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츠 올 곤 피트 통
- 감독
- 마이클 도즈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마이크 윌모트, 폴 케이, 베아트리즈 바타다, 케이트 마고완, 피트 통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조립식 미니어처 완구에 민트색 페인트를 칠한다. 노스롭 그러먼(Northrop Grumman),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Raytheon Technologies) 등 완성된 미니어처 외벽의 간판에는 미국의 글로벌 방위 산업체 이름들이 새겨진다. 그 위로 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년의 읊조림이 얹힌다.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배웠어/ 우리가 겪었던 위대한 전쟁들에 대해 배웠어/ 독일과 프랑스에서 싸웠지/ 언젠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야.” 1964년 발표된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저항적인 포크 송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요?(What Did You Learn At School Today)’는 미니어처 모델의 양식화된 조립 과정과 기이한 대조를 이룬다. 정글의 소리와 멸종된 짐승의 포효가 곁들여진 공룡 뼈의 모형으로 열리는 영화 < 소년 >(2025)은 제임스 베닝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문 시도로, 의뭉스러운 도입 직후 작가 특유의 엄격한 패턴을 제시한다. 베닝이 묘사하는 것은 실재적인 세계 이미지가 아니다. 베닝은 풍경을 포기하고, 텅 빈 블랙박스를 배경으로 구조물을 만들고 라디오를 듣는 소년의 관점을 취한다. 시간을 횡단하는 이 가상의 소년은 세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가고 있으며, 무언가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구조는 명확하다. 플롯은 8개의 분절로 구성되는데, 각 파트는 미니어쳐 모형을 조립하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는 시네이드 오코너(Sinéad O'Connor), 샤이렐스(Shirelles),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 냇 킹 콜(Nat King Cole) 등의 노래, 그 뒤를 이어 완성된 모형을 배경으로 하여 1961년부터 2016년까지의 미국 현대사에서 분기점을 형성한 정치적 연설을 병치한다. 이미지는 순수한 유희처럼 보이지만, 사운드는 군산 복합 비즈니스를 위한 폭력과 전쟁의 연대기를 재생한다. 냉전의 종식과 평화를 외치는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인종 분리를 주장했던 백인 정치인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 흑인들의 힘에 대해 역설하는 인권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이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즈(César Chávez), 이란에 대한 미국의 무기 지원을 인정하는 보수의 상징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기후 위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환경운동가 세번 컬리스-스즈키(Severn Cullis-Suzuki), 미군의 지속적인 이라크 주둔을 옹호하는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핵무장 종식을 촉구하는 반핵운동가 헬렌 칼디콧(Helen Caldicott)의 연설과 군산복합체의 성채는 아이러니하게 충돌한다. 시대의 아젠다를 초점으로 한 연설의 선집은 인종 분리와 시민권, 이주 노동자 착취, 중동 위기, 복지와 환경 문제, 전후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망라하면서 권력과 자본 또는 둘 다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준다. 노래가 연설에 응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아니면 모두가 풍자와 야유의 찬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임스 베닝의 작품은 역사의 무게와 집단 기억 속에서 예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지만 이번에는 사뭇 노골적인 어조와 직설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임스 베닝의 영화를 정의해 온 사색적 무드를 탈피한 생동감이다. 언제나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유머를 가미한 표현 요소들, 예컨대 붓질을 하는 손동작, 리드미컬한 음악, 그리고 풍부한 질감의 연설 대사 때문에 활력이 넘친다. 이미지, 소리, 단어의 조합은 언뜻 보기에는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호한 통일감을 전달한다. 한편으로 지난 10년간 베닝의 작업들처럼, 구조나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디테일에 대한 궁금증도 피어난다. <소년>의 경우, 설정을 알아차리고, 패턴에 대해 상상한 뒤, 곧바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니어처 모형에 색칠을 하는 손은 같은 사람의 것일까? 저들은 평소에도 모형을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장면을 위해 고용된 배우들인가? 정치 연설과 ‘손’의 소재(所在), 정체성은 관련이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엔딩 크레디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년>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게임을 통해 하나의 모델-패턴을 제시하고 노래와 연설이라는 발화 형식의 의도적인 병치를 창조하여 ‘청취’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한다. 엄격한 구성, 역사와 기억을 유희하는 개념적 구조로 관객의 인식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권력과 파시즘의 은유이자 현재에 재건되고 있는 과거의 망령들을 형상화함으로써 예술과 정치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것이다.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베닝은 <소년>을 “수십 년 동안의 일기를 읽으며 만든, 친밀하고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하지만 영화는 사적인 노스탤지어를 넘어서며, 꼰대의 한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감정도 초월한다. 베닝이 제시하는 8개의 스토리는 군국주의의 포괄적인 역사를 회고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엿보기와 수사적 장식을 제공하는데, 이와 같은 병치의 전략은 계보학의 차원을 서사에 부여한다. 