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트 판사
- 감독
- 존 포드
- 제작년도
- 1934
- 출연
- 윌 로저스, 톰 브라운, 아니타 루이즈, 헨리 B. 월델
“집중, 집중.” < 저지 프리스트 > 첫 장면에서 초상화처럼 정면으로 찍힌 윌리엄 프리스트 판사(윌 로저스)는 의사봉을 두들기며 카메라를 향해 꾸짖듯 말한다. 그런 다음 정작 자신은 쥐고 있던 신문으로 눈을 돌린다. 다소 당황스런 이 장면은 이어진 크레딧 시퀀스 다음 장면에서 흑인 제프 포인덱스터(스테핀 펫칫)의 닭 절도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 시퀀스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프리스트 판사는 검사의 열띤 논고가 이어지는 동안 방청객에게는 잘 들으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자신은 재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신문 읽기에 계속 몰두하고 있다. “포드는 가장 브레히트적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제시한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이 말을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보다 더 잘 예시하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방청객에게 경청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경청하지 않는 판사, 사건 자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과시하듯 딴청을 피우는 판사, 피의자가 실제로 절도를 했는지 여부보다 그가 메기 낚시 미끼로 뭘 썼는지가 더 궁금한 판사. 피의자가 자리에서 졸고 있자 “깨워. 이 법정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판사. 첫 장면에서 프리스트 판사가 카메라를 보며 호통 칠 때, 그 호통은 법정의 방청객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실한 책무 이행자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이 장면은, 프리스트가 성직자를 뜻하는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자신을 법 위의 존재, 도덕적 확신의 존재, 그리고 서사적 규율 밖의 존재로 제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엉뚱한 희극처럼 보이는 첫 재판 시퀀스는 법정 공방도 생략된 채, 프리스트 판사와 피의자가 낚시를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어눌한 흑인이 어떻게 절도 혐의를 벗게 되었는지, 아니 혐의를 벗었는지 여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프리스트 판사처럼 존 포드도 재판에 무관심하다. 서사 전체를 통틀어 프리스트의 관심사는 두 가지밖에 없다. 낚시(혹은 크리켓 게임)와 조카의 로맨스. 존 포드는 이 게으른 판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직무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뒤, 사랑의 중재자로서의 면모에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19년 뒤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자 걸작 < 태양은 밝게 빛난다 >(1953)에 필적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지 프리스트>는 포드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이 영화엔 소란과 신명에 대한 포드의 도취가 처음으로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직분과 임무를 잊은 듯 혹은 서사가 자신이 제시한 사건을 잊어버린 듯 발산되는 디오니소스적 파토스의 원형이 여기 있다. 이 도취는 역시 윌 로저스가 주연을 맡은 이듬해의 < 굽이도는 증기선 >(1935)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며, 이후 포드 영화에서 가까스로 억압될지언정 결코 삭제되지 않는 정념의 용암이자 영화적 활력의 원천으로 쉼 없이 작동한다. 이와 연관된 다른 하나는 포드의 주인공의 도덕적 이중성이 이 영화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포드의 주인공에게는 공동체로부터 도덕적 책무가 부과돼 있지만, 그는 자신의 책무에 은밀히 저항한다. 그는 신성한 책무를 훼손(< 젊은 날의 링컨 >)하거나 일시적으로 망각(< 황야의 결투 >)하거나 그로부터 도피(< 도망자 >)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대개 갖가지 방식으로 실패한다. 포드 영화에서 공동체적 도덕과 사적 윤리는 끝없는 내적 교전을 벌이며, 그의 서사에는 임무의 완수를 향한 필연적 전개라는 표면 아래, 이 내적 교전의 자의적 혹은 우연적 해소로 귀결되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음각되어 있다. 프리스트 판사의 이중성이야말로 공동체의 의무를 짊어진 이후 포드의 주인공들의 숨겨진 분열증을 예기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윌리엄 프리스트는 순회재판소 판사(선출직)로 30년간 일해 왔지만 요즘은 낚시와 크리켓이 일과의 대부분이다. 죽은 형의 아들 제롬이 법률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돌아온다. 제롬은 엘리 메이를 사랑하지만, 제롬의 어머니는 엘리 메이가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고아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주 상원의원이자 법률가 호레이스 메이듀의 딸 버지니아와 결혼시키려 한다. 프리스트는 제롬과 엘리 메이를 맺어주기 위해 갖은 꾀를 낸다. 그러던 중 폭행 사건과 재판이 벌어지고, 프리스트는 피의자 밥 길리스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카 제롬과 함께 프리스트는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 법정에 나서 그를 변호한다. 영화의 배경은 1890년대, 켄터키 주의 한 소도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프리스트를 포함한 이곳 주민들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북군(Union)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한 남부 연합(Confederate)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프리스트는 남부인의 기질을 발휘하고 이용해 밥 길리스의 방면 및 제롬과 엘리 메이의 결합이라는 숙제를 해결한다. 