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풍운
- 감독
- 림농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이묵연, 포극, 왕추영, 이힐, 방학근, 주문빈, 풍진주
① 동명극장(東明劇場), 대보극장(大寶劇場) 1923년 조선인상공업자로 구성된 함흥상업회 산하 흥행단체 흥화조합(興化組合)에서 건립한 영화관이다. 연극 공연은 물론 함흥의 대표적인 집회장소로 활용되었다. 함흥의 3개 영화관이 경쟁하던 1932년 당시 동명극장의 입장원은 대인 33,667명, 소인 19,646, 금액 7,563원으로 함흥극장보다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사관과 비슷한 수준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었다. (<咸興三映畵館七年度成績>, 《朝鮮新聞》, 1933.01.20) 1936년 함흥상업회는 흥화조합을 주식회사 동명극장으로 바꾸었다. 당시 극장운영을 맡았던 김영선연예부(金永善演藝部)는 극장 임대료로 한 주당 12원 50전씩 지불했다. ( <분규 거듭하든 동극(東劇) 문제 단락(段落)>, 《동아일보》, 1936.05.19) 1940년 들어서서 동명극장은 대보극장(大寶劇場)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성주(李成周), 지배인은 김하룡(金河龍)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진사좌(眞砂座), 진사관(眞砂館),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 함흥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극장으로 함흥부 본정에 있었다. 진사좌를 운영하던 시마네(敷根角市)는 함흥의 실업인으로 재목점, 운송점과 더불어 진사좌연예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1925년 5월 운영자 시마네(敷根角市)가 기존의 낡은 건물을 수리하여 확장하였다. 1927년 1월 진사좌는 문화연예사 직영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된다. 이때 이름을 진사관으로 바꾸었다. 문화영화사는 경성 희락관 악장으로 이름이 높던 시라이(白石蘇山)와 마츠무라(松村英)가 진사관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眞砂舘の老人優待>, 《朝鮮新聞》, 1927.05.14) 1930년 무렵 진사관의 흥행권을 인수한 쿠니이 (國井勝英)는(<咸興眞砂舘開業一周年>, 《朝鮮新聞》, 1931.05.31) 1931년 5월 개업 1주년을 맞아 낡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1931년 8월 신축 허가를 득하고 공사에 들어가 1931년 11월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6만원이었다. 이즈음 진사관은 쇼치쿠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廣告>, 《朝鮮新聞》, 1933.07.03) 진사관은 1940년대 들어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茂信)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함흥극장(咸興劇場) 1923년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함흥극장이 조직되어 이 자금으로 함흥부 대화정에 건립한 극장이다. 공사비 1만 6천여원이 들었다. 초기 운영자는 타마키(玉置省三)였으며, 1928년 4월부터는 츠지(辻平三)가 1년에 3천원 씩의 임대료를 내기로 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大咸興の展望>, 《朝鮮新聞》, 1933.07.03) 1933년 당시에는 닛카츠와 신코키네마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츠지(辻ヤス子)였으며 고바야시(小林豊三)이 지배인이었다. 총 75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명보극장(明寶劇場) 1940년 함흥부 소화정에 이기진(李基進, 창씨명 芝山基進)이 건립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로 함흥역 가까이 위치했으며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박노홍은 경성의 명치좌에 지지 않는 극장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이기진, 지배인은 다케모토(武本光洋)였다. ⑤ 함흥문화극장(咸興文化劇場) 함흥부 소화정에 있었던 문화영화 상영관으로 객석은 200석이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오쿠야마(奧山歲一)였으며 지배인은 하야시(林英一)였다. ⑥ 원산극장(元山劇場), 유락관(遊樂館) 원산극장은 1921년 9월 원산부 천정(泉町)에 설립되었다. 개관 당시 일본 코우카츠(國活)와 제휴하였다. 이후 연극, 영화의 상영은 물론 각종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나 1925년 11월 15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피해액은 6만 5천원이었다 .(<원산극장 전소(全燒)>, 《동아일보》, 1925.11.17) 원산극장이 있던 자리는 한동안 빈터로 있었다. 후쿠이(福井伊三郞)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유락관이 설립되어 이곳에 극장건립이 추진된다. 1926년 11월 30일 건물이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했고, 1930년 활동사진관 수좌가 등장하여 경쟁체제를 갖추게 되자 닛카츠와 쇼치쿠 등과 계약을 맺고 혁신을 꾀하기도 했다. (<大改革の元山遊樂館披露>, 《朝鮮新聞》, 1930.12.03) 1933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수좌와 합병을 꾀하지만 무산된다. (<元山の兩常設館合併問題具體化>, 《朝鮮新聞》, 1933.10.26) 일제말기까지 원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있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후지사와(藤澤正人)이며 지배인은 고이즈미(小泉昇三)였다. 