베닝은 과거의 렌즈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6천5백만 년 전 공룡을 사라지게 하는 대절멸의 도래, 뼈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다음에 소멸할 종(種)은 인류가 될 것, 이라고 경고한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과 그들의 위협받는 미래에 대한 근심을 담은 이 영화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가 초래할 것들에 대한 전망도 보여준다. 투쟁과 몰락, 재건에 익숙해진 것처럼 계속해서 모형을 칠하고 조립하는 손들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파괴적이다. 마지막에 베닝은 군산 복합 비즈니스의 최종 장을 화면 중앙에 배치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를 초토화한 원자 폭탄 ‘리틀 보이’의 모형은 소문자 영어 제목(<little boy>)에 담긴 ‘소년’의 순수성을 폭파한다.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새기는 소년의 사색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진보와 그 대가, 역사의 폐쇄적 순환 궤도에 대해 성찰하는 <소년>은 인류의 서사가 주요 사건뿐 아니라 사소하고 개인적인 결정들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청각 요소들의 조합은 일관된 패턴을 따르고 베닝의 전작들에 비해 해석의 어려움이 덜 하지만, 이 영화의 시청각 은유는 개별 요소들의 총합을 능가한다. 상징적인 연설과 정적인 이미지를 병치함으로써, 베닝은 시적인 환기와 정치적 명제 사이를 왕래한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시민권 연설이나 헬렌 칼디콧의 핵에 대한 경고처럼, 언어의 힘이 이미지를 이기는 순간들은 깊은 영감을 준다. (상) <엘.코헨>(2018), <알렌스워스>(2022) (사진: " L. COHEN ", " ALLENSWORTH ", VIENNALE) (하) <미국>(2022), <브레스리스>(2023) (사진: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 BREATHLESS ", RÉEL Archives) 제임스 베닝이 지속적으로 헌신해 왔던 ‘풍경’에 관한 에세이로 영화를 읽을 수도 있다. <소년>에는 두 가지 경관 양식이 작동한다. 먼저 파랑, 노랑, 갈색 등의 채색으로 지속하여 변동하는 경관이다. 두 번째는 완성된 미니어처 모형을 길게 비추는 타블로 쇼트가 자아내는 인상으로 여기서 연설은 일종의 음성 해설처럼 기능한다. 환경음과 음악의 지배를 받는 베닝의 영화들(< 엘.코헨 >, <알렌스워스>, <미국>, < 브레스리스 >)처럼 <소년>은 역사적 풍경에 대한 인내심 있는 응시가 된다. <미국>(2022)은 <소년>과 매우 유사한 도식을 구현한 영화이다. 같은 길이의 정지 이미지 50장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이미지 앞에는 검은 무지의 배경에 미국의 50주를 나타내는 캡션이 붙는다. <미국>은 베닝의 다큐멘터리 실천이 세상을 향한 창, 즉 화면 속 현실을 재구성하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경험을 창조하고 전달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이다. <소년>은 <미국>의 전략을 확장한다. 정지 카메라로 촬영한 롱 쇼트, 역동적인 요소들이 섞인 정적인 피사체를 포착하는 베닝의 스타일 서명은 <소년>에서 개별 쇼트의 구성과 프레임 안에서 단조로운 요소들의 기하학적 배치로 대체된다. 대중음악과 정치 연설이 어우러진 미국의 작은 풍경들을 기록하는 단조로운 타블로를 통해 베닝은 미국 역사의 토대를 재구성하기 위한 풍경화를 제시한 것이다. 역사를 미니어처로 관람하는 <소년>의 시청 경험은 시간의 지속과 인내를 요구한다. 베닝은 언제나처럼 우리들이 개념적 퍼즐을 조립하도록 내버려두고, 조립을 위한 부품들만을 제공한다. 그가 모델을 구축했듯이 관객은 부품들을 조립해야 한다. 국방비 지출, 인종 정치, 노동운동, 핵전쟁, 기후 위기에 대한 사전 지식과 선입견, 그리고 음악적 취향에 따라 <소년>은 베닝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자, 그의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후의 증인> 중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랜 기간 한국영화사에서 검열이라는 주제는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전설 혹은 설화와 같이 다루어져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검열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례와 일화들이 전해져 왔지만, 그걸 뒷받침할 만한 자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문헌자료라고 해야 기껏해야 영화법 규정이나 시책 정도가 거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2010년대 초 한국영상자료원이 영화검열 자료를 대량으로 공개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검열담: 창작자(감독)에 의해 만들어져 온 신화 그런데 이전 (그리고 지금까지도) 영화검열에 대한 일화들을 전달한 주체는 대부분 영화감독 들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감독이 아니면 누가 그 영화의 검열상황을 알며, 증언해 줄 것인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 검열 절차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감독이 아니라 제작사(외화의 경우 수입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감독은 제작사를 통해 검열 결과를 전해 듣는 입장이 된다. 1974~1975년, 1979년 검열 담당이었던 이남기 의 증언에 의하면 검열 결과는 공식적으로 제작자에게 통보되며 검열 주체의 의견이 감독에게 직접 전달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이남기 구술 장면 ( 구술채록문 링크 ) 게다가 검열실에는 감독은 물론 제작자도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검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삭제 결정의 구체적 사유나 분위기, 뒷배경에 대해서는 감독과 제작자조차 직접적으로 알 수가 없는 체제였다. 다만 이 원칙이 절대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약간 엇갈린다. 이장호 감독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본인이 < 별들의 고향 >(1974) 검열 현장에 참석했지만, < 바람불어 좋은날 >(1980)에는 참석했던 기억이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남기에 의하면 본인이 근무하던 시기에는 결코 제작자나 감독이 참석할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검열관이 입장하고 나면 검열실을 아예 폐문시켰다는 것이다. 