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린다
- 감독
- 한동균
- 제작년도
- 2014
조현병 환자 영군( 임수정 )은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할머니를 ‘하얀맨’에게 끌려갔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에게 틀니를 가져다주려 자전거로 쫓지만 앰뷸런스를 따라잡을 수 없자 영군은 스스로를 ‘방전된 싸이보그’라 이해한다. 그래서 다소 엽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충전하려다 정신을 잃게 되고, 그 길로 ‘신세계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박찬욱 감독의 2006년 작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는 이렇게 시작한다. 병원에 갇힌 영군은 자신이 ‘고장’날 것이라는 걱정으로 밥을 먹지 못하고 결국 아사 직전까지 간다. 건전지로 자신을 충전하려 하지만 건전지의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또 충전이 될 리도 없다. 그런 와중에도 영군은 할머니를 찾으려 하는데, ‘하얀맨’들이 할머니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영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두어야만 하는 것은 바로 동정심을 버리는 것이라 믿는다. 이를 위해 ‘뭐든지 훔칠 수 있는 남자’인 안티소셜증후군 환자 일순( 정지훈 )에게 자신의 동정심을 훔쳐 줄 것을 의뢰한다. 자신이 훔치고 싶은 것만 훔치는, 나름대로 지조(?) 있는 도둑 일순은 영군의 동정심을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그녀를 미행하며 관찰한다. 그리고 마침내 일순이 영군의 동정심을 훔쳤을 때, 그는 사랑에 빠진다.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를 처음 보았던 2006년의 어느 겨울, 스무 살을 바라보던 나는 ‘사랑은 구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당시를 복기하자니 (감히) 한 개인이 다른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지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나는 꽤 진지했다. ‘라이스 메카트론’이란 이름의 장치를 고안해 영군을 아사로부터 구해낸 일순. 그리고 안티소셜증후군 환자마저도 누군가를 동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든 영군. 당시 내 눈에 비친 영군과 일순은 서로에 대한 구원이었고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사랑을 하고 있었다. 사랑이 한창 궁금할 나이에 마주친 이 이상적인 사랑 이야기는 마치 알고 싶던 문제의 답지처럼 내게 다가왔고, 그렇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박찬욱 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 동안 여러 차례 이 영화와 만나면서 처음의 그 감상만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청소기의 존재 목적은 청소이고 세탁기의 존재 목적은 세탁이듯 대부분의 기계는 탄생의 순간 고유의 기능과 목적을 갖지만 싸이보그로서의 영군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마치 또래의 ‘인간’들이 그러는 것처럼. 하지만 영군이 아무리 밥 먹기를 거부하고, 건전지를 입에 대며 싸이보그의 방식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 해도 그녀는 태생적으로 기계가 될 수 없다. 생물학적 불가능을 차치하더라도 영군은 동정심과 같은 인간성을 결국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영군은 그녀가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했고, 결국 그녀의 본질과 그녀가 원하는 것 사이의 괴리로 인해 성장통은 또래의 그것에 비해 더 유별난 통증으로 찾아온다. “그냥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일순이 설미( 이영미 )에게 받아 영군에게 준 이 잔인한 대사는 영군과 일순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싸이보그가 되어 세상을 끝장내는 것이나 인간으로서 언젠가는 겪게 될 소멸을 피하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꿈에 대한 희망은 버리고, 그저 힘내서 사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일 테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결국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느끼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에, 사실 우리가 내심 원하는 것은 이미 어렴풋이 예감하기 시작한 실패를 통보해줄 누군가가 아니라, 어렵게 실패를 인정했을 때 준비해둔 반창고를 꺼내 붙여 주며 옆에 있어 줄 사람이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빚어낸 신세계 정신병원의 병자들이 참으로 부러웠던 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지적하지 않고 서로의 몽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인간이든 싸이보그든, 비행 양말의 존재를 믿든 말든, 요들송을 부르든 말든, 그 혹은 그녀의 존재와 방식을 보편에 맞춰 고치려 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옆에 있어 준다. 마치 일순이 영군에게 “당신은 싸이보그가 아니며 또한 될 수도 없다”는 말을 하는 대신 라이스 메카트론과 같은 싸이보그 영군이 납득할만한 방식으로 그녀를 돕고, 언젠가 필요해질지도 모를 반창고 또한 미리 챙겨 두었듯이 말이다. 