객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후 신영관(新映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⑦ 수좌(壽座), 대승관(大勝館) 원산부 경정(京町) 36번지에 있던 극장이다. 원산의 토목건축청부업자인 우메다(梅田市治郞)의 주도로 조직된 주식회사 수좌에서 1930년 설립했다. 도아(東亞), 데이키네(帝キネ)의 영화를 상영하며 유락관과 더불어 원산의 양대 일본인 영화관으로 등극했다. 1931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주식회사 유락관과의 합병 문제로 잠시 휴관을 했다. (<元山の毒座>, 《朝鮮新聞》, 1931.06.14) 1933년 주식회사 유락관과 합병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되었고 1935년 6월 21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5년 주식회사 수좌는 소실된 수좌의 재건을 추진한다. 새롭게 건축된 극장의 이름은 대승관(大勝館)이었다. 극장 신축을 위해 주식회사 수좌는 자본금을 12,100원에서 20,000원으로 늘려 주식회사 대승관으로 전환한다. 1943년 당시 대승관의 흥행주는 고이즈미(小泉昇三), 지배인은 요시오카(吉岡玉男)이었다.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⑧ 원산관(元山館) 원산부 북촌정에 건립한 활동사진관으로 1928년 1월 23일 구정을 맞아 개장했다. 1927년 1월, 원산시영회(元山市榮會)의 알선으로 공회당 겸 극장을 짓기로 하고 노기만(盧紀萬) 등 원산 거주 조선인 실업가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주식회사 원산관이 설립을 맡았다 .(<『원산관』 발기>, 《중외일보》, 1927.01.20) 원산관의 흥행주는 보통 주주총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설립 이후 김창준(金昌俊) 등이 맡아 운영했다. (<원산관 쇄신>, 《중외일보》, 1930.03.30) 흥행주인 김창준은 1930년 원산관 산하에 원산관연예부를 조직하여 연극 공연 등을 펼쳤는데 호응이 좋아 인근 함흥의 동명극장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원산관연예부에 초차관(初次舘) 외 출연>, 《중외일보》, 1930.10.04) 1933년 3월 원산관에서는 원산 최초로 토키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자는 김낙진(松平洛鎭)이며 660개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원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⑨ 희락관(喜樂館) 흥남읍 구룡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12월 흥남의 교통사고 기사에서 사상자들이 희락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조선질소비료회사 사택으로 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 관객의 대부분이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사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남 뻐스열차 충돌사건 상보(詳報)>, 《동아일보》, 1938.12.06)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에다(前田長太郞)였으며 지배인은 삼촌건삼이었다. 5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⑩ 흥남관(興南館) 흥남읍 천기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경성 중앙관의 흥행주인 오이시(大石貞七)이며 지배인은 가메야마(龜山嘉介)였다. 총 5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흥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⑪ 소화관(昭和館) 흥남읍 송상리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11월 극단 고협이 이곳에서 공연 중 극장 2층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와타(砥綿啓太), 지배인은 타치바나(立花三郞)였다. 총 87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⑫ 흥남문화영화극장(興南文化映畵劇場) 흥남읍 호남리에 있던 문화영화 전용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도타니(門谷淸), 지배인은 마츠오(松尾辰次郞)였다.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⑬ 용흥극장(龍興劇場) 흥남읍 용흥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野虎雄)였다. 9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단천좌(端川座) 단천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오모토(大元貞珪), 지배인은 시라키(白木義信)이었다. 742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⑮ 단천극장(端川劇場) 단천읍 내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설립자는 함흥출신의 최두진(崔斗鎭)으로 흥행계통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흥행계에 권위 단천극장주 최두진(崔斗鎭)씨>, 《동아일보》, 1939.10.03) 1943년 단천군총력연맹에서 막간 강연을 추진할 장소로 단천좌와 함께 지목된 곳이다. 