다만 본인이 근무하기 전에 제작자나 감독 등이 몰래 들어와서 시사를 참관해서 문제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1] 또한 정진우 감독 역시 필자와의 대화에서 감독이 검열 시사실에 입장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본인은 한 번도 검열 시사에 동석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검열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주체로 인정받아 왔다. 감독들이 주로 특정 영화에 대한 증언을 해 왔던 관행 탓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영화의 최종적 의미 담지자로서 감독에 대한 고정관념, 제작-검열-배급-상영-수용이라는 전 과정이 아니라 텍스트성(그것도 그 텍스트성이 감독에 의해 일방적으로 생산되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이나 작가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전통적인 한국영화사 연구 경향이 존재한다. 그러나 감독의 검열 증언은 전언에 의한 간접적 사실 인식, 기억의 부정확함과 본인의 인정 욕구가 복잡하게 작용하는 사후적 구성물이라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때로 감독은 검열에 대한 증언을 통해 자신의 미학적 실패를 검열 당국의 책임으로 미룰 수 있고, 자신이 당대 사회에서 핍박받는 존재였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그리하여 시대와 불화하는 예술인이라는 신화적 상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한 제작사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검열을 한 후, 검열 당국의 지시라 핑계 댈 가능성도 있다. 이 복합성의 한 사례를 < 최후의 증인 >(1980) 검열을 통해 살펴보자. <최후의 증인> 검열 과정 ▶ <최후의 증인>이 검열에서 잘려 나간 이유는 뭔가요? 이두용 감독: 6.25 전쟁의 후유증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동족간의 이념을 다룬 영화가 아니에요. 한 순진무구한 사람이 권력자들한테 모함을 당해서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그리고 전쟁 때문에 일생이 마모되어 가는 과정을 한 수사관이 수사를 하면서 드러나는 영화인데 이두용 감독 사상이 수상하다고 누가 청와대에 투고를 했어요. 옛날에는 영화를 만들 때 금기가 있었어요. 이념을 다룬 것은 물론 안 되고 공무원 부패를 다룬 것도 안 되고, 아주 많았어요. 그런 게 다 걸렸었나 봐요. 그러니 모조리 잘려버리니까 영화가 절름발이가 된 거죠. 그래서 개봉날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왔어요. 나와서 시간표를 보니까 그 영화가 2시간 40분짜리인데 1시간 40분으로 돼 있더라고요. [2] <최후의 증인>은 그 삭제 분량만으로도 한국영화사에서 혹독한 검열의 사례로 꼽혀 왔다. 제작 당시 160분이었던 러닝타임이 이후 정권의 검열을 통해 90분(혹은 100분, 이두용 감독의 증언이 엇갈림)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물경 40%가 넘는 분량이 삭제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두용 감독은 여러 자리에서 <최후의 증인>의 삭제 사례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고했다. 인용문에 언급되었듯 그에 따르면 이 영화는 청와대에 민원이 제기되어 정권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증언은 당시 검열서류가 밝히고 있는 정황과 차이가 있다. 당시 검열서류에 따라 간단히 이 영화의 검열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최후의 증인>은 1980년 2월 12일 제작신고가 접수되어 2월 19일에 대본 심의가 이루어졌다. 심의를 맡았던 공연윤리위원회는 빨치산의 소녀 추행 장면 등을 포함 7개 장면에 대해 수정 혹은 삭제 판정을 했고, 이와 같은 제한 사항 그대로 문공부는 제작사에 영화제작 신고를 허용했다. 완성된 필름에 대한 검열은 제작이 완료된 후인 1980년 9월 16일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공윤은 ‘공비들이 지혜를 윤간하는 장면’, ‘검사의 책상 위에 지폐 뭉치를 건네주는 금전수수 장면’ 등 총 네 개 화면을 삭제할 필요가 있음을 문공부에 통보했고, 문공부는 9월 18일, 이 내용 그대로 제한 사항을 둔 채 검열 합격을 통보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네 개의 장면의 삭제 길이는 총 56.8m(186.4피트)로 2분이 채 안 되었으며, 검열허가 서류상의 총 상영시간은 158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볼 때, 장면의 연결을 감안하여 좀 더 길게 삭제했다 하더라도 154분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좌) “영화검열 합격통보”(문공부→세경흥업, 1980. 9. 17.) / (우) 영화검열합격증(1980. 9. 17.)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우선 1980년 10월 8일에는 대검찰청 부장검사의 요청에 따라 검찰청 입장에서의 실사가 이루어졌다. 이는 이례적인 일인데, 이 영화에서 검사가 부정적으로 그려진 것에 대한 대응으로 추측된다. 검찰청은 검찰 혹은 교도관과 관련된 대사 및 장면 각 2개 처를 삭제하기를 요청했고, 이는 문공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정황은 재검열 이후 문공부 담당자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최후의 증인’ 제작 경위”라는 서류에 남아있다. “최후의 증인” 제작경위(문공부, 날짜 미상) 그런데 1980년 11월 10일 제작사는 돌연 문공부에 재검열을 신청한다. 신청서에는 “폐사에서 제작하여 검열을 필한 극영화 ‘최후의 증인’을 폐사의 직접, 간접적인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하여 별첨 자진삭제 작업표와 같이 그 내용을 재편집하였으므로 재검열을 신청”한다고 기재되었고, 상영시간은 종전 158분에서 무려 38분이 삭제된 120분으로 줄어있었다. 이 “불가피한 사유”의 정체는 문공부가 공연윤리위원장에 보낸 검열 심의 의뢰서에 나타나는데, 이 서류에 의하면 “상영시간이 길어 극장 상영 배정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결국 검열 결과 이 영화는 제작사가 제출한 최종 120분으로 확정되었고, 11월 15일 개봉하게 된다. (좌) “극영화 재검열 신청”(세경흥업→문공부, 1980. 11. 5.) / (우) 제작사의 자진삭제 부분 신 표시 이 영화가 종국적으로 이두용 감독의 회상처럼 90분이나 100분까지는 아니라도 120분으로 대폭 삭제된 것은 분명하나, 당시 서류에 의하면 그 이유는 감독 본인의 주장과 달리 국가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작사의 상업적인 동기에 의해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증언에 비해 검열서류와 같은 공식 문서를 더 신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는 없다. 