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걸고
- 감독
- 권영순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최무룡, 도금봉, 허장강, 서애자, 김동원, 주선태, 장동휘, 손춘성, 윤왕국, 독고성, 남방운, 이해룡, 백송, 지용남, 하룡, 박남규
① 동명극장(東明劇場), 대보극장(大寶劇場) 1923년 조선인상공업자로 구성된 함흥상업회 산하 흥행단체 흥화조합(興化組合)에서 건립한 영화관이다. 연극 공연은 물론 함흥의 대표적인 집회장소로 활용되었다. 함흥의 3개 영화관이 경쟁하던 1932년 당시 동명극장의 입장원은 대인 33,667명, 소인 19,646, 금액 7,563원으로 함흥극장보다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사관과 비슷한 수준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었다. (<咸興三映畵館七年度成績>, 《朝鮮新聞》, 1933.01.20) 1936년 함흥상업회는 흥화조합을 주식회사 동명극장으로 바꾸었다. 당시 극장운영을 맡았던 김영선연예부(金永善演藝部)는 극장 임대료로 한 주당 12원 50전씩 지불했다. ( <분규 거듭하든 동극(東劇) 문제 단락(段落)>, 《동아일보》, 1936.05.19) 1940년 들어서서 동명극장은 대보극장(大寶劇場)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성주(李成周), 지배인은 김하룡(金河龍)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진사좌(眞砂座), 진사관(眞砂館),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 함흥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극장으로 함흥부 본정에 있었다. 진사좌를 운영하던 시마네(敷根角市)는 함흥의 실업인으로 재목점, 운송점과 더불어 진사좌연예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1925년 5월 운영자 시마네(敷根角市)가 기존의 낡은 건물을 수리하여 확장하였다. 1927년 1월 진사좌는 문화연예사 직영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된다. 이때 이름을 진사관으로 바꾸었다. 문화영화사는 경성 희락관 악장으로 이름이 높던 시라이(白石蘇山)와 마츠무라(松村英)가 진사관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眞砂舘の老人優待>, 《朝鮮新聞》, 1927.05.14) 1930년 무렵 진사관의 흥행권을 인수한 쿠니이 (國井勝英)는(<咸興眞砂舘開業一周年>, 《朝鮮新聞》, 1931.05.31) 1931년 5월 개업 1주년을 맞아 낡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1931년 8월 신축 허가를 득하고 공사에 들어가 1931년 11월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6만원이었다. 이즈음 진사관은 쇼치쿠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廣告>, 《朝鮮新聞》, 1933.07.03) 진사관은 1940년대 들어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茂信)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함흥극장(咸興劇場) 1923년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함흥극장이 조직되어 이 자금으로 함흥부 대화정에 건립한 극장이다. 공사비 1만 6천여원이 들었다. 초기 운영자는 타마키(玉置省三)였으며, 1928년 4월부터는 츠지(辻平三)가 1년에 3천원 씩의 임대료를 내기로 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大咸興の展望>, 《朝鮮新聞》, 1933.07.03) 1933년 당시에는 닛카츠와 신코키네마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츠지(辻ヤス子)였으며 고바야시(小林豊三)이 지배인이었다. 총 75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명보극장(明寶劇場) 1940년 함흥부 소화정에 이기진(李基進, 창씨명 芝山基進)이 건립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로 함흥역 가까이 위치했으며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박노홍은 경성의 명치좌에 지지 않는 극장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이기진, 지배인은 다케모토(武本光洋)였다. ⑤ 함흥문화극장(咸興文化劇場) 함흥부 소화정에 있었던 문화영화 상영관으로 객석은 200석이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오쿠야마(奧山歲一)였으며 지배인은 하야시(林英一)였다. ⑥ 원산극장(元山劇場), 유락관(遊樂館) 원산극장은 1921년 9월 원산부 천정(泉町)에 설립되었다. 개관 당시 일본 코우카츠(國活)와 제휴하였다. 