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만세
- 감독
- 부지영, 양익준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서주희, 김선빈, 정경섭, 권귀빈, 이현수, 박소연, 전재훈, 정다이, 이인훈, 김우, 변정희, 전경하, 황인곤, 김다빈, 조슬기, 고세진, 김소연, 김동현, 이정아, 조정의민, 허준석, 류혜영, 엄영훈, 김성미, 오민애, 김대영, 양익준, 공부성, 이동환, 연상호, 최규석, 박나미, 윤승훈, 조강훈, 이현서, 강예림, 조경은, 정윤영, 김현화, 박연하, 한미영, 이재철, 양유진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어쩐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현장. 물론 그 ‘중요한 일’이란 사진을 보는 순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른다손 치더라도, 사진 속의 인물만으로도 이곳은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1993년 7월 12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영화관 단성사 는 이날따라 매우 들뜬 분위기다. 역대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되며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 서편제 >(임권택, 1993)가 상영 중이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유독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한껏 들뜬 분위기를 가득 안은 단성사를 찾은 특별한 손님은 이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 (당시) 야인/정치인 김대중이었다. 한편 사진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을 가볍게 붙잡고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이는 영화 <서편제>에서 한국적 아름다움을 필름 위에 새긴, 사진의 원 소장자인 정일성 촬영감독이다. “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 ”에는 이 사진 외에도, 단성사 휴게실에서 김대중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일성과 오정해 의 사진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의 표정에는 거물 인사와 함께 자리한 데서 오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이즈음의 김대중은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던 참이었다. 그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돌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산하 국제문제연구소의 객원교수로 떠났다. 그 사이에 여러 언론은 그와의 접촉을 수없이 시도했지만,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외부와 거리를 두고 통일문제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6개월가량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93년 7월 초, 언론은 또다시 그의 거취에 대한 보도를 연일 이어갔다. 그러던 차에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뤄진 그의 <서편제> 관람은 사회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은퇴 정치인의 행보에서 꽤나 튀는, 돌출 이벤트였다. 그가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것은 “제작사 측의 초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1] 제작사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일 거취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야인’ 김대중을 초청했고, 김대중 역시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태흥영화사는 왜 김대중을 단성사에 초청했을까? 김대중은 모든 외부와 거리를 두면서도 왜 태흥영화사의 <서편제> 관람 초청에 응했을까? 제작사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혹시 태흥영화사는 화제 속 인물의 <서편제> 관람이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서편제>는 이미 1993년 5월, 문화체육부 중개로 청와대 시사회를 개최했고 김영삼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관계자들의 찬사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종교인, 김수환 추기경이 <서편제>를 보러 단성사를 찾은 일도 있었다. 단성사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그를 맞이하는 <서편제> 제작팀(구체일 미상) 다시 말해, 정치계를 비롯해 종교계까지 <서편제>를 관람하면서, 영화의 우수성과 작품성, 화제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93년 7월 12일의 이벤트는 단순히 영화 홍보를 위한 목적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김대중’ 그 자체가 태흥영화사에 그리고 영화 <서편제>에, 나아가 한국영화계에 특정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계와 김대중의 관계 내지는 영화계에서 ‘김대중’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로부터 약 5년 전, 노태우 정권을 출범시킨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첫 대통령 직접선거로,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당시 대표적인 민주 인사 김영삼(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 이하 평민당) 역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대중은 민주정권 수립을 위해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으나 결렬되었고, 이들은 각자 독자 후보로서 대선 레이스를 치렀다. 영화계 내에서도 국내 영화시장 보호 및 창작과 표현의 자유, 영화인 복지 향상 등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김영삼, 김대중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2] 단일화가 결렬되자 평민당 김대중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3] 이에 평민당은 「평화민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4] 로 영화인의 요구에 호응했다. 여기서 평민당이 제시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기본 원칙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평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1987. 