공문서에 작성된 최종적인 기록 역시 부정확하고 조작 혹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독의 증언과 같이 국가권력(청와대, 혹은 검찰당국)이 이 영화를 못마땅하게 판단했고, 상영허가를 철회하거나 대규모로 검열을 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물의를 감안하여 제작사에 자진 삭제를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추정 역시 가능하다(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두용 감독은 정확히 언젠지 특정은 하지 못하나 검찰로부터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그 경우 굳이 문공부가 대검찰청이 실사 검열을 통해 대사 삭제 2개 처, 화면 삭제 2개 처를 요청했다는 기록을 남겼을 이유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삭제된 장면들이 정부에 의해 문제될 만한 분량 외 다른 장면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감안할 때, 오히려 서류의 기록대로 영화가 너무 길어 개봉관을 확보하지 못한 제작사가 자진 삭제를 한 이후 감독에게 검열당국의 요구사항이라 책임을 전가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실제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영화 중 2시간 40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는 <최후의 증인> 외 1편( 안현철 의 < 세종대왕 >, 150분)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개봉되지 못했다. 비슷하지만 다소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제작사가 국가의 압력을 핑계로 상업적인 동기를 더하여 과도하게 삭제했을 수도 있다. 신화를 넘어서 해당 분량을 삭제한 것이 국가인가, 자본인가라는 질문은 한국영화 검열의 역사, 심지어 검열의 본질을 논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주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감독이 검열 과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은 본인 때문에 제작사에 피해를 주었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회사에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고 하며, 해당 서류를 본 뒤로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감독이 검열 증언의 주된 발화자라는 점은 사실관계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점 외에도 또 다른 심각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위를 든 국가와 희생당하는 무고한 창작자의 상을 확대재생산 함으로써 검열이 가지는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와 절차, 효과성을 가리며, 이를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문제로 축소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영화 제작사, 지방흥행사(배급사), 상영관, 언론, 나아가 관객 등 영화검열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 (말하자면 텍스트의 생산과 의미 결정에 참여하는) 다양한 주체들을 누락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검열 절차상 직접적인 피검열 당사자인 영화 제작사가 누락되어 온 것은 심각한 문제다. 제작사는 검열절차의 일선에서 검열관들을 상대하고 그들과 협상한다. 감독이 뇌물과 협박, 타협과 굴종이 뒤섞인 검열의 복잡하고 지저분한 협상 과정을 모르거나, 때로 (자신의 희생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알면서도 감출 때 후대 연구자들 역시 전통적이고 협소한 검열의 관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 ◦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 해서 분명히 밝혀두자면, 필자는 감독들의 검열 관련 증언이 허위라거나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소간의 과장이나 왜곡이 있을지언정 상당수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근거가 불명확하고, 그들 역시 제작사로부터 전해들은 정보를 전달하는 입장이라는 것, 무엇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 <최후의 증인> 검열서류 원문은 KMDb 컬렉션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 KOFA 검열서류 컬렉션 ) ◦ 이 글은 필자가 발표한 논문, 「한국영화검열사의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시론적 연구」(『한국극예술연구』 제59권, 2018)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 [1] 이남기, 채록연구 배수경, 「문공부 영화과 시선으로 바라본 1970년대 합작영화」,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한국영상자료원, 2015, 167쪽. [2] “ ‘뽕’ 이두용 ‘2시간 40분짜리를 1시간 30분으로 싹둑’ ”, 《노컷뉴스》, 2008. 1. 15.
<벤허>(1925)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동원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는 식민지 통치 전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제국은 힘의 우위를 과시하며 찍어 누르기 위한 ‘무단통치’를 내세웠으며, 이는 ‘강자’가 곧 ‘적자’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무장한 헌병들이 백주에 대로를 활보하고 일반 문관뿐 아니라 교사들까지 칼을 차고 다닐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는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해 왔던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3.1운동’은 예기치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대규모 인파가 몰릴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던 상황이었고, 실제로 2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한꺼번에 상경했지만 치안 당국의 대응은 미온적인 수준에 그칠 따름이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체포되었으나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행렬은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만세운동의 기운은 조선 각지로 퍼져나가며 끈질기게 이어졌다. 여러모로 ‘3.1운동’은 제국의 통치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비껴난 장면들을 연출해 냈던 셈이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물리적 폭력에 의존한 통치 방식은 뚜렷한 한계에 부딪혔다. 