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프라하의 서곡
- 감독
- 존 스테픈슨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아뉴린 바나드, 제임스 퓨어포이, 사만다 뱅크스, 모르피드 클락, 데블라 키어완
한 가지 사실을 먼저 환기해야 할 것 같다. 로베르트 비네의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은 첫 번째 표현주의 영화가 아니다. 순서대로 따라가야 한다면 1913년 파울 베게너의 < 프라하의 학생 >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미 이 영화에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보여줄 거의 모든 것을 선취하고 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소설과 <파우스트>를 느슨하게 각색한 시나리오, 도플갱어의 등장,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명암대조법(chiaroscuro) 촬영, 환상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오가는 진행.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왜 영화사의 순간을 건너뛰었나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독일 영화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표현주의에 대해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칸딘스키,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것이다. 파울 힌데미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물론 그 배경에는 저 멀리는 독일 낭만주의가 자리 잡고 있고, 배경에는 바이마르 문화가 음산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몇 번이고 영화사의 섬광 같은 순간으로 뛰어들고 싶다고 말했다. 내 목표는 체계적인 영화사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사에는 가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전혀 훌륭하지 않다. 이 영화를 연출한 로베르트 비네는 영화사에서 이 영화 단 한편으로만 기억된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영화사의 섬광이 되었다. 일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온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는 두 사람은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썼다. 모두 6개의 막(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공원 벤치에서 시작한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마지막에 스포일러가 있다. 원치 않는다면 여기서 다음 문단으로 건너뛰기를 바란다) 한 청년이 곁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그 앞을 지나간 여인이 자신의 약혼녀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긴 이야기를 한다. 청년과 그의 친구는 약혼녀를 사이에 놓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중인데 마을에 칼리가리 박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조수 체자레를 이끌고 나타난다. 칼리가리 박사는 체자레에게 최면을 걸어서 예언을 요구한다. 체자레가 죽음을 예언하면 다음 날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해서 발견된다. 청년은 이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칼리가리 박사와 조수 체자레를 뒤쫓는다, 그리고 그들의 은신처인 정신병원에까지 따라간다. 거기서 알게 되는 건 청년이 정신병원 환자라는 사실이다. 이 각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독일 영화사들의 경제적 연합인 Ufa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영화사 데클라(Decla)를 운영하던 에리히 포머였다. 그는 다른 영화사들과 다른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했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각본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에서 그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에리히 포머와 두 명의 시나리오 작가 사이에서 의견 일치를 본 것은 아니다. 제작자 에리히 포머는 돈을 벌기를 기대했고, 칼 마이어와 한스 야노비츠는 자신들이 예술적인 무언가를 썼다고 믿었다. 이 시나리오의 세트를 지어야 했고, 그때 프라하에서 온 세트 디자이너 알프레드 쿠빈에게 제안했을 때 관심을 보였다. 이 도시에서 공무원 프란츠 카프카가 퇴근하면 밤마다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생각을 함께 떠올려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에리히 포머가 제작비를 받아들고 일부만 세트를 짓고 배경은 그림을 그려서 대신 하자는 제안을 했다. 회의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프리츠 랑이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찍었을 것이다. 프리츠 랑은 이 영화의 테이블에서 빠져나갔다, 영화사의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 배경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슈트룸' 그룹의 헤르만 바름이 가세하였다. 혼자서 그 많은 벽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그의 동료인 발터 뢰리그와 발터 라이만이 함께 작업하였다. 그들은 이 세트를 그리면서 자신들의 '표현주의' 그림 속을 몽환적인 시나리오의 영화가 산책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은 미술관의 벽에 걸려서 멈춰 서 있었다. 이제 그림 속을 미친 영화가 최면에 빠져 유괴를 하고 살인을 저지르면서 홀린 듯이 돌아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위한 세트 제작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영화는 아벨 강스가 1915년에 연출한 실험영화 <튀브 박사의 광기>였다. 아벨 강스는 이 영화에서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이용한 '요술 거울의 방' 효과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알프레드 쿠빈과 헤르만 바름은 렌즈에 의한 이미지 왜곡을 만들어내는 대신 세트 자체를 왜곡해서 디자인 하고 그걸 바탕으로 벽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제작비를 절감하려는 에리히 포머의 결정과 그 한계 안에서 세트를 자신들의 인스톨레이션(이 도착도 하기 전에 그런 미술관)처럼 만들어버린 세트 디자인 팀은 그저 불합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차원으로 갑자기 도약시켰다. 이제까지 꿈속에서 만나는 불안과 두려움은 문장 속에 있거나 그림을 바라보면서 상상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이미지가 펼쳐지고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관객들이 본 것은 기기 묘묘한 이야기, 액자 형식의 서사. 빛과 그림자. 굴곡지어지고 왜곡된 세트,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배우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영화가 갑자기 내면의 형상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제까지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서 멈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영혼의 삶에까지 밀고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을까. 영화는 역사를 예언하는 능력이 있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멈추지 않으면 다음에는 현실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찍고 있을 때 빈에 있던 프로이트는 "(...)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결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경우"(정잔진 옮김) 에 관해서 정식화시킨 <친숙한 낯섦(Das Unheimliche, Uncanny)>를 발표했다. 한 가지를 더 부언해야 할 것 같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해 국가방위군의 명령으로 독일 노동자당을 감시하기 위해 위장 가입하였다. 독일 노동자당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되었다. 간단하게 줄여 부르는 말. 나치 정당.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사의 순간은 역사의 순간과 헤어진 적이 없다.