하지만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영화관이 아닌 연극장으로 구분되었거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⑯ 혜산극장(惠山劇場) 혜산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安田隆一)이며 객석수는 455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신포극장(新浦劇場) 신포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야마(中山賢一)이며 객석수는 400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고사관(高砂館) 북청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康弘)이며 좌석수는 489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홍원좌(洪原座) 홍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홍춘선(洪春善, 창씨명洪村春善)이며 4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⑳ 흥락관(興樂館), 고원극장(高原劇場) 흥락관은 고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1936년 12월 23일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 등이 합자하여 7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만들었다. 고원을 대표하는 장소로 뒷날 고원극장(高原劇場) 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교우코쿠(岐谷亮吉)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1. 삼우회관(三友會館) 천내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노(水野長一郞)이며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2. 영흥극장(永興劇塲) 1935년 10월 12일 영흥군에 건립된 극장으로 개관 당시, 함흥의 동명극장을 경영하던 김영선연예부가 운영을 맡았다 .(<영흥극장 수(遂) 개관>, 《동아일보》, 1935.10.13)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연극장으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매일신보≫, 1936.12.29. 고원(高原)에 극장, 입삼일(廿三日) 개관 【고원】 약진도상에 잇는 고원은 발전 여지가 풍만하여 점차 도시의 기풍을 정(呈)하고 잇다. 그러나 아직 오락기관이 업서 간혹 순업흥행단이 차저주면 일대(一大) 울회(鬱懷)를 느끼든 시민의 위안이나 되엿지만 겨우 가설극장에서 풍우설한(風雨雪寒)이면 불편무비(不便無比)하든 바 시내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씨 등 유지 제씨가 합자하야 약 七천여원의 경비로 흥락관(興樂館)이란 극장을 건축하엿는데 거(去) 二十三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동일(同日)부터 三일간 개관기념을 하게 되여 매야 입장객에게 추첨권까지 배부하여 좌기와 여(如)한 경품을 수여하엿다. 一등 一인 백미 一叺 二등 一인 궤종시계 一座 三등 一인 경대 一座 (사진은 건축된 흥락관) [자료] ≪朝鮮新聞≫, 1931.06.14. 元山の壽座 開館に决定 (元山)元山壽座は活動常設遊樂館に對抗し優秀な活動や芝居等を上映興業してフアンを喜ばせるたが突如休館遊樂館に合倂問題が起り一時は一般から成行を注視されてるたが重役會議で開館續行に決定し今後三村敏郞氏が經營の任に當り從來の東亞,帝キネの外新に日活とも特約嶄新なる映畵を上映してフアンの待望にそひ開館隆盛を期することゝなつた [자료] ≪중외일보≫, 1927.01.26. 본보(本報) 독자위안(讀者慰安) 대흥행, 함흥 진사좌(眞砂座)의 개관 기념 함흥에 잇는 극장의 효시로 일반사회에도 공헌이 만튼 진사좌는 근래에 미미(微微) 부진 중에 잇든 바 래(來) 二十五일부터 문화연예사의 직영으로 상설관이 되얏는데 기(其) 벽두로 래(來) 二十五일 야(夜)에는 봉황의 면류관을 봉절할 터이라 하며 래(來) 二十七일 오후 七시반부터는 본보 독자를 위하야 三일간 무료로 흥행하리라는데 단(但) 하족료(下足料)만 받으리라더라(함흥) (우대권은 欄外에) [자료] ≪시대일보≫, 1925.11.20. 원산극장 전소(全燒) 손해(損害) 六만원 【원산】 원산 오락기관의 하나로 또 원산의 유수한 건물인 원산극장은 十五일 오전 三시 四十분에 발화되어 소방대의 전력을 빌엇으나 겨우 五시 三十분에 소화되어 극장은 전소되고 인가(隣家) 二三동까지 소화되엇는데 손해는 약 六만원이라고 [자료] ≪매일신보≫, 1918.10.29. 함흥 활동상설 개관(活動常設 開館) 금춘(今春) 이래 신축 중이던 만세관(萬歲館)은 유유(愈愈) 기(其) 내부의 설치 등이 완성되야 十월 二十五일 야(夜)부터 개관한바 비상한 호평을 박(博)하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5.03.12. 동명관(東明舘) 기념 【함흥】 함흥부 내에서 오직 하나만인 군선인 경영 영화상설관인 동명극장(東明劇場)은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야 이제 개관 八개년 기념으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지난 九일 함흥 일반 유지를 춘경원(春慶園)에 초대하야 간담회를 개최하고 고급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개하엿다는 바 지금은 함흥부내에서 다른 영화관에 손색이 없을만큼 모든 설비를 하엿다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0.04.28. 흥남에 각 극장 수입, 四개월간 六만여원 【흥남】 지난 四월부터 七월까지 四개월간 흥남읍내 각 연극장에서 흥행한 활동사진과 연극들의 관람료금을 조사한 통게 수자는 六만四천五백六원 五十전으로 이에 대한 인원수는 一六六,七三二명이라 한다. 작년 동기에 비하면 약 二활 증가라 한다.
① 평양가부키좌(平壤歌舞伎座), 금천대좌(金千代座) 평양가부키좌는 1910년대 초반 평양 수정(壽町)에 설립된 극장이다. 가부키 공연용 극장으로 규모가 웅장한 건물이었다. 1914년 6월 이곳에서 활동사진이 상영된다는 기사가 발견된다. (<演藝界>, 《每日申報》, 1914.6.9) 1923년 가부키좌는 시설이 낙후하다는 이유로 사용중지 명령을 받고 철거되었다. 1924년 평양의 양조회사인 제등주장(齊藤酒場)의 사이토(齊藤久太郞)가 주도하여 가부키좌가 철거된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하고 그 이름을 제등주장의 명주인 “금천대”라는 이름을 가져와 금천대좌라 정한다. (<平壤に大劇場新築>, 《朝鮮新聞》, 1924.09.23.) 2년에 가까운 공사 끝에 1926년 6월 완공되었다 .