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 감독
- 최효원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이윤수, 천이슬, 서도현, 황명환, 안상은, 임대희, 이해인, 성하윤
사진: "Lichtspiel Opus 1.",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를 뒤져나가면서 슬픈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순간? 영화가 가졌던 하나의 가능성이 역사의 폭력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중단되었을 때. 이번에는 세계영화사의 슬픈 순간 중의 하나와 만날 차례이다. 아마 수없이 이런 순간과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발터 루트만(Walter Ruttmann, 1887~1941)은 188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스위스 취리히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그때 취리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중립국으로 모인 다다이스트들의 도피처였다. 여기에 한스 리히터, 트리스탕 차라, 에미 헤닝스, 한스 아르프, 하여튼 셀 수 없는 다다이스트들이 있었다. 한때 제임스 조이스도 여기 머물렀고, 이웃 도시에 러시아의 동지들에게 문건을 보내던 블라디미르 레닌도 잠시 체류했었다. 아마 여기서 발터 루트만은 다다이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1909년에 독일로 돌아왔고, 뮌헨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파울 클레, 라이오넬 파이닝어와 교분을 맺었다. 잠시 파울 클레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때 파울 클레는 닥치는 대로 화가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중에서 누구보다도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발터 루트만은 그들의 작품을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 그의 영화들 속의 이미지를 가져왔겠는가. (좌1) 발터 루트만 (사진: "Walter Ruttmann", IMDb ) (우2) 발터 루트만 연출 <빛의 유희, 작품 2번>(1922), <빛의 유희, 작품 3번>(1924) (사진: "LICHTSPIEL: OPUS II", MUBI / "Opus III", IMDb ) 발터 루트만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벨기에 아르 누보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헨리 반 데 벨데가 바이마르 미술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를 통합하여 바우하우스(Bauhaus)를 세웠다. (하지만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는 바우하우스를 곧 탈퇴하였고, 독일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초대 교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는 미술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쳐 가기로 한다.) 이 학교는 예술의 창조와 20세기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교육 목표이자 학교의 정체성이며 바우하우스의 프로젝트라고 선언(하다시피)했다. 이 학교에 네덜란드에서 《데 스타일(De Stijl)》을 창간한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방문했고, 러시아 구축주의 미술가 엘 리시츠키도 찾았다. 바우하우스의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헝가리 미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였다. 바우하우스는 산업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좌) 바우하우스 (사진: "Chronology", Bauhaus Dessau ) (우) 1920년대 바우하우스 마스터 하우스에서, 라슬로 모호이-너지 (사진: "Biography", MOHOLY-NAGY FOUNDATION ) 발터 루트만은 화가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추상주의 양식에 끌렸다. 그런 다음 영화를 끌어들였다. 이때 발터 루트만은 영화를 ‘새로운 예술’이라기보다는 미술을 위한 새로운 테크놀로지, 새로운 매체, 새로운 사이트(site)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예술에서의 보편언어’를 추구하는 테크놀로지와 추상의 형식을 서로 결합하는 미래를 선언하는 《데 스타일》의 ‘기계 미학’에 관한 논의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발터 루트만이 선택한 길이 아방가르드 영화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트만 자신은 미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고 믿었다. 