이후 연극, 영화의 상영은 물론 각종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나 1925년 11월 15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피해액은 6만 5천원이었다 .(<원산극장 전소(全燒)>, 《동아일보》, 1925.11.17) 원산극장이 있던 자리는 한동안 빈터로 있었다. 후쿠이(福井伊三郞)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유락관이 설립되어 이곳에 극장건립이 추진된다. 1926년 11월 30일 건물이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했고, 1930년 활동사진관 수좌가 등장하여 경쟁체제를 갖추게 되자 닛카츠와 쇼치쿠 등과 계약을 맺고 혁신을 꾀하기도 했다. (<大改革の元山遊樂館披露>, 《朝鮮新聞》, 1930.12.03) 1933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수좌와 합병을 꾀하지만 무산된다. (<元山の兩常設館合併問題具體化>, 《朝鮮新聞》, 1933.10.26) 일제말기까지 원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있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후지사와(藤澤正人)이며 지배인은 고이즈미(小泉昇三)였다. 객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후 신영관(新映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⑦ 수좌(壽座), 대승관(大勝館) 원산부 경정(京町) 36번지에 있던 극장이다. 원산의 토목건축청부업자인 우메다(梅田市治郞)의 주도로 조직된 주식회사 수좌에서 1930년 설립했다. 도아(東亞), 데이키네(帝キネ)의 영화를 상영하며 유락관과 더불어 원산의 양대 일본인 영화관으로 등극했다. 1931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주식회사 유락관과의 합병 문제로 잠시 휴관을 했다. (<元山の毒座>, 《朝鮮新聞》, 1931.06.14) 1933년 주식회사 유락관과 합병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되었고 1935년 6월 21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5년 주식회사 수좌는 소실된 수좌의 재건을 추진한다. 새롭게 건축된 극장의 이름은 대승관(大勝館)이었다. 극장 신축을 위해 주식회사 수좌는 자본금을 12,100원에서 20,000원으로 늘려 주식회사 대승관으로 전환한다. 1943년 당시 대승관의 흥행주는 고이즈미(小泉昇三), 지배인은 요시오카(吉岡玉男)이었다.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⑧ 원산관(元山館) 원산부 북촌정에 건립한 활동사진관으로 1928년 1월 23일 구정을 맞아 개장했다. 1927년 1월, 원산시영회(元山市榮會)의 알선으로 공회당 겸 극장을 짓기로 하고 노기만(盧紀萬) 등 원산 거주 조선인 실업가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주식회사 원산관이 설립을 맡았다 .(<『원산관』 발기>, 《중외일보》, 1927.01.20) 원산관의 흥행주는 보통 주주총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설립 이후 김창준(金昌俊) 등이 맡아 운영했다. (<원산관 쇄신>, 《중외일보》, 1930.03.30) 흥행주인 김창준은 1930년 원산관 산하에 원산관연예부를 조직하여 연극 공연 등을 펼쳤는데 호응이 좋아 인근 함흥의 동명극장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원산관연예부에 초차관(初次舘) 외 출연>, 《중외일보》, 1930.10.04) 1933년 3월 원산관에서는 원산 최초로 토키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자는 김낙진(松平洛鎭)이며 660개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원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⑨ 희락관(喜樂館) 흥남읍 구룡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12월 흥남의 교통사고 기사에서 사상자들이 희락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조선질소비료회사 사택으로 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 관객의 대부분이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사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남 뻐스열차 충돌사건 상보(詳報)>, 《동아일보》, 1938.12.06)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에다(前田長太郞)였으며 지배인은 삼촌건삼이었다. 5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⑩ 흥남관(興南館) 흥남읍 천기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경성 중앙관의 흥행주인 오이시(大石貞七)이며 지배인은 가메야마(龜山嘉介)였다. 