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rmittagsspuk
- 감독
- 한스 리히터
- 제작년도
- 1928
사진: "Lichtspiel Opus 1.", IMDb 세계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사건과 개념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조명합니다. 세계영화사를 뒤져나가면서 슬픈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순간? 영화가 가졌던 하나의 가능성이 역사의 폭력 앞에서 어처구니없이 중단되었을 때. 이번에는 세계영화사의 슬픈 순간 중의 하나와 만날 차례이다. 아마 수없이 이런 순간과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발터 루트만(Walter Ruttmann, 1887~1941)은 188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스위스 취리히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그때 취리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중립국으로 모인 다다이스트들의 도피처였다. 여기에 한스 리히터, 트리스탕 차라, 에미 헤닝스, 한스 아르프, 하여튼 셀 수 없는 다다이스트들이 있었다. 한때 제임스 조이스도 여기 머물렀고, 이웃 도시에 러시아의 동지들에게 문건을 보내던 블라디미르 레닌도 잠시 체류했었다. 아마 여기서 발터 루트만은 다다이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1909년에 독일로 돌아왔고, 뮌헨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파울 클레, 라이오넬 파이닝어와 교분을 맺었다. 잠시 파울 클레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때 파울 클레는 닥치는 대로 화가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중에서 누구보다도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발터 루트만은 그들의 작품을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 그의 영화들 속의 이미지를 가져왔겠는가. (좌1) 발터 루트만 (사진: "Walter Ruttmann", IMDb ) (우2) 발터 루트만 연출 <빛의 유희, 작품 2번>(1922), <빛의 유희, 작품 3번>(1924) (사진: "LICHTSPIEL: OPUS II", MUBI / "Opus III", IMDb ) 발터 루트만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벨기에 아르 누보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헨리 반 데 벨데가 바이마르 미술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를 통합하여 바우하우스(Bauhaus)를 세웠다. (하지만 바이마르 미술 아카데미는 바우하우스를 곧 탈퇴하였고, 독일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초대 교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는 미술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쳐 가기로 한다.) 이 학교는 예술의 창조와 20세기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교육 목표이자 학교의 정체성이며 바우하우스의 프로젝트라고 선언(하다시피)했다. 이 학교에 네덜란드에서 《데 스타일(De Stijl)》을 창간한 테오 반 두스뷔르흐가 방문했고, 러시아 구축주의 미술가 엘 리시츠키도 찾았다. 바우하우스의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헝가리 미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였다. 바우하우스는 산업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좌) 바우하우스 (사진: "Chronology", Bauhaus Dessau ) (우) 1920년대 바우하우스 마스터 하우스에서, 라슬로 모호이-너지 (사진: "Biography", MOHOLY-NAGY FOUNDATION ) 발터 루트만은 화가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추상주의 양식에 끌렸다. 그런 다음 영화를 끌어들였다. 이때 발터 루트만은 영화를 ‘새로운 예술’이라기보다는 미술을 위한 새로운 테크놀로지, 새로운 매체, 새로운 사이트(site)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예술에서의 보편언어’를 추구하는 테크놀로지와 추상의 형식을 서로 결합하는 미래를 선언하는 《데 스타일》의 ‘기계 미학’에 관한 논의에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발터 루트만이 선택한 길이 아방가르드 영화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루트만 자신은 미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고 믿었다. 좀 더 간단하게 스크린을 새로운 캔버스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캔버스는 ‘시간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매체’였으며 여기에 “우리 시대의 속도”를 그려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빛의 유희, 작품 1번(Lichtspiel; Opus 1)>(1921)이다. 영화 제목이라기보다는 회화 작품에 어울리는 제목. 상영 시간 11분 44초. 음악 막스 부팅. 검은 바탕 화면에 푸른색과 초록색 원이 번갈아 교차하면서 시작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도형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유리 위에 그림을 그린 이 작업은 명백히 칸딘스키의 영향 아래 놓인 것으로 보였다. <빛의 유희, 작품 1번>은 1921년 4월 27일 베를린 마르모르하우스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 극장에서 한 해 전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로베르트 비네, 1919)을 공개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비평가 베른하르트 디폴트는 《프랑크푸르터 자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루트만은 자신의 스피드를 미래주의자 캔버스의 영화적 돌진으로부터 가져왔다”라고 썼다. 영화와 미술은 표현주의 영화들과 다른 차원에서 다시 한번 친교를 맺었다. <빛의 유희, 작품 1번> 중 하지만 <빛의 유희, 작품 1번>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상품 광고 아이디어를 찾던 쪽이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아방가르드와 비즈니스가 서로 결합했고, 부정적으로 말하면 예술은 다시 한번 돈이 되었다. 그들은 이 작품을 산업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받아들였다. 발터 루트만뿐이 아니라 많은 실험 영화 작가들이 새로운 제안을 받았고, 그들은 작업을 계속해서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본 곳은 바우하우스였다. 산업 디자인의 관점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활용한 ‘예술과 테크놀로지 사이의 새로운 통합’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영화라는 표현 대신 매체로서 ‘빛의 구성과 조립으로 이루어진 이 종합’에 관해 1922년 《데 스타일》에 ‘생산, 재생산’이라는 글을 썼다. 발터 루트만은 자신의 작업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왁스-커팅기에 관한 허가권을 얻은 다음 1926년에 로테 라이니거의 영화 <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1926) 오프닝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중 일시적으로 영화(와 미술 사이)의 또 다른 가능성에 다리를 놓았던 순간은 1933년 나치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폐교하면서 갑자기 사라졌다. 발터 루트만은 추상적인 이미지의 ‘빛의 캔버스’를 버리고 산업 디자인 영화에 관심을 돌렸다. 1935년, 발터 루트만은 군중을 대상으로 자신의 ‘캔버스’를 실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나치당은 그가 1928년에 모스크바 여행을 다녀온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감독직에서 해고하고 그 자리에 레니 리펜슈탈을 지명했다. 그 영화가 < 의지의 승리 >(1934)이다. 발터 루트만의 경력은 여기서 끝났다. 오스카 피싱거는 나치 독일을 피해서 1936년에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월트 디즈니의 < 환타지아 >(제임스 알가 외, 1940) 작업에 참여했다.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1937년에 시카고에 머물렀고, 미국에 개교한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한스 리히터는 작업을 중단하고 1940년 뉴욕에서 영화를 가르쳤다. ‘빛의 캔버스’는 그렇게 섬광처럼 빛을 발한 다음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하나의 순간이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