12.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영화계 현안문제를 고루 다루는 가운데서도,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위해 평민당이 가장 먼저 제시한 극장 스크린쿼터 확대안이다. 1986년 12월에 개정되어 1987년 7월부터 시행된 제6차 개정영화법에는 외국인의 국내 영화업 허용 조항이 신설돼, 외국 영화사가 국내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사실 이는 1985년부터 시작된 미국 통상압력의 한 결과로, 이를 토대로 1988년부터 UIP를 시작으로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1989년~), 콜럼비아 트라이스타(1990년~), 월트디즈니(1993년~) 등의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국내에 영업 등록을 하고 자사의 영화를 직접 배급(직배)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는 한국영화계에 위기로 다가왔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직접 배급되면,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영세한 한국영화가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설 자리가 좁아진 한국영화를 보호해줄 장치는 스크린쿼터 제도뿐이었지만, 이 역시 미국의 레이더망에서 안전할 리는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일수를 확대하겠다는 평민당의 공약은 생존 위기에 놓인 영화인들의 희망이자 기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사진 속 1993년 7월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93년의 한국영화계는 스크린쿼터 문제, 나아가 영화 시장 개방 문제로 또다시 분주한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에 시작된 ‘제2차 한미영화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1989년 1월부터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을 연차별로 완화해 1994년 1월부터 전면 폐지할 것에 합의했다. 이는 쉽게 말해 외국영화 상영 필름의 극장 공급량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으로, 국내 영화시장 개방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1994년으로 예고된 영화시장 확대 개방을 목전에 둔 1993년의 영화계는 그해 1월, ‘스크린쿼터 감시단(위원장 정지영)’을 발족하고 전국 극장 상영 실적과 스크린쿼터 위반 실태를 조사, 감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영화 보호의 마지막 보루인 스크린쿼터 사수에 매진했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7월 12일,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야인’ 김대중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공약으로 내세운 1987년의 ‘대선 후보’ 김대중과 교차한다.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 전면 폐지의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는 1993년 현재에,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들의 직배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확대를 약속했던 1987년 정치인 김대중이 마치 소환되기나 한 듯이.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이 예고된 <서편제>를 야인 또는 정치인 ‘김대중’이 관람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한국영화를 위한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 단성사에 김대중을 초청한 호스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그해 10월, 문체부의 스크린쿼터 20일 추가 감경 발표에 대응하고자 출범한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 , 감독 유현목 , 임권택 ,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유동석과 함께 공동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3년 10월 27일에 예정된 영화의 날 기념행사 취소 및 제작 활동 중단 등의 공동 행동을 전개했다. 한편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한국 경제는 IMF 금융위기를 맞았고, 갓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제안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약칭 비대위)’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는데, 이때 역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배우 김지미 , 감독 임권택과 함께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노무현 정부 시기까지 이어졌으나, 그들의 투쟁으로 지켜온 스크린쿼터 146일은 결국 2006년 7월, 연간 73일로 축소되었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참조). *** [1] 《동아일보》, 1993. 7. 13., 5면. [2] 애국영화인 일동, 「 민주화를 갈망하는 애국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II 」, 1987. 12. 11.,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49_01. [3] 이 땅의 영화인들, 「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애국시민에게 드리는 영화인의 글 」, 1987. 12. 14.,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50_01. [4] 한국영상자료원,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관리번호 DZZ0001351_01.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와 영화계 1980년대 중반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양가적인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 그리고 반미 감정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강준만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권」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레이건의 재선 선거 전략과 맞물려 ‘광신적 애국주의’로 포장된 1984년 LA 올림픽은 한국의 신군부에도 매력적인 모델이 되었다. 