솔직한 토론이 이루어질 경우 자신들의 지적 기반과 역사적 모순이 노정될 게 두려웠던 것일까?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말하자면, 영화계는 제도 비평을 수용하고 처리할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비판을 지면의 요구로 해석하는 사람이나, 비판의 실질이 아니라 태도를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사람들은 영화를 문화가 아니라 산업으로 보고 자리를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된 게 아닐까? 그들은 종종 이렇게 무의식적인 고백을 한다. “이런 비판에는 동업자 정신이 결여되어있어……” 재원의 전부가 국가지원금인 경우에도……) 어쨌거나 그때의 비평가들은 대개 미술이나 문예 계열의 지면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2020년 COVID-19로 인한 팬데믹(Pandemic)이 도래했다. 2010년대가 핵심적으로 겨냥한 유산이 ‘뜻밖의 연합’이 창안한 제도였다면, 이러한 역사적 우연은 지극히 공교롭게 느껴진다. 초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의 위신을 추구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단관극장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뜻밖의 연합’ 시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와 독립영화의 ‘다양성’을 ‘보장받길’ 원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멀티플렉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상영관에서 한국의 영화를 확실히 몇 자리 확보하고자 하는. 그리고 팬데믹은 정확히 멀티플렉스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 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리하여 2010년대의 제도 비평을 지금 보면 어딘가 예언적인 게 있다. 그때 지적된 다양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적해 있고 심화되었다. 그렇지만 학습의 효과일까. 오늘날 영화 비평은 더는 제도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내 대가리만 깨지고 말 텐데?)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마이크로시네마’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씨네21》이 서로 너무도 이질적인 집단을 묶고 이들을 ‘마이크로시네마’라는 새로운 환경으로 제시했지만, 그 요체인 소규모-(비)공식-영화보기 모임은 당연한 말이지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최근의 ‘마이크로시네마’가 새로운 현상인 것은 이 기획에 비평가가 다수 참여하고 있고, 과거와 달리 (위법성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홍보로 호객을 한다는 점일 테다) 그 실질은 제도 비평과 아무 관계 없다고 실소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구조적으로도 팬데믹 시기에 강화된 OTT라는 미디어 환경이 영화를 초과공급하고 있기에 강력한 큐레이팅 기능을 요구하는 수요를 포착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의 시야에서 2010년대의 제도 비평과 2020년대의 마이크로시네마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혹은 착각일지라도, 이 착각이 적잖이 생산적일 거라고 자신한다. 이러한 착각을 지속하자면(사실 비평가는 착각의 대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포스트 2010년대’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영화 제도가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유통과 인정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 혹은 제도화 없는 비판이 내파(implosion)와 외파(explosion)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토대로 시작한 참호공사. 어항과 금붕어의 비유를 계속 들자면, 전자는 작지만 작은 어항을 새로이 만들자는 것이고, 후자는 어항을 부술 수 있을 때까지 머리를 단단하게 만들자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다보니, 제안받은 원고의 매수와 주제를 모두 훌쩍 초과했기에, 이쯤에서 서둘러 마무리해보자. 나는 비평이란 그 성질상 위태롭고 불쾌하고 불건전할 때 적절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다시 어항에 대가리를 처박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2010년대에 예견되었듯, 멀티플렉스는 머지않아 시장에 의해 자동조절 될 것이고 줄어드는 관객에 따라 영화에 부착된 사회적 기능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적 실천이 아니라, 제도 비평의 계절이 다시금 오기를 바란다. 그러니 (이제, 감히 대명사를 바꿔 보자) 우리의 ‘제도 비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나의 근심이자 고민이다. 나는 성진-장손이 택시를 돌려 다시 집으로 가길 바란다. 그것이 그의 몸과 정신을 찢어놓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2010년대 재방문’이 너무 늦지 않기를. “장자의 무용지용에 대한 퉁명스러운 반론: ‘그래 그렇게 오래 살아 뭐하자는 게요, 제기랄.’” *주6 *** 주1.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3, 128쪽. 주2. 위의 책, 168쪽. 주3.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건대, 영화의 결말이 가족주의인 것이 영화의 질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4. 고백하자면 나는 초기의 (영화적, 문화적) 세계관을 남재일 선생님의 말과 글에서 전수받았다. 유산은 강력하다…… 주5. 포스트 권위주의 사회에서 영화산업과 국가, 그리고 독립영화가 어떻게 예기치 않게 연합을 이뤘는지를 설명하는 동명의 저서(박영아, 2014)의 제목. 