만세운동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잔혹성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부담을 느낀 제국은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유화책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이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눈에 띄기 쉬운 헌병의 수는 줄었을지언정 실질적인 경찰력은 증대되었으며, 언론의 창간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했지만 이것 역시 식민지 조선 사회의 동향을 철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조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통치의 요체는 감시와 처벌을 짝패로 한 안정적 관리 기술에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극장 이 새로운 식민통치 기술의 주요한 시험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문화통치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해도, ‘3.1운동’의 전례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은 집단을 이룬 조선인들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광장’을 둘러싼 정치적 상상력이 봉쇄당한 상황에서 극장은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종족의 회집 장소였다. 극장업은 엄연한 합법의 영역 속에 놓여 있었을 뿐 아니라, 제국은 극장이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배출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치안 유지에 유용한 기관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극장에 모여든 관객들은 돌발적 사건에 의해 쉽게 자극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치부되었다. 비록 극장에서의 소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여파에 대한 추정치는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전거를 환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20년대 들어 검열 규정 들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1922년에 공포된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취급심득」은 공연에 대한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는 점과 함께 무단 공연 시의 처벌조항도 적시했다. 이어 1923년에는 경기도 경찰부가 경성에 소재한 극장 경영자들을 불러 모아 개선사항을 주문한 바 있었다. 특히 비밀결사와 음모단이 활동하는 내용의 활극은 유해하므로 피할 것, 변사가 사전 검열 내용과 다른 풍자적 언어를 쓰지 말 것 등의 내용이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1] 1926년부터 시행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은 일본의 법규를 소급적용한 것이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별도로 적용된 최초의 법적 근거였다. 또한 이 규칙은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급성장한 영화 를 명백한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필름 상영 전에 검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뿐 아니라, “공안, 풍속 또는 보건상” 지장이 없어야 한다는 검열 기준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상영 시의 임검을 비롯한 현장취체 규정도 명문화되었다. 한편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의 가장 명시적인 표적은 외화 였다고 할 수 있다. 1923년에 < 월하의 맹서 >(윤백남, 1923)가 제작된 이래 조선영화계는 본격적인 생산의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지만, 상영된 영화의 절대 다수는 서양에서 수입해 온 외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떤 이유로 먼 나라의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상이한 풍속의 세계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지기 극장이 형성해 온 무성영화의 상영 관습 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극장에서 상영된 무성영화는 자족적인 텍스트라 보기 어려웠다. 무성영화는 항상 변사와 악사를 비롯한 인간매체의 개입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상영이라기보다는 연행 에 가까운 형식을 띠고 있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대표적 표징으로 지목했던 영화의 성격이란 적어도 식민지기 극장에서는 유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를 관람하던 당대의 관객들은 화면에 나타난 낯선 시각적 코드 와 변사를 통해 중계된 익숙한 구두적 코드 를 결합시켜야 했다. [2]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법한 방식이라 해도 관객들은 극장 경험을 축적해 나가며 이를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백문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무성영화의 관객들은 ‘소리’를 들었다고(혹은 상상했다고) 반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 역시 외국 배우의 벙긋거리는 입술에서 모국어 발화를 연상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법하다. 그리고 변사의 연행은 그러한 상상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무성영화의 수용은 매우 혼종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국적 배경에서 펼쳐지는 외국인들의 이야기, 즉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내러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공유된 코드에 의해 토착화되고 전유 되었으며 더 나아가 종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또한 변사의 역할은 단순히 간자막의 내용을 ‘번역’하여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변사의 수준이란 관객이 지참해야 할 손수건의 수로 가늠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만큼, 그들의 해설은 객석을 선동하여 집단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오독에 가까운 변개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제멋대로인 해설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관객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사들은 스스로의 역할을 일종의 창작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객들의 기대와 욕망을 자극하는 해설을 통해 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유선영은 헐리우드 영화 < 동도(Way Down East) >(데이비드 W. 