손>은 유현목 이 1967년에 만들었던 50초 분량의 단편영화이다. 이 작품은 프린트의 소재가 불분명했으나 한국영상자료원이 2016년 5월 20일에 < 오발탄 >의 복원판과 함께 일반에 공개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 작품은 프린트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분류가 유효하려면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손>이 실험영화의 정전들로 분류되는 1960년대의 영화들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면 그런 수고를 거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작품을 보면 50초라는 짧은 길이를 감안하더라도 동시대의 실험영화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손>이 실험영화라면 어떤 개념적 정의에 따라 실험영화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손>의 타이틀 이미지 필자는 <손>과 유현목이 주도하여 1964년 1월 18일에 설립했던 전위적 단편영화 제작 동인인 “시네포엠”(시네포엠은 미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단체의 이름이기도 한데 이 글에서 단체로서의 시네포엠인 경우에는 큰따옴표를 붙이고, 개념인 경우에는 별도의 표기를 달지 않도록 한다)에 관하여 두 편의 글을 쓴 바 있다. 첫 번째는 오큘로 온라인에 실었던 「유현목의 <손>과 관련된 사실들과 하나의 가설」이고 두 번째는 『영화연구』 71호에 실었던 「이색적인 문화영화: 유현목과 시네포엠(1964-66)의 실험영화 개념에 관한 제안」이다. 첫 번째 글은 <손>과 관련된 공식 기록으로 신문기사에 실렸던 사실들과 당대의 정황 등을 고려하여 <손>이 몬트리올국제박람회를 준비했던 정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두 번째 글은 시네포엠이 지향했다고 하는 전위적 단편영화를 개념어보다는 지시어로 이해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들을 지칭했던 것인지를 살펴보고, 그 개념이 이색적인 문화영화에 준하는 것일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손>에 관한 사실들은 첫 번째 글에서 정리해두었으므로 먼저 참고하기를 바란다). 두 글을 작성하면서 주로 검토해보았던 것은 유현목이 “시네포엠”을 결성하고 전위적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로 했던 동기가 외부의 영향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의 문제였다. 유현목은 <오발탄>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1963년 10월 26일에 출국하여 12월 11일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8일에 “시네포엠”을 출범시켰기 때문에, 유현목이 40일이 넘는 방미 일정을 통해 실험영화를 접했고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필자도 첫 번째 글에서는 유현목의 방미와 “시네포엠”의 설립이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단정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방미 일정, “시네포엠”이 설립 후 열었던 두 번의 상영회에 포함되었던 영화들, 무엇보다도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을 일일이 따져보면 유현목이 당대의 북미 실험영화를 방미 기간에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현목은 1963년 11월 8일 자 『동아일보』에 영화제 방문기에 해당하는 기사를 기고하는데, 이 기사에는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실험영화를 상영한다고 명시되어있다. 그러나 영화제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실험영화로 분류하고 있는 작품들이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현목은 실험영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시선을 국내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의 단서가 떠오르는데 시극동인회가 그것이다. 시극동인회는 1963년 6월 29일에 시, 연극, 영화, 무용, 미술 등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참여하여 결성되었다. 1963년 8월 12일 자 『동아일보』에는 시극동인회의 발족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시극의 연구 창작의 발표 활동을 목적으로 한 시극동인회가 발족을 보았다. 시극의 이론, 창작, 연출, 연기, 미술, 조명, 음악 등을 연구하거나 이에 종사하는 동인들의 모임인 동회에서는 월 1회의 정기연구 및 합평회, 연 2회의 시극에 관한 일반 공개강좌, 시극 무대공연, 동인지 시극 발간, 월 1회 이상의 방송을 통한 시극 발표 등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동회에서는 제1회 8월 정기 연구 및 합평회를 24일(토) 하오 5시부터 중앙공보관에서 여는데 이인석(현대예술과 시극)의 발표와 장호 작 「열쇠장수」에 대한 합평이 진행된다. 시극동인회의 역원과 회원은 다음과 같다. 대표 간사 박용구, 창작 간사 장호, 사무 간사 최재복, 연출 간사 김정옥, 기획 간사 고원, 연기 간사 최명수, 회원 이인석, 김원태, 이흥우, 김요섭, 오학영, 박정온, 최일수(이하 생략). 이 기사를 “시네포엠”의 발족을 알리는 1964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위적인 단편영화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시네포엠」 동인회가 새로 발족. 지난 주말(18일) 하오 중앙공보관에서 발기총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시도되는 이 전위적 모임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유현목 감독을 비롯하여 수년 전부터 「시네포엠」의 주동성을 강조해온 최일수, 배석인, 김인걸 씨가 주동이 되어 발기한 것이다. 영화예술뿐만 아니라 자매예술의 각 분야에서 골고루 회원을 포섭할 예정인 이들 「시네포엠」 동인회는 연 일편이상의 작품 제작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연구발표회, 합평회 및 기관지발행을 기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먼 꿈은 해외의 전위적인 영화작가들과의 교류와 국제영화제의 출품 등으로 무척 화려하다. 외국의 전위영화 동인들이 불과 사(四), 오(五) 명씩 모여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데 비하면 이들의 발족은 좀 모순되는 곳도 있으나 그들의 이 활동에 일단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발기총회에서 선정된 임원과 회원은 아래와 같다. 대표 간사 유현목, 총무 간사 김인휴, 기획 간사 최일수, 제작 간사 이형표, 해외 간사 정일몽, 창작위원 황운헌, 연출위원 배석인, 연기위원 김석강, 기술위원 박익순, 미술위원 박영일, 음악위원 정윤주, 무용위원 임성남, 회원(18일 현재) 장호 노만 황운헌 최일수(이하 생략). 두 단체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일종의 종합예술을 지향하고 있고 활동의 목표와 세부 내용이 거의 같다. 또한 조직의 구성이 유사하며 회원의 이름이 일부 중복된다. 일부 자료에는 시극동인회 회원에 유현목 이름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유현목은 시극동인회의 발족 이후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단체의 성격을 따져보기 위해서는 회원들 개개인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데,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다음으로 미룬다). 이 두 단체를 각각 대표하는 인물은 장호와 유현목이고, 단체의 활동 목표와 미학을 정의해서 일종의 쌍둥이와 같은 관계로 만들었던 인물은 비평가 최일수이다. 최일수는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해서 주로 민족문학론과 관련한 글들을 썼다. 예외적으로 자신의 예술론을 전개하는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다루었던 핵심 문제가 시극과 시네포엠이다. 시네포엠에 관해서는 한 편의 글을 펴냈다. 『자유문학』 1961년 9월 호에 실었던 「종합적 이메지의 예술-시네포엠에 대하여」이 그것이다(1982년에 출간된 최일수의 평론집 『현실의 문학』에는 이 글이 「시네포엠과 종합적 영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최일수는 “시가 핵심이 된 종합적 이미지가 스크린에 표현되었을 때 그것을 시네포엠이라 하고 그것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는 시극이라 한다”고 정의했다. 