좀 더 간단하게 스크린을 새로운 캔버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캔버스는 ‘시간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매체’였으며 여기에 “우리 시대의 속도”를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빛의 유희, 작품 1번(Lichtspiel; Opus 1)>(1921)이다. 영화 제목이라기보다는 회화 작품에 어울리는 제목. 상영 시간 11분 44초. 음악 막스 부팅. 검은 바탕 화면에 푸른색과 초록색 원이 번갈아 교차하면서 시작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형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린 이 작업은 명백히 칸딘스키의 영향 아래 놓인 것으로 보였다. <빛의 유희, 작품 1번>은 1921년 4월 27일 베를린 마르모르하우스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 극장에서 한 해 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1919)을 공개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비평가 베른하르트 디폴트는 《프랑크푸르터 자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루트만은 자신의 스피드를 미래주의자 캔버스의 영화적 돌진으로부터 가져왔다”라고 썼다. 영화와 미술은 표현주의 영화들과 다른 차원에서 다시 한번 친교를 맺었다. <빛의 유희, 작품 1번> 중 하지만 <빛의 유희, 작품 1번>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상품 광고 아이디어를 찾던 쪽이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아방가르드와 비즈니스가 서로 결합했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예술은 다시 한번 돈이 되었다. 그들은 이 작품을 산업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였다. 발터 루트만뿐이 아니라 많은 실험 영화 작가들이 새로운 제안을 받았고, 그들은 작업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곳은 바우하우스였다. 산업 디자인의 관점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활용한 ‘예술과 테크놀로지 사이의 새로운 통합’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영화라는 표현 대신 매체로서 ‘빛의 구성과 조립으로 이루어진 이 종합’에 관해 1922년 《데 스타일》에 ‘생산, 재생산’이라는 글을 썼다. 발터 루트만은 자신의 작업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왁스-커팅기에 관한 허가권을 얻은 다음 1926년에 로테 라이니거의 영화 <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1926) 오프닝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중 일시적으로 영화(와 미술 사이)의 또 다른 가능성에 다리를 놓았던 순간은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교하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발터 루트만은 추상적인 이미지의 ‘빛의 캔버스’를 버리고 산업 디자인 영화에 관심을 돌렸다. 1935년, 발터 루트만은 군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캔버스’를 실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나치당은 그가 1928년에 모스크바 여행을 다녀온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감독직에서 해고하고 그 자리에 레니 리펜슈탈을 지명했다. 그 영화가 < 의지의 승리 >(1934)이다. 발터 루트만의 경력은 여기서 끝났다. 오스카 피싱거는 나치 독일을 피해서 1936년에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월트 디즈니의 < 환타지아 >(제임스 알가 외, 1940) 작업에 참여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1937년에 시카고에 머물렀고, 미국에 개교한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한스 리히터는 작업을 중단하고 1940년 뉴욕에서 영화를 가르쳤다. ‘빛의 캔버스’는 그렇게 섬광처럼 빛을 발한 다음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하나의 순간이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2001년 | 싸이더스 감독: 김태균 | 원작: 서동헌 | 각본: 서동헌 정안철 허균 박헌수 김태균 | 제작: 차승재 | 촬영: 최영택 | 미술: 장근영 김경희 | 음악: 박영 | 특수효과: 정도안 | 무술감독: 이응준 | 시각효과: 장성호 CAST 김경수: 장혁 | 유채이: 신민아 | 장량: 김수로 | 송학림: 권상우 | 소요선: 공효진 | 마방진: 허준호 | 교감: 변희봉 | 요마: 차시은 2000년대 초 한국영화의 화두 중 하나는 컴퓨터 그래픽이었습니다. 그 역사는 채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적잖은 기술적 축적이 있었고, 테크놀로지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는 콘텐츠만 만나면 폭발력을 지닐 듯했습니다. < 화산고 >(2001, 김태균)는 그 첫 시도입니다. 