(<近く竣工する平壤の金千代座>, 《朝鮮新聞》, 1926.06.28) 해방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평양을 대표하는 연극극장이었다. ② 평안극장(平安劇場 ) 침동(砧洞)이라 불리던 평양 남문통 2정목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4년 12월 30일 개관했다. (<광고>, 《매일신보》, 1914.12.27) 1915년 7월 위생강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衛生講話場所>, 《每日申報》, 1915.07.23) 같은 해 10월 30일부터는 조선인 전용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평양 상설활동>, 《매일신보》, 1915.11.02) 1919년 2월에는 종래의 5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던 것을 3일 간격으로 교체하기로 한 내용이 보도 되었다. 1922년 8월 무렵까지 운영이 확인된다. (<반도 고학생 착발>, 《동아일보》, 1922.08.27) 그 무렵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③ 해락관(偕樂館) 1921년 5월 1일 평양부 수정에 설립된 활동사진관이다. 설립자는 평안남도 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직을 맡고 있던 구보(久保順吉)이다. (<평양 해락관 개관식>, 《동아일보》, 1921.05.10) 평양의 대표적인 활동사진으로 인정받던 해락관은 1937년 12월 총 공사비 30만원의 비용을 들여 신시가인 앵정 8번지로 이전 신축되었다. (<평양 해락관 신축코 낙성>, 《동아일보》, 1937.12.2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구보(久保兵二郞), 지배인은 오카(岡妻男)이다. 좌석수 90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제일관(第一館),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 제일관은 평양부 수옥리에 자리한 영화관으로 1923년 3월 4일에 건립되었다. 설립자는 평양상업회의소 부회두인 박경석(朴經錫)이었다. 이 극장은 평안극장이 사라진 이후 설립된 평양의 대표적인 조선인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1941년 무렵에는 박경석의 일가로 보이는 박순옥(朴淳玉)이 관주를 맡았다. 이후 제일관은 이름을 명성영화극장(明星映畵劇場)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순옥(창씨명 木山淳)이었으며, 지배인은 박종식(창씨명 木山宗植)이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⑤ 평양키네마(平壤キネマ), 사쿠라극장(さくら劇場) 평양키네마는 1924년 평양부 앵정 53번지에 설립된 영화관이다. 설립주체는 주식회사 평양키네마로 평양상업회의소 상무위원을 역임한 오쿠타(奧田延之助)를 대표로 한 자본금 10만원 불입금 2만 5천원의 주식회사였다. 개관 당시 평양키네마에서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유명 변사 이코마 텐라이(生駒天雷)를 고빙해 오는 등의 활약으로 일약 해락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관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1928년 3월 5일 극장 내에서 발화한 화재로 극장 일부가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나 한동안 극장운영을 쉬기도 했다. 1943년 4월 1일을 기해 ‘미영색채 일소’를 위해 평양키네마라는 명칭을 사쿠라(櫻, さくら)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모리(森鍬市)이며 지배인은 시게마츠(重松安紀)이다. 좌석수는 367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욱좌(旭座) 1924년 10월 15일 평양부 욱정 13번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약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설립 당시 조합장은 부협의원인 松尾六郞이었다. 개관 직후부터 경영난에 봉착하였는데 1926년 3월 16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대중극장(大衆劇場), 평양동보극장(平壤東寶劇場) 대중극장은 1937년 평양부 앵정 7번지에 설립되었다. 마루야마(丸山花)라는 일본인이 세웠다. 해락관과 이웃하고 있었다. 도호(東寶)영화의 개봉관으로 활용되면서 이름을 평양동보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ハナ), 지배인은 아사이(淺井正夫)였다. 좌석수는 904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다시 대중극장으로 바꾸었다. ⑧ 평양영화극장(平壤映畫劇場) 평양부 수정 82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평양매일신문, 지배인은 사사키(佐々木惣次郞)이며 669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⑨ 화산좌(花山座) 평안남도 진남포부에 세워졌다. 1916년 5월 매일신보사의 순회 활동사진 상영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즉위례대성의(卽位禮大盛儀)의 활동사진>, 《매일신보》, 1916.05.25) 이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⑩ 항좌(港座), 항극장(港劇場) 항좌는 1919년 10월 평안남도 진남포부 용정정에 설립되었다 .(<남포 항좌 삼년 기념>, 《매일신보》, 1922.10.14) 1937년 중락관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진남포의 유일한 상설관이었다. 1938년 9월 무렵까지 항좌라는 이름으로 존속이 확인 된다. 1930년대 말기에 항극장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부치(田淵哲次郞)이며 지배인은 시미즈(淸水健)이었다. 좌석수는 776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⑪ 중락관(衆樂觀) 진남포부 후포정 27번지에 있었다. 1937년 진남포의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이 세웠다. 철골콘크리트 건물로 된 지상 3층, 지하 1층의 현대식 건물로 총 900여평에 달하는 거대한 영화관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이근(창씨명 大利根進), 지배인은 핫포(八方勝)이다. 