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나
- 감독
- 박형진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국민용, 이종민
< 후쿠시마 내 사랑Gruße aus Fukushima >은 독일 감독 도리스 되리에의 신작이다. 국내의 씨네필 관객들은 도리스 되리에를 아마도 여전히 < 파니 핑크 >(1994)라는 로맨틱 코미디로 많이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되리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그 작품 이후로도 극장용 영화뿐만 아니라 TV 영화, 다큐멘터리, 문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15여 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꾸준히 자신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중견작가가 되었다. 되리에는 <파니 핑크>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관계에 서툴고 어설퍼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여성 캐릭터를 낙천적이고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특별한 재능을 보여 왔다. 그 외에 그녀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으로는 < 내 남자의 유통기한Der Fischer und seine Frau >(2005)과 <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Kirschbluten-Hanami >(2008)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과 충돌을 들 수 있다(특히 일본 문화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유명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유쾌한 소동극을 만들며 해방적 순간의 찰나적 즐거움을 선사하곤 한다. 고백 하나를 하자면, 사실 나는 되리에 영화를 한 번도 온전히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사회에서 배제되고 비가시화된 여성들이나 서로 다른 소수자들 간의 우정과 연대를 끈질기게 그려온 그녀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해소되지 않는 불만을 가져왔다. 되리에 특유의 낙관주의가 유발한 순진함은 그녀의 인물이 겪는 좀 더 구조적이고 심각한 갈등을 개인들 간의 위로나 오리엔탈리즘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간문화적 조우의 클리셰로 손쉽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 후쿠시마 내 사랑 > 역시 이런 비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요 몇 년간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였고, 그야말로 ‘사사롭게’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도리스 되리에가 던지는 ‘작가성’에 대한 질문 때문이었다. 되리에는 우리가 흔히 ‘작가적인 것’으로 범주화하는 관습적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진지하지만 날카로운 성찰, 냉정한 거리 두기, 비극적 영웅주의, 폭력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극단을 추구하는 예술적 의지, 묵직한 울림,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이라는 성별 같은 것 말이다. 반면 그녀는 여성 감독이고, 사안을 가볍게 다룬다고 가정하는 ‘로맨스가 섞인 소품 드라마’와 코미디의 장인이며, 심각한 상황에서도 낙천적이고 유쾌한 태도를 유지하고, 고독한 영웅보다는 늘 우정이나 연대에 집중하며, 때로는 둔감한 문화적 클리셰를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로 되리에의 친밀한 낙관주의와 유쾌한 코미디는 진지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기에 부적절한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코미디를 만들어낸다면 정말로 작가적인 것 아닌가? 일관된 작품세계를 구성해온 그녀는 왜 작가로서 진지하게 잘 논의되지 않는가?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다룬 < 후쿠시마 내 사랑 >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다. 놀랍게도 되리에는 몇 년 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대규모의 비극적 재난을 코미디로 다룬다. 심지어 이 영화에는 실제 지진 당시의 푸티지가 간헐적으로 삽입되기도 하다. 그럼에도 집단적 트라우마와 코미디를 융합해 ‘트라우미디(traumedy)’ 또는 재난 블랙 코미디를 만들어낸 그 상상력과 대범함은 놀랍다. 독일 여성 마리는 자신의 잘못으로 결혼을 망치고, 상실감을 치유하고자 후쿠시마에 온다.