그가 이러한 정의를 내리는데 바탕이 되는 상황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현대시는 추상적인 소리에서 구상적인 이미지로 이행해가고 있기 때문에 현대시가 스크린이나 무대로 진출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2) 현대 사회는 개별 예술 장르들을 단독으로 두지 않고 하나의 종합을 이루도록 추동하며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형성할 것을 요구한다. (3) 성격이나 형식이 전혀 다른 예술들의 종합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현대시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만이 “근원적인 창조의 계기를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연극이나 영화는 모든 예술을 종합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가 지니는 근원적 창조의 계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종합을 이루어내는데 실패했다. (5) 시가 “스크린에 진출한 것”은 영화가 결여하고 있는 진정한 종합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 비추어 보면 최일수가 내리는 시네포엠의 정의는 시는 모든 예술의 근본이 되므로 시를 통해서 개별 예술 장르들을 종합해내는 영화라고 풀어서 쓸 수 있다. 영화 대신에 무대라는 말을 쓰면 시극의 정의가 된다. 정의에 따르면 위에서 인용한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는 단체의 목적, 조직 구성 등이 모두 이해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토록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를 어떻게 실현 가능한 방법론으로 만들 수 있는가이다. 최일수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자신이 제시한 시네포엠의 정의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장르인 시네포엠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했다. 그는 기존의 시네포엠을 “1차 대전 이후에 프랑스의 시인을 비롯한 미술가, 음악가, 영화인들이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하나로써 시도된 전연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 장르가 “현대시의 변천과 더불어 하나의 뚜렷한 양식을 갖춘 예술”로 세계화되었다고 파악했고 장 콕토, 만 레이, 폴 엘뤼아르, 기타가와 후유이코 등을 대표적인 작가로 꼽았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들의 시네포엠이 영화-시라는 단어 자체에만 치우쳐서 “영화적 수법의 시”라든가 “시적인 수법의 영화”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시적인 영화라고 호칭하며 그 정의가 모호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시네포엠이 시적 형식 혹은 영화적 형식의 차용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가 주는 영상의 표출이 시각적인 상상(원문에는 이메지네이슈운)을 낳게 되고 그리하여 그것이 곧 종합적인 광장인 스크린에 진출됨으로써 시네포엠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단어가 주는 인상을 영화로 시각화하면 그것이 시네포엠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최일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적 수법의 시, 시적인 수법의 영화, 시적인 영화 각각을 예로 들어 시네포엠과 다름을 보였다. 우선 영화적 수법의 시의 예로 장 콕토의 1920년 시집 『시 Poesie』에 실린 「첫 눈물 Premières Larmes」을 들었다. 최일수는 이 작품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을 마치 눈앞에 그리듯이 언어화했다는 의미에서 시각적인 영상의 성격을 갖고 있고 이러한 특성이 시네포엠으로 이끌어가는 계기는 된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각적 특성이 두드러진 시일 뿐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시적인 수법의 예로는 자크 봉장(Jacques Bonjean)의 1925년 작품 『길 위의 아름다운 결혼식 Les Belles Noces dans la Rue』을 들었다. 이 작품의 장르는 직역하면 벽장 시나리오가 되는 Closet Screenplay에 속하는데, 일본에서는 이 장르를 지칭하는 신조어로 레제시나리오(レ―ゼシナリオ)가 사용되었다. 영화로 만들어질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읽거나 혹은 소수의 그룹 앞에서 낭독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지칭한다. 최일수는 봉장의 작품이 시적 수법을 차용해서 만들어진 시나리오이지 시네포엠은 아니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영화적 수법의 시와 시적인 수법의 영화 각각은 시와 시나리오일 뿐이지 영화화를 전제로 하는 시네포엠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적인 영화의 예로는 오슨 웰즈의 <오델로>(1952), 잭 카디프의 <아들과 연인>(1960),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1959) 중에서 특정 장면을 뽑아 이 장면들이 “영화 이상의 그 무슨 심오한 시각적 이미지를 표상”해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일수는 이 영화들에서 특정 장면들을 시적인 이미지라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시네포엠은 그것이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으로서 존재해야 하며 시적인 장면들의 연쇄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교가 시네포엠이 영화시로 번역되었을 때 올 수 있는 개념적 혼란을 다루기 위해서, 시네포엠은 시나 시적 언어로 작성된 시나리오와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며 또한 특정 장면이 시적 인상을 준다고 해서 시네포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논거를 갖출 수는 있다. 그러나 최일수의 목적은 자신이 정의 내리는 시네포엠이 고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애초에 비교 자체가 잘 못 되었다. 비교를 하려면 제르맹 뒬락, 만 레이, 한스 리히터, 장 콕토 등의 영화 작품들을 예로 들었어야 했다. 이 작가들이 1960년대 전까지 영화와 시에 관계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고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교의 오류는 최일수가 시네포엠을 정의할 때 이에 상응하는 해외 작품들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식민지기에 일본을 통해 수입되고 번역된 초현실주의 문헌들이나 김기림의 시론과 관련된 글들만을 참조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최일수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해외의 시네포엠이 아니라, 국내에서 시네포엠이 이해되었던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당대의 문헌들에 대한 추가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시네포엠”의 설립과 시네포엠의 정의가 1960년대 당시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아니라 식민지기 이후 국내에서 축적된 특정한 맥락에 따른 것임은 분명해진다. “시네포엠”의 설립은 당대 미국에서 형성되었던 독립적인 영화작가들의 조합과 같은 모델을 따른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192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동인지 중심의 활동이 문학, 연극, 영화 등에서 소환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시극동인회와 “시네포엠”에서 1920년대의 극복은 연극과 영화를 시를 중심으로 한 종합예술로 정의하여 이종 예술 간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단체를 대표하는 장호와 유현목이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김기림의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같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과제는 김기림의 비판적 극복이라고 함축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일수가 시도했던 비교에서 생각해보면, 김기림은 시와 영화를 기법의 측면에서만 접근했을 뿐 서로 다른 예술 장르로 남겨두었다면 자신들은 시를 통해 모든 예술을 종합하는 연극과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네포엠은 시가 중심이 되어 영화를 진정한 종합예술로 승격시키는 영화이다.