몇몇 포드 영화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을 소재로 다룬 미국 영화를 볼 때, 우리 같은 외국 관객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남부적인 것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향수다. 미국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만 바라보면 이 향수는 노예제도 옹호와 같은 터무니없는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다. 여기엔 제도의 선악과 무관하게 남부 연합이 표상하는 모종의 모럴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미국 학자의 견해를 빌려야 할 것 같다. 노예옹호론자들 뿐만 아니라 남부 충성파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러하다. “북부인들은 기록과 돈에만 눈이 먼 야비하고 궤변적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반면 남부인들은 “관대하고 기사도 정신이 뛰어나며 친절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남부 연합에 대한 향수에는 성문법이 지배하는 북부의 합리적이며 근대적인 생활방식에 대항해 명예와 관습법을 존중하는 “남부의 생활방식에 대한 옹호”라는 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사의 숨은 이야기>, 범양사) 켄터키 주는 남북 전쟁 때 중립을 표방했으나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고 주민들은 남부와 북부로 갈라져 싸웠다. 하지만 켄터키 주엔 남부 연합에 대한 호의를 지닌 주민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스트 판사와 주민들 대부분은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에 소속돼 싸웠으며, 남부 연합 참전군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친밀함을 지니고 있다. 그 친밀함은 프리스트 판사에겐 법리는 물론 사건의 사실관계에도 앞서는 것이다. 반면 웅변하기 좋아하고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엄격한 법률가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호레이스 메이듀는 북부의 태도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상한다. 요컨대 프리스트의 남부적 모럴(관습법과 명예)과 판사라는 직책(성문법과 합리)은 불화가 예정된 것이며,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은 이 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엄격한 사실에 근거해 판정해야 하는 판사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위반하면서까지 흑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편에 선다는 점에서 그를 일반적인 노예제도 옹호론자와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우리로선 긍정적인 의미의 남부적 모럴을 황야의 율법에도 문명의 규율에도 속할 수 없는 서부사나이의 모럴과 겹쳐놓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프리스트의 정치적 모호성은 곧 존 포드의 모호성이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남부인의 초상을 그린 포드는 5년 뒤에 가장 위대한 북부인의 초상을 담은 <젊은 날의 링컨>을 만든다. 아마도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포드 자신의 범주화할 수 없는 이런 내적 모순을 투영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드의 첫 유성 서부극 < 역마차 >보다 5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저지 프리스트>를 포드의 또 다른 유사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 시퀀스로 시작한 <저지 프리스트>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재판 시퀀스로 끝난다. 앞서 말했듯 첫 재판에서 프리스트 판사는 제프의 절도 여부는 무시하고 그가 옛 북군 장군의 하인이었다는 것과 메기 낚시를 잘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후의 서사 전개는 마지막 시퀀스인 두 번째 재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내 생각에 두 번째 재판은 포드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시퀀스의 상위에 오를만하다. 이 재판의 피고는 “많이 일하고 말이 없는” 타지 출신의 일꾼 밥 길리스이다. 프리스트와 목사 외엔 그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엘리 메이 자신을 포함해, 알지 못한다. 밥은 엘리 메이에 대한 동네 남자들의 험담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고 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프리스트 판사는 주먹다짐 현장에서 밥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판사석에 앉지 못한다. 증인석에 앉은 밥은 왜 주먹을 휘둘렀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의 살인 전과와 종신형 선고 전력을 알아낸 검사의 심문에 일체 답하지 않는다. 이때 프리스트가 변호사로 등장해 기막힌 계략을 실행한다. 증인석에 앉은 목사는 비밀엄수 약속을 깨고 입을 연다. 전쟁 당시 남군의 포병대 대위였던 목사는 남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종신형 선고자들로 부대를 충원했다. 목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출한 경험담 그리고 이제껏 그가 딸을 위해 매달 생활비를 자신을 통해 전달해온 사실이 목사의 입으로 진술된다. 대부분 남군 병사였던 노인들로 채워진 배심원석은 목사의 증언이 진행되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 프리스트의 신호에 따라 재판소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프는 하모니카와 북으로 남군의 행진가였던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목사가 일어서서 그 병사가 바로 밥 길리스라고 지목하자, 배심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제프 데이비스(남군 연합의 대통령) 만세’ ‘밥 길리스 만세’를 외치고 재판은 중단된다. 