주6. 위의 책, 156쪽. 금동현(영화평론가) l 「상상되는 것인 동시에 그 잉여」(2024), 『하녀: 하녀 따위에 흥미를 가져요?』(2024) 등을 집필했다.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의 매거진 《삼삼오오》를 기획하고 있다.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채플린은 언제 ‘위대한’ 채플린이 되었을까. 물론 채플린은 처음부터 훌륭했다. 심지어 맥 세네트가 연출하고 채플린이 주연을 연기한 초기 영화들부터 훌륭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위대하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 누군가는, 여기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채플린의 전문적인 연구자들인데, 1915년에 < 방랑자(The Tramp) >에서 채플린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인물을 이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세상 속의 버림받은 방랑자에서 그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서 그 자신이 방랑자라는 선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만의 문제 설정을 발명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방랑자로부터 주인으로서의 방랑자로의 전도. 하지만 나는 좀 더 뒤로 더 물러나고 싶다. 어디까지? <방랑자>가 훌륭하긴 하지만 잠시만 그 주변을 돌아보자. 여전히 여기에는 채플린이 자신의 희극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하고 일정 거리만큼 물러난 다음 영화 프레임을 무대처럼 사용해서 곡예사의 재주를 한껏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남는다. 문장을 바꿔보겠다. 채플린의 영화를 모두 본 우리는 <방랑자>를 통해서 < 황금광 시대 >(1925)를 보지 않으며, ‘또 다른’ < 방랑자(The Vagabond) >(1916)를 통해서 < 시티 라이트 >(1931)를 보지 않는다. 반대로 < 서커스 >(1928)를 통해서 < 이민자 >(1917)를 볼 것이며, < 모던 타임즈 >(1936)를 통해서 < 개의 삶 >(1918)을 볼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어떤 도약이 놓여있는가. 장편 영화 < 키드 >(1921)가 놓여있다. 채플린이 카메라 앞에 선 1914년 첫해에 키스톤 영화사에서 35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다. 빠르게 영화를 배웠고, 그 해가 끝나기 전에 이미 채플린은 직접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누구나 그랬다. 그리고 1919년 7월 20일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가제(working title)는 <방랑자(The Waif)>. 마치 단편 영화와 같은 간단한 줄거리. 미혼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간절한 편지와 함께 고급 자동차에 놓고 자리를 떠난다. 그 자동차를 악당 두 명이 훔쳐 가고 아이는 길거리에 버린다. 그리고 그 아이를 방랑자가 떠안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방랑자는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리고 둘은 마치 파트너처럼 이런저런 사고도 치면서 서로 아끼는 부자지간이 된다. 그리고 다시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고 방랑자와 아이는 행복하게 재회한다. 시작하자마자 이 영화는 채플린 없이 5분 동안 진행된다. 연출자 채플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채플린이 빈민가 골목에서 등장한다. 게다가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채플린이 아니라 ‘영화사상 가장 귀여운’ 아역이라고 해야 할 네 살 소년 재키 쿠간이 자기보다 큰 소년을 상대로 빈민가 작은 광장에서 일대일 맨주먹 권투를 하면서 혼내주는 씬이다. 이 장면은 아무리 반복해서 보아도 매번 웃게 된다. 그런 다음 채플린의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키드> 중 (사진: “The Kid( 1 , 2 , 3 )”, IMDb / “ Charlie Chaplin – The Kid – Fight Scene ”, Youtube Charlie Chaplin) <키드>는 채플린의 68번째 영화이다. 필름 길이 5,250피트. 상영시간 1시간 8분. 이 상영시간에서 채플린은 1970년에 재개봉을 위해 15분을 단축했다. 새로운 관객들에게 일부 장면이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53분 판본은 1972년 4월 4일 뉴욕 링컨센터에서 프리미어 상영되었다. 이 자리에는 채플린이 참석했다. 이 상영본이 공식적인 <키드>의 판본이 되었다. 채플린의 나이 32살. 아마 이 영화에 담겨있는 모든 파토스와 유머, 그리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에피소드들, 아니, 보는 쪽에서도 계속해서 보고 싶다는 기쁨을 안겨주는 이 영화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재키 쿠간에게서 온 것이다. 그해 봄에 만든 < 양지바른 곳 >(1919)에서 오디션을 통해 재키 쿠간을 발견한 채플린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재키와의 촬영이 끝나고 댄스홀에서 서로 마주 앉아 1시간 45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 살 소년과 할리우드의 거물 사이의 다정한 대화. 재키를 돌려보낸 다음 채플린은 자신의 스탭들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만나 본 중에 가장 놀라운 사람을 지금 만났군.” <키드>의 촬영은 1919년 7월 21일에 시작되었다. 현장에서 채플린은 재키와 영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재키는 개미에 관심이 많았고, 채플린은 함께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자연의 신비로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다음 촬영을 할 때 채플린은 재키가 해야 할 장면의 연기를 그 앞에서 실현해 보였으며, 재키는 그걸 그대로 흉내 내면 되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재키 쿠간은 천재적으로 채플린을 ‘카피’하였다. 