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
- 감독
- 빔 벤더스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피나 바우쉬, 말루 에이로도 , 메크틸드 그로스먼
알모도바르의 1997년 작 < 라이브 플래쉬 >에서 빅토르(리베르토 라발 扮)와 엘레나(프란체스카 네리 扮)가 싸울 때 텔레비전 화면에는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범죄의 리허설>이 나온다. 그런데 영화 <라이브 플래쉬>의 내러티브와 영화 속 영화 <범죄의 리허설>의 장면이 묘하게 중첩된다. 엘레나가 떨어뜨린 총이 발사되자 <범죄의 리허설>의 여자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범죄의 리허설>에는 다리가 떨어져 나간 마네킹이 나오는데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다비드가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범죄의 리허설>에서 마네킹이 불타는데 <라이브 플래쉬>에서는 클라라(안젤라 몰리나 扮)가 빅토르로부터 결별을 통보받는 순간 불길에 갇힌다. 감독은 ‘범죄의 리허설’이 그 장면의 제목이기도 하다고 밝힌 바 있다. 알모도바르는 <라이프 플래쉬>처럼 영화 속에 다른 영화를 삽입하여 내러티브를 중첩시키고 강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예견하게 하는 방식을 즐겨 쓴다. 이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미장아빔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문학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그의 1893년의 일기에서 가문의 문장(紋章, blason) 가운데에 문장의 축소판 혹은 비슷한 아빔(en abyme)을 새겨넣는 것과 같은 작법을 선호한다고 밝힌 것에서 착안, 60여년 뒤 비평가 매그니가 이 용어를 창안했다. 그리고 누보로망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들의 논의를 거쳐 오늘날 예술 전반에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장아빔 기법은 작품 속에 다른 작품을 삽입하여 심연에 빠지는 효과를 주거나 상호텍스트성 혹은 자기반영성을 통해 작품의 형식을 확장할 때 주로 사용한다. 알모도바르는 <라이브 플레쉬>처럼, 영화 속에 텔레비전 화면을 비추는 미장아빔을 선호한다. 이는 프레임 속에 프레임이 생성되어 영화적 심연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을 주므로 다른 감독들도 종종 사용하는 낯설지 않은 기법이다. 그러나 알모도바르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더 개성적인 이유는 연극을 삽입하여 미장아빔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 이질적이고 낯선 연극 장르를 삽입하면 관객 사고를 영화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며 독특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극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는 연극 혹은 연극적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의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그녀에게 >의 티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 < 페인 앤 글로리 >의 《중독》은 영화 속에 연극 장면이 직접적으로 삽입된 예다. 또한, <욕망의 법칙>,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 >은 연극적 세트에서 연극적 대사를 기반으로 제작되었고, < 휴먼 보이스 >는 장콕도의 《휴먼 보이스》를 각색한 작품이다. 감독의 정체성에 연극이라는 프레임이 자리하고 있는 바, 그의 작품은 영화와 연극이라는 이질적 타 장르가 혼재하며 그만의 개성으로 확립된다.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앤딩 장면에는 독일의 저명한 무용가 (故)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춤연극)가 미장아빔으로 삽입되었다. 오프닝에 배치된 《카페 밀러》에서는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이 검정색 의자와 원탁, 회색 벽으로 가로막힌 무대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춤을 춘다.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남자는 여인이 달릴 때마다 필사적으로 의자와 원탁을 치우며 여인이 부딪치지 않게 보호하려고 애쓴다. 《카페 밀러》 공연장면의 롱테이크에 이어, 나란히 관람하고 있는 베니그노와 마르코의 미디움 쇼트가 연결된다. 눈을 감은 여인과 그녀를 보호하는 남성의 탄츠테아터는 코마상태에 빠진 알리시아(레오노르 와틀링 扮)와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 扮)를 돌보는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 扮)와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 扮)의 모티프적 형상인 셈이다. 그리고 앤딩의 배경은 남겨진 알리시아와 마르코가 관람하러 간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의 공연장이다. 