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기관차
- 감독
- 안드레이 곤잘롭스키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존 보이트, 에릭 로버츠, 레베카 드 모네이, 카일 T. 헤프너, 존 P. 라이언, T.K. 카터, 케네스 맥밀란, 스테이시 피크렌, 월터 와이엇, 에드워드 번커, 레이드 크뤽샹스
어두운 도시. 밤 12시가 되면 모든 게 멈추고 모두가 잠든다. 신데렐라 속 마법처럼 자정은 환상이 깨지는 시간이다. 깨어있는 건 기억을 잃고 벌거숭이로 호텔 방에서 발견된 남자와 그런 그에게 전화를 걸어 도와주겠다고 사정하는 말더듬이 박사, 그리고 창백한 안색에 검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수수께끼의 대머리 집단뿐. 그 멈춰버린 시공간에선 은밀하게 거대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잠든 도시를 동분서주하는 남자의 이름은 존 머독.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누명을 뒤집어쓴다. 존의 뒤를 집요하게 뒤쫓는 건 시니컬한 형사와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옷의 대머리 사내들. 그가 기억에 한발 한발 접근할수록 그들의 방해도 더욱 직접적이고 거칠게 다가온다. 우연히 도시가 조용히 ‘튜닝’되어지는 걸 목도한 존은 박사의 도움을 얻어 도시를 깨우고 광명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어두운 도시 알렉스 프로야스의 < 다크 시티 >는 저주받은 걸작이다. 기존의 온갖 SF 컨벤션들과 만화적 설정을 가져와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비전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고 사유적인 재미를 선사한 결과물은 상당히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프란츠 랑의 < 메트로폴리스 >나 < M >을 떠올리게 만드는 누아르적인 스타일뿐만 아니라 오토모 카즈히로의 < 아키라 >와 같은 재패니매이션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만화적 비주얼까지 결합시킨 이 잡탕의 영화는 이미 봤지만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작품을 창출해냈다. ‘위대한 영화’의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를 그 해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선택했으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비슷한 주제와 분위기를 가진 < 매트릭스 >보다 <다크 시티>를 먼저 뽑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매트릭스>는 이 영화의 자양분 위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다크 시티>의 세트를 가져다 일부 장면을 촬영했으니 기시감이 생기는 것도, 유사점이 발견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장대한 스케일과 허를 찌르는 상상력으로 중무장한 SF 누아르임에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2,700만 달러의 예산이 투입됐지만 흥행엔 처참히 실패하고 만다. 제목처럼 어둡고 지나치게 무거운 탓 외에 개봉한 지 2개월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극장가를 맹폭한 < 타이타닉 >이라는 거대한 빙벽 때문이었다. 스틸 어레이란 독특한 영상기법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매트릭스>와 달리 <다크 시티>의 비주얼은 초라한 예산에 걸맞게(!) 아날로그적이며 투박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를 완벽하게 커버해준 건 바로 음악, 트레버 존스의 압도적인 사운드트랙 덕택이다. 남아프리카의 오래된 영화관 맞은편에 살며 이미 어린 시절부터 영화음악이 가진 힘과 매력에 경도돼 장래희망으로 영화음악가를 지망했던 이 조숙한 소년은 영국으로 건너가 12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존 부어맨 감독에게 발탁돼 바그너와 칼 오르프의 클래식 사이에 들어갈 부분적인 스코어를 작곡하게 된다. 그러나 그 대가들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솜씨를 발휘한 존스는 이후 < 폭주기관차 >나 < 라스트 모히칸 >, < 클리프 행어 > 등 굵직굵직한 작품에서 가슴에 각인되는 테마들로 자신만의 족적을 뚜렷하게 남기며 과거 바람대로 성공한 영화음악가의 길을 걷는다. < 노팅힐 >이나 < 니키와 지노 >, < 로잔나 포에버 > 등 서정적이고도 아름다운 사운드도 일품이지만, 뭐니 해도 그의 진가가 유난히 발휘되는 장르는 < 프롬 헬 >이나 < 미시시피 버닝 >, < 엔젤하트 > 등과 같은 다크한 스릴러나 < 다크 크리스탈 >, <대마법사 멀린>, <클레오파트라>, < 젠틀맨 리그 > 등과 같은 시대극/판타지 계열에서였다. 단선적인 일렉트릭 사운드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사적이고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구사하되 감상적으로 빠지지 않는 절제되고 냉철한 시각은 그를 여타의 영미권 작곡가들과는 확연하게 구분 짓게 만든다. 트레버 존스 <다크 시티>는 그런 트레버 존스의 잿빛 색채감이 잔뜩 묻어나는 스코어로 여태껏 나온 그 어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육중하고 파워풀한 쾌감을 선사한다. 마치 트레일러를 잔뜩 싣고 달려오는 화물열차를 바로 코앞에서 마주친 것과 같은 압도적인 위용의 사운드인데 둔탁한 무게감을 전달하는 금관악기의 진한 쇳소리는 물론, 공(gong)과 팀파니, 스네어, 거기에 힘차게 박동하는 일렉트릭 리듬을 덧입힌 다양한 퍼커션까지 결합해 묵직한 깊이의 울림을 만들어내며 황당무계한 상상력과 만화적인 비주얼을 진중하게 눌러준다. 누아르적인 분위기를 따로 살리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암울하게 부유하는 엠비언스와 낮디 낮은 남성성부의 샘플링과 신디 톤, 섬세하고 잔망스러운 스트링이 합류하는 몇몇 큐들을 통해 감성적이고 스산한 디스토피아의 잔재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존이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 삼촌네 집을 방문했을 때 깔리는 ‘Memories of Shell Beach’나 제니퍼 코넬리가 연기한 엠마라는 캐릭터의 테마 ‘Emma’, 박사가 도시에 대한 진실을 알려줄 때 흐르는 ‘Living an Illusion’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일곱 개의 음으로 구성된, 짧지만 강렬한 상승과 하강의 기운을 담아낸 <다크 시티>의 모티브다. 