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주점
- 감독
- 박종호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신성일, 엄앵란, 이민자, 최남현, 전창근, 김희갑, 허장강, 전향이, 이상사, 김영옥, 이지연, 유계선, 김신재, 조항, 이성일, 이한구, 임하, 정동일, 오세정, 강민호, 송재호, 서희자, 윤소정, 나은숙, 박은주, 최삼
1960년대 청춘영화의 성공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 ‘황금기’, ‘르네상스’ 등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하면서 한국영화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꼽힌다. 멜로·괴기·희극·액션·역사·청춘·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시도는 한국영화사에서 도드라지는 그 시대만의 기획이었고,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마자 이루어진 영화계의 법적·제도적 장치의 정비는 (국가적 제도 안에 영화를 위치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을지라도) 영화매체의 대중적·산업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1963-1967년 약 5년간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청춘영화’는 바로 이 두 가지, 영화의 다양성과 영화의 산업적 성장에 큰 기여를 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산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이질적인 공간의 활용과 화려한 의상, 이를 메운 서구적 생활양식은 새로운 영화 문법의 한 요소로 인식되었고 관객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1960년대의 한 가운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60년대의 청춘영화는 몇 가지의 도드라지는 특징으로 설명된다. 먼저 그 내용에 있어, 청춘영화는 공통적으로 가난한 청년과 부잣집 여대생의 사랑을 그린다. 이때 부잣집 여대생의 지위는 매우 매력적인 미장센으로 스크린에 가시화되어 영상미를 높이면서도, 두 남녀의 만남이 좌절되는 중심적인 이유로 작용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신성일·엄앵란이라는 두 배우는 청춘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다. 배우의 팬덤이 형성되고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사회적 관심을 받았던 것은 유래 없는 일이었다. 영화 속 신성일 · 엄앵란의 데이트 코스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고, 그들의 패션 역시 많은 이들의 따라해야 할 스타일이 되었다. 스타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두 배우의 탄생은 청춘영화의 성장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청춘영화의 대부분은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특정 극장에 가면 특정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인식은 영화에 따른 관객의 세대를 나누었고, ‘고무신 관객’으로 폄하되던 관객들과는 전혀 다른 젊은 관객들이 아카데미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이와 같이 한국영화의 외적 팽창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면면들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청춘영화의 특징은 이 영화들이 표절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영화평론가들은 물론이고, 당시 대학가에서 심포지움이 열릴 만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안이었다. 1) 영화의 인기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던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특히 일본영화를 모방한 경우가 많았고, ‘해적판’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릴 지경에 이르렀다. 청춘영화들은 당시 갓 제정된 영화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영화들이었는데, 1962년 제정된 영화법(1962.1.20.)과 1963년 1차 개정된 영화법(1963.3.12.)은 제작사의 의무조건을 강화하고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 위한 모든 과정을 공보부 장관의 사무로 정착시키는 데에 주력하면서 영화제작의 관리에 힘썼을 뿐 표절문제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사이 발생한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 혹은 그것을 그대로 즐기는 관객과 함께 이를 묵인하는 공보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청춘영화의 흥행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집단이나 단체까지도 비슷비슷한 내러티브 안에 포함시키는 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제목과 상관없는 영화의 내용은 특정단체의 공분을 사기도 했으며, 비슷비슷한 내용과 설정들은 약 4-5년 만에 청춘영화가 사라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청춘영화의 문제점들은 청춘영화의 대표격으로 언급되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과 <학사주점>(박종호, 1964)의 당시 영화 심의서류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또한 <학사주점>의 심의서류는 1960년대 초반, 영화법이 만들어진 후의 검열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 과정을 좇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표절화’된 각색-<맨발의 청춘> 현재까지도 <맨발의 청춘>을 언급하는 많은 글들이 이 작품의 흥행과 성과, 특별한 시도 등에 대해 쉽게 상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작품이 ‘표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후지와라 신지(藤原審爾)의 단편소설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을 바바 마사루(馬場當)가 각색하여 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이 1963년 발표한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과 거의 유사하며 구체적으로는 카메라의 앵글이나 소품의 설정까지도 거의 같다고 알려져 있다. <맨발의 청춘>에서만 볼 수 있는 조두수가 요안나와 그의 지인을 만난 식사자리에서 서양식 식사법을 알지 못해 폭소를 유발하는 장면이나, 요안나와 조두수의 정사(情死) 후 상반되는 규모로 치러지는 장례식 장면과 같이 계층적 차이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장면 등이 일본 영화와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지적되지만, 2)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공적인 작품이 표절작이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표절은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맨발의 청춘>에 대한 평가는 의아함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사실 개봉 즈음부터 <맨발의 청춘>은 이 작품이 일본의 영화를 각색한 작품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맨발의 청춘>을 소개하는 한 기사에서는 “원전은 바다건너 작가 馬場當의 '멜로드라마' <진흙투성이의 純情> 번안의 사전승인을 받았다” 3) 는 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날의 기사에서는 “일본 馬場當의 이름을 뚜껑에 박은 깡패와 명문 딸의 눈물바다 속의 애련을 그린 <맨발의 청춘>” 4) 이라는 소개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맨발의 청춘>은 당시 문제가 되던 표절 작품의 한 예로 거론되는 등, 5) 1960년대 일본영화를 표절한 대표작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영화 <맨발의 청춘> 내에서 이 작품이 일본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1) 각색자동의서 영화 <맨발의 청춘>이 상영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한 서류 중 하나인 이 각색자동의서에는 1964년(소화39년),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영화화에 관한 전권을 극동흥업주식회사 대표 차태진에게 위임하고 제작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각색자 바바 마사루의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다. 