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본능
- 감독
- 폴 버호벤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마이클 더글라스, 샤론 스톤, 조지 던자, 진 트리플혼, 레라 니사렐르, 데니스 아드트, 브루스 A. 영, 첼시 로스, 도로시 말론, 웨인 나이트, 다니엘 본 바겐, 스티븐 토보로스키, 벤자민 모톤, 잭 맥기, 빌 케이블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책에는 저자의 후기가 없다. 책을 끝낸 단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이 책이 박사논문을 보완한 것이라는 정보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상념과, 고마운 이들에게 전하는 문장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책에 싣지 않은 후기, 모두 떠난 뒤에 도착하려고 일부러 늦게 출발한 이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먼저 드는 질문은 왜 사람들은 누아르에 대한 인상이 다들 제각각일까 하는 것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읽어 보면 한국의 대표적인 누아르 영화로 박훈정 감독의 < 신세계 >(2012)를 꼽는 이들이 많다. 몇몇 이들은 김성수 감독의 < 아수라 >(2016)를 언급하기도 한다. 혹은 이해영 감독의 < 독전 >(2018)이나 변성현 감독의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을 거론하기도 한다. 대부분 범죄자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다. 많은 이들이 누아르는 어두운 세계를 어둡게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세계는 무엇이고 어두운 묘사는 무엇인가? 나의 논문은 이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두 번째 질문은 누아르 문헌들을 읽으면서 생겨났다. 여러 연구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누아르 영화는 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누아르 영화는 분위기나 스타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다. 논문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글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는 시대와 지역을 가로지르며 합치되고 분기되는 혼종성의 산물이다. 시대의 경로에 지역의 특수성이 결합한다.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에서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길에는 시대와 지역의 여러 흔적이 흩어져 있다. 누아르 장르가 혼종성의 산물이고 장르 역시 혼종성의 산물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고전 누아르도 어느 날 불쑥 솟아난 지대가 아니다.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과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담론도 가세했다. 기원에 대한 추적은 기원을 해체한다. 기원이나 종점도 없이, 이상이나 목적도 없이, 그렇게 휩쓸리고 뒤섞이며 흘러온 결과가 지금의 한국 누아르 영화이다. 나는 책에서 이 과정을 추적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명확한 지도가 아니라 흔적들의 성좌였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누아르는 왜 장르가 아니라고 했는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어렴풋이 드러난다. 결국 나는 연구자들이 누아르 글을 시작하면서 짧게 언급한 한두 문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이 허망하지는 않다. 연구자는 앞선 연구자들이 남긴 가벼운 문장에 의문을 품고 긴 주석을 남겨 놓기도 한다. 『누아르의 타자들』은 연세대학교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누아르 영화의 위상과 표상」(2022)을 편집한 책이다.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편집 공정과 유사했다. 어쩌면 논문을 쓰고 책으로 펴내는 과정 전체가 나에겐 영화를 제작하는 공정을 상기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했지만, 책을 만드는 공정에서는 영화감독의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들과 오래 일하면서도 몰랐던 그들의 내면을 훔쳐본 셈이다. 책을 출간하면서 논문의 앞부분을 크게 줄였다. 논문에는 장르 이론과 필름 누아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구성도 바꿨다, 장과 절로 나뉜 논문을 책에서는 장만으로 엮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박찬욱 영화에 관한 비평 글을 실었다. 영화로 치면 마지막 편집본을 수정해 극장 개봉을 한 것이다. 편집본의 앞부분을 덜어내고 전체 구성을 손보고 보충 촬영을 실행한 셈이다. 나는 책에서 누아르의 계보와 계열을 정리했다. 고전 누아르에 영향을 끼친 사조에서 시작해서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홍콩 누아르를 거쳐 글로벌 누아르에 이르는 여정과 이 지류들이 한국 누아르로 편입되는 흐름을 추적했다. 여기까지가 한국 누아르의 위상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나머지는 한국 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비평이다. 앞부분이 한국 누아르의 계보에 해당한다면 뒷부분은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계열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가정했다. 