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불안정한 마리는 ‘Clowns4Help’ 소속의 광대로 지진 피해 지역의 피난민들을 위로하는 자리에 자원한다. 그러나 광대 공연은 거의 대부분 여성 노인들로 구성된 캠프의 피난민들과 소통되지 않고, 마리는 좌절감에 빠진다. 되리에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불통을 낯선 세계에서의 외국인의 이질감을 일방적으로 전시하는 ‘번역불가능성(lost in translation)’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구 1세계 백인 여성의 위선이 그녀 스스로를 어떻게 함정에 빠뜨렸는지를 부조리 코미디를 통해 드러낸다. 마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자를 찾는 정서적 하이에나다. 그녀는 공연에서 냉정한 반응을 얻은 후 마을의 중과 사케를 마시며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곳에 있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여행의 이유를 털어놓는다. 개인의 고통이 가장 커서 자기 상처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자신의 영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이 서구의 백인 여성은 자신의 도움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도, 그럴 만큼 약해 보이지도 않는 피난민들과 애초에 조우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웃음’은 뛰어나게 표현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대한 성찰 또한 깊이 있게 서사화된다. 로우 앵글의 바스트 쇼트로 어색하게 개별 인물들을 포착하는 방식은 환경의 부적응자가 된 주인공들의 당혹감을 만화적 프레임으로 표현한다. 이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낯선 땅과 언어와 사람들에 둘러싸인 마리만이 아니다. 자신의 일상적 공간이 방사능측정기가 끊임없이 울려대는 제한금지구역이 되고 유령이 출몰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사토리 또한 환경의 부적응자가 된다. 광대는 스스로를 희화하하며 공연하는 동안에는 자신을 보고 웃을 권한을 타자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마리는 자기 중심성과 힘의 우위를 놓지 않는다. 마리가 진정으로 광대가 되는 순간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폐허의 집으로 돌아간 사토리와 함께 기거하면서부터다. 그 집에서 마리는 게이샤였던 사토리에게 끊임없이 타박을 듣는다. 어설프게 마루를 닦고 차 마시는 법을 교육받을 때,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힐난을 들을 때, 그리고 마리가 “You are elegant”라고 사토리를 칭찬하자 “You are like elephant”라는 어이없는 답을 들을 때. 힘의 역학 관계가 바뀌면서 마리는 의도치 않게 사토리와 관객에게 웃음을 준다. 그러나 흑백의 단조로움과 불협화음의 묵시론적인 피아노와 전자음들은 마리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사토리의 무례함을 불쾌하거나 우스꽝스럽지 않은 시적 부조리로 승화한다. 특히 절제되어 있고 단호한, 작은 몸의 나이든 아시아 여성과 일본의 전통적 가옥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덩치와 발걸음을 지닌 거침없는 몸짓의 젊은 백인 여성의 신체언어가 문화, 세대, 지역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관찰하는 카메라는 그야말로 스펙터클하다. 여성의 신체언어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그것의 사랑스러운 활용은 심지어 문화충돌 클리셰의 진부함을 가볍게 넘겨버리게 만든다. 3 핵 독성 폐기물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들이 가지런히 대칭을 이루며 쌓여있는 가운데 인형, 가구, 침구 등 일상의 흔적이 흩어진 초현실적, 묵시론적 폐허를 배경으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 둘 사이의 우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함께 집 앞의 나무에 매달려있다 쓰나미가 덮치면서 쓸려나간 애제자 유키를 사투 속에서 자신이 밀어낸 것 같다고 토로하는 사토미의 비통함과 죄책감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재난의 여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삶은 왜 계속되어야 할까? 영화는 그 답을 절대로 마리가 찾도록 하지 않는다. 그 답은 오히려 사토리에게 있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되리에는 반핵 피켓을 들고 발전소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나이든 일본 여성들의 다큐 사진을 몽타주해 보여준다. 