무대 위의 초록색 풀과 그 사이로 낙하하는 물방울 그리고 무용수들의 꽃무늬 의상은 생명력 넘치는 태초의 에덴동산을 연상시킨다. 남녀 커플로 구성된 무용수들의 춤은 오프닝과는 정반대의 경쾌한 분위기다.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듯한 두 남녀 무용수의 모습에서 관객은 알리시아와 마르코가 연인으로 발전할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처럼 <그녀에게>의 오프닝과 앤딩의 탄츠테아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압축적으로 암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카페밀러》 -눈감은 무용수의 길을 터주는 남성 《마주르카 포고》 -커플들의 경쾌한 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영화의 관통선을 갖는 중요한 연극으로 삽입되었다. 주인공 마뉴엘라(세실라 로스 扮)가 젊은 시절 이 연극을 하며 남편을 만났고, 남편이 떠나고 홀로 키워 장성한 아들과 함께 연극을 본 후 교통사고로 아들이 죽는다. 그리고 마뉴엘라는 연극의 스텔라를 다시 연기하며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화한다. 영화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마뉴엘라에게 만남과 이별을 주는 애증의 매개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통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알모도바르는 연극을 활용한 미장아빔 외에도, 연극적 형식을 차용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한다. 비극적 전개 속에서 발리우드식 뮤지컬이 난데없이 난입하는 < 나쁜 버릇 >이나 < 하이힐 >을 보면 당혹스럽기도 하다. 알모도바르 초기 영화가 키치의 영역에 있다고 평가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이 없다면 알모도바르 영화가 아니다. 비일상적인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묘한 흥분과 긴장감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색이기 때문이다. <하이힐> 여성 수감소에서의 뮤지컬 댄스 또한, 감독은 공연이란 형식으로써 구현되는 배우와 관객, 다시 말해 보여주는 자와 보는자로의 이분법을 연출에 활용한 것이다. <나쁜 버릇>에서 센터에 있는 키큰 금발 수감자를 뮤지컬 댄스를 통해 주목받게 하고 구경꾼들에게 그녀에 대한 뒷담화를 나누게 함으로써 갑자기 내러티브에 끼어들 수 있도록 장치했다. 또한 < 귀향 >에서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부르는 《귀향》은 라이문다의 상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응축한 노래이지만, 동시에 차에 숨어 입을 틀어막고 울면서 딸의 노래를 듣는 어머니의 모습이 강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녀에게>에서 카에타노 벨로조가 부르는 《쿠쿠루쿠쿠 팔로마》 역시 영화 전반을 반영하는 슬픈 사랑 노래이면서 동시에 노래를 듣고 눈물 흘리는 마르코를 위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알모도바르는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를 모두 강조하기 위해 공연 장면을 종종 활용한다. 나아가, 감독은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 집단의 전경을 비추며 마치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페인 앤 글로리>의 극중극인 《중독》 공연장면에서 객석의 전경을 비추는가 하면, <그녀에게>의 《마주르카 포고》 공연장면에서 관람 중인 객석을 비춘다. 그밖에도 감독은 크고 작은 이벤트를 관람하는 집단의 모습을 영화에 삽입하곤 한다. <페인 앤 글로리>- 《중독》의 관객 <그녀에게>- 야외공연의 관객 감독은 관객 집단 쇼트에서 오히려 공연하고 있는 퍼포머를 측면에 위치시키고 관객의 모습을 전면에 배치한다. 영화를 관람하던 나는 관객들의 모습을 나와 동일시하며 별안간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쇼트의 주인공은 퍼포머가 아니라 관객 그리고 나다. 감독의 시선만을 쫓아야 하는 고독한 개인이었던 영화의 관객은 공연장의 관객 집단 쇼트로 인해 역동성과 시점의 자유를 제공받게 된다. 퍼포머에게 맞추어져 있던 포커스가 아웃 되고 확장된 시선을 따라 다른 관객들을 자유롭게 관찰하다 보면 어느새 매체적 제약은 파괴된다. 보여주는 자와 보는자가 결코 실제로 만날 수 없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이들이 만나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연극적 현장성을 고조시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장르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연극을 잘 알고 쓰는 알모도바르의 연출력이라 할 수 있다. 