법정은 난장판이 되고, 흑인들은 흥겨운 딕시 연주를 계속하며, 이 소란은 곧바로 남군 베테랑들의 떠들썩한 축하 행진으로 이어진다. 행진하던 베테랑들은 주민들 틈에 있던 밥 길리스를 행렬에 끌어들이고 행진을 계속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부동의 재판은 역동의 난장으로 바뀌고, 작은 사실들의 오점은 큰 정신적 우위로 무화된다. 엄격한 정신이 소유자라 해도 이 벼락같은 난장의 활기와 신명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저지 프리스트>는 세부적 규칙과 사소한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북부인의 모럴 혹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침 뱉는다. 이것은 포드 중기작에서 ‘주정뱅이 천사’라는 전형적 역할로 등장해온 포드의 형 프랜시스 포드의 침 뱉기로 구현된다. 호레이스 메이듀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멀리 떨어진 타구(침통)에 정확히 침을 명중시켜 법정을 번번이 웃음바다로 만들던 이 주정뱅이 배심원은 남부군 베테랑들의 행진에 경의를 표하는 호레이스의 모자 안에 다시 한 번 정확히 침을 명중시킨다. 포드는 예의와 매너로 자신을 치장하는 호레이스 같은 인간을 포용할 생각이 없다. 오늘의 눈으로 이 마지막 재판 시퀀스의 결함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이 재판에서는, 첫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행 사건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피의자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으로 대체된다. 이는 사실상 근대적 법체계에 대한 부정이다. 더구나 이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 일종의 선동으로 이뤄진다. 두 재판에서의 프리스트의 선택이 모두 약자를 구하기 위한 시도라 해도 이건 위험한 포퓰리즘 아닐까. 또 다른 문제는 딕시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반대한 남부 연합의 군가를 연주함으로써 남부인의 찬미에 가담하는 이 장면에는 만든 사람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지 프리스트>에는 이런 비판을 논박할 증거가 없다.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주민들의 흑인 린치 장면과 프리스트가 린치 중단을 호소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스튜디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존 포드>, 이모션북스) 리메이크 작인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되살아난 린치 장면이 삭제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보다 모호하고 복합적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장면이 변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저지 프리스트>는, 개봉 당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당대의 진보적 관객이라면 온전히 긍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영화였을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의 관객 그리고 외국 관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대답은 존 포드가 오히려 결함과 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사의 직무 태만을 통해 근대적 재판에 대한 무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딕시의 연주를 굳이 흑인들에게 맡김으로써, 포드는 결함을 최소화하거나 위장하는 게 아니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말대로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드러낸다. <저지 프리스트>는 엄숙한 재판을 신명의 축제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다. 이 축제는 얼룩과 오점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누군가는 그 얼룩과 오점 때문에 이 영화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그 얼룩과 오점의 성찰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해도 최종적 판단은 미루는 게 좋을 것이다. 존 포드의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증기선이 질주한다. 목재를 태우고, 목재가 떨어지자 뜯어낸 갑판을 태우고, 구명보트를 태우고, 밀랍인형을 태우고, 악마의 음료이자 만병통치약인 럼주를 태우며 질주한다. 닥터 존(윌 로저스)이 이끄는 낡은 ‘클레어모어 퀸’ 호는 폭발할 듯 불꽃을 뿜으며 1890년대의 미시시피 강을 달린다. 태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태우자(존 포드의 형인 프랜시스는 여전히 술에 취한 채 동료 선원도 태우려 한다) 비로소 결승점에 도착한다. 목적지에 이르자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간발의 차이로 닥터 존의 조카 듀크는 교수형을 면하고, 그들 가족은 또 다른 증기선 ‘프라이드 오브 파둑’을 획득한다. 증기선은 자기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리며, 영화는 서사의 모든 것을 태우고 달린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이 걸출한 액션영화라면(하스미 시게히코는 이 영화를 최고의 액션영화 50편 중의 하나로 뽑았다), 증기선의 물리적 운동감 때문이 아니다. 사실 이 증기선은 그렇게 날렵하지도 빠르지도 않으며, 영화의 서사도 민첩하기는커녕 태평스럽고 느리기 짝이 없다. 태워질 것이라 예상할 수 없었던 것들,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기 힘들었던 차이들이 화로에서 한몸이 되어 불타오른다. 불타오르며 둔중한 증기선을 힘차게 밀고 간다. 