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의 고백
- 감독
- 심우섭
- 제작년도
- 1963
- 출연
- 도금봉, 허장강, 김희갑, 이예춘, 복혜숙, 정문각, 백송, 최삼, 이경희, 이경림, 심해구, 최성, 김홍, 곽태용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장손>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1. 곰곰이 뜯어보면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오묘하다. 비평(critic)이 위기(crisis)를 전제로 한다는 통설에 근거하자면, 비평이란 그 성질상 한사코 안녕(安寧)할 수 없는 것이거나, 최소한 안녕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태평한 시기일지라도 비평가는 위기를 발견하고, 때로는 그것을 인식의 표면에 올리고자 위기를 조장해야 한다. 통념과 상식의 범주에 포착되지 않는 요소를 끝내 사유의 영역으로 회수해내는 일—그곳에 비평가의 덕목과 기쁨이 있다. 물론 이러한 덕목을 실천하고 기쁨을 누리는 비평가도 안녕하기는 어렵다. 상식과의 불화를 견지하면서 평안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녕한 비평’은 존재할 수 없고(안녕하면 비평이 아니다) ‘안녕한 비평가’는 소속감을 불안으로 받아들이고, 불화에서 안정감을 찾는 사람들의 희귀한 기질을 갖춰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 존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잊음(oubli)이다. 나는 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잊음이다.” *주1 ) 비평가는 탄탄대로를 지척에 두고도 굳이 외줄을 탄다. 탄탄대로처럼 보이지만 실은 앞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마땅히 안녕할 수 없는 비평(가)에게 주어지는 ‘비평, 안녕하십니까’란 질문은 이렇게 읽힌다. ‘비평, 설마 안녕히……하고 계신 건 아니죠?’ 내게 비평가란(등단 등의 제도를 통해 부여되는 자격이 결코 아니고) 비평의 기능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사람의 총칭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조금만 비평가다. 그렇지만 질문은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다. 그러니 질문을 핑계 삼아 외줄에 올라보자. 다시 한 번, 김현은 이렇게 쓴 적 있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 없이는 느낄 수 없다.” *주2 비평가는 투사와 예술인의 세계를 오가고, 부지런히 샛길을 만든다. 잠깐, 자부심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나는 부끄럽기에 아주 멀리 우회하고 감추고 파편화할 것이다. 2. 이두용 의 < 장남 >(1984)은 고향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노부모가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상경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장남( 신성일 )을 중심으로 담은 극영화다. 오즈 야스지로의 < 동경 이야기 >(1953)처럼 처음 장남의 집에 모셔진 노부모는 도시화된 생활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집터로 사둔 변두리에 잠시 머물고 결국 노인에게 불편한 아파트로 옮겨진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제주도로 장남이 출장을 간 사이 노모는 아파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틀니를 전달하지도, 임종을 지키지도 못한 장남이 도착한 건 엘리베이터에 실을 수도 없어 관이 ‘짐짝’처럼 곤돌라로 내려지고 있는 때였다. (상) 아파트로 이주한 노부모와 노모의 관이 내려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장남 (하) 공중전화에 두고 간 수첩을 전달받는 장남 이렇게 글줄로 옮기니 장남이 적극적으로 불효를 저지른 것 같지만, 장남은 결코 지탄받을 정도의 불효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잘 잊는 사람’일 뿐이다. <장남> 그리고 이두용의 탁월함은, 이 성격을 구축하는 표현법에 있다. 5분, 장남이 공중전화에서 막내에게 전화를 하고/다음 이용객이 장남이 수첩을 두고 갔다고 불러/수첩을 전해주는 장면이 있다. 슬래쉬(/)를 기준으로 세 컷으로 이뤄진 이 장면은, 장남이 ‘잘 잊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의도(intention)를 드러낼 정도로 강조되어 있지만, 몰입을 저해할 만큼 웅변조는 아니다. 이 장면을 계기로 시작된 ‘잘 잊는 사람’이란 성향이 연속되며 결말이 엄습해온다. 장남의 유실물이 점점 중대해진다. 그는 아내와의 결혼기념일을 잊고, 어머니의 틀니를 해주는 것을 잊고,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말을 했음에도) 결국에는 어머니의 다가오는 죽음을 잊는다. 그 제목만으로 <장남>과 ‘ 각각의 영화사 ’를 상상하게 하는 < 장손 >(오정민, 2023)은 여러모로 다른 영화다. 노부모가 장남을 찾아오는 게 아니라, 상경한 손자가 가족이 사는 대구의 고향 집으로 내려온다. 장남과 달리 장손 김성진( 강승호 )은 자동차를 몰지 않는다( 임권택 은 언젠가 영화평론가 정성일 에게 “남자가 말이오, 나이가 들어서 늙으면 안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운전밖에 없어요”라고 말한 적 있다. 