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월드
- 감독
- 공광덕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이종혁, 기경옥, 이승환, 문남숙, 이원찬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비평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보면 늘 표정이 어두워지게 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아보려 한다. 밝은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지금 웃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또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등장한다. 이만희 감독의 1967년 작 < 원점 >의 오프닝이다. 양복 차림의 남자는 서류 가방을 든 채 건물의 지붕 위를 걷는다. 그는 곧 옥상을 통해 건물에 잠입하여 어떤 중요한 서류를 훔치는데, 그러다 이를 방해하는 악당을 만나 몸싸움을 펼치게 되고, 결국 그 자를 살해하게 된다. 이 13분짜리 오프닝 시퀀스에는 이게 전부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부분들이 많다. 그에 관한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정성일 평론가가 목소리 코멘터리를 남긴 KOFA코멘터리극장 영상 을 통해 확인하면 좋을 것이고,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특별한 부분은 악당의 사인이다. 영화에서 악당은 ‘끼임사’한다. 남자를 잡으려다가 건물 문 앞의 내려오는 셔터에 얼굴이 끼어서 말이다. 끼인 얼굴의 표정은 밝지 않지만, 나는 지금 이 장면을 떠올리며 킥킥거리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장면의 웃음 포인트는 이 끼임으로 인해 남자가 자신의 본 목적인 서류를 챙겨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악당이 셔터에 끼이는 순간, 남자의 서류 가방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셔터와 딱딱한 서류 가방 사이에 악당이 끼는 바람에, 남자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지른 것도 억울한데, 그로 인해 자신의 작업에 실패까지 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분명 악당이다. 악당은 비록 범인을 잡는 것에는 실패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니 자신의 얼굴을 내려오는 셔터에 바쳐(또는 받쳐), 회사의 중요한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막아낸다. 영화는 그의 끼인 얼굴을 잠깐 동안 보여주는데(그리고 곧이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이 오른다)… 아, 나는 지금껏 본 영화 중에서 이토록 짠한 악당의 퇴장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것일까. 과연 무엇을 위해 그곳에 자신의 얼굴을 밀어 넣었던 걸까. 대체 그 페이퍼엔 무엇이 적혀 있던 것일까. 악당과 몸싸움을 하기 직전, 페이퍼를 훔치려는 양복 차림의 남자(석구) 페이퍼에 적힌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땐 웃게 되지만, 비평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늘 어두운 표정을 짓게 된다. 비평 같은 걸 쓰려고 할 때 내 얼굴은 마치 어디에 끼인 듯한 표정이 되곤 하지만, ‘페이퍼에 무엇이 적혀 있었던 것일까’ 같은 비평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상상을 할 때는 만면에 미소가 번진다. 예전엔 그 끼인 자리에서, 영화와 현실 사이의 비좁은 틈에 내 큰 머리를 억지로 들이민 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면, 언젠가부턴 그냥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곳에서 출발해 보려 노력하고 있다. 그게 내 작업과 미래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따져보는 건 이제는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비평에 대해 생각할 때는, 그에 관한 걱정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표정이 어두워지는 거고, 또다시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등장하는 거고, 그러면 나는 황급히 13분 뒤로 넘어가 끼임사한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런데 바닥에 누워 있는 이 남자. 처음에 등장한 양복 차림의 그 남자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앞서 얘기한 <원점>의 오프닝은, 분명 두 인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 한 명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나와, 또 다른 나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기서 나는 중요한 페이퍼를 훔치러 잠입한 남자이기도 하고, 그걸 막기 위해 싸우는 악당이기도 하다. 훔치는 데 실패한 사람이기도 하고, 지키는 데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에 성공하고 무엇에 실패한 것인지, 보고 싶지만 동시에 보고 싶지 않은 그 내용이 무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실 더 알고 싶은 건 정성일 평론가의 페이퍼에 무엇이 적혀 있을까이다. 그가 진행하는 영화 토크 행사에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궁금해할 그 두꺼운 A4 페이퍼 뭉치를 훔치고 싶다. (그라면 지금까지 작성한 모든 페이퍼들에 표지를 붙여 오래된 캐비닛에 연도별로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 그걸 보면 뭔가 깨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막으려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다른 사람의 페이퍼를 절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 그리고 다른 사람의 페이퍼를 보지 않은 채 온전히 나의 방법으로 써낸 나의 페이퍼를 읽고 있는 내가 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럼 정성일 평론가는 <원점>의 코멘터리 원고를 쓸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페이퍼에 적힌 내용보다 그가 그걸 적을 때 지은 표정이 더 궁금하다. 페이퍼를 훔치려는 남자(훔치는 데 실패한 사람)와 그를 막으려는 악당(지키는 데 성공한 사람) 나의 원점을 떠올리면 씨네21 사무실로 당선 인터뷰를 하러 갔던 날이 생각난다. 속으론 정말 기분이 좋았지만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비평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평소보다 더 어두운 표정이 지어질 때는, 그 인터뷰를 하러 가지 않았어야 했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임순례 감독의 < 제보자 >(2014)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박해일 이 연기한 탐사보도 PD 윤민철이 하는 대사다. “제보자 마음 바뀌기 전에 인터뷰부터 따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본 영화 속의 나만 알고 있(다고 믿)는 무언가를 다른 이들에게 ‘제보’하는 것이 영화평론가가 하는 작업이라면, 나는 애초에 그 제보를 하지 않아야 했거나 했더라도 인터뷰를 하지 않아야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혼자만의 작업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터뷰를 해버렸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기에, 자꾸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 바뀐 평론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언젠가 마주칠지도 모르는 그 얼굴을 상상하면, 표정이 영 밝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속으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던 때가 훨씬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도 왔다 갔다 하고 표정도 이랬다저랬다 했지만, <원점>은 13분 지점에 멈춘 채 그대로 있다. 이쯤에서 <원점>의 결말이나 다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겠으나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아보려 한다. 그게 궁금하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 영상을 보시기를 권한다. 대신 나는 웃는 얼굴로, 내가 선택한 이 끼인 곳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묻는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계시는가.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으신가. 나의 페이퍼에 어떤 말들이 적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앞으로 내 캐비닛에 쌓아 놓은 재밌는 제보 거리들을 공개할 수 있는 자리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기꺼이 얼굴을 들이밀 준비가 되어 있다. <제보자> 중 김철홍(영화평론가) l 영화에서 봤다고 하면서 이상한 말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당선.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16년 정지돈과 오한기와 이상우와 나는 <펫 시티>라는 제목의 ‘페이퍼시네마’를 만들었는데, 앨런 튜링의 뇌를 쪼아먹은 앵무새 마부제가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게 되며 조류가 인류를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 분투하는 주인공 잭(a.k.a. 짹)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대체역사 SF였다. 벨라 발라즈는 옛날 영화가 우리에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라는 문화가 너무도 빠르게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래된 예술이 대개의 경우 지나간 시대의 정신을 거기에 합당한 형식에 담아 표현했다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자신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 아직 ‘역사’가 아닌 우리의 최근 모습이며 그 어색함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방금 <펫 시티>의 로그라인을 보며 슬쩍 (비)웃었다면 그 때문이다, 아마도…… 그러니까 문제는 웃음이고, 웃음의 종류다. 