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영화 각색자에게 받은 동의서로 <맨발의 청춘>이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 <맨발의 청춘>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명시하고 있는 각본의 담당은 서윤성(徐允成)이며, 각색에 동의를 해주었던 바바 마사루의 이름이나 원작이 된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제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림 2) 영화제작신고서, 공연권취득증명서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먼저 영화제작신고서에서 <맨발의 청춘>의 원래 제목은 <죽어도 보고싶어>였다는 점과 원작자가 서윤성으로 적혀 있다가 후에 바바 마사루로 수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그런데 그 다음 서류인 공연권취득증명서에는 서윤성이 이 각색 작품을 ‘본인 저작물’로 명시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으며,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크레디트에서도 서윤성은 이 영화의 각본가로 명시된다. 이는 당시 ‘저작’에 대한 개념이 명확치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맨발의 청춘>보다 한 해 앞서 개봉했던 <청춘교실>(김수용, 1963)과 <가정교사>(김기덕, 1963)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청춘교실>은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로 대학생들의 일상과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보여주면서 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영화제작신고과정은 정확히 <맨발의 청춘>의 그것과 반대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영화의 신고서류에서 이 작품의 각색자인 이시철을 원작자로, 공연권취득증명서에서도 <청춘교실>의 시나리오를 동일인의 저작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청춘교실>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는 “石坂洋次郞의 ‘あいつと私’에서”라고 명시함으로써 이 작품이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 『그녀석과 나』라는 작품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표시한다. 영화의 제작신고서류에서는 원작자의 동의서나 승인서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에 부기했던 것이다. 같은 해 개봉한 청춘영화 <가정교사>는 <맨발의 청춘>과 유사한 경우인데, 서류상 이 작품의 원작인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 陽のあたる坂道』의 영화화에 대한 원작자의 승인서가 포함되어 있지만, 영화제작신고서에서는 아예 원작자를 표기하는 난이 비어 있다. 7) 이러한 사례들은 영화 신고의 과정 중에도 혹은 그것을 영화화 하는 과정에서도 원작과 그것의 각색이라는 점을 명시하는 명확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서류에서 명시하고 있는 원작자의 규정 역시 불분명하다. <맨발의 청춘>은 『진흙투성이의 순정』이라는 소설의 원작자가 아닌 영화의 각색자 8) 에게, <가정교사>는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의 영화의 각색자가 아닌 소설의 원작자 9) 에게 각각의 영화화에 대한 승인을 받고 있으며, 서류의 명칭 역시 ‘각색자동의서’, ‘승인서’ 등으로 체계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정확한 양식을 지니지 않았던 이 동의서들은 의무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맨발의 청춘>이나 <청춘교실>, <가정교사> 등은 서류상으로든, 관객에게 보이는 오프닝 크레디트든 한 번은 이 작품의 원작자를 밝히는 것으로 각색영화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 셈이며, 이는 당연히 후에 표절로 번지거나 그럴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작품들에 적용되었던 1차 개정영화법과 그 시행령, 시행규칙들은 제작사의 등록절차를 강화하여 영화의 외적인 성장을 꾀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을 뿐, 저작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제작신고 시 공식적으로 원작자의 동의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합작영화를 제작할 때에만 필요한 과정이었기에, 이 작품들처럼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관객들에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은 제작자의 소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 물론 이는 제작사의 몫으로 남길만한 사안이 아니며 법적 정비가 절실한 부분이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57년이었는데, 그 구체적인 시행령은 2년이 지난 후에야 제정되었을 만큼 11) 저작권에 대한 관심은 미비했다. 본 법령에서 저작물은 ‘문서, 연술, 회화, 조각, 공예, 건축, 지도, 도형, 모형, 사진, 악곡, 악보, 연주, 가창, 무보, 각본, 연출, 음반, 녹음필림, 영화와 기타학문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일체의 물건’으로 규정하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번안이나 번역물, 각색물의 경우 어떤 식으로 원작에 대한 권리를 얻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항목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표절이 문화계 전반에 걸쳐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작권법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고, 약 30년이 지난 1986년 12월 31일에야 처음으로 개정이 되었으니 그 사이의 저작권을 둘러싼 혼란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여기에 저작권법을 관장하고 있던 부서가 문교부였다는 점도 12) 영화계에서 쉽게 표절문제가 불거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 영화의 검열사무를 맡아보던 부서는 문교부였지만, 영화와 연극의 검열사무는 1961년 10월 공보부로 이관된다. 13) 즉 영화의 상영허가를 내주는 부서와 저작권을 관리하는 부서는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고, 각각의 업무는 그리 긴밀한 협조를 맺지 못한 채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젊은 층에게 인기가 있던 영화들이 한국에서 영화화 되는 데에 큰 장애가 없었고, 제작사들 역시 이에 대해 어떠한 법적 제재도 받지 않았다. 다만 당시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의 질타를 받았을 뿐, 공식적으로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림 3) 극영화 <죽어도 보고싶어> 제작신고 접수 통고 이처럼 1960년대 중반 유행하던 청춘영화가 표절과 각색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 자체에서는 특별히 문제가 될 내용이 없었다. 본 제작신고접수 서류에서 지적하고 있는 두 장면은 ‘공서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였고, 이는 이 영화가 당시 민감했던 반공이나 국기 문란 등의 거대담론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작 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흥행이 보장되었던 청춘영화는 <맨발의 청춘>의 성공 이후 비슷비슷한 작품들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대 통용되던 용어의 의미와 전혀 다른 맥락에 서 있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한다. 