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막
- 감독
- 이두용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유지인, 남궁원, 황정순, 최성호, 김윤경, 현길수, 태일, 전숙, 방희정, 서정아, 최종순, 김범기, 최성관, 나정옥, 석인수, 임해림, 윤일주, 박종설, 정규영, 주일몽, 박달, 나소운, 양춘, 이정애, 국정숙, 김기범, 박광진, 신동욱, 이백, 김경란, 정미경, 김애라, 권일정, 김월성, 김예성, 박부양, 이예성, 박예숙, 오세장, 김대현, 김애자, 김수천, 최명희, 최삼, 주상호, 양일민
이두용의 < 귀화산장 >은 1981년작이다. 대표작인 < 피막 >과 거의 동시에 개봉된 영화이다. 그 앞뒤로 < 최후의 증인 >과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가 개봉되었으니 이 정도면 이두용 경력의 정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어떤 재미를 기대해도 될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재미를 따진다면 위 문장에 언급된 다른 작품을 건드리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증인>을 추천한다. 네 편 중 가장 통속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가 세월이 지나면서 가장 재미없는 영화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영화의 재미가 관객들의 가치기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재미만 있으면 되지”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하는데 대부분 영화들이 유통기한을 넘기지 못하는 건 바로 그 “재미만 있으면 되지” 정신 때문이다. <귀화산장>은 <디아볼리크> 장르에 속하는 영화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리크>는 개봉 직후 엄청난 양의 아류작들을 생산해냈고 그들은 거의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사건을 커버한다. 그 뒤로 주인공의 주변을 귀신일 수도 있고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 희생자가 뒤를 따른다. 그 정체는 감독이나 작가 맘이다. (심지어 <디아볼리크> 리메이크들도 다들 결말이 제각각이다.) 이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 중 일부는 심지어 클루조의 영화를 안 봤을 수도 있다. 원작이 번역되었으니 그걸 읽고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귀화산장>의 주인공은 한민우라는 의사다. 자기 이름을 단 의원을 갖고 있고 얼마 전에 중요한 과학적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장모님은 신이 나서 사위에게 종합병원을 차려주겠단다(옛날 한국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남자들의 욕망 중 하나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한몫잡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이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제목이 뜨기도 전에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미쓰 리, 그러니까 간호사 경아를 성폭행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경아는 임신했다고 알리고 한민우의 별장에 눌러앉는다. (별장은 7,80년대 한국 호러와 스릴러 장르의 단골 무대이다. 당시 영화를 자주 본 관객들은 그 건축학적 분위기에 익숙할 것이다.) 한민우는 실랑이를 벌이던 중 경아를 밀치고 경아는 죽는다. 한민우는 시체를 우물에 버린다. 하지만 경아의 시체는 사라지고 빨간 옷을 입은 경아 또는 경아의 유령이 면도칼을 휘두르며 한민우 주변을 맴돈다. 그렇다. 익숙한 <디아볼리크>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 마의 계단 >에서도 벌어졌다. 하지만 <마의 계단>은 남자 주인공의 치졸함을 단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었다. <귀화산장>에서는 어떻게든 남자에게 알리바이를 주려고 기를 쓴다. 그 중 가장 어이가 없는 부분은 분명 앞에서 벌어졌던 성폭행을 없는 것처럼 만들려는 시도이다. 알고 봤더니 그것도 경아가 성폭행으로 한민우를 몰고 갔고 경아는 아직도 한민우를 사랑하고 있고. 미치겠다. 영화는 당시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끔찍함을 모르지는 않는다. 이를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가정부를 좀 건드렸다가 난처해진‘ 한민우 친구의 엄살 떠는 대사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이 영화를 만든 남자들이 그 상황의 비열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영화를 닫는 결정적인 대사가 “여자를 조심하라”라면 더욱 그렇다. 7,80년대 한국영화는 한국의 부당한 남성우월주의 시스템 때문에 고통받는 여자들을 연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다. 소재만 따진다면 페미니즘 영화가 따로 없다. 하지만 이들 영화 상당수는 3S 정책의 결과물인 한국 에로 영화 장르와 겹쳐지기도 했다.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공 여자들을 동정하고 연민했다. 하지만 그들이 건드리기 쉬운 예쁘고 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에 흥분했다. 아마 그들은 주인공의 무력함 뿐만 아니라 비극적 결말에도 자극 받았을 것이다. 이두용이 <귀화산장>을 만든 남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관객들은 <피막>이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미심쩍은 부분을 관대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 난 뒤에도 그럴 수 있을까.