영화라는 단일 장르만 사용하지 않고 연극과 연극적 형식을 활용하여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선보이는 알모도바르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혹여 그의 신작에 낯선 연극이 삽입되었다면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 미장아빔으로 활용했는지 그 연극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영화와 연극의 레이어를 통해 스스로 의미의 퍼즐을 맞추며 영화를 200%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연극적 형식이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한다면 그저 이질적인 느낌 그대로를 새기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즐겁게 탐험하는 방법일테니 말이다. 다음 편은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마지막 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이 연재된다. 많은 관심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고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대답할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일 것이다. 첫 영화 개봉 이후 올해로 데뷔 41년을 맞은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놓으며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감독의 영화적 유니버스는 더욱 거대하고 견고해졌으며 이제는 많은 일반 관객을 그의 세계로 견인하고 있다. 알모도바르의 악동 기질이 드러나는 초창기 키치 영화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과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 또한 이에 한몫했다. 그러나 근래 작품들은 내러티브나 표현방식이 순화되고 세련되어졌다. 감독의 연륜과 함께 그의 영화도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일관된 관심이 여성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상정한 영화에서 남성을 부재하거나 있어도 무능한 안타고니스트로 묘사한다. < 내가 뭘 잘못했길래 >, < 하이힐 >, < 귀향 >의 남편들은 폭력적이고 외도를 일삼아 아내와 딸에게 죽임을 당한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에서 유일한 여주인공의 희망인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남편과 친구는 성전환을 해서 가슴을 달고 나타난다. 심지어 수녀 로사의 아버지는 치매 환자다. 반면 여성은 외연의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이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여성들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해낸다. 오늘날 독립적 여성 캐릭터는 이미 정체성을 완고히 하고 있지만 80년대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의 설정은 파격적이었다.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떠난 남자의 목숨을 구한 뒤 당당히 이별을 고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짜릿함 마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여성이 자식과 어머니에게 갖는 애정을 최상위의 감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 < 하이힐 >, < 귀향 >, < 줄리에타 >는 십여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녀의 관계를 기반하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사랑과 그것의 결핍으로 인한 그리움, 비뚤어진 질투까지, 모녀가 느낄 수 있는 회환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마약 중독자가 한번 약에 다시 손을 대면 몇 년을 끊고 살았더라도 다시 빠져들고 말지. 오랫동안 네 생각을 참으며 지냈지만 널 찾을 희망에 다시 빠져버렸어. 그 바보 같은 희망이 힘들게 쌓은 새 인생을 산산이 조각내버렸지. 내겐 남은 게 없어. 너만 존재할 뿐. 네가 없다는 공허함이 내 삶을 파괴하고 있어.” <줄리에타> 줄리에타의 일기 중. “난 평생 엄마를 따라하며 살았어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모든 면에서 엄마랑 경쟁하려 했다고요.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이겼었죠. 마누엘! 난 그와 결혼했죠. 엄마가 할 줄 알았는데! (…) 어렸을 때 난 귀찮게 하는 것 밖에 못했어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늘 엄마를 돕고 싶었다고요. 엄마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이힐> 레베카 대사 중.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가슴 한쪽에 켜켜이 눌려있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남편에 대한 결핍은 영화의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아픔일 것이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여성들은 이 아픔을 다시금 여성간의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 동질감, 모성애로 응축된 그들의 의리는 남성들이 외치는 의리보다 더욱 소리 없이 끈끈하고 질기다. 