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한걸음씩
- 감독
- 김연하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김연하
1980년대 한국영화 제작 자유화 이전 다큐멘터리와 교육영화, 뉴스영화 등 논픽션 영화를 통칭하는 용어였던 ‘문화영화’는 그 자체로 약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문화인이 되도록 교육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영화감상보다는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여겨졌던 까닭이고, 두 번째는 정부 주도로 제작된 영화들이 대부분인 탓에 감독과 제작자의 순수한 의도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정치적 목적’이 더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극영화 상영 전 ‘무조건’ 상영되는 형태 때문에 ‘강제적’으로 영화를 봐야했고, 이러한 관람형태는 영화관람 전 이미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문화영화에 대한 평가 역시 미학적 완성도보다는 정치적 목적성에 맞춰진 경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수천 편 만들어진 문화영화에서 교육적, 정치적 의도만이 담겨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문화영화들 중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따뜻한 한국인의 심성을 그려내며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발맞추어 살아가길 기대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을 만든 감독 중에 배석인 감독이 있다. 소년, 영어를 통해 세상에 눈을 뜨다 배석인 감독은 일제강점기가 한창인 192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귀한 3대 독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해 조금 더 큰 도시였던 김해로 이사를 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탓에 배석인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참석하였다. 이를 눈여겨 본 젊은 목사님은 그에게 영어로 된 성경 한 권을 선물하고, 자신과 함께 영어로 성경공부를 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영어로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로 그 시절 영어공부는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영어 단어와 문장은 단순히 번역을 넘어 언어를 해석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또한 성경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성찰을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일본인 선생님의 어이없는 발음과 영어 실력에 실망한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구입해 혼자 영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한다. 이때는 미군정 시기로 많은 미군들이 부산에 상주해 있었고, 영어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한 그는 대학 재학 중 야간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주한미군 정보기관 요원에서 영화 <자유전선>의 주인공이 되다 배석인 감독이 대학을 졸업한 1951년 한국은 동족상잔의 전쟁 중이었다. 전투의 현장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피난민과 가난 등 전쟁의 상처는 그가 살고 있는 부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주한미군정보기관에 지원하여 정보사령관의 한국담당 정보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말을 모르는 정보사령관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한국의 여러 상황을 알려주고 조언을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국제교류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부산 광복동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김홍 감독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미군복을 입고 있던 그에게 김홍 감독은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에 고마움을 표하는 영화 <자유전선>을 제작할 예정인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배우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배석인 감독은 거절하였지만, 김홍 감독은 한 달여 동안 그를 설득하고 결국 출연을 수락하게 된다. [사진 1] 영화 <자유전선>의 북에서 내려온 창환(조항)과 논쟁하는 성호(배석인). 오른쪽부터 배석인, 조항, 주증녀 영화의 배경이 된 한국전쟁의 참혹함 못지않게 당시 한국의 영화촬영 현장은 맨주먹밥에 소금물로 끼니를 때우고 거적을 깔고 잠을 청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주증녀, 황해, 조항 등 선배들과 함께 1년여 간 이어진 촬영 속에서 영화에 대한 매력과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사진 2] 영화 <자유전선>에서 브라운 대위를 구하는 육군 중대장 성호(배석인)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난 1955년 서울 시공관에서 개봉하였는데, 러시아와 미국의 격전장이 된 한반도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UN군과 국군의 우정을 그린 영화로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우방과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 