반복되는 영화들과 1960년대 영화 심의의 절차-<학사주점> <맨발의 청춘>과 같은 해에 제작, 개봉한 영화 <학사주점>은 가난한 대학생 경일이 부잣집 여대생 수미를 만나 신분상승을 꿈꾸지만, 자신이 하숙하던 수예점의 혜림과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좌절되고 결국 경일이 투신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 김길헌(본명 김최연)의 창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맨발의 청춘>에 비한다면 매우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영화의 심의 과정에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이었던 ‘학사주점’은 1960년대 초부터 대학생들이 운영하던 주점을 가리켜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던 단어였는데, 엘리트들의 소통공간이었던 학사주점이 영화 <학사주점>에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비춰졌다. 당시 직접적으로 이 영화를 둘러싼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학사주점’을 운영했던 이들의 불만은 후일담으로 남아 있다. 이 부분에서는 먼저 영화법 초기, 즉 1차 개정영화법의 적용을 받고 있던 <학사주점>의 심의서류를 통해 당시의 영화제작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덧붙여 실제의 ‘학사주점’과 영화 <학사주점>이 어떠한 관련도 없다면 이 제목은 당시 젊은 관객층, 그 중에서도 대학생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한 부작용과 그에 대해 당시 ‘학사주점’ 운영진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림 4) 영화제작신고서 이 서류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본 영화제작신고서가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사주점>의 신고 약 한 달 전에 작성되었던 [그림 2]의 <맨발의 청춘> 영화제작신고서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경유 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그 사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가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본 서류에서 경유한 일자(1964.2.29.)가 공보부에 본 서류가 접수된 일자(1964.5.18.)보다 약 3개월이나 앞선 것으로 볼 때, 업자협회를 경유하는 것은 영화제작의 신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유의 과정은 법령이나 시행령 등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당시 경유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허가 받고자 했는지는 명확히 알기 힘들지만, 14) 1963년의 영협(한국영화인협회)과 제협의 마찰은 이 경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1963년, 영협은 제협처럼 영화제작을 위해 영협도 역시 경유하도록 해달라고 관계당국에 건의하고자 한다. 15) 당시 제협은 영화제작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영화배우들의 쇼 출연을 제한했는데, 제협이 영협에 속해있던 당대 톱스타들 김승호, 신영균, 최무룡, 김지미 등을 쇼 출현을 이유로 영화 출연을 정지시키면서 영협이 이에 반발한 것이다. 영협은 제협이 영화계의 상황을 고려치 않고 횡포를 부리고 있다며 맞섰지만, 제협은 앞으로 6개월간 위 4명의 스타를 출연시킨 영화는 공보부의 상영허가 검열을 받기 위해 제협이 경유시켜주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16) 이 과정을 보았을 때, 제협은 영화제작을 위한 공보부의 신고 전 단계에서 영화제작내역이나 배우의 섭외 등을 미리 살펴보고 적합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아예 공보부로의 접수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내용 자체에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영화와 관련한 인적 구성을 걸러내고 제작에 필요한 신고절차 자체를 차단할 수 있었던 경유는 사실상 사전 검열단계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협이 제협의 경유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영협에게도 그 권한을 달라고 요청한 부분인데, 이는 영협이 제협의 경유를 사전 검열 단계로 인식했다기보다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정도에 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5) 극영화 <학사주점> 제작신고 수리 통보 앞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청춘영화에서 수정을 요구받았던 부분들은 차후 제작사와 큰 마찰을 일으킬 내용들은 아니었다. 본 서류에서는 영화법 시행세칙 제1조 2의 규정에 의거하여 17) 몇 부분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구는 당시 가장 큰 주의사항으로 명시되었던 국헌의 문란,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 있는 내용, 민주주의 정신에의 위배, 적국에 대한 긍정이나 법적 존엄성을 훼손하는 등의 요소 등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청춘 남녀들의 사랑이 주가 되었고, 서구식 생활상의 과시와 같은 장면들의 나열이 주가 되었던 <학사주점>은 큰 무리 없이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학사주점>은 두 군데의 삭제 또는 수정지시를 받았는데,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먼저 첫 번째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술집에서 남녀가 함께 술을 먹고 있는 특별한 대사조차 없는 장면이다. 두 번째 장면은 이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 경일이가 죽은 후, 젊다는 것이 그 자체로 고독하고 괴로운 일이며, 경일이 죽었다 해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우울한 내레이션 부분이다. 이러한 장면은 공서양속을 해치고 청년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지적되었고, 심의대본에서는 깨끗이 삭제되어 있다. 18) <학사주점>에서 오히려 중점에 두고 있던 판잣집에 사는 경일의 극심한 가난이나, 그 상황을 묘사하는 대사, 계층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9) (그림 6) 문화영화수속필증 위의 서류를 보면 심의를 거친 영화가 상영이 되기 위해서는 본편 영화 외에 반드시 ‘문화영화’ 혹은 ‘뉴우스영화’를 함께 상영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항은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부터 포함된 것으로 20) 영화검열사무가 문교부에서 보도와 선전업무를 담당하던 공보부로 이동하게 된 이유를 명확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극영화와 함께 상영되는 몇 편의 짧은 문화영화와 뉴우스영화들은 <자립경제>, <새로운 아이디어> 등과 같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국가관을 홍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극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의 필름을 반드시 복사·신청하여 해당 영화가 극영화 상영 과정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자연히 관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이 영화들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던 영화 <학사주점>은 당시 실제 학사주점을 운영했던 이들에게 꽤나 불편한 영화로 비춰지고 있었다. 학사주점은 4.19혁명에 직접 참가했던 대학생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이야기할 장소를 만들고자 개업한 곳이었으며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꽤 긴 시간 이어지면서 당시 명사들과 교류하고 설전을 벌이며 토론을 하던 공간이었다. 일본의 대학생 관광객이나 신문기자 등이 들러 설전을 벌이고 《요미우리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던 학사주점은 대학생들의 아젠다를 생산하던 다분히 엘리트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21) 이러한 고유명사로서의 학사주점은 영화 <학사주점>으로 넘어오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띠는 공간으로 변해 버린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살폈을 때 이 영화의 제목이 <학사주점>일 필요는 없다. 