이 비극은 단순한 자연적 재앙이 원인이 아니다. 마리가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덜대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떠나는 것처럼, 일본 3.11 재난도 인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살아갈 삶도, 미래로의 시간도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송전탑 반대 시위에 나선 밀양 할머니들처럼 이 여성들은 삶의 터를 떠나지 않고 책임을 지고 바꿔나가고자 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말한 것처럼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은 공범자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직접적으로 오마주하고 있는 < 히로시마 내 사랑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알렝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히로시마와 느베르라는 공간으로 은유화 된 두 남녀, 침묵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여행, 기억과 영화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등 진지하고 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 후쿠시마 내 사랑 >은 침묵의 자리에 여성신체의 언어를, 시간여행에 실수를 인정하고 미래를 책임지려는 나이든 여성들을, 영화이미지의 존재론에 웃음에 대한 성찰을 놓는다. <후쿠시마 내 사랑>의 코미디와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연대하는 여성들 간의 연대는 <히로시마 내 사랑>의 침묵의 미학과 묵직한 성찰만큼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곧 오랜 경력 속에서 장인의 능숙함과 지혜를 갖게 된 한 작가가 어떻게 어떤 순간에도 낙관주의를 잃지 않는 코미디의 대가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 글에는 < 나이트 크롤러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나이트 크롤러 >의 후반부에는 상황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한군데 있다. 심야의 격렬한 추격전 끝에 경찰들의 차가 전복되고 살인자의 차도 부서져 도로에 나뒹군다. 밤새 일어나는 말초적인 사건사고 현장을 촬영하여 방송국에 넘기고 돈을 버는 주인공 루(제이크 질렌할)와 그의 조수가 살인자의 자동차 곁으로 재빠르게 다가간다. 루가 먼저 다가가지만 그는 이내 몇 발짝 거리를 두고 멀어지면서 조수를 향해 어서 빨리 저 사람을 가까이에서 찍으라고 재촉한다. 하지만 조수가 다가가자마자 살인자는 총으로 그를 쏘아 살해하고는 차에서 내린다. 몇 발자국 앞에는 루가 카메라를 들고 그를 찍고 있다. 이때 그 납득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살인자는 몇 초간 루를 잠시 노려볼 뿐 발포하지 않고 뒤돌아선다. 그리고는 잠시 후 뒤 따라 오는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한다. 왜 그런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느 관계도 없다. 주인공의 목숨이 부지되는 그 흔한 장면에서처럼 상대방의 총알이 떨어졌기 때문도 아니다. 살인자가 곧 이어질 경찰들과의 총격전을 위해 총알을 아껴야 한다고 찰나에 판단한 것이리라 추정하는 건 그의 냉철함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눈앞에 있는 루의 조수를 당장에 쏘아 죽인 사람이 아닌가. 그는 냉철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루를 쏘지 않고 얌전히 뒤돌아섰는가. 이 장면의 의문스러운 불투명이 이 영화의 흥미로움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 나이트 크롤러 >는 루에 관한 영화다. 그는 심야의 유혈 낭자한 사건 사고들을 하이에나처럼 쫓아다니며 찍어서 방송국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 넘기고 돈을 챙긴다. 장물이나 훔쳐 팔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사고 장면 촬영분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걸 두고 루는 사업을 시작했다고 꽤 근사하고 자부심 넘치게 표현한다. 우린 그의 과거를 전혀 모르거니와 그가 혼자 사는 반미치광이라는 사실 외에는 현재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미치광이 루 역할을 맡아 열연한 배우 제이크 질렌할의 연기를 칭송하는 평가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섬세한 연기를 선보였고 독창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다만 < 나이트 크롤러 >가 배우의 열연과 캐릭터의 완성 측면으로만 접근될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예컨대 <나이트 크롤러>는 같은 L.A.