임시연 감독이 연출한 < 햄스터 죽이기 >의 주인공 효정은 존재감이 없는 아이다. 그녀는 15살 동갑내기 수정과 일란성 쌍둥이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구분된다. 수정이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효정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불분명한 상태로 그려진다. 수정은 신분과 소속이 분명하지만, 효정은 신분과 소속이 불분명하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효정을 수정으로 착각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효정의 존재론적인 지위는 불분명하다. 영화 초반, 효정은 내레이션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5년 전 엄마는 쌍둥이를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이건 마지막으로 내가 김효정이었던 때의 이야기이다.” 이 독백이 암시하는 것처럼, <햄스터 죽이기>는 타자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비교적 덤덤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도플갱어는 오랜 시간 동안 문학과 영화의 주요 소재로 쓰였다. 사전적으로 도플갱어는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을 뜻하며, 그것은 자아의 증식, 복제, 분할, 분열 등과 같은 함축적 의미를 포함한다. 도플갱어가 자아의 증식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욕망의 발현과 관련이 있으며, 도플갱어가 자아의 분열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이성에 의한 억압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도플갱어의 의미를 자아의 분할, 구분, 교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억압된 대상이 회귀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도플갱어는 억압된 주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반발을 표현하고자 했던 낭만주의 문학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다룬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다. < 프라하의 학생 >(1913),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19), < 노스페라투 >(1922), < 마부제 박사 >(1922)가 도플갱어를 영화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작품들은 거울 이미지, 괴물, 광인 등으로 도플갱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인물과 그것의 유령적인 대응물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조력자이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장애물일 수 있다. 도플갱어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자아와 타자는 서로 운명 공동체를 형성한다. <햄스터 죽이기>의 효정과 수정 또한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 두 사람은 모종의 협상을 맺고서 서로의 분신이 되기로 약속한다. 수정은 효정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지 묻는다. 파우스트적인 거래에 가까운 이 협상이 맺어진 결과 수정은 효정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그동안 효정은 수정을 대신해 학교에 간다. 영화는 효정의 변화된 삶에 주목한다. 그녀는 수정의 명찰이 붙은 교복을 입고, 수정이 다니는 학교에 가서, 수정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수정을 대신해서 시험을 본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효정은 자신을 수정이라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수정을 연기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효정의 억압된 욕구가 현실로 회귀하고,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효정의 욕망은 그녀가 수정의 분신이 되었을 때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한계를 갖는다. 또한, 효정이 수정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그녀의 소원 성취는 일시적으로 혹은 무기한 유예된다. 이것은 타자의 도플갱어가 된 한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모든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분신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햄스터 죽이기>는 우화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삽입한다. 이 영화는 한 쌍의 햄스터가 있을 때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도플갱어로 맺어진 효정과 수정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 수정은 학교 앞에서 사 온 것이라면서 한 쌍의 햄스터를 집에 들인다. 수정이 햄스터에 대해서 비교적 무심한 것과 달리 효정은 케이지 안에 들어 있는 한 쌍의 햄스터를 유심히 관찰한다. 