학사주점은 영화의 주된 공간이 아니며, 단지 주인공 경일에게 부잣집 딸 수미를 유혹해 한몫 잡으라고 부추기는 대학생 친구들이 있는 공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이 대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요행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당시 통용되던 학사주점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학사주점의 운영진이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준비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학사주점의 운영진들의 회의를 살펴보면 <학사주점>,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등에서 등장하는 학사주점의 분위기나 인물들이 자신들의 학사주점에 대한 인식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오도 단속반을 운영하고 싶다는 의지까지를 피력한다. 그리고 당시 남의 간판을 빌려다 만든 이 영화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손해배상 청구도 하려고 소장(訴狀)까지 썼다가, 6.3계엄령으로 그만두었다는 말에서 22) 당시의 대학생들이 이 영화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청춘영화는 1967년을 기준으로 급격하게 쇠퇴하고 사라진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표절작이라는 비판과 함께 끊임없이 양산되는 비슷비슷한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이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제작사들은 편의에 따라 원작을 관객에게 알리거나 감추었고, 이것에 대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흥행된 작품과 내용도 배우도 유사하게, 배경도 분위기도 비슷하게 제작되었던 청춘영화에 싫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으며 관객의 외면은 한 장르의 소멸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춘영화가 발랄한 분위기를 영화내부로 끌어들여오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는 점, 영화의 산업을 확대하는 데에 기여를 했다는 점 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1) 영화예술의 연구를 목적으로 한 서울대문리대의 ‘대학시네마 클럽’에서는 <한국영화를 고발한다>는 심포지움을 열고, 최근 인기있는 영화들의 표절에 대해 논의하였다. 《동아일보》, 1964.11.14. 2) 이우석, 「1960년대 청춘영화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 논문, 2003, 7쪽. 3) 《조선일보》, 1964.3.10. 4) 《조선일보》, 1964.6.7. 5) 《경향신문》, 1965.7.10. 6) 이후 제명변경신청을 거쳐 영화의 제목은 <죽어도 보고 싶어>에서 <맨발의 청춘>으로 변경된다. 7) 이 작품은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원작자를 명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1960년대의 일본영화 표절작품을 나열할 때, <가정교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 역시 영화 내에 원작자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8) <맨발의 청춘>이 참고한 작품은 1958년 발표된 후지와라 신지(藤原審爾)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바바 마사루(馬場當) 각색·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으로 1963년에 영화화 된 <泥だらけの純情>이다. 이 작품은 1977년에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jmdb.ne.jp 참조) 9) <가정교사>가 참고한 작품은 1957년 신문에 연재된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동명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이케다 이치로(池田一朗) 각색·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감독으로 1958년에 영화화된 <陽のあたる坂道>이다. 이 작품은 1967년, 1975년에 각각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jmdb.ne.jp 참조) 10) 공교롭게도 원작자의 명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맨발의 청춘>, <가정교사>는 모두 극동흥업주식회사의 작품이다. 이를 보면 제작사에 따라 원작 표시 여부가 결정되었을 확률이 있다. 참고로 영화 자체에만 원작을 표시했던 <청춘교실>의 제작사는 한양영화공사이다. 11) 저작권법은 1957년 1월 28일, 1935년 7월 8일 조선총독부칙령으로 반포되었던 ‘저작권법의시행에관한건’을 폐기시키며 제정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행령은 법령이 제정된 지 2년이 넘은 1959년 4월 22일이 되어서야 제정되었는데, 이 시행령에서도 저작권을 위반했을 때의 제재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12) 저작권 시행령에 의하면 저작권법을 조사 심의하는 기관으로 저작권 심의위원회를 두는데 이 위원회의 모든 사항은 문교부장관의 자문에 따른다. 13) 《경향신문》, 1961.10.2. 14) 1967년 4월 1일 부터는 업자협회에 각본심의위원회를 두어 자체적으로 각본을 심의하고 공보부에 영화제작신고를 하게 한다. 그러나 1964년경에는 경유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심의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15) 《경향신문》, 1963.2.15. 16) 《경향신문》, 1963.2.14. 17) 영화법시행규칙 1조 2의 내용은 “공보부장관은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수리한 신고내용에 제5조에 해당하는 사실이 있거나 기타 부당하다고 인정되는 사유가 있는 때에는 이에 대한 시정을 그 신고자에게 요청할 수 있다”이다. 이때 제5조의 내용은 국기문란을 포함한 사회적 혼란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18) 물론 거대담론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이 장면들의 삭제가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회적으로 크게 비화되지 않았을 뿐,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릴 가능성은 농후하기 때문이다. 19) 이는 1970년대의 영화검열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에는 가난이나 개발이 미비한 장소 등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20) 1962년 제정된 영화법 2조 5항에서는 문화영화의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제11조에서는 문화영화의 동시상영을 의무화하고 있다(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 이후 1963년의 1차 개정영화법에서는 문화영화에 2조 6항에 뉴우스영화를 포함시키고(이 법에서 "뉴우스영화"라 함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부면의 시사를 신속·정확하게 보도하기 위하여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역시 극영화 상영 시에는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상영을 의무화 했다(제11조 공연자가 극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 21) 유근호, 『60년대 학사주점 이야기-4.19세대의 시대증언』, 나남, 2011 참조. 22) 위의 책, 148면.