하나는 누아르라는 울창한 숲을 조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뻗어 있는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누아르의 검붉은 숲길을 함께 걷길 바랐다. <말타의 매>(존 휴스턴, 1941)와 <첩혈쌍웅>(오우삼, 1989) 중 (사진: " The Maltese Falcon ", " Dip huet seung hung ", IMDb) 한국 누아르 영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세계 관객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장면들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이 극단의 감각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 특성과 한국 현대사의 지난 상흔을 탐색했다. 필름 누아르는 이름 그대로 ‘검은 영화’이다. 그렇다면 ‘검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책에서 이 단어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했다. ‘검다’라는 것은 폭력과 섹스의 기표이다. 검은 것은 따라서 두렵고 매혹적이다. 검게 내려앉은 도시에서 낯선 남녀가 만나는 것은 두렵고도 매혹적인 일이다. 누아르가 그리는 세계가 이런 풍경이다. 빗물이 고이고 네온이 비치는 거리에서 낯선 남녀가 만난다. 유혹과 살인의 예감이 얼굴을 스친다. 누아르는 명암대비가 선명한 키아로스쿠로 조명으로 이 공간을 채색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할리우드의 누아르이다. 여기에 낭만과 비애와 비정이 교차하는 홍콩 누아르가 접속한다. 누아르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일 뿐 아니라 후각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누아르에는 피 냄새가 난다. 피의 비린 내음이 관객의 감각을 적신다. 그래엄 그린(Graham Greene)은 누아르 영화를 ‘피의 멜로드라마(Blood Melodrama)’라고 칭했는데 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누아르의 계보를 그리기 위해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글로벌 누아르를 탐색했다. 이 과정이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궤적의 수평선이라면 홍콩 누아르와 일본 누아르는 수직선이다.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국 누아르가 있다. 이 지도는 평면도가 아니다. 여러 굴곡이 있는 입체적인 도형이다. 구릉은 솟았다 꺼지고 길은 사라졌다 나타난다. 책에도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에 영향을 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오우삼 의 < 영웅본색 >(1986)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 펄프 픽션 >(1994)이다.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를 세계에 알린 영화이고 <펄프 픽션>은 글로벌 누아르를 견인한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는 1950년대 이후 주춤하다가 197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80년대 초에 네오 누아르로 부활했다. 1992년은 필름 누아르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1992)이 개봉했다. <원초적 본능>은 네오 누아르의 정점을 찍은 영화이고 <저수지의 개들>은 네오 누아르에서 글로벌 누아르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영화이다. 1992년은 또한 한국 누아르의 시작을 알린 < 걸어서 하늘까지 >(장현수, 1992)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누아르의 연대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시기는 2000년 전후와 2010년 이후이다. 2000년을 전후해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 텔미썸딩 >(장윤현, 1999),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02)이 개봉했고, 2010년 이후에 < 황해 >(나홍진, 2010), <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 2010), <아수라>(김성수, 2016)가 나왔다. 2000년 전후는 한국 누아르가 성숙한 시기이고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숙성한 시기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 누아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가 2000년 전후라면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독한 향기를 내뿜던 시기였다. 그 향기는 비린 피 내음이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 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조짐은 보였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간을 씹어 먹고 아킬레스건을 자른다. <황해>는 칼로 쑤시고 도끼로 찍는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튄다. <악마를 보았다>에선 신체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는다. <아수라>는 집단 학살로 끝난다. 한국 누아르는 왜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주시한 역사의 현장은 1997년의 IMF 외환위기와 2014년의 세월호 참사였다.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한국인들이 조우한 집단 외상의 표현이다. 집단 외상이 유혈과 학살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가학과 자학의 피의 멜로드라마가 전개된다. 시대의 외상이 한국 누아르를 검붉게 물들였다. 