그리피스, 1920)가 식민지 조선에서 변사 해설을 동반하여 상영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과 다소 비껴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동도>는 남자에게 배신당해 미혼모 신세가 된 젊은 여성이 사회의 냉대 속에서 온갖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선한 행실을 통해 끝내 행복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동도>는 권선징악의 시적 정의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둔 전형적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안나는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알아본 데이빗의 구애를 받게 되지만, 과거 그녀를 버렸던 레녹스와 다시 만나 과거사를 폭로 당했고, 데이빗의 아버지인 스콰이어는 부정한 행실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안나를 면전에서 모욕한다. 쫓겨난 안나는 눈보라 속에서 기절하고 강물에 휩쓸려 흘러가다가 폭포로 추락할 위기를 맞이하지만 뒤쫓아온 데이빗은 유빙들을 징검다리 삼아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며 극적으로 안나를 구해내게 된다. 이 장면은 <동도>의 메인 포스터 이미지로 활용될 만큼 스펙터클의 요소가 부각되는 곳이며, 내용 측면에서도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영환이 가장 ‘통쾌’한 대목으로 회고했던 것은 데이빗이 아버지 스콰이어에 대해 ‘후레질’을 하며 대드는 장면이었다. 특히 데이빗은 ‘종교, 도덕, 법률’이 부재한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데, 아버지의 ‘종교와 도덕’은 무엇이냐고 되묻는 장면이나, 안나에게는 ‘종교, 도덕, 법률’ 어느 것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선영은 이러한 반복이 다분히 변사 김영환의 강조점에 따라 취택되고 덧붙여진 장면에 가깝다고 보았다. 즉, 김영환이 느꼈던,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통쾌감’은 낡은 구질서와 도덕의 파괴, 자기혁신을 통한 개조, 정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절박한 기대감, 식민지민이자 약소민족이라는 자의식이 결합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4] 변사 김영환 / <동도>(1920) 중 (사진: “ Way Down East ”, IMDb) 이처럼 변사의 해설은 서양발 수입 무성영화의 세계를 식민지의 서사로 환치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관객들은 은밀한 해석의 코드를 공유하면서 전유의 독법을 체화해 나갔다. 더군다나 인간매체인 변사는 복제매체와 달리 돌발적 수행성 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해설 대본도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무대 배우의 애드립처럼 변사 역시 현장 분위기에 맞추어 임의로 발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 필름 검열과 별도로 임석경관을 동반한 현장취체가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 대구 만경관 활동사진 순업단이 지난 팔일 진주에 도착하여 연일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십일 밤 영사하는 사진, <암흑의 시(市)>에 설명 변사 김성두 군이 동 영화 중에 나타나는 주인공이 빈한한 사람을 위하야 일하다가 결국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전기의 판결을 담임한 판사의 아들이 역시 법망에 걸리는 경로를 설명하면서 현대사회 조직이 불합리할 뿐 아니라 법률이 없어도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잇다는 설명 을 마치자 곧 임석경관이 검속을 시키고 다음 사진도 못하게 함 에 오백여 군중이 이유를 설명하라고 고함을 쳐 장내는 대소란을 일으켰는데 활동사진 설명까지 가혹히 취체함은 처음 일이며 진주경찰서의 근래 언론취체는 너무 가혹하다 하여 일반의 비난이 자자하다더라. (진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6 』, 한국영상자료원, 2014, 177쪽. - 기사, “활동사진 설명 중 – 변사 돌연 검속”, 《조선일보》, 1926. 3. 13. (나) 지난 십육일 밤에 시내 조선극장에서 다수한 격문을 살포한 사건 이 있은 이후 경찰 당국의 극장 경계는 더한층 삼엄하여져서 시내 단성사 , 조선극장 , 우미관 등의 각 극장의 입구는 말할 것도 업고 밑의 층 위층에는 두어 간통만큼씩 십수 명의 정, 사복경관이 벌려서서 철통 같은 경계를 하고 잇는데 그중에도 무대 정면에는 바로 변사 옆에 순사부장 한 사람이 걸상에 걸어 앉아서 활동사진을 영사하는 암흑한 속에서 끊임없이 관중과 눈싸움 을 하고 잇는 등 일찍이 극장에서 볼 수 없던 진기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0 』, 한국영상자료원, 2019, 132쪽. - 기사, “각 극장마다 수십 경관 배치 – 변사 옆에 순사가 앉아”, 《조선일보》, 1930. 1. 19. (가)는 임석경관이 변사의 임의적 해설을 문제 삼아 흥행 자체를 중지시킨 사례에 해당한다. 대구 만경관 소속의 활동사진 순업단이 진주에서 영사회를 열었을 때, 변사 김성두는 감옥에 갇힌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볼온하게 해석될 만한 해설을 덧붙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 불합리하며, 법률이 없어도 충분히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막연한 인도주의적 발상에 기댄 이 해설이 명시적인 불온성을 띤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년도 5월부터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등 국사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시행되어 왔음을 고려한다면, 치안 당국은 법률 무용론을 설파한 해설의 저의에 의구심을 품기 충분했을 것이다. 한편,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치안 당국을 긴장시켰던 사건이었다. 