총 886석의 좌석을 갖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순천극장(順川劇場 ) 평안남도 순천읍에 있던 극장이다. 1935년 3월 빈민구제를 위한 자선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린바 있다. (<순천 동정음악 오십여원이 수입>, 《동아일보》, 1935.03.02.) 이를 통해 볼 때 1935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장현택(張賢澤)이며 3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다음, 평안북도의 극장은 아래와 같다. ⑬ 신극장(新劇場), 신영극장(新映劇場) 신의주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히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5월 경성일보 애독자 위안 활동사진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으며 (<광고>, 《경성일보》, 1922.05.16) 1923년 7월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교포학생들의 환영행사,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 활동사진 상영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관객 대상의 대표적인 극장이던 신극장은 1940년대 신영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인다. 1939년 신의주 지역 국방헌금 납부 내역에 신극장의 이름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9년까지는 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던 것 같다. (<신의주 국방 헌금>, 《매일신보》, 1939.07.14) 1943년 현재 신영극장의 흥행주는 임경범(林京範), 지배인은 마츠바라(松原寬)이었다. 좌석수는 522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상반좌(常磐座) 신의주에 있던 활동사진관으로 정확한 존속기간은 알려지지 않았다. 1922년 7월 경성일보 애독자위안 활동사진회 (<광고>, 《京城日報》, 1922.07.10) 와 1923년 12월 도청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6월 정주음악대교육활동사진반의 활동사진상영회와 (<정주악대 내신(來新)>, 《시대일보》, 1925.06.18) 같은 해 8월 열린 수해 관련 활동사진상영회의 기록이 남아 있다. (<七일 신의주에 수해영사 공개>, 《시대일보》, 1925.08.07) ⑮ 신선좌(新鮮座) 1927년 10월 1일 신의주 매지정(梅枝町)에, 일본인 히라바야시(平林正)와 조선인 이태영(李泰永), 고성건(高成建) 등이 1만원을 출자하여 설립했다. 연극과 영화를 두루 공연하던 곳이다. 1933년 12월에는 극단 신무대 공연 중 무대 막에 불이 붙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동아일보 주최 독자위안행사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와타나베(渡邊治太郞), 지배인은 다무라(田村直太郞)였다. 좌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세계관(世界館) 신의주부 상반정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3년 12월 도청 이전 축하회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 기록이 있다. (<축하회의 여흥>, 《동아일보》, 1923.12.06) 1927년에는 일본인 변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관주는 이시하라(石原)였다.(<변사 태업, 대우 개선 요구>, 《동아일보》, 1927.02.23) 1930년대 중반 관주 노다(野田白水)가 사망하면서 부인 기미코가 운영했는데, 그녀는 매월 26일 하루치 수입을 빈민구제에 기부하는 등 선행을 통해 큰 칭송을 받았다. (<세계관주 미거(美擧)>, 《동아일보》, 1935.05.06)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노(中野キミ子), 지배인은 이케하타(池畑晉造)였다.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선천극장(宣川劇場) 1932년 12월 평북 선천읍 본정에 사사키운송점을 경영하던 사사키(佐々木光藏) 등 수 명이 세운 극장이다 .(<선천극장 신축 낙성식 거행>, 《매일신보》, 1932.12.1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케시마(武島壽吉), 지배인은 카나자와(金澤二鳳)였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정상극장(定商劇場) 1923년 무렵 평북 정주읍에 설립된 극장으로 정주수해구제연예와 국민협회순회강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진 기록이 있다. 1935년 정주유학생회의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기록 (<정주음악연주>, 《동아일보》, 1935.08.10) 을 마지막으로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⑲ 정주극장(定州劇場) 평북 정주군 정주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5년 1월 31일 구기회 주최 소인극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이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주 구기(救饑) 연극>, 《동아일보》, 1925.02.04)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케다(池田寅雄)이며 좌석수는 500석이었다. ⑳ 북진극장(北鎭劇場) 평북 운산군 북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우미하라(海原正植)였다. 박노홍은 그를 창씨한 조선인이라 했다. 좌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㉑ 의주극장(義州劇場) 평북 의주읍 동부동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가네다(金田孝兵)였다. 