의 밤을 배경으로 했던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마이클 만의 < 콜래트럴 >이다. 의외로 <콜래트럴>의 빈센트(톰 크루즈)와 <나이트 크롤러>의 루는 여러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빈센트가 L.A.라는 거대 도시에 무지한 이방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인물이 이 도시의 밤을 밤새 헤매고 다닌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들의 활동 시간은 전적으로 밤의 시간이다. L.A.의 밤이라는 배경을 <콜래트럴> 이후에 이렇게 실제적으로 차갑고 적막하며 정신질환적인 정서로 그려낸 영화는 흔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콜래트럴>의 빈센트, <나이트 크롤러>의 루 두 인물 사이의 더 흥미로운 유사성은 이들이 완벽하게 흥정의 달인이며 요설가라는 점이고 그것이 종종 그들의 내재된 광기를 번뜩이게 한다는 점이다. 흥정은 대개 자부심으로 가득한 요설에 의해 그들 쪽으로 유리하게 성사된다. 빈센트가 흑인 재즈 뮤지션을 살해할 때 그가 펼치는 내기의 흥정(빈센트는 자신이 내는 재즈에 관한 문제를 맞히면 살려주겠다고 흑인 뮤지션을 꼬드긴다)은 루가 사람들을 상대할 때마다 발휘하는 그 비열한 사업수완으로서의 흥정과 요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루는 조수가 총에 맞아 죽도록 고의적으로 일을 꾸민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이 가르쳐 준 흥정의 기술로 도리어 자신에게 (급료를 올려 달라는) 흥정을 걸어 왔다’는 점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둘 다 각자의 사업 때문에 밤을 헤매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업의 형태가 사실은 둘 다 청부업이라는 점이다. 빈센트는 살인 청부업을 하고 루는 촬영 청부업을 한다. 다르게 표현할 때 둘의 사업의 연관성은 더 확실해진다. 둘의 사업은 어원적으로는 같은 일이다. 빈센트는 밤새 사람들을 쏘고(shoot) 다니고 루는 밤새 사람들을 찍고(shoot) 다닌다(그리고 이 어원의 동일성은 우리가 제기한 후반부의 그 의문스러운 장면에서 정확히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만다). 빈센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루가 오게 되어 있다. 이들이 바로 잔인한 도시의 밤을 완성하는 부패한 가상의 짝패일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결국 빈센트는 L.A.의 지하철 안에서 쓸쓸하게 싸늘한 시체로 죽어 갔고 그는 밝고 따뜻한 햇볕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반면에 루는 수사관의 엄포에도 끄떡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거짓으로 꿰맞췄으며 밝은 대낮에 제 발로 경찰서를 나와 사업을 번창시킨다. 하지만 이 차이는 귀결의 차이에 해당할 뿐이다. 두 인물의 다른 귀결은 왜 일어나게 된 것인가 재차 물을 때 다음과 같은 점이 핵심이 될 것이다. 자신의 세계와 대상에 대한 지배력 혹은 통제력을 지닌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인가. 빈센트는 상실했으나 루는 성취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빈센트의 사업은 맥스라는 운전기사를 지배하고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균열을 맞는다. 루는 완전히 반대된다. 조수가 반기를 일으키자 그 즉시 살인을 꾸민다. 루는 처음에 어떠한 지배력도 통제력도 지닌 바 없었지만 그것을 무섭게 성취해간다. 그런데 어떻게 성취해갔느냐가 정작 중요하다. 그가 다루는 세계와 대상 즉 사건사고의 현장에 대한 연출력을 총동원하면서다. 의외로 < 나이트 크롤러 >의 서사적 핵심은 루는 얼마나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끔찍한 괴물인가 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루는 어떻게 현장에서의 조작적인 연출력을 증대해 가는가에 있다. 그 연출력 증대의 궤적을 따라 그의 악함은 저절로 강조되는 것이다. 이 연출력에의 강조야말로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루가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연출력이란 기껏해야 사소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현장의 경찰들이 윽박지를 때 그는 자신의 촬영이 허가받은 것이라고 거짓말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에 루가 젊은 부부의 집에 잠입해 들어갔을 때를 보자. 그는 벌써 대담해진다. 