총 5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흥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⑪ 소화관(昭和館) 흥남읍 송상리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11월 극단 고협이 이곳에서 공연 중 극장 2층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와타(砥綿啓太), 지배인은 타치바나(立花三郞)였다. 총 87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⑫ 흥남문화영화극장(興南文化映畵劇場) 흥남읍 호남리에 있던 문화영화 전용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도타니(門谷淸), 지배인은 마츠오(松尾辰次郞)였다.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⑬ 용흥극장(龍興劇場) 흥남읍 용흥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野虎雄)였다. 9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단천좌(端川座) 단천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오모토(大元貞珪), 지배인은 시라키(白木義信)이었다. 742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⑮ 단천극장(端川劇場) 단천읍 내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설립자는 함흥출신의 최두진(崔斗鎭)으로 흥행계통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흥행계에 권위 단천극장주 최두진(崔斗鎭)씨>, 《동아일보》, 1939.10.03) 1943년 단천군총력연맹에서 막간 강연을 추진할 장소로 단천좌와 함께 지목된 곳이다. 하지만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영화관이 아닌 연극장으로 구분되었거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⑯ 혜산극장(惠山劇場) 혜산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安田隆一)이며 객석수는 455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신포극장(新浦劇場) 신포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야마(中山賢一)이며 객석수는 400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고사관(高砂館) 북청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康弘)이며 좌석수는 489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홍원좌(洪原座) 홍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홍춘선(洪春善, 창씨명洪村春善)이며 4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⑳ 흥락관(興樂館), 고원극장(高原劇場) 흥락관은 고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1936년 12월 23일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 등이 합자하여 7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만들었다. 고원을 대표하는 장소로 뒷날 고원극장(高原劇場) 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교우코쿠(岐谷亮吉)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1. 삼우회관(三友會館) 천내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노(水野長一郞)이며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2. 영흥극장(永興劇塲) 1935년 10월 12일 영흥군에 건립된 극장으로 개관 당시, 함흥의 동명극장을 경영하던 김영선연예부가 운영을 맡았다 .(<영흥극장 수(遂) 개관>, 《동아일보》, 1935.10.13)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연극장으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매일신보≫, 1936.12.29. 고원(高原)에 극장, 입삼일(廿三日) 개관 【고원】 약진도상에 잇는 고원은 발전 여지가 풍만하여 점차 도시의 기풍을 정(呈)하고 잇다. 그러나 아직 오락기관이 업서 간혹 순업흥행단이 차저주면 일대(一大) 울회(鬱懷)를 느끼든 시민의 위안이나 되엿지만 겨우 가설극장에서 풍우설한(風雨雪寒)이면 불편무비(不便無比)하든 바 시내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씨 등 유지 제씨가 합자하야 약 七천여원의 경비로 흥락관(興樂館)이란 극장을 건축하엿는데 거(去) 二十三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동일(同日)부터 三일간 개관기념을 하게 되여 매야 입장객에게 추첨권까지 배부하여 좌기와 여(如)한 경품을 수여하엿다. 