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요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시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이 시각화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종합예술은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각각 독자적이면서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에서 이 두 요건이 충족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손>은 짧은 내레이션과 함께 이미지가 전개되는데, 내레이션은 “There were hands in the beginning of the world”로 시작한다. 이 문구가 나올 때의 이미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There were 부분에 나오는 이미지 hands in the beginning에 나오는 이미지 of the world에 나오는 이미지 아기, 원숭이, 어린이의 손이 순차적으로 나오면서 해당 내레이션이 전개되는데, 작품의 나머지에서도 내레이션의 특정 단어들에 바로 연결될 수 있는 이미지들이 나온다. 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든 간에 시네포엠의 첫 번째 조건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시적 연상의 시각화는 충족한다. 그러나 두 개 이상의 예술 장르가 결합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요건을 충족하는 요소를 굳이 찾아보면, 내레이션의 낭독이 산문이라기보다는 시의 낭독처럼 들린다는 정도가 될 것 같다. <손>의 내레이션은 최일수가 썼는데, 여기에 포함하지는 않았지만 최일수의 시극 이론을 생각해보면 최일수가 일종의 산문시로 내레이션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아서 <손>은 시, 이미지, 낭독을 결합해서 독립적인 장르의 작품을 만드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손>에서 시네포엠의 두 번째 요건이 불충분했던 것이 50초라는 길이의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화려한 인적 구성으로 시작했던 초기에 비해 “시네포엠”의 구심력이 약해진 시점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시네포엠”의 첫 번째 작품인 <선>을 볼 수 있어야 종합예술로의 영화가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알 수 있는데, 프린트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시극동인회의 작품들은 기록이 보다 상세히 남아 있으므로, 종합예술의 실천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는 있으나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추후에 설명하고자 한다. <손>을 실험영화로 분류한다면 이때 실험영화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를 의미한다. 한때 유행했던 다원예술이나 최근에 등장한 융복합 예술이라는 말과 개념적으로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최일수가 시극과 시네포엠의 정의를 종합예술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에 영향력이 컸던 T.S. 엘리엇이나 장 콕토의 극복을 의식하고 있음은 분명하나 하필 왜 종합예술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지금으로써는 어떤 근거나 맥락 없이 예나 지금이나 예술 장르 간의 종합이라는 아이디어가 때때로 유행을 타는 결과라는 생각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현목은 1970년에 변인식 , 하길종 등과 함께 전위적 영화운동을 벌이기 위해 소형영화동호회를 결성하는데, 이 시기에 언급했던 작품들이 동시대의 미국 독립영화 작품들이다. 유현목이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 미국의 실험영화들을 일부 접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때 시네포엠에 준하는 개념은 아예 사라지고 취미로서의 영화 혹은 아마추어의 영화가 전면에 나타났다. “시네포엠”에서는 미학적 개념이 중요했다면, 소형영화동호회에서는 8mm와 16mm 포맷을 이용한 소규모의 독립적인 제작방식이 더 중요해졌다. 전위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시네포엠”에서나 소형영화동호회에서나 마찬가지만, 둘 사이의 어떤 연속성이 있다고 가정하기는 힘들다. “시네포엠”이 1920년대의 자장에 속해있다면, 소형영화동호회는 동시대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시기의 공백이 너무나도 크며, 활동에 대한 자기반성의 흔적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에서 실험영화를 말 할 때, “시네포엠”을 최초의 위치에 올릴 수 있겠지만 어떤 유산을 남겼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이고 갑작스런 전환들의 공백 사이를 최대한 메꾸어 보려는 노력이 한국에서 영화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서 전위와 실험이 어떻게 자리바꿈하는지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 이 글은 현재 작성 중인 논문의 일부를 추려서 실은 것으로, 시극동인회나 김기림에 대해 빠진 설명들을 포함하여 추후에 논문으로 낼 예정이다. 영화-시에 관한 전반적인 정리는 Fil Ieropoulos가 쓴 < Film Poetry: A Historical Analysis >에 잘 되어 있고, 참고문헌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최일수가 일본을 통해 수입되어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제시나리오나 이론들은 Christophe Wall-Romana가 쓴 Cinepoetry: Imaginary Cinemas in Frech Poetry(Modern Language Initiative, 2013)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시극에 대한 연구는 국문학이나 연극학 분야에서 축적되어 왔는데, 이현원, 「최일수와 장호의 시극 인식에 대한 연구」, 어문론집, 64, 2015를 참조하면 추가적인 자료들을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존 휘트니는 모션 그래픽의 아버지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휘트니는 1955년부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UPA(United Productions of America)에서 일했다. 여기서 그래픽 디자이너인 솔 배스(Saul Bass)를 만났고, 둘이 함께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와 광고의 특수효과를 제작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때 제작했던 대표적인 타이틀 시퀀스가 히치콕의 < 현기증 >(1958)(사진1)이다. 이 시퀀스는 지금도 모션 그래픽 교재들에서 모범 사례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휘트니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오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휘트니가 1960년에 설립했던 회사의 이름이 모션 그래픽이었기 때문에, 그를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설명하는 것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휘트니의 이름 앞에 굳이 무엇의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붙여야 한다면, 컴퓨터를 이용한 생성예술 혹은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의 아버지라고 붙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휘트니를 컴퓨터를 통해 소리와 빛을 연결하는 구조를 생성하고자 했던 작가로 설명하고자 한다. [사진1]<현기증(1958)>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4CZfSc6nJ8U'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휘트니는 1980년에 「디지털 하모니: 음악과 시각예술의 상보성에 관하여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를 펴낸 바 있다. 이 책의 제목과 부제는 휘트니의 관심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자전적 배경, 음악과 영화에 대한 사유들, 비디오디스크와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이해, 작업 방식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휘트니는 1917년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태어났는데, 자신이 살았던 동네는 예술로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휘트니는 퍼모나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학교에 실망하고, 21살이었던 1938년에 네 살 아래 동생인 제임스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고 유럽으로 떠났다(이 글에서 휘트니는 존 휘트니를 지시하고, 제임스 휘트니는 제임스로, 둘을 함께 언급할 때에는 휘트니 형제로 표기한다). 