여성들이 소파에서 모여 수다를 하는 장면들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알모도바르는 미장센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80년대의 작품을 근래에 다시 보더라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주인공들의 의상과 세트, 그리고 갤러리에 와있는 듯한 회화의 향연은 내러티브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를 거부라도 하는 듯 시각적으로 환기를 준다. 게다가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애정을 넘어 집착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는 퀴즈,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의 색깔은? 눈치챘겠지만 정답은 빨강이다. <하이힐>의 저명한 아나운서 레베카(빅토리아 아브릴 扮)가 타는 차, <귀향>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의 어머니가 트렁크에 숨어있던 차, < 브로큰 임브레이스 >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죽음을 맞이하는 차, <줄리에타>의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 扮)가 떠난 딸을 찾으러 갈 때 타는 차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기종은 달라지지만 여주인공의 승용차가 빨간색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감독은 종종 버드 아이즈 뷰로 도로를 지나는 여주인공의 자동차의 모습을 담는다. 특히 초록이 우거진 숲길을 종과 횡으로 지나는 빨간 자동차 장면은 보색의 대비로 더욱 잔상이 각인된다. 빨간 자동차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시대와 장르를 그야말로 종과 횡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아닐까? 빨간 자동차와 함께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영화를 연결하는 유니버스로 시야를 확장해보자.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반복적으로 다시 출연시키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배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배역을 더욱 진짜처럼 믿게 하고 싶어서 혹은 뉴 페이스를 통해 새로운 분위기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발굴한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일루전의 고조나 분위기의 전환보다는 자신만의 색을 더욱 강조하는 편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연부터 단역에 이르기까지 전작에서 봐온 익숙한 배우가 늘 다시 등장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세실리아 로스,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마리사 파레데스는 대표적인 감독의 페르소나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 라이브 플레쉬 >에서 버스에서 아기를 낳는 창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임신한 연약하고 순수한 수녀, <귀향>에서 억척스럽고 강한 엄마,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매력적인 여배우를 연기했다. 변화무쌍한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수려한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모두가 손꼽는 대표적인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다. 초기작 < 나쁜 버릇 >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고(故) 커스 람프리브는 엄마, 할머니, 이웃 등 단역으로 출연하며 웃음을 주는 씬스틸러이기도 했다. 마블의 팬들은 마블 유니버스가 총 망라되어있는 < 어벤져스: 엔드게임 >에서 히어로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반가움의 환호성을 질러봤을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팬들 역시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분하는 친근한 배우를 보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배우를 통해 감독의 전 작품들을 상기하다보면 어느새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에서 유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소나 컨벤션 외에도, 감독은 독특한 방식들을 통해 자신의 전작들을 연결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와 마테오 블랑코(루이스 호마르 扮)가 찍은 코미디 <여인과 가방>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 <여인과 가방>의 편집본을 다시 보는 