어쩌면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가 우리에게 제시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미 대선이 치러졌던 지난 11월 8일,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 힐러리 클린턴이 쭉 앞서던 필라델피아 주의 색깔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승리의 여신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음이 거의 확정 된 순간이었다. 그날 밤과 이후의 며칠 동안 42번가의 타임스퀘어의 한 건물의 광고판엔 트럼프가 미칠 영향을 경고하는 문구가 걸렸고, 뉴욕의 시민들은 퇴근 후 매일 저녁 맨해튼의 트럼프 타워 앞으로 몰려가 그들의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이튿날 아침엔 소위 말하는 ‘뉴욕 버블’을 꺼트리기라도 할 기세로 비가 내렸다. 현재 필자가 재학 중인 컬럼비아 대학교의 예술 대학은 ‘뉴욕 버블’의 전형적인 예시라고 할 만한 집단이다.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고, 몇몇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선 레이스 내내 침묵을 지키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집단. 몇몇 미국인 학생들은 실의에 빠져 수업에 나오지 않았고, 그나마 농담을 던질 힘이 남아 있던 영화학도들은 흐린 하늘을 가리키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모습이구나…’라며 쓴웃음을 겨우 지어냈다. 유학생과 미국인 학생의 비율이 6:4일 정도로, 타 국적의 학생들이 많은 집단이지만, 미국의 군사 정책이 영향을 미치는 나라 출신들이 꽤 많은 탓에, 우리는 국적을 불문하고 함께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공유하고 서로를 달랬다. 영화학도들뿐만 아니라 영화과의 교수들도 어느 정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많은 극작 혹은 연출 분과의 교수들이 본격적인 수업 시작 전 30~40분의 시간을 대선에 대해 말하는 것에 할애했고, 학장은 모든 예술학도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학과 건물의 로비 한쪽 벽면엔 ‘다가올 시대의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써 붙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졸도Swoon>(1992)과 < 세비지 그레이스Savage Grace >(2007)를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가르치는 중인 톰 케일런이 사석에서 내게 해준 말이었다. 자신의 연출 수업 시간에 < 살인의 추억 >(2003)을 예시로 보여줄 정도로 봉준호 감독의 열렬한 팬인 케일런은 종종 내게 한국 사회에 대해 묻기도 하기에, 우리는 각자가 속한 사회뿐만 아니라, 타자로서 각자의 사회에 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는데, 무수한 긴 한숨들이 지나간 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길 때,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클리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에 그의 말이 내게 와 닿진 않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었지만, 그의 말마따나 클리셰처럼 느껴졌달까. 하지만 정확히 그날 밤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케일런의 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한국에서 날아온 기사 하나를 며칠이 지나 뒤늦게 읽은 순간, 그의 말은 더 이상 클리셰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11월 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2차 범국민 행동에서, 10대 청소년들이 폴리스 라인 앞에 늘어서 경찰을 지켰다는 내용이었다. 방금 읽은 것을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왈칵 쏟아졌다. 클리셰가 무엇인가? 어떠한 이야기를 풀어냄에 있어 독창적인 고민 없이, 이미 사용될 만큼 사용된 장치를 쉬운 선택지로 골라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반복 사용된 듯 보이는 보편적인 장치라도, 적절한 곳에 위치해 확실하게 효과를 발휘한다면, 아무도 그것이 클리세라고 어깃장을 놓지 않는다. 경찰에게 보호받아야 할 10대 청소년들이 평화 시위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경찰을 보호하려고 나섰다는 이야기가 우리가 서로 더 사랑하고 지켜나가야지만 희망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메시지와 만났을 때, 나는 마치 ‘문제에 처한 주인공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실행할 용기를 낸다.’는 아주 보편적인 스토리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보는 관객이 된 기분이 들었다. 흔히 정치 비관론에 빠진 이들은, 다시금 뭔가를 바꿔보려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향해 냉소를 던진다. ‘그래 봤자 변하는 것은 없더라.’, ‘겪어 보니 그 놈이 그 놈이고, 다 똑같더라.’라는 흔한 푸념부터, 심하게는 ‘촛불은 바람에 쉽게 꺼진다.’까지 등의 논리가 일종의 갑옷이자 눈가리개가 되어 그들을 둘러싼다. 어쩌면 그들이 보기에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되던 착취와 지배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의 시도들은 역사의 클리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의 저항과 움직임은 때때로 즉각적인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세대와 세대를, 그리고 세기와 세기를 거쳐 더딘 응답을 언제나 받아내곤 했다. 