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사나이
- 감독
- 박종호
- 제작년도
- 1967
- 출연
- 신성일, 윤정희, 위키 리, 한성, 윤일봉, 허장강, 김희갑, 어윤길, 한은진, 남미리, 김신재, 전양자, 최성, 최창호, 권오상, 최병철, 김칠성, 조덕성, 이영호, 에드워드 디 루스딘, 김선, 손청균, 김지영, 박은추, 길옥윤 올스타즈, 육기술과 그악단, 비너스 씨스터즈, 동양TV전속무용단, 예그린 교향악단
대중가요와 영화, 쌍끌이 부흥기의 음악영화 한형모 감독의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1966)는 제목과 감독, 제작연도만으로도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 세 가지가 주목할 만한 중요 키워드인 셈이다. 첫 키워드는 워커힐이다. 1963년에 개장한 호텔인 워커힐은, 주한미군을 비롯한 외국인을 위한 호텔로 만들어진 시설로 1973년에 선경(현 SK)이 인수하기 전까지 국제관광공사 소유였다. 미8군 사령관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의 이름을 딴 것이나,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조선호텔·반도호텔 등과 달리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쉽지 않은 광나루 언덕에 지어진 것, 1968년 카지노장까지 개장한 것 등도 워커힐이 지닌 이런 성격 때문이다. 당연히 워커힐에는 극장식당이 갖추어져 있고 주한미군 등 외국인의 취향을 고려한 쇼로 채워졌다. 워커힐의 쇼는 당시로는 세련된 고급의 쇼인 동시에 다소 높은 수위의 노출도 가능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에서 한국의 관객이라면 ‘호텔’이 아니라 ‘쇼 공연장’에서 만나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즉 작품의 제목에서 워커힐 쇼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사인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많은 쇼 장면을 보여주는데, 비단 워커힐 쇼만이 아니라 다양한 호텔 쇼와 방송국 쇼 프로그램까지 망라한다. 노출된 여자무용수의 허리의 꿈틀거리는 동작을 클로즈업한 오프닝 화면이 불러일으킨 호기심에 비하자면 쇼의 관능성 수준은 시원찮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이 정도가 ‘19금’ 등급이었다. 둘째 키워드는 한형모 감독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 작품과 이듬해의 < 엘레지의 여왕 >으로 끝이 난다. 1950년대 후반 < 자유부인 >과 < 청춘쌍곡선 > 등으로 당대에 보기 드문 세련된 촬영과 편집으로 전후 상업영화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보이지 못했던 한형모 감독으로서는, 두 편의 음악영화로 마지막 피치를 올린 셈이다. 그는 줄곧 음악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꾸준한 시도를 해온 사람이었고, 음악영화가 요구되는 때에 그가 불려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자유부인>에서 가수 백설희의 노래와 댄스홀의 라틴댄스 쇼 장면을 화려하게 보여준 그는, <청춘쌍곡선>(1958), < 나 혼자만이 >(1958)에서는 좀 더 음악과 춤의 비중을 높이거나 뮤지컬적인 장면을 시도했다. 그러니 아무리 1960년대 후반이라 해도 노래와 춤을 영화에 버무려 넣는 기법에서 그는 확실히 많은 노하우를 지닌 독보적인 감독임에 틀림이 없었다. 셋째 키워드는 1966년이라는 시기이다. 영화사에서 1960년대가 보기 드문 전성기였음은 두루 아는 사실인데, 대중가요사에서도 역시 전성기였다. 한 해가 다르게 양적으로 팽창해가는 한국영화계는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온갖 장르를 시도하게 됐고 음악영화 역시 그중 하나였다. 