1958년도에 데뷔하여 육십여 년을 작가로 활동하신 김지헌(본명 김최연)은 1930년 9월 26일 평안남도 진남포 비송리에서 태어났다. 작가는 어린 시절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진남포와 경성을 오가며 살았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소개령이 내린 경성을 떠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이 있던 강원도 평창으로 피난을 떠나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사진1] <만추>(이만희, 1966) 작가 김지헌 [사진2] 김지헌 작가는 시나리오 지망생 시절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인 최인규를 무작정 찾아가 영화에 대해 물었다. 최인규 감독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극영화, <자유만세>(1966)을 연출했다. 최인규 감독은 김지헌 작가에서 숙제를 내줬고 그 숙제는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가는데 큰 가르침이 되었다.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작가는 소학교를 거쳐 명문 진남포공립중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당시는 일제말기로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본인이었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일본어를 쓰고 말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해방 후 작가와 가족은 서울, 장충동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경동공립중학교에 진학했다. 문학과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작가는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화가가 되기를 꿈꿨던 작가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가 형님에게 발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의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고향 형님의 권유였다. 형님은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를 써볼 것을 권유하였고 작가는 한달음에 국립도서관을 찾아가 시나리오와 영화에 관련된 책을 모두 섭렵하였다. 그 시절 처음 본 책이《키네마 순보》이다. 이 후 작가는 평생 《키네마 순보》를 구독하였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며 당대 최고의 감독인 최인규 감독을 만나기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에 찾아갔다. 몇 차례 문전박대를 당한 뒤에야 최인규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최인규 감독은 작가에게 한 영화가 몇 개의 커트로 구성되어있는지를 세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돌려보냈다. 작가는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의 커트를 세며 보냈고 결국 좋은 영화란 커트를 세기 어려울 만큼 흡인력이 강한 영화라는 결론을 얻었다. 작가가 터득한 결론에 최인규 감독은 관객을, 손님을 절대 놔주지 않는 흡인력 있는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이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부라며 작가에게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작가 김지헌은 본격적인 영화공부를 위해 서라벌예술학교의 전신인 서울예술학원에 입학했다. 1949년에 설립된 서울예술학원에는 이광래, 김진수, 백철, 양주동, 박목월, 서정주, 오영진 등 당대의 문인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작가는 학교에서 시나리오 부장을 맡는 등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러한 학교생활도 한국전쟁과 함께 일단락되고 만다. 하지만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전쟁 중에 소중한 인연으로 돌아왔다. 9. 28수복 이후 작가는 친우들과 함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하지만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가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논산으로 떠난다. 논산에서 만난 이가 서울예술학원 동문인 시나리오 작가 하유상이다. 하유상의 도움으로 잠시 논산에 머물렀던 작가는 자형을 찾아 광주로 갔지만 도착했을 때 자형은 이미 광주를 떠난 뒤였다.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작가에게 도움을 준 이가 문학평론가 장백일이다. 장백일의 도움으로 건강을 추스른 작가 광주 군관학교에서 발행하는 정훈잡지 편집관 모집에 응시하여 편집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면접관이 작가 선우휘이다. 편집관으로 일하면서 작가는 서울에서 피난 온 그리고 광주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렸고 이들을 따라 광주에 내려와 있었던 시인 서정주와 만난다. 서정주 시인에게 보여준 한 편의 시는 후일 서정주의 추천으로《현대문학》에 실렸다. 작가의 시 <종 鐘>은 정전 이후 출간된《현대문학》4호(1955년 4월호)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시로 실렸다. 정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온 작가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창간한《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문화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문화계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작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난 인연들과 경험이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고 구술하였다. 기자로 일하던 중 작가는《조선일보》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이 신설된 것을 알고 오랜 꿈인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기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문학청년의 꿈을 일궈낸 광주로 내려가 응모작을 준비하였던 작가는 스승인 오영진의 부름을 받고 스승을 찾았다. 언론계에서 일한 탓에 아는 이가 많은데다가 스승인 유치진과 오영진이 심사위원이라는 것을 알고 예명으로 출품한 작품이 최종에 올라갔는데 심사위원인 오영진이 당선 후보자의 면모가 궁금하여 작가를 부른 것이다. 오영진 선생은 당선 후보자가 자신의 제자인 것을 알고 놀라면서도 당연한 결과라며 당선을 축하했다. 작가는 이때 사용한 예명인 ‘김지헌’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사진3] 해방 후 신세대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예프로덕션에 김지헌 작가도 참여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영화의 포스터이다. 영화는 전후의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렸다.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를 받았다. 시나리오 당선과 함께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작가는 이성구 감독, 이강원 감독, 제작자 전홍식 등과 함께 신예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영화계에 새로운 세대의 바람을 일으켜보자며 의기투합한 이들을 당대의 영화인들은 영화계의 젊은 그룹이라 칭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신예프로덕션의 창립작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평론가 이영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영일은《영화예술》에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의 특집을 게재하였는데 이제 진짜 영화가 나왔다는 평을 실었다. 영화계 원로들은 이영일의 사무실을 찾아가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나친 호평이라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일본의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장본인인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신예프로덕션의 작품들은 언론과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는 이들 영화는 새로운 세대를 가로막는 당시의 불안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진4] 김지헌 작가의 대표작인 <만추>(1966)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 [사진5] 1966년 개봉한 신성일, 문정숙 주연의 <만추>(이만희)의 포스터이다. 안타깝게도 영화를 볼 수 없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세련된 감수성이 돋보이는 연출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사진6] 이만희 감독과 함께 한 또 하나의 작품 <원점>(1967)의 포스터이다. 설악산 여행을 함께 떠난 이만희 감독과 작가가 설악산을 배경으로 구상한 영화이다. [사진7]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는 작가가 가장 아쉬움을 갖고 있는 작품중 하나이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어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작가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사진8] 1982년 김수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만추>의 포스터 이다. 