장면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알모도바르의 그로부터 20년 전의 개봉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의 장면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릎을 탁 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종국에 친구가 된 마뉴엘라(세실리아 로스 扮)와 위마 로조(마리사 파레데스 扮)는 3년 뒤 < 그녀에게 >에서 야외공연 관람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관객에게 그녀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며 근황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아들 방에 걸려있던 피나 바우쉬의 포스터는 <그녀에게>의 베니그노(하비에 카마라 扮)의 손에 들려 다시 한번 영화는 연결된다. <욕망의 법칙>에서는 영화 감독인 파블로(유세비오 폰셀라 扮)를 통해 장 콕도의 희곡 <휴먼 보이스>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대리하게 하지만 13년 뒤 < 휴먼 보이스 >를 내놓으며 애정에 방점을 찍는다. 이처럼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물, 오브제, 그리고 소재 등을 자신의 작품에 재투영하며 전작과 연결고리를 채운다. 악동과 성자, 고집불통과 재기발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알모도바르의 유니버스는 다음편에서도 계속된다. 3부작으로 구성된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1편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2편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3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가 연재된다. 나가며... “돌아온 과거와의 우연한 만남이 두려웠지. 내 삶이 흔들릴까봐. 추억으로 가득한 그 밤이 두려웠지. 내 꿈이 뒤 엉킬까봐. 하지만 도망치던 나그네는 곧 발길을 멈추리라. 모든 걸 앗아간 망각이 내 오랜 망상들을 죽였다 해도 내 마음속엔 아직도 실낱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귀향. 주름진 이마 세월의 눈이 쌓인 백발이 되어 귀향을 하네. 인생은 한 순간. 뜨거운 눈빛은 널 찾아 그림자 속을 헤메고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는 달콤한 추억에 의지해 내 영혼은 힘을 얻네 ” <귀향> 라이문다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귀향》의 가사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한국영상자료원으로부터 영화 속의 푸드팀에 대한 글 문의를 받고 문득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이런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을 만큼 그간 영화 속의 음식을 많이 진행했었구나, 두 번째는 수많은 영화에서의 음식을 선보였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쓰면 좀 더 맛깔나고 재미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2017년도 개봉 예정작에 선보일 음식 촬영 진행을 하며 작업할 영화들이 추가되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자리에 앉아 고민하며 글을 써본다. 푸드팀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지만 아직도 푸드팀과 한 번도 작업을 해보지 않았거나 아예 인지를 못 하고 있는 영화인들도 많다. 영화에서 푸드팀이라는 타이틀로 처음 일을 하게 된 것은 시간을 거슬러 2005년으로 올라간다. 영화 쪽에 먼저 발을 들여 일하고 있던 남동생이 우리를 영화의 세계로 입문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마침 남동생이 작업하던 이준익 감독님의 < 왕의 남자 >(2005)에 연회 씬이 아주 크게 나오는데, 미술과 소품의 영역으로 음식을 차리면 전문적이지 못하다고 요리 전문가를 모시고 세팅을 하길 원하신다는 감독님의 요청이 있었다며 연락이 왔다. 그땐 우리에게도 영화 속 음식이란 것이 너무도 생소해서 연출 제작팀과 끝없는 회의를 했음에도 지금 돌이켜보면 실소를 금치 못할 실수들이 잦았다. 팔팔 끓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출을 원해서 닭백숙을 정말 뜨겁게 끓여 놓았는데 광대역의 배우들이 닭을 손으로 막 찢어 먹다가 입천장을 데어 다시 식혀 놓기도 하고, 모든 음식을 먹는 거라 이해하고 한 음식마다 정성을 다해 맛있게 간을 하여 세팅했지만 연출상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한두 가지로 정해져 있어 수 시간 준비한 음식들을 맛도 보지 못하고 버리는 아픔이 있었다. <왕의 남자>의 한 장면 <왕의 남자> 촬영현장의 음식 세팅 < 왕의 남자 > 이후로 < 식객 >(2007)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요리 만화 「식객」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에 마음이 벅차올랐었는데, 이런 큰 음식 영화가 우리에게 먼저 연락을 해오다니! <식객>은 국내 최초로 본격적인 음식 영화이기도 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했던 셰프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라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갖고 도전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말 공부를 많이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수십 편의 영화에서 음식을 담아냈지만 <식객> 때만큼은 우리가 미술 소품에 포함되는 푸드팀이 아닌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에 있는 푸드팀이었다. 