이후 < 해운대 >(2009, 윤제균 )이나 최근 < 신과 함께 > 시리즈(2018~2019, 김용화 ) 등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의 시작은 <화산고>였던 셈이죠. 무협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을 결합한 이 영화는 어쩌면 반 걸음 정도는 앞서 간 실험이었는데요, 개봉 당시엔 기대만큼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월드 마켓에서 마니아 층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현장 공개는 6월 말, 어느 여름 밤에 이뤄졌습니다. 장소는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도양’이라는 곳이었는데요, 지금은 도로 사정이 나아져서 서울에서 5시간 정도 걸리지만 당시엔 장장 7시간을 가야 했던 곳입니다. 소록도로 가는 배가 떠나는 부두 근처에 있는 어느 폐교에 세워진 야외 세트는 장관이었는데요, 전국을 뒤지며 1,000개에 달하는 폐교를 둘러본 끝에 헌팅한 장소입니다. 운동장 양 끝엔 거대한 조명탑이 있고, 그곳엔 ‘火山’ ‘武’ 같은 한자가 새겨진 붉은 휘장이 걸려 있습니다. 살수차는 지하수를 끌어 올려 폭우를 만들어내고, 카메라는 크레인에 올라가 있었으며, 무술 팀은 끊임없이 와이어를 잡아당기던 분주한 밤 현장이었습니다. 이날 촬영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수학 교사 마방진(허준호)과 주인공 경수(장혁)의 대결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와이어 액션이었는데요, 마방진의 가격에 경수가 하늘로 치솟는 장면 때문이었죠. 허리에 와이어를 매단 경수의 몸이 한 순간에 갑자기 솟구치는 장면을 위해, 카메라 밖에선 무술 팀(이른바 ‘땡김이’)이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와이어를 잡아 당깁니다. 10번 넘는 테이크 만에 OK 사인이 났는데요, 카메라 앵글을 바꿔서 그 장면을 반복합니다. 그때마다 장혁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야 했고요. 마치 <매트릭스>의 한 장면 같습니다. 12개의 살수구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면 ‘우중 액션’이 시작됩니다. 어릴 적 우연하게 뇌전벽력을 맞아 극강투기를 가지게 된 경수. 그는 여덟 번 퇴학을 맞고 아홉 번째 전학으로 화산고에 옵니다. 영화 < 짱 >(1998, 양윤호 ), 드라마 <학교>(1999)로 고등학생 이미지가 강했던 장혁에게 <화산고>는 어쩌면 운명적인 캐릭터였을지도 모릅니다. 마방진 역의 허준호. ‘빌런’ 캐릭터로 허준호만큼 다크 포스를 내뿜는 배우도 많지 않을 겁니다. <화산고>에서도 경수를 압도하는 엄청난 힘을 보여줍니다. 장혁은 경수를 “바보스럽지만 바보는 아닌” 캐릭터로 설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11개월 동안 이어진 촬영은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신인급 배우에게 결코 쉽지 않았는데요, 촬영이 끝났을 땐 마치 학교를 졸업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화산고> 현장에서 와이어는 장혁에겐 마치 신체의 일부와도 같았습니다. 거의 항상 몸에 달려 있었으니까요. 거친 액션을 소화하느라 온몸에 멍이 들었고, 일곱 번 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엔 너무 익숙해져서, 와이어에 매달린 상태에서 자장면을 먹을 정도가 되었다네요. 1997년 어느 공모전에 출품된 시나리오가 하나 있었습니다. <화산고>였죠. 당선되진 않았지만 그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었던 김태균 감독은 원작자 서동헌에게 영화화 제안을 했는데요, 처음엔 직접 연출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하네요. 이후 < 키스할까요? >(1998)을 마친 후 불현듯 <화산고> 시나리오가 떠올라 친구인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에게 제안했고, 2년에 걸쳐 <화산고>를 만들게 됩니다. 촬영에 11개월, 후반작업에 6개월. 당시 한국영화로선 파격적인 제작 일정이었죠. <화산고>의 클라이맥스 액션 신은 마치 서부극을 연상시킵니다. 김태균 감독은 이 대목에 대해 “총과 총의 대결이 아니라 물 싸움으로 변형”시켰다고 설명합니다. <화산고>는 제작 노하우에서 그 어떤 참고 자료도 없었던 영화입니다. 의도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와이어 액션을 위해 홍콩 액션 팀을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컴퓨터 그래픽을 해외 업체에 맡길 수도 있었지만, 모두 국내 인력을 통해 해결했습니다. 그래야 뭔가 쌓인다는 판단 때문이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제작비와 일정이 늘어났죠. “아무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영화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괴로움을 겪었어요. 과연 이 영화를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했죠.” 김태균 감독의 말입니다. 김태균 감독은 <화산고>를 “근사함과 망가짐이 공존하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아주 촌스러운 구석도 있고, 만화적인 톤도 있지만, 근사한 비주얼과 스펙터클이 결합된 영화. 그런 면에서 <화산고>는 거대하면서도 무모하고 한편으론 용기 있는 시도였습니다.