그게 처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정지돈과 내게 ‘우리가 사랑하는 21세기 한국 영화’라는 주제로 한달씩 번갈아가며 연재할 것을 제안했을 때 우리가—적어도 나는—떠올린 것이었다.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은 거의 언제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소위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영화라는 우정 운운하면서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모습을 보라. 소문난 영화사랑맨이자 시네마테크의 얼치기 인류학자였던 뤽 물레는 < 알카사르 작전 >에서 자신과 친구들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 시네필들이 다 그렇듯이 그는 입냄새가 심했다, 라고…… < 인생은 소설이다 >의 개봉에 맞춰 알랭 레네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세르쥬 다네는 < 히로시마, 내 사랑 >이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주었던 충격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네는 말한다, 내가 말해서는 안 될 그의 어떤 무엇인가를 말했다는 듯이 그는 조금은 쌀쌀한 태도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마치 내가 그의 레인코트를 칭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년기를 응시했던’ 영화들은 공유 불가능하다는 것, 심지어 그 영화들의 작가와도 공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웃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지돈씨가 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다. —두 종류의 한국 영화가 있습니다. 웃겨서 계속 보고 싶은 한국 영화와 웃겨서 더는 볼 수 없는 한국 영화. 전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이) 그럼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서교동 콜마인에서 만났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친구들’(가제)이라고 이름 붙인 연재를 위한 일종의 기획회의? 작전회의? 나는 약간 복잡한 마음이었다. 오랜만에 둘이 하는 공동작업이 설레기도 했지만, 장 루이 셰페르의 말마따나, 나는 영화에 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할 자격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지나치게 자주 가는 지돈씨와 달리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갔던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콘 에어>를 본 건 기억나는데…… —정연씨, 제발 니콜라스 케이지는 잊으세요.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 더 록 >, < 패밀리 맨 >, < 스네이크 아이즈 >, < 비상 근무 >, < 페이스 오프 >, < 시티 오브 엔젤 >,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같은 영화들을 보며 생각했다. 왜? 왜 죄다 이 사람이 주인공인 거야? 그건 아직도 내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고, 사람이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좀처럼 잊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지돈씨에게 내가 가장 최근에 본 한국 영화인 < 남산의 부장들 >에 대해 말했다. 중반까지는 무척 몰입해서 봤다, 중반을 넘어가며 조금은 동어반복적이고 지지부진한 느낌이, 클라이막스 이후에는 뭔가 잘 정리되지 않은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전체적으로 재밌었다, 다만 어느 순간 —한국 현대사를 다룬 정치 영화가 아니라 가족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이병헌이랑 이희준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계속 보다보니까 추석에 삼촌들이 고스톱 치다 싸우는 것 같고, 이성민은 꼰대 아버지고,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김소진은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는, 레비 스트로스적인 의미에서 족외혼을 통해 교환된, 문자 그대로 출가외인이며…… 겉으로는 세련된 척, 젠틀한 척, 서로 존중하는 척하면서 뒤로 은근히 견제하고 돌려서 까고 음모를 꾸며 뒤통수치는 외국의 정치물과 달리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보다 직접적이라는 감상이 남았다. 그리고 그건 내게 아쉬움보다는 한국에서 한국 영화 나온다,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이런 이야기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나는 정치라는 공적인 관계까지 가족이라는 사적 프레임을 통해 파악하는 관점이 너무 익숙하다. 혹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관객으로서 내게 한국 영화는 어떤 시대를 다루건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가족처럼……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를 보고 한국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작품의 매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종종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걸까? 우리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너무 좁아. 약간의 여유가, 숨을 돌릴 수 있는 거리가 필요해. 늘 그랬던 것처럼 지돈씨는 자신에게 아이디어가 있다고 했다. 무려 세 개나! “봐, 나한테 아이디어가 있어”라고 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들뢰즈는 묻는다.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은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고 자주 오지 않는 일종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은 뭔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가끔은. 하지만 매번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지돈씨는 어떻게 아직도 매번 아이디어가 샘솟는 거지? 지돈, 유 돈 스탑 네버 스탑? —첫 번째, 22세기의 영화 청년들이 우연히 21세기 초반의 영화를 발견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이에요. 일종의 SF처럼.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베터 콜 사울>에 나오는 영화과 학생들이었다. 어쩐지 22세기에도 그들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의 영화과 학생으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천재 감독이 될 수 있었지만 전공을 잘못 택한 22세기의 사울 굿맨에게 착취 당하며…… —두 번째, 이건 방금 니콜라스 케이지 얘기하다가 떠오른 건데, 재밌게 봤지만 이상우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영화들이라는 컨셉인 거죠. 쉽게 말하면 길티 플레져 같은? 그런데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지돈씨와 나는 종종(실은 거의 항상) 글을 쓸때 서로를 등장시켜 할 말 못할 말 모두 하게 만들곤 하는데, 이상우를 등장시킬 때는 어쩐지 조심하게 된다. 상우씨가 특별히 뭐라고 한 적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점이에요, 지돈씨가 말했다. 여기서 이상우는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정연씨와 저의 초자아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인 거죠. —세 번째, 각자 상대를 내세워서 서로가 본 영화에 대해 쓰는, 금정연은 정지돈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정지돈이 영화를 보고 느낀 걸 기록하고 정지돈은 금정연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금정연이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거예요. 3인칭 미니 픽션처럼. 물론 가장 내 마음에 든 건 세 번째였다. 22세기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시점에서 21세기 초반의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지만 상상하긴 힘들었고, 이상우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영화는 이상우에게 절대 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영화 경험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촌에 있던 녹색극장과 이대 앞 영화마당, 서울극장과 단성사와 피카디리와 씨네코아 같은 시내의 극장들에 대해 말했다. 비디오대여점과 극장에서 했던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도. 좌석들 사이에 떡하니 커다란 기둥이 있어 시야를 가리던 코아아트홀에서 < 버팔로 66 >을 봤다는 이야기를 하자 정지돈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걸 극장에서 볼 수 있냐고 물었다. 얼마든지 볼 수 있죠. 내가 대답했다. 충분히 오래 전에 서울에서 태어나기만 했다면…… 정지돈이 영화를 본 곳은 대구극장과 한일극장과 만경관이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이던 1996년 대구극장에서 < 미션 임파서블 >을 보며 처음 돌비서라운드를 경험했고, 그때부터 브라이언 드 팔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질문. 만약 당시로서는 최첨단 음향시설이 설치된 대구극장에서 <미션 임파서블>을 보지 않았다면, 그와 드 팔마의 관계는 지금과 달랐을까? —귀를 중심으로 한 영화 경험은 관객의 자아로 깊숙이 진입한다고 토마스 엘새서가 말하긴 했죠. —그럼 지돈씨 자아 깊숙이 드 팔마가 있는 거예요? 와, 대박. —아니요. 제 자아 깊숙한 곳에는 드 팔마가 없습니다. 정지돈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 탐 크루즈가 있죠. 귀와 음향은 영화 경험의 공간성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라고 엘새서는 쓴다. 우리는 모퉁이에서, 그리고 벽 뒤에서, 심지어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과 눈부시게 환한 환경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많은 전통적 접근 방식이 영화 관객을, 이성적으로 동기화되고 목적 지향적인 방법으로 관람하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로 간주한 반면, 귀는 균형 감각과 공간적 감수성과 같은 요소로 초점을 옮긴다. 