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날들
- 감독
- 이난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송새벽, 정인겸, 오윤홍, 장미윤, 김소은, 박일목, 김사홍, 이승준, 이대혁, 박성연, 박은영, 김동현, 나귀화, 진승찬, 김사라, 김성현, 김재현, 김정, 김선영, 김병조, 한예리, 이정미, 정인기, 최희진, 노치만, 김미소, 배수정, 박인수, 정수현, 이주승, 김승훈, 최혜승, 김갑식, 김명규, 박세령, 임은영, 홍재희
작년, 임순례 감독의 < 리틀 포레스트 >(2018)는 150만 명의 관객들을 동원하며 잔잔한 힐링 영화라는 장르 중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피할 수 없는 꼬리표가 있었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농촌의 낭만화”, 영화 이전부터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시골 농촌이라는 배경에 대한 논란이었다. 영화는 허구이지만 현실에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그 비판은 충분히 유의미하다. 그러나 이번 비평은 그 비판 때문에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관객들에게 전하는, 영화에 대한 변호이다. 영화는 밝고, 따스하고, 반짝거린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밝은 색감을 고수하는데, 이는 관객들에게 농촌에 대한 무조건적인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혹은 그를 통해 귀농을 장려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임순례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이 영화는 하나의 주장을 하는 대신 ‘힐링’을 관객들에게 선물해주고자 하는 영화이다.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를 발견해내거나, 그런 사회를 거세게 비판하기보다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관객들의 마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영화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주인공인 혜원을 통해서 스크린에 등장한다. 영화 초반, 혜원의 도시 생활은 관객 대부분이 겪는 사회 현실과 다를 게 없다. 현대 한국 사회 속 개인은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그 선택 또한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조건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안정적인 선택지를 고르고, 혜원도 마찬가지로 임용고시라는 선택지를 고른다. 혜원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빠르게 지나가는 노량진 장면은 그녀가 안정적인 삶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상징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혜원은 허겁지겁 삼각 김밥을 먹고, 노량진에선 제대로 앉지도 않고 서서 컵밥을 먹는다. 치열한 경쟁 속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먹지 않는 식사는 경쟁에 초조한 현대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도시에서의 속도는 불안만큼 빠르다. 그러나 혜원의 노력은 통하지 않았고, 애인이었던 ‘훈’은 결국 합격했다. 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혜원은 그와 비교됨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공부를 했다면, 조금 더 빨랐다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도시는 그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빠르게 먹어치운 식사는 빨리 사라진다. 혜원이 느끼는 허기는 열심히 노력했던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없어 생기는 간극이다. 같은 시대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관객들 또한 갖는 이 허기를, 영화는 혜원을 통해 해소 시켜준다. 혜원의 고향인 미성리는 도시와는 정반대로 흘러간다. 이 공간은 거리라는 문제 때문에 물건 거래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이 공간은 ‘자급자족’을 바탕으로, 영화의 속도를 조정한다. 영화 속 “최고의 요리는 자신이 직접 해먹는 요리”라는 말처럼, 직접 만들어서 먹는 요리는 느리지만,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허기를 완벽하게 채워준다. 영화 속 혜원은 그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농사는 혼자 할 수 없는 일로, 고모와 함께 혹은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수확한 쌀, 팥, 채소 등의 먹을거리는 다시 요리로 나눠 먹게 된다. 도시가 무한 경쟁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공간이라면, 자연의 공간인 미성리는 협력과 나눔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갑작스러운 태풍으로 인해 농사를 망치게 되었어도,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혜원은 다시 일할 뿐이다. 이때 혜원은 투덜거리며 일을 하는데, 초반 도시에서 자신에게 책임을 몰아세우던 모습과는 다시 상반된다. 모든 걸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야, 혜원은 자신을 떠난 엄마라는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그저 ‘자연히’ 일어난 일이라는 걸 이해하는 것. 영화의 ‘힐링’은 이에 밑바탕을 둔다. 지금 답을 찾지 못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것과, 함께 답을 찾다 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답이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이야기다. 영화가 말하는 힐링이 어렵지 않았던 것처럼, 감독은 그 메시지도 쉽게 전하려 한다.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영화처럼 어렵게 삶을 성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영화 속 혜원과 마찬가지로 관객들도 책임감을 덜어내고 잠시라도 편하게 지내길 원하기 때문이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각종 화려한 편집 방법으로 전해진다면 그것 또한 모순이기 때문에, 감독은 관객들이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끔 스크린에 보이는 이미지에 집중한다.