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락치
- 감독
- 유현
- 제작년도
- 2005
엄태웅 , 주원 주연, 황병국 감독의 < 특수본 >(2011)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특별수사본부’의 약자인데 시간을 더 거슬러 1970년대로 가면 설태호 , 이원세 감독이 바통 터치하며 만든 <특별수사본부> 시리즈가 있었다. ‘한국의 CSI 였다!’라고 말하면 너무 거짓말이고, 한국영화사의 대표적인 반공수사물 시리즈라고 보면 된다. 한국영화사에 에로, 액션 시리즈만 있었던 게 아니라 나름 진지한 범죄추리(물론 추리는 좀 약하다) 시리즈도 있었던 것. 1편인 <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 >(1973)을 시작으로 2편 < 특별수사본부: 여대생 이난희 사건 >(1973), 3편 <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1973), ‘꽃할배’ 이순재 가 출연한 4편 <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1974), 끝으로 역시 꽃할배 박근형이 출연한 < 특별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 >(1975)에 이르기까지 모두 5편이 만들어졌다(1-2편은 설태호 감독, 3-5편은 이원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2, 4, 5편은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서 VOD 관람이 가능하다). 특별수사본부 시리즈 이 시리즈는 민영방송 ‘라디오 동아방송’(1980년 신군부에 의해 KBS에 통합될 때까지 17년 7개월 동안 이어왔다)에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방송된 라디오 심야프로그램 <특별수사본부> 시리즈가 그 모태다. 이 대공수사실록드라마에서 오제도 검사는 여간첩 김소산 사건, 해군 프락치 허만도 사건, 기생간첩 구자운, 점쟁이간첩 윤길도, 거물간첩 성시백 등을 도맡은 고뇌하는 반공검사로 큰 인기를 끌었다. 김수임은 광복 후 미군정기에 남조선노동당을 위해 일한 간첩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몇 년 전에는 조명화 감독에 의해 한미합작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란 보도도 있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1948년, 주한 정보대장인 페이드 대령의 첩, 김수임( 윤소라 )이 특별수사본부에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매 시퀀스마다 회한을 머금은 표정으로 “그 이듬해 봄이었어요...”라는 식의 김수임 멘트로 시작하는 그 구조가, 마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조안 크로포드의 회상으로 불쑥 시작하는 마이클 커티즈의 < 밀드레드 피어스 >(1945)를 연상시킨다. 아무튼 김수임은 남로당에 가입해 자신이 얻은 숱한 정보를 북한에 제공해오다가 오제도 검사( 이순재 )에게 체포된 것. ‘묻고 따지는’ 이순재에게 지난날을 회상하는 김수임의 과거는 도저히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 이화보통여자학교에 입학한 김수임은 이복 오빠인 최만용(북괴공작원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 문오장 ') 때문에 17살의 어린 나이로 농부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시집을 뛰쳐나와 다시 이화여전에 입학한 그녀는 이강국( 신일룡 )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박헌영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이강국은 “좀 더 위대한 미래를 위해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월북하고 만다. 그런 사랑의 실패를 겪으며 페어드 대령과 결혼한 김수임은 아들 ‘밥’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강국을 미끼로 다시 수임에게 접근한 오빠 최만용의 획책이었던 것. 그렇게 수임은 남로당원으로서 첩보 활동은 물론 페어드에게 이런저런 인사 청탁까지 조종하는 위치에 이른다. 여기서 무엇보다 놀라게 되는 것은 후시녹음으로 완성된 외국인 배우들의 유창한 한국어다. 거의 아나운서 수준으로 얘기하는 페어드 대령은 물론 “엄마, 어디야? 빨리 와,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혼혈 아이 밥의 언어구사능력도 상당하다. ‘아들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수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오검사가 집으로 전화했다가, 밥이 대뜸 “마미?”라고 영어로 답하자 황급하게 전화를 넘기는 이순재 의 연기 또한 놀랍다. 윤소라 윤소라 는 당시 서구적인 마스크로 눈길을 끌었다. 아마도 그런 외모가 당시로써는 낯설어서인지 김지미 , 남정임 , 문희 , 윤정희 의 자리까지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속 팔도강산 >(1968)으로 데뷔한 이래 제목부터 무언가 그녀의 선명한 캐릭터를 드러내는 < 버림받은 여자 >(1970), <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 < 야녀 >(1974), < 70인의 여죄수 >(1974) 등에 출연하며 남다른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 김수임의 일생 >에서도 인사 청탁을 위해 속옷이 비치는 가운만 걸친 채 페어드 대령의 털 난 가슴을 어루만지며 유혹하는 장면이 생생하다. 물론 이강국을 그리워하는 사랑과 아들 밥을 향한 모성의 굴레 속에서 방황하는 그 깊은 슬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당시 함께 이국적 외모의 글래머 배우로 주목받았던 김혜정의 다소 과잉된 연기와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물론 그 이국적 외모로 인해 <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의 미얀마 여자, < 여진족 >(1969)의 여진족이기도 했던 김혜정 또한 유현목 의 < 아내는 고백한다 >(1964), 이성구 의 < 지하실의 7인 >(1969)에서 대체할 수 없는 에로틱한 매력을 뿜어냈다. 