一등 一인 백미 一叺 二등 一인 궤종시계 一座 三등 一인 경대 一座 (사진은 건축된 흥락관) [자료] ≪朝鮮新聞≫, 1931.06.14. 元山の壽座 開館に决定 (元山)元山壽座は活動常設遊樂館に對抗し優秀な活動や芝居等を上映興業してフアンを喜ばせるたが突如休館遊樂館に合倂問題が起り一時は一般から成行を注視されてるたが重役會議で開館續行に決定し今後三村敏郞氏が經營の任に當り從來の東亞,帝キネの外新に日活とも特約嶄新なる映畵を上映してフアンの待望にそひ開館隆盛を期することゝなつた [자료] ≪중외일보≫, 1927.01.26. 본보(本報) 독자위안(讀者慰安) 대흥행, 함흥 진사좌(眞砂座)의 개관 기념 함흥에 잇는 극장의 효시로 일반사회에도 공헌이 만튼 진사좌는 근래에 미미(微微) 부진 중에 잇든 바 래(來) 二十五일부터 문화연예사의 직영으로 상설관이 되얏는데 기(其) 벽두로 래(來) 二十五일 야(夜)에는 봉황의 면류관을 봉절할 터이라 하며 래(來) 二十七일 오후 七시반부터는 본보 독자를 위하야 三일간 무료로 흥행하리라는데 단(但) 하족료(下足料)만 받으리라더라(함흥) (우대권은 欄外에) [자료] ≪시대일보≫, 1925.11.20. 원산극장 전소(全燒) 손해(損害) 六만원 【원산】 원산 오락기관의 하나로 또 원산의 유수한 건물인 원산극장은 十五일 오전 三시 四十분에 발화되어 소방대의 전력을 빌엇으나 겨우 五시 三十분에 소화되어 극장은 전소되고 인가(隣家) 二三동까지 소화되엇는데 손해는 약 六만원이라고 [자료] ≪매일신보≫, 1918.10.29. 함흥 활동상설 개관(活動常設 開館) 금춘(今春) 이래 신축 중이던 만세관(萬歲館)은 유유(愈愈) 기(其) 내부의 설치 등이 완성되야 十월 二十五일 야(夜)부터 개관한바 비상한 호평을 박(博)하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5.03.12. 동명관(東明舘) 기념 【함흥】 함흥부 내에서 오직 하나만인 군선인 경영 영화상설관인 동명극장(東明劇場)은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야 이제 개관 八개년 기념으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지난 九일 함흥 일반 유지를 춘경원(春慶園)에 초대하야 간담회를 개최하고 고급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개하엿다는 바 지금은 함흥부내에서 다른 영화관에 손색이 없을만큼 모든 설비를 하엿다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0.04.28. 흥남에 각 극장 수입, 四개월간 六만여원 【흥남】 지난 四월부터 七월까지 四개월간 흥남읍내 각 연극장에서 흥행한 활동사진과 연극들의 관람료금을 조사한 통게 수자는 六만四천五백六원 五十전으로 이에 대한 인원수는 一六六,七三二명이라 한다. 작년 동기에 비하면 약 二활 증가라 한다.
남.기.남 앞으로 해도 뒤로 해도 마찬가지인 이 이름은 마땅히 이 코너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그의 등장을 기다려 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무언가를 쓰려 하면 곤란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그는 남철 도, 남성남 도 아닌 남기남 이기 때문이다. 그는 임권택 보다 늦게 데뷔했지만 더 많은 수의 작품을 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청기 처럼 아동영화에 영화 인생을 걸지도 않았지만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아동영화의 최고 흥행작품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영구와 땡칠이 >는 애초에 정식 극장 개봉도 못 하고 어린이회관을 전전하였으나 폭발적인 인기에 뒤늦게 극장으로 확대 개봉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례다. 영화인들은 180~250만 사이를 최종스코어로 짐작하는데, 이는 어린이회관 상영에 대한 집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뿐이면 쉬울 것이다. 그의 현장은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중화권을 돌며 짝퉁 이소룡인 ‘여소룡’과 권격영화를 찍을 당시, 허가도 받지 않고 대만의 한 사찰에서 촬영을 감행했다. 해당 사찰의 관련자들이 저지했음은 당연지사. 연출부와 제작부가 사정을 설명하고 옥신각신하다가 도저히 허가를 받을 수 없어 남 감독에게 더 이상 촬영이 어렵겠다고 전하자 그는 말했다고 한다. “찍긴 뭘 더 찍어. 다 찍었어. 철수!” 이뿐만이 아니다, 임하룡 , 이성미 와 함께 한 < 철부지 >의 촬영 현장은 한국 영화사상 가장 짧은 촬영 기간으로 알려져 있는데, 촬영 6일 차가 되던 날 점심시간이 되어 연출부 한 명이 “감독님 식사하시고 찍으시죠.”라고 말하니 “뭘 더해. 다 찍었는데. 밥 먹고 철수!”라고 응수했다고 전해진다. 제작 스태프조차 알 수 없었던 남기남 연출의 마술. <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큘라 >에 출연했던 개그맨 정종철 은 본인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대체 내가 뭘 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편집본을 보니 영화가 되어 있는 거예요.” 