그 희망은 비록 1년간의 유럽 체류로 끝이 났지만, 휘트니 작업의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휘트니는 로테르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작업의 단초가 되고, 경력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를 보았다. 흰색으로 도장된 비행기 날개의 곡선, 철판의 모서리들, 철판을 연결하는 못의 기하학적 형상들과 떨림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비행에 따라 그려내는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이다. 휘트니는 이 부분들을 촬영해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생각은 단지 발상으로만 남았지만,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설정한 질문과 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휘트니에게 비행기의 날개와 그 부속들은 역동적인 구조와 부분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한 대상이었다. 휘트니는 원래 음악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음악에 비해서 세계는 너무나도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휘트니가 설정한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세계는 베토벤의 음악과 비교했을 때 따분할 정도로 정적이다. 빛은 소리보다 빠른데도 불구하고,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은 역동적이지만 빛을 재료로 하는 영화는 음악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무겁다. 그 이유는 영화가 카메라로 정적인 세계를 찍기 때문이고,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가 움직임이 큰 대상들을 클로즈업으로 찍거나 카메라를 빠르게 움직이고 편집의 호흡을 짧게 가져가서 역동적이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이 음악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또한 사람들은 집요하게 카메라로 촬영된 이미지에서 무엇이 어디서 찍힌 것인가를 찾으려고 애쓰며, 그것들을 분별해낼 수 없다면 사진적 이미지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휘트니에게 영화의 기본적 문제는 음악만큼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영화에 설정한 과제와 목표는 ‘유동적인 건축 liquid architecture’이라는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유동적 건축은 변화와 구조를 동시에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쾨테가 “음악은 유동적인 건축이고, 건축은 응고된 음악이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휘트니는 유럽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유동적인 건축이라는 개념을 접했고, 유동적이라는 말을 시공간 상에서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휘트니는 20세기에 이르러 시각예술이 마침내 자신의 참된 구성요소들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표면, 색채, 형태, 선, 질감과 같은 요소들은 시각예술의 알파벳이었고, 이 요소들을 발견함으로써 시각예술은 음악의 유동적 구조를 획득할 수 있었다. 반면에 휘트니에게 영화는 늘 현실의 어떤 장소에 속박되어 있는 매체였기 때문에, 영화가 유동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어딘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휘트니가 영화라는 매체에 요구했던 것은 음악에 준하는 역동성과 추상성을 갖추는 것이었고,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제는 카메라로 매개되지 않으면서 빛을 구조화하여 음악에 상응하게 하는 것이었다. 빛과 소리의 구조적 상보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휘트니의 생각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판단 역시 새로울 것은 없었다. 휘트니에 앞서 만 레이, 한스 리히터, 비킹 이겔링, 발터 루트만과 같은 작가들이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여 음악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드는 방법을 탐구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메라가 현실의 대상을 찍는다는 이유 때문에, 영화가 음악과 같이 유동적이 되기 위해서 카메라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곧바로 내려질 수도 없다. 이를테면 이 연재에서도 다루어질 구조영화 작가들을 생각해보면, 굳이 음악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카메라를 버리지 않더라도 영화의 구조를 유동적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휘트니에게 고유하고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계기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로부터 비롯된다. 휘트니의 유럽 체류는 1939년 파리에서 막을 내리는데, 이때 르네 라이보비츠(Rene Leibowitz)를 만나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을 배웠다. 이 기법을 구성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한 음렬(tone row)은 반음계의 12음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것이다. (2) 한 음렬 내에서 어떤 음도 반복되지 않는다. (3) 기본(Prime, P), 반행(Inversion, I), 역행(Retrograde, R), 역행-반행(Retrograde-Inversion, RI)을 각 음정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용한다(P, I, R, RI를 각각 사분면에 표시한다고 할 때, 기본 P를 1사분면에 놓으면 기본과 좌우대칭을 이루는 역행은 2사분면에, 좌우/상하대칭을 이루는 역행-반행은 3사분면에, 상하대칭을 이루는 반행은 4사분면에 위치시킬 수 있다). (4) 음렬은 반음계에서 네 가지 변형 중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다. 이 원칙들을 적용해서 음렬을 구성하면 [그림1]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이 가능하다. [그림1]12음기법을 이용한 음렬 구성의 예시 12음으로 이루어진 한 음렬에 대한 기본, 역행, 반행, 역행-반행을 행렬로 표시하면 [그림2]와 같다. 행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을 지시하고 행에서 왼쪽으로 가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해 역행을 하고 같은 도수만큼 이동(transposition)한 것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열에서 아래로 향하는 화살표는 기본에 대한 반행에 같은 도수만큼의 이동을 지시하고, 위로 향하는 화살표는 그 역행에 도수이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면, 기본 12, 역행 12, 반행 12, 역행-반행 12 음렬로 총 48개의 음렬을 얻을 수 있다.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은 제2빈악파의 작곡가들인 베베른이나 베르크 등에게 계승되어 음렬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림2]음렬의 행렬 쇤베르크의 12음기법의 핵심은 음악을 순수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전환시켰다는 데 있다. 위에서 서술한 원칙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초기에 유한한 수의 원소를 갖는 집합과 이 원소들을 매핑하는 함수를 정의하고 나면, 나머지 절차들은 자동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즉 음악에서 유사 오토마타가 가능해진다(초기 상태와 상태 전이에 대한 정의는 있지만, 결과를 판단하고 종료하는 절차에 대한 규칙이 없다). 