또한 LA 올림픽이 보여준 미국 제일주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한국은 최고 우방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국이 개최한 올림픽에서 10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고, 전 국민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방송국을 동원한 국민 축제로 열기를 이어나갔고, 이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연결되며 1980년대 중후반의 한국 사회 전체를 취하게 만든다. 전두환 정권이 추진한 일련의 올림픽 이벤트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통치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이 미국이라는 타자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이은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 그것이다. 학생들은 광주민주화항쟁 5주년을 기해 학살의 책임자로 신군부를 지목하고 정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지원한 미국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기회 삼아 학생운동을 국민 여론과 격리하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부각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광주학살과 미국의 관련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간 것이다. 더 이상 반미는 운동권 대학생의 구호에만 머물지 않았다. 제5공화국의 영화 정책 설계도 미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절차적 정당성과 도덕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혹은 올림픽이라는 정권 차원의 과업 때문인지 특히 문화예술을 강조했고, 예산 지원과 규제 검열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가동했다. 1984년 영화 시책부터 반영된 영화예술 및 영화산업 활성화 방안도 당시 문화 정책의 맥락에 놓여 있을 것이다. 제5차 영화법 개정(1984. 12. 31)으로 영화제작업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었고, 전격적인 독립영화 제작 제도까지 신설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검열제도 심의제로 이름을 바꿨고, 주체 역시 반관반민 기구인 공연윤리위원회로 이관되었다. 이 같은 한국영화 육성 및 자율화 정책의 추진 배경에는, 1985년 시작된 한미영화협상이 있었다.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의 끊임없는 압력 끝에 한국영화는 전면적인 시장 개방이 예고된 상태였다. 결국 제6차 영화법 개정(1986. 12. 31)으로 1987년 7월부터 외국 영화사들이 한국에서 영업을 시작했고, 1988년 UIP의 <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 >(애드리안 라인, 1987)가 그 물꼬를 텄다. ‘한국의 스필버그’에서 미학적 야심가로 1953년생인 배창호 는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부터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 영화사를 기웃거린 영화청년이었다. 당시 제작 명가 화천공사를 찾아가 자신을 기획실장으로 채용해주면 연간 3편 이상의 흥행작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복귀작 < 바람 불어 좋은 날 >과 < 어둠의 자식들 >(1981)의 조감독으로 현장 경험을 쌓은 후 1982년 < 꼬방동네 사람들 >로 감독 데뷔의 꿈을 이뤘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이동철의 원작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강했지만, 영화는 문공부 검열 과정을 거치며 외견상 멜로드라마로 전향했고, 결과적으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배창호 자신도 대중적 화법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차기작인 < 적도의 꽃 >(1983)이 15만 관객 동원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충무로의 흥행 감독으로 등극했고, < 고래사냥 >(1984)의 40만 흥행에 이어, < 깊고 푸른 밤 >은 60만이 넘는 전대미문의 흥행 성공을 거뒀다. 지금이야 1천만 관객 흥행이 큰일도 아니지만, 당시 이 정도 흥행 성적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영화는 1985년 3월 1일 명보극장 한 관에서만 개봉해 7월 31일까지 무려 다섯 달 동안 상영했다. 매일 3,000명 이상의 관객이 들면서 5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때문에 다른 개봉관인 코리아극장으로 옮겨 최소 10만을 더 동원하게 된다. 이는 < 겨울여자 >( 김호선 , 1977)가 보유한 58만 기록을 깬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의 스필버그’로 불렸는데, 대중적 화법의 스토리텔링에 능하다는 평가와 흥행 감독이라는 가치가 합쳐진 표현이었을 것이다. 1985년 < 고래사냥 2 > 역시 흥행에 성공했지만, 그는 불현듯 ‘왜 영화를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지게 된다. < 황진이 > (1986)에서 시도한 탐미적 실험이 추석 프로를 기대한 관객에게 철저하게 충격을 주고 외면받은 후, 양식미는 유지하면서 서민의 일상을 따뜻하게 묘사한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로 다시 대중의 선택을 받았다. 영화비평가 김영진의 표현처럼 배창호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이미지로 승부를 거는 작가의 길에서 주춤거렸고, 흥행 감독의 명성은 조금씩 잊혀갔다. 1990년대 이후 그는 미학적 야심을 투영한 작가주의 영화와 대중영화, 또 저예산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갔다. 전자는 < 꿈 >(1990)과 < 천국의 계단 >(1991), 후자는 < 러브 스토리 >(1996), < 정 >(1999)과 < 흑수선 > (200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관객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받는 작품이라면, 1980년대의 그것은 배창호의 몫이었다. <깊고 푸른 밤>을 위시로 한 그의 1980년대 영화는 대중적 화법, 기술적 혁신 그리고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야심까지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성취는 그간의 한국영화가 기댄 멜로드라마의 상투성을 벗어난 것이었다. 황량한 풍경이 전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영화는 미국 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오픈카에 타고 있는 한 남자를 비추며 시작한다. 