재키 쿠간(좌)과 찰리 채플린(우) (사진: “ The Kid ”, IMDb) 여기까지 읽으면서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키드>의 줄거리는 장편 영화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좋은 질문이다. 채플린은 ‘가제’ <방랑자>를 처음부터 장편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채플린이 준비한 영화는 재키 쿠간과 함께 출연한 세 편의 단편 영화였다. 그때 채플린과 계약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도 그것을 원했다. 그래서 <키드>는 세 편의 영화를 하나로 이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채플린은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 영화는 한 편이 되는 쪽이 훨씬 깊은 감정적인 호소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 영화사에 편집 일부를 먼저 시사하였다. 경영진은 채플린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때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 아내 밀드레드 해리스는 채플린의 재산을 가압류 신청하였다. 채플린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 영화가 가압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여기에는 반대의 설명도 있다. 밀드레드 해리스가 가압류 대상으로 삼은 건 단편 영화들이었고, 채플린이 장편 영화를 제작할 것으로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의 첫 번째 장편 영화 <키드>가 예술적 결단인지. 아니면 산업적 판단인지, 혹은 재산 분쟁을 둘러싼 변호사의 조언에 따른 것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과 결정이 서로 실타래처럼 뒤엉킨 것일 수도 있다. 채플린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는 밀드레드 해리스 몰래 네거티브 필름을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유타 호텔로 가져가 편집실을 차려놓고 최종본을 완성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비밀리 진행되어야 했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솔트레이크시티에는 현상실을 비롯한 후반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스튜디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 7월 30일에 작업이 끝난 <키드>는 1921년 2월 6일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키드>에 채플린은 만족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퍼스트 내쇼널과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세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옮긴 채플린은 이제 단편 영화로 돌아오지 않았다. 후일담.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된 것은 아니다. 채플린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첫 번째 영화는 < 파리의 여인 >(1923)이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이 연출만 하고 출연하지 않은 두 편의 영화 중의 한편이다. 이 영화는 박스 오피스에서 재난을 맞이하였다.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길건 짧건 그건 상관없었다. 대중들은 채플린의 영화가 아니라 ‘방랑자’의 영화를 원했다. 후일담의 첨언. 하지만 나는 박스 오피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파리의 여인>은 걸작이다. <키드> 중 (사진: “ The Kid ”, IMDb)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2021년, 예술문화 공간 연희동에 문을 열다 연희동은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재건축이 빈번하지 않고 오래된 도시의 정취를 가지고 있다. 부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동교동, 서교동, 연남동에서 이어지는 ‘홍대권’의 끝단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재건축에 관심이 없는 오래된 저택들이 많은 탓에 급격한 상권변화나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다. 연희동에는 소규모의 갤러리가 많다. 주로 2014년부터 궁동산과 안산 자락 일대에 들어온 소규모 갤러리들은 대부분 주택가의 1층 혹은 상가 건물을 개조해 만든 건물에 들어서며 연희동 고유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되 예술적 동네의 모습을 갖춰 갔다. 라이카시네마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문학창작공간 ‘연희문학창작촌’이 있다. 도심 속 같지 않게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이 공간에서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작품을 창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공방과 퍼포먼스 예술 극장 등이 연희동에 자리 잡으며 마을의 문화적인 분위기가 더 확고해졌다. 때문에 라이카시네마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연희동에 당연히 있을 법했던 것이 이제야 생겼다’라는 반응도 있었다. 연희동 최초의 극장이자 예술영화관인 라이카시네마는 2021년 1월 13일 연희삼거리 골목길 안쪽에 좌석 40석의 단관으로 문을 열었다. 