것에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배석인 감독은 이후 여러 영화에서 섭외요청을 받았다. [사진 3] 영화 <자유전선>의 홍보전단지 USIS를 거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다 유학과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배석인 감독에게 영어교사로 일할 때부터 친분이 있던 미국공보원(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원장은 ‘교사는 자신의 생각을 칠판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고, 감독은 영상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라면서 USIS 영화과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한다. 평소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많던 그는 부모님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부모님 옆에서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 USIS에서의 근무를 택한다. 그곳의 라이브러리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동시녹음 카메라, 편집기 등을 통해 영화적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마산일보》를 배경으로 지방 독립지가 제작되는 과정을 담은 <지방신문편집자>(1958)라는 문화영화를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USIS에서 일한 지 3년째가 되던 1958년, 국립영화제작소로 자리를 옮긴다. 국립영화제작소는 1957년 중앙청 내에 건물을 새로 지어 세트장, 현상소, 녹음실 등을 갖추고, 본격적인 문화영화제작을 하고자 여러 인재들을 영입하던 중이었다. 배석인 감독은 미국의 시각보다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고, 상대적으로 국가의 지시나 통제에서 자유로운 ‘촉탁’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촉탁은 과장, 계장 등의 직급이 없는 대신 경력을 인정받아 자신이 제작하고자 하는 작품의 기획안을 올려 통과가 되면 예산과 장비, 인력 등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면 되는 자리였다. 의무적으로 뉴스영화나 홍보영화를 찍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옮겨간 국립영화제작소의 상황은 듣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영화 관련 장비를 갖추었다고 하였지만, USIS에 비하면 장비의 수준이 낮았고, 장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진이 없었다. 영화 관련 용어들도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가 혼재되어 있어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배석인 감독은 먼저 영화 인력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영어로 된 영화사전을 번역하여 직원들에게 나누어주어 익히도록 하였고, 미국 시라큐스에서 파견된 영화교육단의 통역을 맡아 영화에 대한 지식과 기술들을 전달하였다. 시라큐스의 교육으로만은 부족하다고 느낄 때면 따로 직원들을 모아놓고 영화기술에 대해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 로고 [사진 5] 중앙청 내에 위한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오른쪽에서 6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배석인 감독 (출처: 국가기록원)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고, 혼란스러웠던 당시 중앙청에서 몸을 피해 어느 화장실로 숨었다가 신문 한 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 쓰여 있던 것이 노산 이은상 선생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였다. 끝없이 철썩거리는 동해의 물결! 백사장(白沙場)가에 박아 놓은 철조망의 마지막 쇠말뚝을 붙드는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것이 피어린 휴전선의 마지막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이냐! 그래, 내가 이 마지막 쇠말뚝 하나 잡아 보려고 600리를 허위허위 달려왔더냐.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 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 노산 이은상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중에서 이은상 선생이 휴전선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600리 길을 걸으며 보았던 분단의 비극,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기행문을 참고하여 직접 나레이션을 쓰고 DMZ 지역까지 들어가 촬영한 끝에 17분짜리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1962) 1 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1963년 제2회 대종상 문화영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비극부문과 제13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석인 감독에게는 출품과 수상이라는 공적인 지표보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더 큰 기쁨이었다. [사진 6] 영화 <피어린 600리> 한반도에 그어진 38선의 이미지 [사진 7] 영화 <피어린 600리> 철로가 끊어진 채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는 금화지구 [사진 8] 영화 <피어린 600리> 금화지구 내 폐허 속에 방치된 부서진 열차 [사진 9] 영화 <피어린 600리> 600리의 마지막 동쪽 끝 해안에 위치한 철조망 이후에도 배석인 감독은 대중들의 감성에 말을 거는 영화를 많이 만드는데, 그 중에서 <새길>(1962) 2 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전쟁 고아들의 비행과 일탈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시대에 그들이 일탈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적 문제와 어른들의 책임을 묻고, 비록 죄를 지었지만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였다. 