한 여성이 올라타자 차는 데스밸리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린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는 기이한 협곡의 구릉에 기대선 채로 관계를 가진다. 섹스가 끝난 후 남자는 돌변한다. 돈이 든 핸드백을 집어 든 그는 여자를 무자비하게 걷어차고 사막 한가운데 버려둔 채 떠난다. 이 남자는 바로 기회의 땅 미국에서 영주권을 받고 부자가 되려는 백호빈( 안성기 )이다. 임신한 애인을 한국에 남겨둔 채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영주권을 받아 그녀를 초청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LA 도심의 화려한 야경을 배경으로 ‘깊고 푸른 밤’이라는 타이틀이 보이고, 이제는 술집이다. 한 중년 여성이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성 바텐더에게 다가가 위장 결혼을 권한다. 그녀는 더 이상 싫다고 거절하지만 한국 남자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뀐다. 그녀는 주한미군을 따라 미국에 왔다가 이혼한 후, 영주권을 받으려는 남자들과 위장 결혼해 돈을 버는 제인( 장미희 )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위장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전남편 마이클이 딸 로라를 무리하게 데려간 사건이 있던 밤, 호빈과 제인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고 제인은 점차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한밤에 이민국 직원들이 들이닥쳐 둘의 관계를 추궁하지만, 제인의 도움을 받은 호빈은 결국 영주권을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한국의 애인을 불러올 생각에 들뜬 호빈은 제인의 집을 나서며 이혼을 요구하고, 그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그녀는 임신했다고 거짓말한다. 제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은 호빈은 그녀 역시 데스밸리로 데려가 폭행한다. 임신이 거짓말이었다는 제인의 말에 안심한 호빈은 이혼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고, 차에 탄 그녀는 호빈의 애인이 보내준 테이프를 들려준다. 아이도 지우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목소리에 호빈은 정신을 잃고, 제인은 그의 머리를 쏜 후 자신의 머리도 쏜다. 어떤 의미에서 <깊고 푸른 밤>은 한국영화사상 가장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해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일 것이다. 데스밸리행 고속도로를 달리는 오픈카, 모래 계곡에서 벌이는 정사 등 작심한 듯 할리우드 영화의 질감으로 볼거리를 전시하던 영화는, 갑자기 여인을 무자비하게 발로 걷어차는 악마 같은 남자를 보여준다. 특히 오프닝의, 인물을 점처럼 두고 데스밸리의 전경(全景)을 잡아내는 압도적인 숏은 일품이다(촬영기사 정광석은 이 영화로 21회 시카고국제영화제 촬영상을 받았다). 영화의 엔딩 역시 데스밸리다. 호빈은 제인을 때리고 목을 조르며 모래산 밑으로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이때도 모래산 위의 두 남녀를 점처럼 잡아내며, 대자연에 비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신비로우면서도 황량한 모래 협곡과 사막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호빈과 제인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데스밸리로 상징되는 영화 속 미국은 이민자들의 꿈이 자랄 수 없는 불모의 땅일 뿐이다. 최인호 의 시나리오, 장미희의 호연 <깊고 푸른 밤>은 <적도의 꽃>에 이어 최인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오프닝 타이틀에 그의 소설 「깊고 푸른 밤」과 「물 위의 사막」을 원작으로 삼았다고 나오는데, 시나리오는 두 소설의 주요요소와 구성을 합친 것이다. 전자에서는 한국에서 터진 대마초 사건으로 미국에 온 가수와 선배 소설가가 자동차로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요소를 취했고, 미국 영주권을 얻기 위해 계약 결혼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후자에서 가져왔다. 사실 최인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는 극의 구성이나 인물의 성격 등 배창호의 영화 버전과는 꽤 다르다. 예를 들어, 데스밸리를 배경으로 한 사건은 시나리오의 엔딩에만 적용되고, 제인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여인으로, 또 그녀와 호빈도 더 깊은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는 제인을 차갑고 그늘이 있는 여성으로 묘사하는 등 둘의 관계에 거리를 만들고, LA와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과 데스밸리의 황량한 구도 속에 인물들을 배치해 공간과 분위기로 인물의 내면 풍경을 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 속 제인의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빚어진 것은 무엇보다 장미희의 역할이 컸다. 영화평론가 신은실의 평가처럼 전작 <적도의 꽃>이 배우로서의 안성기가 장악한 영화였다면 <깊고 푸른 밤>은 장미희의 아우라가 지배한 영화였다. 1980년 9월부터 방송출연금지 연예인으로 묶여 있던 장미희는 스크린 작업만 이어가다 1983년 9월부터는 거의 잠적에 가깝게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배창호의 끈질긴 설득으로 출연을 결심한 그녀의 요구 조건이, 미국 올로케이션과 동시녹음 등 기술적 투자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영화로 장미희는 <겨울여자>의 로리타 캐릭터를 넘어선 성숙한 매력의 여인으로 변신하며, 연기적 성장을 맞게 된다. 한국 대중영화의 주목할 만한 성취 당시 기사(「동아일보」 1985.10.14)는 <깊고 푸른 밤>이 관객의 주목을 받은 이유로, 소재의 참신성과 서구영화 같은 스타일을 든다.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국 이민 사회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영화 매체의 강력한 영향력, 특히 현재 1천만 영화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당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관객들에게 외국영화 보는 기분을 맛보게 한 점”도 큰 매력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 통상 제작비의 2~3배인 2억 5,000만 원가량의 제작비를 투입했고, 한국 배우는 4명만 출연시키며 미국 현지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배창호의 감각적인 연출과 속도감 있는 전개도 매력적이었지만, 테크닉 면에서도 발군이었다. 