쇤베르크는 1926년에 12음기법을 처음 적용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에 착수하고 나서, “소리의 생산과 소리들의 관계의 정확성을 보장하고, 소리들을 초보적이고 믿을 수 없으며 무심한 음악가들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모든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쇤베르크의 목표는 음악가의 일시적인 감정이나 직관으로부터 음악을 해방시키고, 음악을 생성하는 문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음악을 하나의 예술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형식언어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이다. 음악이 형식언어가 될 수 있다면, 컴퓨터라는 추상기계에 의해 연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쇤베르크가 휘트니에게 미친 영향은 역동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음악과 영화에 접근했던 휘트니를 생성적 구조라는 방향으로 틀게 했다는 데 있다. 또한 데이터와 문법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다면, 빛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발상을 가능하게 했다. 요약하면 휘트니가 유럽 체류 기간에 스스로에게 설정했던 과제는 카메라를 통하지 않고 빛을 매개하여 소리에 상응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이 과제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를 통해서 빛과 소리가 생성되는 구조를 발견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이 모든 생각들이 유럽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뿌리는 유럽 체류 기간에 내리고 있으며 도래할 매체인 컴퓨터를 향하고 있었다. 1939년 유럽에서 돌아온 휘트니 형제는 1936년부터 파라마운트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던 오스카 피싱거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휘트니 형제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패서디나에 있던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8mm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때 완성한 작품들은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이라는 제목으로 묶여졌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쇤베르크의 이론을 적용한 작품들이었다(공교롭게도 쇤베르크는 1934년부터 남가좌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아래에 삽입한 제임스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이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nU88XWYjE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1]제임스 휘트니의 <원에 대한 변주곡>(1942) 휘트니 형제는 ‘변주곡’ 시리즈를 만들면서 피싱거의 방식(카드보드지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라내서 움직이는 방식)을 차용했지만, 피싱거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소리를 삽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각적인 요소들이 자동적으로 소리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고, [사진2]와 같은 장치를 고안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진자를 흔들면, 필름의 사운드트랙 부분에 사인파를 그려서 소리의 패턴이 새겨질 수 있도록 만든 장치였다. 이 장치를 이용해서 만든 작품이 <필름 습작 No. 1-5>(1943-44)[영상2]이다. 휘트니 형제는 사운드트랙 위에 그림을 그려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자신들이 고안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그러한 방식을 먼저 실험했던 작가 역시 오스카 피싱거였다. 오스카 피싱거는 [사진3]과 같이 그래픽 패턴을 그려내서 소리를 생성하는 실험을 1932년에 수행했던 바가 있고, 이 결과가 <장식 사운드 Ornament Sound>이다(이 작품은 비주얼 뮤직 센터(Center for Visual Music)에서 복원되었고 비메오(Vimeo)에서 유료로 스트리밍하고 있다 https://vimeo.com/ondemand/26951 ). [사진2]진자를 이용한 소리 생성 장치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uZbgM8yxt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2]휘트니 형제의 <필름 습작 No.1> [사진3]오스카 피싱거의 <장식 사운드>의 그래픽 패턴들 제임스는 <필름 습작> 시리즈를 완성한 직후 뉴욕으로 가서 힐다 르베이(필자가 쓴 마리 멘켄의 < 노트북 > 리뷰에도 등장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초대 디렉터, 이름이 다소 길어서 힐라 르베이, 바로네스 르베이 등으로도 불렸다)를 만나서 작품을 구매해줄 수 있는지와 새로운 작품을 위한 기금을 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르베이는 <필름 습작> 시리즈뿐만 아니라 <원본 주제에 대한 24개의 변주곡> 역시 구매했고 1944년과 1945년 초에 상영하였다. 이 상영회에는 토니 스미스, 존 케이지, 테네시 윌리엄스, 마르셀 뒤샹 등이 참석했었다. 그런데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했던 르베이는 휘트니 형제의 작품을 보다가 영사실로 뛰어가서 작품 상영을 중단시켰다. 다행히 이 상영회에 잭슨 폴록 역시 참석해 있었고, 폴록이 개입해서 상영회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후에 이 작품들은 구겐하임에서 정기적으로 상영되었다. 또한 휘트니 형제는 1949년 브뤼셀 영화제에서 <필름 습작>으로 1등상을 수상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휘트니는 록히드사에서 초고속 미사일 사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M5 대공포 디렉터(Antiaircraft Gun Director)라는 대공방어 미사일 유도 시스템을 접하게 되었다. 이 장비는 원래 영국에서 개발했던 것으로 록히드사가 개조해서 사용 중이었는데, 무게가 850파운드에 11,000개가 넘는 부품으로 구성된 아날로그 컴퓨터였다. 휘트니에게 M5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이 아니라, 카메라 없이 빛을 매개하고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그의 목표에 부합하는 장치였다. 전쟁이 끝나고 휘트니는 불용품으로 경매에 나온 M5를 구입하고, 추가로 중고 부품들을 모아서 M5를 그래픽 생성 장치로 개조하였다. 휘트니가 만든 장치는 요즘으로 치면 모션 콘트롤 카메라에 해당한다. 휘트니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였던 영화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들은 그가 개발한 장비로 만들어졌다. 휘트니는 영화 타이틀과 광고 특수효과 작업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1960년에 모션 그래픽이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상업적인 작업들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개발한 장치로 만든 첫 작품 <카탈로그>[영상3]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는 휘트니가 고안한 슬릿-스캔(slit-scan) 방식이 적용되었는데, 이 방식은 요즘에도 미디어 아트 작품들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휘트니가 개발한 장치로 작업하는 방식은 <컴퓨터: 인간의 지배에 도전하다>[영상4]라는 다큐멘터리의 일부에서 볼 수가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TbV7loKp69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3]휘트니의 <카탈로그(1961)>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5eMSPtm6u5Y'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4]휘트니의 아날로그 컴퓨터 작업 방식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로 한 작업들로 평가를 받아서 1966년에 IBM 아티스트 레지던스에 초청되었고 1969년까지 후원을 받았다. 여기서 GRAF(Graphic Additions to FORTRAN)의 개발자인 잭 시트론과 만나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시트론은 IBM 모델 360 컴퓨터와 2250 그래픽 디스플레이 콘솔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그래픽 콘솔은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작동되었는데, 4000 * 4000개의 점을 실시간으로 표시할 수 있었다. 