음식 영화의 푸드팀장이라는 타이틀은 부담감도 매우 클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인가. 그때 참 날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쓰며, 그간의 영화 경력을 다시 찾아보니 정말 많은 영화에서 음식을 선보였다. < 왕의 남자 >(2005) < 식객 >(2007) < 미인도 >(2008) < 쌍화점 >(2008) < 폭풍전야 >(2009) < 식객-김치전쟁 >(2010) < 방자전 >(2010) < 미스터 아이돌 >(2011) < 후궁 >(2011) < 기술자들 >(2014) < 나는 왕이로소이다 >(2012) < 톱스타 >(2013) < 협녀, 칼의 기억 >(2013) < 군도: 민란의 시대 >(2014) < 상의원 >(2014) < 해적: 바다로 간 산적 >(2014) < 허삼관 >(2014) < 궁합 >(2015) < 검사외전 >(2015) < 봉이 김선달 >(2016) < 미쓰 와이프 >(2015) < 뷰티 인사이드 >(2015) < 고산자, 대동여지도 >(2016) < 침묵 >(2016) < 보통사람 >(2017) < 군함도 >(2017) < 공작 > (2017) < 남한산성 > (2017)까지 약 17편의 크고 작은 영화에서 우리의 역할을 드러냈고, 또 드러낼 예정이다. <식객-김치전쟁> 음식 세팅 <뷰티 인사이드> 음식 세팅 영화마다 남아있는 기억도 다양하다. 영화를 통해 평소에 전혀 접하지 않는 식재료들을 다루는데, < 후궁 > 때는 자라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김대승 감독님은 촬영 내내 음식에 대해 매우 세심하게 하나하나 신경을 쓰셨는데, 극 중 자라탕이 매우 혐오스럽게 보이길 원해 목이 나와 있는 상태로 탕을 끓이기도 했다. < 검사외전 > 촬영 때는 < 군도 > < 허삼관 > 때 함께 했던 연출, 제작, 미술, 소품팀을 다 같이 만나 매우 반갑게 촬영했다. 현재 촬영 중인 < 공작 >에서는 위의 세 개 영화를 함께 했던 팀들과 또다시 호흡을 맞춰서 정말 즐겁게 찍고 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고증에 입각한 음식을 선보이길 원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다. < 쌍화점 >은 고려 시대가 배경이었으나 음식에 대한 고증은 기본만 따라가고 가장 화려하고 멋있게 세팅해달라는 연출과 미술팀의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시대극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색감의 음식들을 준비해 23회차씩이나 현장에 나가 음식을 세팅했는데 정작 영화 속 음식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아직 개봉 전인 영화 < 궁합 >은 < 식객 > 때 조감독님의 입봉작으로 확실히 음식 영화를 경험하셨던 분이라 영화 속 음식 연출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시고 (고증을 철저히 따랐다) 앵글에도 음식이 많이 보였다. 음식을 세팅하는 우리로선 화면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 가장 뿌듯하기에 신바람 나게 일했던 기억이 있다. <후궁>의 자라탕 <쌍화점>의 화려한 음식 영화 < 식객 >의 인연으로 배우 임원희 와는 지금까지도 매우 친하게 지낸다. 역할은 악역 봉주였지만 실제로는 성격이 좋고 너무도 친절했다. 그는 왼손잡이여서 칼 사용을 왼손으로 시작했었는데 2007년 촬영 당시 왼손잡이 요리사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 칼질을 오른손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대다수의 의견으로 피나는 연습을 통해 오른손 칼질을 앵글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때 그 연습 이후로 아직도 칼질 하나 만큼은 오른손으로 한다고 한다. 그가 예능 방송에 출연할 때 야간 매점 음식을 뭘 할지 고민하며 연락왔을 때도 내가 자주 해 먹는 야식 하나를 알려주었는데 예상치도 않게 1등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연락하며 안부 물으며 지내는 친한 지기이다. <식객>의 배우 임원희 때로는 손 대역도 자처한다. 그간 다양한 영화에서 내 손이 여러 가지 형태로 많이 비치기도 했다. < 식객-김치전쟁 >을 촬영할 때는 배우들의 조리 동선, 완성된 음식의 형태, 조리과정에 있어 NG 후 필요한 재료들에 대한 조치를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요리사 8’의 보조역할로 극 중에 투입되어 촬영하기도 했고, < 허삼관 >을 촬영할 때는 허삼관이 자주 가는 만두집의 만두를 직접 빚는 조리 장면, 피순대와 생고기를 투박하게 써는 장면, 붕어찜의 식재료를 전문적으로 써는 장면 등을 능수능란하게 선보이기도 했다. 내 손이 가녀리진 않지만 날씬하다고 알고 있었으나 화면에 비친 내 손은 아주 통통한 손이었다! <허삼관>을 촬영할 때는 내 평생 그렇게 피순대를 많이 썰어보기도 처음이었다. 