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작업, ‘개인에게서 책임감을 덜어내는 것’은 도시와 미성리라는 공간의 색감차이로 시각화한다. 혜원이 도시에 있을 때 살았던 방은 밤이라 어둡기도 하지만, 형광등 불빛, 냉장고 안에서 나오는 인위적 불빛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칙칙한 느낌이 든다. 그러한 공간 속에 놓인 인물은 ‘좋아했던 남자친구와의 경쟁에서 졌다는 사실’만큼이나 어두워 보인다. 그러나 미성리에서의 혜원은 창과 문이 많은 공간에 있다. 언제든 자연광이 바깥에서 안을 비출 수 있고, 안에서 혜원이 불을 뗄 수도 있다. 창문을 통한 햇빛이나 난로 불이 비추는 혜원은 따뜻하고 깨끗해 보인다. 도시의 인공적 불빛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혜원은 자신을 짓누르던 책임감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인다. 힐링의 두 번째 요소는 ‘함께’이다. 영화는 인물에 대해 클로즈업을 최소화하고, 등장인물들이 늘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도록 구도를 잡는데, 이 구도는 인물들이 더욱 더 가까워보이게 한다. 이러한 구도가 잘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로, 혜원, 재하, 은숙, 셋이 함께 막걸리를 먹는 장면에서도 처음엔 막걸리 잔에 초점을 맞춘 카메라는 앉아있는 옆모습이 모두 보일 때까지 줌아웃한다. 카메라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셋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줄어든 것처럼 보이게 되고, 덕분에 ‘함께’라는 요소를 더욱 부각시킨다. 롱쇼트는 ‘함께’라는 가치를 나타낼 때에도 쓰이지만, ‘자연스러움’이라는 가치를 나타낼 때에도 쓰인다. 혜원이 농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야외의 ‘자연적인’ 공간에 놓이는 장면마다 카메라는 그녀와 거리를 더 벌린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봄과 가을의 장면에서는 혜원의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익스트림 롱쇼트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뜻 보면 이런 구도는 인간이란 존재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사소하고 작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 같다. 그러나 자연은 혜원을 억압하고 있기 보다는 그녀와 함께 장면을 완성해주는 역할을 하고, 혜원은 자연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계절이 바뀌는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이는 계절의 순환성이라는 자연의 특성과 다시 한 번 연결된다. 자연의 연결점들 속 혜원은 점차 ‘자연스러움’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타이밍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한다. <리틀 포레스트>는 아주 특별한 영화는 아니다. 영상, 인물, 주제의식 어떤 면에서도 영화는 평범하고, 그러나 평범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관객에게 더욱 다가갈 수 있었다.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힐링 때문에 농촌이 너무 낭만화된 것 아니냐는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영화가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작은 숲’은 혜원의 공간일 뿐, 관객들이 가질 힐링의 공간은 그 어떤 곳, 도시 깊숙한 안이 되어도 상관없다. 그저 그럴 수 있는 공간을 찾기 바란다는 메시지와 함께, 영화를 조금 더 편하게 보는 관객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덩케르크>의 패착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에는 전장의 광기와 폭력 그리고 비극이 승리의 기념비를 위한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헌신으로 전화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전장의 ‘1일’을 채우고 있는 민간 선박에 관한 에피소드는 그러한 영웅적 서사로 가장 강력하게 수렴된다. 항구에 정박되어 있던 민간 선박에까지 국가의 징발령이 내려진다. 그러자 큰아들을 이미 이 전쟁에서 잃은 한 아버지는 해군에 배를 넘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직접 자신의 다른 어린 아들과 동네 소년까지 태운 채 전장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 동네 소년이 불의의 사고로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그 아버지는 소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배를 돌려 항구로 되돌아가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한 사람의 소년보다는 덩케르크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무수한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런은 영화의 말미에 결과론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이 옳았다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한 아이를 잃는 대신 더 많은 병사를 구했으며, 그 소년은 바라던 대로 마을 신문을 통해 영웅으로 보도되었다. 주제적 차원에서 <덩케르크>는 영웅과 승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전쟁 드라마이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헌신, 마지막 사병 하나까지도 챙기고자 했던 전투 지휘자, 위험을 감수하고도 끝까지 전투기를 몰았던 전투 조종사.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내래이션되는 승리의 오마주들. 