좌석수는 350석이었다. ㉒ 강계극장(江界劇場) 평북 강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0년 7월 31일 배우 왕평이 이 극장에서 공연 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최후의 무대˝-왕평군 공연 중 급사>, 《매일신보》, 1940.08.02)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니시쿠라(西倉高盛)이며 8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㉓ 만포극장(滿浦劇場) 평북 강계군 만포읍에 있던 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수헌(창씨명 金津守憲)이며 지배인은 마츠다이라(松平哲夫)이다. 좌석수는 620석이었다. * [사진](상단) 근천대좌 낙성 당시 기사 사진(조선신문 1926.07.18) [자료] 《朝鮮新聞》, 1926.07.13. 壯麗を極むる 金千代座落成 勘彌一行を招聘して 十八日より舞臺開き 平壤壽町の中央に一昨年九月より建築工事を進め來つた劇場金千代座は此程愈愈落成を告げ來る十八日に盛大なる落成を擧ぐる事となつた同座は淸酒金千代釀造元の齊藤氏が平壤に娛樂機關としての劇場なきを憂ひ十萬圓の巨費を投じ財界不況の折柄にも拘らず犧牲を見込んで建設に着手したもので建坪二百七坪の煉瓦建ての高壯華麗なる場內の設備整頓せる慥に滿鮮一を以て誇るに足る大劇場である舞臺開きに招聘せられた守田勘彌一行は十七日に乘込み十八,十九の兩日間花花しく開演する事となり久方振に名優を迎ふる事とて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から二千餘名を收容し得る大劇場も大入滿員の盛況を見るであらうと豫想されてゐる(平壤) 寫眞は=新裝なつた平壤の劇場金千代座 [자료] 《朝鮮新聞》, 1926.07.18. 平壤金千代座 落成式に續いて 舞臺開き興行 內外の設備完成し平壤市街に一偉觀を添へた劇場金千代座は愈愈十八日午後二時より落成式を擧ぐる事となり座主齊藤久太郞氏は官民多數に案內狀を發したが招聘された帝劇俳優の守田勘彌一行の柿葺落興行は落成式擧行後引續き開演の筈で非常な人氣を呼んで居る(平壤) [자료] 《朝鮮新聞》, 1924.10.18. 旭座柿葺落し 平壤旭町に建設中の劇場旭座は內外の設備全く完成したので十五日正午平壤官民有志を招待して柿葺落しの式を擧げた神官の修○終りて松尾創立委員長の挨拶長富委員の工事報告に次で宮館府尹來賓を代表して一場の挨拶を述べ夫れより開宴京阪女歌舞伎一座の餘興劇あり盛況を極めた(平壤) [자료] 《동아일보》, 1921.05.10. 평양 해락관(偕樂舘) 개관식 조선에 제이 도회라 칭하는 대도회로서 상당한 오락장소가 무(無)함은 유감(遺憾)이라 하야 평안남도평의원과 상업회의소 의원의 공직을 가진 당지 유력자 구보순길(久保順吉)씨의 경영으로 평양 구시가의 중심 되는 수정(壽町)에 일대 활동사진 상설관을 건설하고 차(此)를 해락관(偕樂館)이라 하엿는데 차는 작년 八월부터 기공하여 대판(大阪)에서 전문기사를 초빙하야 관내외를 최신식으로 건축한바 세멘트와 연와제로 하고 정원 一천명을 수용할 대건물인대 금번 준공되엿슴으로 거 七일 오후 二시부터 시내 각 관공직자와 신문기자 급(及) 유력자를 초대하야 개관피로를 하여 활동사진 시영(試映)을 하엿더라. 그런데 당일 관주 구보(久保)씨의 례사(禮辭)가 잇슨 후 楠野 평양부윤의 축사와 松井 평양상의회두와 長谷川 평남매일사장의 축사가 유(有)하얏다더라. (평양) [자료] 《동아일보》, 1937.07.02. 남포의 영화 전당 중락관(衆樂舘) 낙성, 총공비 二十만원 【진남포】 전조선을 통트러 비겨보아도 제일 첫손가락으로 꼽힐만한 대중영화극장(大衆映畵劇場) 중락관(衆樂館)이 진남포 한복판인 후포리(後浦里)에 그 위관을 나타내고저 지금 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잇다. 이 극장인즉 진남포 실업가 서이근(徐利根)씨의 장남 서기선(徐基善)씨가 문화사업(文化事業)을 하랴면 어떤 것이 조을 것인가 하고 다년 연구한 결과 육만 인구를 갖고 잇는 대도시 진남포에 정원 겨우 사백명밖에 못되는 극장 단 하나로서는 부 체면 상으로나 부민의 위안 처소인 오락기관으로 보아 도저히 그저 볼 수 없다고 해서 작년 五월에 인가를 얻어 각 방면으로 조사를 거듭하야 외관이며 내용이 다 가치 정묘하게 설게하여 금년 三월에 비로소 공사에 착수한 이래 그 공사를 착착 진행하는 중이다. 이제 이 중락관의 대개를 소개하면 구조는 철골 콩쿠리-트로 지하실을 합하야 四층 총평수 九百여평 정원 一千五百명의 대건물로 총공사비 二十만원을 요하며 영사기(映寫機)는 R·C·A발성기(發聲機) 중에도 최고급형(最高級型)으로 조선에는 처음 장치되는 것이라 한다. 오는 가을까지 기어코 완성케 하도록 주야 겸행으로 공사를 진행시키고 잇는 중인데 이 극장이 준공되는 날에는 진남포 시가에 일대 위관이 될 것은 물론이오, 영화전당으로 민중을 위하야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일반은 크게 기대하고 잇다.
대구에는 1910년 이전 달성관(達城館)이라는 연예회장이 있었다. 극장이라기보다는 각종 집회와 연회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1912년 폐관되었다. 그 외에도 대구 서문과 북문 밖에는 가설극장들이 존재했으며 금정(錦町)의 금좌(錦座)와 대화정의 낭화관(浪花館), 대구구락부와 같은 활동사진이 상영되던 극장이 있었다. 1910년대 후반 이후 대구지역의 극장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① 칠성관(七星館), 대송관(大松館), 만경관(萬鏡館), 대경관(大鏡館), 호락관(互樂館) 대구부 촌상정(村上町)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6년 후루가와(古川文之助) 등이 청원하여지어졌다. 1922년 무렵 칠성관은 대송관으로 바뀌었다. 이후 대송관은 대영관(大榮館)에 인수되어 제2대영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8년 만경관(萬鏡館)을 운영하던 이제필이 만경관이 화재로 소실 된 후 대송관(제2대영관) 건물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했다. 이후 만경관이 신축되자 이제필은 이곳을 대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영화 대경관 신설>, 《동아일보》, 1929.01.02) 이제필이 운영하던 대경관은 1933년 8월 12일 윤무용(尹武用), 김상덕(金尙悳), 김파영(金波影) 등의 경영진 하에서 다시 이름이 호락관(互樂館)으로 바뀌었다. 1938년 시설 낙후 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② 대구좌(大邱座), 대구극장(大邱劇場) 대구좌는 대구부 전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용산의 앵좌(櫻座)를 이전하여 건설한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던 대극장이었다. (<대구좌 신축 신보(新捗)>, 《조선시보(朝鮮時報)》, 1918.04.27) 1918년 5월 말 대구기업주식회사에서 세웠다. 