실제 구두닦이 소년을 캐스팅하여 실감나게 연출한 덕분인지, 이 영화가 전국적으로 상영되었을 때, 영화를 본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 소년을 실제 범죄자라 착각하여 범죄자가 된 소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년을 마을에서 쫓아낸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길>은 궁극적으로 당시 문제아 혹은 범죄자로 터부시되던 전쟁고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포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과 극영화의 연출 기법을 차용하여 3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한 소년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사진 10] 영화 <새길> 판사 역할로 출연한 배석인 감독 [사진 11] 영화 <새길> 실형을 선고 받는 광민 [사진 12] 영화 <새길> 감옥에 들어온 광민을 쇠창살 너머에서 보여주는 장면 [사진 13] 영화 <새길> 즐거운 위문공연 장면을 통해 소년원 수감자들도 행복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한국을 알리고 싶은 노력의 결과물 <팔도강산>(1967) 배석인 감독은 1964년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배우 김희갑과 함께 미국의 영화촬영 현장을 견학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미국 남가주 대학에서 특강을 하게 되는데, ‘6.25전쟁’은 알지만 ‘대한민국’은 모르는 미국 학생들과, 텍사스 도서관 내 한국관에 자료가 없어 텅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배석인 감독을 다큐멘터리스트로 새롭게 자각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열악한 한국영화산업 환경에서 극영화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자고만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기반을 튼튼히 닦아 놓는 것이 먼저이고 자신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독일과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돌아온 그는 사비를 털어 책을 구입하여 텍사스 도서관에 한국관련 서적들을 비치하였고, 스페인에서 영화 시작 전 국가를 트는 것을 본 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촬영한 영상과 함께 국도극장에서 처음 영화상영 전 애국가를 틀었다. 난데없는 애국가에 관객들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애국가를 제창하던 그날의 기억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어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극영화 <팔도강산>(1967)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는 경제 개발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은 커녕 자신의 거주지 주변을 벗어나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구석구석 아름다운 모습을 영화로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한 달여 간의 밤샘 작업을 통해 <팔도강산>의 초고 시나리오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극작가 신봉승에게 각색을 부탁하여 몇 개의 씬을 추가하고, 김희갑, 황정순을 비롯하여 최은희, 김진규, 김승호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서울에서만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다른 감독들에 의해 속편도 제작되었다. <팔도 기생>(김효천, 1968), <팔도 사나이>(김효천, 1969) 등의 아류작도 쏟아져 나왔다. [사진 14] <팔도강산>(1967)의 개봉극장인 국도극장 앞에 모인 사람들(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15] <팔도강산>(1967)의 포스터 [사진 16] <팔도강산>(1967) 사돈(김승호)의 안내에 따라 속리산 법주사를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의 모습.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장면 중에 하나이다. [사진 17] <팔도강산>(1967) 사위(김진규)의 안내에 따라 삼천리 시멘트 공장을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 우리나라의 큰 공장과 발전된 산업을 보고 놀라는 황정순의 표정이 재미있다. [사진 18] <팔도강산>(1967) 비행기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김희갑에게 “이륙 시에는 답배를 피울 수 없다”고 안내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TV 다큐멘터리 제작과 63빌딩의 아이맥스 영화관 설립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꼭 10년을 보낸 1968년, 배석인 감독은 국립영화제작소를 나와 홀로서기에 나선다. 1971년 영화제작자이자 평론가인 호현찬과 함께 한국문화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한국의 美> 등 TV용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KBS에 납품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수익성은 매우 낮았고, 회사는 1년만에 문을 닫게 된다. 