남성성과 운전). 그리고 무엇보다 장남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한다. 그렇지만 장손은 가족의 무게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장손은 조부모의 영정사진을 찍는 일을 회피하고, 할머니의 장례식장으로도 곧잘 들어오지 않으며, 병실 바로 앞에서도 고모부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창밖의 햇볕에서도 눈을 돌리듯, 가족의 문제를 외면(外面)한다. 고모부를 보지 못하고 병실 앞에 앉은 성진 물론 <장남>의 잦은 망각도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에 검열된 결과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다. 다만 무의식적 외면의 욕구가 가족주의라는 검열과 부딪칠 때마다 쌓였던 에너지는 노모의 죽음과 함께 슬픔으로 폭발하고 관객에게 전이된다. 그리하여 이두용 영화에 내재한 미묘한 냉엄함과 별개로, <장남>은 가족주의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주3 이와 달리 가족의 무게를 결단코 외면하지만 (지극히 특권적이고 결단코 반항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러므로 단언컨대 성진은 그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핵심적 구동원리인 ‘장자우선주의’의 수혜자인 덕에 가족주의의 전(全) 과정을 익히 알 수 있는 성진의 특권적 시야로 인해 <장손>은 건조한 케이스 스터디로 귀결된다. <장남>과 <장손>의 이 차이는 흥미롭다. 그렇지만 지금 남겨둘 질문은 하나다. 어쩌다 장손은 외면을 하게 되었는가? 3. 유산(heritage)은 벽이다.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수록, 그 벽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에는 모두를 병들게 한다. 이 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은 단 하나다. 그것을 정확히 대면하는 것. 나는 여기에 관한 최량의 우화를 하나 알고 있다. 남재일 : 당신의 영화는 매우 공격적이고 신랄하게 발언한다. 지금 ‘아버지’라고 표현한 부분일 수도 있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격하고 싶은 건가? 임상수 : 나는 모든 권위 혹은 권위주의를 철저하게 경멸한다. < 그때 그사람들 >(2005)을 본 사람들은 임상수가 이렇게까지 존경심이 없다는 데 당혹해한다. 좌파와 진보적인 사람들까지도. 그런 걸 보면 나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경멸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경멸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조롱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조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뿌리 깊은 속성부터 아무런 존경심이 없다. 그 근원은 내 부친이다. 그는 존경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출세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질투가 있었지만, 나는 한 세대를 겪고 나오면서, 그 질투를 정확하게 걸러냈다. 그의 경멸만을 물려받았다. 경멸하려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요만큼도 존경할 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허투루 존경받고 있다는 치명적인 사실 말이다. (강조-인용자) ‘남한’을 구축했다고 할 만한 최대의 유산인 박정희를 경멸하기 위해 임상수 는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임상수는 박정희를 거의 촌부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 해직기자이자 영화평론가였던 아버지 임영(林英)의 덕이며, 심지어는 “어떤 점에서는 아버지가 이 영화의 공동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층위는 다소 다르지만) 유산의 성격이다. (박정희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정확히 대면하면 그것을 경멸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임영이라는) 유산은 강력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주4 한국의 영화에도 많은 유산이 있다. 나는 이 유산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유산은 일종의 물과 어항이다. 나는 그 안에 살기에(물) 제한된다(어항). 제한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지만, 의심이 시작되면 참을 수 없이 답답해진다. 이 답답함을 외면(外面)하는 것이 ‘안녕’한 선택이다. 그리고 ‘안녕’을 위한 외면도 반복된다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다시 한 번, 비평은 어항의 ‘바깥’을 향한 몸짓이다. 그 몸짓의 방법과 정도는 가지각색일 수 있다. 어항 속의 물고기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지느러미로 어항을 가늠하고 빈틈을 탐색할 수도 있고, 눈알이 빠지도록 대가리를 어항에 처박을 수도 있다. 