누군가가 지금 신분제의 부활과 노예 사유화, 그리고 여성의 정치 참여 제한을 주장한다면 그 누군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사실 노예 해방이 이뤄지고 여성 참정권이 인정받은 것은 이 길고 긴 인류의 역사의 끝자락, 불과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뤄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침묵하는 기득권의 냉소와 탄압을 겪어 내고 당연해야 하는 것들을 이뤄내려는 사람들의 지난한 노력과 그 과정은 길고 긴 인류의 역사라는 이야기 속에서 분명 효과를 발휘한, 클리셰가 아닌 그 무엇이다. 1989년의 할로윈데이, < 오즈의 마법사 > 속 인물 도로시로 분한 ACT UP의 멤버가 ‘도널드 트럼프를 체포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에 임하고 있다. [사진출처]Surrender Donald! A Queer Call to Action Since 1989 사실 도널드 트럼프(와 그가 대표하는 집단)에 대한 저항도 이번 미 대선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다. 케일런이 속해 있기도 한 국제단체 ACT UP(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의 멤버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트럼프 타워를 건축하며 받았던 육백이십만 달러의 세금 혜택이 뉴욕의 빈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구축할 예산으로 사용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트럼프를 가난한 자들을 소외시키고 부유한 자들의 특권을 강화하는 잘못된 체제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1989년 10월 31일 맨해튼의 트럼프 타워 앞에서 트럼프에 저항하는 시위를 펼쳤다. 1989년의 그 날 20대 청년이었을 톰이 트럼프 타워 앞에 서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그 해 태어난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가 한 명의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트럼프와 그로 대변되는 이 사회의 시스템과 싸워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내가 살아온 세월만큼 시간 동안 거대한 부조리와 싸워왔다면 지칠 법도 할 텐데, 앞서 언급한 대화 이후 며칠이 지나 수업 시간에 교수와 학생으로서 다시 만난 케일런은 대선 결과를 다시금 언급하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다.’라고 자신의 학생들에게 말했다. 영화라는 것은 하나의 매체이자 언어이며, 감독 혹은 작가가 되길 지망하는 우리는 각자의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세상에 맞서 영화라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미의 발언이었다. 그렇다, 미국이냐 한국이냐의 지리적 문제를 차치하고, 지금은 영화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라, 영화가 말해야 할 때다. 우리가 어딘가의 광장에 모여 우리의 목소리로 부정에 맞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화 또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용기를 내서 그것을 말해야만 하는 시기이다. 평론가 강소원은 11월 23일 자로 부산일보에 게재된 본인의 칼럼에서 올해 부산독립영화제 출품작 대다수의 문제가 ‘절망적인 시대를 절망적인 영화로 담아냈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절망적인 시대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과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지금 광장으로 뛰쳐나온 세대의 영화 속에선 왜 그러한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강소원의 이러한 지적이 단지 부산의 젊은 감독에게만 해당하는 분석이 아닌, 필자가 속한 세대의 감독들이 만든 지난 몇 년간의 독립 영화 전반에 적용 가능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영화 속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만든, 지난 역사 속의 여러 사태에 대항할 때마다 느낄 수밖에 없었던 무력감이 우리의 말문이 잠시 막히게 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느리고 더디게 승리를 쟁취한 적이 있으며, 지금은 또 다른 아주 길고 긴 싸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중이다. 누군가가 살아온 평생보다 더 오랜 시간 광장에서 싸웠지만 지치지 않은 이가 있으며, 누군가보다 훨씬 적은 세월을 살았지만, 용기를 가지고 광장에 발을 디딘 이들이 있다. 당장은 우리의 이러한 또 한 번의 저항이, 그간 무수히 있어 왔던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클리셰적인 시도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느린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분명 나아지는 중이고, 우리가 써내려가는 중인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영화에서 이러한 시도들이 클리셰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렇게 주장하는 필자부터 그동안의 비관론을 버리고, 다시 한번 희망을 바라보려고 한다. 나로 하여금 너무나 당연한 것이 모두 클리셰는 아님을 깨닫게 해준 광장의 청소년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위 사진 설명: 미 대선 이튿날인 11월 9일,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정경. 네온 사인 속 문구: “Trump victory causes ‘SERIOUS CONCERNS’ in Middle East”(트럼프의 승리는 중동 지역에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한다.)