관객은 더 이상 영화 밖에 머무는, 시각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한 이미지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음향적, 공간적, 육체적으로 영화적 조직과 엮여 있는 신체적 존재다…… 이듬해에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한 < 단테스 피크 >를 돌비서라운드로 보다가 등 뒤에서 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며 지돈씨는 쓸쓸하게 덧붙였다. —지금은 무엇에도 놀라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요. 정지돈은 또 아버지와 함께 한일극장에서 < 클리프행어 >를 보기 위해 매표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아무래도 못 보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아버지가 줄에서 쓱 나가 돌아다니던 암표상을 부르니 형님, 오셨어요? 하며 암표를 주었다고 했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가 비로소 아버지처럼 느껴졌던 몇 안 되는 기억이라고. 비슷한 무렵, 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 < 쥬라기 공원 >을 보러 극장에 갔다. 마감에 허덕이는 만화가였던 아버지는 아는 암표상 동생이 있지는 않았고, 허름한 극장에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지도 않지만, 단순히 극장에 데려 갔다는 사실만으로 아버지와 얽힌 기억 중에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밖의 다른 좋은 기억들은 집에서 비디오로 함께 < 구니스 >를, <레이더스>를, < 8번가의 기적 >을, < 어비스 >를, < 스플래쉬 >를, < 폴리스 아카데미 >를, < 오복성 >을, < 총알탄 사나이 >를, < 로보캅 >을, < 토탈리콜 >을, < 다이하드 >를, < 프레데터 > 같은 영화들을 보던, 보다가 어머니와 싸우기 전까지는 그래도…… 헐리우드파였던 내 아버지와 달리 지돈씨의 아버지는 장 가뱅을 좋아하던 유럽파였다. 이걸 헐리우드에서 헐리우드 나고 유럽에서 유럽 난다고 해야 할지. 정작 우리 부자는 헐리우드에 가본 적도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헐리우드건 유럽이건 아버지들이 우리를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한국 영화는 아빠인가? 우리는 한국 영화를 죽여야 하나? —그건 < 화이 >에서 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 친부 하나에 계부 다섯, 마지막에는 상징적 아버지까지 일곱 명이나 죽이잖아요. —정연씨, < 암살 >을 생각하세요. <화이>에서 친자인 여진구에게 죽었던 이경영은 <암살>에선 친자인 전지현(B) 대신 자기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모인 살부계의 일원인 하정우에게 죽습니다. 그건 수정주의죠. 영화라는 시간은 선형적이지 않아요. 지돈씨와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고 대신 연락을 끊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의 기원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를 영화 쪽으로 이끌었다는—엄밀히 말하면 영화 언저리에서 방목했다는—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세르주 다네는 시네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단지 학교 수업과 병행해서 행해지는 또 다른 수업이자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었으며 이 수업에서 노란 표지 시기의 <카이에>가 길잡이 역할을 했고 몇 사람의 성인 통행안내인들이 우리의 은밀한 공모자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시네필이 아니고 한 번도 시네필이었던 적은 없지만, 우리들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최초의 성인 통행안내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정확히 다네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저기 어딘가에 발견해야 할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이거다! 그때 갑자기 정지돈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외쳤다. —한국의 영화는 일종의 교육-장치입니다.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적교육체제인 거죠. 로라 멀비는 주류 영화가 남성의 판타지와 쾌락을 제공하며 남성의 응시를 위해 구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네는 시네필cinéphile을 영화-아들cine-fils라는 이보다 분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조어로 바꿔 말했고요. 아버지에서 아들로 내려오는 가부장적인 사적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한국에서 모두 두 곳입니다. 극장 그리고 목욕탕! —그건…… 마치 고대 로마 같은 이야기네요. —그렇죠! 캐롤라인 래빈에 따르면 학교는 열을 지어 정렬한 관객 개념을 고대 극장에서 빌려 왔습니다. 따라서 세 가지 학교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교, 감옥, 그리고 극장. 레프 마노비치는 스크린의 계보에서 영화 스크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람객이 자리를 뜨지 않고도 다른 공간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움직이는 가상의 시선이죠. 하지만 이 가상적 운동성은 새롭게 제도화된 관객의 부동성을 대가로 얻어진 것입니다. 전 세계에 수백만 명의 수감자를 수용하기 위한 대규모 감방, 즉 영화관이 지어진 거죠. 수감자-관객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 수도 자리를 옮길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게 제가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싫어하는 것 치고 극장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정연씨,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사회, 푸코는 그걸 훈육사회라고 불렀다. 훈육사회는 감옥, 학교, 작업장, 병원 등 감금 환경의 구성으로 규정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극장이 추가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우리가 훈육사회를 넘어—윌리엄 버로스의 표현을 빌려—통제사회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감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다. 들뢰즈는 말한다. 통제는 훈육이 아닙니다, 고속도로로 사람들을 감금하지는 않지만, 고속도로를 통해 통제 수단을 늘릴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고속도로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전혀 갇혀 있지 않고 무한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데도 완벽하게 통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 극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소름…… 하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거지? 목욕탕이 배경인 곽경택의 < 억수탕 >? 하지만 그건 20세기 영화인데…… 아니면, 홍상수의 < 극장전 >……? 그날 밤, 책상 앞에 앉아 스포티파이가 추천하는 맞춤 플레이리스트를 듣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앨라니스 모리셋의 ‘넌 알아야 해You Oughta Know’를 흥얼거리는데, 등장인물들이 그 노래를 부르던 두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먼저 <투어의 끝>에서 제이슨 세걸이 분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와 일행들이 차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 그리고 < 북스마트 >에서 케이틀린 디버가 친구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열창하는 장면. 이어지는 것은 < 트립 투 이탈리아 >에서 롭 브라이든과 스티븐 쿠건이 차를 타고 가며 앨라니스 모리셋의 ‘Jagged Little Pill’ 앨범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다. 티키타카 끝에 둘은 CD를 트는데 “내가 당신을 열받게 하나요?Do I stress you out?”라는 첫소절이 나오자마자 브라이든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그래Yes, you do.” 그리고 장면은 다시 < 레이디버드 >에서 어린 주인공이 기타를 치며 ‘아이러닉Ironic’을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들을 어떤 순서로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튀어올라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마치 작은 빅뱅처럼. 한 마디로 그건 들뢰즈가 말하는 “내게 아이디어가 있어”의 순간, 단지 영화적인 것밖에 될 수 없는 아이디어의 순간이었다. 톰 앤더슨, < 타짜 >, 한국, 그리고 노래방이 한데 섞인…… 톰 앤더슨은 로스앤젤레스가 등장하는 영화의 장면들을 이어 붙여 < 로스앤젤레스 자화상 >을 만들었다. < L.A. 컨피덴셜 >, <긴 이별>, < 블레이드 러너 >, <히트>, < 차이나타운 > 같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켄트 맥켄지의 <더 엑사일즈> 같은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도시의 장소들, 건물들, 거리들, 교통체제, 재개발, 도시의 기원을 둘러싼 신화, 도시를 통제하는 경찰 권력, 인종차별과 계급문제를 모두 아우르는 중층적인 영화-에세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톰 앤더슨의 영화를 본 이후로 언제나 하고 싶었던 일, <담배와 영화>라는 책을 통해 나름 시도했으나 결코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나는 지돈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 한국 영화 속에 나타나며 한국 영화를 한국 영화로 만드는 한국적인 장면들을 모은 일종의 에세이 영화를 만드는 거죠, 우리가 직접! 이번 연재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 기획 단계에서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한국 영화에 대한 한국 영화를 만드는 두 사람의 좌충우돌 편력기를 그린 일종의 제작 노트가 되는 거고요! 지돈씨는 동의했고, 나는 검색과 기억에 의지해 노래방이 나오는 영화(25개)와 목욕탕이 나오는 영화(12.5개)의 목록을 정리해서 지돈씨에게 메일로 보냈다. 