묵시록적인 비장함과 존재론적 고독을 토해내듯 뿜어내는 금관악기의 거친 포효는 영화 내에서 여러 차례 변주되며 존과 이방인들이 대치된 상황에서 ‘힘’의 주도권을 상징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프닝 타이틀 격으로 나온 ‘Into the City’를 제외하곤 이 테마는 그들의 대결이 펼쳐지는 액션 씬에서 주되게 흘러나오는데(‘No more Mr. Quick’이나 ‘The Wall’), 특히 후반 액션 및 결말 시퀀스 13분을 통째로 책임지는 대곡 ‘You have the Power’는 가히 사운드트랙의 백미라 말할 수 있다. 기존 모티브에서 몇 배 이상 알레그로, 크레센도된 강력한 편곡으로 스피드와 박력, 고통과 환희, 그 온갖 감정들과 두 종족 간의 운명을 건 대결을 담아낸 채 힘껏 내지르는 사운드의 위력은 한마디로 굉장하다. 그 어떤 비주얼이나 연기로 커버할 수 없는 사운드의 깊이와 크기를 간직한 이 장엄한 스코어는 영화가 가진 예산상의 한계를 음악적 상상력으로 훌륭하게 커버해냈다. 아니 오히려 그 파워가 너무 세서 초라한 영상을 압도할 정도다. 대결이 끝나고 난 뒤 곡의 후반으로 접어들며 절대자가 되어 도시를 새로 건설하는 존의 뒷모습에 덧입혀지는 오르간 사운드나 서정적인 스트링 위주의 편곡은 종교적인 후광에 숭고함과 거룩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트레버 존스의 미칠 듯한 존재감의 스코어 외 사운드트랙엔 모두 6곡의 삽입곡이 실려 있는데, 그중 3곡은 영화상에 등장하지 않는 상업적인 선택이라는 점이 많이 아쉽다. 이방인들이 주문처럼 쓰던 말을 제목으로 삼은 휴즈 홀의 ‘Sleep Now’는 짧지만 몽롱한 기운을 선사하고, 극 중 클럽 가수로 나오는 제니퍼 코넬리가 부르는 달달하고 섹시한 올드 넘버 두 곡 ‘Away’와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는 모두 아니타 켈시 버전으로 커버되어 영화의 감흥을 더한다. Track List 1. Sway - performed by Anita Kelsey 2. The Information - performed by Course of Empire 3. Just a Touch Away - performed by Echo & The Bunnymen 4. Dark - performed by Gary Numan 5. Sleep Now - performed by Hughes Hall 6.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 performed by Anita Kelsey 7. Into the City 8. No More Mr. Quick 9. Emma 10. The Strangers are Tuning 11. Memories of Shell Beach 12. The Wall 13. Living an Illusion 14. You Have the Power
한국 영화아카데미 심화과정에서 내놓은 4번째 장편 영화들 중에 한 편인 < 밀월도 가는 길 >은 참 복잡한 영화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동조는 고향 인천에 찾아온다. 그리고 웜홀의 존재를 믿던 특이한 친구 기정을 떠올린다. SF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기정은 왕따였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동조는 웜홀에 대한 집착이 점점 커지는 기정이 버겁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인해 그 둘은 나란히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이후 사라진 기정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지만 그를 다시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동조는 이미 비어있는 기정의 예전 집을 찾아가 그를 모티브로 쓴 소설로 탄 상장과 상금을 조용히 올려놓고 떠난다. 마치 뒤늦은 속죄를 하듯이. 라고 내용을 요약해 보지만, 사실 요약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이 영화는 감독의 욕심이 굉장히 많다. 현실, 비현실, 현재, 과거를 오가는 복잡한 이야기, 멋진 앵글을 만들려는 노력이 빚어낸 사진엽서에 나올 것 같은 장면들이 그렇다. 하지만 과욕이다. 이야기는 벌려놓은 판을 수습도 잘 안되고, 카메라는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친 채 부유한다. 민망한 유머는 덤이다. 잘 만들었다고는 보기 힘든 영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그저 `망작`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실패한 데뷔작으로 치부하기는 불편한 기분이 든다. 잘 납득은 안 가지만, 이 영화의 어떤 부분에 나는 동기화 되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한 시퀀스에 있었다. 동조와 기정이 일진 패거리들에 잡혀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는 끔찍한 장면. 이 장면의 잔혹함만 떼고 본다면 아마 학원폭력을 다룬 여러 영화들과 비교를 해도 높은 순위에 자리할 정도다. 이 장면은 마치 폭주기관차 같다. 구타, 피는 물론이고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아주 질 나쁜 린치까지도 이어진다. 가해자, 피해자는 물론 침묵하는 비겁자가 모두 한 공간에 존재한다. 감독은 그것을 똑바로 보라는 듯 망설임 없이 까발려 스크린에 뿌린다. 마치 이 시퀀스를 위해 존재하는 영화인 듯 파워풀하게 보여지는 폭력에서 나는 스스로를 본다. 나는 어디에 서 있었나? 그간 한국 독립 영화 진영에서는 학교 폭력을 다루는 인상적인 작품도 적지 않았다. < 밀월도 가는 길 >은 학교 폭력을 다룬 많은 영화 사이에서 수작의 카테고리에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정호 감독이 보여준 파워풀한 연출은 지금껏 나오지 않은 다른 종류의 영화가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데뷔작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어떤 감독이든 평생 단 한번만 주어지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밀월도 가는 길>을 뛰어난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