한국의 영화사를 돌아보면 많은 비평은 어항을 새로이 만드는 일에 참여해왔다. 초기의 비평은 세계영화에 비해 기반과 역사가 빈천한 ‘한국영화’의 위신(prestige)을 위해 투쟁했고, 1990~2000년대 ‘뜻밖의 연합(Unexpected Alliances)’ *주5 이 이뤄진 시기의 비평은 ‘스크린쿼터 운동’을 문화제국주의에 대립하는 첨예한 전선으로 잡고 독립과 인디(indie)의 기반이 되는 제도와 기금의 조성에 헌신했다. 이들의 투쟁과 헌신이 얼마나 상례적이었고 유효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제도는 분명 중요한 비평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비평의 결과로 만들어진 제도가 오늘날 영화에서의 유산이다. 나는 2010년대 중반부터 영화 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기억컨대, 2010년대의 영화계는 제도 비평의 활기가 가득했다. 혹자는 이들의 제도 비평을 두고 지면(紙面)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라고 저열한 힐난을 했지만, 내가 아는 한 제도 비평에 열을 올렸던 비평가 중 영화계에서 안정된 지면을 얻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제도 비평은 실질적으로 유효한 행정의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제기한 논점을 두고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듣는 회담이 열린 적도 없다. 솔직한 토론이 이루어질 경우 자신들의 지적 기반과 역사적 모순이 노정될 게 두려웠던 것일까?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말하자면, 영화계는 제도 비평을 수용하고 처리할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비판을 지면의 요구로 해석하는 사람이나, 비판의 실질이 아니라 태도를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사람들은 영화를 문화가 아니라 산업으로 보고 자리를 지키는 것에만 혈안이 된 게 아닐까? 그들은 종종 이렇게 무의식적인 고백을 한다. “이런 비판에는 동업자 정신이 결여되어있어……” 재원의 전부가 국가지원금인 경우에도……) 어쨌거나 그때의 비평가들은 대개 미술이나 문예 계열의 지면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2020년 COVID-19로 인한 팬데믹(Pandemic)이 도래했다. 2010년대가 핵심적으로 겨냥한 유산이 ‘뜻밖의 연합’이 창안한 제도였다면, 이러한 역사적 우연은 지극히 공교롭게 느껴진다. 초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의 위신을 추구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단관극장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뜻밖의 연합’ 시기의 비평이 세계영화에 대해 한국영화와 독립영화의 ‘다양성’을 ‘보장받길’ 원한 배경은 당대 영화의 미디어 환경이 멀티플렉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상영관에서 한국의 영화를 확실히 몇 자리 확보하고자 하는. 그리고 팬데믹은 정확히 멀티플렉스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 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리하여 2010년대의 제도 비평을 지금 보면 어딘가 예언적인 게 있다. 그때 지적된 다양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적해 있고 심화되었다. 그렇지만 학습의 효과일까. 오늘날 영화 비평은 더는 제도를 문제 삼지 않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내 대가리만 깨지고 말 텐데?)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마이크로시네마’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씨네21》이 서로 너무도 이질적인 집단을 묶고 이들을 ‘마이크로시네마’라는 새로운 환경으로 제시했지만, 그 요체인 소규모-(비)공식-영화보기 모임은 당연한 말이지만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최근의 ‘마이크로시네마’가 새로운 현상인 것은 이 기획에 비평가가 다수 참여하고 있고, 과거와 달리 (위법성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홍보로 호객을 한다는 점일 테다) 그 실질은 제도 비평과 아무 관계 없다고 실소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구조적으로도 팬데믹 시기에 강화된 OTT라는 미디어 환경이 영화를 초과공급하고 있기에 강력한 큐레이팅 기능을 요구하는 수요를 포착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의 시야에서 2010년대의 제도 비평과 2020년대의 마이크로시네마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혹은 착각일지라도, 이 착각이 적잖이 생산적일 거라고 자신한다. 이러한 착각을 지속하자면(사실 비평가는 착각의 대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포스트 2010년대’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영화 제도가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유통과 인정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판단, 혹은 제도화 없는 비판이 내파(implosion)와 외파(explosion)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토대로 시작한 참호공사. 