왜 노래방이냐고? 목욕탕이 극장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사적교육체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면, 노래방(룸싸롱이나 가요주점 등을 포함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치가 구비된 방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은—정확히 말하면 한국 영화에서 재현되는 노래방은—한국의 남성들이 우애를 다지는 호모소셜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성 인물들이 함께 노래를 한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 친구 >에서 유오성이 부르는 ‘마이 웨이’나 < 비열한 거리 >에서 천호진이 부르는 ‘올드 앤 와이즈’와 < 광복절 특사 >에서 송윤아가 부르는 ‘분홍 립스틱’이나 < 너는 내 운명 >에서 전도연이 부르는 ‘오빠’를 비교해보라.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꿀벌 이야기에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한국사람 이야기에 노래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하필 박무석이 곽철용 앞에서 ‘불나비’를 부르는 <타짜>의 장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에요? —지돈씨, 그건 말이죠…… (다음 회에 계속) *참고도서 [영화의 이론](벨라 발라즈 지음, 이형식 옮김, 동문선, 2003년)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세르쥬 다네 지음, 정락길 옮김, 이모션북스, 2013년)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장 루이 셰페르 지음, 김이석 옮김, 이모션북스, 2020년)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질 들뢰즈 지음,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옮기고 엮음, 문학과지성사, 2011년) [영화 이론 –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토마스 앨새서.말테 하게너 지음, 윤종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년) [페미니즘 영화이론](쇼히니 초두리 지음, 노지승 옮김, 앨피, 2012년) [형식들](캐롤라인 레빈 지음, 백준걸.황수경 옮김, 앨피, 2021년) [뉴미디어의 언어](레프 마노비치 지음, 서정신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년)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영화에서 오마주(homage)라는 말은 누벨바그 세대와 함께 도착했다. 그들은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학습’했고, 그런 다음 자신들이 경배하는 위대한 거장들의 영화에 대한 존경을 자신의 영화에 담기를 원했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첫 장면, 미셀과 그의 애인이 파리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로셀리니의 < 이탈리아 여행 >의 첫 장면이다. 영화 장면 안에 등장한 오마주는 영화사에 시네필 세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누벨바그 세대가 존경을 바쳤던 대부분의 거장들이 영화가 태어난 1895년과 거의 동시에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들은 문법을 만들었고, 개념을 발명했으며, 과학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나의 역사, 하나의 전통, 임권택 을 시네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에게 아마도 가장 낯설게 들리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들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를 떠돌 때 임권택은 영화를 찍으면서 길거리와 세트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임권택은 취미에서 시작한 영화감독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직업감독이었다. 하지만 임권택의 1960년대 영화들에서 불규칙하지만 반복해서 마주치는 이상한 명단이 있다. 오마주를 바치는 것만 같은 영화들. 리메이크라고 하기에는 원작이 너무 희미하고, 그저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흔적을 남겨놓은 영화들. < 남자는 안 팔려 >와 빌리 와일더의 < 뜨거운 것이 좋아 >. < 바람같은 사나이 >와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칠형제>.(그때 임권택은 <황야의 칠형제>의 원본인 <칠인의 사무라이>를 아직 보지 못했다) < 30년만의 대결 >과 존 포드의 < 아일랜드의 연풍 >. 게다가 그 영화들과 원작을 연결시켜 질문할 때마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다. “그때 그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본 거에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나는 그 대답을 하시는 순간의 표정에서 기쁨의 시간을 읽는다. 그 대답에서 임권택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를 뒤로 밀어버리고 그 바탕에 있는 밑그림으로서의 영화, 아마도 기억 안의 원(原)텍스트라고 불러야 할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기원에로 거슬러 올라갔다. 영화를 본다는 경험, 임권택은 영화를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벨바그 세대는 앙드레 바쟁의 지도를 받았고, 앙리 랑그루아의 프로그램으로 고전을 보았으며, 서점에서 수많은 영화서적을 구할 수 있었다. 임권택은 첫 영화를 1962년에 찍었다. 그때까지 그는 단 한 권의 영화책도 읽을 수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법을 배움. 배운다는 문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학교 바깥에서 영화를 배운다는 문제. 혼자서 스스로 영화를 배운다는 문제 앞에 서야 했을 때 임권택은 (고전이 아니라) 개봉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다. 그가 좋아한 영화들, 자기가 감탄한 장면들. 하지만 제한적인 목록. 임권택은 그때 한국전쟁이 막 끝난 다음 폐허와 다름없는 서울에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을 환기시켜 주겠다. 그때 아직 남한에는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도 임권택에게 영화에서의 미학적 문제에 대한 질문의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때 임권택은 무엇이 영화에서 가치 있는가, 에 관한 질문을 정식화시킬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정반대의 자리에 있던 하이데거와 아도르노는 거의 동시에 예술에서의 진리, 라는 질문을 서로 다른 빙식으로 제기하였다. 누벨바그 세대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지도자 앙드레 바쟁이 귀도 아리스타르코와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은 주제인가 형식인가를 놓고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사회적 내용과 주제에 우선하는 미학적 형식의 기준. 영화에서의 질문의 위계질서. 이 논쟁은 아마도 하나의 강령이 되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임권택은 새로운 영화의 시작과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었다. 그 안에 들어왔지만 수수께끼와 같은 질서들. 쇼트의 접속. 왜 어느 순간에는 기적 같은 경험을 안겨주는데 어느 자리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가 단순하게 시나리오나 대사, 연기의 결함이나 부족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의 내재적 시청각 기호들의 오작동으로 귀결될 때 이 예술은 세계의 무질서에 대해 항상 자기의 질서, 세계와의 사이에서 가져보는 자기의 규칙, 세계와 영화를 연결하는 순간 사이의 연결의 미학에로 이어지는 질문에 이끌렸을 것이다. 임권택의 질문. 그때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찾았다. 왜 어떤 영화는 나를 즐겁게 만들고 어떤 영화는 그렇지 않은가. 그 즐거움은 무엇인가. 즐거움의 즐거움, 즐거움의 정체. 정체의 이면. 이면의 질서. 질서의 규칙들, 그 즐거움은 어떻게 이루어져있는가. 심지어 임권택은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을 프린트를 구해서 그 즐거움의 순간을 프레임 단위로 들여다보았다. 그때는 영화를 손 안에 넣을 기회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편집실에서 릴을 걸어놓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이 조지 스티븐스의 웨스턴 <세인>이었다. 임권택은 이 영화에서 맛 본 즐거움의 체험을 몇 번이고 말했다. 1956년 11월 2일에 서울에 개봉한 영화. (그때는 대도시에 먼저 개봉한 다음 프린트가 지방 소도시로 배급되었다) 임권택이 정창화 의 연출부를 할 때였다. 1953년 파라마운트가 테크니컬러로 제작한 < 셰인 >은 웨스턴의 영화사에서 < 하이 눈 >과 함께 고전 웨스턴의 시대를 끝내고 이 장르를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셰인>에게 찬사를 바쳤고(미국 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는 웨스턴사상 베스트 10에 선정했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 탄식을 했다. 앙드레 바쟁은 이 영화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는 <셰인>을 ‘쉬르 웨스턴(Sur-western, 이 정의를 휴 그레이는 영어로 옮기면서 ‘Super western’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이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박상규는 이 표현을 ‘초(超)웨스턴’으로 옮겼다. 쉬르레알리슴(超現實主義)에서 가져온 접두어일 텐데 또 다른 오해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발음’으로 옮겼다)’이라고 불렀다. 바쟁은 이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쉬르 웨스턴’들은 고전 웨스턴들과 달리 자신이 웨스턴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이 장르 바깥에서, 이를테면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그리고 심리적이거나 정치적인, 혹은 다른 미학적이거나 에로틱한 무언가. 