기존의 한국영화와 달리 영화 전체를 동시녹음으로 진행했고, 배창호의 스타일적 인장으로 꼽히는 360도 촬영 등 인물들의 감정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도 돋보였으며, 마치 재즈처럼 이미지와 조우하는 정성조의 세련된 영화음악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관객에게 서구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을 부여했다는 점은, 최신 렌즈의 카메라로 미국의 풍광을 담아낸 것이 이유였지만 할리우드 영화를 환기시키는 장면이나 분위기를 차용한 것이 주효했다. 여러 평론가가 언급하듯, < 차이나타운 Chinatown >(로만 폴란스키, 1974)의 필름 누아르적 분위기를 취한 것부터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마틴 스코세이지, 1976) 속 로버트 드 니로가 걷는 장면을 모방한 것도 그렇다. 하지만 당시 배창호의 언급처럼 미국영화에 대한 콤플렉스 차원이 아닌, 미국 현지에서 완성도 있는 대중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1980년대 중반의 시도 자체가 평가의 방점으로 찍혀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변화의 예고 1980년대 후반의 제작 자유화 물결과 정치적 유화 국면을 타고 한국영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물결을 맞았다. 이장호와 배창호의 후예들이자 영화운동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장선우 , 박광수 , 이명세 , 정지영 등이 등장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서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사회비판적 작품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국내외 영화학자들은 그들의 작품 경향을 묶어 ‘코리안 뉴웨이브’로 명명했다. 특히 장선우는 한국식 자본주의를 우화적 표현으로 풀어낸 < 성공시대 >(1988)를 내놓으며, 1990년대를 휘저을 파격적인 행보를 예고하고 있었다.
1958년도에 데뷔하여 육십여 년을 작가로 활동하신 김지헌(본명 김최연)은 1930년 9월 26일 평안남도 진남포 비송리에서 태어났다. 작가는 어린 시절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진남포와 경성을 오가며 살았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소개령이 내린 경성을 떠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광산이 있던 강원도 평창으로 피난을 떠나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사진1] <만추>(이만희, 1966) 작가 김지헌 [사진2] 김지헌 작가는 시나리오 지망생 시절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인 최인규를 무작정 찾아가 영화에 대해 물었다. 최인규 감독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극영화, <자유만세>(1966)을 연출했다. 최인규 감독은 김지헌 작가에서 숙제를 내줬고 그 숙제는 작가가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가는데 큰 가르침이 되었다.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작가는 소학교를 거쳐 명문 진남포공립중학교에 진학하여 수학했다. 당시는 일제말기로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본인이었다.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작가는 일본어를 쓰고 말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해방 후 작가와 가족은 서울, 장충동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작가는 경동공립중학교에 진학했다. 문학과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작가는 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화가가 되기를 꿈꿨던 작가는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떠났다가 형님에게 발각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의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고향 형님의 권유였다. 형님은 소설이 아닌 시나리오를 써볼 것을 권유하였고 작가는 한달음에 국립도서관을 찾아가 시나리오와 영화에 관련된 책을 모두 섭렵하였다. 그 시절 처음 본 책이《키네마 순보》이다. 이 후 작가는 평생 《키네마 순보》를 구독하였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며 당대 최고의 감독인 최인규 감독을 만나기 위해 고려영화주식회사에 찾아갔다. 몇 차례 문전박대를 당한 뒤에야 최인규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최인규 감독은 작가에게 한 영화가 몇 개의 커트로 구성되어있는지를 세어오라는 숙제를 내주고 돌려보냈다. 작가는 하루 종일 극장에서 영화의 커트를 세며 보냈고 결국 좋은 영화란 커트를 세기 어려울 만큼 흡인력이 강한 영화라는 결론을 얻었다. 작가가 터득한 결론에 최인규 감독은 관객을, 손님을 절대 놔주지 않는 흡인력 있는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이 자신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부라며 작가에게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작가 김지헌은 본격적인 영화공부를 위해 서라벌예술학교의 전신인 서울예술학원에 입학했다. 1949년에 설립된 서울예술학원에는 이광래, 김진수, 백철, 양주동, 박목월, 서정주, 오영진 등 당대의 문인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작가는 학교에서 시나리오 부장을 맡는 등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러한 학교생활도 한국전쟁과 함께 일단락되고 만다. 하지만 학교에서 맺은 인연은 전쟁 중에 소중한 인연으로 돌아왔다. 9. 28수복 이후 작가는 친우들과 함께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하지만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가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해 논산으로 떠난다. 논산에서 만난 이가 서울예술학원 동문인 시나리오 작가 하유상이다. 하유상의 도움으로 잠시 논산에 머물렀던 작가는 자형을 찾아 광주로 갔지만 도착했을 때 자형은 이미 광주를 떠난 뒤였다.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작가에게 도움을 준 이가 문학평론가 장백일이다. 장백일의 도움으로 건강을 추스른 작가 광주 군관학교에서 발행하는 정훈잡지 편집관 모집에 응시하여 편집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때 면접관이 작가 선우휘이다. 편집관으로 일하면서 작가는 서울에서 피난 온 그리고 광주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렸고 이들을 따라 광주에 내려와 있었던 시인 서정주와 만난다. 서정주 시인에게 보여준 한 편의 시는 후일 서정주의 추천으로《현대문학》에 실렸다. 작가의 시 <종 鐘>은 정전 이후 출간된《현대문학》4호(1955년 4월호)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시로 실렸다. 