침체 속에 거둔 70년대 이후의 수확 1970년대 이후의 양상은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양이나 질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황정순이 <팔도강산>(배석인, 1967) 류의 국책영화에 기용되면서 그동안 호흡을 맞춰온 김승호 대신 희극배우 김희갑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사실이다.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김수용, 1970),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등이 그런 예다. 노부부가 일본에 사는 아들의 초청을 받아 엑스포70 세계박람회를 관람(<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하거나, 전국 각지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 유람 여행하는 동안 변화된 한국의 발전상을 에피소드에 끼워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달라진 제작 환경 아래서 황정순은 1970년대에 비극적인 수절의 이면을 그린 <홍살문>(변장호, 1972) 등 60여 편에 출연했다. 60년대에 비해 절반가량 줄어든 실적이다. 속편 등 유사 기획으로 작품성보다는 흥행 위주의 영화가 대세인 가운데 아들을 국가대표 골게터로 키웠으나 신장염을 앓게 되자 콩팥까지 이식해 주는 <어머니의 영광>(김기, 1973)의 생선장수, 벙어리 청소부 아들과 4남 2녀의 손자, 손녀들까지 돌보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조문진, 1978)의 헌신적인 할머니,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불목의 위기를 화해로 풀어내는 <장마>(유현목, 1979)의 외할머니 등 여러 형태의 모성애를 보여 주었다. 이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돋보인 것이 유현목 감독의 <장마>였다. 화면을 줄곧 적시는 지루한 장맛비 속에 외손자와 나누는 콩깍지의 교감, 설움조차도 발효시킨 푸념 조의 독백은 선율처럼 느끼게 했다. 황정순 최고의 연기라 할 수 있다. [사진] 영화 <장마>에서 황정순과 김신재(오른쪽) 1980년대 이후의 출연작은 <피막>(이두용,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여자의 함정>(이경태, 1982), <가고파>(곽정환, 1984), <88 짝궁들>(서윤모, 1984), <장남>(이두용, 1984) 등 10여 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이두용 감독의 <피막>과 <장남>에서의 연기가 관심을 끈다. <피막>에서는 장손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하는 강인한 노마님의 모습이, <장남>은 핵가족시대 노인의 소외감이 묻어나는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사진] 영화 <장남>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김일해 황정순은 이렇게 연극무대에서 다듬은 특유의 발성과 응집력을 무기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열녀문>(신상옥, 1962)으로 대표되는 한은진과 쌍벽을 이루며 1960년대 전후의 한국영화계에 대들보 역할을 했다. ‘탱크’라는 말을 들으며 다진 연기력 황정순은 1925년 8월 2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난산 끝에 10남매 중 일곱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산모는 몸이 약한 마흔이 넘은 고령자였다. 딸이 백일이 지나 건강을 되찾자 황씨 일가는 시흥을 떠나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정순이 세 살 때,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익사체가 되어 돌아오는 큰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채무까지 짊어지고 험한 품팔이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들어간 인천 박문여자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은 이 무렵 프랑스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아르센 뤼팡>에 빠졌다. 신출귀몰하는 괴도신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열네 살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본 ‘타잔’ 영화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황정순은 어느새 배우지망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에 사는 사촌 언니(황금순)를 믿고 가출한 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로 찾아갔다. 무턱대고 졸라 얻어낸 것이 대사 없이 처녀들 사이에 끼어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산송장>의 행인 역이었다. 1940년이었다. 그동안 딸의 ‘광대 짓’을 극구 말리던 노모도 제물에 지쳤는지 묵인했다. 그 사이 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극단 ‘호화선’(1941년)의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못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해방 후에는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1945년)가 되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직전 극단 ‘신협’의 <뇌우(雷雨)> 공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물꼬를 튼 연극 활동은 6,25 때 대구로 피란 온 ‘신협’의 <자명고>(1951. 1, 대구)와 <햄릿>(1951. 9, 대구), <맥베드>(1951. 10, 마산) 등에 출연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뒤이어 <은장도>(1953, 시공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5, 시공관) 등의 무대에 섰고, 56년에는 중앙국립극단 전속 단원이 되었다. 이즈음에 출연한 작품이 제1회 공연작 <원술랑>과 제2회 공연작 <뇌우(雷雨)>였다. 두 연극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명(1955년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두 연극에서 김유신 장군의 아내 지소 부인과, 노씨 집안의 하녀로 들어간 사봉 역을 맡았다. 특히 젊은 나이로 노파 역까지 소화한 <원술랑>의 지소 부인 역은 관객들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햄릿>(1957, 시공관) 등 여러 작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김동원은 몸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열정을 보고 단원들은 ‘탱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2003, 태학사, 188쪽) 고 했다. 황정순이 1949년 영화 <파시>에 출연한 후 6년 동안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그녀는 이미 신접살림을 하는 새댁이었다. 1953년 3년의 열애 끝에 의사 이영복과 결혼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한꺼번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하지만 결혼 30년 만에 남편이 먼저 가버렸다. 그의 연기를 받쳐준 것은 무대 경험을 통해 축적한 발성법과 육체언어로 인식한 연기동작,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작품해석과 성격분석이었다. 이례적으로 현대적인 풍모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육체의 고백>의 서구적인 ‘밤의 여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삶의 질곡과 모진 풍상을 겪은 억척스런 아내이거나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어머니, 가난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서민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황정순 황정순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2006년 여배우로서는 처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나 이후 발병한 치매로 고생하다가 2014년 2월 17일 아흔 살의 나이로 400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46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거두었다. * 연도별 출연 편수는 통계에서 빠진 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증가될 수 있음.