휘트니는 GRAF를 배웠고, 이 언어를 사용하여 1966년에 < 순열 >[영상5]을 만들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kdYxJ85RSds'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5]휘트니의 <순열>(1966) < 순열 >은 휘트니가 디지털 컴퓨터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 <순열>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매 프레임이 총 281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왜 281개의 점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짐작건대 소수들 중에서 시스템이 처리하기 용이한 수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열>은 총 281개의 점의 초기 위칫값과 일련의 명령어를 이용하여, 프레임별로 점들의 위치를 변화시키면서 만들어졌다. 그 명령어들의 일부를 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스크린의 중앙에서부터 시작하라. 계산한 거리만큼 오른쪽으로 이동해라. 계산한 각도만큼 원주를 따라 왼쪽으로 회전하라. 거기서부터 외곽 방향으로 새로운 반지름을 계산하고, 원주를 따라 새로운 각도만큼 회전하라. 그 위치에 하나의 점을 찍고, 나머지 280개의 점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반복하라. < 순열 >의 시각적 패턴은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짜여있다. 반지름과 각도를 매개변수로 하는 일대일 대응 함수들이 전부이다(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반지름 변수를 RT로, 각도 변수를 DT로 표시하면서 이 두 변수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패턴이 생성되고, 이에 대응하는 음계는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해놓았다. 다소 분량이 많은 관계로 이 글에 옮기기가 어려운데, 관심 있는 분들은 56-59페이지와 70-71페이지에 삽입된 그림만 참조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휘트니가 <순열>에서 수행했던 작업 방식은 <스크리닝 룸>(하버드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이자 대학 내 필름 연구 센터를 설립했던 로버트 가드너가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했던 프로그램으로, 휘트니가 첫 번째 출연자였고 이외에도 미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가들이 출연했었다. 이 중에서 20여 편은 DVD로 발매되어 판매 중이다)이라는 TV 프로그램[영상6]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BaW4DTKNflA' frameborder='0' allowfullscreen> [영상6]<스크리닝 룸>에 출현한 휘트니의 인터뷰 휘트니가 < 순열 >에서 사용했던 작업 방식은 디지털 컴퓨터에서 포트란(FORTRAN)과 같은 형식언어를 사용했을 때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는 절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휘트니에게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쇤베르크의 12음기법에 대응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휘트니의 작품들에서 원형의 패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반지름과 각도라는 두 변수를 통해서 생성되는 패턴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변수를 사용했을 때 만들어지는 패턴들(대표적으로 장미꽃잎과 같은 패턴)들은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이 아니라, 두 변수들의 비율을 변경해가면서 생성되었던 것이다. 휘트니는 반지름과 각도의 비율을 변경했을 때 특정한 패턴이 생성되었다가 점이 분산되어 임의로 흩어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긴장과 이완의 반복으로 이해했다. 그가 유동적 건축이라는 개념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순열>을 만들었던 것이다. 쇤베르크의 이론에 받은 영향을 고려하면 휘트니가 말하는 하모니가 어색해 보이지만, 이때 하모니는 화성이 아니라 가로 대 세로, 반지름 대 각도 등의 비율에 따라 긴장이 생성되고 해체된다는 것을 뜻한다. 휘트니가 < 순열 >에서 디지털 컴퓨터를 처음 사용했다고 해서, 카메라와 필름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 카메라와 필름은 촬영장치가 아니라 하드 디스크를 대신하는 저장장치였다. 휘트니는 아날로그 컴퓨터를 사용했던 <카탈로그>부터 컴퓨터를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는 데 사용했고, 녹화와 후반작업은 필름으로 했다. 컴퓨터로 시각적 패턴을 생성하고 난 다음에 한 프레임씩 흑백 필름으로 촬영하고, 색깔은 옵티컬 프린터를 이용해서 입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당시의 컴퓨터 시스템의 저장과 그래픽 능력이 빈약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휘트니가 비로써 카메라와 필름을 내던진 것은 <아라베스크>(1975)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순열>에서 사용된 음악은 순다람 발라찬더(Sundaram Balachander)가 연주한 남인도 음악이었다. 휘트니 형제가 피싱거의 작품을 기성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음악의 사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선택 역시 당대 컴퓨터의 연산 능력으로 하나의 코드로 그림과 소리를 동시에 생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휘트니가 동시대와 같은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그가 설정했던 과제들을 고려해볼 때, 실시간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에 가까운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 순열 >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색채에 있다. 빛을 데이터와 문법으로 처리한다는 과제에 비추어본다면, 색채 역시 일련의 규칙들을 따랐어야 했다. 그러나 특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없고 임의로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영상4]에서 카메라가 위에 고정되어 있고 회전하는 이미지 디스크 아래에 휘트니가 컬러 필터를 삽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색채만큼은 작가의 선택과 회전하는 디스크의 속도가 조합되어 반쯤은 의도적이고 반쯤은 우연히 결정되도록 남겨두었다. 색채에서 어떤 규칙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라베스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점들의 위치를 계산하는데 있어서는 엄밀한 규칙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와 관련해서는 작가의 결정도 아니고 완전히 우연도 아닌 둘 사이의 애매한 중립을 선택했던 것일까? 앞서 설명했듯이 휘트니가 사용할 수 있었던 컴퓨터의 그래픽 시스템으로는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색채를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필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필름은 현상과 프린팅 과정에서 색을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당시의 휘트니에게 색채는 계산 불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한계가 휘트니가 비디오라는 매체의 미래를 낙관했던 이유이다. 비디오에서는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휘트니는 색채를 온전히 계산 가능한 영역으로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다소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화가에게 색채는 일반적으로 물감, 손, 눈이라는 세 요소간의 직접적인 일대일 상호작용으로서 직관적으로 경험된다. 이토록 친밀한 스스로 직접 하는 상호작용은 이성보다도 창의적인 마음을 요구하며, 컬러 필름으로 작업하는데 필요하다. 컬러 필름의 현상 과정을 화가처럼 통제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들은 종종 좌절되고 말았다. 현상실과 프린팅 단계들에서 걸리는 시간은 순간적인 직관과 실제적인 색채 효과 사이를 단절시켰다. 