이후 배석인 감독은 독자적으로 배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프랑스에서 『직지심경』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우리의 출판문화를 알리는 영화 <한국의 출판문화>(1972)를 제작하여 세계도서 엑스포에서 상영하였다. 또한 <게릴라전>, <화생방교육> 등 신병들을 대상으로 한 군교육 영화도 제작하였는데, 당시 시도되기 시작했던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여 실사영화보다 더 많은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렇게 수익성이 없음에도 사재를 털어서까지 문화영화에 매진했던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우리 문화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 마음, 국경을 넘어 해외에 한국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 경제적인 이득보다 앞에 있었다. 또한, 언제 실전에 투입될지도 모르는 군인들에게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라도 전술을 완벽하게 체험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끌었다. 1984년 국내 굴지의 기업이었던 대한생명은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인 63빌딩을 건설하면서 이 건물 내부에 우리나라의 첫 아이맥스 영화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총책임자로 배석인 감독에게 스카웃 제의를 한다. 늘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 주저함이 없었던 그는 곧 문화영화사를 정리하고 아이맥스의 본고장인 캐나다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와 만든 영화가 <아름다운 대한민국 Dance of the East>(1986)이었다. 20여 년전 <팔도강산>을 촬영할 때 그러하였듯이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장소를 물색하고, 영화를 기획하였다. [사진 19]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 [사진 20]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과 촬영기사 박한춘 이 영화는 남북적십자 회담장에서도 상영되었고, 세계 곳곳의 아이맥스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사진 21]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부채춤 장면 [사진 22]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농악놀이 장면 [사진 23, 24]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해외 상영을 위한 시놉시스 문서 하지만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아이맥스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이후에는 주로 해외 아이맥스 영화를 수입하여 상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13년 동안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을 이끌었던 배석인 감독은 1997년 은퇴하였다. 다큐멘터리스트 배석인 구술의 의의 본 연구자가 배석인 감독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물론 현재도 그렇지만) 문화영화는 대부분 소재가 불분명하여 볼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고, 감독이나 스태프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당대의 검열서류가 공개되지 않은 탓에 정확한 작품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된 극영화 <자유전선>(김홍, 1955), <팔도강산>(1968)과 <지상최고의 여정>(1968), 그리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함께 일했다는 양종해 감독의 증언,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의 개관 책임자였다는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첫 만남을 진행하였다. 극영화 영화인들과의 만남은 많은 자료를 가지고 토론하듯 인터뷰가 진행될 수 있는 반면, 자료가 없는 다큐멘터리 감독들과의 만남은 1차적으로 구술자의 증언에 기댄 채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는 듯 한걸음 한걸음 진행되지만 잊혀졌던 작품 하나, 정보 하나를 찾을 때마다 마치 고고학자가 된 양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발견된 영화들을 볼 때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화영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조금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감독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영화의 핵심에 다가서게 한다. 이 구술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두 편의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와 <새길>이 그러하였다. 