원작에서 문정숙이 맡았던 혜림역은 김혜자가, 신성일이 연기한 훈은 정동환이 맡았다. [사진9] <만추>(이만희, 1966)는 2010년 다시한번 리메이크 되었다. 연출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와 <가족의 탄생>(2006)을 감독한 김태용이 하였다. 영화의 배경은 시애틀로 바뀌었고 혜림 역은 중국배우인 탕웨기가, 훈 역은 현빈이 연기하였다. 김지헌 작가는 40년의 간극을 두고 만들어진 원작과 리메이크 작품이 두 감독의 개성과 시대를 잘 담아내었다고 이야기했다. 1960년대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상생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것에 목말라 했다. 그 갈증을 해소시켜 준 이가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로 인해 고초를 겪을 당시 만났던 동료 재소자를 만난 일화를 들려주었고 이를 예사로이 넘기 않은 작가가 시나리오 만든 것이 영화 <만추>(이만희, 1966)이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을 누구보다 뛰어난 연출력과 창의력을 가진 감독이라고 회고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와 쫓기고 있는 남자가 함께 국수를 먹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울음이 터졌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스크린 안의 배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연출이 이만희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작가는 설명하였다. <만추>(이만희, 1966)의 흥행이후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설악산 여행을 떠났다. 이만희 감독과 작가는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술잔을 기울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작가는 이를 시나리오로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이만희 감독이 1967년에 연출한 <원점>이다. 갑작스런 이만희 감독의 죽음을 작가는 많이 안타까워했다.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인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를 영화화 해보고 싶다는 전화통화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만추>(이만희, 1966)는 일본에서 상영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1972년 사이토 고이치가 <약속 約束>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였다. 한국에서도 1981년에는 김수용의 연출로 그리고 2010년에는 김태용의 연출로 다시 만들어졌다. 영화가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해 재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안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품성이 숨 쉬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태양은 다시 뜬다>(1966)로 제5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만추>(이만희,1966)의 흥행 그리고 <태양은 다시 뜬다>(유현목, 1966)의 대종상 수상까지, 1966년 한 해 동안 작가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일궈냈다. [사진10] 1966년에는 김지헌 작가의 대표적인 두 작품, <만추>(이만희)와 가 개봉하였다. 작가는 <태양은 다시 뜬다>로 제5회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사진11] <태양은 다시 뜬다>(1966)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특히, 문예영화 연출에 있어서 독보적인 감독이었다. 1960년대 작품성과 흥행성 있는 작품을 두루 발표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작가는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4차 개정 영화법과 시나리오 사전심의제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영화계 전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유신체제 하의 영화는 검열로 훼손되기 일 수였다. 작가는 이 시기 본인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현대물에 대한 검열은 더욱 심해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이 시대물 혹은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현실을 작가는 이야기했다. 작가는 1973년 한일합작영화를 준비하였다. 한일 양국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는 연방영화사 주동진 사장이 제안하여 쇼치쿠 영화사와 합작을 계획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는 <가야금-겨울의 가락>이다. 하지만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영화의 합작계획은 표류하게 되었다. 작가는 국내영화사의 제안으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유현목의 연출로 1977년 <문>이란 제목으로 완성되었다. [사진12] 1977년 개봉한 영화 <문>(유현목)은 김지헌 작가가 1973년 한일합작영화로 준비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목은 <가야금-겨울의 가락>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시나리오는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다. 1977년 유현목 감독의 연출로 완성되었다. [사진13] 일제말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 1977)는 극장 상영 중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상영이 중지되었다. 후일 미국 이민을 떠난 뒤 비로소 본 영화는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였다. 작가는 검열로 다른 작품이 된 영화를 이국 땅에서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하였다. [사진14] 김지헌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 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영화법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작가는 검열로 영화가 훼손되어가는 과정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1970년 대 후반 영화의 검열은 더욱 엄혹해졌다. <야시>(박남수, 1979)도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 중 하나이다. [사진15] 김지헌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망명의 늪>의 포스터이다. 작가는 1976년《조선일보》4월 23일자 5면에 「영화시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국산영화 향상을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에서 작가는 영화업의 허가제, 우수영화 수입추천제, 시나리오 사전 검열 한국영화의 발전과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영화인 모두가 공감하였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영화인들은 박정희 정권과의 마찰을 두려워했다. 작가는 정부의 영화정책이 궁극에는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를 야기할 것이라 예견했고 결국 스크린 위의 검열로 훼손된 영화들을 통해 그 결과가 보여졌다. 작가는 1968년 통혁당 사건이 발생한 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소환의 이유는 영화 <학사주점>(박종호, 1964) 때문이었다. 통혁당 사건의 관련인이 명동에 학사주점을 하였는데 그것이 이유였다. 영화 속 주인공(신성일)이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지(김승호)를 찾아갔는데 아들을 본 아버지의 첫 마디가 “쌀값도 비싼데 왜 벌써 제대를 했느냐” 였다.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에게 쌀값 운운하는 것이 말이 안 되고 또 남한이 그렇게 못사는 나라라는 뜻인지, 이는 이적행위라며 작가를 불러간 이들은 추궁했다. 