원래는 2019년부터 개관을 준비했으나 코로나19로 극장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개관 시기를 고민하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정면돌파하는 마음으로 열었는데, 오히려 젊은 관객들과 연희동 주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라이카시네마 정문 출입구 최초의 우주개 라이카에서 명칭을 따다 ‘LIFE LIVE LIKE’라는 이름의 개관 기획전은 첫 비행을 컨셉으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파이널컷>(2020),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 원더풀 라이프 >(1998),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 멀홀랜드 드라이브 >(2001), 왕가위 감독의 < 화양연화 >(2000),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 멜랑콜리아 >(2011) 등 16편이 상영되었다. ‘라이카시네마’라는 이름은 소련의 우주선 스푸트니크 2호에 탑승한 최초의 우주개 ‘라이카Laika’에서 땄다. 극장이 들어서 있는 건물 이름이 먼저 지어졌고(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독Space Dog)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지어진 이름이다. ‘영화로 광활한 여정을 떠나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홈페이지에 실린 영화관에 대한 공식적인 소개 역시 ‘연희동에 불시착한 복합문화공간’이다. 라이카시네마 1층 로비 전경 스페이스독은 연희동 토박이로 오랫동안 동네에 주민들의 문화공간을 짓고 싶어 했던 이화유니폼 서기분 대표가 같은 연희동 주민인 SPDG(스페이스독) 이한재 대표와 의기투합해서 지었다. 본래 2층 주택인 부지를 허물어 4층 건물로 리모델링했는데, 1~2층은 카페, 3~4층은 공유오피스이다. 건축주는 서기분 대표이고 해당 건물의 설계부터 운영까지 스페이스독이 맡고 있다. 스페이스독 지하에 영화관이 들어온 이유는 서기분 대표와 이한재 대표 모두 오랫동안 연희동에 살면서, 연희동에 있을 법한데 없는 것 중 하나가 영화관이라고 생각했고, 예술영화나 독립영화가 이런 작은 영화관과 잘 맞을 것이라고 봤다. 영화편집숍 컨셉의 젊은 예술영화관 라이카시네마를 찾는 관객들은 주로 20대 여성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입문자들이다. 상영 영화들에 따라 연희동 주민이나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좌석을 꽉 채우기도 한다. 연희동의 유일한 예술영화관으로서 지역 사회는 물론 여러 주체와의 협업에도 열려 있는데, 개관한 해에 바로 ‘2021 서대문독립민주영화제’를 개최하거나 단편 영화들을 한 편씩 상영하는 기획전을 열기도 했다. 이런 노력들로 라이카시네마는 20대 젊은 층에게는 테마가 있는 ‘영화편집숍’으로, 동네 주민들에게는 다양한 영화 체험의 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라이카시네마의 지향점은 앞서 언급했듯 관객들이 ‘영화 편집숍’을 방문하듯이 라이카시네마를 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좌석 수의 한계로 수익성 자체가 눈에 띄게 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 공간을 잘 활용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는 게 라이카시네마의 운영 방향성이다. 애초에 공간 구성과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썼고, 시네필이 아닌 이들에게 진입장벽을 낮추고 싶어서 영화 선정 또한 너무 어렵거나 힘든 예술영화보다는 접근이 쉬우면서도 새로운 작품 중심으로 하고 있다. 라이카시네마 상영관 입구 복도 라이카시네마의 인테리어 역시 보통의 영화관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조형물들과 우주선에 탑승한 듯한 느낌을 주는 구성이다. 설계 때부터 영화관을 염두에 둔 것에서 알 수 있듯, 영화관의 설비나 공간 구성은 최고 수준이다. 서울의 예술영화관 중 유일하게 입체 음향 기술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을 도입해 영화를 상영하고 있고, 다른 영화관에 비해 넓은 좌석 배치로 관객들의 시야가 어느 자리에서도 가려지지 않고 앞좌석에 발이 닿기도 어렵다. 더불어 물과 무알콜 음료를 제외한 음식은 섭취가 불가능하다는 상영관 내 규칙까지, 영화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한다. 라이카시네마의 상영 시간표는 매주 수요일에 업데이트 된다. 라이카시네마가 위치한 연희동을 기점으로 가까운 거리에 아트하우스 모모와 필름포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 안 인디스페이스 등의 독립예술영화관들이 위치하고 있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종로구와 중구에 밀집돼 있던 예술영화관이 서대문구, 마포구로 많이 이전되어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독립예술영화관들이 모여있는 일종의 지구가 형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라이카시네마 상영관 내부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 8길 18 스페이스독 B1 2. 설립일 : 2021년 1월 13일 3. 대표자 : 서기분 4. 규모 : 연면적 721.26㎡ 지하1층–지상4층 5. 공간 구성 : 1관 40석(장애인석 1석 포함), 1층 로비, 2층 카페(휴업), 루프탑(정원) 6. 운영시간 : 09:30-24:00 (영화 상영시간에 따라 조정) 7. 입장료 : 평일(월~목), 주말(금~일,공휴일) 1) 성인: 평일 1만원, 주말 1만 1천원, 조조 평일 6천원, 주말 7천원 2) 대학생: 평일 9천원, 주말 1만원 (서대문구/마포구 소재대학교 재학생 1천원 추가 할인, 현장 전용) 3) 청소년: 평일 8천원, 주말 9천원, 우대 7천원, 문화가있는날 6천원 ※ 연희동 주민 1천원 할인(조조, 문화가있는날 제외, 현장 전용, 신분증 확인) 8. 구성원 : 총괄운영/프로그래머 문유정, 매표 및 청소 직원 4인 글/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 취재 일자 : 2023년 10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