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의 신부
- 감독
- 프랑크 로담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스팅, 제니퍼 빌즈, 안소니 하긴스
이경미 의 < 미쓰 홍당무 >는 2008년에 나온 한국 영화들 중 가장 심각한 작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단지 ‘코미디’라는 장르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간단하고 자명한 사실을 놓치고 지나간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검토해보라. 당시 나온 영화들 중 <미쓰 홍당무>만큼이나 캐릭터의 고통과 고민을 전면으로 끄집어내고 어떤 냉소나 타협 없이 진지하게 바라본 영화가 얼마나 되나. 이 영화는 진짜로 하드보일드하다. 반대로 보면 < 미쓰 홍당무 >의 하드보일드한 접근법이 먹힐 수 있었던 것은 이경미 가 이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선택한 장르가 코미디였기 때문이다. 안면 홍조증이 있으며 옛날 사제지간 사이였던 같은 학교 선생 서종철을 짝사랑하는 러시아어 교사 주인공 양미숙은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웃긴다. 별다른 계획도 생각도 비전도 없으면서, 무작정 서종철이 동료 러시아어 교사인 이유리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막기 위해 서종철의 딸인 제자 서종희를 끌어들여 온갖 유치한 소동을 벌인다는 이야기는 더욱 웃기다. 이 우스꽝스러움을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영화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공이 살고 있는 험악한 환경을 적당히 윤색하는 것이 된다. 우스꽝스러운 존재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야 한다. 단지 그렇다고 그 우스꽝스러운 존재의 비극성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한국 코미디의 공식을 보자. 대부분 이들의 공식은 비슷하다. 4분의 3정도는 정말로 괴상한 인물을 등장시켜 코미디를 만든다. 그러다가 4분의 3지점 이후부터는 갑작스럽게 멜로드라마로 전환해 눈물을 뺀다. 외국 관객들에게 이 전환은 괴상하며 거의 컬트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의 눈에는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주인공이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괴상하다고 해도 그들은 반드시 영화가 끝나기 전에 사회와 타협의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 엽기적인 그녀 >를 예로 든다면, 그건 폭력적인 판타지에서 순정만화 주인공으로의 전환이다. 얼핏 보면 그럴싸해 보이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한국식 항복이다. 무난한 사회성만을 강요하는 사회적 폭력에의 굴복이다. < 미쓰 홍당무 >에서는 그런 전환이나 항복의 지점이 없다. 영화 후반에 법정영화를 연상시키는 어학실 장면이 나와서 주인공들이 빠져 있는 거짓과 집착과 착각의 거미줄을 정돈해주긴 한다. 이들은 이를 통해 그들이 갇혀 있던 난장판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간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일반적인 한국 코미디 영화식 전환이 아니다. 양미숙과 어쩌다가 공범자가 된 전교 왕따 서종희에게는 개선의 가능성이 없다. 그들은 여전히 이전처럼 우스꽝스럽고 오싹하며 어리석다. 영화가 끝나도 사회는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영화가 끝날 무렵 사회의 폭력은 거의 물리적 린치와 같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영화의 결말은 그래도 낙천적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장기적인 해피엔딩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 미쓰 홍당무 >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를 일종의 공포물, 그 중에서도 괴물 영화로 보았다. 관객들을 무섭게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타자화 되기 마련인 괴물을 연민의 대상으로 보게 하는 그런 종류의 영화 말이다. 나는 <프랑켄슈타인>과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를 떠올렸고, 종희가 학교에서 겪는 무심하게 일상화된 집단 따돌림의 가해자들이, 온갖 종류의 농기구들과 횃불을 휘두르며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쫓아 세트장을 달리던 유니버설 공포 영화의 엑스트라들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팀 버튼의 작품들과 비교했다. 비주얼과 영화적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절대로 정상적인 세계와 타협과 공존이 불가능한 두 괴물과 같은 주인공들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좁고 이상한 세계를 이해해주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이야기의 유사성은 부인할 수 없지 않겠는가. 나에게 < 미쓰 홍당무 >의 에필로그는 < 크리스마스의 악몽 >에서 잭과 샐리의 마지막 이중창만큼 아름답다. 단지 그 장면에도 나오는 불쌍한 피부과의사 박찬욱 선생도 같은 의견일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