다행히 작가는 풀려났지만 엄혹했던 한 시절에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영화가 상영 중에 금지를 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1977년 작품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은 검열에 합격해 극장에 상영되었으나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결국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사전심의에서부터 불순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기독교 측의 반정부 투쟁이 격렬했고 정부는 이 영화를 이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작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상영이 취소되었고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합격하여 극장 상영을 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미 미국이민을 떠난 뒤였다. 작가는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가 되어있었지만 작가는 영화가 만들어진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검열로 원안과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를 보는 것은 작가에는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야시> (박남수, 1979), <망명의 늪> (김수용, 1978) 등 작가의 많은 작품들은 검열의 과정에서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사진16]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0년 김지헌 작가는 미국 이민을 떠났다. 이민 생활 중에도 쉬지 않았던 창작 활동의 결과물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시나리오 선집은 한일 양국에서 출판되었다. 작가는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1980년 1월 작가는《조선일보》1980년 1월 27일 5면에 「80년대의 한국문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나, (9) 영화 제작-표현의 자유를. 자질 향상 위한 해외연수-기금확보도」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새로운 정치권력에게 한국영화계의 문제점들을 타파하고 발전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희망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고 작가는 미국이민을 결심하였다. 뉴욕을 거쳐 LA에 정착한 작가는 미주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화를 도모하는 한편 작품 창작도 쉼 없이 하였다. 작가는 각기 활동해 오던 한미영화학회와 미주한국영화인회의를 통합한 미주한국영화인회의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작가는 감독 홍의봉, 제작자 주동진 등과 함께 재미교포 이철수 사건을 영화화를 모색하였다. 또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오는 한국영화인들을 지원하는 등 미국에 머물면서도 한국영화계와 밀접하게 지냈다. 작가는 1987년 미국에 머물 당시 <별의 유역>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989년 영화진흥공사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이민을 떠난 지 십년 만에 귀국하였다. <별의 유역>은 방대한 스케일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하였지만 작품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한일 동시 출간된 이 작품집에는 미발표된 다수의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십년 만에 돌아온 한국영화계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비디오 대여 시장과 케이블 TV의 영향으로 대기업이 영화제작투자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신진 인력들이 영화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작가는 귀국 후 영화제작과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요동하는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던 김지헌은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꿈꿨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였던 작가는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전후의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대의 젊은 이들의 삶을 스크린에 담고자 하였던 작가는 영화계의 신진들과 힘을 합쳐 신예 프로덕션을 설립,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을 만들었다. 전후의 영화계에서 새로운 영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이들은 누벨바그, 네오리얼리즘 등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한국영화계에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년 간 백 여 편 이상의 영화를 생산해내던 당시의 한국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바람은 기성의 영화인들에게는 불안함으로 느껴질 수 있었겠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문제의식이 당대의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였음을 앞서 기술한 평론가 이영일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고 대표작으로 <만추>(이만희, 1966)를 꼽았다. 또한 1960년대를 자신의 전성기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유신체제가 시작되면 작가의 삶은 녹록치 않아졌다. 작가는 유신체제하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창작자의 당연한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쓰는 한편 검열과 싸우며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작가는 다시 겨울로 들어서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작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1990년대의 한국영화는 사뭇 달라진 환경이었다. 영화사의 설립과 관련한 법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이 되었고 수입자유화와 외화 직배 그리고 비디오가 활성화되면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영화제작자로 다시 영화계에 돌아와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영화계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1958년 이병일 감독의 <자유결혼>의 각색으로 데뷔한 김지헌 작가는 1990년 <홀로서는 그날에>(석래명)의 윤색에 이르기까지 60여 편의 각본과 20여 편의 각색과 윤색을 담당하셨다. 1990년 이후로는 제작과 후학 양성에 힘써 오신 김지헌 작가는 2014년 영상자료원과 함께한 원로영화인 구술사 작업을 마치시면서 좋은 작가란 동시대를 고민할 줄 알아야한다고 했다. 한국영화와 60여 년을 동거동락한 작가의 경험이 깊이 새겨진 말이다.