우리를 사로잡는 건 배의 속도감도 불의 물리적 형상도 아닌, 배의 육체도 서사의 육체도 다 태워버릴 듯한 난폭하고도 맹렬한 불의 활동이다. #1 #2 1939년 < 역마차 >가 나오기 전까지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위대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윌 로저스를 주연으로 기용한 세 작품(< 닥터 불 > < 저지 프리스트 > < 굽이도는 증기선 >)과 < 순례여행 > <에어 메일> 등을 제외하면 그가 <역마차> 이전에 만든 20여 편의 유성 영화들은 어딘지 허술하고 독창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물론 < 밀고자 >(1935)로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긴 했지만 이 영화는 과대평가된 포드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동년배인 킹 비더와 조셉 폰 스턴버그가 무성 시대의 말기와 유성시대의 첫 10년 동안 자신의 대표작들을 쏟아낸 것과 비교하면, 존 포드의 1930년대는 차라리 탐색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은 이 탐색기의 의심할 수 없는 최고작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 포드의 거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처음엔 자신을 한 사건의 서사로 제시하지만 사건이 거의 잊혀질만큼 그것의 장악력이 느슨해지면서, 그 틈새들 사이로 유머와 헛소동, 잉여의 몸짓과 표정들, 그러니까 삶의 조각들과 세계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빛을 내며 활동하기 시작한다. 포드는 이 조각들의 난장을 플롯의 기예로 정리할 생각이 없다. 대신 하나의 결정적 활동 안에 그들을 밀어 넣는다. 미시시피 강에서 증기선 경주가 벌어지는 마지막 20여 분의 시퀀스는 그 조각들이 불타오르며 벌어지는, 영화사가 기억해야 할 황홀한 축제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닥터 존은 미시시피 강 일대를 돌아다니며 싸구려 럼주를 만병통치약으로 속여 판다. 그는 한때 항해사였고 유일한 가족은 조카인 항해사 듀크다. 두 사람은 닭장처럼 초라하고 낡은 증기선 ‘클레어모어 퀸’을 최근에 구입해 들뜬 상태다. 듀크가 늪지대에 사는 소녀 플리티 벨과 사랑에 빠져 그녀를 데리고 나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녀에게 추근대던 선원을 살해한 것이다. 선원이 먼저 칼을 뽑았기 때문에 정당방위이지만, 유일한 목격자인 얼뜨기 예언자 ‘새로운 모세’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듀크의 사형이 확정되고 항소는 거부당했다. 사형은 증기선 경주가 끝나는 시점에 경주의 결승점에서 집행될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듀크의 결백을 증언할 ‘새로운 모세’를 찾아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여기엔 멀쩡한 사람이 없다. 주인공인 닥터 존은 사기꾼 약장사이며, 그의 조카는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 자신을 새로운 모세, 새로운 엘리아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엉터리 예언자들, 자수하러 온 살인자에게 귀찮다는 듯 감옥 열쇠를 던져주는 보안관, 사형집행을 앞두고도 증기선 경주에 더 관심이 많은 주지사, 항상 취해있는 알콜 중독 기관사 에페(프랜시스 포드) 등등, 이곳은 사기꾼과 가짜 예언자와 주정뱅이와 게으른 관리의 세계다. 여기엔 영웅도 악인도 없다. 신기하게도 포드는 이 비루한 세계를 더없이 평화롭고 따뜻한 곳으로 그려놓았다. 닥터 존과 ‘새로운 모세’는 적이지만 둘은 부딪히는 일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기 치며 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미 벌어진 정당방위 살인과 곧 벌어질 부당한 사형집행.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문제를 포드는 사소하게 다룬다. 그의 인물들은 종종 그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의 서사는 스스로 종종 그 문제를 잊어버린 것처럼 진행된다. 인물도 서사도 주어진 그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현재에 몰두하는 것이다. 포드는 때로, < 황야의 결투 > 혹은 < 웨건 마스터 >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영화가 심각한 문제를 다룰 때조차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혹은 영화가 사건을 등장시킨다 해도 사건을 다루는 매체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중심 사건조차 서사의 한 조각일 뿐이거나 때로 핑계에 가깝다. < 굽이도는 증기선 >에서 살인과 사형집행은 무엇의 핑계인가. 혹은 살인과 사형집행을 사소화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결국 증기선의 연료가 될 두 소재, 럼주와 밀랍인형을 먼저 떠올려보자. 닥터 존은 럼주가 전설의 인디언 처녀 포카혼타스의 처방약이라고 선전한다. ‘새로운 모세’는 럼주가 악마의 음료라고 주장하며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성령의 리본을 판매한다. 각각 전설과 성경을 근거로 럼주를 찬미하거나 규탄하는 것이다. 의미의 원천인 전설과 성경이 여기선 두 사기꾼의 효과적인 선전도구로 작동한다. 하지만 포드는 이 사기행각들의 악덕을 드러내기는커녕 그것에 유쾌한 활력과 정감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주정뱅이 에페가 성령의 리본을 달고 악마의 럼주를 들이키며 즐거워할 때, 그는 사기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조작된 의미들과 유희를 벌이는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존재처럼 보인다. 증기선 안에 설치된 밀랍인형 박물관은 모세와 선지자들, 나폴레옹, 조지 왕, 그랜트 장군 등 위대한 전설을 거느린 역사적 인물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영리한 사기꾼 닥터 존은 그들을 남부의 농부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로 바꿔버린다. 조지 왕은 조지 워싱턴으로, 북군의 그랜트 장군은 남군의 리 장군으로, 모세는 무법자 제시 제임스로 명찰을 바꿔단다. 이 영화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는, 박물관을 부수러 온 성난 농부들이 제시 제임스로 앞에서 겁을 집어먹고, 리 장군에게 경례를 하는 장면이다. 총을 든 제시 제임스는 좀 전까지 모세였고, 리 장군은 좀 전까지 자신들이 싫어하는 그랜트 장군이었다. 