그런데 이 순간 불현듯 떠올라 크리스토퍼 놀런의 국가와 역사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압도해버리는 영화가 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영화에서 쇼헤이는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체제에 순응하고 동화할 수 없는 자)이 유년기 겪었던 국가와 권력,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중 일본 역시 자국 민간 어선들에 대한 징발을 명령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유일한 생계수단인 어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통 사정을 하게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주인공은 아버지를 굴복시키며 생존수단을 강탈하려는 군인들에게 달려들고, 결국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는 징발에 수긍하게 되는 장면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쇼헤이에게 국가와 전쟁은 결코 애국이나, 대의, 승리로 설명될 수 없는 실체이다. 전범 국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전쟁이 위정자들의 게임이이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 생활을 했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컷트 보네컷의 『제 5 도살장』에는 부제가 달려있다.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다. 그가 전장에서 마주친 적군-악의 실체는 사실상 이제 막 13-4살을 넘긴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전장의 게임은 그 어떤 승리의 명분도 수립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탄식만이 가능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거대하게 몰려드는 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공포로 자폭을 선택했던 일본 병사들 역시, 죽음 직전에 엄마와 가족에게 편지를 남기며 울부짖었던 어린 소년들에 불과했다. 이스트우드는 그들이 자발적인 애국주의에서가 아니라 국가의 강요된 대의와 명분에 의해 이끌려왔음을 묘사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 역시, 전장의 최전선에 서 있는 병사들이 위정자들 혹은 권력자들의 승리를 위한 비인격화된 수단들로 간주되는지를 냉혹한 게임처럼 묘사한다. 세상에 대한 성찰의 시선을 가진 거장들에 의해 그려진 전쟁은 적과 아, 승리와 패배, 정복과 굴복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 모든 전쟁은 불모한 폭력에 불과하며, 그 무수한 이름 없는 죽음들 앞에 그 어떤 승리도 영광도 존재할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가 무려 6만 5천여 명이 죽어간 전장을 승리의 기념비로 다시 써 내려가는 순간, 이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우매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에도 흥미로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이 영화가 적어도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전장은 공격하는 자가 의해서가 아니라, 공격받는 자들에 관한 세계로서 묘사한다. 사실 주류 영화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 의해 지배되는 뉴스 미디어, 드라마 등은 언제나 공격하는 자의 입장과 정당성에 입각해 서술되고 조작된다. 반면 <덩케르크>는 영화의 본편이 공개되기 이전부터 트레일러를 통해 전쟁에 관한 새로운 체험 감각(불안과 공포)을 제안하였다. 잔교에 운집한 병사들이 폭격기 소리와 함께 공포에 사로잡히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는 안타깝게도 언제나 본편보다는 트레일러가 더 훌륭하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부 및 잔교에서의 1주일을 묘사하는 많은 장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청년(토미)의 불안과 필사의 생존 의지를 묘사하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호이테 반 호이테마가 촬영한 와이드한 전장의 풍경들은 그 드넓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시한폭탄처럼 짹각거리는 스코어 사운드와 더불어 주인공 및 관객을 심리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가 탁월하다. 이 영화에서 더욱 흥미로운 두 번째 지점은 영화가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전개된 영화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아이디어들 때문이었다. 놀란 감독은 영화의 존재를 ‘시간’의 축으로서 구조화한다. <메멘토>로부터 <인셉션> <인터스텔라>, 그리고 <덩케르크>까지 그는 영화가 어떻게 아날로그적 시간에 대한 감감을 해체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덩케르크>는 이 영화가 초반에 제시하듯, 명시적으로는 3개의 시간을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해안가 잔교에서의 1주일, 선박을 타고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나선 가족의 하루, 그리고 공중폭격을 위해 출격한 항공기에서의 한 시간. 명백하게 서로 다른 길이로 구성된 시간이지만, 놀런은 이 영화의 서사 구조 내에서 교차 편집을 통해 세 개의 시간 층위를 동등하게 병렬적으로 배치하는 야심을 피력한다. 물론 이러한 배치가 온전히 새로운 영화적 실험은 아니다. 사실 영화는 조르쥬 멜리에스의 ‘트릭’이 발생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시간의 구조물이었다. 영화의 모든 시간들은 생략되거나 연장될 수 있으며, 압축될 수 있다. 다만 이미 1930년대, 할리우드 고전기에 이른 성과는 그 시간의 트릭을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선택되고 배열되는 시간의 파편들을 관객들이 서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인과론적인 실체로서, 영화의 조작 가능성을 비가시화하는 심리적 구성물로 완성해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런의 시간 구조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연화된 고전적 서사의 시간을 탈구시키는 것, 즉 선형적이고 인과론적 서사로 수렴되었던 시간을 비선형적 단위로 재구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여기서 핵심은 그가 영화의 논리 혹은 시간의 논리를 분절적이고, 비선형적인 디지털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독히도 아날로그적인 질료인 필름을 고집하고 있음에도 그의 영화적 시간 감각은 철저하게 디지털화된 감각이다. 