햄스터를 관찰하는 효정의 모습은 이 영화 전체의 구조와 어우러져 관객인 우리가 그림 속의 그림을 바라보는 듯한 착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관객이 효정과 수정 사이에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정은 한 쌍의 햄스터 사이에서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본다. 이 미장아빔(mise en abyme)의 구조에 의해서 영화의 안과 밖 모두 도플갱어가 관계의 중심을 이루는 세계처럼 지각된다. 그리고 이 액자식 구조 속에서 관찰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문자 그대로 잡아먹는 잔인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 도착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인 동시에 먹는 행위를 통해서 정령, 타자, 초월적 존재가 현현(incarnation)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자의 그림자에 갇힌 도플갱어를 넘어서 타자를 집어삼킨 도플갱어의 모습에서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햄스터 죽이기> 후반부의 일부 장면은 너와 나의 구분이 무너진 도플갱어의 관계를 암시한다. 효정이 두 마리 햄스터 중 한 마리의 사체를 화단에 묻고 난 직후 그녀는 교복을 입은 수정과 마주한다. 여기서 영화는 효정과 수정의 모습을 각각 풀 샷, 바스트 샷, 클로즈업 샷으로 담은 이미지를 쇼트와 역-쇼트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 쇼트들의 교환 속에서 효정의 얼굴과 수정의 얼굴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그 교환의 구조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증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효정과 수정을 구분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명찰이 없는 교복을 입었기에 효정인지 수정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누군가가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근데 쥐새끼도 제 자식은 알아보는 게 아닌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것은 분명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 영화 속 누군가의 자조 섞인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리라.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경성은 식민지 조선의 최대 도시이자, 가장 많은 극장이 ‘밀집’된 곳이었다. 오늘날과 견주어 보면 ‘밀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전국적인 극장의 분포 정도를 살펴보면, 식민지 시기 내내 경성은 극장의 도시였다. 1930년대 전쟁이니 불황이니 해도 경성의 영화 인구는 계속 늘었고, 그럴수록 경성과 지방 사이의 격차는 벌어졌다. 부산이나 평양 정도의 도시에는 규모가 있는 영화상설관들이 꽤 있었고 필름의 순환도 제법 빠른 편이었지만, 경성과의 물리적 거리가 일종의 ‘문화 지연’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에서 본 영화를 경성에서 다시 보며 ‘지금 여기’에 묘한 회상의 감각을 덮어보는 엘리트 관객의 시간 감각만큼이나, 경성에서 본 영화를 지방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는 영화팬의 속내 또한 복잡했을 것이다. 카프(KAPF)의 직속 극단 ‘신건설(新建設)’ 창단을 주도했던 신고송은 1932년에 이른바 ‘『우리 동무』 배포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석방된 후 교사인 아내의 근무지였던 김해군 김해읍으로 이주했다. 김해에 살면서 1936년 『조선영화』 창간호에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을 기고하는데, 이 글은 경성의 지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을 취했다. 『조선영화』에는 한때 그와 함께 했던 ‘형들’―송영, 나웅, 최일숙, 고경흠 등―이 글을 싣고 있었는데, 그중 나웅이 이 글의 수신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2. 신고송,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 중에서 신고송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읍내 극장에 영화나 연극이 ‘올’ 때마다 극장에 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극장에서 <암로(강호, 1929)>와 <혼가(김유영, 1929)>,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양철, 1930)> 등 자신의 과거 어느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영화들을 보았다고 한다. 김유영이 연출하고 임화가 주연했던 영화 <혼가>는 엉뚱하게도 ‘나웅’ 주연의 영화 ‘어두운 거리’라고 광고되기도 했는데, “서울 사는 형들의 생각에는 어느 집 창고에 먼지에 파묻혀 있으리라고 할” 이런 영화들에서 임화의 맵시를 보고, ‘형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자신에게는 위락이 된다고도 적었다. 경성의 영화팬들은 기억도 못할 수년 전의 무성영화가 그가 사는 곳에서는 신작처럼 상영되는 것이다. 