정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온 작가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창간한《중앙일보》에서 문화부 기자생활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문화부 기자생활을 하면서 당대의 문화계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작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난 인연들과 경험이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고 구술하였다. 기자로 일하던 중 작가는《조선일보》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이 신설된 것을 알고 오랜 꿈인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기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문학청년의 꿈을 일궈낸 광주로 내려가 응모작을 준비하였던 작가는 스승인 오영진의 부름을 받고 스승을 찾았다. 언론계에서 일한 탓에 아는 이가 많은데다가 스승인 유치진과 오영진이 심사위원이라는 것을 알고 예명으로 출품한 작품이 최종에 올라갔는데 심사위원인 오영진이 당선 후보자의 면모가 궁금하여 작가를 부른 것이다. 오영진 선생은 당선 후보자가 자신의 제자인 것을 알고 놀라면서도 당연한 결과라며 당선을 축하했다. 작가는 이때 사용한 예명인 ‘김지헌’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사진3] 해방 후 신세대 영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예프로덕션에 김지헌 작가도 참여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영화의 포스터이다. 영화는 전후의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렸다.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를 받았다. 시나리오 당선과 함께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작가는 이성구 감독, 이강원 감독, 제작자 전홍식 등과 함께 신예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영화계에 새로운 세대의 바람을 일으켜보자며 의기투합한 이들을 당대의 영화인들은 영화계의 젊은 그룹이라 칭하였다. 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신예프로덕션의 창립작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평론가 이영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영일은《영화예술》에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의 특집을 게재하였는데 이제 진짜 영화가 나왔다는 평을 실었다. 영화계 원로들은 이영일의 사무실을 찾아가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나친 호평이라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일본의 태양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은 태양족 영화를 만든 장본인인 오시마 나기사의 찬사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신예프로덕션의 작품들은 언론과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그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전후의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는 이들 영화는 새로운 세대를 가로막는 당시의 불안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진4] 김지헌 작가의 대표작인 <만추>(1966)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 [사진5] 1966년 개봉한 신성일, 문정숙 주연의 <만추>(이만희)의 포스터이다. 안타깝게도 영화를 볼 수 없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세련된 감수성이 돋보이는 연출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사진6] 이만희 감독과 함께 한 또 하나의 작품 <원점>(1967)의 포스터이다. 설악산 여행을 함께 떠난 이만희 감독과 작가가 설악산을 배경으로 구상한 영화이다. [사진7]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는 작가가 가장 아쉬움을 갖고 있는 작품중 하나이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어 작가에게 전화를 했다. 작가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사진8] 1982년 김수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만추>의 포스터 이다. 원작에서 문정숙이 맡았던 혜림역은 김혜자가, 신성일이 연기한 훈은 정동환이 맡았다. [사진9] <만추>(이만희, 1966)는 2010년 다시한번 리메이크 되었다. 연출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김태용, 민규동, 1999)와 <가족의 탄생>(2006)을 감독한 김태용이 하였다. 영화의 배경은 시애틀로 바뀌었고 혜림 역은 중국배우인 탕웨기가, 훈 역은 현빈이 연기하였다. 김지헌 작가는 40년의 간극을 두고 만들어진 원작과 리메이크 작품이 두 감독의 개성과 시대를 잘 담아내었다고 이야기했다. 1960년대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상생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것에 목말라 했다. 그 갈증을 해소시켜 준 이가 바로 이만희 감독이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로 인해 고초를 겪을 당시 만났던 동료 재소자를 만난 일화를 들려주었고 이를 예사로이 넘기 않은 작가가 시나리오 만든 것이 영화 <만추>(이만희, 1966)이다. 작가는 이만희 감독을 누구보다 뛰어난 연출력과 창의력을 가진 감독이라고 회고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와 쫓기고 있는 남자가 함께 국수를 먹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울음이 터졌다. 역설적이게도 정작 스크린 안의 배우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연출이 이만희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작가는 설명하였다. <만추>(이만희, 1966)의 흥행이후 작가는 이만희 감독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설악산 여행을 떠났다. 이만희 감독과 작가는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종일 술잔을 기울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작가는 이를 시나리오로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이만희 감독이 1967년에 연출한 <원점>이다. 갑작스런 이만희 감독의 죽음을 작가는 많이 안타까워했다.