어항과 금붕어의 비유를 계속 들자면, 전자는 작지만 작은 어항을 새로이 만들자는 것이고, 후자는 어항을 부술 수 있을 때까지 머리를 단단하게 만들자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다보니, 제안받은 원고의 매수와 주제를 모두 훌쩍 초과했기에, 이쯤에서 서둘러 마무리해보자. 나는 비평이란 그 성질상 위태롭고 불쾌하고 불건전할 때 적절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다시 어항에 대가리를 처박는 사람들이 보고 싶다. 2010년대에 예견되었듯, 멀티플렉스는 머지않아 시장에 의해 자동조절 될 것이고 줄어드는 관객에 따라 영화에 부착된 사회적 기능도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적 실천이 아니라, 제도 비평의 계절이 다시금 오기를 바란다. 그러니 (이제, 감히 대명사를 바꿔 보자) 우리의 ‘제도 비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나의 근심이자 고민이다. 나는 성진-장손이 택시를 돌려 다시 집으로 가길 바란다. 그것이 그의 몸과 정신을 찢어놓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2010년대 재방문’이 너무 늦지 않기를. “장자의 무용지용에 대한 퉁명스러운 반론: ‘그래 그렇게 오래 살아 뭐하자는 게요, 제기랄.’” *주6 *** 주1.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3, 128쪽. 주2. 위의 책, 168쪽. 주3.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건대, 영화의 결말이 가족주의인 것이 영화의 질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4. 고백하자면 나는 초기의 (영화적, 문화적) 세계관을 남재일 선생님의 말과 글에서 전수받았다. 유산은 강력하다…… 주5. 포스트 권위주의 사회에서 영화산업과 국가, 그리고 독립영화가 어떻게 예기치 않게 연합을 이뤘는지를 설명하는 동명의 저서(박영아, 2014)의 제목. 주6. 위의 책, 156쪽. 금동현(영화평론가) l 「상상되는 것인 동시에 그 잉여」(2024), 『하녀: 하녀 따위에 흥미를 가져요?』(2024) 등을 집필했다.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의 매거진 《삼삼오오》를 기획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영화는 윤리적 재현과 관련해 오랫동안 아방가르드의 위치를 점해왔다. 미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던져졌고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이에 자의적, 타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절멸이라는 끔찍한 폭력을 구체적으로 시청각화 하는 것은 어떠한 효과를 낳는가, 인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폭력을 서사화할 수 있는가, 목격자가 없거나 말하기 힘든 경우 (예를 들면, 가스실) 증언과 기억은 어떻게 기록될 수 있는가, 과거는 어떻게 현재와 대화를 나누고 기억을 상속할 수 있는가,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 놓인 생존자들의 증언은 어떠한 형식으로 가능한가, 관객들의 동일시와 공감은 어떤 강도로 이끌어 내는 것이 적절한가, 피해자·가해자·조력자·제삼의 목격자 들 중 어떤 시점을 선택할 것인가 등. < 밤과 안개 >(알랭 레네, 1955), <카포>(질로 폰테코르보, 1960), < 소피의 선택 >(알란 J. 파큘라, 1982), < 쇼아 >(클로드 란츠만, 1985), < 쉰들러 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 1993), < 인생은 아름다워 >(로베르토 베니니, 1997), < 사울의 아들 >(라즐로 네메스, 2015), < 조조 래빗 >(타이카 와이티티, 2019) 같은 대표적 작품들을 거쳐 오며 각 질문과 관련해 새로운 미학적 선택이 쟁점화 되었고 역사적으로 홀로코스트 영화는 이전 영화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무언가 새로운 영화적이고 윤리적인 미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홀로코스트 영화들에는 있을 수밖에 없다. 관객들 또한 이전 영화와 관련된 쟁점을 인식하고 그에 근거해 영화를 보게 된다. 따라서 모든 홀로코스트 영화는 내외적으로 이전의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매개하고 참조하는 미디어 고고학적 상태에 놓인다.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조나선 글레이저가 감독한 <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3) 역시 그러한 강박 속에 놓여있다. 영화는 새로운 위치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시각화 한다. 이제까지의 홀로코스트 영화가 수용소 및 피해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화하는 선택을 했다면(평화로운 전원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기념관이 된 전후의 수용소를 보여준 <밤과 안개>, 방관자였던 폴란드 주민들의 변명을 듣고 있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화면에 담는 <쇼아>, 흐릿한 포커스 아웃과 좁은 주관적 시야의 제한적인 시각을 통해 목격의 의지를 영화화 했던 <사울의 아들>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 글레이저 감독은 수용소가 아닌, 수용소 소장의 사택과 가정생활을 탐색한다.