선형적이고 물질적이며, 연속성과 원본(본질)성에 대한 감각인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적 감각은 비선형적이며 비물질적이며, 불연속성과 절대성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예술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시도하는 연구자 찰리 기어는 예술과 디지털의 상관관계를 자본주의적 형식논리(상품의 추상화, 표준화, 수량화의 논리. 그로 인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류의 새로운 분절적 감각과 논리) 속에서 파악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화된 형식논리로 작동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과 공간의 가치와 크기는 근대 이후 형성된 서구적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가장 미시적으로 파편화하거나 압축하고 해체한다. 밀레니엄 시대를 전후로 고조된 디지털적 감각에 대한 예술의 인식은 당장은 비선형성(랜덤 액세스)과 상호작용성의 신화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디자인하는 예술형식으로 무수하게 발현되어 왔다. 하나의 절대성, 하나의 인과론적 서사, 하나의 감각으로 통일된 시공간 구조의 수사학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덩케르크>에서 크리스토퍼 놀런이 디지털적 감각으로 시간과 공간을 구축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세 개의 시간(1주일, 하루, 한 시간)을 병렬적으로 분절해 제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덩케르크>는 사실 굉장히 관습적이고 장르적인 컨벤션과 스릴, 긴장 구성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관습을 배치하는 방법에서 눈에 띄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화의 초반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대의 인물들을 마치 동시적인 시간처럼 교차 편집을 통해 구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일주일의 시간을 대변하는 토미가 잔교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다른 이와 함께 함선으로 호송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거의 실시간적 시간 흐름을 가지고 서사에 배치되는데, 그 사건을 통해 관객의 긴장을 자아내기 위해 함선 장교의 출항 명령, 군집한 병사들로 인해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토미의 호송, 심지어 그 와중에 진행된 폭격과 진행을 가로막는 잔교의 끊어짐 등이 묘사된다. 이 순간들은 토미가 과연 배에 승선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지독히도 관습적인 긴장과 병렬의 편집방식을 채택한다. 그런데 이 장면의 트릭은 다시금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긴박한 순간과 교차편집된다. ‘하루’의 시간을 보여주는 민간 선박 출항의 긴박함(해군들이 배를 징발하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그들을 따돌리고 출항해 버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연료계가 고장 난 폭격기의 불안한 항공 등이 그것이다. 표면적으로는 1주일, 하루, 한 시간의 시간 위에 배치된 인물과 사건들은 교차편집을 통해 마치 동시적 시간인 양, 그것도 거의 실시간적인 방식으로 구성된다. 만일 이 영화가 초반에 세 개의 인물군이 서로 다른 길이의 시간을 배분받고 있음을 자막을 통해 알려주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분명히 동시적 시간으로 인식했을 순간이다. 그러나 서사의 정황상 이 시간들은 전혀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영화가 편집이라는 장치를 통해 서로 다른 시간대에 얼마나 랜덤하고 자의적인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지를 실험한다. 이 실험에서 ‘놀라움의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놀런의 영화 그 자체라기보다는, 관객의 고전주의적이고 관습적인 관람행위(인과론적이고 선형적인, 무엇보다도 편집의 이음매 없는 연결이 구성한 영화적 일루전의 리얼리티 효과) 그 자체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으로서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구조화하는 장인이다. <트윈 픽스>의 25년, 과거 혹은 미래? 이러한 크리스토퍼 놀런은 야심 많고 흥미롭지만, 그는 언제나 특정 한계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부한 주제의식도 여기에 한 몫 하지만, 영화적 트릭과 야심이 영화의 존재 그 자체를 재구성하는 전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선형적, 랜덤 액세스 되는 시간이 서로 다른 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올해의 성취는 역시 25년만의 귀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시리즈이다 노장의 예술가 데이빗 린치가 <트윈 픽스 3>를 통해 보여주는 세계는 놀랍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미학을 대변하는 호이테 반 호이테마의 웅장한 스펙터클의 위용이 없을지라도 그는 키치적이고 B급 영화적인 생략과 응축, 유머를 통해 감히 범접하기 힘든 불가해한 예술 세계를 달성한다. 린치에게 영화는 단순한 시공간적인 트릭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세계로 진입하는 ‘열린 문’이다. 25년 전 <트윈 픽스> 시리즈를 봤던 관객이라면, 시즌 2의 후반부 붉은 방의 로라 팔머가 쿠퍼 요원에게 25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은 정말로 25년이 지난 2017년, 시즌 3를 시작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하는 또 한 가지. <트윈 픽스 3>의 붉은 방에서, 외팔이 사내는 여전히 그 공간에 앉아 있는 쿠퍼에게 지금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질문한다.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를 결과를 미리 언급하자면, 시즌 3의 최종화에서 쿠퍼가 도달한 세계는 영화적 서사의 과거일까? 미래일까? 놀랍게도 시즌 3의 최종화는 전 에피소드들의 최종적인 귀착점이자 원점으로 돌려버린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트윈 픽스>는 영화의 안과 밖에서 두 개의 시간 구조를 제시한다. 영화 밖에 존재하는 첫 번째 시간은 정말로 25년의 공백 이후에 도착한 이 영화에 새겨진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다. 