이 시기 극장은, 동맹휴학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져나가던 학교와 더불어 경찰의 일급 감시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두운 공간 속에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들었던 극장은 격문을 살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나)는 조선극장 격문 살포 사건 이후 임석경관의 감시가 매우 노골적으로 표변한 순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는 객석의 가장 뒤편, 즉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5] 그런데 격문 살포 사건이 발생하자, 경관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순사부장이 아예 변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중과 눈싸움”을 벌이는 “진기한 광경”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치안 당국의 주안점이 변사의 해설 자체보다 그것이 촉발하는 객석의 정동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데 있었다는 점을 함의한다. 그러나 가시화된 임석경관의 존재는 외려 극장에 내재한 정치적 상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임석경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제국의 감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와 같은 시스템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현존하고 있었다는 점은 극장에 내재된 불온성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던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프로그램은 언제나 임석경관에 의해 중지되거나 취소될 수 있었기에, 임석경관은 극장에 모여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임석경관으로 대표되는 감시기제의 존재는 관객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응시하면서 극장을 둘러싼 심상지리를 ‘불온한 공간’으로 스케치했으며, 관객들은 그 시선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구성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극장 흥행주들은 이러한 불온성을 흥행 코드로 치환 하는 데 은근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특히 민족의 수난 서사와 해방서사를 담아 낸 외화들은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예컨대 1928년에 개봉되었던 <가우초>와 <이스라엘의 달>은 압제에 시달리는 약소민족의 해방서사를 그려 낸 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가우초>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에 터전을 둔 유목민 ‘가우초’의 영웅담을 조명한 작품으로, 그들의 수령인 주인공은 신전을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신관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 신전의 보물을 노린 도적들이 쳐들어오고 열세에 처한 주인공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신출귀몰한 책략”을 발휘하여 끝내 신전을 지켜낸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6] <십계>의 ‘자매편’이라 소개되었던 <이스라엘의 달>은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아 허구를 가미한 작품이다.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 끌려가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 왔다. 그들을 동정해 왔던 이집트 왕자 세티는 ‘이스라엘의 달’이란 별칭을 가진 메라피와 만나게 된 후, 이스라엘 민족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신문에 게재된 감상평은 동포의 자유를 위해 “어여ᄲᅳᆫ 청춘”을 바친 메라피의 희생을 ‘잔 다르크’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게 된 이집트 왕의 최후를 “확연한 인과의 결실”이라 규정한 바 있다. [7] <가우초>, <이스라엘의 달> 포스터 이듬해 식민지 조선에서 개봉한 < 벤허 >(프레드 니브로, 1925)는 유대민족의 수난사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는 계기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극장 운영자와 실무자들은 서양영화를 경유하여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관객몰이’에 유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기 위해서는 먼저 필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단성사 영업부장으로 재직하며 <벤허> 검열 과정에 참여한 이구영 의 ‘무용담’은 흥행 실무자의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당대 검열행정의 공백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구영) 영화검열을 이거 통과해나가면, 대본을 보니까 이거 암만해도 위태로워요, 내가. 거기 몇 마디 다이알로그가 이건 아주 불온 천만한 얘기란 말이에요, 저 노예선이..., 거 지중핸가 거기 나가지 않습니까? 거기에 전부 철사로 묶이고 거기에 이제 그..., 이... 저...? (면담자) 북? (이구영) 네, 북을 울리면서 리듬 맞춰가지고 노를 젓지 않습니까? 거기에 소위 선장이라고나 할까? 그게 나왔어. 나와서 채찍으로 갈기는 겝니다. 막! 덜 움직인다고... 그래 반항하는 거야. 이쪽에서. 그 주인공의 이름이 마리오스인가요? 반항하는 거야. 직접 대고. 그 선장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저어서 한 시간씩 늦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빨리 배를 저으란 말이야. 그 때 반항하는 거야. 그래서 대사 하나가 나옵니다. 너의 한 시간은 말이야, 우리 유태 민족의 백 년이단 말이야.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알겠느냔 말이야. 그 대사가 하나 탁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하나 유일하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겝니다. 이것이 통과되야만, 되면 이거 아주 히트란 말이에요, 영화는... 그런데 검열관은, 소위 성격을 내가 파악하고 있었어요. 오까라고 하는 검열관한테 이것이 가는 날에는 틀림없이 전부 가위질 다 당해서 아마 한 200피트 이상은 없어질 겝니다. 그 화면 전체를 막 끊고, 그런데 다행히 내가 거기 급사로 있던 사람에게 물었어요. 이 대본이 어떤 사람의 손으로 가는 걸 알아다오. 그래 나중에 전화를 걸으니깐드루 요시다란 사람의 손으로 갔다, 길전(吉田)이한테... 됐단 말이야. 그럼 내가 성격을 아니깐 이거 꼭 내가 방법론을 써야 되겄다. 이제 검열실에 올라갔어요. 영화 돌아가는데..., 그 사람이 소위 하이꾸라고 해서 그 배구(俳句)를 좀 할 줄 압니다. (면담자) 네, 하이꾸? (이구영) 네, 그게 경무 월간지가 있어요. 