부부가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루는 냉장고의 외관에 붙어 있는 사진들의 배열을, 시청자가 상상적 서사를 알아서 일으키도록, 보기 좋게 조작한다. 현장의 사물을 연출하는 것이다. 동시에 집 마당에 서 있는 부부를 적절한 극적 앵글로 포착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다음 사건에서는 차량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의 시체를 차 쪽으로 일부러 끌어와 더 참혹한 이미지 구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이제 그의 연출의 영역은 단지 소도구의 배치가 아니라 효과적인 프레이밍으로 확장된다. 이즈음 루는 방송국 뉴스 담당자에게 자신이 “프레이밍에 신경을 쓰고 있다”며 그로써 오히려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시청자들의 시선을 화면에 더 오래 잡아끌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루의 연출력은 끔찍할 정도로 과감해진다. 가령 도시 외곽 부유층 백인 저택에서의 일가족 살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루는 인명을 구하려 들기는커녕 현장성 포착이라는 미명하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방치하고 카메라를 돌린다. 일종의 사건의 방치라는 간접적이지만 치명적인 연출법을 행하기 시작한다. 도주하는 범인들을 일부러 신고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어서는 더 과감한 연출법이 가해진다. 살인범들이 있는 곳을 경찰에 알려 총격전을 유도하고 미리 기다리다 그것을 찍는 것이다. 간접적인 방치가 아니라 직접적인 유도의 기술이 유용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질문했던 장면이야말로 루의 연출력이 최고조에 달한 장면이다. 왜인가. 이 장면은 사건 이후의 순간도 아니고, 사건에의 방치도 아니며, 유도도 아니다. 루, 자신이 몸소 나서서 살인하는 장면을 적극적으로 연출하고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의 이 악랄한 연출력을 가장 반기는 것은 역시 루와 거래하는 텔레비전 뉴스 책임자 니나(르네 루소)다. 자신들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루가 영감을 주는 것 같다며 니나는 결국 감동하여 말한다. 그때 자신들의 일이란 더 자극적이고 더 참혹한 이미지로 가득한 방송, 그녀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목이 잘린 여인이 소리치며 달리는 것”과 같은 이미지의 완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질문했던 장면에 이르러 우린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왜 상대는 그때 루에게 총을 쏘지 않은 것인가. 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쏘지 못하는 것이다. 루의 카메라가 상대방의 총보다 더 과격하고 힘이 세며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루의 연출력이 상대의 살의보다 더 강력하고 악랄하기 때문이다. 더 센 짐승 앞에서 물러나는 약한 짐승처럼 상대는 돌아선다. 루가 카메라를 든 자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마치 총을 들고 겨누고 있는 것처럼 상대에게 맞서고 있다. 따라서 물러서지도 않고 도망갈 기색도 없다. 마치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죽일 수도 있으리라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론 카메라가 당장에 눈앞의 상대를 쓰러뜨리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루의 카메라가 상대방의 총보다 훨씬 더 센 것이다. 총이 카메라를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든 자가 총을 든 자를 존재론적으로 제압하고 있는 상황. 이것이 두 악한이 마주하여 일으키는 이 장면의 흥미로움이다. 우리는 총을 쏘는 것과 카메라로 찍는 것이 하나의 단어(shoot)로 계열화될 수 있음을 미리 지적했다. 사람을 쏘고 다니는 남자와 사람을 찍고 다니는 남자가 이 순간 격돌하였을 때, 이 영화에서라면 가치의 면모에 있어서 동일하게 악한 두 인물이 격돌하였을 때, 쏘는 자는 찍는 자에게 결코 대항하지 못한다. 루의 찍는 행위가 연출이라는 전체에 직접적으로 해당한다면 상대의 쏘는 행위란 루의 그 연출 계획안에 들어 있는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카메라와 총 사이에 놓인 악의 완력 관계는, 이 영화에서 루가 행하는 카메라의 악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 잔혹함인지 역설하고 있다. 어느 날 아무런 정보도 예고도 없이 그저 좀 대강 보아도 되는 스릴러이겠거니 하고 보게 된 < 나이트 크롤러 >에서 문득 내가 접한 매혹의 지점들이 바로 이상의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