흥미롭게도 <지하실의 7인>에서 윤소라는 말 수가 적은 수녀, 김혜정은 성적 매력을 마구 발산하는 북한 여군으로 출연해 만났다. 역시 외모 하면 빠질 수 없는 남자 신일용도 있다. 수임이 이강국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누구나 한 번쯤 보면 반할 수밖에 없는 쾌남아였어요”라고 말할 정도인 신일용 과는, 윤소라의 은퇴작이기도 한 김수용 의 < 아라비아의 열풍 >(1976)에서도 연인으로 출연했다. 그런 두 사람이 마치 <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2005)의 부부처럼 ‘그 사람이 매일 아침 어디로 출근하는지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이 허망하다. 김수임의 화장, 그리고 페어드 대령의 유창한 한국말 그래도 김수임과 이강국은 서로를 잊지 않고 살아왔다. 클라이맥스는 이강국을 시골에서 올라온 외삼촌이라 거짓말하고 페어드 대령에게 빼내 달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수임으로 인해 한국식 인사 청탁 문화가 몸에 밴 그는 부탁대로 강국을 집으로 데려오지만, 외삼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젊고 잘 생긴 그를 살짝 의심한다. 결국 페어드는 “부인, 난 이제 사무실로 나가 볼 테니 삼촌을 좀 대접해요”라고 출근하는 척 거짓말을 하고는 그들의 뜨거운 포옹을 몰래 훔쳐본다. 그렇게 수임은 사랑에 실패하고 감옥에 이르게 된다. 반공영화이기는 하지만 “사랑과 사상이 꼭 일치되어야 하나요. 전 좌익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그의 마음과 육체를 사랑했어요.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라는 항변은 가슴 절절하다. 그렇다. 당시 공공의 적은 북한이 아니라 일본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전 죽일 년이에요”라는 마무리 멘트를 들은 오제도 검사는 “사랑의 에고이즘이군요”라는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 마치 제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척척 추리해내는 탐정 엘큘 포와로처럼 고뇌하는 모습으로 소파에 앉은 이순재 의 모습이 그 기나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 >에서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우는 윤정희 의 모습이 압권이었다면, < 김수임의 일생 >에서는 페어드 대령의 면회 전 손거울을 보며 눈화장을 고치는 윤소라 의 연기가 심금을 울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페어드 대령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전을 울린다. “딸링...” 그 딸링에 덧붙여 확실히 이것 또한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하루종일 “마미~~~”라는 말이 입에서 내내 맴돌 것이다. 김수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검사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내 얼굴을 곱게 화장하겠어요. 추하게 있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줄 몰라서죠. 늙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화장을 하지 않고 남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여자에요.” 이순재 정말 마지막으로 이순재 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하고 싶다. < 그대를 사랑합니다 >(2011) 당시 인터뷰했던 그는 가장 존경하는 선배 배우로 최무룡 을 꼽았다. “후시녹음 시절에도 그처럼 자기 대사의 템포를 살려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후시녹음이라 그런 주연급 배우들 중에 대사를 안 외워오고 그냥 입만 벌리거나 조감독이 옆에서 읽어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 읽는 경우가 허다했지. 뭐 나중에 성우가 다 하니까. 그런데 최무룡 선배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내실을 다지는 사람이었지. 메소드 연기의 대가였고 늘 끊임없이 새롭게 변신하는 배우였어. 물론 다른 좋은 선배 배우들이 많았지만 자기만의 확고한 원칙과 ‘폼’이 잡혀 있는 최고의 배우였지. 그래서 한번은 최민수 를 만나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내가 민수 백일잔치도 가고 어렸을 때부터 쭉 봐왔거든. 이제 작품으로 만날 일은 없고, 전에 무슨 행사장에서 만난 적 있는데 머리에 두건 쓰고 수염 기르고 요란한 청바지 입고 왔기에 ‘야, 너 허리에 도끼만 차면 딱이겠다’고 한 적 있어. (일동 대폭소) 연기자로 치면 ‘성골’ 출신 배우고 또 한때 얼마나 잘했어? 멈추지 말고 좀 더 하면 정말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있을 텐데. 마스크도 얼마나 좋아. 참 아쉬워, 한번 만나서 얘기해야지.” 그렇게 그는 한국영화사 최고의 배우로 최무룡을 꼽았다. 그러면서 앞선 시리즈에서 오제도 검사를 연기한 최무룡에 이어 자신이 그 역할을 이어받은 <특별수사본부> 시리즈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로서는 얼마나 감격적인 캐스팅이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윤소라 신일룡 이순재 문오장 감독: 이원세 각본: 오재호 개봉극장: 대한 관람인원: 11,249명