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인 <용서받기 싫다>(김묵, 1964)를 영화화 해보고 싶다는 전화통화가 이만희 감독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만추>(이만희, 1966)는 일본에서 상영되어 큰 호평을 받았고 1972년 사이토 고이치가 <약속 約束>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하였다. 한국에서도 1981년에는 김수용의 연출로 그리고 2010년에는 김태용의 연출로 다시 만들어졌다. 영화가 세 번에 걸쳐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해 재해석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리지널 시나리오 안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작품성이 숨 쉬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태양은 다시 뜬다>(1966)로 제5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만추>(이만희,1966)의 흥행 그리고 <태양은 다시 뜬다>(유현목, 1966)의 대종상 수상까지, 1966년 한 해 동안 작가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일궈냈다. [사진10] 1966년에는 김지헌 작가의 대표적인 두 작품, <만추>(이만희)와 가 개봉하였다. 작가는 <태양은 다시 뜬다>로 제5회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사진11] <태양은 다시 뜬다>(1966)를 연출한 유현목 감독은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특히, 문예영화 연출에 있어서 독보적인 감독이었다. 1960년대 작품성과 흥행성 있는 작품을 두루 발표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작가는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4차 개정 영화법과 시나리오 사전심의제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영화계 전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유신체제 하의 영화는 검열로 훼손되기 일 수였다. 작가는 이 시기 본인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현대물에 대한 검열은 더욱 심해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이 시대물 혹은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현실을 작가는 이야기했다. 작가는 1973년 한일합작영화를 준비하였다. 한일 양국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는 연방영화사 주동진 사장이 제안하여 쇼치쿠 영화사와 합작을 계획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는 <가야금-겨울의 가락>이다. 하지만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면서 영화의 합작계획은 표류하게 되었다. 작가는 국내영화사의 제안으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유현목의 연출로 1977년 <문>이란 제목으로 완성되었다. [사진12] 1977년 개봉한 영화 <문>(유현목)은 김지헌 작가가 1973년 한일합작영화로 준비한 영화였다. 시나리오의 원제목은 <가야금-겨울의 가락>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예인들의 삶을 다룬 시나리오는 1973년 한일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제작의 어려움을 겪었다. 1977년 유현목 감독의 연출로 완성되었다. [사진13] 일제말기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 1977)는 극장 상영 중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상영이 중지되었다. 후일 미국 이민을 떠난 뒤 비로소 본 영화는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였다. 작가는 검열로 다른 작품이 된 영화를 이국 땅에서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하였다. [사진14] 김지헌 작가는 1972년 한국영화인협회 시나리오 분과위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유신과 함께 개정된 영화법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작가는 검열로 영화가 훼손되어가는 과정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1970년 대 후반 영화의 검열은 더욱 엄혹해졌다. <야시>(박남수, 1979)도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 중 하나이다. [사진15] 김지헌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망명의 늪>의 포스터이다. 작가는 1976년《조선일보》4월 23일자 5면에 「영화시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국산영화 향상을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에서 작가는 영화업의 허가제, 우수영화 수입추천제, 시나리오 사전 검열 한국영화의 발전과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영화인 모두가 공감하였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영화인들은 박정희 정권과의 마찰을 두려워했다. 작가는 정부의 영화정책이 궁극에는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를 야기할 것이라 예견했고 결국 스크린 위의 검열로 훼손된 영화들을 통해 그 결과가 보여졌다. 작가는 1968년 통혁당 사건이 발생한 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소환의 이유는 영화 <학사주점>(박종호, 1964) 때문이었다. 통혁당 사건의 관련인이 명동에 학사주점을 하였는데 그것이 이유였다. 영화 속 주인공(신성일)이 군에서 제대하고 아버지(김승호)를 찾아갔는데 아들을 본 아버지의 첫 마디가 “쌀값도 비싼데 왜 벌써 제대를 했느냐” 였다.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에게 쌀값 운운하는 것이 말이 안 되고 또 남한이 그렇게 못사는 나라라는 뜻인지, 이는 이적행위라며 작가를 불러간 이들은 추궁했다. 다행히 작가는 풀려났지만 엄혹했던 한 시절에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영화가 상영 중에 금지를 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1977년 작품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은 검열에 합격해 극장에 상영되었으나 상영금지처분을 받아 결국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에 저항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사전심의에서부터 불순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기독교 측의 반정부 투쟁이 격렬했고 정부는 이 영화를 이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작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상영이 취소되었고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 합격하여 극장 상영을 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미 미국이민을 떠난 뒤였다. 