시즌 3에서 우리는 25년 만에 다시 뭉친 놀라운 출연진들을 거의 다 만나게 된다. 붉은 방에 갇혀 있던 쿠퍼는 말할 것도 없이 트윈 픽스의 보안관 사무실과 그 마을에서 살아가던 거의 모든 배우들이 시간의 흔적을 온 육체와 얼굴에 새기며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이 시즌의 절대적 주제는 ‘시간’처럼 보인다. 시즌 3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서사와 상관없이 25년의 공백(혹은 점핑)이 주는 놀라운 연속성과 단절성을 지속적으로 상기하고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역시 영화적 구조가 내재한 미궁과도 같은 세계를 관통하는 시간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즌 3의 최종화는 이 모든 이야기의 귀착점이자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쿠퍼와 주요 인물들은 불가해한 세계의 문을 통과해 초월적 우주와 붉은 방,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시간의 경계,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의 경계는 불가해한 미스터리로서만 제시될 뿐이며, 심지어 죽음이 존재의 끝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린치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우주로 통하는 문들을 통해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언제든 변용가능한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트윈 픽스 3의 최종화의 마지막 대사는 “지금이 몇 년인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별거 아닌, 그러나 거대한 매혹 철학자 들뢰즈로부터 영화 연구자 데이빗 노먼 로도윅까지 그들은 영화를 ‘공간에 기반한 시간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영화는 공간의 구성을 통해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 가능한 시간매체이다.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영화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이며, 모든 시간이 시작되는 탄생과 소멸되는 죽음까지도 영화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로 작동한다. 올해 나의 사사로운 주목을 받았던 영화와 감독들은 모두 ‘시간’을 영화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감독들이자 영화들이다. 혹은 나에게 ‘영화적 시간’에 대한 사유를 재촉했던 작품들이다. 수십 년 만에 스크린으로 공개된 고다르의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는 린치의 영화처럼 시간의 점핑과 함께 우리 앞에 도착했다. (당연히 이 영화 역시 여느 고다르의 영화들처럼 영화라는 매체의 자의식과 영화의 시간을 실험하는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순간은 이 영화 속에서 아직 젊었던 장 피에르 레오가 영화 상영 이후 실제로 극장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불멸의 시간을 소망한다던 바쟁의 말처럼 스크린 속 과거의 젊은 레오와 달리 그는 현실의 노쇠한 육신으로 관객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장 피에르 레오 그 자신의 스타성과 영화적 역사들을 응축하는 것으로 점철되는 스와 노부히로의 영화 <오늘 밤 사자는 잠든다> 역시, 그가 죽음을 연기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종결된다. 그리고 극 중 영화 현장을 떠난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이 깃든 과거의 공간들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역시 먼저 죽어간 이들의 유령을 마주한다. 스와 노부히로는 이 영화에서 영화야말로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을 기록할 수 있는 매체임을 새삼스레 상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나만의 베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구로사외 기요시는 전작 <은판 위의 연인>(사진과 죽음, 영화에 관한 고혹적 괴담)에 이어 세계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시간의 끝, 죽음과 영화가 온전히 만나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디지털 시대에 영화는 그 스스로 디지털적인 속성(비록 아날로그였던 셀룰로이드라 할지라도 분절된 프레임으로 존재했던 영화적 이미지와 시간들)을 세상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 그 자체로 현시한다. 파편화되고 불연속적이며 절대성의 위계를 상실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압축과 파편화. 최근 무수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시간의 절대성을 넘어서는 서사들(평행적 세계, 4차원을 넘어 5차원의 세계, 우주적 시간, 비선형적 내러티브 등)은 포스트 모던을 넘어선 또 다른 예술적 시간의 재현능력을 탐닉하게 한다. 영화와 예술, 디지털적 감각과 영화적 시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수렴되는 형식 논리들. 이러한 것들이 요즘 나를 사로잡는 사사로운 매혹들, 사사로운 영화들이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아내 미즈키는 거실 뒤편에서 누군가 지켜보는 인기척을 느껴 되돌아본다. 한 남자가 서 있다. 남편 유스케다. “몇 년 만이지?” “3년이네요.” 둘의 대화는 이상할정도로 담담하게 진행된다. 이들 사이의 3년이란 시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속내를 알기 어려운 꽤나 느긋한 부부의 대화다. 그가 3년 만에 되돌아온 유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이런 상냥한 환대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실제로 3년 전에 사라졌고, 시체는 발견되지 못했지만 죽은 것은 사실이다. 유스케는 자신의 몸이 바다에 있고, 고기들이 몸을 이미 씹어 먹어 버렸기에 시체를 보더라도 자신을 알아채지 못할 거라는 끔찍한 말을,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아내에게 말한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 그녀는 성을 내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와락 달려드는 일도 없이 상냥하게 유령을 환대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 < 해안가로의 여행 >은 부부의 재회를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이들의 과묵한 대화는 몹시 인상적이다. 