1. 시대물에서 괴기물까지 50편 연출 권영순 은 1956년 시대물인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1981년 < 사향마곡 >이란 영화까지 25년간 50편을 연출했다. 한국적인 영화제작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특정 장르를 고집할 수 없기도 하지만 권영순은 통속시대물로 감독 데뷔해서 코미디물, 액션물,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멜로물 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고 선도했다. 그만큼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행동 구역이 넓고 시각이 트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영순은 왜 시대물로 감독 데뷔를 했는가? 나는 시대상을 통해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56년은 한국영화사적으로 성장기였다. 1953년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포성이 멈췄다. 사회가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도 차츰 제작 열기를 더 해갔고 1954년부터 57년까지를 성장기로 부른다. 이 기간 4년 동안 총 1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56년에 30편이 개봉되었다. 1956년 개봉된 한국영화 30편 둥 절반이 역사물과 통속시대극이었다. 전창근 의 < 단종애사 >와 < 마의 태자 >, 윤봉춘 이 < 처녀별 >과 < 논개 >, 이규환 의 < 심청전 >, 김소동 의 <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 정창화 의 < 장화홍련전 >, 김기영 의 < 봉선화 >, 안종화 의 < 천추의 한 >과 < 사도세자 >,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 홍일명 의 < 벼락감투 >, 신현호 의 < 숙영낭자전 > 등 13편과 권영순 의 데뷔작 < 옥단춘 >을 합쳐 14편에 달했다. 1956년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전흔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어 멜로물과 청춘물이 자리매김하기 전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는 역사물과 통속시대물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권영순 도 1956년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한 것은 이런 영화 흥행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옥단춘>은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절개를 지킨 평양기생 옥단춘의 생애를 그렸는데 윤인자 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진규 , 최봉 이 공연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7년 권영순 은 김광주 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물 < 나는 너를 싫어한다 >와 라이트 코미디인 < 오해마세요 > 두 편을 감독했지만 흥행적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58년 연출한 코미디물 < 오부자 >가 흥행에 대성공을 함으로써 일약 유명감독으로 단숨에 가치를 올렸다. 영화 <오부자>는 화목하게 살아가는 오부자(五父子) 가정의 아들 4형제가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내용의 코미디물로 출연도 이종철 , 김희갑 , 구봉서 , 양훈 등 코미디언들 일색이었다. 이 영화는 1958년 4월 19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바람을 일으키더니 그 여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제작자 권철휘 는 큰 돈을 거머쥐었고 감독 권영순도 스타덤에 올랐다. < 오부자 >를 감독한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권영순 으로서는 감독 절정기였다. 감독 활동은 1981년까지 했지만 1958년부터 1965년 가지 이 기간 동안 권영순은 < 흙 > < 표류도 > 같은 문예물에 도전했고 대륙활극 < 정복자 >로 흥행의 줏가를 높였으며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 에서는 당대의 톱스타 김진규 . 김지미 . 김승호 . 박노식 등을 총출연 시켰으며 흥행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간 동안이야 말로 권영순 의 연출 감각은 최고 궝영순은 영출자로서 상승 곡선을 그었으며 다양항 장르를 체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2, 폭 넓은 연출세계- 다양한 장르 섭렵 권영순 감독은 세 번째 작품 < 오부자 >가 흥행에 성공 했지만 코미디물이란 한 장르에 집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섭렵에 들어간다. 그 당시 한국영화 게작계 풍토나 감독 자신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계속해서 몇 작품 코미디물을 연출할만한데 권영순은 안주정착하지 않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네 번재 작품으로 멜로물 < 한 많은 청춘 >을 감독한다. 이 영화는 소매치기와 그의 도움을 받는 여대생과의 순정 연애를 담았는데 황해. 김미선이 주연했고 안성기 의 아역배우 데뷔작이기도하다. 이때부터 권영순 감독은 거침없는 다양한 장르 섭렵에 돌진한다.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권영순 만큼 여러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드물다. 