분단이나 교화 등의 키워드로만 알려졌던 영화들을 실제로 관람하면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용어로만은 담을 수 없는 당대 대중들의 감성과 소통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구술자와의 만남 이후에 다시 보게 된 영화 <팔도강산>은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알리는 국책영화의 효시’로서만이 아니라 최고의 스타들을 한 영화 안에서 볼 수 있고, 실제 가보기 힘든 전국 방방곡곡을 구경하는 대리만족을 얻으며, 거기에 적절한 위트와 감동까지 선사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당대 최고의 오락물이라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후 수많은 속편과 아류작이 제작된 것뿐만 아니라 KBS 일일연속극 <팔도강산>(윤현민 작, 김수동 연출)이 무려 3년 동안 방송되면서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로케이션을 다니며 인기를 구가한 것은 대중들의 호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구술을 통해 국립영화제작소와 독립프로덕션의 초기 제작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지형도가 그려졌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와 문화영화, 그리고 관에서 혹은 독립프로덕션에서 문화영화제작에 대한 연구를 위해 영상자료원에서 2012년 문화영화에 대한 주제사 구술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기본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영화의 역사와 위치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1)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2)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1953년에 발표된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신봉승의 각색을 거쳐 김수용 감독이 1965년에 장편으로 완성한 영화다. 1965년 11월에 개봉한 < 갯마을 >( 김수용 , 1965)은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신상옥 , 1961), < 벙어리 삼룡 >(신상옥, 1964)과 더불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영화로까지 의미가 확장된 ‘문예영화’의 기준을 확립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흥행과 비평 면에서 모두 성공적이었고, 이후 1967년까지 폭발적으로 이어진 문예영화 전성기를 연 기념비적인 영화다. 장편영화만 109편을 연출한 김수용 감독은 이 영화의 성공으로 문예영화의 기수로 떠오르게 되는데, 한국 문예영화의 전성기는 김수용의 영화 활동의 전성기와 대략 일치한다. 예술성 있는 문예영화가 수익성도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이 영화의 경험으로 김수용 감독은 소설의 영화화에 더욱 매진하였던 것이다. < 까치소리 >(1967), < 안개 >(1967), < 산불 >(1967) 등 그의 대표작은 거의 문예영화였던 점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짧은 단편소설을 장편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원작에 없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들을 더하여 좀 더 스토리라인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해순과 시어머니, 상수, 그리고 동네 아낙들로 이루어진 원작의 단순한 캐릭터 구성 위에 영화에서는 시동생을 주요 캐릭터로 더하였다. 그리고 남편의 죽음 이후, 해순이 상수와 함께 하는 육지 생활과 산속 생활이 새롭게 추가되어 구체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영화의 드라마적 구성이 더 풍부해졌다. 결혼한 지 이제 열흘이 된 새댁 해순( 고은아 )의 남편 성구( 조용수 )가 고깃배를 타고 출항한 후 거센 폭풍우로 인해 사망하고, 그녀는 시어머니( 황정순 ), 시동생 성칠( 이낙훈 )과 함께 살아간다. 바닷가 갯마을은 과부가 많은 동네로 시어머니도 일찍 남편과 사별했다. 경제적 토대와 일상적 생활이 서로 한데 엮인 연대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갯마을 과부들은 끊임없는 성적 농담으로 자신의 척박한 처지를 이겨낸다. 그러던 중 아름답고 해맑은 해순을 쫒아 다니는 건장한 상수( 신영균 )는 그녀와 새출발하고 싶어 하고, 도망 다니던 해순은 결국 그와 관계를 맺게 된다. 성칠과 어머니는 해순과 상수 사이를 눈치 채고 해순을 설득하여 보내기로 한다. 원작은 상수가 징용에 끌려가자 홀로 산에 남은 해순이 바다를 그리워 하다가 병이 나서 갯마을로 돌아가는 결말이다. 이에 반해 영화는 서사적 확장을 꾀하기 위해 에피소드들을 추가한다. 채석장에서 행복하게 일하던 두 사람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자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살던 중, 지나가던 사냥꾼이 해순을 겁탈하려 한다. 그러자 상수가 사냥꾼을 죽이고, 해순은 기절한다. 상수는 약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가 산으로 뛰어오던 중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는다. 정성스럽게 남편의 장례를 지낸 해순은 그리운 갯마을로 돌아온다. 시어머니와 마을 아낙들은 해순을 반갑게 맞이하고, 해순은 다시는 바다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원작이 해순과 상수의 해후를 열린 결말로 놓았다면, 영화는 두 번이나 사별한 해순이 운명에 순응하면서 다시 갯마을에서 갈아가기로 결심하는 닫힌 결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말은 운명의 비정함과 삶의 건강한 활력이 뒤섞이는 보다 풍부한 마무리를 생산해낸다. <갯마을>은 <벙어리 삼룡>처럼 향토색 짙은 서정성의 로컬 컬러 경향의 영화로 보이지만, 이전 향토성 문예영화들과 다른 면이 많다. 갯마을은 시대성이나 외부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원형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과부들로 구성된 여성 공동체에서는 성적 욕망을 마음껏 발산해도 된다. 