휘트니는 색채에 관해서 만큼은 화가의 직관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휘트니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휘트니와 동시대에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을 했던 스탠 반더빅, 벤 라포스키, 메리 엘렌 뷰트에게도 규칙에 온전히 주도권을 넘기지 않고 마지막까지 창조의 신비성이라 불릴만한 영역을 고집하는 태도가 발견된다. 그래서 동시대에 독일에서 컴퓨터 예술을 개척했던 프리더 나케는 “미국/캐나다의 접근 방식은 이론이 없다. 그냥 즐기고 네 작업을 하고 창조적이 되며 뭔가 흥미로운 것을 하라는 식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캐롤린 케인(Caroly L. Kane)은 「색상 알고리즘: 코드 이후의 색채 합성, 컴퓨터 아트와 미학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에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독일 방식과 신비주의적이고 주관적인 미국 방식을 비교하였다. 이 책에서 케인은 미국 방식을 주체와 저자성(authority)이라는 낭만적인 관념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해석하고 있다. 케인의 해석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흥미로운 해석은 자벳 패터슨(Zabet Patterson)의 「대포 제어기로부터 만다라까지: 존과 제임스 휘트니의 사이버네틱 영화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논문에서 패터슨은 휘트니가 개발한 M5 대공 방어 미사일 유도 장치가 영화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패터슨은 영화라는 매체와 미사일 유도 장치가 인간의 시각과 신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의 차이를 강조하였다. 영화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매체이다. 반면에 미사일 유도 장치는 목표물을 쫓는다는 점에서 전투기에 부착된 반구형 포탑과 같은 계열의 장치이다. 영화와 반구형 포탑 장치 모두 객관성과 투명성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카메라 옵스큐라에 기반한 영화는 성찰적이고, 관객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게 한다. 반면에 반구형 포탑 장치는 시야에 들어온 목표에 신체가 즉각적으로 개입하고 반응하도록 훈련하여 시스템 회로의 일부가 되게 만든다. 패터슨은 휘트니의 < 순열 >을 분석하면서, 관객이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흐르고 변화하는 패턴들을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의 순수한 지각한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고 보았다. <순열>은 사용자의 시선을 목표물에 고정시키고 신체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반구형 포탑 계열의 장치로 만들어졌지만, 휘트니가 순수한 추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이 사이버네틱 시스템의 일부로 종속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면 휘트니가 색채에 대해서 주저했던 이유도 M5와 영화라는 이질적인 시각체계가 교차할 수 있는 비결정적인 영역을 남겨두려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글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패터슨의 논의를 좀 더 전개시켜보면 요즘에 유행하는 VR영화가 논리적으로 가능한 개념인지와 이질적인 시각체계를 결합하기 위해서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따져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휘트니는 「디지털 하모니」에서 1960, 7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두 가지 흐름-영화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미술과 음악에서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에 불만을 표했다. 휘트니는 1960년대에 한때 뉴욕에서 20세기 초반 유럽 예술의 기준을 가장 젊은 예술인 영화에 이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전위를 자처하는 영화작가들이 그 노력들을 한 번도 제대로 평가한 적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 노력들 대신에 들어선 작가들과 관객들은 스스로를 언더그라운드로 격하시키며, 성행위나 개척하는 것을 언더그라운드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휘트니는 1960년대 당시에 우연과 주역에 열광했던 지식인 부류의 태도에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우연과 주역에 대한 관심을 마치 우연이라는 신비에 의지하면 시나 음악이 저절로 완성될 것처럼 간주하는 태도라고 비난하였다. 휘트니는 1970년대 초반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에 대한 열광이 연장된 것이라고 보았다. 컴퓨터가 난수를 발생시키는 최상의 장치였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면 우연이라는 원칙을 따르는 예술 창작이 가능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당시 컴퓨터 기술이 가장 앞섰던 캘리포니아로 몰려왔지만 이내 곧 물러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의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밑바탕부터 스스로 만들어가거나 이미 완성된 기술을 활용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는데, 이 두 가지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휘트니는 그가 활발하게 작업했던 당대에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양쪽에서 모두 환대를 받았지만 동시에 배제되기도 했다. 그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영화 쪽에서 휘트니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가 정도로 치부되고, 미술 쪽에서 컴퓨터 예술을 논의할 때 막스 벤제의 정보미학과 프리더 나케와 같은 독일 작가들 위주로만 다루어왔다.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미술, 음악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은 이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휘트니는 양쪽 모두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암묵적인 가정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 가정은 생성 문법에 의존하고 있다. 휘트니는 촘스키가 두 가지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새로운 문법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의 여부이고, 두 번째는 음악과 예술이 당연히 언어인가의 여부이다. 휘트니는 이 두 질문에 응대함으로써 새로운 문법과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언더그라운드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 모두의 과제라고 보았다. 지난 20여 년 간 국내에서 전개되어왔던 디지털 영화와 미디어 아트에 관한 논의들을 돌아보면, 영화와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분리되어 별다른 교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40년여 전에 휘트니가 설정했던 과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탐구해야 할 영역으로 남아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휘트니 형제에 관한 사실과 일부 견해들은 다음의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Carolyn L. Kane, Chromatic Algorithms: Synthetic Color, Computer Art and Aesthetics after Cod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Paul J. Karlstrom(ed.), On the Edge of America: California Modernist Art, 1900-195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John Whitney, Digital Harmony: On the Complementarity of Music and Visual Art, Kingsport Press, 1980. Zabet Patterson, “From the Gun Controller to the Mandala: The Cybernetic Cinema of John and James Whitney,” Grey Room 36, Summer 2009, pp. 36-57.