그 리듬을 잊기 어렵다.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의 리듬과는 무연하다. 누구나 자기만이 느끼는 아픔의 리듬이 있고, 이 순간의 리듬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다. 헤어짐을 견디거나 고통을 멀리 떼어내는데 그들 각자의 고유한 시간이 걸린다. 헤어짐의 아픔, 그것을 견뎌내기 위한 시간은 이곳 생에 걸친 사람들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 장면은 저쪽 편, 죽음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그 아픔의 리듬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3년 만에 되돌아왔다. 유령의 도래에 담긴 비밀은 부활에 있을게 아니라 3년이란 시간의 간격에 있다. 죽은 자가 비록 당돌하게 되돌아오지만(그렇게 보일 뿐, 유령들 각자 재림의 고유한 리듬이 사연만큼 있다), 그러므로 공포나 놀람보다는 재림이 불러오는 것은 맑은 눈물이다. 브레송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여인의 눈에 촉촉이 젖은, 눈가의 물이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순간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 되돌아온 남편이 아내를 이끌어 당도하게 될 해안은 말 그대로 물이 가장 많고 빛나는 곳이다(더불어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에서 과다한 물의 이미지가 불러온 정서를 또한 떠올려보게 된다.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에 대한 짧은 글에서 밝힌바 있지만, 3.11 혹은 4.16 이후 당분간 우리는 물의 이미지들에서 어떤 죽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안으로의 여행이란 그러므로 물에 도달하는 것이자(그 곳에서 남편은 죽었다고 한다), 밝게 빛나는 물들(눈물)과 만나는 여정이다. 그가 몹시도 아름다운 곳이라 말했던 이곳은 사실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디에나 있을 바닷가일 뿐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도달하는 순간 관객인 우리는 이 여행을 납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정말 아름다운 곳에 도착한다. 모든 것이 빛나는 곳이다. < 도쿄 소나타 >에 이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몹시도 감동적인 영화를 이 세상에 가져왔다는 것에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도 <도쿄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피아노와 바다가 등장한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 반복에 대해 먼저 말해야만 한다. <도쿄 소나타>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 < 해안가로의 여행 >은 피아노를 치는 한 소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주 느린 템포의 피아노곡이 연주되고 있다. 아이가 있는 거실의 넓은 공간은 몇 개의 가구를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는 편인데, 이상한 것이 저 뒤편의 바깥으로 향한 창문에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창문이 열려 있기에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왜 여기서 창문이 열려 있어야만 할까? 문이 열려 있는 것도,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도 그 자체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이가 있는 거실의 창문이 바람에 흔들릴 정도로 열려 있다는 것은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자면 낯설다Unheimlich. 배치의 의도를 작가에게 묻지 않고는 가볍게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이다. 이 부조리한 장면에 눈길을 던지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구로사와 기요시의 과거 작을 거론하며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는 무례한 이들이 아닌, 여전히 최근작들을 몹시도 좋아하는 드문 팬들일 것이다. < 도쿄 소나타 >의 몇 장면들이 이 순간 그들에게도 떠올랐을 것이다. 거론하는 <도쿄 소나타>의 첫 장면은 이러하다. 카메라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측면 운동을 하며 움직여 거실을 보여준다. 거실의 바닥 위로 신문지 한 장이 바람에 날린다. 전경의 탁자 위에 놓인 잡지의 몇 페이지가 마찬가지로 바람에 날려 펄럭거린다. 집의 내부로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다. 카메라가 천천히 더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저 뒤편,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을게 눈에 들어온다. 가정주부인 메구미가 급히 뛰어나와 창문을 황급히 닫고 마루를 걸레질한다. 물끄러미 창문을 쳐다보던 그녀는 다시 문을 열고는 비가 몰아치는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장면에서 열린 창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장면. 학교에서 꾸지람을 들은 소년은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는 우연히 카네코 피아노 교실이란 간판이 붙어있는 가정집 앞을 지나다 열린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된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집을 들여다보면 피아노 선생이 한 소녀에게 레슨을 하고 있다. 아이는 천천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얼마 후, 꼬마는 그 선생에게서 피아노 강습을 받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감동적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아노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다. 아이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강당의 뒤 편 창문에서 커튼이 펄럭거리고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어쩌면 <해안가로의 여행>의 첫 장면과 가장 유사하다 말할 수도 있겠다. 