남편 없는 이들이 섹스를 그리워하는 직설적인 농담을 나누거나, 서로의 맨 다리를 베고 누워 서로의 육체를 찬양하거나, 여성들끼리 진하게 포옹하고 키스하며 뒹구는 장면은 에로틱하면서도 건강한 생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갯마을이라는 원형적인 공간은 원초적인 삶의 양태들로 가득 채워져 생동하는 삶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표현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원초적 건강성이 뿜어내는 매혹은 비관적인 신파성과 거리를 둔다. 이 위에 1960년대 한국 감독들이 의식하고 있었던 유럽 모더니즘 영화의 영향이 더해진다. 캐릭터들의 농담과 태도에서 보여지는 보다 건조한 표현은 영화적 품격으로 나타난다. 해순이 상수를 받아들이던 날 클로즈업의 투 쇼트를 보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나 루이 말의 영화처럼 내면의 환희와 갈등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처럼 분열된 의식세계가 감각적인 서구의 예술영화적 기법으로 표현된다. 바다와 갯벌, 이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성적 욕망은 원초성의 자연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유교적인 사회적 규범이 깨어지는 장면들은 어색하지 않다.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 이제 막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며느리를 재가시키는 것, 다시 돌아온 며느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환영하는 것과 같은 장면들은 이전 영화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진보적인 애티튜드다. 굿과 성황당 또한 원초성의 상징으로 기능하는데, 이전 영화들에서 무속이 전근대성의 표상으로 타파해야 할 구습으로 비춰지는 면이 있었다면, <갯마을>의 무속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삶과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는 갯마을 사람들에게 무속은 또 하나의 자연의 일부다. 해순이 남편의 혼백을 건져내는 푸닥거리 장면, 그리고 아들의 넋을 건져내 정성스레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오는 어머니의 행동은 기이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일상적 제의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갯마을>은 신파성에서 한걸음 나아가며 모더니즘 영화언어에 대한 갈망을 그려내는 전환기적인 작품이며 문예영화의 기준이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진보적인 이상적 여성 공동체는 지금 봐도 놀랍다.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과 동시대적 이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계속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 갯마을 VOD 보러가기 <<
1930년 1월 조선극장과 단성사가 토키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활동사진 변사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조선의 영화 문화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변사들의 연행이 ‘화예(話藝)’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원숙한 경지에 이른 때였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변사의 한 사람, 김영환은 곱상한 외모와 단정한 매너로 흥행계에서 인기를 얻어왔을 뿐 아니라, <장화홍련전>(1924), <세 동무(삼걸인)>(1928), <약혼>(1929), <젊은이의 노래>(1930), <연애광상곡>(1931)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기도 했으며, “낙화유수”, “세 동무” 등의 영화 주제가와 “강남제비”, “추월색” 등의 유행가를 작곡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1928년에 단성사에서 조선극장 해설부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앞으로 수년 내에 변사라는 직업이 사라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에서의 영화해설 역사를 설명한 음반 《역려》(1932)에서, 그는 자신이 서있는 격변의 시간을 “활동사진이란 그 이름이, 영화라는 이름으로 바꾸이는 동시에 변사라고 하든 것도, 해설자라는 것으로 고치어진 오늘” 1 이라는 정도로 인식했다. 그가 보기에 토키 이후의 변사는 ‘활동사진 변사’에서 ‘영화의 해설자’로, 그러니까 극장의 엔터테이너에서 필름 텍스트에 한걸음 더 다가가 영화의 번역자로서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하는 존재였다. 김영환에게는 더 나은 해설자가 되는 것이 중요할 뿐 굳이 다른 분야를 곁눈질할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김영환은 ‘조선인 변사 1세대’ 서상호와 김덕경의 견습으로 흥행계에 입문했다. 경상도 출신으로 사투리 탓에 견습 시절에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꽤 오래 생활고에도 시달렸지만, 이제 영화해설계의 중진이 되자 변사의 화예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외국영화뿐 아니라 국산영화를 상영할 때도 변사의 해설이 붙는 일본이나 조선에서 “해설은 외국인들도 일찍 발견치 못한 영화감상의 효과를 한층 더 힘 있게 하는 일종 특수적 색채”이며 “영화를 일반적으로 감상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색채와 더 예민한 감각과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작품을 해부하여 일반적 감상에 바치는 일종 수단”인 영화해설에는 그야말로 ‘연구’가 필요하다. “지껄이되 잘 지껄이자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조리 있게 잘 지껄일까를 힘써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 끝에 김영환은 영화의 주제와 플롯, 분위기를 이해하고, 작자의 주안(主眼)과 세선(細線)을 분별하는 안목을 보유하며, 영화 번역에 창의성을 발휘하되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해설자의 자질이라고 풀어 설명했다. 2 1931년 조선극장에서 <럭비시대>(The Forward Pass, 1929)와 <크랙 장군>(General Crack, 1929)을 상영하던 때, 김영환이 기록한 일기에는 이제 막 토키 시대로 진입한 조선 변사의 일상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루하루가 바쁜 변사였다. 