김해는 부산에서 가까워 갓 일본에서 들여온 ‘신작’들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어떤 영화들은 경성의 ‘형들’보다도 신고송이 먼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성영화 <벤갈의 창기병(The Lives of a Bengal Lancer, 1935)>을 무성영화 영사기로 상영하는 낙후된 극장 시설은 ‘경향의 시차’를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비슷한 무렵, 시인 이상은 평안남도 성천에서의 영화 경험을 기록해 놓았다. 1935년 9월의 어느 저녁, ‘공기는 수정처럼 맑고, 별빛만으로도 누가복음을 읽을 수 있을 듯한’ 평안남도 성천에 요양 차 머무르던 그는 금융조합 주최의 선전활동사진회 구경을 갔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들”이 모여든 밤,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이라곤 본 적 없는 성천 사람들에게 움직이는 영상은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에 비할 것이며, 영화를 보기 위해 학교 마당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이 아니라 축음기 그 자체가 신기해서 모여드는 펭귄처럼, 성천 사람들은 영화의 내용을 알거나 이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 장치 그 자체에 매혹되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액션이 화려한 극영화도 아니고, 부산 잔교, 모란봉, 압록강 철교 등 그저 조선의 실경(實景)을 담은 필름의 영사가 끝난 것인데도, 성천 사람들은 마치 서양 명감독의 영화를 접한 듯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도회라는 ‘화려한 고향’에서 일상적으로 영화를 경험해온 그에게는 퍽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이 상영의 장에서 그 역시 성천의 ‘촌민’들과 더불어 ‘백성’ 혹은 ‘동포’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일체화되었던 경험을 짧게 적는다. 사진3. 이상, 「산촌여정 - 성천 기행 중의 몇 절」 중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조선에서 경성과 지방, 도시와 농촌 사이의 문화적 격차는 경성을 떠나야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터였다. 영화는 과학 기술이 탄생시킨 복제 미디어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사운드 도입 이후에도 조선에서의 영화 이동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벌, 많아도 겨우 몇 벌의 프린트가 경성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고 도는 식이었다. 더 많은 관객에게 영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순회 영사는 지역에 따른 경험의 차이도 계속 생성해갔다. 일제가 식민지 주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문화 선전 활동을 구상할 때, 경향 간 문화 경험의 차이는 더욱 문제가 되었다. 문화 기반 시설이 부족한 농산어촌과 공장 및 광산 지대의 주민에게 영사대를 파견하여 집단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하는 이동영사가 전시체제기에 기획되고 치밀한 조직과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단시간 내에 수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과 지방 혹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가 추동했던 문화 향유에 대한 갈망과도 깊이 관련된다. 이동영사의 관객들은 거의 대부분이 문화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려면 겨울에도 20~30리 길을 걸어야 상영장에 닿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꺼이 먼 길을 걸어 보러 올 만큼 이동영사에 대한 호응이 높았던 것은 선전과 교화 수단으로서 영화를 이용하려는 당국의 의도와 오락과 여가, 문화로서 영화를 경험하는 식민지 주민의 수용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단사진1. 평양 순회 영사 관련 기사 출처: 《동아일보》 1934년 7월 29일자 2면 (뉴스라이브러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신고송,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 『조선영화』 제1집(1936년), 118~119쪽. 형! 중앙을 떠난 지도 벌써 오래되니 나의 전문이던 연극에까지도 인연이 멀어진 것 같거든, 하물며 영화와는 더욱 남이 된 것 같소이다. 행(幸)으로 부산에 가까이 있으므로 한 달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영화는 보기가 됩니다. 그도 일본영화는 간혹 조선 첫 봉절도 있습니다마는 조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양 것들은 다, 형들이 감상하고 난 나머지를 얻어 보는 셈이지요. 형! 그래도 이런 시골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얼굴이 간지러우며 진땀을 흘리면서도 추억의 거리가 되는 재미나는―중앙에 있는 형들은 못 보는―것을 구경합니다. 이 읍에도 명색 극장이 있어 한 달에 한 번은 영화나 연극이 오는데 이러한 한거(閑居)에서 무위의 날을 보내는 나는 우리집 앞 논둑길로 악대가 불고 지나가는 밤이면 꼭 극장에를 가보는 것입니다. 이 덕택으로 서울 사는 형들의 생각에는 어느 집 창고에 먼지에 파묻혀 있으리라고 할 <암로>와 <혼가>와 또는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혼가>가 ‘어두운 거리’로도 되어 나오고 주연이 ‘나웅(羅雄)’이라고도 되어 광고됩니다. 그래 웃으면서 구경 갑니다. 