물론 둘 다 밀랍인형이라는 모조품이다. #3 #4 #5 #6 럼주와 밀랍인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들 속에서 역사와 전설, 신화와 성경은 제멋대로 전용되며 조작된다. 진리의 원천, 의미의 심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 이곳에서 모든 것은 표층의 유희로 전유 되어 끝없이 변형된다. < 굽이도는 증기선 >가 기호 놀이라면 기의를 따돌린 기표들의 아방가르드적 유희가 아니라, 임의적이고 일회적이며 종종 기만적인 의미작용 자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기호놀이다. 이제 이 영화에서 사건의 역할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형집행은 사건으로서의 중대성 때문이 아니라 이 기호놀이의 종결자로 동원된 것이다. 클레어모어 퀸은 유일한 증인 ‘새로운 모세’를 찾아 사형집행 전까지 결승점에 도착해야 한다. 그 둔중한 육체를 전속력으로 약동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에너지이며 힘이다. 이제 주변 사물들은 그것의 유동하는 의미와 상징이 아니라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수한 물질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조지 워싱턴, 리 장군, 제시 제임스, 악마의 음료, 만병통치약은 사라지고 오직 연료로서의 물질들만 남았다. 사형집행은 기만적이고 유희적인 기호놀이를 중단시키고, 모든 것을 힘과 속도의 문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목재는 물론이고 갑판도 구명보트도 태워버린 뒤, 닥터 존이 외친다. “박물관을 태워.” 이제 이름들과 의상들이 상징들이 사라지면서 밀랍인형들이 불탄다. ‘박물관’마저 다 태워버리자 화로는 다시 죽어간다. 부당한 사형집행을 막을 시간도 사라져 간다. 이때 주정뱅이 에페가 화로 곁에서 럼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그를 본 ‘새로운 모세’가 화를 내며 술병을 빼앗아 화로에 던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 악마의 음료가 그토록 가공할만한 연료인지 몰랐을 것이다. 누가 주정뱅이를 비난할 것이며, 거짓예언자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우연의 간계는 때로 악덕을 천상의 미덕으로 바꿔놓는다. 럼주가 마지막 연료로 등장해 화로에서 폭음을 내며 배를 집어삼킬 듯 불꽃을 내뿜을 때, 탄성을 참기 힘들다. 닥터 존에게 럼주는 이제 조카의 죽음을 막은 진정한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새로운 모세’에게 이것은 악마의 음료를 태워 없애며 한 생명을 살린 신성한 의식이 되었다. 두 사람은 사기꾼이며 엉터리 예언자였고 또한 서로 적이었지만, 어떤 논쟁도 대결도 없이 럼주를 함께 불태우는 행위 하나만으로 자신의 사기와 엉터리 예언을 자기도 모르게 정당화한 것이다. #7 의지와 우연, 미덕과 악덕들이 모두 하나의 불꽃으로 타오르자 비로소 간발의 차이로 행복한 목적지에 이른다. 이 대책 없는 서사의 낙천성은 세계관의 낙천성과 무관하다. 그것은 의지의 뜨거움이 아니라 운명의 차가움에 대한 긍정이며, 운명의 차가운 힘을 알게 된 자의 유희정신이다. 존 포드는 후에 “이건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었는데, 나서기 좋아하는 새 매니저(대릴 F. 자눅을 말한다)가 와서 코미디를 다 덜어내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불평했지만, < 굽이도는 증기선 >는 여전히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 중 하나이고, 소란과 난장의 활력이 영화 전부를 지배하는 포드의 첫 유성영화이며, 그의 후기 대표작들을 예기하는 걸작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3주 전인 1935년 8월 15일, 윌 로저스는 비행기 사고로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를 누빈 카우보이, 신랄하고도 유머러스한 칼럼니스트, 보드빌과 연극과 영화를 오간 배우이자 타고난 익살꾼이었던 로저스는 대통령에서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당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한 사내였다. < 굽이도는 증기선 >의 원래 엔딩은 로저스가 또 다른 증기선 선장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하는 장면이었지만, 그의 죽음 직후 그가 증기선에 편히 누워있는 지금의 엔딩 장면으로 바뀌었다. 원래 엔딩으로 상영할 경우 극장이 울음바다가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수작 < 데이 워 익스펜더블 >(1945)과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1946)를 잇달아 내놓은 존 포드는 마음속에 오래 품어온 영화 한 편을 완성한다. 그래엄 그린 Graham Greene의 소설이 원작이며 우울한 떠돌이 성직자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어떤 제작자도 원하지 않는 프로젝트였다. 여기엔 결투도 로맨스도 없었으며 멕시코 올 로케이션 촬영이어서 제작비 부담도 컸다. 포드 자신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릴 자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건 돈을 걸만한 상업영화가 분명히 아니야. 하지만 내 심장과 믿음은 이걸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이 영화를 위해 포드는 폭스의 연봉 60만 달러 계약을 거절하고, 자신의 프로덕션 브랜드인 아고시 Argosy를 법인화해 직접 제작에 나섰다. 결과는 처참했다. 아고시는 1백만 달러의 빚을 짊어지게 되었고 이 영화가 성공하면 포드의 또 다른 개인적 프로젝트 < 조용한 사나이 >를 지원한다는 RKO와의 계약도 무용지물이 됐다. 포드가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거의 전부 뜯어고치는 바람에 시나리오 작가 더들리 니콜스와의 사이도 틀어졌으며, 원작자 그래엄 그린도 “포드의 아일랜드식 카톨릭주의 때문에 내 원작이 희화화되었다”며 비난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멀어져갔다. 평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나쁜 편이었다. 포드의 열렬한 지지자인 린지 앤더슨조차 이 영화가 “과도하게 장식적이고 감상적”이라고 평했고 장 미트리는 “이론적 리얼리티를 지닌 이론적 드라마이며... 탈개인적이고 차갑다”고 비판했다. 오직 포드 자신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변호인이었다. “나는 이 영화 보는 게 즐겁다. 내게 이 영화는 완벽하다.” 