통속시대물로 데뷔해서 코미디물, 멜러물, 문예물, 반공물, 앳션물, 검객물, 역사물에서 말년의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권영순 만큼 다양한 영화 쟝르를 소화한 감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시야가 넓고 감각이 빠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의 연출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속시대물 : < 옥단추 >(56) < 옥난 공주와 활빈당 >(60) < 가야금 >(64) * 코미디물 : < 오부자 >(58) < 오해 마세요 >(57) < 8통8반 여반장 >(64) * 멜러물 : < 나는 너를 싫어한다 >(57) < 한 많은 청춘 >(58)<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59) < 가는 봄 오는 봄 >(59) < 양지를 찾아서 >(59) < 장미의 곡 >(60) < 그리운 얼굴 >(60) < 정과 정 사이에 >(72) < 모정 >(72) <축배> < 산녀 >(73) < 불꺼진 창 >(76) *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62) < 에밀레종 >(68) * 반공물 : < 국회 푸락치 >(74) * 문예물 : < 흙 >(60) < 표류도 >(60) *액션물 : < 목숨을 걸고 >(62) < 남아 일생 >(65) < 무적자 >(66) < 의리에 산다 >(70) < 6인의 난폭자 >(70) * 검객물 : < 비호 >(69) < 쌍용검 >(69) < 무정검 >(69) < 백면검귀 >(69) < 유정검화 >(70) < 복수의 마검 >(70) < 다섯개의 단검 >(71) * 괴기물 : < 대지옥 >(72) < 반수반인 >(75) < 용사왕 >(76) < 사향마곡 >(81) 권영순 이 연출한 50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기본이고, 반공물에, 액션물, 검객물에다 특히 이광수 원작소설 < 흙 >과 박경리 원작소설 < 표류도 > 2편의 문예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권영순 감독은 말련에 괴기물에 심취하여 여기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한 때는 다작 감독이기도 했다. 1960년과 1969년에는 한 해에 5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한해에 최고로 10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 감독이 있기도 하지만 한 해에 5편 연출도 대단한 다작으로 봐야 한다. 권영순 감독의 다작과 1970년 전후해서 낮은 제작비의 검객영화를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빠른 작업 속도가 큰 몫을 했다. 권영순 감독의 현장 작업속도는 영화계에서 최고로 꼽는 기능인이었다. 그가 빨리 작업을 진행한 날은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할 정도였다고 그의 조감독들은 증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3, 현장의 고집 센 기능주의자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집 센 독재자였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 진행속도가 빠른 만큼 감각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의 순발력과 회전이 팍팍 돌아가 촬영 현장은 <레디 고>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그대신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스탭들의 조언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격하는 고집 센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조감독이나 촬영기자, 조명 기자의 조언을 일체 듣지 않고 자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고 한다.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많은 권영순 감독이었지만 신통하리만큼 현장 촬영에는 한 치의 착오도 없었다고 당시의 조감독들은 증언했다. 그이 현장 고집은 유명해서 조감독이 조언하면 ''너가 감독되면 그렇게 하라''고 일축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뚝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했겠는가? 따라서 제작자들에게 권영순 감독의 인기는 최고였다. 촬영 속도가 빠른 만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제작비가 절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촬영현장에서 진행속도가 빨라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권 감독ㅇ 몸소 시연을 해보일 만큼 적극적인 연출을 했다. 특히 액션물에서 격투 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장에서 열정이 촬영이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한 탓인지 촬영장 밖에서는 술을 말술로 마셨다고 한다. 촬영장 안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고집센 독재자였고 일상에서는 술을 사랑해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권영순 감독은 1992년 5월 23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23년 출생이니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여운이 남은 아쉬운 죽음이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은 권영계(權寧桂). 일본대학 문학부 졸업. 유족으로는 부인과 스튜디어스 출신 외동딸이 남아 있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3년 3월 9일 경북 안동 출생 1992년 5월 23일 사망 1956년 < 옥단춘 >데뷔 <작품명> 1956 옥단춘 1957 나는 너를 싫어한다 / 오해마세요 1958 오부자 / 한많은 청춘 1959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 가는 봄 오는 봄 / 양지를 찾아서 1960 흙 / 표류도 1962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1965 모녀봉 1966 무적자 1968 풍운의 임난야화 1969 무정검 / 백면검귀 1970 유정검화 / 의리에 산다 / 복수마검 / 육인의 난폭자 1971 다섯개의 단검 1972 정과 정 사이에 / 모정 / 대지옥 1973 산녀 /축배 1974 국회프락치 1975 인사여무 / 태백산맥 1976 불꺼진 창 1988 칠삭동이의 설중매 등 5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