영화에 관해 글을 쓸 땐, 사적인 이야기로 지면을 채우는 것을 많이 주저하는 편이다. 영화 글을 읽는 사람들의 동기는 대체로 글쓴이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그 글이 다루는 영화에 대한 관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쓰이게 된 배경을 잠깐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년 연말까지만 해도 난 한국에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작은 규모의 영화 잡지를 만들며 백수와 직업인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몇 달 앞두고 마침 뉴욕에 계신 먼 친척분의 집이 비게 되었고, 뉴욕행 비행기의 항공권보다 서울의 여섯 달 치 월세가 더 비싸단 이유만으로 예정보다 조금 빨리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딱히 이곳에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영화들의 DVD나 블루레이를 구해 보거나, 링컨센터 필름 소사이어티(Film Society of Lincoln Center), 필름 포럼(Film Forum), IFC 센터(IFC Center) 등을 다니며 소일하던 중 한국영상자료원으로부터 ‘뉴욕에서 할 수 있는 시네필 적인 경험’에 대해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고, 이곳에서 새롭게 경험한 것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무심코 청탁을 수락하게 되었다. 처음엔 집필 과정이 순탄할 것만 같았다. 장 뤽 고다르가 < 언어와의 작별 >(2014)에서 3D 기술을 활용해 단순한 오버랩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이미지의 중첩을 선보임으로써 영화 몽타주의 영역을 확장하였지만, 한국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나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몇몇 운 좋은 관객들만이 그 순간을 목격할 수밖에 없던 것과는 달리, 뉴욕의 시네필들은 맨해튼의 IFC 센터에서 비교적 오렛동안 매일같이 영화사의 새로운 도약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아쉬운 이야기부터, GV가 예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회고전 내내 자신의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극장을 찾아 모든 관객의 질문에 성심껏 답하며 크리스 마르케, 알랭 레네, 프랑수아 트뤼포 등과의 일화를 들려준 아녜스 바르다의 이야기라든지, 크라이테리언의 노력 끝에 4K 복원된 사티야지트 레이의 < 길의 노래 >(1955)를 다른 도시의 시네필들보다 먼저 만나볼 수 있었던 것 등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글을 시작하고 나니 ‘과연 내가 뉴욕에서 경험한 것들이 한국에 있었을 때에 비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이곳에서 그저 영화를 보았을 뿐이고, 좋은 영화를 만나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은 부산에서 십대를 보내고, 서울에서 이십대를 보내는 동안에도 내가 늘 해오던 것이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뉴욕의 시네마테크들에서 내가 만났던 영화들과 영화인들에 대해 부러움을 표할 때, 나는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서울아트시네마, 영화의 전당에 앉아 있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밝은 햇빛 혹은 현란한 네온사인이 내미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깜깜한 어둠 속에 틀어박혀 영화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어느 프랑스인의 묘사에 의하면 ‘시네마테크의 들쥐들’ 같은 시네필들이 하는 경험이란 결국 어떤 도시에 체류 중인가의 문제가 아닌 어떤 극장을 찾았는가의 문제에 의해 좌우되며, 그것들 사이에 우열 관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 맨해튼 >(1979)을 극장에서 본다면, 그곳이 맨해튼의 필름 포럼이 아니라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한 시간 반 남짓 우디 앨런의 시선으로 바라본 1970년대의 맨해튼에 있는 것이다. 극장 문이 닫히고 나서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기 전까지의 짧은 어둠 속에서 관객들은 이전까지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과 격리되어 곧 상영될 영화의 감독이 설계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영화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창조된 공간은 그곳이 세트였든 아니면 실제 장소였든 간에, 분명 존재하기에 필름에 착상되어 이미지로 재연되었지만, 막상 그것이 촬영된 실제 장소와는 다른 성질을 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찰나의 암전 후 영화가 상영되는 세상의 모든 영화관은 엄밀히 말해 일종의 무국적 지대이며, 그 속의 시네필들은 이를테면 국적은 물론 시간과 공간의 경계마저 초월한 그 영역을 유랑하는 초국적의 시민들인 셈이다. 그들이 이미 극장에 들어선 순간 그들에게 자신이 위치한 물리적인 좌표는 무의미할 뿐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네필이 도시 간을 이동하며 여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서로 다른 장면에서 울고 웃는 타 문화권의 관객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 체험은 때때로 그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하며, 다른 도시를 방문해 그간 영화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실제 장소를 비교해보는 것은 그 영화가 그 도시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영화적 공간으로 구성한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여행자로서 시네필은 유명한 관광 명소뿐만이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이라면 무심결에 지나칠 법한 곳들에서도 그 장소에 덧입혀진 서사에 기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킹콩의 사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더라도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의 풍경에서 감흥을 느끼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 이터널 선샤인 >(2004)을 보지 않은 채로 몬타우크에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물리 법칙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앞서 나열한 것들과 같은 시네필적 경험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영화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각자 다른 영화를 만나며, 내가 만나지 못한 영화를 만날 누군가를 끊임없이 부러워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의 곁을 지킨다면, 그래도 영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형태인지 점차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앞선 시네필들이 단지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시네필들이 서로에게 ‘저는 이 영화를 이렇게 보았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부치듯이 쓴 조각들이 모여 감히 혼자서는 완성하지 못할 영화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그 지도를 보며 후대의 시네필들이 다음엔 어떤 영화를 찾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며 새로 써나간 편지들이 모여 이뤄진 것이 어쩌면 시네필의 역사이자, 영화 비평의 역사이며, 영화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은 조금 서투르고 정리가 안 되긴 했지만, 그리고 엉뚱하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 무엇보다 내가 뉴욕에서 겪은 시네필적인 경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