무엇이 포드 스스로 ‘완벽’이라는 단어까지 쓰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왜 그토록 폄하되었는지도 짐작하기 힘들다. 1997년 이국 도시에서 낡은 VHS 테이프로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 기억한다. 우울한 표정의 한 사내가 대의도 명분도 없이 죽음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줄곧 어둠과 불안으로 가득했고,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야 사내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이게 정말 존 포드 영화인가? 사내의 선택에 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그 선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형언하기 힘든 압도적인 공기가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재발견을 기다리는 포드의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들판을 지나 무너진 성벽을 넘어 무엇엔가 쫓기듯 비틀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가 이 영화의 영웅인 신부(헨리 폰다)이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영웅의 등장이 이토록 불길하고 초라하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면 그는 아치형의 기둥이 끝없이 도열해 있는 회랑을 지나서 걸어온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타고 마을을 향해 간다. 그리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 영화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진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성경에서 시작된 옛날이야기이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주제이며 세계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영화의 촬영지는 멕시코이며 멕시코 정부 및 영화계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배경이 된 마을은 적도와 멀리 떨어진 허구의 공간이다. 누가 알겠는가.” 포드의 영화적 무대는 대개 미국의 서부이거나 아일랜드의 마을이었으며, 지리적 좌표와 역사적 시간과 연루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 도망자 >는 자신의 예외성을 처음부터 공표한다. 여기엔 특정한 시대와 장소도 지정되지 않고 신부를 비롯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이 자의식적 우화의 원본은 그래엄 그린의 소설 이전에 신약성경이다. < 3인의 대부 Three Godfathers >가 서부극의 세팅 위에서 예수 탄생기를 원용했다면, <도망자>는 초시대적 알레고리로 예수의 최후를 우울증적 서사와 표현주의적 영상으로 번안한다. 도입부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정체불명의 마을에 진입한 사내는 언덕 위의 폐건물과도 같은 버려진 성당으로 들어간다. 이어지는 3분여의 짧은 성당 숏 안에 포드는 극도의 간결함과 압축미로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단번에 드러내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한다. #1 #2 #3 #4 #5 신부는 긴 그림자로 성당에 입장한다(#1). 실루엣으로만 그의 모습이 드러나며 카메라 위치를 반대로 잡은 장면에서도 그는 여전히 검은 실루엣이다(#2). 그는 그림자 혹은 어둠의 존재이다. 그의 지친 듯 얼빠진 표정이 드러나면(#3), 그에게 드리워진 어둠이 그가 단순히 도망자라는 신분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의 상실과 밑 모를 불안이라는 내면의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형 십자가도 성상도 없는 성당에서 그를 맞은 건 부서질 듯 왜소한 나무 십자가들이다(#4). 남자의 뒤를 따라 성당에 들어온 여인 마리아 돌로레스와의 만남 장면에서 그의 불안한 존재감은 더 강조된다. 여인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둘러싸이지만 사내는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다(#5). 이 명암 대조는 관습적인 조명법을 교란한다. 신부는 어둠의 편에 여인은 빛의 편에 속해 있는 것이다. 여인이 묻고 남자가 대답하는 짧은 대화가 이어진다. “누구세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여기가 내 집이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 마을 남자들은 내가 다 알아요.” “........................” “혹시 경찰인가요?” “경찰을 피하고 있습니다.” “범죄자인가요? 도둑질하거나 살인을 저질렀나요?” “아닙니다. 난 신부입니다. 내 성당이지요.” 이 단문의 대화만으로도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단번에 드러난다. 아이를 안은 여인은 창녀이고 남자가 로마군에 쫓기는 예수처럼 경찰에 쫓기는 신부이며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여인이 “교회가 다시 열리나요?”라고 묻자 사내는 “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여인이 “세례를 못 받은 아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신부님이 여기 오신 건가요?”라고 묻자 사내는 역시 “아마도요”라고 대답한다. 사내는 자신이 이곳에 온 돌아온 이유와 자신이 할 일을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매춘부인 여인은 지금 빛을 받으며 구원자의 자리에 서 있고, 신부인 사내는 범죄자처럼 어둠 속에서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 창녀=구원자라는 암시가 < 역마차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일곱 여인들 7 Women>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 도망자 >는 무엇보다 먼저 < 젊은 날의 링컨 >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내의 망설임 때문이다. 역시 헨리 폰다가 연기한 젊은 링컨에게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망설이듯 전진하는 우아하고도 기묘한 움직임이었다.