가서 강호(姜湖)의 얼굴을 보고 임화(林和)의 맵시를 보고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에게 한갓 위락이 됩니다. 강호 군은 <암로> 이야기만 내면 아주 미안해하고 싫어합니다만 근 십년 전의 작품이오, 초기의 첫 작품이 그러하다는 것이 왜 강호의 불명예야 되겠습니까. 형! 이러한 시골 극장에서 얻는 에피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번은 <부라커 대학생>이라는 광고로 영화가 상영되기에 나도 무심히 구경을 갔었지요. 그랬더니 ‘부라커’는 정히 저 ‘프라-그’이고 영화는 그 유명한 <프라하의 대학생[Der Student von Prag]>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벤갈의 창기병[The Lives of a Bengal Lancer, 1935]>이 왔기로 나는 그것을 전에 볼 기회가 없어 못 보았는지라 가보았더니 사일런트 기계로 무성으로 올리겠지요. 영화로서 효과는 전연 없어졌지마는 영화에 의하여 느끼어진 적이 최근에는 없는 나로서는 느껴지는 것이 있습디다. 어떻게 해서 영국이 토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부를 축적했는가, 그것이었습니다. 소위 서부활극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아메리칸 인디언을 취급하는 데서도 흔히 보는 것이지만 인종적으로 모욕해서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형! 이래도 부산서 형들이 먼저 보기 전에 서양영화를 첫 봉절에 하나 보았습니다. <춤추는 브로드웨이[Broadway Melody of 1936]>, 그 어이 없이 시끄럽고 날뛰는 영화 말입니다. 늙은이 코 고는 것이 ‘상승음계형’, ‘하강음계형’, ‘권태형’ 등등 수십 종의 형으로 유별(類別)하는 재주에는 경탄했습니다만, 양키들의 끝없이 □□[식별 불가]하는 광조난무(狂躁亂舞)는 아메리카 문화를 경조화(輕燥化)하는 것이 발성영화의 죄일는지요, ‘엘레지 오브 아메리카’의 죄일는지요. <톱 햇[Top Hat, 1935]>, <오페라 해트[Mr. Deeds Goes To Town, 1936]>, <함대를 뒤쫓아서[Follow the Fleet, 1936]> 등등 끝없이 재즈문화는 재즈화해가고 ‘폭스 트로트’는 ‘룸바’에 가지로 증후는 악화해 가는 모양입니다. 아메리카의 영화가 내용적으로 저열해지건, 불란서에서 <마주르카>니 <에키파-쥬>니 우수하다고 하는 영화들이 뒤이어 소개되건, 조선영화의 소조(蕭條)한 비발전(非發展)에는 경탄을 마지않습니다. 그 원인은 허다하겠지요마는 한심한 일입니다. 이곳 극장에서 발성영화 <××전>을 구경했습니다마는 그러한 거액의 돈으로 그것밖에는 만들지 못한 원인은 기술의 부족으로 보아야 옳겠지요. 기술이 있는 이들이 그냥 썩어져 있건마는 기회는 항상 그것을 찾아보지 못하고 그렇지 않은 데서만 방황하니 기회 그놈이 무심타고 하겠습니다. 일본영화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고 중국의 영화도 최근 훌륭한 것들이 나온다고 하니 어이 남의 일만 같다고 하겠습니까. 이제는 아마 조선영화도 기업적으로 채산이 되는 듯하니 대중의 저속한 취미에만 영합하려는 통속화의 경향을 집어치우고 예술적 양심을 움직여 대중의 영화에 대한 감상안을 높여가야 영화문화의 진전이 있지 않겠나요. 외국영화 더욱이 불국(佛國) 영화를 보면 모든 것에 있어서 화면에 넘치는 여유작작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조선영화에 있어서는 시나리오 그것에 그러하고 연기에 그러하고 감독에 그러하여 모두가 여유가 없으니, 이것은 기술의 탈일까요. 저들의 생활에는 여유가 있고 우리의 생활에는 궁박(窮迫) 그것이 모든 것에 반영되어 그럴까요. 형! 지금 나의 경우에는 이것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형의 건강을 빌고 마지않습니다. 2. 이상, 「산촌여정 - 성천 기행 중의 몇 절 (완)」, 《매일신보》, 1935년 10월 10일 및 11일 자, 조간 1면, 부분 발췌 이 마당[학교 마당]에서 오늘 밤에 금융조합 선전활동사진회가 열립니다. 활동사진? 세기의 총아—온갖 예술 위에 군림하는 ‘넘버’ 제8예술의 승리. 그 고답적이고도 탕아적인 매력을 무엇에다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활동사진에 대하여 한낱 동화적인 꿈을 가진 채 있습니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이것은 참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을 배워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동포의 부러운 재간입니다. [...] 밤이 되었습니다. 초열흘 가까운 달이 초저녁이 조금 지나면 나옵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짧고도 기다란 인생을 적어 내려갈 편전지(便箋紙)—‘스크린’이 박모(薄暮) 속에서 ‘바이오그래피’의 예비 표정입니다. 내가 있는 건너편 객줏집에 든 도회풍 여인도 왔나봅니다. 사투리의 합음(合音)이 마당 안에서 들립니다. 시작입니다. 부산 잔교가 나타납니다. 평양 목단봉입니다. 압록강 철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태서(泰西)의 명감독이 바야흐로 안색이 없습니다. 십분 휴게시간에 조합 이사의 통역부(通譯附)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달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 금연—이라는 느낌입니다. 연설하는 이사 얼굴에 전등의 ‘스포트’도 비쳤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경동할 일입니다. 전등—이곳 촌민들은 XX행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 눈이 부시게 밝은 광선 속에서 창백한 이사는 강단(降壇)하였습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 사람도 박수치지 않았습니다—물론 나도 그 우매한 백성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