아무리 음식을 하는 사람이라지만 피순대를 좋아하지 않는 이상 많이 먹어볼 일도 접할 일도 없는데, 촬영을 위해 엄청난 양이 필요했고 또 의외로 정말 맛있어서 촬영을 마치고 촬영 스텝들과 다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식객-김치전쟁> 촬영현장 <허삼관>의 피순대 푸드팀의 역할이 무얼까. 이름에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우리는 영화 속 음식을 세팅하는 사람들이다. 시대극을 찍을 때는 시대적 배경에 맞아야 하며,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감동이 느껴지거나 정치성이 보이거나 등등 음식만 보고서도 그 느낌이 전달될 수 있게 구성하고 세팅해야 한다. 푸드팀이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제작, 연출, 미술, 소품팀과의 호흡도 중요하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 전체적인 배경색과 톤앤매너 협의, 소품팀과의 소품 정리, 감독님과 함께 논의하는 연출팀과의 다자간 미팅이 진행된다. 대화를 통해 음식 시안을 공유하며 메뉴 구성을 마치면 영화 촬영장에서는 푸드팀의 요리 마술이 시작된다. 현장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는 조리 공간이 충분치 않아 이미 만들어 온 음식에서 살짝 손보는 정도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날이 더 많다. 또한 다른 팀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준비를 마쳐야 한다. 배우가 음식을 먹는 장면이면 NG 장면을 대비해 미리 음식을 준비하거나, 김이 나야 하는 장면은 슛 들어갈 때 그 김이 바로 보일 수 있게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하는 등 촬영하는 동안 푸드팀 일원들은 정말 바쁘게 움직인다. 영화 속 음식이라 대부분 먹지 못하는 음식을 만든다고 해서 요리를 못 해도 푸드팀에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큰 오산이다. 음식을 누구보다도 전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게 푸드팀이다. 역사적 배경과 시대에 따라, 또 상황과 극 역할에 따라 수많은 음식의 종류와 가짓수가 바뀌고 이 부분을 이해, 설명, 그리고 조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푸드팀의 또 다른 역할. 영화 촬영장에 푸드팀이 함께하면 현장 분위기가 매우 훈훈해진다. 예전엔 음식 소품이라 해서 영화 속 음식을 먹지 않고 기피하였으나 정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눈에 보이면 스텝들 눈에도 소품이 아닌 일용할 양식으로 돌변하는 순간이 온다. 현장이 정말 바쁜 날이 아니면 우리가 별도의 조리를 하여 스텝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곤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고된 촬영에 지친 스텝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가 된다. 맛있는 음식 냄새를 풍길 때면 언제나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스텝들, 음식 옆을 지나가며 차마 먹을 수 없는 상황의 스텝들의 그렁그렁한 소 같은 눈. 감독님, 피디님부터 배우들, 각 팀의 막내까지 모두가 평등해지는 순간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일을 두 배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나눠먹으며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은 그 이상이 된다. 벌써 약 10년이 넘게 영화 쪽 음식을 진행하다 보니, 현장에 아는 사람들도 많고 함께 같이 여러 작품을 한 사람들도 많다. 10년 넘게 시간이 흐르니 영화 입문 초창기부터 봐 왔던 사람들이 어느덧 영화팀의 고참이 되어 현장에서 만나면 함께 예전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남동생의 영화 쪽 지인들을 내가 하는 영화에서 만나 같이 작업하며 친분도 쌓게 되고, 또 최근에 알게 되는 신참 팀원들의 열정적인 패기를 보며 때로는 그들의 열정에 자극을 받기도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곧 크랭크인 하는 큰 규모의 영화 속 음식 예시 안을 준비하고 있는데, 글을 쓰며 나 자신에게 동기부여 하는 시간이 된 것 같이 뿌듯하다. 약 10년차가 넘게 이쪽분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우리 음식이 정말 맛있고 따뜻하게 보이는 마음, 훈훈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영화 < 식객 > 이후로 음식영화가 제작이 되지 않고 있는데, 그간 음식에 관련한 다양한 일들을 진행하며 얻은 좋은 아이디어들을 토대로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 이번에 작업하게 되는 영화에서도 음식이 중요하게 보일 예정인데, 오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푸드팀으로써 더 맛있게 그리고 멋있게 음식을 세팅 해보려한다. 마지막으로 맹렬한 더위와 추위에도, 잠과의 사투를 벌이며 지금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 모든 영화인들,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