말하자면 이 장르 바깥으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와 자신의 수치를 정당화시키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라고 공격하였다. (‘웨스턴의 진화’) 여기서는 <셰인>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반대로 바쟁은 <셰인>을 공격하면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매혹에 대해서 어떤 찬사의 글보다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먼저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셰인>은 1889년 존슨 카운티 전쟁, 혹은 와이오밍 평원 전쟁으로 알려진 개척민과 토지 소유주들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참극에서 느슨하게 가져온 이야기이다. <셰인>보다 본격적으로 이 소재를 다룬 영화는 마이클 치미노의 < 천국의 문 >이다. 가난한 개척민 마을에 허름한 차림에 점잖고 예의바른 총잡이 한명이 찾아든다. 셰인이라는 이름의 남자. 아무도 이 사람을 알지 못하고 그 자신도 과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 낯선 남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이 마을의 조 스타렛이다 그는 가난하지만 정숙한 아내 마리안과 어린 아들 조이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걱정은 토지 소유주 라이커와 그 일당이 계속해서 이들이 힘들게 개척한 땅에서 쫓아내려는 것이다. 라이커와 그의 일당이 폭력을 행사할 때 과묵하고 조용한 셰인은 숨겨져 있던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조이는 그 모습을 보고 셰인을 영웅처럼 존경하고 조의 아내 마리안도 자신도 모르게 이 남자에게 이끌린다. 그걸 셰인도 알지만 모른 척 한다. 라이커는 개척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쌍권총 총잡이 잭 윌슨을 고용한다. 검은 옷을 입은 이 사내는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을 해치운다. 라이커는 조 스타렛에게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지만 셰인이 대신 그 자리에 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총을 뽑아 잭 윌슨과 라이커를 해치운다. 셰인은 거기까지 쫓아온 조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와이오밍 평원 저편으로 떠난다. 어린 소년 조이가 멀어져가는 셰인을 향해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 중의 하나를 외친다. “돌아와요, 셰인” 평원의 메아리. 바쟁은 <셰인>이 신화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바쟁에게 웨스턴은 비극의 윤리학이었다) 이 영화에서 셰인은 성배를 찾는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 중의 한명인) 것처럼 보이며, 게다가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그저 신비로운 복장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웃듯이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셰인>을 매혹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놓쳤다. 신화와 비극의 거리. 신비로운 주인공. 나는 거기에 이 주인공의 특징을 한 가지 더하고 싶다. 아무런 목표가 없는 주인공. 바쟁의 표현을 빌린다면 불가능한 목표에 이르기 위한 무한정한 방랑. 대지를 떠돌아야 하는 ‘나그네’(‘Wanderer’는 '산책자‘가 아니다)의 멜랑코리. 그래서 이 주인공은 무엇보다 우울하다. 이 우울한 주인공은 목표가 없기 때문에 종종 우유부단하게 보인다. 그 우울한 우유부단이 보는 쪽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안고 있는 슬픔. 왜 세계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한 고난의 슬픔에 머물 때, 거기서 발생하는 세계와 나 사이의 불화. 그 불화하는 세계가 역사에 기대어 있을 때 그 역사의 무게 아래에 눌려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 거기서 물러났을 때, 그래서 그 불화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 그 입구를 스스로 차단했을 때, 나는 역사의 시간 안에서 삭제되는 것이다. 그때 경험하는 우울한 우유부단은 세상 안에 있으면서 역사 바깥에 놓여있는 자리, 이것도 아니면서 저것도 아닌 (아감벤이 쓰는 표현을 빌리면) 시시한 자리에 가는 행위의 제스처이다. 임권택에게 <셰인>과 (펠리니의) <길>은 보는 쪽의 자리에서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같은 영화이다. 어쩌면 둘 중 한 쪽, <셰인>과 < 풍운의 검객 > 중 어느 한 편만을 보았다면, 그래서 다른 한 쪽을 줄거리만으로 알고 있다면 다른 한 편이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두 편의 영화는 멀리서 쳐다보는 서사가 아니라 그 안에서 들여다보는 장면의 디테일에서 서로 겹친다. 한 가지 사실을 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임권택은 처음부터 조선시대 사극을 자신의 영화적 무대로 삼았다. 이미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에서 사도세자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 그리고 정조의 이야기를 궁궐 안을 무대로 실타래처럼 얽은 이야기를 풀어헤치고 묶으면서 고유한 유형의 매듭으로 고유한 장소를 만들어냈다. 분명히 임권택은 조선시대 사극의 대가인 신상옥 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임권택은 늘 겸손하게 그건 내가 연출부를 했던 정창화 감독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리고 그건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모든 인물들을 감싸 안는 정념의 연쇄고리들은 전적으로 임권택의 것이다. 하지만 <풍운의 검객>은 이상하게도 <망부석> 혹은 < 십년세도 >에서 보여주었던 조선시대 사극의 사료적 근거가 반사하는 것만 같은 장소의 질서, 인물들 사이의 위계질서. 질서가 빚어내는 운명, 그 안에서의 복종과 같은 역사와 서사 사이의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둘 사이의 친화성이 희미해졌다. 그 유사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조선시대는 기괴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워졌고 그 대신 거의 절대적이었던 질서의 체제, 그래서 숨 막힐 것처럼 촘촘하게 그 곁에 연이어 이어 붙여놓았던 제도의 고유한 거리들의 일부가 사러지거나 거의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여기에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 바깥에서 온 것 같은 인물의 등장이다. 이따금 전시하는 거의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는 무술. 왜 여기에 왔는지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도 설명하지 않)는 인물. 길을 잃지 않기 위한 가이드로서의 줄거리. 하지만 <풍운의 검객>은 줄거리의 독후감과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감상의 디테일 사이의 간극이 이상할 정도로 큰 영화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조선시대. 왕은 병석에 누워있고 간신들이 날뛰고 있는 시절.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최괄은 희빈 문소이와 함께 왕이 별세하면 문소이가 낳은 아들 달지를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내서 왕자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어느 날 밤 어린 왕자를 해하려는 순간 복면을 쓴 검객이 나타나 그들을 물리친다. 그 무렵 한양 주막가에 자신을 방갓이라 칭하는 나그네가 한 명 나타나 뛰어난 무술 솜씨를 보여준다. 그의 무술을 높이 평가한 달지는 그를 자신의 수하에 둔다. 그런 방갓을 보고 달지가 관심을 기울이는 기생 연화가 연모하는 마음을 품는다. 방갓은 최괄의 집에 매달린 초롱에 화재를 일으킨 다음 몰래 빠져나가 옥에 갇힌 영의정 김종성의 딸 난실을 구한다. 그때 우연히 그걸 달지의 집을 방문한 연화가 보게 된다. 난실은 자신을 구해준 방갓에게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노리개를 건네주면서 연모하는 마음을 품는다. (기이한 우연과 사건이 겹친 다음) 달지는 방갓이 자신을 방해하려는 목적을 지녔음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최괄은 방갓이 무술이 뛰어남을 알고 또 다른 무술의 고수인 백운선생을 부른다. 한편 연화는 방갓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난실에게 끌린다고 오해하고 그가 난실과 은거하고 있는 산 속의 암자를 달지에게 알려준다. 달지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백운선생이 방갓을 찾아냈을 때 알게 되는 것은 방갓이 백운선생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백운선생은 방갓이 살생을 일삼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꾸짖는다. 스승의 부름 앞에 제자는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다음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해였음을 연화가 백운선생에게 알리고, 백운선생은 감옥에 갇힌 방갓을 구한다. 백운선생은 상소문을 올려 최괄과 문소이가 역적모의를 했음을 알리고 다시 떠나지만 달지에게 죽음을 당한다. 방갓은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여기고 연화와 난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막아선 달지를 물리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갓을 지켜보던 소년은 떠나가는 방갓의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부른다. “아저씨” 하지만 그 소리는 바람소리에 묻힌다. 방갓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분명히 <풍운의 검객>은 <망부석> 혹은 <십년세도>로부터 멀어졌다. 아쉽게도 나는 그 사이에 놓인 < 영화마마 >, < 왕과 상노 >, < 닐니리 >, < 청사초롱 >을 (네가 프린트가 사라져서) 보지 못했다. 네 편의 영화. 나는 그 영화들을 건너뛰면서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단절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태도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설명해도 <풍운의 검객>은 조선시대에 머물고 있다. 장르로서 반복 안의 차이. 그리고 디테일에서의 차이 안의 반복. 그 안에서 일부 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놓여있는 시대에 복종하고 있지만 일부 인물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 부정은 저항이 아니라 억압된 것을 인정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의 어떤 결과가 자유를 얻게 된다, 라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고스란히 따라 가보고 싶게 만든다. 