열린 창문으로 바깥의 바람이 실내로 들어온다. 반대로 내부의 무언가가 바깥으로 향하게 되기도 한다(<도쿄 소나타>에서 열린 문으로 들어온 정체불명의 도둑에 이끌려 메구미는 해안가로 납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설정을 <해안가로의 여행>의 기이한 여행과 연결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 해안가로의 여행 >의 첫 시작은 비슷한 구도에서 시작한다. 한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고, 뒤편의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이 펄럭거린다. 잠시 후, 피아노 선생인 미즈키가 등장해 아이에게 천천히 연주할 것을 주문한다. 나중에 소녀의 어머니는 그런 미즈키의 주문을 못마땅해 한다. 조금 밝게, 빠르게 피아노를 연주할 수는 없느냐고. 이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쯤에 다시 반복되어 나온다. 유스케와 해안가로의 여행 중에 음식점에서 함께 일하게 된 미즈키는 우연히 식당에 있는 피아노 위에 놓인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악보에 손이 끌린다. 무심결에 피아노 앞에 앉아 곡을 연주한다. 갑자기 가게 주인 여인이 달려와 그녀의 연주를 제지한다. 허락도 받지 않고 연주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 말한다. 격렬한 제지에 미즈키는 적잖게 놀라는데, 그녀는 슬픈 사연을 털어 놓는다. 그녀의 여동생이 연주하던 곡이다. 동생은 어릴 때 연주를 많이 했지만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아 곡을 완주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린 나이에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부모는 피아노를 버리자 했지만, 악기가 동생의 몸의 한 부분이라 여긴 그녀는 동생을 기억하며 여태껏 버리지 못하고 있던 터다. 사연을 들은 미즈키는 자기가 그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싶다 말한다. 그러자 응답처럼 갑자기 어린 아이의 유령이 나타난다. 언니는 망연자실 바닥에 쓰러진다. 미즈키는 아이가 곡을 연주하도록 피아노로 이끈다. 아이는 건반 위에 손을 얹고 피아노를 연주하지만 아마도 예전처럼 실력에 부친 듯 쉽지 않아한다. 연주를 지켜보던 미즈키는 나지막이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다시, 너의 템포로 연주하렴.” 피아노가 놓인 식당 저 뒤쪽의 열린 창문으로 커튼이 마찬가지로 펄럭거린다. 실내는 잠시 어둠 속에 잠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작은 빛이 이 세 명의 여인들을 어둠 속에서 감싸고 있다. 유미코는 소녀의 연주를 응시하고, 저 뒤편에서 언니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동생의 피아노 연주를 조용히 듣고 있다. 세 여성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구도가 인상적이다. 상냥한 기쁨, 혹은 부드러운 슬픔의 순간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지금 어쩌면 나루세의 세계에 근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미코의 눈에 촉촉이 눈물이 고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눈물을 반짝거리고 있다. 아이는 연주를 마치고 컷이 되면 장면이 바뀌어 이내 소녀는 사라지고 없다. 어둡던 식당이 천천히 밝아진다. “너의 템포로 연주하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미즈키가 아이에게 주문했던 느린 템포의 연주는 기실은 이 아이에게 어울리는 리듬이었을 것이다(물론 그 템포는 남편과 사별한 미즈키의 삶의 리듬이기도 했다). 유령 이런 식의 연출은 전형적인 호러영화와를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유령이 어떻게 출현하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 반대가 중요하다. < 절규 >로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던 2007년에도 그는 사다코의 유령처럼 어떻게 기발한 방법으로 유령이 출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흥미를 느끼는 것은 어떻게 유령이 사라지는가이다. 하늘로 날아갈 것인지, 문을 열고 나갈 것인지, 계단을 타고 내려갈 것인지 등등. 이런 생각은 호러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일찌감치 무효로 하는 설정이지만 더 흥미로운 질문이다. 유령은 이 세계에 갑자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빈 공간에 거주하고 있다. 어떻게 유령을 보게 될 것인가. 혹은 유령임을 어떻게 판명할 것인가. 최종적으로는 어떻게 유령과 결별할 것인가. 횡으로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이런 빈 공간의 여백을 담아내는데 적절했을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달라진다. 유스케는 왜 돌아왔을까. 그것도 3년의 시간이 걸려서. 비록 유스케가 생전 좋아했을 음식을 요리하는 때에 매번 돌아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그의 첫 출현이 그랬다. 마찬가지로 그가 다시 사라진 이후-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즈키 그를 두고 떠났던 일이지만- 다시 그를 불러내기 위해 음식을 요리한다), 이는 개연성이 없는 하나의 설정, 알리바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유령은 언제나 빈 공간에 거주한다. 그의 출현은 전적으로 그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다만 그를 소환하거나 사라지는 것에 영화적 장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프레임이라는 틀(구조물)과 컷 이라는 분리장치다. 영화의 프레임은 가시성의 틀이다. 틀 안에는 물론 보이지 않는 공백들도 담겨진다. 또 다른 하나. 하나의 컷에서 다른 컷 사이의 공백, 어둠에서 유령은 나타나고 사라진다. 가령, 한 컷에서는 소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고 다음 컷에서는 소녀는 없고 피아노만 놓여있다. 멜리에스의 영화처럼 트릭필름이라 불렀던 초기영화부터 있던 아주 단순하면서도 오래된 방식이다. 프레임이든 컷의 변경이든, 여기서 유령의 출현과 사라짐은 불가해한 바깥에의 감각을 강렬하게 한다. 프레임 안으로 바깥의 세계를 유입하는 것, 혹은 컷의 바깥으로 유령을 사라지게 하는 것.