50~60년대의 인기 영화배우이자 김진규 의 전부인이었던 이민자 씨가 뇌일혈로 19일 하오 6시 숨졌다. 향년 58세. 이씨는 지난1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일본의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날 타계했다. 장례식은 21일 상오 많은 동료와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의 고단다의 한 절에서 있었다. (서울신문 1986년 1월22일) < 생명 > < 유혹의 강 > < 모녀기타 >등 90여편의 영화에 출연, 50~6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했던 배우 이민자 씨가 지난 19일 저녁8시 일본 동경대부속병원에서 뇌일혈로 별세했다. 향년57세. 이씨는 46년 배우 김진규 씨와 결혼했다가 59년 이혼하고 68년 일본에서 재혼, 사업을 해왔다. 이씨의 유해는 25일경 서울로 운구될 예정이다. (동아일보 1986년 1월22일) 이민자 는 이렇게 쓸쓸하게 갔다. 새해가 열리는 정월 초하룻날 쓰러졌다.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스무날을 못 채우고 그냥 갔다. 그것도 현해탄 건너 이국땅에서. 장례도 그곳에서 치러졌다. 그렇게 많은 갈채를 받던 고국에 핏기없는 주검으로 돌아왔다. 60을 채우지 못한 이민자 의 일생은 그녀의 죽음만큼이나 쓸쓸하고 복잡다단했다. 그래서 일까. 이민자는 그녀의 일생을 그대로 영화에 반영 하다시피 했다. ‘미망인의 세계. 어쩌면 이것으로 이민자의 영화경력을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어딘지 청초하고 수심에 잠긴 듯 한 모습의 이민자는 영화계에서 ‘과부형 배우’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그의 출연작을 살펴 보더라도 대부분 과부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고 그런 역에서 성공을 거두어 왔음을 알수 있다… (여성영화인사전- 여선정 ) 이민자 의 다섯째 작품이 < 미망인 >(1955)이다. 이 영화는 이민자의 ‘미망인의 세계를 그렸다는 점 말고도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크게 기록되고 있다. 한국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 이 연출한 영화가 바로 이 <미망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감독데뷔작품이다. 어린 딸을 데리고 사는 전쟁미망인이 도덕윤리와 욕망의 늪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좋은 점수를 받았다. 53년 이민자는 네번째 작품 < 최후의 유혹 >에 출연했다. 유현목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정창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이민자는 바 마담역을 맡았다. 김 화의 <이야기 한국영화사>는 …이민자는 이 때부터 술집 마담역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쓰고 있다. 52년에 만들어진 < 악야 >는 거장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품인데 여기서 이민자는 작가( 황 남 )와 하룻밤을 지내는 양공주역을 맡았다. 56년 < 마의태자 > ( 전창근 감독) , < 사도세자 > ( 안종화 감독)등 2편의 사극에 출연하고 57년에도 < 마인 > ( 한영모 감독), < 오해마세요 > ( 권영순 감독)등 2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1958년. 이 해부터 1964년까지를 한국영화 중흥기로 구분 ( 호현찬 의 <한국영화100년>)하는 만큼 이민자의 출연영화는 5편으로 늘어난다. 한국최초의 시네마스코프 < 생명 > ( 이강천 감독)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은 이민자는 뒤이어 < 어머니의 길 > ( 안현철 감독), < 자유결혼 > ( 이병일 감독), < 유혹의 강 > ( 유두연 감독), < 소낙비 > ( 이경식 감독)등 모두 5편에 출연했다. 111편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진 59년 이민자 는 모두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아름다운 여인 > ( 유현목 감독), < 청춘극장 > ( 홍성기 감독), < 행복의 조건 > ( 이봉래 감독)등이었다. 60년에는 < 울지 않으련다 > ( 신경균 감독), < 사랑해선 안될 사랑 > ( 이봉래 감독), < 과부 > ( 조긍화 감독)등 모두 9편,61년 2편, 62년에는 < 이십구세의 어머니 > ( 이강원 감독 ), < 여자의 일생 > ( 신경균 감독), < 여인천하 > ( 윤봉춘 감독), < 아낌없이 주련다 > ( 유현목 감독)등 모두 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에서 이민자 를 크게 부각시키고 여러모로 화제를 뿌린 작품은 단연 < 아낌없이 주련다 >라 하겠다. 교양있는 연상의 미망인과 먹물 든 연하의 청년사이의 사랑이야기로 물론 멜로드라마 이지만 6촵25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고뇌를 그렸다는 점에서격조높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말할 나위없이 이민자는 고민하는 연상의미망인상을 훌륭히 표출해 냈다. 이 작품은 또한 영화기자 출신 호현찬이 기획촵제작(극동영화사와 합작)하여 흥행면에서도 아낌없이 주는 반응을 얻었다는 기록을 누렸다. 이민자 는 63년에도 59년과 마찬가지로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총 제작편수는 148편). < 언니는 좋겠네 > ( 이형표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 유현목 감독), < 오색 무지개 > ( 조긍하 감독), < 남자조종법 > ( 정일몽 감독), < 자문밖 설마담 > ( 한상훈 감독), < 율곡과 그 어머니 >( 이종기 감독)등이다. 이 가운데서<김약국의 딸들>은 < 미망인 > < 생명 > <아낌없이 주련다>등과 함께 이민자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김약국의 네딸 중 큰 딸 역을 맡은 이민자는 과부의 삶과 심리를 밀도 있게 연기함으로써 이 작품을 문예영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일조를 했다. 64년에는 < 모녀기타 > ( 강찬우 감독), < 청춘은 목마르다 >( 박상호 감독), < 학사주점 > ( 박종호 감독)등 모두 11편의 영화에 이민자 는 출연했다. 65년에는 < 장보고 > ( 안현철 감독), < 7인의 여포로 > ( 이만희 감독), < 모녀봉 > ( 권영순 감독), < 갯마을 > ( 김수용 감독)등 9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어떤 기록에는 14편으로 되어있다. 이는 아마도 주연 또는 주요역할을 중심으로 했느냐 여부에 따른 차이일것이다. 실제로<갯마을>의 주연은 이민자가 아니다. 이 작품의 과부는 고은아이고 시어머니역은 황정순이다. 이민자는 66년에는 < 친청 어머니 > ( 김기덕 감독), <특급 결혼작전> (유현목 감독)등 4편, 67년엔 <빙우> (고영남 감독) 68년에는 <슬픔은 파도를 넘어> (김효천 감독)에 출연했다. 광복전인 1944년< 태양의 아이들 >( 최인규 감독)에 데뷔한 뒤로 24년동안 9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이민자 는 < 슬픔은 파도를 넘어 >를 끝으로 한국영화와 작별할 뿐만 아니라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모국도 떠난다. 50년대 후반 60년에 전반 한국영화 전성기에 이민자 는 한국의 에바가드너로 불렸다. 저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사랑의 여신 에바가드너로승격을 시킨 것이다. 입소문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아예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호현찬 의 <한국영화100년>은 < 아낌없이 주련다 >대목에서 …여주인공은 한국의 에바가드너라고 불리는 이민자를 …이라고 못박았다. 이민자는 좋은 연기자였다. 거기에 에로티시즘의 화신이랄까,섹스 어필 만점의 연기자였다. 한국의 에바가드너라는 칭호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에바가드너와 달리 이민자 는 유복한 집안, 한의사의 넷째딸로 태어났다. 무학여중 2학년때 극장 구경을 갔다가 배우가 되는 계기에 부딪혔다. 44년 동랑 유치진이 이끄는 현대극장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무대에서 주목을 받은 어린 이민자는 같은 해에 < 태양의 아이들 >로 영화데뷔를 한다. 뒤이어 48년 두번째 영화< 여명 >( 안종화 감독)에 출연한다. 데뷔작품에서는 단역을 맡았기 때문에 이민자의 데뷔작으로 첫 주연인 <여명>을 흔히 든다. 이 연극-영화와의 인연은 이민자 에게 인생의 인연을 안겨주었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해, 16세때 이민자는 같은 극단 같은 무대에 선 김진규 를 만나 그 다음해인 45년 정식결혼을 했다. 광복전의 일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14년만에 파경을 맞았다. 이민자를 둘러싼 사랑의 기쁜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이것은 그대로 그녀의 배역과 직결되었다. 그래서 미망인전문배우가 되다시피 한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는지, 이민자 는68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 해에 재일교포와 재혼을 했다. 그리고, 18년뒤 이민자는 미소가 사라진 주검으로 돌아왔다. 60년대초 퇴계로의 아스토리아 호텔의 밀실에서 이민자 와 인터뷰한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이 졸문을 쓰면서 그때의 기사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또한 이민자의대표작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사뭇 안타깝다. 신우식(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이용랑 출 생 : 1929년 4월10일 서울 1986년 1월 19일 사망 데 뷔 : 1944년 최인규 감독 < 태양의 아이들 > 주요 작품 : < 미망인 >, < 유혹의 강 >, < 아낌없이 주련다 >, < 생명 >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