최초의 칸느영화제 초청작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 기생충 >( 봉준호 , 2019)이 800만 명의 관객을 모으고 있는 2019년 6월 중순 현재,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칸느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던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이두용 , 1983)를 되돌아보는 건 분명 흥미롭다. 1983년 11월 제작이 완성되자마자 제2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한 이 영화는 다음해인 1984년, 빔 벤더스의 <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빔 벤더스, 1984)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제 37회 칸느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11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두용 감독은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한국 여인상의 존엄성을 표현하려 했다”고 밝혔는데, 봉건적 가부장제 하 여성의 ‘피맺힌 한’은 이렇게 국제 무대에서 ‘한국적인 것’을 대표하기 시작한다.(한국 관객들도 이것을 공공연히 받아들이게 되는 건 약 10년 후 신드롬을 일으키는 < 서편제 >( 임권택 , 1993) 즈음일 것이다.) ‘한국적 한’의 영화적 탄생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애초 아이디어는 세 토막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전설따라 삼천리’류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제목만 봐도 1969년의 옴니버스작 < 이조여인잔혹사 >( 신상옥 )>를 떠올리게 하는데(당시 최일남도 소재가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1) ), 그래서인지 이두용 감독은 이 세 토막을 길례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 연결시키기로 했다. 몰락한 양반가문의 딸인 길례가 김진사의 죽은 아들과 영혼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팔려나가 수절하며 살다가 예기치 않게 시동생에게 성폭행을 당해 쫓겨나는 첫 부분, 머슴 윤보를 만나 하층민으로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길례를 탐내는 채진사를 결국 윤보가 살해함으로써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 중간 부분, 그리고 갑자기 윤보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린 세도가의 자제였음이 드러나 길례가 윤부사집 며느리가 되었다가 씨내리를 당하고 자결하게 되는 마지막 부분. 그 연결의 억지스러움은 길례가 물레 돌리는 장면들의 미학적 실루엣으로 무마하고자 했으나, 김종원이 지적했듯 “울림의 공감을 주는 메타포로서 살아나지 못했다.“ 2) 저 기구한 삶의 결절마다 그 육체가 하릴없이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는 길례가 물레를 돌릴 때, 그녀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주인공이기보다는 침입자들 앞에 무방비 상태에 놓인 취약한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한(恨)’의 취약한 이미지는 오히려 이제 막 국제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위치에 대한 메타포에 가깝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198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이두용 감독의 < 피막 >이 특별상을 수상하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가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한국적인 것’(혹은 ‘아시아적인 것’)은 근대성과 길항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것과 융합하기도 하는 어떤 미적인 것으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이 (재)발견을 공들여 전유한 결과물이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평자가 “30년전 일본 미조구치 겐지”를 연상케 한다고 지적했듯, 오랫동안 미지의 대상이었던 한국영화는 이 국제무대의 관객들을 위해 일본영화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어떤 ‘한국적인 것’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길례의 육체가 그다지도 자주 폭력에 노출되었던 것은 이 전시를 위한 이미지, 즉 물레를 돌리는 한맺힌 여성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시대의 관객들 어쨌거나 영화를 통해 ‘한국적인 것’을 (재)발견하려던 이 작업은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한국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게임 개최를 앞두고 그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여인잔혹사:물레야 물레야>는 만하임 영화제, 런던 영화제, 페사로 영화제 등에 초청되고 일본의 ‘스튜디오 200’에서 ‘현대한국영화주간’을 개최할 때 상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거주 한국인들이 주관한 각종 행사에도 소개되었다. 일본 쓰까사에는 15만 달러에 수출되었는데, 1983년 한국영화의 총수출 편수(21편)의 총액이 25만7천 달러였던 걸 염두에 두면 놀라운 가격이다. 하지만 한국의 관객들, 즉 이미 < 적도의 꽃 >( 배창호 , 1983)>, < 바보선언 >( 이장호 ,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에 호응하고 할리우드의 <이티(E.T.,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82; 한국에서 1984년 개봉하여 역대 최고 흥행성적 3위를 기록했다)>의 자장 안에 있던 관객들에게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그저 “우수영화 및 대종상 겨냥영화” 3) 의 하나였던 듯하다. 28일간 상영되었던 명보극장에는 3만5천여 명의 관객만이 방문했다. 1) 최일남, “최일남 산책: 생활문화론,” <동아일보> 1984.3.14. 2) 김종원, “1983년도 한국 (극)영화,” 영화진흥공사 편, <1984년도판 한국영화연감>, 1984. 3) 김종원, 앞의 글.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