조선극장에서는 이미 외국의 토키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김영환은 그 외국어 자막을 번역해 설명하는 연행을 했다. 그런 한편 개인적으로 유성기 극음반을 취입해 상당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유성기와 라디오 보급률이 서서히 증가하면서 극장에서 ‘오리지널’한 변사의 목소리는 레코드를 통해 ‘복제’되고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다. 변사가 자신의 다른 목소리들과 공존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30년대의 김영환은 라디오에 출연해 영화를 해설하고 극음반 취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새로운 ‘재생 예술’들과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소리 복제 시대’를 반기고 있었다. 1931년 봄 김영환이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취입한 《춘향전》은 윤혁과 이애리수의 실연(實演)과 박록주의 창, 그리고 그 자신의 설명이 어우러진, 다시 말해 연극과 판소리, 영화해설이 뒤섞인 음반으로서 구매자들에게 풍성한 즐거움을 제공했다. 극음반이 잘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던 김영환은 극음반 취입의 소감을 이렇게 기록했다. “영화는 형태의 촬영이라면 레코드는 음성의 촬영이다.” 3 기술적 격변의 시기에 그는 쏟아지는 신작 영화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자, 일본의 영화 잡지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와 『키네마주보(キネマ週報)』를 구독하며 동시대적인 감각을 익히려 노력했다. 어느 날은 자신이 취입한 음반이 많이 판매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솔직하게 적었지만, 또 어느 날은 일본의 명변사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가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해 반론을 펼친 데 깊이 동조했다. 김영환은 여기서 언어와 계급의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토키영화를 해설하지 않는 것은 민중 오락인 영화를 “일부 유식급(有識級)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 독락적(獨樂的) 기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인해 일본영화 산업계의 구조 조정이 시작된 것을 영화 노동자의 입장에서 아프게 바라보기도 하는데, 체계를 갖춘 스튜디오 하나 없이 산업적으로 허약한 조선영화의 현실에서는 그것조차도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4 기술과 산업의 후진성이 어떤 경험을 ‘결핍’시키거나 ‘지연’시키는 조선의 현실에서, 1930년대 초반의 변사들은 기존의 상영 관습을 이어가는 차원에서, 또 외국어 토키에 대한 관객들의 언어적 소외를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발성영화의 음향을 줄이고 영화해설을 곁들이는 ‘토키 연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관객의 항의에 부딪치지는 않았다. 비단 외국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무성영화가 제작되고 있었고 아직 토키 상영 설비를 갖추지 못한 극장들도 많았다. 무성영화 프린트는 계속 유통되었고, 변사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며 관객들이 영화 사운드와 영상 동조 시스템을 이해하고 자연스레 토키 감상에 익숙해지자 변사는 점차 불필요한 존재로 그의 연행은 ‘낡은 문화’로 인식되어갔다. 김영환의 일기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30년대 후반, 경성의 이른바 ‘일류관’에서 변사의 해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 문화의 첨단에 서 있었던 변사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활동사진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1938년 가을, 조선일보영화제에 자극을 받은 ‘재경해설유지연맹(在京解說有志聯盟)’이 동양극장 영화부의 후원을 얻어 11월 16일부터 3일간 ‘무성영화 감상제’를 개최했다. 그해 여름 우미관 화장실에서 변사한 왕년의 인기 변사 서상호를 추모하듯, 무성영화 감상제에서는 과거의 동료들인 ‘무성영화 해설계의 권위’ 변사 이십여 명이 해설을 하고 그들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악사들이 영화음악을 연주했다. 5 <선라이즈>(Sunrise: A Song of Two Humans, 1927), <부활>(Resurrection, 1927), <거리의 천사>(Street Angel, 1928), 그리고 조선영화 <철인도>(1930), <아리랑 전·후편>(1926, 1930) 등 ‘추억의 명화들’이 이병조, 최병룡, 서상필 등의 해설로 다시 상영되었다. 그때가 아마도 ‘잊혀졌던 암실의 웅변가’들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조명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진 2. ‘무성영화감상제’ 광고 출처: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 3면. 1) 배연형·구인모,「역려」『유성기 시대, 변사의 화예』, 한국문화사, 2018, 321쪽. 2) 김영환,「영화해설의 소고(小考)」『대중영화』 제4호(1930년 7월), 8~13쪽. 3) 김영환,「영화생활」『영화시대』 1권 3호(1931년 5월), 32쪽. 4) 김영환, 위의 글, 30~31쪽. 5) 「해설유지 주최 무성영화감상제」『동아일보』 1938년 11월 17일자, 4면. 