(4회 참조) <젊은 날의 링컨>애서 자신의 선택이 자유의지인지 운명의 간계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공동체 영웅, <도망자>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성직자는 동질의 인물이다. 그들을 일반적 대중영화에서의 고결한 속인과 대비되는 범속한 성인(聖人)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존 포드의 영화를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범속성의 몸짓이다. 그들에게 종교적(혹은 공동체적) 소명은 고결한 사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감옥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대의에 투신하는 게 아니라 대의의 실행자라는 자리에 불려 나온 것이다. 하여 그들은 종종 그 자리에 가기를 원치 않는 듯 느리게 움직이고 엉뚱한 심술을 부리며, 불안과 공허의 몸짓으로 프레임을 채우고 때로 자신의 지위를 부인하기도 한다. < 도망자 >의 사내에게 목숨을 걸고 자신의 교회로 돌아온 결단과 “아마도요”라는 망설임의 발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요”라는 말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소극적이고 우회적이지만 그러나 완강한 부인의 몸짓이다. 사내가 신부임을 알게 된 마리아가 몸을 숙여 그의 손에 입 맞추려 하자, “그러지 마세요”라고 만류한다. “그러지 마세요”라는 말은 이후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는 지금 성직자의 임무를 위해 돌아온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계속 부정하려 한다. 정확히 말하면 짧은 순간이나마 소명을 잊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슬픔에 젖은 표정과 느린 동작, 낮고 우울한 목소리는 그 시도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임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는 다시 소명을 부인하고 탈출을 시도하겠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 덧없는 시도의 여정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불안하며 고요한 성당 장면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예감케 한다. < 도망자 >를 보고 로베르 브레송의 <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 >(1951)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회의하고 불안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성직자, 그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환경, 사제의 죽음이라는 귀결 등은 물론이고 에피소드 병렬의 구조, 연극적인 말투와 연기, 인물의 텅 빈 표정과 동작에 대한 모더니즘적 몰두에서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이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어느 시골사제의 일기>는 종교적 외피 아래 숨겨진 리비도가 점액질의 촉감을 만들어내지만, <도망자>는 엄연히 고전적인 캐릭터 스터디의 면모를 갖고 있다. 일견 포드적인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망자>는 포드적인 세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여기엔 신부 외에도 두 사내가 더 등장한다. 신부를 추적하는 장교, 그리고 현상수배범 그링고(워드 본드)이다. 돈을 밝히고 천박한 총독 일당에 비하면 장교는 잔인하지만 품위 있는 혁명가이다. 그는 내세의 구원을 경멸하고 현세의 행복을 부르짖는다. 우연히 마을에 도착하는 무법자 그링고는 내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서부극의 전형적 인물이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신부의 탈출을 돕다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세 인물의 공통점은 고결함 혹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다. 이 점이 근본적으로 관능적인 브레송과의 차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실패한다는 것이다. 무법자는 총 맞아 죽고 신부는 사형대에 오른다. 장교는 세속적 승리자이긴 하지만 그가 부르짖는 행복한 공동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되며, 신부를 총살할 때 그의 가책의 몸짓은 그 실패를 예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포드는 세 인물을 유기적으로 엮는 서사에는 무관심하다. 대신 세 인물을 한 공간에 모아놓고 그들의 선택과 행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세 사내는 서부사나이를 셋으로 나눠놓은 것 같다. 우울하고 불안한 성직자, 잔혹하고 강인한 혁명가, 무도하지만 따뜻한 무법자. 세 인간 유형은 실은 동일한 존재의 변주들이다. 자신의 신념 혹은 운명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 도망자 >를 그런 점에서 포드적 영웅의 해부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포드적인 것과 가장 멀어 보이는 이 영화야말로 포드적 세계의 훌륭한 입문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엔 그가 사랑한 인물들의 어두운 심연이 있고, 강렬한 표현주의적 영상과 아름다운 구도가 있으며, 실패한 구원의 서사가 있다. 다만 여기엔 포드가 그토록 사랑한 것처럼 보였던 유머와 헛소동이 없다. 포드는 왜 이 영화를 두고 ‘완전한’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2차 대전의 체험이 그의 마음을 유희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일까. 이 질문은 제대로 답해질 수도 없고 실은 불필요한 질문일 것이다. 평자로서 말할 수 있는 건 창작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의 작품 자체일 뿐이다. 대신, 이 질문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영웅의 선택의 과도함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신부의 선택은 표면적으로 과도하다. 죽음 직전에 이른 한 사내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위해 그는 자신이 방금 탈출한 곳으로 목숨을 걸고 되돌아간다. 