한국 누아르의 집단적 자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 누아르에 대한 영화 비평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 대한 문화 비평이다.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그래서 일부러 책에 저자 후기를 넣지 않았다. 저자는 숨어 있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러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쑥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강봉래(영화문화비평가) l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상수 감독의 < 눈물 >(2000)과 허진호 감독의 < 외출 >(2005) 프로듀서를 했고, 허진호 감독의 < 행복 >(2007)을 제작했다. 저서로 『누아르의 타자들』(2025)이 있다.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 본 글에는 <색깔있는 남자>의 반전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0년대 한국영화 산업은 여러 면에서 척박했던 시기로 회자된다.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한국영화 산업의 첫 르네상스라 평가됐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와 80년대는 독재 권력의 감시 하에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검열이 극심해지면서 산업적 토대와 시스템이 허약해진 시기로 평가된다. 1970년대부터 대중추수적인 에로티시즘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처럼 청춘을 다룬 영화들을 중심으로 주제와 형식 측면에서 저항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간간이 출현했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는 한국영화의 전면적 시장개방이 일어나면서 한국영화 점유율이 급격히 떨어지긴 했지만, 영화제작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검열제도가 심의제도로 전환되고 저항적인 학생영화운동을 포함해 새로운 영화세대가 부상하면서 독립영화와 코리안 뉴웨이브의 싹이 틀 수 있는 움직임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 색깔있는 남자 >(김성수, 1985)가 개봉된 1980년대 초중반은 전두환 정권의 적극적인 3S(Sex, Screen, Sports) 정책, 선정성과 폭력성이 극대화된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할리우드 장르 관습, 흥행작의 끝없는 시리즈화, 컬러 비디오라는 새로운 부가시장의 저예산 문법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면서 한국영화 산업 전반이 에로영화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색깔있는 남자> 역시 에로틱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당시 대부분의 에로영화들처럼 다양한 정사 장면을 넣기 위한 지나치게 복잡한 인물 구도와 설득력 없는 급작스러운 반전, 컬러 비디오 시대에 걸맞은 화려한 색상과 조명, 줌 쇼트와 프리즈 프레임 등의 과도한 사용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정성을 목표로 두면서 느슨해진 서사 그리고 부족한 예산과 시스템을 메우기 위한 표현적 과장은 오히려 이 영화를 급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 지점에서 김형석 은 <색깔있는 남자>를 < 디아볼릭 >(앙리 조르주 끄루조, 1955)이나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같은 놀라운 반전 서사를 가진 1980년대 대중영화의 숨겨진 걸작에, 이문우(「1980년대를 퀴어링하기」)는 범죄화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레즈비언을 가시화한다는 측면에서 퀴어적 독해의 텍스트로 위치시킨다. <색깔있는 남자>는 제목만 보면 김성수 감독의 전작, 장미희 와 이영하 주연의 < 색깔있는 여자 >(1980)의 후속작처럼 보이지만, 두 영화는 장르적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 <색깔있는 여자>가 신파적 특징이 강한 여성수난사라면, <색깔있는 남자>는 냉철하고 잔인무도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팜 파탈과 여성 착취적이고 이기적인 옴 파탈이 대격돌하는 스릴러 영화다. 이 영화는 당대 몇몇 에로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정적 재현을 위해 비규범적 성적 욕망과 관계를 소재로 가져온다. 유사 근친상간, 사도매저키즘, 양성애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도 전통적 젠더 역할을 뒤집는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패션 디자이너 샤르망 최( 임성민 )의 귀국 기자회견으로 시작한다. 세련된 매너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그는 돌아오자마자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샤르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여자들의 사랑과 욕망을 이용하는 데 거침이 없다. 샤르망은 공사 모두에서 누나 같은 변수린( 오수미 )의 돌봄과 지원을 당연하게 받고 있지만 정작 그의 집착 어린 사랑은 모른 척한다. 또한 그는 김여사( 홍명진 )의 애인 노릇을 하며 후원을 받아 패션사업을 키워나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른 젊은 여자들과의 성적 관계를 거절하지 않는다. 저돌적으로 그에게 다가오는 부티크 직원( 오경아 )과 다른 여자들과 달리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재미교포 사업가 주은몽( 오혜림 )이 그들이다. 모든 여자의 욕망의 대상인 샤르망은 이 모든 관계의 중심인 것처럼 보인다. 