띠요옹~ 남기남 감독과 작품들 남기남 의 영화는 그런 것이었다. 70년대 유신정권하에서 대충 빨리 찍어 스크린쿼터를 해결하고 외화를 수입하려는 목적에만 눈이 벌개있던 제작사들에게 남기남은 소중한 존재였다. 적은 제작비로 휘몰아치듯 영화를 찍어 눈 깜짝할 새 개봉까지 해치워버리는 남기남은 일종의 해결사였고, 가끔씩 흥행에도 대박까지 터트리기도 하는 영화 제작자들의 로또이기도 했다.(실제로 남기남은 고 이주일 과 함께한 < 평양맨발 >의 흥행으로 정부가 선출한 우수감독에 뽑혀 할리우드에 가기도 했다. 정부가 우수감독도 뽑아 할리우드도 보내주고 참 좋았던 시절이었나 보다.) 그중에서도 <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 >은 가장 재미있는 사례다. 이 영화는 1986년 미국 ABC에서 방송된 <태권소년 어니>라는 드라마로 인기가 높아진 ‘어니 리예스 주니어’를 기용해 만들어진 영화다.(그는 스턴트맨을 거쳐 액션배우로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이 드라마는 한국에도 방송되어 큰 인기를 모았다. 1989년 12월에 개봉한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의 광고 카피는 “겨울방학 특선! 태권소년 어니가 영화에 나왔대! 잘났어 정말! 태권소년 어니!”였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은 어니가 아니라 마스터 킴이어서 과연 남기남 감독이라는 감탄을 자아낸다. 내용이 무슨 의미냐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어느날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 ‘하바드 박’이 살해당한다. 그는 헤로인 밀수 조직과 연관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의심을 받는다. 그와 절친이었던 재미한인회 회장 신성일(끝까지 극 중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은 하바드 박을 친딸처럼 여기며 보살피는 와중, 유학을 위해 무작정 미국에 온 마스터 킴을 만나게 된다. 집도 절도 없는 마스터 킴은 비슷한 처지의 고아 마이클(어니 리예스 주니어의 극 중 이름은 마이클이다. 고로, 극 중에 ‘어니’라는 존재는 없다.) 만나게 된다. 고아원에서 배운 태권도를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마이클과 마스터 킴은 친구가 되고, 그 둘을 의기투합하여 폭력과 마약, 섹스의 위험에 노출된 미국 청소년들을 계도하기 위해 태권도 도장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하바드 박을 쫓던 헤로인 밀매상들은 마스터 킴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도장에 쳐들어오게 되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데... (좌)마스터 킴과 마이클의 첫 대련 '허허, 이 녀석이!' (우)'어때 우리 이제 친구 되는게.' '난 너 같은 부랑아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아.' 어설픈 연기, 계속 헛갈리는 내용, ‘ 남기남 ’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는 유치한 촬영 등을 조금만 참을 수 있다면 영화는 나름대로 즐길 만하다. 무술 유단자 바비 J 킴 과 어니의 무술 연기는 상당한 수준이며(남기남 감독은 한 때 무협영화의 흥행사였음을 떠올리자) 유해한 환경에 노출된 미국 청년들을 태권도로 교화하자는 애국적 스토리가 심금을 울릴랑말랑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설이 된 이유는 영화 밖에 있다. 이 영화는 1989년 12월에 개봉을 했다. 89년 7월에 남기남 감독이 연출한 또 한 편의 영화가 개봉했는데 그게 < 영구와 땡칠이 >다. 한 해에 그가 감독한 영화가 복수로 개봉하는 일이 드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 >이 <영구와 땡칠이>가 촬영되는 중간에 찍혀졌다면 얘기가 조금 다르다. 남기남 감독은 <영구와 땡칠이>의 촬영 도중 세트 제작을 위해 1주일의 시간이 비었다. 미리 스케쥴을 통보받은 남 감독은 제작자 몰래 비는 시간 동안 미국에서 다른 영화 한 편을 더 감독하기로 계약하고, 스태프 6명을 데리고 출국해버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이렇지만, 항간엔 심형래 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있는 상태여서 남기남 감독이 화가 나 그랬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89년 개봉한 김청기 감독의 우뢰매 시리즈 5편 < 뉴머신 우뢰매 >는 그런 심형래를 빼고 ‘ 한정호 ’라는 배우가 에스퍼맨을 연기했다. 이 역시 심형래의 폭거(?)