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앙 프리에델)는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 높은 담장 밖 바로 옆에 위치한 빌라에 거주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는 아내인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 그리고 다섯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있는 다정다감한 가장이다. 루돌프는 큰 아들에게 직접 승마를 가르쳐주고 잠 못 들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막내딸에겐 <헨델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준다. 그는 아내에겐 책임감 있고 유머러스한 남편이기도 하다. 헤트비히 역시 집안을 건사하고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며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데 열정적이다. 전쟁 기간 동안 계급적 상승을 이뤄낸 회스 부부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어낸 것에 큰 자부심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용소가 아닌 사택과 그 주변의 목가적인 풍경만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화장터 굴뚝의 연기와 냄새, 강물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재를 막을 수는 없다. 영화의 제목인 ‘관심/이익 지역’은 나치에 의해 몰수된 수용소 주변 토지를 일컫는다. 이들은 이 지역을 사택으로 사용하는 등 경제적 이익(interest)을 취했다. 이 영화에서 수영장과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한껏 꾸며진 사택은 그 경제적 이득, 시각적 관심이 된다. 어떤 이미지의 관심 혹은 이익은 다른 이미지의 무관심/피해를 대가로 한다. 회스 부부는 바깥과 타자를 절멸시킨다. 가해자 가족의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은 수용소에 대한 철저하고 적극적이며 의식적인 무관심 혹은 비가시성과 교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이미지의 정치경제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가해자 일인이 아닌 그의 가족생활을 다루는 실내극이라는 점에서 이전에 가해자들을 주인공으로 했던 다른 영화들과도 변별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젠더의 정치학이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 절멸 계획을 짜고 지휘한 루돌프 회스 만큼이나 그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를 주인공의 자리에 놓고 그녀의 선택과 행동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가족극, 혹은 < 잔느 딜망 >(샹탈 아커만, 1976) 같은 페미니스트 예술영화들이 실내 건축학을 통해 가족의 정치경제학을 영화적으로 전경화 했던 것처럼 집안과 그에 딸린 목가적 풍경,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의 동선이 끊임없이 시각적이고 경제적인 관심/이익의 교환체계에 놓여있음을 각인시킨다. 헤트비히는 루돌프에게 수동적으로 딸려 있는 부수적 이해관계자가 아니다. 헤트비히는 수용소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모른 척하고 무관심한 채 유태인들의 죽음을 대가로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선택한다. 루돌프가 집안 거실에 앉아 가스실과 화장터 건축과 운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만들어낼지, 즉 어떻게 사람들을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이 살해할지에 대한 계획을 사업체로부터 듣고 논의할 때, 그리고 지상에서는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지하에는 비밀통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줄 때, 가족의 단란함을 포함해 중상층 가족이라는 계급적 유지가 근본적으로 집단학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행위와 결과로부터 그들 자신을 분리하려 한다. 루돌프의 청결에 대한 강박, 매일 밤 모든 방의 전등을 끄고 문단속을 하는 반복 일상, 외화면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화면 안을 가득 차게 보여주는 정원의 꽃의 클로즈업 쇼트들, 침대에 누워 부부가 함께 회상하는 이탈리아 휴가, 유태인 수용수의 모피코트 주머니 속 립스틱까지 꼼꼼하게 챙기면서 유태인들의 유품이 쌓여있는 장소를 ‘캐나다’로 부르는 철저함, 정원의 꽃 이름, 주변 숲의 새 이름을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기억하게 하기 등. 신체, 시각, 언어, 사유의 차원 모두에서 깔끔하게 집단학살을 분리해 내려 한다. 