샤르망을 연기한 임성민은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한 스타로 신성일 이나 남궁원 같은 이목구비 뚜렷하고 키 큰 ‘미남배우’의 계보에 있긴 했지만 훨씬 세련되며 때로는 유약하기도 한, 그래서 이성애 여성들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미묘한 스타성을 갖고 있었다. 임성민이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장길수, 1994)에서 수많은 여성의 이상형으로 꼽히는 (그래서 여성운동 활동가 강민주에게 전략적으로 납치당하는) 스타 배우 백승하로 캐스팅된 것은 그의 실제 스타 이미지에 일부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매너 좋고 유약한 남성성에서 오는 그의 스타성은 에로영화의 선정적 노골성을 약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런 면에서 임성민은 에로영화의 타겟 관객을 이성애 여성으로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실제로 여성 주인공들보다 임성민을 중심에 놓고 “에·놈·쌍쉬엘(Un homme sensuel)”이라는 카피를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는 주인공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스펙터클화 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좌) <색깔있는 남자> 포스터 (우) <색깔있는 남자> 중 배우 임성민 하지만 이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샤르망은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옴 파탈이다. 샤르망은 사업 확장을 위해 공장을 구매할 자금이 필요하다며 김여사를 부추기고, 김여사는 기어이 병들고 늙은 (가학적 성욕을 가진) 남편( 변희봉 )을 복상사하게 만든다. 범죄와 그에 따르는 불안과 집착은 연쇄성을 갖게 되고 영화는 점점 에로보다는 스릴러에 집중한다. 자금을 확보한 샤르망이 김여사를 귀찮아한다는 것을 눈치챈 변수린은 그렇잖아도 질투 때문에 마땅치 않던 그녀를 차로 여러 번 치어 살해한다. 변수린의 범죄를 알게 된 샤르망은 자신을 향한 집착이 부담스러워지고 재미교포 사업가 주은몽과 새 삶을 계획한다. 주은몽은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에게 집착하지 않는 ‘쿨’한 여자다. 결국 그는 변수린을 기찻길에서 잔인하게 살해한다. 하지만 주은몽과 형사들은 그를 살인자로 의심하고 변수린이 살아있는 것 같은 이상한 징후들이 그를 불안에 휩싸이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전을 내놓는다. 그 반전을 예상하지 못한 건 영화가 반전을 위한 서사를 거의 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아볼릭>을 넘어선 파격적 혹은 허술한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주변부 인물, 즉 조연이었던 직원과 영화 후반부에 등장해 존재감이 미미했던 주은몽이 이 모든 계략을 지배하며 완전범죄를 저지른 레즈비언 커플이었음이 매우 급작스럽게 밝혀진다. 주은몽은 변수린에게서 벗어나고픈 샤르망의 욕망을 자극해 공장을 판매한 대금을 자신에게 투자하도록 유도했으며, 아마도 사적, 공적 공간 모두에서 프레임 바깥에 상시적으로 존재했을 직원은 온갖 정보를 수집해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변수린과 샤르망의 대화를 녹음해 변수린이 살아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었을 것이다. 변수린, 샤르망, 주은몽을 훔쳐보는 제3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종종 암시하지만 서사적으로 그 눈이 직원의 것일 거라는 예측을 하기는 어렵다. 프레임 바깥 존재인 그들의 비가시성과 유령성은 완전범죄와 ‘완벽한(예측 불가능한)’ 반전 서사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비가시적이고 유령적인 레즈비언 커플이 변수린의 유령을 위장하고 무대화할 때 과장되게 연출된 줌 쇼트, 화려한 번쩍이는 조명, 사각앵글 등은 그들 스스로 유령적 존재였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매우 아이러니하다. 변수린이 김여사를 살해할 때 부띠크 직원을 용의자로 몰기 위해 그의 모습으로 변장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과장과 위장은 1980년대 에로틱 스릴러의 문법이기도 하면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없는 레즈비언 커플의 유령적 현현의 비틀어진 알레고리가 된다. 전말이 드러나는 에필로그, 즉 마지막 장면 바로 직전 쇼트에서 샤르망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형사들에게서 도망쳐 기차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간다. 기차와 부딪히기 직전 그의 신체는 프리즈 프레임 효과 속에서 동결된다. 기차의 헤드라이트 때문에 하얗게 날린 스크린은 종결보다는 다른 이미지와 서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하얀 스크린과 샤르망의 신체가 한중간에서 찢겨나가기라도 하듯 바로 이어지는 쇼트에서 창문 양쪽이 열리고 하얀 커튼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누드로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여자, 부띠크 직원과 주은몽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샤르망의 신체와 스크린(그리고 이성애 서사)을 찢고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 에이리언 >(리들리 스콧, 1979)에서 에일리언과 접촉했던 남자 승무원의 배를 찢고 아기 에일리언이 나오는 장면이, 직유적으로 (불가능한) 남성출산을 가리켰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까지 어떤 서사적 암시도 없었기에 그 반전은 그야말로 영화 전체를 헤집고 뒤집는 얼룩이 된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여자 등친 돈, 여자가 돌려받았을 뿐이야”라고 그럴듯한 범죄 동기를 던져줌에도 이 반전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이 예측 불가능한 에필로그는 철학자 질 들뢰즈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분석하며 그의 회화가 구상이나 추상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상을 뒤흔들고 해체하는 힘의 운동(강도)에 가깝다고 분석한 것에 가깝다. 