극장의 운영은 나카무라(中村喜一)가 맡았다. 1925년 봄 야마네(山根初太郞)가 대구좌의 운영을 맡아, 외관과 내부를 수리한 후 9월 재개장 했다. 이 무렵 대구좌라는 명칭 대신 대구극장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대구극장은 경성의 부민관이나 평양의 금천대좌와 같이 다목적 회관의 성격을 지닌 극장으로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조선관(朝鮮館), 만경관(萬鏡館) 조선관은 대구부 경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이다. 1920년 대구의 전당포업자들의 모임인 십일회(十日會)와 대구좌(大邱座) 주인 나카무라(中村喜一), 조선인 배모(裵某)가 합작하여 만든 극장이었다. (<대구에 극장 신설>, 《매일신보》, 1920.02.26) 하지만 건립 직후 화재로 사라졌다. 1922년 8월 조선관이 있던 자리에 만경관(萬鏡館)이라는 새로운 극장이 지어졌다. 삼층의 벽돌 건물로 대구지역의 대표적 조선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었다. 192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만경관의 흥행을 맡아하던 이제필은 대송관(大松館)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갔다. 1929년 화재로 사라졌던 만경관이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만경관의 흥행주는 니시야마(西山吉五郞)이며, 72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④ 대영관(大榮館), 소명관(昭明館), 신흥관(新興館),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 대영관(大榮館)은 대구부 전정 14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으로 1921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대영관은 소명관(昭明舘)으로 관명이 바뀌었으며, 1931년 4월에는 신흥관(新興館)으로 다시 바뀌었다. 신흥관은 1939년 6월 문을 닫았다. 18년 전 지어진 건물이라 시설이 낙후하였기 때문이다. 1940년 7월 5일 시마다(島田金四郞)가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을 설립했다. 신흥관의 흥행권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1943년 현재 대구송죽영화극장의 흥행주는 이토(伊藤勘吾)이며 객석 수는 570석이었다. 해방 후 대구동보극장(大邱東寶劇場)으로 바뀌었다. ⑤ 영락관(永樂館) 1930년 무렵 대구부 전정(田町) 11번지에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인 영락관(永樂館)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당시 경영자는 나가오(長尾喜重郞)이었다. 1934년 영락관을 운영하기 위해 주식회사 대구영흥상회(大邱映興商會)가 조직되었다. 1936년 여름 시설을 크게 개선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송전극장으로 바꾸었다. ⑥ 대구키네마구락부(大邱キネマ俱樂部), 대구보총극장(大邱寶塚劇場) 대구부 동성정 2정목 88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대구키네마구락부는 1938년 호락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1940년 이름을 대구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950석에 달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는데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립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⑦ 김천좌(金泉座), 김천극장(金泉劇場) 김천좌는 1910년대부터 흥행장으로 활용된 경상북도 김천의 극장이다. 정확한 설립연대와 설립자는 알 수 없다. 1925년 무렵 낡고 협소한 공간이 문제가 되어 당시 관주인 후쿠시마(福島格一)가 영업을 중지했다. 대신 1923년 잠시 문을 열었다가 문을 닫은 활동사진상설관 조선관(朝鮮館)의 건물을 인수받아 영업을 이어갔다. (<金泉唯一の娯楽塲>, 《朝鮮新聞》, 1925.08.22) 1938년 김천읍내 유지들로 구성된 경북흥업주식회사가 김천좌의 흥행권을 인수한 후 성내정의 부지를 매수하여 그곳에 극장을 신축하게 된다. (<경북흥업 신축 재이(在邇)>, 《동아일보》, 1938.02.24)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김천극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노(佐野秋千代), 지배인은 타니히치(谷久平)이다. 객석 수는 800석이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⑧ 영일좌(迎日座) 포항극장(浦項劇場) 1920년대 포항에는 영일좌(迎日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언제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영일좌에 이어 들어선 극장이 포항극장이다. 1936년 포항읍 대정정에 들어섰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마노우치(山之內學)이며 객석 수는 597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영천극장(永川劇場) 경북 영천읍 창구동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34년 무렵 신문지상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하라(安原在玉)이며, 객석 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⑩ 상주좌(尙州座), 상주극장(尙州劇場) 경북 상주읍 서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쿠쇼쿠(拓植光太郞)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⑪ 예천극장(醴泉劇場)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8년 1월 영업을 시작했다. 