< 기프실 >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오랜 주제였으며 근래에는 다양한 미학적 접근을 통해 문제시되고 있는, 장소 박탈과 기억 투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영주댐 건설이 결정되고 감독의 할머니가 살아온 마을 ‘기프실’은 수몰 지구에 포함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고 감독은 더 이상 생명을 일구지 말라고 경작금지안내판이 붙은 기프실에서의 삶을 쫓는다. 상실이 예정된 이 마을에는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삶의 역사를 담은 공간은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으로서 생의 리듬을 관할하고 관계를 축적한다. 영화는 터전이 되어주는 공간의 의미를 잘 기억하고, 이를 통해 장소 잃은 삶을 질문하기 위한 기록이다. 마을에서는 이런저런 의례가 열린다. 영주댐 착공식이나 자전거 대회같이 관에서 주관하는 행사에는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며 지역의 일을 유용하는 국회의원의 연설이 울려 퍼진다. 반면 곧 폐교되는 평은 초등학교 총동창회 운동회에서는 대선배 졸업생 할아버지가 오랜 추억을 돌이키며 연설을 하고 마지막 초등학생들이 단상에 선다. 운동회는 이제 사라질 마을이 한동네 사람들 공통의 기억을 만드는 곳임을 상기시키는 의식이기도 하다. 한편 할머니의 장례식은 가족의 기억을 갱신하는 동시에 감독이 간직하고 있는 오랜 기억을 불러들인다. 감독은 내레이션을 통해 내밀한 마음을 고백하고, 할머니를 쫓는 그 마음은 마을의 죽음에 대한 불안과도 닿는다. 그 불안은 내가 어떤 존재를 붙잡지 못하고 영원히 상실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례에서 우리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용되는 경박하거나 낯선 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두 의례인 운동회와 장례식에서는 마을 공동의 기억과 한 개인의 기억이 교차하는 터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 기록되는 마지막 의례는 오랜 홈비디오에 담겨 있는 신년 잔치다. 이 홈비디오에서 집의 앞마당에는 웃음을 나누는 가족과 건강한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와 마당을 잃은 가족이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로 또다시 모여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기프실의 기록은 가족사에서 출발하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파괴되는 현장을 보고하고 그곳과 직접 관계를 맺어나간다. 또 감독의 내레이션은 개인에게 고유한 경험과 감정의 영역에서 마을을 상실하는 문제에 접근한다. 사적 다큐나 에세이, 또는 퍼포먼스 등 사회적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여러 층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근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미학적 시도들을 오가면서 <기프실>의 기억은 점점 단단해진다. 영화에서 기억되는 장소란 우선 모이고 쌓이는 곳이다. 터전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의 장소를 잃는 일이며 사람 사이 관계와 역사 지속의 중심을 잃는 일이다. 터전을 잃는다는 것은 삶을 경작하고 수확할 집을 잃는 일이다. 할머니가 무당새로 집에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엄마를 따라 감독의 의식은 돌아올 검푸른 무당새의 날갯짓과 기프실을 떠올린다. 생전에 자주 서던 거울 앞에 한동안 머무는 무당새를 보면서 감독의 어머니는 연신 새가 곱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고운 무당새는 철거된 집과 이윽고 잠기게 될 마을 앞에서 머물 곳을 잃고 헤맬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감독과 노미 할머니의 관계가 관통하고 있다. 노미 할머니와 감독이 누워서 함께 TV를 보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언뜻 의아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인 정보를 전하거나 이야기의 전개를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우리가 쉽게 의미화하기 힘든 집에서의 시간을 담고 있다. 한 공간을 나누는 삶이란 왕왕 별일 없이 흐르는 시간을 공유한다. 이 장면에 앞서 면서기 집 할머니와의 인터뷰 중에도 의아한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할머니만을 담던 화면 중간에 들어오는 그것은 인터뷰 중인 감독을 비롯하여 카메라가 세팅된 전체 모습을 한 화면에 담고 있는 풀숏이다. 꼭 필요한지 묻게 되는 이러한 장면들에는 공통적으로 감독이 스크린에 있고, 그것은 할머니와의 거리를 드러낸다. 오프닝과 엔딩 장면에서도 감독은 기프실의 기록에 등장한다. 감독은 계속 <기프실>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감독은 멀리 바라본 기프실의 풍경에서 시작해 마주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인터뷰를 거쳐 시간을 나누는 관계에 이르렀다. 마을에 쌓인 삶이란 이렇게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품고 있다. 감독은 베이고 절단되어 모래가 흘러내리는 산의 모습처럼 사라져가는 마을 및 개발의 풍경과 대립하여 삶의 장소를 다시 자신의 관계 속에서 복원하고 기록한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감독은 장소를 박탈당한 후의 할머니들을 따라간다. 그리고 영화는 경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증언한다. 기억은 단절되거나 멈추지 않았다. 땅은 댐에 갇혀버렸지만, 기억을 간직한 손길과 발걸음은 안 좋은 토질에서도 험한 비탈길에서도 다시금 경작을 시작하고 있다. 땅에 쐐기 박혔던 경작금지안내판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뿌리 뽑히고, 영화는 상실감 대신 기억의 투쟁을 껴안는다. 이 경작을 응원하는 감독의 퍼포먼스는 기프실과 감독의 거리를 더욱 밀착시킨다. 함께 살아가는 땅을 일구고자 하는 영화의 의지가 앞으로 경작해가야 할 우리의 미래에 기억의 싹을 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