들뢰즈가 ‘돌발흔적’이라고 부른 것 말이다. 돌발흔적은 구상에 가까운 그림 위에 우발적이고 맹목적으로 던져진 국지적이고 질료적인 손의 흔적을 지칭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에서 퀴어적인 것은 영화 내내 이어진 팜 파탈과 옴 파탈 간의 연쇄 범죄도, 비규범적 섹슈얼리티도, 레즈비언 커플이 가시화되는 에필로그도 아니다. 그보다는 국지적인, 흰 스크린 위의 얼룩과도 같은, 마지막 한 씬으로 영화 전체를 뒤흔들고 반향을 만드는 힘의 강도다. 무엇도 선명하게 의도되지 않고 혼탁하기 그지없다. 외삽도 내삽도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며 우발적으로 스크린을 찢어내며 등장한 돌발흔적. 레즈비언 커플은 그야말로 샤르망의 몸, (혹은) 스크린을 찢고 자진 탄생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기존의 (이성애) 서사를 완전히 망쳐 놓는다. 영화는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듯 “아... 색깔있는 남자여 안녕”이라는 대사를 던지며 웃는 주은몽의 얼굴로 다시 한 번 프리즈 프레임하며, 샤르망의 프리즈 프레임을 취소시키고, 그 자신의 얼굴로 끝을 낸다. 에필로그 ‘얼룩,’ ‘돌발흔적’에 그칠 수밖에 없던 레즈비언 커플은 기껏해야 하나의 씬, 비밀스러운 작은 침실에서만 가시화될 수 있었다. 최근 개봉을 앞두고 있는 두 편의 퀴어 장편영화 <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3)와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는 사회와 공동체에 의해 지워버려야 하는 얼룩과 불쾌한 냄새로 취급되는 레즈비언 커플의 가족구성권 혹은 자기 자리와 공간의 확보를 다루고 있다. <색깔있는 남자>의 ‘에필로그’는 국지적인 것이 바탕을 바꾼다는 면에서 퀴어적으로 독해될 수 있지만 분명 한계가 있다. 반향을 만들어내는 얼룩의 자리는 강제된 것이고 실제로 그 자리 이외의 것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에 대하여>와 <럭키, 아파트>는 레즈비언 커플들이 더 이상 얼룩과 냄새로만 남아있지 않을 것이며, 돌발흔적은 오히려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넘어 상상된 관계들과 공동체들의 이접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말한다. 돌발흔적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촉지될 수 있다. <딸에 대하여>, <럭키, 아파트>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연설을 듣는 청중이나 지켜야 할 조국은 여자다. 열정적인 연설은 대중을 오르가슴에 이르게 한다. 정치란 창녀와 같아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가 너의 머리를 물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철학은 인간 해방의 머리이며 프롤레타리아는 그 심장이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리바이어던Leviathan』과 < 작전명 발키리Valkyrie > 브라이언 싱어가 서른 살에 <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 )>(1995) 를 들고나왔을 때 할리우드는 들썩거렸다. 지금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지만 23년 전 이 영화의 파장은 대단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무슨 ‘석학’이 출현한 것 같았다. 이후 브라이언 싱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유주얼 서스펙트> 케빈 스페이시 그때 주인공인 케빈 스페이시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나는 며칠 동안 세상의 모든 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다(영화의 작은 소품이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이후 케빈 스페이시가 나온 < 쉬핑 뉴스Shipping news >(2001) 같은 ‘힐링’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도 여전히 그는 내게 <유주얼 서스펙트> 속 모습으로 남았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그는 다른 영화에서 한 코믹한 연기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최근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수많은 상을 탄 베테랑 연기자이다. 젊은 나이에 그런 영화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2008)역시 야심작이다. 톰 크루즈는 말할 것도 없고 < 블랙북Black book >(2006)의 캐리스 밴 허슨, 한국 영화 < 택시운전사 >(2017)의 토마스 크레취만도 반갑고, 케네스 브래너는 언제나처럼 멋지다. 브라이언 싱어 캐리스 밴 허슨 토마스 크레취만 케네스 브래너 2차 대전 말기, 조국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독일 장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톰 크루즈 분)은 히틀러 정권의 전쟁에 신물이 났다.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나치 정권을 비판하다가 아프리카 튀니지 전선으로 좌천된 그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왼쪽 눈, 오른손, 왼쪽 손가락 둘을 잃은 뒤 독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43년, 이미 여러 번 히틀러 암살 작전을 시도했던 일군의 장교들과 함께 ‘발키리 작전’을 역이용해 히틀러와 그의 측근을 제거하려 한다. ‘역모’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극적인 정치적 배경에 브라이언 싱어의 재능이 더해져, 두 시간 내내 관객의 심장을 ‘관할한다’. 