상단사진 1. 변사 김영환의 영화일기 출처: 「영화생활」, 『영화시대』(1931년 5월) (아단문고 미공개 자료 총서 2013, 7권, 104쪽)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김영환, 「영화생활」 『영화시대』 1권 3호(1931년 5월), 30~32쪽. (부분 발췌) 3월 7일 (토) 10시 기상— 근래 처음으로 충분히 잠을 잔 모양이다. 어린애가 몸성히 잘 있다는 편지가 왔으므로 오늘은 마음이 좀 편해진다. 오늘은 토요일, 주야(晝夜) 곱빼기를 또 마시는 날이다. 『영화시대』에 보낼 원고 몇 장을 쓰고 나니 벌써 무대 교대 시간이 되었다. 마음에 없는 작품을 지껄이는 것이야말로 울면서 겨자 먹기, 이를테면 ‘빵’ 구실에 지나지 못하니 ‘밥’이 시키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는 그것뿐. 밤에 김연실, 강석연, 강석제, 유영광 이 네 분의 양(孃)들이 놀러 왔었다. 편지 쓰고 있던 때라 고급적 인사를 못하였더니 “방해가 너무 많아 미안합니다”라고 석제 씨의 꼬는 말씀 한마디에 낭자군은 일제 행동! 네 분의 양군(孃群)은 객석으로 달아났다. 저녁 일을 마치고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3월 1일 제393호)를 통독함. 유니버설 춘계 작품 에드윈 커리우 (Edwin Carewe) 감독, 루프 벨레즈 (Lupe Velez) , 존 볼스 (John Boles) 주연으로 톨스토이의 『부활』이 재차 영화화가 된 모양. 반가운 소식이다. 돌로레스 델 리오 (Dolores del Rio) 가 지긋지긋하게 싫으니만큼 전(前) 영화 <부활> (Resurrection, 1927) 에서도 나는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라 재차 영화화인 루프 벨레즈와 존 볼스의 이 신(新) <부활> (Resurrection, 1931) 에 나는 기대를 가져본다.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로 세실 B. 드밀 (Cecil B. DeMille) 감독 <마담 사탄> (Madam Satan, 1930) 의 발표는 그리 반갑지가 않다. 또 어느 구석에서든지 기필코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고 씨부렁대놓은 구절이 있을 것 같아서 평(評)이나 시사를 대하기 전까지는 믿고 싶지가 않다. 동 회사 클래런스 브라운 (Clarence Brown) 감독 <불사조> (Wonder of Women, 1929) , 문호 주더만 (Hermann Sudermann) 의 원작인 만치 스토리의 통속적이 아니요, 비상업적인 그 점에서 어서 좀 보고 싶다. 일활(日活) 촬영소에서는 소원(所員)의 감봉 정리를 단행하였다고? 해고당한 50명 중에는 기술자나 배우로서 제일선에 나선 사람은 하나도 끼이지 않은 모양. 그러고 본즉 결국 수하 자(手下者) 참수 단행이나 아닌지 원! 먹을 것이 제법 생긴다는 저 땅에서도 영화 노동자의 수난이 생길 데에야 백사지(白沙地) 이 땅 위에서 갈팡질팡 헤매는 우리 영화 노동자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리. 아직도 참수 단행은 당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 씨의 「영화연첨일기(映畫軟尖日記)」, 『키네마주보(キネマ週報)』소재,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한 대항전은 흥미 있게 읽었다기보다도 장차 우리에게도 전환되어올 수난일 듯한 거기에서 같은 감정에 가슴이 흔들린다.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해서는 나 역시 거기에는 수긍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직업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제3자의 견지로도 물론 그러하다. 만일 세계 공통어가 세계적 보급과 발달을 얻고, 그리하여 그 세계 공통어로 취입(吹込)하여 토키영화를 제작한다면 모르되, 그것을 얻지 못하는 금일에 있어서 토키영화 설명 반대를 고창(高唱)하는 것은 민중 오락에 본위를 가진 영화 그 물건으로 하여금 일부 유식급(有識級)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 독락적(獨樂的) 기호물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전횡적 야심인 동시에 가공적 잠꼬대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 과학문명의 발달은 노동자의 생명을 뺏는 독와사(毒瓦斯)! 축음기의 권위로 말미암아 음악사(音樂士)의 희생을 본 오늘에 있어 토키영화의 출현으로 해서는 또다시 해설의 존재까지 그러하지 않은가! “아- 쿠오바디스 (Quo Vadis) 변사여!” 무세이 씨의 차탄사(嗟歎詞)이다. 참 아닌 게 아니라 어디로 갈꼬! 3월 8일(일) 9시 기상- <럭비시대> (The Forward Pass, 1929) 를 오늘도 주야로 두 번씩이나 씨부렁댈 일을 생각하니 졸음이 온다. 존 배리모어 (John Barrymore) 주연 <크랙 장군> (General Crack, 1929) 은 내가 보지는 않았으나 생각건대 <럭비시대>보담은 지껄일 재미가 좀 있으리라 했더니 후반을 담임한 성동호 군,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말. 그러나 <럭비시대>나 <크랙 장군>이 태작이라고 할 지경이면 배급소의 시비를 받을 말인 고로 이를테면 어디까지든지 태작이 아니요, 걸작이란 말이다. 요컨대 이 두 개의 걸작이 유감천만히도 우리들의 입에는 맞지 않는 음식과 같아 씨부렁대기에 매우 부아통이 터질 뻔 했다는 그것뿐이니 당해 배급소여! 달은 잡지 마실지어다. 적선동 강대원 씨에게 조극(朝劇) 초대권으로 미성(微誠)을 표하였다. 콜롬비아축음기회사 문예부 강윤석 씨 방문, 나의 취입한 레코드 초회 발매, 레코드 대회, 2회 발매, 《춘향전》은 상당히 잘 팔린다는 말 듣기에 기쁘다. 영화는 형태의 촬영이라면 레코드는 음성의 촬영이다. 촬영을 마친 영화배우나 취입을 마친 취입자의 궁금증은 피차가 일반이니 시사나 시험반(試驗盤)을 대하기까지에 일력장(日曆帳)이 곤죽이 되어버리는 것도 똑같은 일이다. 3회 발매품은 무엇인지 어떻게 되었을까. 잘 되었으면 좋고, 못 되었으면 낙망! 낙망! 단성사 해설부 견습이던 편순만 군. 조극 무대로 오겠다는 것을 단성사 해설 주임 김덕경 씨의 승낙을 맡아오라 했더니 저녁에 씨(氏)의 쾌락을 맡아왔음으로 즉시 출연을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