두 번 스치듯 만난 것 외엔 어떤 인연도 없는 한 사내(신부는 이 현상범이 자신의 탈출을 도왔다는 사실을 모른다)의 구명이 아니라 고해성사가 자신의 생명을 걸 만큼 중대한 소명일까. 이 대목은 전 회에서 말한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걸려 있는 것이 목숨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라는 사실 때문에 얼마간 가려지긴 했지만, 프리스트 판사에게 장례식 주재라는 행위의 사소성에 비해 너무 큰 희생의 결단이 요청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상황과 행위의 비대칭, 다시 말하면 상황의 과소함과 그것이 요청하는 행위의 과도함의 불균형이라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의 도식이 S-A-S′(문제적 상황-해결의 행위-개선된 상황)라면 포드의 두 영화에서의 도식은 s-A-s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의 소문자 s는 과도한 행위를 요청한 상황이 영웅의 행위 이후에도 근본적으로 변함없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이 도식은 두 서사에서 결국 행위를 표시하는 대문자 A가 가장 문제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 태양은 밝게 빛난다 >를 말하면서 이를 ‘도덕과 윤리의 불안정한 동반에서 윤리만이 문제되는 상황으로의 이행’으로 요약한 바 있다. 그런데 < 도망자 >를 보고 나면 이 수정된 도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껴진다. 신부는 첫 시퀀스에서 돌아온 이유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신부가 다시 탈출한 뒤 은신처에서 의사에게 하는 말에서 들을 수 있다. “자만에 도취해서 생각했어요. 혹시 알아? 순교자가 될지.” 그에게 순교라는 선택은 상황으로부터 독립적이며 그 자체가 자기목적적인 행위이다. 신부를 되돌아가게 만든 죽어가는 이의 고해성사는 바로 이 순교를 위한 일종의 도구라고 볼 수도 있다. A는 s는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식은 s…A…s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순교 혹은 최종적 결단의 자기목적성, 자기충족성은 정말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자기완결적 행위인가. 오히려 우리가 포드의 영화에서 보는 건 공동체의 완고한 부도덕의 표정, 세계의 되돌릴 수 없는 타락의 그림자, 혹은 순교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의 몸짓이 아닌가. < 도망자 >를 지배하는 그림자와 폐소공포증적 어둠, 그리고 불안한 말투와 망설임은 그것의 표상이 아닌가.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영웅은 결단했지만 창녀들은 예정대로 추방되었고(< 태양은 밝게 빛난다 >), 마을은 잔인한 혁명가가 그대로 지배한다(<도망자>). 영웅의 결단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동일하다면 그 견고한 s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고 궁극적 행위자이며 영웅의 행위는 순교든 희생이든 부질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정말 과소한 것은 A이다. 그렇다면 이 도식은 다시 수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S)-a-(S)로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S-A-S′의 여러 변형 도식들로 말하려는 건 그들의 분석적 효용성이 아니다. 포드의 어떤 영화에서도 고전기의 원형적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S와 A는 끊임없는 불안정과 비대칭의 관계에 놓인다는 것이다. 종종 뒤돌아 떠나는 영웅의 뒷모습으로 은유 되는 주인공의 죽음은 이런 물음을 남긴다. 그것은 과도한 A, 혹은 과대망상적 행위의 증상인가. 아니면 과소한 a, 혹은 행위의 근본적 무기력의 증상인가. 이 물음은 포드 영화 이력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다. #6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을 말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엉뚱하게도 금주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신부는 가까스로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바로 다음 장면은 정갈하고 평온한 휴양지와도 같은 곳이다. 그리고 ‘IN ANOTHER STATE(다른 나라 혹은 다른 주)’의 ‘SANCTUARY’(은신처 혹은 성역)이라는 이 영화의 유일한 중간 자막이 떠오른다(#6). 유성영화에서 중간 자막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포드가 여기서 굳이 이 자막을 쓴 이유는 짐작하기 힘들다.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이 중간자막은 그 존재감 때문에 앞 장면과의 근본적 단절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탈출한 마을과 신부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이제 곧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마을에서 온 뱀과 같은 사내가 신부의 침실에 숨어들어 신부를 다시 꼬드긴다. 총에 맞은 무법자가 죽어가니 신부로서 마지막 고해성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신부는 금방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 죽음이 기다린다는 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시간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나라의 은신처’는 마을에 인접한 곳에 불과했다. 중간자막이 가져다준 단절과 평온의 예감은 한순간에 붕괴한다. 이 붕괴의 느낌은 충격에 가깝다. 주인공이 탈출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완전히 갇혀있다는 느낌. 신부의 소명이 벗어날 수 없는 감옥으로 실감되는 것, 앞서 말한 도식을 원용하자면 s가 (S)로 한순간에 변하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어떤 영화에서도 중간자막이 이처럼 감각적 충격의 진원이 되는 순간을 겪지 못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