하지만 영화 <작전명 발키리>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텍스트는 근대 국가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교재이다. <작전명 발키리>는 토머스 홉스(1588~1679)의 『리바이어던』과 연동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리바이어던』과 <작전명 발키리>는 상호 충실한 해제이다. 메타포로 국가를 만들다 고전의 정의 중의 하나로 “널리 회자되지만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리바이어던』도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생각보다 않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책이 인용되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읽혔다면, 절대 몸 이야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언급하는 이들은 대개 ‘딴소리’를 한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비서구 국가 혹은 한국의 (남성) 지식인들 중에서 헤겔, 마키아벨리, 칸트, 홉스, 루소 등을 맥락 없이 ‘들먹이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솔직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해한 방식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염 난 백인 남성’의 지적 권위가 (유학을 다녀온) 비서구 남성 ‘엘리트’에게 ‘내부 통치용’(“그들의 사상을 나만 안다.”)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리바이어던』의 경우, 사람들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 책의 분량은 생각보다 짧다. 가장 놀라운 점은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거의 단 한 줄도 빼놓지 않고 몸의 은유(body metaphor)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위대한 업적’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를 실체(entity)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는 관계와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의 몸처럼 주권, 영토, 인구의 총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국가 내 모든 영토는 평등하지 않다. 모든 국민도 평등하지 않다. 어디가 국가인가? 서울? 전라도 완도? 경상도 언양? 누가 국민인가? 여성? 장애인?…… 영토나 인구 개념은 상정된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다만, 특정 지역이 국가로 대표될 뿐이다. 어떨 때는 서울이, 어떨 때는 독도가, 어떨 때는 한라산이……. 주권은 어떠한가. 나는 식량 주권, 검역 주권에는 찬성하지만, 군사 주권에는 회의적이다. ‘국가의 영혼’이라는 주권은 하나가 아니다. 19세기 말 중국은 서구에 의해 완전히 약탈당했지만(영화 <북경의 55일>(1963)을 보라) 공식적으로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관타나모? 지금 그곳은 미국의 군사 기지이지만, 쿠바의 영토다. 『리바이어던』의 역사적 의미는 근대 국가의 개념적 기틀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서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쇄술-표준어의 발달 따위가 국가를 탄생시킨 물적 토대라는 주장이다. 국가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다. 홉스 역시 유물론자였다. 그는 가부장제를 자연적인 산물로 보지 않고 사회적 구성물로 여겼다. ‘없는 실체’를 ‘존재’로 만들려면 반드시 은유가 필요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몸에 대한 은유는 인류의 오랜 인식 방법이었다. 그리고 몸은 사회적 해석을 반영한다. 그래서 머리(정신)와 몸(수족)의 위계라든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없다면 불가능한 수사가 많다. 서구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공동체로서 조직을 유기체(하나의 몸)로서 조직으로 인지하는 데 결정적인 인식을 제공해 왔다. 사회 조직이 인간의 몸으로 비유되는 유기체일 때, 조직은 (지배-피지배) 관계/제도’가 아니라 실체로 간주된다. 권력은 도처에 있지만(is) 누군가가 가진(have) 것처럼 소유 관념으로 인식되어야,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만물의 척도였다. 몸은 모든 상징체계의 기본 도식을 제공해 왔고 서구 사상에서 정치 조직은 언제나 신체에 비유되어 왔다. 몸의 부분에 대한 의미 체계는 사회 규범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사회 조직에서 개인의 위치를 표현하는 ‘우두머리’, ‘수족’, ‘오른팔’ 같은 표현은 신체 기관이 위계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리바이어던』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연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창작품이 ‘인간’인데 인체를 모방함으로써 창작품은 한결 더 고급품이 될 수 있다. 정치 공동체, 즉 ‘국가’는 바로 이런 솜씨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국가의 주권은 몸 전체에 생명과 동작을 주는 인공적 ‘혼’이며, 각부 장관이나 행정부·사법부의 관리는 인공적 ‘관절’이다. 보상이나 처벌은 ‘신경’…… 고문관(顧問官)들은 ‘기억’에 해당하며, 형법과 법은 ‘인공 이성’이며 ‘의지’이다. 조화는 건강이요, 반란은 병환이며 내란은 죽음이다. 