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유령이란 존재(와 그의 출현과 사라짐)가 인물의 심리와 무연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유령적 존재를 라울 루이즈의 용어를 빌려 ‘정오의 유령’이라 부르고 싶다. 루이즈가 들려주는 기이한 일화. “어느 날 한 사람이 칠레의 거리를 걷다 40년 전의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들은 진부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눴다.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는다거나, 우유 값이 올랐다거나, 근처 다리에 구멍이 있다던가 하는 그런 진부한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들은 헤어졌다. 얼마 후 그가 깨닫는다. 그 친구는 몇 년 전에 죽었던 것이다.” 루이즈는 이러한 존재를 ‘정오의 유령’이라 불렀다. 이는 나쁜 이들에게 복수하는 그림자나 고딕 유령이나, 억압된 것의 귀한이나 악의 있는 힘으로 살아 있는 자에 출몰하는 그런 유령이 아니다. 그가 돌아왔다. 처음에 미즈키는 유스케가 돌아온 것이 꿈인가 싶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깨어난 그녀는 그러나 “나랑 같이 가겠어. 아름다운 곳이야.”라 말한다. 이렇게 되돌아온 자가 같이 가자고 하는 곳은 그러나 피안의 세계가 아니다. 어디에나 있을 현실의 세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의 세계의 다른 곳이다. 그를 돌보아주었던 사람들이 있던 곳이다. 부부는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 때론 버스를 타기도 한다. 현실의 수고는 유령이라고 해서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유령 유스케는 심지어 길을 몰라 기차역의 승무원에게 행선지를 묻기도 한다. 그들은 때론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여전히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 사람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어느 날밤에 미즈키는 유스케에게 묻는다. 왜 돌아왔어요? 그는 대답대신 묵묵히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시 묻지만 왜 유스케는 3년 만에 되돌아온 것일까. 그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수백 장의 기도문을 썼던 응답이 되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마치 제사상의 음식처럼 어느 날 우연히 마련했기 때문인가. 사실 그 이유는 미즈키에게 연유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의문은 미즈키가 아닌 유스케에게 전적으로 속한 것이다. 그는 어찌된 일인지 아내에게 되돌아오기에 3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므로 둘의 여행은 아내가 따라나선 그의 사후 3년의 행적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그녀에게 다가오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던 이유를 가늠하는 일은 드라마의 논리에 따라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설명은 그러나 흥미롭지 않다. 영화는 대신 다른 길, 꽤 물리학적 경로를 따라간다. 영화 후반부에 유스케는 시골 작은 마을에서 과학 선생처럼 주민들에게 우주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로 우주의 기원과 존재에 대해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은 무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 설명은 드라마의 개연성과는 무연한 영화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자와 함께하는 여행은 단지 둘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유령이면서도 3년을 살았던 그의 행적을, 사후생의 흔적을 탐구하는 여정이다. 아내는 그런 다른 생을 받아들인다. 아름다운 곳이 있어, 함께 가지 않겠어. 유스케가 미즈키를 여행으로 안내하는 주문이다. 아름다운 곳. 사실 그들이 찾은 곳은 절경도 실로 아름다운 곳이라 말할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작은 마을들이다. 유스케가 말한 아름다움이란 그러므로 아직 볼 수 없었던 바깥의 세계다. 평범하지만, 전적으로 유령의 눈에 비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의 눈앞의 세계란 아직 미즈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들, 말해지지 않은 것들, 아직 들리지 않았던, 그러므로 아직 보이지 않았던 것들과 관련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미즈키는 유스케에게 묻는다. “나는 궁금해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이 둘은 함께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즈키는 지금 유스케와 같은 것을 보고 있던 것일까? 미즈키는 지금 영화에 고유한 특별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영화란 나 이외의 사람에게도(실은 죽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고유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한다. 존재하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차이를 최대한으로 줄여가는 것.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보는 사람이 공유하는, 영화적 체험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 해안가로의 여행 >은 이를 가장 감동적으로 느끼게 하는 영화다. 사족을 달자면, < 해안가로의 여행 >은 올해 상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다시 극장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체험하고 싶다. 아직 정식 개봉하지 않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그 때에 남은 이야기를 더하고 싶다. 더 기쁜 일은 이미 구로사와 기요시가 또 다른 신작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 크리피 >라는 작품으로, 일가족 실종사건을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다. 올 6월에 일본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늘 있었지만) 돌아온걸 환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