대중가요사로 보자면, 1960년대 초에 한 번도 선두 장르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던 트로트의 기세가 꺾이고 ‘양풍’ 가요인 스탠더드팝이 가요계의 선두를 차지한 후, 196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는 이미자 열풍과 작곡가 이봉조 시대의 개막, 록그룹 키보이스 등장 등 다양한 경향이 함께 솟아오르는 시기가 이때였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남진, 문주란, 배호, 정훈희 등 폭발적이라 할 만큼 여러 신인 가수가 두각을 나타내는데, 1966년은 그 직전의 상승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가요를 활용한 음악영화의 출현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대중가요를 청각만이 아니라 시각까지 만족시키며 즐기고 싶은 관객들의 요구란 늘 있다. TV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당시에, 대형 컬러 화면으로 다양한 종류의 쇼를 구경한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부터 < 청춘대학 >( 김응천 , 1966), < 엘레지의 여왕 >(1967), < 폭풍의 사나이 >( 박종호 , 1968), < 이 강산 낙화유수 >( 조길현 , 1969) 등 음악영화가 쏟아져나왔고 이 흐름은 1970년대까지 이어진다. 어찌 보면 인기 가수의 노래 장면을 틈틈이 배치한 국책영화 < 팔도강산 >( 배석인 , 1967), 영화로 만든 한국대중가요사라 할 만한 < 가요반세기 >( 김광수 , 1968) 등도 이런 흐름 속에 놓여있다. 그러니 <워커힐에서 만납시다>는 무엇보다도 틈틈이 화려한 대중가요 쇼를 보여주는 것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시골 사람의 어리바리 서울 구경,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의 극적인 만남 같은 극영화의 기본 얼개는 매우 상투적이며 부실하다. 심지어 한형모 감독이 무려 10년 전에 시도한 <청춘쌍곡선>의 뮤지컬적 장면조차 이 영화에는 없다. 대사를 대신하는 노래는 전무하며 모든 노래는 가수들의 쇼 장면으로만 소화되고 있다. 사건은 그저 쇼 장면을 연결해주는 느슨한 끈 정도에 불과하다. 대신 대중가요 쇼의 배치는 공들여 다채롭게 배치된 티가 역력하다. 트로트부터 스탠더드팝, 경음악까지 두루 능란하게 다루는 작곡가 박춘석이 음악을 맡았으니 음악의 질도 나쁘지 않다. 당시 최고의 사회자인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여러 장면에서 쇼의 진행자로 등장하고,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이 총출동했다.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자니부라더스의 <방앗간집 둘째 딸> 등 박춘석의 작품뿐 아니라, 1960년대 초중반을 휘어잡은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그 외 이금희와 위키리 등의 외국 곡도 두루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 익살스러운 복장의 윤항기가 <울리불리>를 부르는 키보이스 연주 장면까지 넣어 당시 아주 젊고 새로운 록 음악까지 선사한다. 이렇게 다양한 음악과 쇼를 보여주기 위해, 위해 ‘부르스’ 추는 호텔 나이트클럽과 공연의 중심인 시민회관 쇼, 회전무대를 갖춘 화려한 워커힐 쇼, KBS TV의 쇼 스튜디오, 젊은이들이 소울풀한 몸짓으로 춤추는 명동의 뮤직홀까지, 어리바리한 두 시골 사람이 돌아다니도록 만들었다. 주인공인 신인가수 남보라(남정임 분)가 부르는 주제가 격인 노래는, 트로트와 스탠더드팝의 중간쯤 되는 <파란 이별의 글씨>(전우 작사, 박춘석 작곡, 성태미 노래로 영화에서는 립싱크로 처리되었다)를 배치해 안정감과 대중성을 모두 충족시켰다. 거의 모든 쇼 장면에는 무용이 들어있어, 당시 쇼의 무대미술과 연출, 백댄스의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충분히 의미를 발한다.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임권택 감독의 스릴러 영화 < 속눈섭이 긴 여자 >(1970)의 한 장면. 옛 애인으로부터 남편에 대한 의혹을 들은 숙진은 빈 집에서 정적 속에 나타난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놀라고 곧이어 묘령의 여인의 방문을 받는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한 그녀, 자기 이름을 전하면 남편이 알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남편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의혹에 시달리는 숙진의 불안한 심리는 정적을 깨는 두 검은 존재에 의해 편집증적으로 증폭한다. 