끝으로 이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합의나 동의는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말씀하신 “이제 사람을 창조하자.”라는 명령과 같다고 하겠다. 이처럼 『리바이어던』은 전편에 걸쳐 국가를 ‘건강한 비장애인 인간’의 신체에 비유한다. “화폐는 국가의 혈액”, “식민지는 국가가 출산한 자녀”(제8장), “주권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회충처럼 신체를 괴롭히는 자”, “피정복민은 종기”, “안일함은 기면증”, “폭동은 폐병”, “국가를 개혁하려고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 이것은 마치 노쇠한 아버지의 회춘을 갈망하여 아버지의 몸을 절단하여 이상한 약초와 함께 끓였으나, 아버지를 젊은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펠레우스(Peleus)의 어리석은 딸들과 같은 것이다.”(제13장) 이처럼 국가를 유기체인 인체에 비유하면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인체를 절단하는 행위와 다름없게 된다. 모든 국가의 외부는 무정부 상태라는 전쟁 중에 있으므로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외부의 적을 생각할 때,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과 같은 힘의 공백을 노출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으며 국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정상 국가는 장애인의 몸으로 표상되어야 한다 국가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부는 국가보훈처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국가주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사회다. 한국 사회는 특히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존경이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여기서 내가 반민특위 사건을 들먹이며 흥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윤리적이지 않다. 윤리적인 국가는 보훈(報勳)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공동체 유지와 후세대 교육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상 국가는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의 몸으로 재현되지만, 실제 정상 국가는 외적과 투쟁을 거쳐 쟁취한 공동체이므로 부상당한 몸이 정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이용사(傷痍勇士)’나 장애인의 몸이 정상 국가를 상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국가는 거의 없다. <작전명 발키리>의 주제는 반역이 탄로 날 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제시된다. 관객의 심장은 쿵쾅거린다. 그때 슈타우펜베르크 역의 톰 크루즈는 자신의 신체를 ‘전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한마디로 “당신들, 나처럼 조국을 위해 눈과 팔을 잃었나? 감히 내 앞에서 할 말이 있는가?” 체포 직전의 그는 자신의 훼손된 몸으로 히틀러 측을 압도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감동받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가능한 사회를 꿈꾼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 없는 상태를 ‘현상 유지(the status quo)’라고 표현하는데, 부정적/비정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국가는 계속 전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묘사된 비장애인의 몸이 아니라 부상당한 장애인의 몸이어야 한다. 지난번 이 지면에서 다룬 영화 < 설국열차 >(2013)에서 언급한 리더의 조건 중에, 다친 몸이 아닌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 영화를 통해 독일은 또 한 번 뿌듯(?)했을지 모른다.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의 전후 책임 문제를 두고 극단적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이 글에서 다룰 사안도 아니다). 독일도 ‘군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가해/피해 사안 모두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톰 크루즈의 아내 역으로 나오는 네덜란드 배우 카리서 판 하우턴이 열연을 펼친 폴 버호벤 감독의 <블랙북>은 2차 대전 후 연합군 국가들이 ‘적국의 남자와 섹스한 자국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보여준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존재는 독일의 자부심이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나치 정권은 대중의 협력 없이 불가능했고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 심리』를 통해 해석을 시도했지만, 어쨌든 히틀러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한 독일인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상기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사과하는 일본인,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벌인 만행에 문제 제기를 멈추지 않는 한국인, 나치에 항거한 독일인……. 자국의 범죄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인류가 국민이기 전에 인간인 이유다. 물론 최근 한국 사회의 일부 좌파와 페미니스트가 ‘난민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