작가는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다른 영화가 되어있었지만 작가는 영화가 만들어진 지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검열로 원안과 다른 작품이 되어버린 영화를 보는 것은 작가에는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야시> (박남수, 1979), <망명의 늪> (김수용, 1978) 등 작가의 많은 작품들은 검열의 과정에서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사진16]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0년 김지헌 작가는 미국 이민을 떠났다. 이민 생활 중에도 쉬지 않았던 창작 활동의 결과물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시나리오 선집은 한일 양국에서 출판되었다. 작가는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을 뒤로하고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1980년 1월 작가는《조선일보》1980년 1월 27일 5면에 「80년대의 한국문화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나, (9) 영화 제작-표현의 자유를. 자질 향상 위한 해외연수-기금확보도」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새로운 정치권력에게 한국영화계의 문제점들을 타파하고 발전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희망은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고 작가는 미국이민을 결심하였다. 뉴욕을 거쳐 LA에 정착한 작가는 미주 영화인들과 함께 영화화를 도모하는 한편 작품 창작도 쉼 없이 하였다. 작가는 각기 활동해 오던 한미영화학회와 미주한국영화인회의를 통합한 미주한국영화인회의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작가는 감독 홍의봉, 제작자 주동진 등과 함께 재미교포 이철수 사건을 영화화를 모색하였다. 또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오는 한국영화인들을 지원하는 등 미국에 머물면서도 한국영화계와 밀접하게 지냈다. 작가는 1987년 미국에 머물 당시 <별의 유역>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1989년 영화진흥공사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작가는 이민을 떠난 지 십년 만에 귀국하였다. <별의 유역>은 방대한 스케일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하였지만 작품은 2013년 집문당에서 발간한 『한일대역시나리오선집』에 실려 있다. 한일 동시 출간된 이 작품집에는 미발표된 다수의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십년 만에 돌아온 한국영화계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비디오 대여 시장과 케이블 TV의 영향으로 대기업이 영화제작투자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신진 인력들이 영화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작가는 귀국 후 영화제작과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요동하는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였던 김지헌은 시나리오 작가의 삶을 꿈꿨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였던 작가는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전후의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대의 젊은 이들의 삶을 스크린에 담고자 하였던 작가는 영화계의 신진들과 힘을 합쳐 신예 프로덕션을 설립, <젊은 표정>(이성구, 1960)을 만들었다. 전후의 영화계에서 새로운 영화의 바람을 일으켰던 이들은 누벨바그, 네오리얼리즘 등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한국영화계에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시도는 년 간 백 여 편 이상의 영화를 생산해내던 당시의 한국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바람은 기성의 영화인들에게는 불안함으로 느껴질 수 있었겠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문제의식이 당대의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였음을 앞서 기술한 평론가 이영일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리매김을 확고히 하고 대표작으로 <만추>(이만희, 1966)를 꼽았다. 또한 1960년대를 자신의 전성기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유신체제가 시작되면 작가의 삶은 녹록치 않아졌다. 작가는 유신체제하의 엄혹한 현실에서도 창작자의 당연한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위해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쓰는 한편 검열과 싸우며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1980년 짧은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작가는 다시 겨울로 들어서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작가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1990년대의 한국영화는 사뭇 달라진 환경이었다. 영화사의 설립과 관련한 법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이 되었고 수입자유화와 외화 직배 그리고 비디오가 활성화되면서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영화제작자로 다시 영화계에 돌아와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작가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영화계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였다. 1958년 이병일 감독의 <자유결혼>의 각색으로 데뷔한 김지헌 작가는 1990년 <홀로서는 그날에>(석래명)의 윤색에 이르기까지 60여 편의 각본과 20여 편의 각색과 윤색을 담당하셨다. 1990년 이후로는 제작과 후학 양성에 힘써 오신 김지헌 작가는 2014년 영상자료원과 함께한 원로영화인 구술사 작업을 마치시면서 좋은 작가란 동시대를 고민할 줄 알아야한다고 했다. 한국영화와 60여 년을 동거동락한 작가의 경험이 깊이 새겨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