《경무월보》라고... 그걸 내가 찾아냈어요, 일부러, 그래서 고 문구를 외고...,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줄담배입니다. 줄담배, 소위 아사히라고 하는 것을 밤낮, 이놈을 입에다 종일 물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눈이 좀, 시력이 이상해서 아주 그냥 안경을 굉장한 걸 썼습니다. 도수가 깊은 것, 그래서 이제 고 화면이 한 5분이면 벌써 나타나기 쉬운 방면까지 왔어요, 벌써. 그래 내가 화면 보면서 대본 읽으면서 얘기하면서 이거 볼 거 아닙니까? 그러면은 그때는 그 배구에 대한 것, “당신 참 배구 참 멋지다 말이지. 이런 문구, 암만 생각해도 이건 정말 걸작인데, 이런 걸 왜 문단에 발표하지 않고 이런 데다 이렇게 내슈?” 막 칭찬하구 말이야. “당신, 자꾸 쓰슈, 자꾸 이런 글을. 이래야지, 우리도 좀 보지. 당신이 나 이런 걸 쓰는지 몰랐단 말이야. 오까~ 같으면 이런 걸 안 쓴단 말이야. 당신이니까 썼지.” 그렇게 하니까 칭찬해서 누가 싫다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아, 그러냐?구,’ “그래 평판이 대단하단 말이야, 요시다상, 이거 정말 문학에도 이렇게 조예가 있고 검열관으로 있기에는 참 아깝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아! 그렇냐’고 말이야. 그래 그러는데 그 화면이 지나가요. (면담자) 네, 그걸 지키기 위해... (이구영) 내 아주 잊질 않죠, 이제. 그 지나갔어요. 지나가서 얘기 딱 끊고, 뭐 참, 얘기가 너무 길었단 말이야. 그러고 영화 보는 게죠. 그러니까 지나갔죠. 그러니까 이제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 콱콱 내줬어요. 내가 춤을 추고 혼자 나오는데,(웃음) - 한국예술연구소 편,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편』, 소도, 2003, 283~284쪽. <벤허> 중 (사진: “ Ben-Hur A Tale of the Christ ”, IMDb) <벤허>는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하에 놓여 있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 벤허는 귀족 집안 출신의 자제이며, 체제에 반항하는 동족들을 밀고하라는 로마인 친구의 부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노예로 전락한 인물이다. 이구영이 주목했던 것은 벤허를 비롯한 유태인들이 노예선 위에서 학대 받는 장면이었다. 채찍질하는 노예선의 선장에게 맞서 “우리 민족의 백년한”을 부르짖었던 대사가 “히트”를 예감케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구영이 보기에도 반항기가 농후했던 이 대사가 온전히 검열을 통과할 리 만무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구영은 ‘꼼수’를 동원한다. 어떤 검열관이 배정되었는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필름 검열 당시 문제의 장면이 지나갈 때 관심을 돌릴 요량으로 그의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 실력을 일부러 추켜세웠다는 것이다. 결국 “노컷으로다가 무제한 도장”을 받아 낸 이구영은 희희낙락하며 검열실을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벤허>가 상영되었을 때, 이 대사는 문제를 일으켰고 즉각 임석경관의 중지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벤허>는 필름 검열을 통과한 작품이었던 데다가 변사가 설명대본에 없는 대사를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검열 당국은 당혹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구영이 회고한 뒷이야기에 따르면 검열관들 사이에 다툼까지 일어날 정도로 큰 난리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벤허>는 계속 상영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연장상영까지 진행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검열 역시 사람의 손으로 수행하는 작업인 이상 빈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구영은 그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던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며, 극장의 핵심 프로그램이 발성영화로 전환된 1930년대 이후부터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요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발성영화는 별도의 소리 연행자를 둘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된 텍스트였기에 필름 검열만으로도 불온한 장면들을 걸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발성영화의 사운드와 충돌할 때가 잦았던 변사의 목소리는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재래의 취향’으로 낙인찍히며 점차 주변화되었다.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의 극장에서 돌발적 수행성이 발휘될 여지(餘地)가 급격히 좁아져 간다는 점을 의미했다. *** [1] 기사, “활동사진 개선의 요점 - 비밀결사나 모험뎍 활동사진은 조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금지”. 《조선일보》, 1923. 4. 11. [2] 유선영, 「초기 영화의 문화적 수용과 관객성 : 근대적 시각문화의 변조와 재배치」, 『언론과 사회』 12, 사단법인 언론과 사회, 2004. [3] 백문임, 「식민지 극장의 무성영화 관람성」, 『한국언어문화』 38, 한국언어문화학회, 2009. [4] 이러한 전유의 구조를 적용해 본다면, 안나는 피억압 약소민족으로 치환되며, 레녹스는 거짓과 위선으로 식민지를 강제 병합한 제국 일본으로, 스콰이어는 종교와 도덕을 말하면서도 침략자인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서구 강대국들로, 데이빗은 약소민족을 대변하기 위해 아버지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조력자이자 인도와 정의를 구현하는 선인으로 전치될 수 있을 것이다. (유선영, 「식민지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동도>의 전복적 전유와 징후적 영화경험」, 『미디어, 젠더 & 문화』 26,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2013.) [5] 광주극장은 1930년대에 건축되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온 극장이다. 광주극장은 ‘임검석’의 위치도 보존해 놓았는데, 객석의 가장 뒤편인 출입구 바로 옆에 임석경관을 위한 자리가 별도로 마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기사, “신영화 - 『더글라스』의 가우초”, 《조선일보》, 1928. 2. 15. [7] 기사, “내가 본 이스라엘의 月”(一), 《동아일보》, 1928. 2. 10.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