설립자는 예천 청년 김위진(金渭鎭)으로 1만 1천원의 비용을 들여 완성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위진(창씨명 正木渭鎭)이며 객석은 총 400석이었다. ⑫ 청도회관(淸道會館) 경북 청도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하라(大原基一)이다. ⑬ 안동극장(安東劇場) 경북 안동읍에 있었다. 1939년 무렵 개관을 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는 권투경기가 자주 열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가노(中野文雄)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⑭ 경주극장(慶州劇場) 경북 경주읍 동부리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8월 19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경주 학교조합관리자 기노시타(木下宇平)이다. (<慶州劇塲竣工>, 《朝鮮新聞》, 1928.8.17) 경주지역의 유일한 흥행장으로 연극, 영화의 상연은 물론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39년 9월 17일 흥행주 기노시타(木下淸)가 낡고 좁은 건물을 증축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노시타(木下淸)이며 객석 수는 350석이다. ⑮ 대인좌(大仁座) 구룡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32년 11월 20일 설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다(多田仁助)이며 객석 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영주극장(榮州劇場) 영주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로타(廣田且吉), 지배인은 야스다(安田浩三)였다. 객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강구회관(江口會館) 강구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후지하라(藤原英一)였다. ⑱ 의성회관(義城會館) 의성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라노(平野文雄)이며, 객석 수는 600석이었다. [자료] 《朝鮮新聞》, 1928.08.17. 慶州劇塲竣工, 十九日落成式 (慶州)篤志家木下宇平氏は前學校組合管理者にして地方發展の爲慶州劇場建設を計畫し愈愈日頃竣工し上つたので新築落成式を兼ねこけら落しを擧行する事となり內地より松島家松鶴一座を招聘し來ろ19日午後3時より落成式を擧げ引續き6時から招待演劇を開幕すぺく多數各方面に夫夫招待狀を出しをりつあり [자료] 《매일신보》, 1940.11.11. 감포극장(甘浦劇場) 전소(全燒) 【경주】 감포극장(甘浦劇場)은 지난 八일 오전 二시경에 전소하였는데 원인과 손해는 방금 당지 주재소(駐在所)에서 조사 중이라는데 동 극장은 十여 년 전에 건축한 二층으로서 손해는 대략 三천원가량이라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27.05.19. 대구의 대극장, 만경관(萬鏡舘) 전소(全燒), 십팔일 새벽에 불이 낫다 【대구지국특전】 대구에 잇는 죠선인 죠합 조직의 활동사진상설관 만경관(萬鏡館)은 젼에 불탄 극쟝자리에 새로 셰운 남선유일의 큰 극장이엇섯는대 십팔일 새벽 돌연이 불이 나서 대구 시내의 소방대는 일제히 츌동하야 진화에 노력하야 연소는 없섯스나 만경관은 젼소되고 악긔와 및 비품도 젼부 소실되고 마랏다는대 진화는 오젼 여섯시경이었다. 손해는 오(五)만원, 원인은 실화인 듯 츌화한 원인에 대하야는 아직 조사 즁이나 삼층 우에서 발화되듯하다 하며 손해액은 젼부 오만원 이상에 달하겟고. 보험에는 삼만원 드러잇다고 한다. 만경관은 최근에 신츅된 남션 유수한 극장이다. [자료] 《동아일보》, 1922.06.28. 대구 이오극장(二五劇塲) 신설 대구부 경정(京町) 一정목 전(前) 조선관(朝鮮館) 기지(基址)에 대구 유력자 十二인이 합명하야 극장을 건설하고 기(其) 명(名)을 이오관(二五館)이라 하야 활동사진 ᄭᅡ 지 겸영(兼營)하리라더라.(대구) [자료] 《동아일보》, 1939.09.20. 경주극장 신장(新裝), 거(去) 십칠일부터 개관 【경주】 二만여 읍민의 유일한 관극장소인 경주극장(慶州劇場)은 과거에 넘우 자리가 협소하야 왜지의 큰 흥행단체도 흥행 “코-수”에 엇지안코 통과하는 일이 만흘뿐덜어 또한 조곰 조흔 극이 오면 즉시 만원이 되어 일반의 관극 상 불편이 적지 안엇는터인데 금번 극장주 목하청(木下淸)씨가 다대한 돈을 엇고 수리를 시작하야 낭하를 물리이고 장내를 확장하는 등 어느 정도의 신장을 보이게 되엇다. 그동안 근 수십일을 두고 휴업중에 잇든 경주극장도 지난 십칠일 밤부터 참신한 면목으로 손의 앞에 개관케 되엇다. 앞으로 속속 조흔 흥행물을 골나서 관중을 마즈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8.01.12. 예천극장 개관 【예천】 예천 지방에서 일반이 갈망하든 극장은 예천읍 발전 상 긴요한 숙제이든바 당지 청년 김위진(金渭鎭)씨의 노력으로 一만 一천여원의 금전과 五개월의 시일을 소비한 결과 지난달에 준공하고 그동안 모든 설비도 완비되엇으므로 신년 벽두를 기하야 지난 五, 六 양일간 주야겸행으로 일반에게 피로 공개한바 연일 초만원의 성황이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1.02. 영화 대경관(大鏡館) 신설 대구의 상설영화 만경관은 연전(年前)의 화재를 당한 후, 당시 경영자 이제필(李濟弼)씨는 촌상정동(村上町洞) 대송관(大松館) 집을 빌어 만경관 이름을 보게(保揭)하고 이래 적극적 노력을 하야 오든 바 금번 경정(京町) 소지(燒址)에 신관이 재성(再成)되고 신경자(新營者)가 현출(現出)됨으로 씨는 종래의 만경관 명을 해관(該館)에 양환(讓還)하는 동시, 신년 一월 一일부터 종래 씨의 경영하든 바 만경관은 『대경관』이라 개칭하야 더욱 확충에 진력하겟다는 바이로서 대구에 영화상설관은 양처(兩處)가 된다더라. 【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