하지만 헤트비히와 카메라의 보지 않으려는 회피, 혹은 적극적 무관심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디테일, 안락과 아름다움은 학살에 기반 한다. 화장된 피해자들의 뼛가루로 키워낸 탐스러운 꽃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완벽한 무관심, 외면은 불가능하다. 앎은 단순히 정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앎은 신체적이고 환경적이다. 소리, 빛, 냄새, 물의 흐름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대사들은 종종 J 또는 L 컷으로 편집된다. 앞 쇼트의 대사는 뒷 쇼트로 흘러넘치고, 뒷 쇼트의 대사는 앞 쇼트에 선재한다. 복도, 창, 문, 하늘, 강은 거부할 수 없는 신체적 앎이 통제를 벗어나 흘러 다니는 통로이다. 헤트비히는 일을 하느라 자신과 독일 장교 부인들의 앞을 지나가고 창 밖에서 일하고 있는 유태인 하녀와 하인들을 무시한다. 이들은 쇼트와 쇼트, 프레임 안과 밖을 사운드와 함께 넘나든다. 독일 장교 부인들이 유태인의 소지품을 어떻게 나눠가졌는지, 그들이 어떻게 끌려갔는지에 대한 농담을 하는 부인들의 대화는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창과 문 너머로 집 안에서 일하는 유태인들의 몸에 흘러 들어간다. 동시에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또한 막지 못한다. 잠시 머물다 간 헤트비히의 엄마, 유태인 하녀들, 그리고 딸까지 모두 그 소리를 듣지만 회스 부부는 적극적으로 듣지 않는다. 관심지역은 적극적 무관심 지역을 통해 만들어 진다. 이 영화는 신체적 앎 그리고 알면서도 행하는 악의 적극성이 어떻게 회스 부부에게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글레이저 감독이 마지막에 루돌프 회스의 구역질 장면을 넣은 것도 이 신체적 앎에 근거한다. 그들은 알면서도 행한 것이다. 당연히 이 앎은 반성이나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와 적극적 무관심으로 이른다. 사진: "Jon obeu inteoreseuto", IMDb ( 좌 , 우 ) 홀로코스트 이후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집단학살과 관련된 예술에 있어 주요한 윤리적 테제 중 하나로 언급되어 왔다. 가해 집단이 피해자와 동일한 인간 종에 속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일이 일어난 이후 어떻게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글레이저는 여기서 이 지침을 한번 뒤집는다. 그렇다면 절멸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혹은 정말로 서정시를 쓰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헤트비히의 정원에는 꽃 하나하나 벌레 먹지 않고 탐스럽게 피어 있다. 영화의 대부분에서는 카메라가 거리를 두고 건조한 관찰의 태도를 취하지만 헤트비히가 키워낸 꽃만은 마치 자연 다큐멘터리의 관습적 연출을 보듯 탐스럽게 클로즈업으로 정성들여 포착한다. 그것의 즉각적 아름다움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려울 것이다. ‘평화로운’ 집 주변의 목가적 풍경처럼 말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곧 그 클로즈업 바깥에서 꽃의 비료로 쓰이는 것이 소각장에서 태워진 분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프레임 바깥과 내부는 끊임없이 교환되고 연결된다. 마찬가지로 루돌프가 다정한 아버지로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바깥에서 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집단학살의 꼼꼼한 계획, 유태인 여성에 대한 성착취를 행하고 있는 루돌프는 끔찍하게도 가정적인 부성을 동시에 수행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의 부성은 가해 행위 위에 기반해 있다. 그러면 시와 노래는 어디서 가능한가? 글레이저는 수용수들을 돕기 위해 사과를 노역장에 몰래 숨겨놓는 폴란드 소녀를 적외선 카메라로 애써 보여주며 증명하려 한다. 소녀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보려는 태도는 흐릿한 쿠키더미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나 혹은 우리의 관심/이익 영역이 아닌 바깥을 보려는 태도, 효율성이나 성과가 아닌 다른 가치를 돌보려는 태도, 타자의 존재는 교환할 수 없거나 나눌 수 없음을 인지하는 태도, 내장지각에 가까운 신체적 앎을 회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태도, 실내와 목가가 얼마나 정치경제적인지를 인식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더 중요하게는 글레이저 감독이 아카데미 수상소감에서도 밝혔듯이 오늘날 시가 가능하려면 이스라엘 혹은 홀로코스트 바깥을 봐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또 다른 민족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집단학살하며 가해자고 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팔레스타인의 이미지가 더 필요하다. 사진: " Jon obeu inteoreseuto ", IMDb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