로 인한 일이었으나, 그가 우뢰매에서 빠지자 우뢰매와 심형래의 인기가 동반하락, 6편에서 에스퍼맨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곳에서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을 뚝딱 촬영하고 돌아와 <영구와 땡칠이>의 남은 부분 촬영을 3일 만에 완료한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마스터 킴을 맡은 ‘ 바비 J 킴 ’을 왕년의 액션스타 ‘바비 킴’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다른 사람이다. 바비 킴을 따라한 콧수염 때문에 멀리서 보면 얼추 비슷해 보이긴 하는데 가까이서 보면 그냥 한눈에 봐도 다른 사람이다. 바비 J 킴은 바비 킴처럼 마초의 기운이 희번덕거리지 않는다. 맘씨 좋은 아저씨 같달까. ‘폭력과 마약, 섹스에 노출되어 있는 미국 청소년들을 태권도로 교화시켜보겠습니다.’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아저씨가요?’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같은 대사를 원조 ‘바비 킴’이 했다면? ‘암요 그러믄요 미국 꼬맹이들은 혼 좀 나야지요.’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소룡, 성룡을 패러디한 배우는 많았지만 한국 액션배우를 패러디한 배우는 바비 J 킴이 유일하지 않았을까? 누군가 속은 기분이 든다면 이름에 J가 분명히 들어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기 바란다. (누군가는 ‘ 남충일 ’ 무술 감독 같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마스터 킴의 사람 좋은 4종 세트 <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터 킴 >은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 ‘어니’ 이름을 빌어 졸속으로 제작된 겨울방학용 어린이 영화였다. 포스터를 봐도 그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영화의 기둥줄거리가 헤로인 거래에 연루된 ‘하바드 박’의 죽음이고 여주인공이 납치되어 강간의 위험에 빠지질 않나(덩치가 산만한 외국 배우가 벨트를 푸는 시늉을 하는 장면이 있다) 급기야 태권소년 마이클이 별다른 힘도 못써 보고 총에 맞아 사망하는 아스트랄 한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은 홍종원 이라는 설과 장현수 라는(< 게임의 법칙 >의 그 장현수 감독이다.) 설이 있는데, 네이버 검색에는 장현수, KMDb에는 홍종원이다. 남기남 과 꾸준히 작업을 한 사람이라는 점을 보면 홍종원이 맞는 것 같은데 구글 검색에는 아예 장현수와 남기남이 공동감독으로 올라가 있으니 참 어지러운 지경이다. 하여간 각본을 누가 썼든 ‘감독 남기남’이라는 크레디트 아래서는 크게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남기남이라는 브랜드는 강하다. 남기남 감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한물간 직업 영화감독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현재까지 현역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2010년 < 동자 대소동 >, 2011년 <달무리>를 연출했다. 마치 영화를 공장에서 뽑아내듯 해치웠던 그의 감독으로서의 태도에는 이런저런 이견이 있다. 하지만 그가 했던 작업들은 철저히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진 영화들이었다. ‘3류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별명처럼 따라붙으면서도 묵묵히 영화 한 길을 걸어온 이 노장은 죽기 전까지 “그럼 다 찍지, 남기남?”이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영화 인생을 이어갈 것이다. 그는 한창 무협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릴 무렵인 70년대 언젠가 촬영차 고향 광주로 내려갔을 때, ‘환영. 천재감독 남기남’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영화에서 예술적인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아예 지워버렸다고 한다. 예술인으로서의 생존이 아닌,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직업으로 영화를 규정지은 것이다. ‘장인’이라고 부르긴 힘들겠지만, 자신의 직업과 주어진 사명에 철저하게 몰입했던 영화인으로서 존경받을 구석은 분명히 있다고 본다. 1년에 9편을 찍는 괴력은 그저 빨리 찍는데 통달했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해내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천재 감독’에서부터 ‘저질’까지의 극단을 오갔던 남기남 감독에게 나는 ‘음지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바치고 싶다. 바비 J 킴 ERNIE RAYES.JR 신성일 감독: 남기남 각본: 홍종원 개봉극장: 한가람 관람인원: 203(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