나는 여기서 앙드레 바쟁의 웨스턴에 대한 견해를 뒤집어 다시 세우고 싶다. 왜 그럴 필요가 있는가. 바쟁은 쉬르-웨스턴의 영화들을 공격하면서 이 영화들이 자기가 놓여진 시대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냉전시대의 매카시 ‘레드 페이퍼’를 알리바이로 삼는 것으로부터 이 장르를 구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나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과도하게 뒤집어 쓴 알리바이. 하지만 영화가 자기의 책임, 모순, 법적인 제도, 복잡한 층위에서 요구하는 정치적인 상황, 경제적인 관계, 그 안에서 하나의 통일을 부여하려는 예술의 전투 혹은 타협, 그 전투 혹은 타협의 주관적인 결정과 객관적인 한계, 그 모든 것의 결정으로서의 역사를 형식의 일시적인 진공상태로 정지시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제 자리로 돌아간 영화. 나는 재빨리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고 싶다. <풍운의 검객> 안의 새로운 인물들, 가까스로 세워놓은 배경을 어지럽히는 행동들, 이 행동이 만들어내는 사건. 그것들은 임권택이 이제까지 복종했던 조선시대 사극에 대한 하나의 시험이다. 어떤 시험? 임권택에게 할리우드 영화들, 그 중에서도 웨스턴 영화들, 그 중에서도 (바쟁의 분류에 따르면) 쉬르-웨스턴들은 이상적인 유토피아 모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극 모델 안에서 웨스턴 영화를, 쉬르-웨스턴을, <셰인>을 진행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라는 하나의 시험. 그 둘은 겹쳐놓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 둘은 서로 공존 가능한 것일까. 그 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그러나 어딘가에서 닮은 것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모방은 탐색이다. 무엇에 대한? 유사한 기호들.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라는 시험. 하지만 이건 위험한 시험이다. 왜냐하면 서로 완전히 다른 배경의 무대는 그것이 작동되기 시작할 때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때려 부술 지도 모른다. 이 폭력적인 접근의 교집합. 이때 교집합의 자리에 놓인 주인공은 이유 없는 자신의 고난 앞에서 아무 것도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우유부단해지고 그 공허한 행위 속에서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러 관점에서 다시 정의내릴 수 있는 <풍운의 검객>은 이 수수께끼의 검객 방갓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연성을 놓고 질문을 하면 의문이 떠오른다. 방갓은 왜 한양 한 복판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왜 어린 왕자와 옥에 갇힌 난실을 구하는 것일까. 왕자도, 난실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그는 왜 목숨을 걸고 최괄과 희빈 문소이의 음모를 방해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시나리오에는 있다. 방갓은 수문장 손호관의 아들 손용운으로 그의 가족이 최괄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아남은 다음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방갓의 모든 행위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로 옮기면서 방갓의 사연, 차라리 손용운이라는 인물 자체를 삭제시켜 버렸다. 우리는 끝까지 방갓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추론은 그 스스로 내내 쓰고 다니면서 자신을 ‘방갓’이라고 부르는 모자를 통해 희미하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삿갓과 달리 방갓은 부모의 상(喪)을 당한 상제가 외출을 할 때 쓰는 모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누구도 방갓에게 부모의 상을 당한 슬픔에 대해서 위로하거나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모자는 내용 없는 기호로 그와 함께 내내 머문다. <풍운의 검객>에는 대사가 없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이를테면 최괄의 하인들, 달지의 부하들. 장안의 오가는 백성들. 하지만 방갓을 쓴 사람은 방갓뿐이다. 그럼으로써 방갓은 그 모두로부터 방갓을 분리해내는 기호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두 번째 특별한 점. 방갓은 자기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 약속은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물론 살인에 대해서는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여기서 방갓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살인의 위협을 가하는 경우에도 그를 물리치거나 무력화시킬 뿐 거기서 멈추는 그 자신과의 약속에 있다. 그 약속이 스승 백운도사와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뒤에 방갓을 에워싼 달지의 수많은 부하들의 칼과 맞서야 할 때, 그래서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칼등 대신 칼날을 휘둘러야 했을 때, 그때 그 자리에 나타난 백운도사의 입을 통해서이다. 이 약속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영웅의 조건. 단지 뛰어난 무술과 빼어난 지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방갓에게 선과 덕을 요구한다고 말하면 그건 요점을 놓친 것이다. 영웅이 영웅이 되는 순간은 그가 시련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다. 임권택은 이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에 틀림없다. 그의 주인공들은 종종 이 시련을 통과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신체의 일부를 상실하거나 부서졌다. 그 시련은 점점 혹독해졌으며 임권택의 ‘다찌마와리’ 액션 장르영화 시기에는 잔혹함을 넘어서서 (상황에서) 기괴하고 (감정적으로) 굴욕적이며 차라리 거기서 멈춰 서서 그 과정 자체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는 것만 같은 도착으로까지 밀고 나아갔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 과정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심지어 1970년대 새마을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운동의 지도자로 거듭 나기 위해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아마도 이 과정의 가장 복잡하고 기이한 정식화는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빌려 한(恨)을 품어야만 더 높은 예술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는 판소리 예술가들에 관한 두 편의 영화 < 서편제 >와 < 천년학 >일 것이다. 나는 이미 반복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밀고 나아갈 것이다. <풍운의 검객>에서 임권택은 이 질문을 아직 정식화시키지 않았다. 대신 주인공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조선시대 안에 어떤 틈을 만들어내고 있다. 차라리 주인공을 조선시대로부터 소외시키면서 장르와의 사이를 분리시키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 방갓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영웅이 되면서 그 자신에게 충만하면 할수록 조선시대는 점점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풍운의 검객>은 (바쟁의 정리에 의지해서 말하자면) <셰인>이 웨스턴에서 한 것을 조선시대에 대해서 하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은 자기가 시작했던 무대를 자기의 방법으로 부정하는 중이다. 방갓은 이 공허한 무대에서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기호들 사이를 오가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걸고 무언가를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그걸 왜 하는 지 끝내 알지 못한다. 무언가, 라는 행위와 왜, 라는 이유, 사이의 간극에서 방갓은 영웅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만 그 시련의 대가는 그에게 무의미한 조선시대로부터 거의 우주적인 텅 빈 영화 바깥의 세계에로 어떤 선택의 여지없이 다시 떠나야한다는 운명적인 결론이다. 그때 이 우주는 어둠 속으로 무엇이든지 집어삼켜버린 다음 소멸시켜버리는 심연에 다름 아니다. 임권택은 영웅적인 죽음대신 차라리 여기서 영웅적인 소멸을 선택한다. 죽음과 소멸 사이의 간극. 이 절망적인 매혹, 나는 아무 것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사라버리고 싶습니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그걸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호의 밤. <풍운의 검객>에서 영웅적인 과정은 사실상 소멸 앞에서의 잠시 동안의 머뭇거림이다. 하지만 세 번째 특별한 점에 비교하면 두 번째 특징은 아무 것도 아니다. <셰인>에서 셰인은 마리안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리안과의 로맨스를 외면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호의를 베풀어준 그녀의 남편 조 스타렛과의 우정 때문이다. 물론 마리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제스처를 노출시킬 뿐이다. 좀 더 복잡한 설명도 있다. 셰인은 이 마을에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단지 이 마을뿐만 아니라 어떤 공동체에도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마리안이 아닌 누구와의 로맨스도 거절했을 것이다, 라는 가설이다. 왜 웨스턴의 주인공이 광야(wildness)에서 공동체에 왔다가 다시 광야로 떠나가는지에 관한 긴 이론이 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우리의 논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세 번 밖에 총을 뽑지 않는 <셰인>은 셰인과 마리안과의 감정적 긴장에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웨스턴이라기보다는 로맨스 멜로드라마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풍운의 검객>도 로맨스에 더 가까운 (일종의) 기사도 서사이다. 