이 검은 방문자, 도발적인 눈빛에 연갈색 피부를 한 그녀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남미리 (南美里)다. 남미리가 맡은 미아는 ‘방탕’한 생활과 범죄를 저지르고도 끝까지 반성적인 면모라고는 찾을 수 없는, 뼛속 깊이 ‘나쁜’ 여자다. 매사에 무관심하고 권태로운 듯이 도도한 남미리의 표정은 그런 캐릭터에 힘을 실어 넣는다. 이처럼 나쁜 여자이거나 ‘타락’한 여자, 혹은 남자의 통제 아래 머무르지 않는 여자로 등장하는 남미리 의 얼굴은 1960~70년대 영화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연급으로 출연한 영화가 많지는 않아도 그녀의 독특한 인상과 연기는 그 대부분의 영화에서 짙은 잔영을 남기고 있다. ‘스타일’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서 피임도구를 사고 남편이 꺼리는 가족계획을 하는 한순(< 신식할머니 >), 약속에 늦은 상대를 바람맞히고 그의 경쟁자와 데이트에 나서는 클럽 댄서 유미(< 폭풍의 사나이 >), “사내한텐 아예 반하면 안되는” 세상의 원리를 잘 알아 남자에 냉소적인 터키탕 여성 순희(< 육체의 문 >), 그리고 게이샤로 변장을 하고 상대남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이는 “홍콩의 요화” 유미(< 홍콩에서 온 철인 박 >)는 모두 남미리였기에 가능한 캐릭터들이다. 그녀가 이렇게 인상적인 역할들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방탕과 순정의 양극에서 번민하는 여인상”을 연기하고 싶다는 배우 본인의 개성 있는 연기관 덕분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외적으로 그녀가 지니고 있던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화여대를 중퇴하고 외국 유학을 했다는 경력은 그녀에게 단지 ‘지적인 여배우’ 정도가 아니라 경계 바깥의 문물에 대해서도 이미 남성들보다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위험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 것 같다. 더구나 그녀는 데뷔 초기부터 이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전속 모델로 유명했으며, “아름다운 각선미” 등으로 (소위 ‘순수함’과는 반대편에 있는) 육체파 스타라는 평가도 받고 있었다. 후기작에서 암흑가의 마담이나 클럽 댄서 역할을 유독 많이 맡았던 것은 이렇게 쌓여온 ‘일탈’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각인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케도 만든다. 아마도 도전적인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 남미리 본인의 과감함과 그렇게 자신감 있는 그녀를 ‘경계 밖의 여자’로 한정지으려 했던 집단적인 무의식이 만난 결과할 것이다. 영화 데뷔 전 대만 동오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그녀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했고 실제로 제16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중국어 실력과 대만 유학 경력이 그녀에게 ‘중국통’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인지 남미리 는 영화에서 중국인 역할을 종종 맡기도 했다. < 여마적 > < 홍콩에서 온 철인 박 > < 인간 사표를 써라 > 같은 영화에서 치파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한·홍 합작영화 < 사랑의 스잔나 >에서는 홍콩 가수 진추하의 어머니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녀의 중국어 실력은 <인간 사표를 써라>에서 짧게나마 볼 수 있다. 영화배우 활동을 하는 도중에도 모델로서 신문·잡지에 ‘가을의 모드’, ‘직장여성 옷차림’ 같은 패션사진을 선보였으며, 1963년에는 ‘영화배우의 브라운관 화면 진출 제1호’로 KBS 일요연속극 <아내의 얼굴>에 출연했다. 최근 일반 슈퍼 판매 문제로 화제가 되었던 모 드링크 음료 광고모델로도 유명세를 얻었다. 영화계에서 은퇴 후 한동안 문화방송 근처에서 살롱을 경영했고 지금은 호주로 이민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