처음에는 방갓이 달지의 아흔 아홉 칸 대궐 같은 저택에서 벌이는 신출귀몰하는 지략과 음모의 모험극처럼 시작하지만 이 서사 안으로 연화와 난실이 들어오자 갑자기 두 여자가 방갓에게 보내는 정념의 로맨스로 바뀐다. 연화는 방갓을 보자마자 그가 이 서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달지가 그녀에게 보내는 관심을 외면한다. 난실은 방갓이 그녀를 옥에서 구하자마자 처음 보는 그에게 자신이 품고 있던 노리개를 건네주면서 (연인들 사이에 나누는) 정표로 삼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방갓을 사이에 두고 난실과 연화는 사랑, 질투, 분노, 원망, 하여튼 그녀들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서로 경쟁적인 로맨스의 감정을 조금도 숨길 생각 없이 드러내놓고 신호를 보낸다. 이때 방갓은 둘 사이의 선택에서 어떤 고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둘 중 누구도 선택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방갓은 그녀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면서 항상 친절한 태도로 대하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로맨스의 신호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는 둘 중 누군가에게 실망을 시킬까 두려워 거짓 거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거절하는 척 하는 사랑. 우리들이 로맨스 소설에서 이미 읽은 냉담한 실패를 목표로 한 사랑의 거짓 제스처. 거절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의 변주들). 방갓이 이 로맨스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서사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서사 바깥에서 누군가 (이를테면 집에서 기다리는 그의 아내) 방갓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 어딘가를 가야하는 도중에 벌어진 일에 말려든 것이 아니며) 거기에 또 다른 계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알고 보니 이 일은 왕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임무였다, 라는 이중 플롯) 아무 것도 숨기지 않은 두 여자의 속마음. 무조건적인 정념. 오히려 삼각관계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관되고 단조롭게 설명할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행되는 방갓의 거절은 오히려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걸 먼저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때 어떤 로맨스도 받아들이지 않는 방갓의 선택은 그의 적들에게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약속과 결합하면서 그가 ‘나그네’라기보다는 불가에 입문한 승려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풍운의 검객>에서 불교의 어떤 기호도 발견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런 가르침을 내린 방갓의 스승 백운도사도 스님이 아니다. 이때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두 여자, 난실과 연화의 대조적인 사회적 신분이다. <풍운의 검객>의 무대가 조선시대라는 것을 환기시키겠다. 난실은 영의정 김종성의 무남독녀 영애이다. 조선시대에 시기별로 그 지위가 변하였으나 (<풍운의 검객>은 정확한 연대를 표기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 최고의 자리였으며 그 아래 좌의정과 우의정을 두고 조선의 국사를 결정하던 자리. 그 지위의 근대적인 번역은 갑오개혁에 이르러 고종의 명에 따라 영의정을 총리대신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봉건제 왕권국가에서 임금 바로 아래의 관직.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딸. 연화는 그녀가 아무리 호사스러운 장안의 기방(妓房) 여주인이라 할지라도 유교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기생의 신분이다. 우리는 ‘춘향전’에서 서예와 가무에 능한 성춘향은 어머니가 기생이지만 그녀는 엄연히 기방에 등록하지 않은 여염집 규수인데도 기생의 딸이라는 이유로 남원 사또 변학도에게 술시중을 들지 않는다고 불려가 고초를 당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방갓이 두 여자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그 둘이 반대의 자리가 아니라 비대칭의 위치에 있다. 여기서 조선시대는 임권택의 영화 안으로 이상한 우회를 거쳐 회귀한다. 내면화된 조선. 오른 쪽에는 난실이 있다. 영의정 김종성의 가문이 지금은 최괄과 희빈 문송이의 음모로 화(禍)를 당하고 난실이 한양 바깥으로 쫓겨나 그녀의 몸종처럼 데리고 다니는 어린 소년과 지내고 있지만 그 음모를 밝히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면 난실은 다시 명문가의 자리에로 되돌아갈 것이다. 지금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 방갓은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게 <풍운의 검객> 서사의 전부이다. 이때 이 서사의 무대로서의 역사는 감정의 세계가 아니라 왕조차 복종해야하는 질서에 지배받고 있는 국가이다. 무대는 배경에서 멈추지 않고 그 서사의 토대라는 더도 덜도 아닌 근거의 지평을 인정해야 한다. 영화가 끝난 다음, 그러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의 첫 번째 장면을 떠올려보자. 지금 한양 바깥 산속 암자에서 지내는 처지이지만 난실이 다시 복권하고 원래의 자리에 갔을 때 방갓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다. 난실은 지금이 예외의 상태이지만 방갓에게 원래의 자리라는 것은 없다. 나그네의 자리. 일시적인 잉여의 위치.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고, 양반은 사회의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이었으며 그들을 천민들과 분리하였다. 난실은 그 중에서도 최고위층의 사대부 집안, (한 번 더) 그 중에서도 영의정의 자식이다. 난실이 방갓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그녀의 (어쩌면 남아있는) 가족, 가족의 친척들, 그녀가 되돌아온 사대부, 그들을 둘러싼 선비들, 그 모두를 구성하는 신분사회인 조선은 방갓이 그들 사회에 진입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관한 사극영화의 멜로드라마 서사들. 양반집 따님, 혹은 남편을 잃은 과부가 하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맞이하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 <풍운의 검객>은 방갓이 난실의 로맨스 제안을 받아들이면 마지막 장면 디음 장면은 정확하게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를 반복하는 비극의 첫 장면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왼 쪽을 볼 차례이다. 이때 연화는 난실의 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옆이 아니라 위와 아래의 자리에 완강하게, 거의 불변의 위치에서, 사회적 조건 아래, 고정된 상태로 머물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신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천민에 해당했다. 물론 기생들 사이에서도 다섯으로 나뉜 등급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으뜸인 일패기생(一牌妓生)은 임금 앞에서만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달지를 상대하는 연화는 문무백관만을 상대하는 이패기생(二牌妓生)이었을 것이며, 이패기생 중에는 가무와 서예로 한양 장안에서도 그 명성이 드높은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신분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은 유교의 원리가 가치였던 사회였다. 남녀유별, 남녀칠세부동석, 의 가치아래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하는 여자들은 유교라는 텍스트를 난잡하게 만들고 올바른 도덕적 삶에 대한 타락의 사례가 되었다. 도덕은 유교에서 명령이다. 나는 똑같은 가정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방갓은 난실대신 연화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이상한 장면. 방갓은 난실의 노리개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연화의 기방을 찾는다. (그런데 이게 위험을 무릅쓸만한 일인가) 연화는 그때 자기를 보고 싶어 찾아온 것으로 오해하고 방갓에게 안겨 자기의 속마음을 고백한다. 이때 방갓은 매장하게도 난실의 노리개를 찾으러 왔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방갓의 태도에 관한 질문, 이 방문을 통해서 방갓은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표면적인 진정한 목표는 (이 이중적인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노리개가 아니라 연화를 실망시킴으로써 그녀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론. 가장 단순하게 그 행위가 다른 남은 선택인 난실을 위한 것이라면, 혹은 반대로 연화를 실망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감정을 바꿔놓기 위해서라면, 어느 쪽을 향하건 사랑의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방갓은 어느 쪽도 선택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이 공허한 방문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이때 방갓을 둘로 찢어서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방갓은 자시니 난실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인 연화에게도 향한다. 방갓은 정말 연화를 받아들일 마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상대는 연화라는 대상에게 일시적인 판단을 했을 수 있다. 그래서 난실의 노리개는 핑계이며 연화와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기에 왔(을 수 있)다. 그런데 마치 방갓의 속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화는 흠모하는 자기 마음을 고백한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왔다면 방갓은 왜 그 고백을 거절하는가. 여기에 도착하는 전까지 방갓에게 연화는 어떤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도착하여 고백을 듣는 순간 어떤 대상이 연화가 되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서로 완전히 다른 자리라는 것이다. 도착하기 전까지 연화는 대상이긴 하지만 방갓이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였다. 그러므로 연화는 방갓에게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연화가 자신을 방갓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이라는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순간 연화는 즉시 단순하게 사랑의 감정에 고정된 존재로 축소된다. 그러므로 질문은 단순해진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왜 여기서 질문은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고 옮겨진 것일까. 로맨스 서사의 무대가 조선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다시 번역하면 당신은 기생인 나를, 천민인 나를, 유교의 가치 아래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는 나를, 그런 나의 연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로 옮겨질 수 있다. 방갓이 거절하는 것은 연화가 아니라 연화가 놓인 사회적 위치이다.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나그네인 방갓이 그걸 거절할만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지금 당신이 이 선택의 남은 절반을 잠깐 잊은 것이다. 신분사회의 로맨스. 난실과의 일시적지만 이 맹목적인 로맨스는 방갓을 상상할 수 있는 (하지만 임금을 제외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려놓는다. 방갓은 영의정 김종성의 딸 난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방갓은 두 개의 선택 사이에서 (셰인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 태도에서는 별 차이 없이) 우유부단해진다. 어떤 우유부단? 난실의 사랑을 받을 때 방갓은 그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 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뒤로 물러나고, 연화의 사랑을 받을 때 방갓은 자신이 난실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부터 내려갈 생각이 없기 때문에 뒤로 물러난다. 이때 이 두 개의 뒤로 물러남이 비대칭의 이유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방갓이 어떤 계산도 없이 로맨스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 방갓은 조선시대 안에서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산의 비대칭이 방갓을 우유부단한 슬픔에 빠지게 만든다. 이것이 방갓의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 사이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선택 이후의 선택은 방갓이 조선시대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는 것이다. 임권택은 퇴각의 마지막 자리에 <셰인>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맥스를 배치하였다. 셰인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전문적인 해결사인 총잡이 잭 윌슨과 대결을 벌인다. <셰인>에 매혹된 관객은 누구나 이 마지막 대결 장면을 언급한다. <풍운의 검객>에서 가장 공들인 장면은 방갓과 달지 사이의 단 한 번의 마지막 대결 씬이다. 이미 최괄과 희빈 문소이는 백운도사가 올린 상소문으로 연화석상에서 나라의 명을 받고 대역 죄인으로 포도청 금부(禁府)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방갓은 난실과 연화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길을 떠나던 중이었다. 떠나가는 방갓을 따라온 건 난실을 모시던 어린 소년 시종과 그 자리에서 구금을 피해 달아난 달지뿐이다. 물론 시종 소년의 역할은 영화 내내 거의 존재감이 없다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방갓과 달지의 대결을 바라보는 증인의 시선으로서의 역할, 말하자면 <셰인>에서 셰인과 잭 윌슨의 대결을 바라보는 증인의 존재이자 신화를 완성시키는 임무를 가진 마리안의 어린 아들 조의 자리이며, 그런 다음 떠나가는 방갓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의 존재로서 거기 있는 것이다. 총에서 칼로 바뀐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대결, 웨스턴 영화의 마을 중심에 자리한 술집 바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등성이 들판에로의 이동.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단지 산등성이 언덕 풀밭을 흔드는 정도를 넘어서서 들판 전체를 흔드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바람과 함께 어디에선가 안개가 몰려온다. 화면은 일부가 정도로 짙은 안개. 바람결에 그 안개가 사방을 덮는다. 안개를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이 장면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1943년에 만든 첫 영화 < 스가타 산슈로(姿三四郞) >의 마지막 대결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 마디로 굉장한 시퀀스. 물론 임권택은 그때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영화는 1998년 10월 20일 일본대중문화 개방정책에 따른 허가까지 한국에 수입이 금지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1967년은 극장이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고, 임권택은 해외에 1978년에 처음 나가보았다. 하지만 단지 들판에서 바람이 분다는 설정에서 멈추지 않고 방갓과 달지가 서로 마주보는 장면의 구도 일부는,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심지어 본 적도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첫 영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씬의 디테일은 임권택 스타일의 특별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씬이 <풍운의 검객> 전체로부터 마치 떨어져 나온 다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오직 여기서만 씬 전체에서 장소의 위와 아래, 그 장소와 관계하는 기후의 변화와 그것이 서사에 관여하여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효과, 그 안에서의 동선의 이동과 그 동선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으로 이루어지는 몇 겹의 배치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단조롭던 이 영화의 동선과 장소의 배치는 오로지 이 장면만을 위해서 마치 숨겨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마도 방갓이 달지와 마주치는 장면은 소년의 시선의 위치 때문에 산등성이 언덕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달지는 떠나는 방갓을 멈춰 세운다. “이봐, 결판을 내야지” “싫다” “그건 네 생각이고, 어차피 너와 나는 끝장을 봐야하는 입장이다” “싫다,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웃기지마라” 그리고 달지가 칼을 뽑아든다. 방갓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갓을 벗는다. 그런데 그런 다음 그 둘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산 비탈길 아래로 위치를 옮긴다. 마치 위에서 소년이 내려다보기에 좋은 위치로 옮겨야한다는 듯이 그렇게 이동한다. 이때 화면을 채우는 것은 갑작스러운 바람소리이다. 조금 전까지 평화롭던 이 산등성이에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단지 장르의 약속 이상으로 그 바람이 너무 세고 큰 규모로 불기 시작하기 때문에 기이하고 심지어 초현실적인 감흥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때 이 대결장면은 임권택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어떤 스타일? 이 대결 장면이 2분 40초에 이르는데도 임권택은 서로를 마주보는 방갓과 달지 사이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찍은 쇼트를 마주보게 만든 다음(shot_reverse shot) 둘 사이만을 번갈아 오갈 뿐이다. 이 대결에서 달지가 칼을 휘두르는 찰나의 순간은 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방갓은 마지막 순간 단 한 번 칼을 휘두를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방갓은 그 한 번으로 달지의 양쪽 무릎을 베어 그를 땅에 무릎 꿇게 만든다. 임권택은 이 씬에서 액션의 디테일 대신 서로 마주보는 시선의 교환, 그때마다 위치를 옮겨 찍은 카메라의 위치와 구도, 무엇보다도 바람소리와 화면을 덮치는 것만 같은 안개로 진행한다. 최소의 액션. 이때 씬의 진행에서 위계질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디테일들 사이의 위계질서. 이때 임권택이 거기서 찾은 디테일은 서사의 안쪽으로부터 말 그대로 표면, 영화라는 표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영화의 표면, 영화라는 표면. 표면의 광경. 광경의 디테일에 관한 방법론. 나는 거의 멈춰 서다시피 이 마지막 씬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임권택은 분명히 거기서 무언가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다. 마치 마지막 씬의 기쁨을 위해서 이미 만든 영화의 전부를 바꿔도 상관없다는 것만 같은 태도. 임권택의 1960년대 영화를 설명할 때 대부분 고통의 감정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본 것은 분명히 기쁨의 정념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고통 안에 숨어있던 기쁨을 끌어내려고 애쓸 것이다. 물론 기쁨이 비가시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매번의 쇼트라는 양태 안에 담겨있는 속성의 표현이라면, 그래서 그 표현이 영화를 견디게 해주는 실존적인 상태라면,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정념의 형상에 관한 설명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실패를 무릅쓰고 이 형상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거듭 되돌아올 것이다. 그걸 해낼 수 있다면 임권택 영화에서 거의 다루어진 적이 없는 디테일을 경유하여 정념의 형상에 관한 표현의 순간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